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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폴란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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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폴란드 관계는 15세기부터 시작되어 상업, 외교, 군사 동맹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해 왔다. 16세기에는 잉글랜드와 폴란드의 외교 관계가 절정에 달했으며,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 상인들이 폴란드에 무역 거점을 마련했다. 18세기에는 폴란드의 분할에 대해 영국 정부의 무관심이 있었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19세기에는 영국-러시아 관계가 냉랭해지면서 폴란드 독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세기에는 나치 독일의 부상에 따라 양국 관계가 급진전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사 동맹을 맺어 함께 참전했다. 냉전 시기에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지만, 냉전 이후 민주화된 폴란드는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방, 유럽 연합 등에서 협력하고 있다. 현재 영국은 폴란드 상품의 주요 수입국이며, 양국은 대사관 및 총영사관을 통해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여러 도시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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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폴란드 관계
지도
기본 정보
관계 유형양국 관계
국가영국
폴란드
외교 관계
영국 대사관주 폴란드 영국 대사관
폴란드 대사관주 영국 폴란드 대사관
역사
상호 인정1919년
제2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망명 정부는 런던에 기반을 둠
경제
무역 관계영국은 폴란드에 중요한 투자국이며, 폴란드 또한 영국과의 무역 관계를 강화하고 있음
주요 수출품폴란드는 주로 기계류, 운송 장비, 화학 제품, 식품 등을 영국에 수출
주요 수입품영국은 폴란드로부터 주로 자동차, 가전 제품, 가구 등을 수입
문화 및 사회
폴란드 이민자영국 내 상당한 규모의 폴란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는 유럽 연합 가입 이후 더욱 증가함
문화 교류양국 간 문화 교류가 활발하며, 폴란드 영화제,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영국에서 개최됨
교육 협력양국 대학 간 교환 학생 프로그램 및 연구 협력이 활발히 진행 중
정치
협력 관계유럽 연합 및 NATO 회원국으로서 다양한 국제 문제에 대해 협력하고 있음
브렉시트브렉시트 이후 양국 관계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가 발생하고 있으며, 미래 관계 설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

2. 역사

영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상업과 외교를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16세기와 17세기에는 양국 간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 상인들이 폴란드에 정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폴란드 분할 시기 영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며 폴란드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세기 들어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영국 내에서 폴란드 독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으나, 실질적인 지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양국은 나치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동맹 관계를 맺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가 런던에 수립되고 많은 폴란드 군인들이 영국군과 함께 싸웠다. 전쟁 이후 냉전 시대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속한 폴란드와 서방 세계의 영국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냉전 종식과 폴란드의 민주화 이후, 양국 관계는 다시 긴밀해졌다. 폴란드의 유럽 연합 가입 과정에서 영국은 폴란드 노동자들의 이동을 초기에 허용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이후 국방 및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에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1. 중세 시대

14세기에 몇몇 폴란드 상인들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1]

본격적인 양국 관계는 15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 역사가 오스카르 할레키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여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 가장 이른 공식적 교류 기록 중 하나이다.[2] 이후 영국-폴란드 관계는 주로 상업과 외교 분야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16세기에 양국 관계는 더욱 발전했다. 1554년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과 스페인펠리페 2세 국왕이 결혼했을 때, 폴란드의 크시슈토프 바르셰비츠키(Krzysztof Warszewicki)가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메리 1세 사후 그녀의 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자, 개신교 신자였던 그녀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에 맞서는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전쟁에 돌입하자, 폴란드의 항구 도시 그단스크에서는 잉글랜드 및 네덜란드 상인들과 스페인 상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단스크 시 당국은 이들에게 도시 내 분쟁 중단을 요구했다.

17세기에는 약 20명의 스코틀랜드 상인들이 폴란드에 무역 거점을 마련했다.

2. 2. 16-17세기

16세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잉글랜드 왕국 간의 상업 및 외교 관계가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1554년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과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결혼식에는 폴란드의 크시슈토프 바르셰비츠키(Krzysztof Warszewickipol)가 참석하여 증인이 되기도 했다. 바르셰비츠키는 이후 저명한 폴란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579년에 설립된 영국 이스트랜드 회사는 양국 간의 무역을 촉진했으며, 이 시기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에 이어 폴란드의 두 번째로 큰 해상 무역 파트너였다.[3] 폴란드는 주로 잉글랜드에서 천을 수입했고, 잉글랜드는 폴란드로부터 곡물, 아마, 철, 재, 타르, 선박 로프, 조선용 목재 등을 수입했다.[3]

메리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개신교도로서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맞서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면서, 영국 해군과 네덜란드 왕립 해군의 사략선들이 폴란드로 향하는 스페인 선박까지 나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폴란드의 주요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와 스페인 간의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 그단스크시는 파벨 지알린스키(Paweł Działyńskipol)를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 사절로 보내 스페인 선박 공격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알린스키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상인 및 상품에 대한 금수 조치를 거론하며 다소 직설적인 태도를 보였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결국 사절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영국의 외교관과 상인들은 지중해에서 스페인 정보원이나 무역 경쟁자를 피하기 위해 폴란드를 경유하여 중동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다.[4]

