뮤지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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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뮤지컬 영화는 영화와 음악을 결합한 장르로, 1920년대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무대 작품을 영화화하거나, 배우들의 노래와 춤을 담은 레뷰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본격적인 뮤지컬 영화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콤비, 버스비 버클리의 독창적인 안무 등이 인기를 끌었다. 1940~50년대에는 MGM을 중심으로 한 스타 시스템 뮤지컬 영화가 전성기를 누렸고, 196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들이 흥행했다. 1970년대 이후 뮤지컬 영화는 쇠퇴기를 겪었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의 성공과 2000년대 이후 《시카고》, 《맘마 미아!》 등의 작품을 통해 부활했다. 최근에는 다양한 스타일과 소재의 뮤지컬 영화가 제작되고 있으며, 인도, 스페인, 일본, 한국 등 각국의 뮤지컬 영화도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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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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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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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
하위 장르 | 영화 |
파생 장르 | 뮤지컬 |
2. 역사
뮤지컬 영화는 1920년대 토키 기술의 발명으로 영화에 음악과 노래를 결합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장편 유성 영화 중 하나인 알 조슨 주연의 ''재즈 싱어''(1927)는 이러한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초기에는 브로드웨이 무대 작품을 영화화하거나 리뷰 형식의 단편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토키 초창기에는 기술적 한계도 있었지만, 유럽의 오페레타 영화가 인기를 끌며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대공황 시기 브로드웨이의 불황은 오히려 실력 있는 댄서들을 할리우드로 유입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1933년 ''42번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본격적인 뮤지컬 영화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에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의 춤, 버스비 버클리의 혁신적인 안무 연출 등이 뮤지컬 영화의 발전을 이끌었다. 주요 영화사들은 뮤지컬 영화 시리즈를 제작하며 장르의 대중화에 힘썼고, 테크니컬러 도입 등 기술 발전도 뮤지컬 영화의 성장에 기여했다. 초기 뮤지컬 영화는 연예계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백스테이지 뮤지컬' 형식이 많았다.
2. 1.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할리우드는 뮤지컬 영화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토키 기술의 등장은 뮤지컬 영화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으며, 최초의 장편 유성 영화 중 하나인 ''재즈 싱어'' (1927)는 영화에 노래를 통합하며 새로운 장르의 시작을 알렸다.[1][2] 이후 할리우드는 수많은 뮤지컬 영화를 제작하며 장르의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뮤지컬 영화는 브로드웨이 무대 작품을 영화화하거나, 레뷰 형식의 단편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1929년 MGM이 제작한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올 토킹, 올 싱잉, 올 댄싱"을 표방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뮤지컬 영화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 시기에는 테크니컬러를 활용한 컬러 뮤지컬 영화 제작 시도도 활발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 뮤지컬 영화의 과잉 생산으로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다.[4]
1930년대 중반, 안무가 버스비 버클리의 혁신적인 연출과 프레드 아스테어, 진저 로저스 콤비의 등장은 뮤지컬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버클리는 카메라 워크와 편집을 활용하여 무대에서는 불가능한 화려하고 기하학적인 군무 장면을 창조했으며,[5] 아스테어와 로저스는 우아하고 로맨틱한 춤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 시기부터 뮤지컬 영화는 할리우드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는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특히 MGM 스튜디오는 프로듀서 아서 프리드의 주도 아래 주디 갈랜드, 진 켈리, 프레드 아스테어 등 뛰어난 스타들을 앞세워 ''오즈의 마법사'' (1939),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자'' (1944), ''사랑은 비를 타고'' (1952), ''밴드 웨건'' (1953)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 시기 뮤지컬 영화는 화려한 색채, 매력적인 음악과 춤, 낙관적인 분위기로 관객들에게 꿈과 환상을 선사했다. 다른 스튜디오들 역시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의 브로드웨이 히트작들을 영화화하거나 자체적인 뮤지컬 영화를 제작하며 경쟁했다.
1960년대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 (1965),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대작 영화들이 큰 성공을 거두며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대형 뮤지컬 영화의 흥행 실패가 이어지고 영화계의 흐름이 변화하면서 뮤지컬 영화는 점차 쇠퇴기를 맞았다.
1970년대 이후 뮤지컬 영화는 주류에서 벗어나 비정기적으로 제작되었지만, ''토요일 밤의 열기'' (1977)와 같이 특정 음악 장르나 가수를 중심으로 한 영화들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 루즈!'' (2001)의 성공과 볼리우드 영화의 영향 등으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시카고'' (2002)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부활의 움직임을 보였다.[43][44] 이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영화화와 새로운 창작 뮤지컬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며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 1. 1. 1930-1950: 클래식 사운드 시대
토키 기술의 등장은 영화에 음악과 노래를 결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뮤지컬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장편 유성 영화로 여겨지는 알 졸슨 주연의 ''재즈 싱어'' (1927)는 배우들이 대사 없이 연기하고 음악과 간헐적인 음향 효과만 삽입된 초기 유성 영화들과 달리, 영화 속 배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노래(다이어제시 음악)와 배경 음악(비다이어제시 음악)을 모두 포함했다.[1] 알 졸슨이 직접 부른 "Dirty Hands, Dirty Face", "Toot, Toot, Tootsie", "Blue Skies", "My Mammy" 등이 영화에 삽입되었다. 비록 짧은 대사 시퀀스만 포함되었지만, ''재즈 싱어''의 등장은 무성 영화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2] 이후 워너 브라더스는 또 다른 졸슨 주연의 반(半)유성 영화 ''싱잉 풀'' (1928)을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1]극장들은 앞다투어 새로운 음향 장비를 설치했고,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브로드웨이 극장의 작곡가들을 고용하여 스크린을 위한 뮤지컬 제작에 열을 올렸다.[3] 최초의 완전 유성 영화인 ''뉴욕의 불빛'' (1928)은 나이트클럽 장면에서 뮤지컬 시퀀스를 선보였고,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주요 스튜디오가 유성 영화 제작에 집중하게 되었다. MGM이 제작한 ''브로드웨이 멜로디'' (1929)는 "최초의 올 토킹, 올 싱잉, 올 댄싱" 장편 영화로 홍보되었으며, 흥행 성공과 더불어 1929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뮤지컬 영화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 영화는 매력적인 노래와 춤을 추는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이후 '백스테이지 뮤지컬'이라 불리는 장르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스튜디오들은 모리스 슈발리에와 자넷 맥도널드 같은 브로드웨이 스타들을 영입하여 ''러브 퍼레이드'' (1929)와 같은 작품들을 제작했다.[3]
워너 브라더스는 최초의 스크린 오페레타인 ''사막의 노래'' (1929)를 제작하며 상당 부분을 테크니컬러로 촬영하는 등 기술적인 시도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어서 최초의 완전 컬러 유성 뮤지컬 영화인 ''온 위드 더 쇼'' (1929)와, 1939년까지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보유했던 ''브로드웨이의 골드 디거스'' (1929)가 연이어 등장했다. 시장은 뮤지컬, 레뷰, 오페레타 영화로 넘쳐났으며, 1929년과 1930년에만 수많은 컬러 뮤지컬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연도 | 주요 컬러 뮤지컬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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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할리우드 리뷰 오브 1929, 더 쇼 오브 쇼, 샐리 |
1930 | 방랑왕, 팔로우 스루, 브라이트 라이츠, 골든 던, 홀드 에브리싱, 로그 송, 송 오브 더 플레임, 송 오브 더 웨스트, 스위트 키티 벨레어스, 언더 어 텍사스 문, 연대의 신부, 후피!, 재즈의 왕, 비엔나의 밤, 키스 미 어게인 |
또한 컬러 시퀀스를 일부 포함한 뮤지컬 영화들도 다수 개봉되었다.
