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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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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1181년 또는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인물로, 가톨릭 성인이자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이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회심 후 가난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을 인가받았으며, 클라라회를 설립하고 평신도를 위한 제3회를 조직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으며, 1220년 성탄 구유를 만들었다. 이집트 술탄과의 만남을 통해 이슬람교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모색했으며, 성흔을 받고 1226년 선종했다. 그는 가난, 자연, 평화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예술 작품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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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프란치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필리프 프뤼티에르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필리프 프뤼티에르스가 그린 성 프란치스코의 그림
본명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
출생1181년경, 신성 로마 제국 스폴레토 공국 아시시
사망1226년 10월 3일 (약 44세), 교황령 움브리아주 아시시
공경 대상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구 가톨릭교회
주요 성지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축일10월 4일
상징수도복

동물
성흔
십자가

해골
수호프란치스코회
가난한 사람들
생태학
동물
밀항자
상인
푸에르토리코 아과다
세부 나가
카마리네스수르 부히
세부 발람반
세부 두만주그
카비테 헤네랄트리아스
이탈리아
직함
직함프란치스코회 창립자
신앙의 고백자
성흔을 받은 자
주요 저서
시성
시성일1228년 7월 16일
시성 장소교황령 아시시
시성자교황 그레고리오 9세
종교 정보
종교기독교

2. 초년 시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그의 아내 피카 데 불레몽 사이에서 태어났다. 피카는 프로방스 태생의 귀족 여성이었다.[294] 프란치스코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295] 프랑스에서 사업을 성공하고 돌아온 그의 부친은 아들을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치스코(이탈리아어로는 프란체스코)라고 불렀다.[296]

어린 시절 프란치스코는 음유시인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즐겨 입으며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렸다.[294] 하루는 시장에서 옷감을 팔다가 걸인을 만나 가진 돈을 모두 주었는데, 이 일로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부친에게 야단을 맞았다.[297]

1201년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1년간 감옥에 갇혔고,[298] 1203년 풀려난 후 1204년 중병을 앓으며 영적 위기를 겪었다. 1205년 군대에 입대하려다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영적으로 변화했다.[290] 이후 친구들과의 연회를 피하고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가난을 찬미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나병 환자를 간호하며 회개 생활을 했다. 로마 순례 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고상의 그리스도로부터 “내 집을 수리하여라.”라는 말씀을 듣고,[292][299] 부친의 옷감을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했다.

이 일로 부친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아시시 주교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프란치스코는 상속권과 부친과의 관계를 모두 포기하며 옷을 벗어 돌려주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가난한 은수자 옷을 입고 구걸하며 아시시 인근에서 2년간 통회하며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했다. 포르치운쿨라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거처였다.[299]

2. 1. 출생과 성장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비단 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프랑스 귀족 출신인 피카 데 불레몽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한 명이었다.[294] 어머니 피카에 대해서는 프로방스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3] 프란치스코는 원래 조반니(이탈리아어로는 요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295] 아버지 피에트로가 프랑스에서 사업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을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체스코(프란치스코)라고 불렀다.[296] 이는 아마도 피에트로가 프랑스에서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296]

프란치스코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


어린 시절 프란치스코는 트루바두르 음유시인을 매우 좋아했으며, 알프스 너머의 세상을 동경했다.[290][296] 그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고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탐미적인 생활을 했지만,[294] '거지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세속에 대한 환멸은 그의 인생에서 상당히 일찍 찾아왔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시장에서 옷감과 직물을 팔고 있을 때 걸인이 구걸하러 오자, 거래를 중단하고 걸인에게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모든 돈을 주었다. 이 일로 친구들은 그를 비웃었고, 집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는 화가 난 부친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다.[297]

1201년, 프란치스코는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1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298] 이 경험은 그가 영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203년, 아버지의 보석금으로 풀려난 후, 1204년에는 중병을 앓으며 영적 위기를 겪었다. 1205년,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려 했으나,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영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290] 성인전에 따르면, 스폴레토에서 환시를 보았을 때 “주인을 섬기겠느냐? 아니면 종을 섬기겠느냐?”는 목소리를 듣고 “주인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응답하자 아시시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시시로 돌아온 후, 프란치스코는 친구들과의 연회 참석을 피하고, 가난이라는 덕을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시간을 보냈고, 나병 환자들을 간호하며 회개 생활로 들어갔다. 로마 순례 중에는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아시시로 돌아가던 길에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고상의 그리스도(산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야,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는 말씀을 듣고,[292][299] 부친의 가게에서 값비싼 옷감들을 가져다가 시장에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했다.

부친과 절연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하는 성 프란치스코


이 소식을 들은 부친 피에트로는 몹시 화가 나서 프란치스코를 도시 집정관들에게 데려가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종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아시시 주교 앞에서 재판이 열렸고,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상속권은 물론 부친과의 관계마저 포기한다고 선언하며,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 부친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몇 달 간 구걸하며 연명하다가, 아시시 인근에 돌아와 2년 동안 통회의 삶을 살며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성당들 가운데 포르치운쿨라는 프란치스코가 가장 좋아하는 거처였다.[299]

2. 2. 군 복무와 회심

1201년 프란치스코는 페루자 군대와 싸우기 위한 원정군에 참여했으며, 전쟁 도중 포로로 사로잡혀 1년 동안 콜레스트라다에 있는 감옥에서 죄수로 갇혀 지냈다.[298] 이 당시 포로 생활 경험은 그가 영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203년 부친이 낸 보석금으로 풀려나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걱정 없이 태평한 시간을 보냈다. 1204년 그는 중병에 걸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게 되면서 영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1205년 프란치스코는 페루자 정복을 위한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환시를 체험한 후 아시시로 돌아와 영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290]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군대에 지원할 목적으로 길을 가던 중 스폴레토에 있을 때 환시를 보았는데, 수많은 갑옷과 무기가 있는 방 안에 있던 중에 “주인을 섬기겠느냐? 아니면 종을 섬기겠느냐?”라는 목소리를 듣고 “주인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응답하자 아시시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시시로 돌아온 후로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은 물론 친구들과의 연회 참석도 피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친구들이 그에게 웃으면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가난을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칭송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한적한 장소에 혼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시시 인근에 있는 나병 환자들을 수용한 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결정적인 회개 생활로 들어갔다. 로마를 순례한 길에서 그는 성당 문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들과 같이 생활하기도 하였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아시시로 돌아가던 길에 아시시 교외에 있는 산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게 되었다. 기도하던 중에 십자고상의 그리스도(산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야,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던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수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이를 위해 부친의 가게로 가서 값비싼 옷감들을 가져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292][299]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친 피에트로는 몹시 화가 났으며,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리려고 갖은 시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혼을 내다가, 나중에는 체벌까지 가하였다. 결국 피에트로는 최후의 수단으로 프란치스코를 도시 집정관들에게 데려가 프란치스코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종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교회의 판결에 달려 있었다. 도시 집정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상속권은 물론 부친과의 관계마저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심지어는 대중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뿐만 아니라,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부친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아시시 지역에서 몇 달 간 구걸 행위로 연명하며 지내다가, 아시시 인근에 돌아와 2년 동안 통회의 삶을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아시시 인근의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성당들 가운데 움브리아 평원에 있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안에 있는 작은 경당인 포르치운쿨라는 프란치스코가 가장 좋아하는 거처였다.[299]