그단스크의 잉글리쉬 하우스, 1640-1690년 영국 상인들의 전 회합 장소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폴란드 이주가 더욱 활발해졌다. 이미 1380년대부터 시작된 스코틀랜드인의 이주는 16세기와 17세기에 크게 늘어나면서 폴란드의 스코틀랜드인 공동체를 형성했다.[5] 약 20명의 스코틀랜드 무역상이 폴란드에 무역 거점을 마련했으며, 이들은 "영국 무역 대리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2. 3. 18세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때 강대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폴란드를 다스리던 작센 출신 왕들은 외교 업무를 주로 작센에서 처리하며 폴란드 자체의 외교 관계에는 비교적 소홀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1744년부터 1746년 사이, 영국 정부는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간의 동맹 조약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 조약은 영국 하원에서 "우호 및 동맹 조약"으로 불렸으며, 영국이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며 참전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 체결되었다. 폴란드는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폴란드 국왕을 겸하고 있던 작센 선제후가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조약은 "폴란드 공화국"의 이름으로 서명되었다.

1762년 아우구스투스 3세가 사망한 후, 1764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새로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영국의 조지 3세는 1765년 영국 의회 연설에서 그의 선출을 언급하기도 했으나,[6] 이후 폴란드가 겪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들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1772년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에 의해 자행된 제1차 폴란드 분할에 대해 조지 3세는 1772년과 1773년 의회 연설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789년에는 프로이센이 폴란드의 포메른 지역을 점령하고, 여전히 폴란드 영토였던 항구 도시 그단스크를 통과하는 폴란드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일이 발생했다. 폴란드와의 무역에 이해관계가 있던 영국은 폴란드가 그단스크와 토룬을 프로이센에 양도하는 대신, 그단스크 항구의 자유로운 사용권을 보장받고 프로이센의 관세를 낮추도록 중재하려 했으나, 폴란드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7]

조지 3세는 이후 1793년의 제2차 폴란드 분할과 1795년의 제3차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의회 연설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분할 행위에 대해 공식적인 외교적 항의조차 하지 않자, 당시 영국과 유럽 대륙의 많은 사람들과 후대의 폴란드 역사 학자들은 영국이 폴란드의 운명에 무관심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8] 이러한 영국의 태도는 강대국들과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는 실리적인 계산 때문이었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폴란드 스트리트 (Poland Street), 런던 소호 지구의 모습


그러나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무관심 속에서도, 조지 3세 본인이나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일부 영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개인적인 서신이나 출판물을 통해 폴란드 분할과 그로 인한 유럽의 힘의 균형 붕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2. 4. 19세기

19세기 들어 악화된 영국-러시아 관계는 영국이 폴란드 독립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되었다.[1][2] 빈 회의 당시, 1812년부터 1822년까지 영국 외무부 장관이었던 캐슬레이 경은 폴란드의 독립 회복을 강력히 지지했으나, 영국은 자국의 다른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에서의 입지 확보를 위해 결국 이 입장을 철회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내내 냉랭한 양국 관계는 영국 내에서 폴란드 독립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켰으며,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억압받는 민족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2]

2. 5.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시, 영국은 연합국인 프랑스, 미국과 함께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동맹국에 맞서 싸운 소수 민족들을 지원하며 폴란드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은 폴란드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과도한 영토 할양이 향후 독일을 자극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로이드 조지는 그단스크(단치히)를 폴란드 영토가 아닌 자유 도시 국가로 만들고, 상 실레지아 주민투표를 실시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 문제 역시 양국 간 주요 이견 사항이었다.[9]

폴란드-소련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폴란드를 지지했으나, 전쟁보다는 평화적 해결을 선호했다. 커즌 경은 폴란드의 동부 국경선으로 커즌선을 제안하며 중재에 나섰지만, 이 제안은 폴란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폴란드는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국경을 동쪽으로 확장했다. 로이드 조지는 커즌선 서쪽 지역에 대한 소련 붉은 군대의 공격에 대해서는 폴란드를 지원했지만,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목표로 했던 과거 분할 이전의 국경을 회복하려는 시도에는 반대했다.[9]

1923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 주재 영국 대사관이 있던 바르샤바의 브라니츠키 궁전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영국 내에서는 폴란드의 팽창주의 정책과 소수 민족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특히 영국 좌파 진영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반면, 영국 우파는 폴란드가 소련의 확장을 막는 완충 지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같은 시기 폴란드 내에서 영국에 대한 인식은 다소 양면적이었으며, 당시 폴란드는 영국보다는 프랑스독일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첫 런던 주재 폴란드 대사관은 1929년에야 설립되었다.

나치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히 변화했다. 공동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영국과 폴란드는 우호 관계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31일, 영국은 폴란드에 독립 보장을 약속했다. 이어 8월 25일에는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표면적으로는 유럽 내 어떤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발생할 경우 상호 지원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비밀 의정서를 통해 사실상 나치 독일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임을 명확히 했다.