그러나 1930년 한 해에만 100편이 넘는 뮤지컬 영화가 쏟아져 나오면서[4] 관객들은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1931년에는 제작 편수가 14편으로 급감했다. 스튜디오들은 이미 제작 중이던 영화에서 노래 장면을 편집해야 했고(예: ''파티의 인생'' (1930), ''5천만 프랑스인'' (1931), ''맨해튼 퍼레이드'' (1932)), 컬러 영화 제작 역시 감소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나 로저스 앤드 하트 콤비의 뮤지컬 영화도 1932년경에는 인기가 시들해졌다.[4]
뮤지컬 영화의 침체는 오래가지 않았다. 1933년, 안무가 버스비 버클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 복무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5] 정교하고 화려한 집단 군무를 선보이며 뮤지컬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42번가'' (1933), ''1933년의 골드 디거스'' (1933) 등에서 그는 무대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안무를 선보였다. 특히 카메라를 이용해 댄서들의 대형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치 만화경처럼 기하학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연출(버클리 샷)은 무대에서는 불가능한 영화만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평가받는다.[5]
같은 시기,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는 RKO에서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우아하고 로맨틱한 댄스 시퀀스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톱 햇'' (1935), ''스윙 타임'' (1936), ''쉘 위 댄스'' (1937) 등은 이들의 대표작으로, 아스테어와 로저스는 호흡이 잘 맞는 댄스 파트너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1937년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결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 작품은 제1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월트 디즈니에게 특별상을 안겨주었다.
뮤지컬 영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다른 장르의 배우들도 뮤지컬에 도전했다. 갱스터 영화의 "터프 가이" 이미지로 유명했던 제임스 캐그니는 원래 무대 가수이자 댄서였던 재능을 살려 ''양키 두들 댄디'' (1942)에서 뛰어난 노래와 춤 실력을 선보였고,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코미디 그룹 마르크스 형제 역시 거의 모든 영화에 뮤지컬 넘버를 포함시켜 음악적 재능을 뽐냈으며, 그들의 마지막 영화 ''러브 해피'' (1949)에는 당대 최고의 댄서 중 한 명으로 꼽히던 베라 엘렌이 출연했다. 코미디언 W. C. 필즈는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뮤지컬 앤솔로지 ''1938년의 빅 브로드캐스트''에 출연했으며, 이 영화에는 키르스텐 플래그스타드, 티토 기자르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도 참여했다.[6] 이 영화는 밥 호프의 대표곡이 된 "고마워요, 추억"으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다.[7]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는 MGM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뮤지컬 영화의 황금기가 펼쳐졌다. 특히 프로듀서 아서 프리드가 이끄는 제작팀(프리드 유닛)은 기존의 정형화된 뮤지컬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1944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자''를 시작으로, 프리드 유닛은 ''이스터 퍼레이드'' (1948), ''온 더 타운'' (1949), ''파리의 아메리카인'' (1951), ''사랑은 비를 타고'' (1952), ''밴드 웨건'' (1953), ''지지'' (1958) 등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꼽히는 수많은 뮤지컬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 MGM은 주디 갈랜드, 진 켈리, 앤 밀러, 도널드 오코너, 시드 채리스, 미키 루니, 베라-엘렌, 제인 파월, 하워드 킬, 캐서린 그레이슨 등 뛰어난 뮤지컬 스타들을 배출하며 "별들의 수보다 많다"는 찬사를 받았다. 은퇴했던 프레드 아스테어 역시 ''이스터 퍼레이드''를 통해 복귀하여 다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MGM은 프리드 유닛 외에도 ''7인의 신부'' (1954), ''상류 사회'' (1956) 등의 뮤지컬 영화를 제작했으며, 새뮤얼 골드윈이 제작한 ''아가씨와 건달들'' (1955)을 배급하기도 했다.
다른 스튜디오들도 뮤지컬 영화 제작에 힘썼다. 20세기 폭스는 베티 그레이블, 컬럼비아 영화는 리타 헤이워스 등을 간판스타로 내세웠다. 특히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의 브로드웨이 히트 뮤지컬을 영화화한 ''오클라호마!'' (1955), ''왕과 나'' (1956), ''회전목마'' (1956), ''남태평양'' (1958)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빙 크로스비 주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1954)와 오드리 헵번 주연의 ''퍼니 페이스'' (1957)를, 워너 브라더스는 도리스 데이 주연의 ''캘러미티 제인'' (1953)과 주디 갈랜드의 복귀작인 ''스타 탄생'' (1954)을 선보였다. 감독 오토 프레밍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도로시 댄드리지를 주연으로 내세운 ''카르멘 존스'' (1954)와 ''포기와 베스'' (1959)를 연출했으며, 하워드 혹스 감독은 마릴린 먼로 주연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1953)를 통해 뮤지컬 장르에 도전했다.
한편, 1940년대 미국에서는 '사운디스'(Soundies)라고 불리는 주크박스 영화가 유행했다.[57] 레스토랑이나 바에 설치된 '파노람'(Panoram)이라는 기기에 동전을 넣으면 듀크 엘링턴과 같은 인기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나 노래를 담은 약 3분짜리 단편 음악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58]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사운디스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당시 제작된 필름들은 그 시대 뮤지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영상 자료로 남아 있다.
이 시기 뮤지컬 영화들은 주로 가수, 댄서, 뮤지컬 스타들의 무대 뒤 이야기나 사생활을 다루는 '백스테이지 뮤지컬' 형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노래하고 춤을 추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2. 1. 2. 196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영화화
1940년대 중반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오클라호마!는 탄탄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뮤지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러한 흐름은 1950년대 영화계로 이어져, 조지 큐커 감독의 스타 탄생(1954)이나 로저스 & 해머스타인의 작품들처럼 이야기를 중시하는 뮤지컬 영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전까지 MGM이 주로 만들었던 노래나 춤 같은 개인기를 앞세운 뮤지컬이나 스타 중심의 영화는 점차 사라졌다.이야기와 음악을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영화 제작자들은 이미 완성도가 높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로 만드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들어지는 뮤지컬은 크게 줄어들었다.
동시에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영화 화면이 커졌고, 제작비가 많이 드는 뮤지컬 영화는 그만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대작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웠다.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메리 포핀스(1964), 마이 페어 레이디(1964) 등 오늘날에도 명작으로 꼽히는 대형 뮤지컬 영화들이 할리우드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탄생하며 뮤지컬 영화의 황금기를 열었다.