2. 3. 부친과의 갈등과 출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 귀족 여성인 어머니 피카 사이에서 태어났다.[294]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귀국 후 아들에게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치스코(이탈리아어로는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296]

어린 시절 프란치스코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고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294]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버지를 대신해 시장에서 옷감과 직물을 팔다가 걸인을 만났다. 거래 직전, 그는 물건들을 내팽개치고 걸인을 뒤쫓아가 가진 돈을 모두 주었다. 이 일로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샀고, 아버지에게도 크게 야단맞았다.[297]

1201년, 프란치스코는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1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298] 1203년, 아버지의 보석금으로 풀려난 그는 1204년 중병을 앓으며 영적 위기를 겪었다. 1205년, 페루자 정복에 나섰다가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영적으로 변화했다.[290]

이후 프란치스코는 친구들과의 연회를 피하고,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라며 가난을 찬미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나병 환자들을 간호했다. 로마 순례 후, 아시시 교외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고상의 그리스도로부터 “프란치스코야, 다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라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 가게의 옷감들을 팔아 버렸다.[292][299]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몹시 분노하여 아들을 체벌했다. 결국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도시 집정관에게 데려가 상속권을 포기시키려 했으나, 종교 문제였기에 교회 재판에 넘겨졌다. 아시시 주교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상속권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모두 포기하며, 가진 돈과 옷을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 옷을 입고 몇 달간 구걸로 연명하다가, 아시시 인근에서 2년간 참회하며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했다. 포르치운쿨라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거처였다.[299]

3. 프란치스코회 설립

기도하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1209년 성 마티아 축일에 마태오 복음서 10장 9절을 듣고 가난한 삶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290] 이후 사람들에게 회개를 설교하며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를 비롯한 많은 동행자를 얻었다. 그는 동행자들과 함께 '작은 형제회'를 이루어 단순한 삶을 살면서, 복음에 기초한 짧고 단순한 회칙인 '생활 양식'(Forma Vitae) 또는 '원회칙'(Regula Primitiva)을 만들었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새 수도회 설립 인준을 요청하여 구두 승인을 얻었다.[300],[301] 이는 프란치스코회가 이단으로 몰릴 위험을 막아준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후 형제회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212년에는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그를 따르면서 클라라회(프란치스코회 제2회)가 설립되었다.[187] 또한, 수도생활을 할 수 없는 평신도들을 위해 제3회를 설립하여, 이들도 프란치스코회의 원칙을 따르도록 하였다.[23]

3. 1. 초기 활동과 회칙

1209년 성 마티아 축일에 프란치스코는 미사 중 마태오 복음서 10장 9절을 듣고 가난한 삶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290] 그는 낡고 헤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니며 회개를 설교했고,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가 첫 동행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년 안에 프란치스코는 7명의 동행자를 얻었다. 프란치스코는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고, 동행자들을 ‘작은 형제들’(fratres minoresla)이라 불렀다.[290] 이들은 아시시 인근 리보토르토의 옛 나환자 수용소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고, 움브리아 산악 지대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290]

프란치스코는 동행자가 11명이 되자, '생활 양식' 또는 '원회칙'이라는 짧고 단순한 회칙을 만들었다. 이는 복음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인준을 요청하러 로마로 갔다.[300] 조반니 디 산 파올로 추기경의 주선으로 교황을 알현했고, 교황은 꿈에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을 부축하는 프란치스코를 보고 수도회를 구두로 인준했다.[301] 이는 발도파와 달리 이단으로 몰릴 위험을 막아주었다. '작은 형제회'는 포르치운쿨라를 본원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설교를 확산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알현한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일행들


1208년 2월, 프란치스코는 마태오 복음서의 "열두 제자 파견"을 듣고 가난에 헌신했다. 그는 거친 모직 튜닉을 입고 참회, 형제애, 평화를 설교했다. 1년 안에 11명의 추종자를 얻었고, 리보 토르토의 버려진 나병 환자 공동체에서 살며 움브리아 산악 지대를 다녔다.[7]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란치스코회의 규약을 승인하는 모습, 조토


1209년, 그는 "Regula primitiva" 또는 "원시 규율"을 만들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 허가를 구했다.[20] 조반니 디 산 파올로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황은 단체를 비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삭발례를 받았다.[21] 교황은 꿈에서 라테라노 대성전을 받드는 프란치스코를 보고 수도회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210년 4월 16일에 일어났으며, 프란치스코회의 공식적인 창립을 의미했다. "작은 형제회"는 포르치운콜라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후, 형제들은 리보톨토의 오두막에서 병자를 돌보고 탁발과 설교를 했다. 그 후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와 성당 주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172]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의 작은 성당을 베네딕토회로부터 빌렸다.[173] 형제단은 이곳을 거점으로 규모를 확대했다.[174] 매년 성령강림절에는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와 총회를 열었다.[175] 1217년에는 국외 선교가 시작되었고, 1219년 총회에는 3,000명 또는 5,000명이 모였다.[177] 오스티아의 우고리노 추기경(후의 그레고리오 9세)이 형제단을 지원했다.[178]

프란치스코는 새에게 설교하거나[180] 늑대를 설득하는 등[181] 기적담이 전해진다.