또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의 등장을 계기로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만들어져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존 할리우드 뮤지컬이 추구했던 환상적인 '꿈의 세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2. 1. 3. 1970년대-1990년대: 쇠퇴와 새로운 시도
1960년대 이후 뮤지컬 영화는 흥행을 보장하기 어려운, 불안정한 장르가 되었다. 관객 수가 줄어들고 제작되는 영화 수도 감소하면서, 뮤지컬은 주류 영화계에서 점차 벗어나 특정 관객층을 위한 장르로 변화하였다.특히 1960년대 말에는 규모가 커진 대형 뮤지컬 영화들이 연이어 상업적으로 실패하면서 장르의 급격한 쇠퇴를 맞았다. 새롭게 부상한 아메리칸 뉴 시네마나 SFX 영화에 오락 영화의 주류 자리를 내주게 되면서, 이후 약 30년간 뮤지컬 영화는 비주류 장르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는 소재와 인재 발굴의 원천이었던 브로드웨이의 침체가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 인해 배우, 감독, 기타 제작진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드물게 제작될 뿐이었다.
이러한 주류 뮤지컬의 퇴조와는 별개로, 1950년대 중반부터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와 같은 특정 인기 음악가를 전면에 내세운, 이른바 '주크박스 뮤지컬' 형태의 소규모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사운드트랙 앨범 판매와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와 1980년대로 이어져, 특정 가수에 국한되지 않고 젊은 세대를 겨냥한 매력적인 팝 음악으로 사운드트랙을 채워 대중음악 시장과 강하게 결합된 영화 제작 방식으로 발전했다. 특히 ''청춘 낙서''나 ''토요일 밤의 열기'' 같은 영화들의 큰 성공은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비록 평론가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영화들은 이후 뮤직 비디오 시대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록키 4''와 같이 뮤지컬이 아닌 다른 장르 영화의 제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2. 1. 4. 2000년대 이후: 부활과 다양화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물랑 루즈!''(2001)는 볼리우드 뮤지컬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43] 이 영화는 인도 테마의 연극과 영화 ''차이나 게이트''의 노래를 포함한 볼리우드 스타일의 댄스 시퀀스를 선보이며 인도에 경의를 표했다. ''물랑 루즈!''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은 당시 침체되었던 서양 실사 뮤지컬 장르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이후 ''시카고''(2002), ''프로듀서''(2005), ''렌트''(2005), ''드림걸즈''(2006), ''헤어스프레이''(2007)와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면서 장르의 부흥을 이끌었다.[44]이러한 부활에는 19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의 성공도 영향을 미쳤다. 미녀와 야수(1991)를 시작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들이 성인 관객에게도 호평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2000년대 실사 뮤지컬 영화, 특히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영화화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2003년에는 ''시카고''가 뮤지컬 영화로는 34년 만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RENT/렌트''(2005), ''프로듀서스''(2005), ''헤어스프레이''(2007), ''맘마 미아!''(2008)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이 연이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볼리우드의 영향은 서양 뮤지컬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 구루''(2002)와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5)는 인도 스타일의 노래와 댄스 시퀀스를 포함했다. 볼리우드 뮤지컬 자체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라가안''(2001)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데브다스''(2002)와 ''랑 데 바산티''(2006)는 BAFTA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대니 보일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볼리우드 스타일의 노래와 댄스 넘버를 선보였다. 2022년 영화 ''탈리카''는 마하라자가 작곡한 음악을 담아 음악 분야 세계 기록 보유자로 등록되기도 했다.[45]
인도는 연간 800편에 달하는 영화를 제작하며, 그중 상당수가 뮤지컬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제작 편수 면에서는 인도를 뮤지컬 영화의 본고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도 뮤지컬 영화는 액션 등 다양한 장르 요소를 혼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1990년대 이후 라지니칸트 주연의 ''무투 춤추는 마하라자''와 같은 인기 영화들이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뮤지컬 영화의 제작 방식에도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뮤지컬 영화에서는 배우들이 사전에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노래에 맞춰 촬영 현장에서 립싱크 연기를 하지만, ''레 미제라블''(2012)에서는 모든 노래를 촬영 현장에서 직접 부르며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배우들은 이어폰을 통해 피아노 반주를 들으며 연기했고, 이 피아노 소리는 후반 작업에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대체되었다.[59]
2010년대에는 텔레비전에서도 라이브 뮤지컬 이벤트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2013년 NBC가 ''사운드 오브 뮤직 라이브!''를 방영한 것을 시작으로, 무대 뮤지컬을 라이브 텔레비전 이벤트로 제작하는 것이 연례적인 기획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피터 팬 라이브!'', ''위즈 라이브!'', ''헤어스프레이 라이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라이브!'', ''닥터 수스: 그린치 뮤지컬 라이브!'', ''애니 라이브!'' 등이 제작되었다. ABC와 폭스 역시 ''그리스 라이브!'', ''크리스마스 스토리 라이브!'', ''렌트: 라이브'', ''인어 공주 라이브!'' 등 유사한 라이브 이벤트를 선보였다.[11]
2. 2. 인도 뮤지컬 영화

인도 영화 산업은 뮤지컬 영화의 역사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뭄바이를 중심으로 한 볼리우드 영화 산업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곳 중 하나이며, 제작되는 영화의 대부분이 뮤지컬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첸나이의 타밀 산업, 방갈로르의 칸나다 산업, 하이데라바드의 텔루구 산업, 그리고 말라얄람 산업 등 인도의 다른 주요 지역 영화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즉, 인도 영화에서 음악과 춤은 단순한 삽입곡 이상으로 영화 서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 뮤지컬 영화는 고전 인도 음악 연극, 산스크리트 드라마, 파르시 연극 등 자국의 풍부한 전통 공연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기에 초기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왔다.[12] 최초의 인도 유성 영화인 ''알람 아라''(1931)의 성공 이후, 뮤지컬은 인도 영화의 주류 장르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14]
수많은 영화에 뮤지컬 장면이 포함되어 왔지만, 영화 전체가 노래와 춤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완전한 의미의 뮤지컬 영화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 2009년 아누라그 카시야프 감독의 ''데브 D''가 인도 최초의 완전한 뮤지컬 영화로 평가받으며, 이후 2017년 아누라그 바수 감독의 ''자가 자수스''가 그 뒤를 이었다. 인도 뮤지컬 영화의 역사와 발전 과정, 주요 작품과 특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2. 2. 1. 초기 사운드 영화 (1930년대-1940년대)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리 드 포레스트는 뮤지컬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1926년부터는 수천 편의 비타폰 단편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이들 중 다수에는 밴드, 보컬리스트, 댄서가 등장했다. 초기의 유성 장편 영화들은 배우들이 무성 영화처럼 대사 없이 연기하는 동안 배경 음악과 간헐적인 음향 효과만으로 사운드트랙을 구성했다.[1] 1927년 워너 브라더스가 개봉한 ''재즈 싱어''는 영화 속 인물들이 듣는 음악(다이어제틱 사운드)과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비다이어제틱 사운드)을 모두 포함한 최초의 영화였으나, 대사가 포함된 장면은 짧았다. 이 영화는 또한 알 졸슨이 "Dirty Hands, Dirty Face", "Toot, Toot, Tootsie", "Blue Skies", "My Mammy" 등의 노래를 부른 뮤지컬 영화이기도 했다. 역사학자 스콧 아이먼은 영화 상영 후 샘 골드윈의 아내 프란세스가 관객석의 유명 인사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목격했다고 전했는데, 이는 유성 영화의 등장이 기존 영화 산업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즈 싱어''에서 실제 목소리가 나오는 장면은 일부에 불과했고, 영화 대부분은 동기화된 배경 음악만 사용되었다.[1] 1928년, 워너 브라더스는 졸슨이 출연한 또 다른 부분 유성 영화 ''싱잉 풀''을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1] 이에 극장들은 새로운 음향 장비를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브로드웨이 극장의 작곡가들을 고용하여 영화용 뮤지컬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3]최초의 완전 유성 영화인 ''뉴욕의 불빛''은 나이트클럽 장면에서 뮤지컬 시퀀스를 선보였다.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주요 스튜디오는 유성 영화 제작으로 전환했다. 1929년 MGM이 제작한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매력적인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쇼 비즈니스 영화였다. MGM은 이 영화를 "모두 말하고, 모두 노래하고, 모두 춤추는" 최초의 장편 영화로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며, 흥행에 성공하여 1929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스튜디오들은 브로드웨이의 히트 뮤지컬을 영화화하기 위해 무대에서 재능 있는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파라마운트의 ''러브 퍼레이드'' (1929)는 모리스 슈발리에와 신예 스타 자넷 맥도널드가 주연을 맡았고, 브로드웨이의 베테랑 작가 가이 볼턴이 각본을 썼다.[3]
워너 브라더스는 1929년 최초의 영화 오페레타인 ''사막의 노래''를 제작했으며, 상당 부분을 테크니컬러 방식으로 촬영하여 시각적인 화려함을 더했다. 이어서 최초의 완전 컬러, 완전 유성 뮤지컬 장편 영화인 ''온 위드 더 쇼'' (1929)를 내놓았다. 1929년 최고의 흥행작은 두 번째 완전 컬러, 완전 유성 장편 영화인 ''브로드웨이의 골드 디거스'' (1929)였다. 이 영화는 당시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1939년까지 역대 최고 흥행 영화로 기록되었다. 이 시기 할리우드는 뮤지컬, 리뷰, 오페레타 장르의 영화들을 쏟아냈다.
연도 | 제목 |
---|---|
1929 | 할리우드 리뷰 오브 1929, 더 쇼 오브 쇼, 샐리 |
1930 | 방랑왕, 팔로우 스루, 브라이트 라이츠, 골든 던, 홀드 에브리싱, 로그 송, 송 오브 더 플레임, 송 오브 더 웨스트, 스위트 키티 벨레어스, 언더 어 텍사스 문, 연대의 신부, 후피!, 재즈의 왕, 비엔나의 밤, 키스 미 어게인 |
이 외에도 컬러 장면이 포함된 수많은 뮤지컬 영화들이 개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뮤지컬 영화의 홍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할리우드는 1930년에 100편이 넘는 뮤지컬 영화를 개봉했지만, 다음 해인 1931년에는 14편으로 급감했다.[4] 1930년 말에 이르자 관객들은 뮤지컬에 식상함을 느꼈고, 스튜디오들은 이미 제작 중이던 영화에서 노래 장면을 삭제해야 할 정도였다. 예를 들어, ''파티의 인생'' (1930)은 원래 완전 컬러, 완전 유성 뮤지컬 코미디로 기획되었으나 개봉 전에 노래가 모두 삭제되었다. 테크니컬러로 촬영된 ''5천만 프랑스인'' (1931)과 ''맨해튼 퍼레이드'' (1932)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같은 배우가 영화에서 부른 노래가 인기를 얻고, 로저스 앤드 하트와 같은 작곡가 콤비가 호평받는 영화 음악을 만들기도 했지만, 1932년 무렵에는 이러한 인기마저 시들해졌다.[4] 대중들은 점차 컬러 영화를 뮤지컬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뮤지컬 장르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컬러 영화 제작 역시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인도에서는 독자적인 뮤지컬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볼리우드 뮤지컬은 고전 인도 음악 연극, 산스크리트 드라마, 파르시 연극과 같은 인도의 풍부한 전통 음악 연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봄베이의 영화 제작자들은 이러한 자국의 음악 연극 전통과 할리우드 초기 유성 영화에서 나타난 뮤지컬 형식을 창의적으로 결합했다.[12] 또한 우르두 문학과 고전 설화집 ''아라비안 나이트'' 역시 초기 볼리우드 영화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13]
인도 최초의 유성 영화는 아르데시르 이라니 감독이 1931년에 제작한 ''알람 아라''이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인도 영화 시장에서 유성 영화와 뮤지컬 영화의 가능성을 입증했다.[14] 이후 볼리우드를 포함한 인도의 모든 지역 영화 산업은 빠르게 유성 영화 제작 체제로 전환했다.
1937년, 아르데시르 이라니는 힌디어로 제작된 최초의 컬러 영화 ''키산 칸냐''를 선보였다. 이듬해에는 또 다른 컬러 영화인 ''마더 인디아''의 새로운 버전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컬러 영화가 인도에서 대중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인도 영화계에서는 화려한 로맨틱 뮤지컬과 멜로 드라마가 주류를 이루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2. 2. 2. 황금기 (1940년대 후반-1960년대)
1960년대에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집시'', ''더 뮤직 맨'', ''바이 바이 버디'', ''마이 페어 레이디'', ''메리 포핀스'', ''사운드 오브 뮤직'', ''포럼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재밌는 사건'', ''정글북'', ''완전 멋쟁이 밀리'', ''올리버!'', 그리고 ''화니 걸'' 등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하며 전통적인 뮤지컬 영화의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영화 감독 자크 드미의 재즈 뮤지컬 ''쉘부르의 우산''과 ''로슈포르의 숙녀들'' 역시 국제적인 비평가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중의 음악 취향은 로큰롤과 그에 따른 자유분방함과 젊음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형식적으로는 과거 뮤지컬과 유사한 영화 여러 편에 출연했으며, 비틀즈가 출연한 ''하드 데이즈 나이트''와 ''헬프!''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았다. ''오클라호마!''나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많은 뮤지컬 영화는 성공한 무대극을 각색하거나 재연한 작품이었다. 이 시기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뮤지컬 중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는 디즈니의 역대 최고 흥행작 중 두 편인 ''메리 포핀스''와 ''정글북''을 꼽을 수 있다.''사운드 오브 뮤직''의 큰 성공은 할리우드 주요 영화사들이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뮤지컬 영화 제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일부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할리우드는 대중의 취향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많은 뮤지컬 영화에서 실패를 겪었다.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영화들로는 ''카멜롯'', ''피니안의 무지개'', ''헬로, 돌리!'', ''스위트 채리티'', ''닥터 두리틀'', ''하프 어 식스펜스'', ''가장 행복한 백만장자'', ''스타!'', ''달링 릴리'', ''굿바이 미스터 칩스'', ''페인트 유어 왜건'', ''노르웨이의 노래'', ''맑은 날에는 영원히 볼 수 있어요'', ''1776'', ''라만차의 사나이'', ''로스트 호라이즌'', ''맘'' 등이 있다. 이러한 영화들의 연이은 실패는 여러 주요 영화사의 재정 상태에 큰 부담을 주었다.