클라라는 1212년 종려주일에 집을 나서 프란치스코에게 삭발을 받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187],[188],[189] 이는 현재 클라라회라고 불리는 프란치스코회 제2회(여자 수도회)의 시작이다. 산 다미아노 교회를 거점으로 "가난한 귀부인들"은 형제단과 함께 발전했다.[190]

프란치스코는 이슬람 세계 선교에도 의욕을 보였다. 1209년부터 1212년 사이 시리아로 향했지만 배가 난파되었고,[192] 1212년부터 1214년 사이 모로코를 목표로 했지만 병으로 돌아왔다.[193] 1219년에는 제5차 십자군이 주둔한 이집트로 건너갔다.[194] 다미에타를 포위하고 있던 십자군(다미에타 포위전)에게 전투 중지를 호소했지만 환멸을 느꼈다.[195] 술탄 알-카밀과 회견하여 개종을 요구했지만, 술탄은 응하지 않았다.[196] 프란치스코는 이슬람 율법학자와의 신명 재판을 제안했다.[197]

''꽃다발''


프란치스코 부재 동안, 형제단 내에서 규율 완화 움직임이 있었다.[200] 볼로냐 형제단이 건물에 정주하여 학문에 힘쓰자 프란치스코는 저주하며 전원이 나갈 것을 명령했다.[201] 그는 학구 생활은 청빈과 맞지 않고, 석조 건물 정주는 이념에 반한다고 경고했다.[202],[203] 포르치운쿨라에 건물이 세워지자 지붕 기와를 벗겨내기도 했다.[204]

형제단은 조직화가 필요했고, 규율이 너무 엄격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센병 환자 간호 의무 완화 요구도 있었다. 무원칙한 방랑 생활, 남녀 혼합 공동 생활 등 문제도 나타났다.[205] 프란치스코 사후 "온건파"와 "엄격파" 대립의 싹이 나타났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단 조정을 시도, 수양 기간을 부과하고,[206] 제3회도 조직화했다.[207] 그러나 규율 완화에는 응하지 않아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는 1220년에 총장직을 카테니에게 넘기고,[209]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1221년에 카테니가 죽자 엘리아가 총장직을 이었다.)[210]

프란치스코는 23개 조항 회칙을 기초했지만, 1221년 총회와 호노리우스 3세의 인가를 얻지 못했다. ("인가받지 못한 회칙" 또는 "제1회칙")[211]

그는 폰테콜롬보 은둔처에서 우골리노 추기경 조언을 받아 회칙을 고쳐 썼다. 1223년 총회에서 승인된 이 회칙은 "인가된 회칙" 또는 "제2회칙"이라 불린다.[212] 이후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관상으로 나날을 보냈다.

1223년 크리스마스에 그레치오 산중에서 베들레헴을 재현, 마구간과 구유, 황소와 나귀를 설치하고 미사를 거행했다.[213]

1224년 라 베르나 산중에서 육익 천사로부터 성흔을 받았다.[214] 이는 그리스도 모방을 철저히 하려 했던 프란치스코의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는 기적이다.

3. 2. 교황의 인가

1209년 프란치스코는 성 마티아 축일 미사 중 마태오 복음서 10장 9절을 듣고 가난한 삶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했다.[290] 그는 낡고 헤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복음을 전파했으며, 곧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를 비롯한 동행자들이 생겨났다.[290]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되지는 않았고, 동행자들을 ‘작은 형제들’(fratres minoresla)이라 불렀다.[290] 이들은 아시시 인근의 버려진 나환자 수용소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고, 움브리아 산악 지대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290]

프란치스코는 동행자가 11명이 되자, 복음에 기초한 짧고 단순한 회칙인 '생활 양식'(Forma Vitae) 또는 '원회칙'(Regula Primitiva)을 만들었다. 이 회칙의 주요 내용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새 수도회 설립 인준을 요청하기 위해 11명의 동행자와 로마로 갔다.[300] 그들은 아시시 교구장 귀도 주교와 조반니 디 산 파올로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황을 알현했다. 교황은 처음에는 회칙의 엄격함을 이유로 인준을 유보했으나, 꿈에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을 받치는 프란치스코를 보고 그가 교회를 쇄신할 인물임을 깨닫고 다음날 구두로 규칙과 수도회를 인준했다.[301] 이는 발도파와 달리 이단으로 몰릴 위험을 막아준 중요한 결정이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포르치운쿨라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3. 3. 클라라회와 제3회 설립

1211년, 아시시의 성 루피노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들은 젊은 귀족 여성 클라라는 그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녀의 사촌 루피노 또한 합류하려 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1212년 3월 28일 밤, 클라라는 몰래 가족의 궁전을 떠났다.[22]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콜라에서 그녀를 맞이했고, 이를 통해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클라라회)를 설립했다. 그는 클라라에게 자신의 것과 유사한 의복인 수도복을 입힌 후, 그녀와 여동생 카테리나, 그리고 다른 젊은 여성들을 적절한 수도원을 마련할 때까지 근처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머물게 했다. 이후 그는 그들을 산 다미아노로 옮겨 몇 채의 작은 오두막이나 작은 방에 거처하게 했다. 이곳은 제2 프란체스코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 되었다.[7]

그 후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일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회 형제자매 제3회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평신도나 성직자로 구성되었으며, 회원들은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수도 서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프란치스코회의 원칙을 준수했다. 머지않아, 제3회는 현재 재속 프란치스코회로 불리며 이탈리아를 넘어 성장했다.[23]

아시시의 귀족의 딸인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공감하여 1212년 종려주일 밤에 다른 여성과 함께 집을 나섰다.[187] 프란치스코에 의해 삭발을 한 후, 인근 여자 수도원에 몸을 의탁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수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188] 병자 등에 대한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189] 현재 클라라회라고 불리는 프란치스코회 제2회(여자 수도회)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윽고 주교 귀도가 산 다미아노 교회를 제공하면서, 그곳을 거점으로 "가난한 귀부인들"은 형제단과 함께 발전해 나갔다.[190]

4. 전교 활동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꿈 속에서 쓰러지려는 교회를 붙잡아 세우는 성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준 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는 지원자 수가 빠르게 증가하였다.[302] 1209년 아시시의 클라라는 산 루피노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아 클라라회를 설립하였다.[302]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은 평신도들을 위해 '회개하는 형제자매회'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3회(오늘날의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여 평신도와 사제들이 일상 생활에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였다. 프란치스코회는 이탈리아를 넘어 다른 나라에도 전파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밖으로 나가 선교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며,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모로코로 선교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프란치스코 부재 동안, 형제단 내에서는 규율 완화 움직임이 나타났다. 프란치스코는 학문 생활이 청빈과 선교에 맞지 않고, 석조 건물 정주는 형제단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 경고했다. 또한, 한센병 환자 간호 의무 완화 등의 요구도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단 내부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규율 완화에는 응할 수 없었다. 결국 1220년에 총장직을 넘기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1221년 회칙을 기초하였으나 총의를 얻지 못했고, 1223년 수정된 회칙이 승인되었다.

4. 1. 이탈리아 밖으로의 선교 시도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하고서, 이탈리아 밖으로 나가 설교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다. 1212년 봄 막바지에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달마티아 해안에 강한 폭풍우가 불어닥쳐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면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3년 5월 8일, 키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 백작으로부터 라 베르나 산을 기증받았다. 오를란도 백작은 라 베르나 산이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속죄와 기도 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 설명하였다.[303][304] 몇 달 뒤 프란치스코가 파견한 두 수사가 이 산을 답사하였고, 프란치스코회원들은 기도와 관상에 아주 적합한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는 곳에 거처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라 베르나 산은 훗날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장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04]

이집트의 술탄 앞에서 불의 심판을 제안하는 성 프란치스코


같은 해, 프란치스코는 이슬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으나, 스페인에서 병에 걸려 좌절되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다시 방문하였고, 이 시기에 도미니코회의 창설자인 도미니코를 만났던 것으로 추정된다.[289] 1217년 프랑스에 가겠다고 선언했으나, 프란치스코를 오랫동안 지지하였던 세니의 우골리노 추기경(훗날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은 이탈리아는 아직도 그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며 반대하였다.

1219년, 수사 한 명과 함께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집트술탄을 개종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당시 도착한 곳은 다미에타라는 도시로 십자군이 1년 이상 포위 공격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술탄은 살라딘의 조카로서 1218년 부친의 뒤를 이은 알카밀이었다. 양측은 1219년 8월 29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주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305] 이때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 수사가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갔으며, 사라센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그의 막사에 지냈다.[306]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의 기록물들과 프란치스코의 초기 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술탄은 프란치스코를 상냥하게 대접하였으며,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고 십자군의 야영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307] 당시 아랍 측의 기록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전해지는 것이 없다.[308]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가 술탄 앞에서 기독교가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309]

보나벤투라는 이후 이야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들에서는 프란치스코가 주저함 없이 불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며, 조금도 화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13세기 말엽 조토에 의해 아시시에 있는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어 있다.[310] 몇몇 후기 문헌에 따르면,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지에 있는 거룩한 장소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설교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동행한 수사는 1220년 후반에 아크레에 있는 십자군 주둔지를 떠나 이탈리아행 배에 승선하였다. 프란치스코회는 1217년 엘리야 수사가 아르케에 도착한 이래 거의 계속 성지에 존재해왔다. 1333년에 맘루크 술탄으로부터 예루살렘베들레헴에 있는 몇몇 거룩한 장소들을 양도받았으며, 1342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사법적 특혜를 부여받았다.[311]

1220년 아시시 인근의 그레치오에서 프란치스코는 예수 성탄 대축일(크리스마스)을 기념하여 최초로 성탄 구유를 만들었다.[312]

4. 2. 이집트 술탄과의 만남

1219년 프란치스코는 수사 한 명과 함께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집트술탄을 개종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당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미에타라는 도시로 십자군이 1년 이상 포위 공격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술탄은 살라딘의 조카로서 1218년 부친의 뒤를 이은 알카밀이라는 사람이었다. 양측은 1219년 8월 29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주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합의하였다.[305] 이때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 수사가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갔으며, 그들은 곧 사라센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그의 막사에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306]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의 기록물들과 프란치스코의 초기 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술탄은 프란치스코를 시종일관 상냥하게 대접하였으며,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십자군의 야영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307] 당시 아랍 측의 기록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전해져오는 것이 없다.[308] 보나벤투라는 여기에 더해 프란치스코가 술탄 앞에서 기독교가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309]

보나벤투라는 이후 이야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들에서는 프란치스코가 주저함이 없이 불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며, 조금도 화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13세기 말엽 조토에 의해 아시시에 있는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어 있다.[310] 몇몇 후기 문헌들에 의하면,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지에 있는 거룩한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은 물론 그곳에서 설교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그와 동행한 수사는 1220년 후반에 아크레에 있는 십자군 주둔지를 떠나 이탈리아행 배에 승선하였다. 프란치스코회는 1217년 엘리야 수사가 아르케에 도착한 이래 거의 계속 성지에 존재해왔다. 프란치스코회는 1333년에 맘루크 술탄으로부터 예루살렘베들레헴에 소재한 몇몇 거룩한 장소들을 양도받았으며, 1342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사법적 특혜를 부여받았다.[311]

4. 3. 성지 방문

1212년 봄, 프란치스코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달마티아 해안에서 강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되면서 이탈리아로 돌아와야 했다.[303]

1219년, 프란치스코는 제5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이 1년 넘게 포위하고 있던 이집트 다미에타로 갔다. 그는 술탄을 개종시키거나 순교할 각오로 아르세의 일루미나투스와 동행했다. 당시 이집트의 술탄은 살라딘의 조카인 알카밀이었다.[305] 1219년 8월 29일, 양측은 치열한 전투 끝에 4주간 휴전에 합의했다.[305] 이 기간 동안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는 무슬림 진영으로 넘어가 술탄에게 며칠 동안 머물렀다.[306]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 기록과 프란치스코의 초기 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술탄은 프란치스코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십자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307] 아랍 측 기록에는 이 만남에 대한 언급이 없다.[308]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가 술탄 앞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불 속에 들어가려 했다고 전한다.[309]

일부 후기 문헌에 따르면,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지 방문과 설교를 허락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는 1220년 후반에 아크레의 십자군 주둔지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프란치스코회는 1217년부터 성지에 거의 계속 존재해왔다. 1333년 맘루크 술탄으로부터 예루살렘베들레헴의 성지를 양도받았고, 1342년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사법적 특혜를 받았다.[311]

4. 4. 성탄 구유

1220년 아시시 인근의 그레치오에서 프란치스코는 예수 성탄 대축일(크리스마스)을 기념하여 최초로 성탄 구유를 만들었다.[312] 그의 성탄 구유는 당시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예수의 탄생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성탄 구유를 본 많은 사람에게 생동감을 주기위해 살아있는 동물들을 구유 안에 집어 넣었다.[312]

5. 프란치스코회 개편과 죽음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었던 상처와 같은 성흔(오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1224년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을 준비하며 베르나 산에서 40일간 단식 기도를 하던 중, 성십자가 현양 축일에 환시를 체험하고 양손, 양발, 옆구리에 성흔을 받았다.[290] 당시 함께 있었던 레오 수사는 이 사건을 기록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에서 성흔 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성흔을 받은 후 프란치스코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여러 도시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포르치운쿨라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을 준비하였고, 1226년 10월 3일 해질 무렵 시편 142(141)편을 노래한 후 선종하였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하였다. 시성식 다음 날, 교황은 아시시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머릿돌을 놓았다. 1230년 5월 25일,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대성당 지하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1818년 그의 무덤이 재발견되었고, 이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하 묘소가 조성되었다. 1978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임명한 학자 위원회는 유해 조사를 통해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유해는 돌무덤 속 유리 유골함에 안치되어 있다.