한편, 인도의 독립 이후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영화 역사가들에 의해 힌두 시네마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15][16][17] 이 시기에는 비평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힌두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구루 더트가 감독하고 아브라 알비가 각본을 쓴 ''피아사''(1957)와 ''카가즈 케 풀''(1959), 라지 카푸르가 감독하고 콰자 아흐마드 아바스가 각본을 쓴 ''아와라''(1951)와 ''쉬리 420''(1955), 메흐부브 칸이 감독하고 딜립 쿠마르가 출연한 ''안''(1952)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주로 인도 노동 계층의 삶, 특히 도시 생활의 현실을 다루는 사회적 주제를 담고 있었다. ''아와라''는 도시를 동경의 대상이자 악몽 같은 공간으로 묘사했고, ''피아사''는 도시 생활의 비정한 단면을 비판적으로 그렸다.[18]
메흐부브 칸 감독의 ''마더 인디아''(1957)는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아우라트''(1940)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인도 영화이다. 아쉽게도 단 한 표 차이로 수상하지는 못했다.[19] ''마더 인디아''는 이후 수십 년간 힌두 시네마의 특징을 규정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0][21][22]
2. 2. 3. 볼리우드 (1970년대-현재)
1970년대 초, 힌두 시네마는 주제 면에서 정체기를 겪고 있었으며, 뮤지컬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24][23] 이러한 상황에서 각본가 듀오 살림-자베드 (살림 칸, 자베드 악타르)가 등장하며 산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24] 그들은 ''Zanjeer'' (1973)와 ''Deewaar'' (1975) 같은 영화를 통해 거칠고 폭력적인 뭄바이 언더월드 범죄 영화 장르를 새롭게 선보였다.[25][26]1970년대는 "볼리우드"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시기이며,[27][28] 상업적인 볼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자리 잡은 때이기도 하다.[29] 이 시기에는 여러 장르(액션, 코미디, 로맨스, 드라마, 멜로드라마, 뮤지컬)의 요소를 혼합한 마살라 영화 장르가 등장했다. 마살라 영화는 영화 제작자 나시르 후세인[30]과 각본가 듀오 살림-자베드[29]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볼리우드 블록버스터 형식의 기반을 마련했다.[29] 나시르 후세인이 감독하고 살림-자베드가 각본을 쓴 ''Yaadon Ki Baarat'' (1973)는 최초의 마살라 영화이자 전형적인 "볼리우드" 영화로 평가받는다.[31][29] 살림-자베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성공적인 마살라 영화 각본을 다수 집필했으며,[29] 이 장르는 아미타브 밧찬을 당대 최고의 볼리우드 스타로 만들었다. Manmohan Desai가 감독하고 Kader Khan이 각본을 쓴 ''Amar Akbar Anthony'' (1977)는 마살라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며,[32][31] Desai 역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 장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대에는 아미타브 밧찬 외에도 페로즈 칸[33], 미툰 차크라보르티, 나시루딘 샤, 재키 슈로프, 산자이 더트, 아닐 카푸르, 써니 데올 등이 인기 배우로 활동했다. 또한 헤마 말리니, 자야 밧찬, 라키, 샤바나 아즈미, 지나트 아만, 파르빈 바비, 레카, 딤플 카파디아, 스미타 파틸, 자야 프라다, 파드미니 콜하푸레 등이 대표적인 여배우였다.[34]
1980년대 후반, 볼리우드는 흥행 수입 감소, 영화 속 폭력성 증가, 음악의 질 저하, 비디오 불법 복제 확산 등으로 인해 다시 침체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중산층 가족 관객들이 극장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작품은 만수르 칸이 감독하고 그의 아버지 나시르 후세인이 각본 및 제작을 맡은 《Qayamat Se Qayamat Tak》(1988)이었다. 이 영화는 아미르 칸과 주히 차울라가 주연을 맡아 젊음, 건전한 오락, 감성적인 스토리, 그리고 인상적인 음악을 결합하여 가족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35][36] 이 영화는 1990년대 힌두 영화계를 주도하게 될 볼리우드 뮤지컬 로맨스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36]
1990년대 이후의 힌두 영화 시대를 "뉴 볼리우드"라고 칭하며,[37] 이는 1990년대 초 인도의 경제 자유화와 맞물려 시작되었다.[38] 이 시기에는 다시 가족 중심의 로맨틱 뮤지컬이 큰 인기를 얻었다. 《Qayamat Se Qayamat Tak》의 성공 이후 《Maine Pyar Kiya》(1989), 《Chandni》(1989), 《Hum Aapke Hain Kaun》(1994), 《Dilwale Dulhania Le Jayenge》(1995), 《Raja Hindustani》(1996), 《Dil To Pagal Hai》(1997), 《Pyaar To Hona Hi Tha》(1998), 《Kuch Kuch Hota Hai》(1998)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연이어 성공했다. 이와 함께 아미르 칸, 아디티아 판촐리, 아제이 데브건, 악셰이 쿠마르, 살만 칸(살림 칸의 아들), 샤루크 칸 등 새로운 세대의 남자 배우들과 마두리 딕시트, 스리데비, 주히 차울라, 미낙시 세샤드리, 마니샤 코이랄라, 카졸, 카리스마 카푸르와 같은 여자 배우들이 스타로 부상했다.[34]
특히 1990년대 이후 볼리우드를 대표하는 세 명의 배우는 "쓰리 칸"으로 불리는 아미르 칸, 샤루크 칸, 살만 칸이다.[39][40] 이들은 역대 볼리우드 영화 흥행 순위 상위 10편 중 대부분에 출연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쓰리 칸은 1980년대 후반부터 성공적인 경력을 시작했으며,[39] 1990년대부터 약 30년간 인도 박스 오피스를 장악했다.[41][42]
볼리우드 뮤지컬은 서구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자신의 성공적인 뮤지컬 영화 ''물랑 루즈!''(2001)가 볼리우드 뮤지컬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43] 이 영화는 인도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인도 테마의 연극 장면과 영화 ''차이나 게이트''의 노래를 사용한 볼리우드 스타일의 댄스 시퀀스를 포함했다. ''물랑 루즈!''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은 당시 침체되어 있던 서양 실사 뮤지컬 장르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이후 ''시카고'', ''프로듀서'', ''렌트'', ''드림걸즈'', ''헤어스프레이''와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며 장르 부흥에 기여했다.[44]
영화 ''더 구루''(2002)와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5) 역시 인도 스타일의 노래와 춤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볼리우드 뮤지컬 ''라가안''(2001)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으며, ''데브다스''(2002)와 ''랑 데 바산티''(2006)는 영국 아카데미상 BAFTA 영화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대니 보일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는 영화 마지막 크레딧에 볼리우드 스타일의 노래와 춤 장면을 삽입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영화 ''탈리카''(2022)는 마하라자가 작곡한 음악을 특징으로 하며 음악 분야에서 세계 기록 보유자로 등록되었다.[45]
2. 3. 소련 뮤지컬 영화
소련의 뮤지컬 영화는 할리우드나 볼리우드의 작품들과 달리 주로 정치적 선전의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의 후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화를 공산주의 이념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46] 1930년대에 이르러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오락성을 일부 받아들였으나,[47] 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따라 집단 노동의 중요성 등 이념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51]2. 3. 1. 스탈린 시대