5. 1. 프란치스코회의 성장과 문제점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회의 규모는 계속 커져 프랑스, 독일, 헝가리, 스페인 등지로 진출하였다. 모로코에서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베네치아를 경유해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313] 우골리노 디 콘티 추기경은 교황에 의해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탈리아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원들은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었는데, 동시대 다른 수도회들과 비교해봤을 때 프란치스코회는 매우 급속도로 규모가 커져갔지만, 그에 반해 수도회의 조직성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당초에 프란치스코가 만든 기존의 간단한 규율만 가지고는 수도회 전체를 통솔하기 힘들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는 더욱 상세한 새로운 수도규칙, 즉 ‘1221년 수도규칙’ 또는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Regula prima, Regula non bullata)을 제정하였다. 이 수도규칙은 가난과 사도적 삶에 대한 헌신을 재차 강조하였으며, 프란치스코회에 보다 체계적인 체제가 들어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220년 9월 29일, 프란치스코는 동료 수사 베드로 카타니에게 프란치스코회 총장직을 맡겼다. 그러나 베드로 수사는 5개월 후인 1221년 3월 10일에 선종하였으며, 시신은 포르치운쿨라에 매장되었다. 선종한 수사의 전구를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포르치운쿨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 생활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선종한 베드로에게 기적을 그만 멈추고 편안히 안식에 들 것을 청원하였고, 이후 기적에 대한 소식이 끊겼다. 베드로 수사가 맡았던 총장직은 프란치스코의 대리자인 엘리야 수사가 이어받았다.

2년 후,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규칙'을 수정한 수도규칙을 제정하였으며,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이 수도규칙은 ‘인준받은 수도규칙’이라고도 불리며, 현재 프란치스코회의 공식 수도규칙으로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수도규칙에 서약한다. 이 수도규칙은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교회에 대해 충실히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근본 삼아 복음의 정신 속에 살 것을 권하고 있다. 또한 수도복, 장상, 총회, 회원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수도규칙이 교황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으면서 프란치스코는 차츰 외부 활동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1221년에서 1222년 사이에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쪽으로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까지, 북쪽으로는 볼로냐까지 횡단하였다.

5. 2. 수도규칙 개정과 인가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회의 규모는 프랑스, 독일, 헝가리, 스페인 등지로 뻗어나가며 계속 커졌다. 모로코에서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베네치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313] 당시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회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조직 체계가 미흡했다. 또한, 프란치스코가 만든 간소한 규칙만으로는 수도회 전체를 이끌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는 더 자세한 새로운 수도 규칙, 즉 '1221년 수도 규칙' 또는 '인준받지 않은 수도 규칙'(Regula prima, Regula non bullata)을 만들었다. 이 규칙은 가난과 사도적 삶에 대한 헌신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프란치스코회에 보다 체계적인 체제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220년 9월 29일, 프란치스코는 동료 수사인 베드로 카타니에게 프란치스코회 총장직을 맡겼다. 그러나 베드로 수사는 5개월 후인 1221년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은 포르치운쿨라에 안장되었다. 베드로 수사의 전구를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포르치운쿨라로 몰려들었고, 이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 생활을 방해할 정도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베드로에게 기적을 멈추고 편안히 안식에 들 것을 청원했고, 이후 기적에 대한 소식은 끊겼다. 베드로 수사의 총장직은 프란치스코의 대리자인 엘리야 수사가 이어받았다.

2년 후,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 규칙'을 수정한 수도 규칙을 만들었고,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인준받은 수도 규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규칙은 현재 프란치스코회의 공식 수도 규칙이며,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규칙에 서약한다. 이 규칙은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 언급하며, 교회에 대한 충실한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바탕으로 복음 정신 속에 살 것을 권고한다. 또한 수도복, 장상, 총회, 회원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수도 규칙이 교황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으면서 프란치스코는 점차 외부 활동을 줄여나갔다. 1221년에서 1222년 사이에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쪽으로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까지, 북쪽으로는 볼로냐까지 이동했다.

5. 3. 성흔과 죽음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었던 상처가 나타나는 성흔(오상)으로 유명하다. 1224년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 29일)을 앞두고 8월 15일부터 40일 동안 베르나 산에서 단식 기도 중, 성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에 환시를 체험하고 양손, 양발, 옆구리에 성흔을 받았다. 당시 함께 있었던 레오 수사는 이 사건을 간략히 기록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에서 성흔 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290]

> “갑자기 그는 하늘로부터 찬란하고 불타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 그 천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가졌는데, 그의 날개 중 두 개는 머리 위로 뻗쳤고, 둘은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고, 다른 둘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세라핌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오상을 남겨주었다.”

성흔을 받은 후 프란치스코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눈이 반쯤 멀고 심한 병을 얻었다. 시에나, 코르토나, 노체라 등에서 치료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포르치운쿨라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마지막 시간을 성경과 영적 서적을 읽으며 보냈다. 1226년 10월 3일 해질 무렵, 시편 142(141)편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Voce mea ad Dominum)를 노래한 후 선종하였다.

1228년 7월 16일, 프란치스코회 보호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하였다. 다음 날, 교황은 아시시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머릿돌을 놓았다. 1230년 5월 25일, 유해는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으나, 엘리야 수사의 요청으로 사라센족 침입을 막기 위해 비밀에 부쳐졌다. 1818년 무덤이 재발견될 때까지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파스콸레 벨리 주도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에 신고전주의 양식 지하 묘소가 조성되었고, 1927-1930년 우고 타르치에 의해 대리석 장식을 걷어내고 현재 모습으로 재단장되었다. 1978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임명한 학자 위원회는 유해 조사를 통해 무덤이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유해는 돌무덤 속 유리 유골함에 안치되어 있다.