할리우드와 볼리우드의 뮤지컬 영화가 현실 도피주의와 연관되어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것과는 달리, 소련 뮤지컬 영화는 무엇보다도 선전의 한 형태였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영화를 "가장 중요한 예술"이라고 말했으며, 그의 후계자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공산당 교리를 효율적으로 전파하는 데 있어 영화의 힘을 인식했다. 1920년대에 영화는 널리 인기를 얻었지만, 소련 영화 시장을 지배한 것은 주로 독일과 미국의 외화였다. 이들 외화는 소련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역사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것으로 여겨졌다.[46] 1930년대에 이르러 소련 영화가 서방 국가들과 경쟁하려면, 관객들이 원하는 것, 즉 할리우드에서 얻는 화려함과 환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47] 당시 등장한 뮤지컬 영화는 엔터테인먼트와 공식 이데올로기의 이상적인 조합을 구현했다.단순한 웃음을 위한 오락과 명확한 이념적 메시지를 가진 엔터테인먼트 사이의 갈등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소련 뮤지컬의 황금기를 정의했다. 당시 영화 산업 수장이었던 보리스 슈먀츠키는 할리우드의 컨베이어 벨트 방식의 제작 방식을 모방하려 했으며, '소련의 할리우드'를 설립하는 것까지 제안했다.[48]
1930년, 소련의 저명한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동료 감독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와 함께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알렉산드로프는 미국의 영화, 특히 뮤지컬에 큰 영향을 받았다.[49] 1932년에 귀국하여 1934년에 최초의 소련 뮤지컬인 ''즐거운 친구들''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줄거리는 가볍게 다루고 코미디와 음악에 더 집중했다. 당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이 영화에 대해 큰 적대감을 보였다. 알렉산드로프는 웃음을 위한 웃음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며 자신의 작품을 옹호했다.[50] 마침내 알렉산드로프가 이 영화를 스탈린에게 보여주자, 스탈린은 뮤지컬이 선전을 효과적으로 퍼뜨리는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집단 노동의 중요성과 자수성가 이야기와 같은 메시지가 대부분의 소련 뮤지컬의 줄거리가 되었다. ''즐거운 친구들''의 성공은 뮤지컬 형식이 소련 영화에서 자리를 잡도록 했지만, 슈먀츠키는 영화가 공산주의 가치를 홍보하도록 엄격한 지침을 즉시 설정했다. 슈먀츠키의 칙령 "수백만을 위한 영화"는 영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산업과 노동 계급의 미화)을 성공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전통적인 플롯, 등장인물, 몽타주를 요구했다.[51]
사회적 메시지와 오락의 첫 번째 성공적인 조화는 알렉산드로프의 ''서커스'' (1936)였다. 그의 아내 류보프 오를로바 (''즐거운 친구들''에도 출연한 오페라 가수)가 주연을 맡았는데, 그녀는 흑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아이를 낳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피해 소련으로 이주해야 하는 미국 서커스 배우 역할이었다. 화려한 뮤지컬 제작을 배경으로, 그녀는 마침내 소련에서 사랑과 포용을 발견하며 인종 관용은 소련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알렉산드로프의 연출에 미친 버스비 버클리의 안무 영향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뮤지컬 넘버에서 볼 수 있다. 할리우드에 대한 또 다른, 더 명백한 언급은 영화 전체에서 코믹한 재미를 선사하는 찰리 채플린 모방가이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4백만 명이 ''서커스''를 개봉 첫 달에 관람했다.[52]
알렉산드로프의 또 다른 인기 영화는 ''밝은 길'' (1940)이었다. 이 영화는 현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동화 ''신데렐라''를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이야기 속 신데렐라는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였던 오를로바였다.[53] 이 영화는 판타지였지만, 이야기의 교훈은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커스''에서는 뮤지컬 넘버가 춤과 볼거리를 포함했지만, ''밝은 길''의 유일한 안무는 공장 기계의 움직임이었다. 음악은 오를로바의 노래로 제한되었다. 여기서는 노동이 볼거리를 제공했다.
뮤지컬 영화의 또 다른 주요 감독은 이반 피리예프였다. 알렉산드로프와는 달리, 피리예프의 영화는 집단 농장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영화, 《트랙터 운전사》(1939년), 《양치기와 돼지 치는 사람》(1941년), 그리고 가장 유명한 《쿠반 코사크》(1949년) 모두 그의 아내인 마리나 라디니나가 주연을 맡았다. 알렉산드로프의 《밝은 길》과 마찬가지로 유일한 안무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노래조차도 일의 즐거움에 관한 것이었다. 피리예프는 그의 어떤 영화에도 특정한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스탈린의 슬로건인 "삶이 더 나아지고, 삶이 더 즐거워졌다"를 홍보했다.[54] 때로는 이 메시지가 그 당시의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다. 《쿠반 코사크》 촬영 당시, 소련은 전후 기근을 겪고 있었다. 사실, 번영의 시기에 대해 노래하던 배우들은 배고프고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55] 하지만, 이 영화들은 관람객들에게 도피와 낙관주의를 제공했다.

스탈린 시대 뮤지컬 영화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1938년 알렉산드로프 감독의 영화 ''볼가-볼가''였다. 이 영화 역시 류보프 오를로바가 주연을 맡았으며,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이 영화는 그 유형 중 가장 이례적인 작품이다. 줄거리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직업보다 음악에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소련의 가치를 대표하지 않는다. 코미디는 지방 당국과 관료주의를 조롱한다.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산업에 대한 찬양은 없다. 줄거리가 휴가를 이용하여 볼가강과 모스크바 운하를 따라 모스크바로 여행을 떠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이므로 일 또한 미화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굴라크 수감자들이 건설했다는 암시 없이 모스크바 운하를 찬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볼가-볼가''는 이념적 신조보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원칙을 따랐다. 스탈린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영화는 삶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영화의 또 다른 예이다. 스탈린의 숙청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개봉되어 대중에게 도피주의와 위안을 주는 환상을 제공했다.[56]
2. 4. 스페인 뮤지컬 영화
스페인은 할리우드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제작된 뮤지컬 영화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대 스페인 제2공화국 시기와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안달루시아 지방색, 집시, 코플라 등 스페인 고유의 정서를 담아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시기 임페리오 아르헨티나, 에스트레지타 카스트로 등 많은 스타를 배출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마리솔, 호셀리토와 같은 청소년 스타들이 등장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과 모비다 문화의 부상 이후 장르의 인기는 다소 수그러들었으며,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플라멩코 영화 등을 통해 명맥을 유지했다.2. 4. 1. 제2공화국 시대-1970년대
스페인은 할리우드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제작된 뮤지컬 영화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스페인 뮤지컬 영화는 1930년대 스페인 제2공화국 시대와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 무성 영화 시대에도 몇몇 사르수엘라(스페인 오페레타)가 영화 각본으로 각색되기도 했다.초기 스페인 뮤지컬은 안달루시아의 마을과 풍경, 집시, bandolero|반돌레로es(산적)와 같은 낭만적인 스페인 원형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코플라를 비롯한 대중적인 민요들을 이야기 전개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영화들은 당시 스페인에서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큰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스페인의 초기 영화 스타들 중 다수가 뮤지컬 장르에서 배출되었다. 임페리오 아르헨티나, 에스트레지타 카스트로, 감독 플로리안 레이가 대표적이며, 이후에는 롤라 플로레스, 사라 몬티엘, 카르멘 세비야 등이 인기를 얻었다. 스페인 뮤지컬 영화는 점차 확장되고 성장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청소년 스타들이 등장하여 흥행을 이끌었다. 마리솔, 호셀리토, 필리 & 밀리, 그리고 로시오 두르칼은 이 시기 뮤지컬 영화의 주요 인물이었다.
2. 4. 2. 1980년대 이후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과 함께 "모비다 문화"가 부상하면서, 스페인에서 뮤지컬 영화 장르는 제작과 흥행 면에서 이전보다 위축되었다. 이 시기 스페인 뮤지컬 영화의 명맥은 주로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과 그의 플라멩코를 소재로 한 뮤지컬 영화들을 통해 이어졌다.2. 5. 일본 뮤지컬 영화
일본 뮤지컬 영화는 초기 토키 영화 시대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특히 일본 고유의 정서와 운율을 살리기 좋은 시대극 장르와 결합하여 에노모토 켄이치, 미소라 히바리와 같은 스타들을 배출하며 한때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할리우드 스타일을 따른 현대극 뮤지컬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현재는 오리지널 작품 제작이 드문 편이다. 최근에는 일본 특유의 감성을 담아내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60]2. 5. 1. 초기-1960년대
일본 최초의 토키 영화인 『마담과 부인』(1931)은 할리우드 초기 토키 영화처럼 뮤지컬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었다.일본 뮤지컬 영화는 특히 시대극과 잘 어울리는 특징을 보였는데, 이는 일본 고유의 7·5조 운율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위기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원앙가합전』(1939)은 이러한 시대극 뮤지컬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꼽힌다. 이후 '에노켄'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에노모토 켄이치나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미소라 히바리 등이 주연한 시대극 뮤지컬은 전쟁 중부터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에 걸쳐 큰 인기를 누렸다. 『너구리 어전』 시리즈 역시 전쟁 중과 전후 시기에 여러 영화사를 통해 제작되며 오랜 기간 사랑받은 시리즈가 되었다.
반면, 시대극이 아닌 현대극 분야에서는 할리우드 스타일을 모방한 야심찬 뮤지컬 대작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훌륭한 남성』, 『아스팔트 걸』 등이 제작되었으나 관객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프랭키 사카이가 주연한 『너도 출세할 수 있다』는 비평적으로는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례로 평가받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결과적으로 현대극 뮤지컬은 당시 유행가를 중심으로 한 가요 영화의 형태나, 가야마 유조 또는 코미디 그룹 크레이지 캣츠 등이 주연한 코미디 영화 속 일부 장면으로 삽입되는 방식으로 주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2. 5. 2. 1970년대 이후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는 브로드웨이 번역 작품이 강세인 무대 공연계와 비슷하게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가 제작되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제작되더라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같은 작품을 제외하면 어린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 관객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하지만 최근 들어 일본 특유의 감성을 담은 뮤지컬 영화를 만들고 정착시키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2012년 SKIP시티 국제 D시네마 영화제 단편 부문에서는 가도카와 히로아키 감독의 뮤지컬 작품 『유메의 소리』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가도카와 감독은 일본식 뮤지컬 영화를 뿌리내리겠다는 목표 아래 「Japanese Musical Cinema」라는 단체를 발족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13년에는 사이타마현과 쇼치쿠가 공동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사이타마 가족』의 한 작품으로, 쓰루미 신고가 주연하고 가도카와 히로아키가 감독한 뮤지컬 『아버지 론도』가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2014년에는 스오 마사유키 감독이 연출한 『마이코는 레이디』가 개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마이 페어 레이디』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주연 배우 가미시라이시 모네가 스타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2021년에 개봉한 『구해줘, 고란』 실사 영화는 뮤지컬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댄스 장면을 과감히 배제하고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들을 기용하여 일본 관객들이 어색함을 느끼지 않도록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스스로를 "신감각 팝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소개하며 새로운 형태의 뮤지컬 영화를 시도했다.[60]
2. 6. 한국 뮤지컬 영화
3. 대표적인 뮤지컬 영화 목록
대표적인 뮤지컬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미국 영화 협회가 뮤지컬 영화 베스트로 선정한 25 작품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작품
# 세계 3대 영화제의 최고상 수상 작품
아래 하위 섹션에서는 시대별 주요 뮤지컬 영화와 함께 위 기준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3. 1. 1920년대-1930년대
뮤지컬 영화는 1920년대 토키 발명으로 영화에 음악 결합이 가능해지면서 등장했다.[1] 최초의 장편 토키 영화로 평가받는 알 조슨 주연의 《재즈 싱어》(1927)는 음악 영화였다.[1] 초기에는 무대 작품을 영화화하거나 스토리 없는 리뷰 단편이 많았다.[1]하지만 토키 초기에는 노래와 댄스 실력이 부족한 배우가 많았고, 제작 수준이 낮기도 했다.[2] 이런 상황에서 유럽풍 오페레타 영화가 세련된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할리우드에서는 독일 출신 에른스트 루비치 같은 유럽 인재들이 활약했다.[2]
세계 대공황으로 브로드웨이가 불황을 겪던 1930년대 전반, 실력 있는 댄서들이 일자리를 찾아 할리우드로 이동하면서 1933년 《42번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뮤지컬 영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3]
댄서 프레드 아스테어는 RKO 소속 배우 진저 로저스와 콤비를 이루어 여러 히트작에서 기술적이고 로맨틱한 댄스 시퀀스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4] 아스테어 & 로저스 콤비는 호흡이 잘 맞는 남녀 댄서의 대명사로 여전히 회자된다.[4]
또한, 안무가 버스비 버클리는 영화만의 연출, 특수 촬영, 컷 분할 기법을 활용하여 뮤지컬 영화가 무대와는 다른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5] 특히 댄서들을 위에서 촬영하여 만화경 같은 대형을 만드는 '버클리 샷'은 그의 대표적인 창조물이다.[5]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는 1929년 《브로드웨이 멜로디》의 성공 이후 이를 시리즈화하여, 1935년 《춤추는 브로드웨이》, 1937년 《춤추는 불야성》, 1940년 《춤추는 뉴욕》 등을 제작했다.[6] 파라마운트 영화사 역시 《라디오는 웃는다》(1933년)의 속편으로 《1936년의 대방송》(1935년), 《1937년의 대방송》(1936년), 《백만 달러 대방송》(1937년) 등을 선보였다.[6]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30년대 말부터 뮤지컬 영화는 테크니컬러 도입, 고품질 녹음 시스템 등 기술 혁신의 혜택을 가장 먼저 누리는 장르가 되었다.[7] 이 시기 뮤지컬 영화의 주된 스토리는 가수, 댄서, 뮤지컬 스타 등 갑자기 노래하고 춤춰도 자연스러운 인물들의 무대 뒤 이야기나 사생활을 다루는 것이었으며, 이는 후에 '무대 뒤편 뮤지컬'(backstage musical)이라는 전통적인 장르로 불리게 된다.[8]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영화 제목 | 개봉 연도 | 비고 |
---|---|---|
브로드웨이 멜로디 | 1929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59] |
42번가 | 1933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13위[60] |
톱 햇 | 1935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15위 |
쇼 보트 | 1936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24위 |
위대한 지그필드 | 1936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
오즈의 마법사 | 1939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3위 |
3. 2. 1940년대-1950년대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중반은 스타 시스템에 의한 뮤지컬 영화의 최성기였다. 특히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는 주디 갈랜드, 진 켈리, 프레드 아스테어 등 수많은 뛰어난 뮤지컬 배우들이 출연하는 호화로운 작품들로 큰 인기를 누렸다. 다른 영화사들도 20세기 폭스의 베티 그레이블, 파라마운트 영화의 빙 크로스비, 컬럼비아 영화의 리타 헤이워스와 같은 간판 스타들을 보유했지만, "별의 수보다 많다"고 칭송받던 MGM의 압도적인 스타 파워에는 미치지 못했다.MGM 뮤지컬은 『파리의 아메리카인』과 『사랑의 파라다이스』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 시대 오락 영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춤추는 뉴욕』, 『앵커 어웨이』, 『나를 야구에 데려가 줘』, 『사랑은 비를 타고』, 『밴드 웨건』, 『이스터 퍼레이드』, 『오즈의 마법사』, 『나의 딸』과 같은 수많은 명작들이 탄생했다. 또한 이 시기는 이른바 틴 팬 앨리의 작사가·작곡가가 마지막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하며, 이때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의 곡 중 다수가 현재까지 스탠더드 넘버로 애창되고 있다.