성흔을 받은 후, 프란치스코는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점차 쇠약해졌다.[215] 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했고, 산 다미아노 교회에서 클라라의 간호를 받기도 했다.[216]

엘리아의 설득으로 교황 의료진의 진찰을 받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218] 죽음을 직감한 그는 시에나 등에서 유언을 남기고, 포르치운쿨라로 돌아가길 원했다.[219] 성인의 유해를 탐내는 도시들을 피해 아시시 군대가 파견되어 프란치스코를 고향으로 호송했다.[220]

아시시 주교관에서 마지막 날을 보낸 후, 포르치운쿨라로 옮겨진 프란치스코는 시민들의 경호 속에 1226년 10월 3일 사망했다. 임종 때 『태양의 찬가』 제창과 『요한 복음서』 수난 부분 낭독이 있었고, 프란치스코는 땅에 깐 고행복 위에 알몸으로 누워 숨을 거두었다.[221]

유해는 아시시로 옮겨졌고, 장례 행렬은 산 다미아노 교회에서 잠시 멈춰 클라라 등이 마지막 작별을 했다.[222] 이후 산 조르조 교회에 매장되었다.[223]

프란치스코 시대에 그리스도와 같은 상처, 즉 "성흔"은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241] 교황 그레고리오 9세도 성흔을 믿지 않았고, 시성 심사에서도 고려되지 않았다.[242] 1237년 교황 칙서로 성흔이 승인되었지만,[243] 부정적인 시각은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244]

성흔을 처음 보고한 엘리아는 장소, 시일, 목격자를 언급하지 않았다.[245] 1차 자료는 만년의 프란치스코 곁을 따른 레오네가 남긴 문서인데, 위로를 구한 레오네에게 프란치스코가 축복의 말을 써준 양피지 여백에 적힌 주석이다.[247]

이에 따르면 라 베르나 산에서 프란치스코는 천사 세라핌을 만나 대화하며 평안을 얻고 "스티그마"를 얻었다.[248]

첼라노의 토마스는 "스티그마"를 성흔으로 해석, 세라핌에게서 받았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천사와의 대화로 위로받은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본뜬 천사에게 성흔을 받는 이야기로 변모한 것이다.[251]

성흔의 진위와 관계없이, 신봉자들에게 성흔은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그리스도 모방"의 최종 형태였다. 동료들은 프란치스코가 복음대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반복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만년을 새로운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기억했다.[253]

5. 4. 시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지 며칠 후, 작은 형제회의 총장인 엘리아는 전 세계 회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프란치스코의 성흔을 보고했다.[224]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묘로 몰려들었고, 많은 기적이 보고되었다. 1228년 7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하였다.[225] 이는 프란치스코가 사망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이루어진 신속한 조치였으며, 그레고리오 9세는 추기경 시절 프란치스코를 보호하고 조언했던 우골리노 추기경이었다.[223] 1230년에는 엘리아가 세운 웅장한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지하로 이장되었다.[223]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하였다. 시성식 다음날, 교황은 아시시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머릿돌을 놓아 축성하였다. 1230년 5월 25일,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으나, 엘리야 수사의 요청에 따라 사라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프란치스코의 정확한 매장 장소는 1818년 그의 무덤이 재발견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파스콸레 벨리의 주도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하 묘소가 들어설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성당 지하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우고 타르치에 의해 대리석 장식을 걷어내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단장되었다. 1978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임명한 학자들의 조사 위원회는 프란치스코의 유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이 무덤이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돌로 된 무덤의 유리 유골함 안에 안치되어 있다.

6. 평가와 영향

성 프란치스코가 생전에 입었던 수도복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서양인으로서는 드물게 자연과 일체화된 성인으로서, 국가종파를 초월하여 전 세계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2013년 3월 13일, 선출된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기려 자신의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선택했다.[62][63]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이름을 선택했다고 밝혔다.[63][64][65][66]

1939년 6월 18일 교황 비오 12세프란치스코를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였다.[322]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73]

1979년 11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였다.[319]

프란치스코는 영국 성공회, 캐나다 성공회, 미국 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등 기타 개신교파에서도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일하게 10월 4일이다. 독일 개신교회에서는 프란치스코의 축일을 그가 선종한 날인 10월 3일에 지낸다.

프란치스코는 그가 지은 《태양의 찬가》 때문에 문학 평론가들에게 이탈리아 최초의 시인으로 여겨지고 있다.[323] 20세기에 익명의 사람이 작성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는 평화를 위한 기도는 한때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졌었다.[325][326]

프란치스코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시성 이후 그의 삶에 대한 숭배를 장려했으며,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미술에 등장했다.[94] 서유럽 전역의 교회와 박물관에는 17세기와 18세기에 제작된 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음악 천사를 묘사한 작품이 수없이 많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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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벤 다리오의 시 "''Los Motivos del Lobo'' ("늑대의 이유")"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끔찍한 늑대를 길들였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이 짐승보다 더 어두운 욕망을 품고 있음을 발견한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알료샤의 영적 스승 조시마를 묘사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에게 적용된 별칭인 "파테르 세라피쿠스"를 언급한다.
  • 헨리 아담스의 ''몽생미셸과 샤르트르''에서 "신비주의자들"에 관한 장에서는 프란치스코를 광범위하게 논의한다.
  • ''프란체스코의 다정한 세상''은 리릭 스튜디오가 제작한 1996–97년 비디오 출시 기독교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프란체스코와 그의 말하는 동물 친구들이 산 다미아노 교회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02]
  • 리치 멀린스는 미치 맥비커와 함께 뮤지컬 ''Canticle of the Plains''를 공동 집필했다. 1997년에 발매된 이 작품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바탕으로 했지만, 서부극 이야기로 그려졌다.
  • 버나드 맬라무드의 소설 ''보조원''(1957)에는 20세기 중반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 프랭크 알파인이 등장한다.
  • G. K. 체스터턴의 저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이다.[103]

6. 1. 그리스도의 모방자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그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프란치스코처럼 헌신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314] 프란치스코는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었으며,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천국에서 온 어떤 성인과 어느 가난한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먼저 사제에게 가서 경의를 표하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겠습니다. 그리고 성인에게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이 사제의 손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분을 만집니다. 이 손은 인간 이상의 거룩함을 지니고 있습니다.’”[292]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던 동료 수도자들은 가난을 매우 사랑하였다. 가난은 그의 본질적 행로였으며, 생전에 마지막으로 저술한 책에서도 자신이 세운 프란치스코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절대적으로 가난한 삶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292]

프란치스코는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찬미하였다. 그는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에게 ‘형제’나 ‘자매’라고 불렀으며, 새들에게 설교를 하였다.[315] 심지어 그는 마을 주민들을 공격한 늑대에게 가서 만약 주민들이 늑대가 굶지 않게 양식을 주면 공격을 중단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가 직접 지은 '태양의 찬가'를 보면 태양과 불, 바람 등을 ‘형님’으로, 달과 별들, 물, 땅, 죽음 등을 ‘누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앓고 있는 만성 질병들을 ‘자매들’이라고 불렀다. 프란치스코의 자연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기인한다는 견해가 있다.[316] 자연에 대한 경외심, 피조물과의 친교, 기사도 정신, 동물 보호 등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는 독창적인 모습이 전통적인 금욕 생활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것이다.[317]

프란치스코의 이집트 방문과 이슬람교도와의 친선 관계 도모는 그가 선종한 후에도 그 영향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십자군이 세운 나라들이 차례대로 몰락하여 성지가 이슬람교 세력권에 넘어간 이후에도 그리스도교 성지의 관리인 자격으로 계속 체류하는 것을 허락받은 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유일하였다.

프란치스코와 다른 사람들이 나병 또는 천연두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일부 후기 자료에 따르면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지에서 성지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다. 안전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가 아크레의 십자군 진영을 떠났고, 그곳에서 1220년 후반에 이탈리아로 향했다는 것이다.

겸손을 위해 반나체로 이끌리는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재현하고 문자 그대로 그의 사역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분의 하느님은 여러분의 육신에 속해 있으며,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이웃, 모든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라고 설교했다.[39]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청빈을 찬양하고 숭배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그의 성격의 중심이었고, 그의 마지막 저작인 유언에서 절대적인 개인적 및 단체 청빈이 그의 수도회 회원들에게 필수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연 자체가 하느님의 거울이라고 믿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을 그의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고, 새들에게 설교하기도 했으며[49][40], 일부 지역 주민들이 늑대에게 먹이를 주기로 동의한다면 구비오의 늑대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하느님 아래 형제애에 대한 그의 깊은 감각은 다른 사람들을 포용했다.

프란치스코의 이집트 방문과 이슬람 세계와의 화해 시도는,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는 십자군 왕국이 몰락한 후, 모든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 프란치스코회가 성지에서 머물면서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여 "성지 큐스토디안"으로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다.[41]

프란치스코에 관한 문헌 자료는 수없이 많으며, 그중에는 스승을 기리는 제자 수도사들이 기록한,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I Fioretti'')이라는 제목의 14세기에 완성된 전기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거기에 기록된 프란치스코의 삶은 "탁발 수도사의 모범"이다.[226]

프란치스코의 사상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임종 시에 불렸다는 "피조물의 찬가"가 있다. "모든 것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라, 빛의 형제(동포)인 날을 찬양하라"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 (형제인) 태양의 찬가"라고 불리기도 한다.[227] 거기서는 태양, , 바람, , , 공기, 대지를 "형제자매"로 하여 주님께 대한 찬미에 참여시키고, 심지어 죽음마저 "자매인 죽음"으로 맞이했다. 프란치스코 자신의 내면에서는, 청빈과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조화되어야만, 간소하고 자연스럽고 순박한 밝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226]

6. 2. 가난과 자연에 대한 사랑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그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프란치스코처럼 헌신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314] 프란치스코는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었으며,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던 동료 수도자들은 가난을 매우 사랑하였다. 가난은 그의 본질적 행로였으며, 생전에 마지막으로 저술한 책에서도 자신이 세운 프란치스코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절대적으로 가난한 삶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292]

프란치스코는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찬미하였다. 그는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에게 ‘형제’나 ‘자매’라고 불렀으며, 새들에게 설교를 하였다.[315] 그는 마을 주민들을 공격한 늑대에게 가서 만약 주민들이 늑대가 굶지 않게 양식을 주면 공격을 중단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가 직접 지은 '태양의 찬가'를 보면 태양과 불, 바람 등을 ‘형님’으로, 달과 별들, 물, 땅, 죽음 등을 ‘누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앓고 있는 만성 질병들을 ‘자매들’이라고 불렀다.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세상은 본래 하느님에 의해 좋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지만, 인류의 원죄 때문에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설파하였다. 그는 인간과 동물을 막론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모든 피조물로서 행해야 할 의무를 가르쳤으며,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들의 관리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로서도 자연을 보호하고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설교하였다.[318] 1979년 11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였다.[319]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에 출판된 《잔꽃송이》(Fioretti)에는 자연을 향한 그의 애정을 알아볼 수 있는 각종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하루는 프란치스코가 몇몇 수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우연히 도로 양 옆에 있는 나무 위에 수많은 새가 가득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프란치스코는 동료 수사들에게 “제가 저의 자매들인 새들에게 설교하러 가는 동안 잠시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새들에게 가서 설교하였다.[318] 그러자 새들이 프란치스코 주위로 날아와서 그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고 한다.

《잔꽃송이》에 기재된 또 다른 일화는 프란치스코가 며칠 동안 머물렀던 구비오라는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구비오에서는 늑대 한 마리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습격하는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늑대를 잡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으나, 같이 올라갔던 사람들은 모두 늑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 프란치스코는 늑대를 발견한 뒤 십자 성호를 긋고 이리 오라고 명령하자, 늑대는 입을 다물고 프란치스코의 발 앞에 다가가 엎드렸다. 프란치스코는 늑대에게 “늑대 형제님, 당신은 이 도시에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 그러나 늑대 형제님, 저는 당신이 여기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늑대를 도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시민들은 놀랐으나 프란치스코의 중재 아래 늑대와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되었다. 늑대는 배가 고파서 나쁜 짓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늑대의 처지를 고려하여 정기적으로 먹이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 대가로, 늑대는 더 이상 가축이나 사람을 습격하지 않기로 하였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도시에 사는 개들에게도 다시는 늑대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82년 세계 환경의 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피조물들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사랑과 보살핌을 현대 가톨릭 신자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1990년 1월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 “피조물들이 지닌 고귀함에 대해 진실하고 깊은 존중심을 가짐으로써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라고 설명하였다.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것은 이단을 귀순시키거나, 수상쩍은 성직자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작은 새나 늑대 등을 포함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형제자매처럼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고, 단순함과 겸손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228] 프란치스코는 토끼, 매미, , 비둘기, 당나귀, 늑대에게 말을 걸어 마음이 잘 통했다고 전해진다.[228] 물고기에게 설교를 시도하고, 늑대를 회심시킨 전설이 알려져 있으며, 특히 작은 새에게 설교한 이야기가 유명하다.[229][226]

1978년부터 2005년까지 교황직에 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프란치스코를 "자연 환경 보호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했다.[232]

프란치스코에게는 인류뿐만 아니라 천지의 삼라만상 모두, 유일신인 하늘의 아버지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는 형제자매였다.[227] 이러한 "만물 형제의 사상"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수도회를 관통하는 것이며,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가 "프리아(friar)"라고 불리는 이유이다.[227][233]

프란치스코의 수도 생활에 관한 사상은 프란치스코회의 회칙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더욱 철저한 복종·청빈·정결을 지키며 살았다.[227]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칭송하는 것에 있어서는 철저하여, 물질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거나 지적인 풍요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234]

6. 3. 생태계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코는 세상이 하느님에 의해 좋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구원이 필요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였다. 그는 인간과 동물을 막론하고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관리자로서 자연을 보호하고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설교하였다.[318] 그는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찬미하였으며,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에게 '형제'나 '자매'라고 불렀다.[315] '태양의 찬가'를 보면 태양과 불, 바람 등을 '형님'으로, 달과 별, 물, 땅, 죽음 등을 '누님'으로 부르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생애에는 동물이나 자연 환경과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318] 《잔꽃송이(Fioretti)》에는 자연을 향한 그의 애정을 알아볼 수 있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자 새들이 주위로 날아와 그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었다고 한다.