1940년대 미국에서는 사운디스[57]라고 불리는 주크박스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58] 레스토랑이나 나이트클럽 등에 설치된 '파노람'이라는 전용 장치에 동전을 넣으면 듀크 엘링턴 등 인기 재즈 뮤지션이 등장하는 약 3분 길이의 단편 음악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사운디스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났지만, 이때 제작된 필름들은 당시 뮤지션들의 모습을 오늘날에 전하는 귀중한 영상 자료가 되었다.
작품명 | 개봉 연도 | 비고 |
---|---|---|
양키 두들 댄디 | 1942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18위 |
우리 엄마는 바람둥이 | 1944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10위 |
이스터 퍼레이드 | 1948 | |
뉴욕의 춤 | 1949 | 미국 영화 협회 선정 뮤지컬 19위 |
파리의 아메리카인 | 1951 | 미국 영화 연구소(AFI) 선정 뮤지컬 영화 9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
사랑은 비를 타고 | 1952 | AFI 선정 뮤지컬 영화 1위 |
밴드 웨건 | 1953 | AFI 선정 뮤지컬 영화 17위 |
화이트 크리스마스 | 1954 | |
일곱 신부 | 1954 | AFI 선정 뮤지컬 영화 21위 |
스타 탄생 | 1954 | AFI 선정 뮤지컬 영화 7위 |
아가씨와 건달들 | 1955 | AFI 선정 뮤지컬 영화 23위 |
왕과 나 | 1956 | AFI 선정 뮤지컬 영화 11위 |
지지 | 1958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
3. 3. 1960년대
50년대에 조지 큐커 감독의 스타 탄생(1954년)이나 로저스 & 해머스타인의 작품들처럼 잘 짜인 이야기를 중시하는 뮤지컬 영화가 주류가 되면서, 이전 MGM 스타일의 배우 개인기 중심 뮤지컬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야기와 음악을 잘 결합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은 완성도 높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영화 오리지널 뮤지컬 제작은 크게 줄었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와이드스크린 기술 도입으로 영화는 점점 더 규모가 커졌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뮤지컬 영화는 그에 걸맞은 큰 수익을 목표로 하는 대작 위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고, 뮤지컬 영화는 최대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메리 포핀스, 마이 페어 레이디 등 현재까지도 고전으로 평가받는 대작들이 할리우드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에서도 탄생했다.
또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성공 이후, 사회 문제를 다루는 뮤지컬 영화들이 등장하여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기존 할리우드 뮤지컬이 보여주던 '꿈과 환상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주요 작품:
작품명 | 개봉 연도 | 원작 정보 | 비고 |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 1961 | 브로드웨이 뮤지컬 (1957)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2위, 아카데미 작품상 |
쉘부르의 우산 | 1964 | 영화 오리지널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
마이 페어 레이디 | 1964 | 브로드웨이 뮤지컬 (1956)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8위, 아카데미 작품상 |
메리 포핀스 | 1964 | 동화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6위 |
사운드 오브 뮤직 | 1965 | 브로드웨이 뮤지컬 (1959)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4위, 아카데미 작품상 |
올리버! | 1968 | 웨스트엔드 뮤지컬 (1960) | 아카데미 작품상 |
화니 걸 | 1968 | 브로드웨이 뮤지컬 (1964)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16위 |
3. 4. 1970년대-현재
1960년대 말, 규모가 커진 뮤지컬 영화들이 연이어 상업적으로 실패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부상한 아메리칸 뉴 시네마나 특수 효과를 활용한 SFX 영화에 오락 영화의 주류 자리를 내주면서, 뮤지컬 영화는 이후 약 30년 동안 주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특히, 뮤지컬 영화의 소재와 인재를 공급하던 브로드웨이의 침체가 큰 영향을 미쳐 배우, 감독, 스태프 등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드물게 만들어지는 데 그쳤다.이러한 주류의 퇴조 속에서도, 1950년대 중반부터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와 같은 특정 인기 음악가를 내세운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소규모 뮤지컬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사운드트랙 앨범과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더욱 발전하여, 특정 가수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 관객층을 겨냥한 매력적인 팝 음악으로 사운드트랙을 가득 채운 영화들이 등장했다. 이는 영화와 팝 음악 시장의 결합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청춘 낙서』와 『토요일 밤의 열기』 같은 영화들의 큰 성공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 비록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들은 이후 뮤직 비디오 시대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록키 4』와 같이 뮤지컬이 아닌 다른 장르 영화의 제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도 주목할 만한 뮤지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연도 | 작품명 | 비고 |
---|---|---|
1972 | 카바레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5위 |
1978 | 그리스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20위 |
1979 | 올 댓 재즈 |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뮤지컬 14위, 황금종려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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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画館と観客の文化史
中央公論新社
200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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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映画『レ・ミゼラブル』特別映像
http://www.youtube.c[...]
[60]
웹사이트
映画「すくってごらん」特集 真壁幸紀監督インタビュー+尾上松也、百田夏菜子、柿澤勇人、石田ニコル、音楽制作陣コメント|“歌えるキャスト”が織りなす新感覚の音楽表現 - 音楽ナタリー 特集・インタビュー
https://natalie.mu/m[...]
202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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