《잔꽃송이》의 또 다른 일화는 구비오라는 도시에서 늑대 한 마리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습격하여 골칫거리였다는 이야기다. 프란치스코는 늑대를 만나 십자 성호를 긋고는 이리 오라고 명령하였고, 늑대는 그의 발 앞에 다가가 엎드렸다. 프란치스코는 늑대와 도시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여, 늑대는 더 이상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고, 사람들은 늑대에게 정기적으로 먹이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979년 11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였다.[319]

6. 4. 축일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은 10월 4일이다. 로마 보편 전례력에는 그가 성흔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 9월 17일로 지정되었으나, 1604년에 폐지되었다가 1615년에 재지정되었다. 1969년판 로마 미사 경본에서는 의미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각인 축일이 삭제되고,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증거자 축일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각인 축일은 전통 로마 미사 경본과 일부 지역 교회 및 프란치스코회 전례력에만 남아 있다.[321]

프란치스코는 영국 성공회, 캐나다 성공회, 미국 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등 기타 개신교파에서도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도 똑같이 10월 4일이다. 독일 개신교회에서는 프란치스코의 축일을 그가 선종한 날인 10월 3일에 지낸다.

6. 5. 이탈리아의 수호성인

1939년 6월 18일 교황 비오 12세는 사도적 서한 《Licet Commissa》를 발표하여 프란치스코를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였다.[322] 비오 12세는 또한 1949년 5월 5일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 가진 사목 담화에서 프란치스코와 가타리나 두 성인을 재차 언급하며 칭송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73]

6. 6. 문학과 예술

프란치스코는 그가 지은 《태양의 찬가》 때문에 문학 평론가들에게 이탈리아 최초의 시인으로 여겨지고 있다.[323] 그는 평민들도 자신의 언어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라틴어 대신 움브리아 방언으로 자주 글을 썼다.[324] 20세기에 익명의 사람이 작성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는 평화를 위한 기도는 한때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졌었다.[325][326]

프란치스코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시성 이후 그의 삶에 대한 숭배를 장려했으며,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미술에 등장했다.[94]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교회에 그를 성스러운 인물과 함께 묘사하거나 그의 삶의 에피소드를 담은 많은 작품을 의뢰했다. 초기의 거대한 프레스코 연작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존재한다.

서유럽 전역의 교회와 박물관에는 17세기와 18세기에 제작된 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음악 천사를 묘사한 작품이 수없이 많다. 이러한 묘사의 제목은 "위로받는", "안도하는", "황홀경에 빠진" 또는 "환희에 찬" 프란치스코를 묘사하는 등 매우 다양하며, 음악 천사의 존재 여부는 언급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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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벤 다리오의 시 "''Los Motivos del Lobo'' ("늑대의 이유")"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끔찍한 늑대를 길들였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이 짐승보다 더 어두운 욕망을 품고 있음을 발견한다.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알료샤의 영적 스승 조시마를 묘사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에게 적용된 별칭인 "파테르 세라피쿠스"를 언급한다.
  • 헨리 아담스의 ''몽생미셸과 샤르트르''에서 "신비주의자들"에 관한 장에서는 프란치스코를 광범위하게 논의한다.
  • ''프란체스코의 다정한 세상''은 리릭 스튜디오가 제작한 1996–97년 비디오 출시 기독교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프란체스코와 그의 말하는 동물 친구들이 산 다미아노 교회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02]
  • 리치 멀린스는 미치 맥비커와 함께 뮤지컬 ''Canticle of the Plains''를 공동 집필했다. 1997년에 발매된 이 작품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바탕으로 했지만, 서부극 이야기로 그려졌다.
  • 버나드 맬라무드의 소설 ''보조원''(1957)에는 20세기 중반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 프랭크 알파인이 등장한다.
  • G. K. 체스터턴의 저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이다.[103]


프란치스코에 관한 문헌 자료는 수없이 많으며, 그중에는 스승을 기리는 제자 수도사들이 기록한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I Fioretti'')이라는 제목의 14세기 전기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거기에 기록된 프란치스코의 삶은 "탁발 수도사의 모범"이다.[226]

프란치스코의 사상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임종 시에 불렸다는 "피조물의 찬가"가 있다. "모든 것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라, 빛의 형제(동포)인 날을 찬양하라"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 (형제인) 태양의 찬가"라고 불리기도 한다.[227] 거기서는 태양, , 바람, , , 공기, 대지를 "형제자매"로 하여 주님께 대한 찬미에 참여시키고, 죽음마저 "자매인 죽음"으로 맞이했다. 프란치스코 자신의 내면에서는, 청빈과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조화되어야만 간소하고 자연스럽고 순박한 밝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226]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서양인으로서는 드물게 자연과 일체화된 성인으로서, 국가종파를 초월하여 전 세계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마더 테레사, 요한 바오로 2세, 마거릿 대처 등 저명한 종교가와 정치가가 공공 장소에서 인용하여 청중과 함께 낭송하는 등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코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쓰인 책이나 팸플릿, 엽서도 많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프란체스코 본인의 작품이 아니다. 초출은 1912년 프랑스어에 의한 것으로, 오해로 인해 성 프란치스코의 작품으로 전해져 퍼진 것이다.[238]

그렇다고는 해도, 박애와 관용의 정신을 역설로 설하는 내용은 프란체스코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져, 오해가 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름으로 애창되고 있다.[239][240]

참조

[1] 웹사이트 Tunic Worn by Saint Francis Identified https://www.livescie[...] 2023-12-18
[2] 웹사이트 St. Francis and His Tunic https://academic.oup[...] 2023-12-18
[3] 웹사이트 7 Religious Talk About the Habits They Wear https://www.ncregist[...] 2023-12-18
[4] 웹사이트 St Francis of Assisi: patron saint of the poor https://www.thetimes[...] News Corporation 201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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