2. 5. 1. 제2차 세계 대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병합 이후 영국은 기존의 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병합할 경우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39년 3월, 영국은 독일과의 분쟁 시 육군을 대륙에 파병하지 않고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에 의존하려던 기존 계획을 수정하여, 동원 33일 이내에 2개 사단으로 구성된 2개 군단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는 32개 사단을 파병할 계획을 세웠다.[10]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폴란드와의 상호 방위 조약을 이행했다. 영국은 즉시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시작했으며, 9월 4일에는 영국 공군이 크리그스마리네 군함을 겨냥하여 빌헬름스하펜 공습을 감행했다. 영국 원정군(BEF)은 영국 본토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제1군집단에 배속되어 프랑스-벨기에 국경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BEF는 2개 사단 규모에 불과했고 현대적인 장비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9월 말까지 4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지만 장비 부족 문제는 여전했으며, 이는 동원 33일 후 2개 군단을 프랑스에 집결시키겠다는 초기 약속을 이행한 수준이었다.[11]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가짜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는 자국 비행장에서 발진하는 영국 공군 폭격기에 대한 독일의 보복을 우려하여 독일 본토에 대한 대규모 공중 작전을 꺼렸고, 이로 인해 영국 공군의 독일 상공 활동은 주로 선전 전단 살포와 정찰 비행에 국한되었다.[12]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1940년까지 영국-프랑스 최고 전쟁 위원회 회의에서도 유지되었다.

제303 폴란드 전투기 비행대의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모습 (1940년 10월)


폴란드 망명 정부는 1940년부터 런던에 본부를 두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루마니아 교두보 등을 통해 탈출한 약 25만 명의 폴란드 군인들은 영국군에 편입되어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전체 조종사의 12분의 1이 폴란드인일 정도로 큰 활약을 펼쳤다.

전쟁 중 폴란드인들은 독일 강제 노동 수용소의 포로가 되거나 독일 점령 하의 채널 제도에 갇히기도 했다.[13] 영국군 포로들 역시 다른 연합군 포로들과 함께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에 설치된 독일군 포로 수용소와 강제 노동 분소에 수용되었다. 폴란드 저항 운동은 이러한 영국군 포로들이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것을 돕고, 탈출한 포로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으며, 중립국인 스웨덴으로의 해상 탈출이나 헝가리를 경유하는 육로 탈출을 조직하여 동남유럽으로의 이동을 지원했다.[14][15]

독일군 포로 수용소 Stalag XXI-D에서 1941년 폴란드 저항 운동이 조직한 ''Dorsze'' 작전 중 탈출한 영국 조종사들을 기리는 우치의 기념비


한편, 지브롤터에서는 1943년 폴란드 육군 총사령관이자 폴란드 망명 정부 총리였던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는 1943년 지브롤터 리버레이터 AL523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로 결론 내려졌지만,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 논란과 이론이 존재한다.

전쟁 말기 얄타 회담에서 전후 폴란드 국경 변경 문제가 논의되면서 영국-폴란드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영국이 폴란드의 의사와는 다르게 국경 변경에 쉽게 동의한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폴란드 측은 전쟁 기간 동안 자국이 치른 막대한 희생과 기여를 고려할 때 이를 특히 부정적으로 여겼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폴란드 군인들과 난민들이 공산화된 조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영국에 정착했다.

2. 5. 2. 냉전

초기 영국의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대한 시각은 비교적 중립적이었으며, 심지어 영국 극좌파 일부는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런던의 이튼 플레이스 43번지에 계속 머물렀으며, 폴란드인들은 귀국을 강요받지 않았다.

런던에 위치한 폴란드 망명 정부 대통령 관저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고 폴란드가 그 일원이 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냉전 기간 동안 공산 폴란드 정부서방의 일원인 영국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반면, 영국 정부는 폴란드를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분리시키고 폴란드 내 개혁을 장려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2. 5. 3. 냉전 이후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폴란드는 국방 분야와 EU 내에서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영국은 2004년 폴란드의 EU 가입 이후, 폴란드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 소수의 국가 중 하나였으며, 이후 37만 5천 명의 폴란드인이 영국에서 일하기 위해 등록했다.

2011년 영국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폴란드어북아일랜드에서 영어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모국어로 나타났으며, 이는 얼스터 스코트 방언과 아일랜드어 사용자 수를 넘어선 것이다. 폴란드와 영국은 여러 차례 정부 간 협의를 개최했으며,[16][17] 마지막 협의는 2018년 12월 런던에서 당시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와 폴란드 총리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및 양국 내각 구성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18]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테리사 메이, 브뤼셀, 벨기에 2017


경제적으로 영국은 EU 외 국가 중 폴란드 상품의 최대 수입국이며, 전체 폴란드 상품 수입국 중에서는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차지한다(2019년 기준).[19]

2020년 12월, 잉글리시 채널 인근 켄트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교통 체증 당시, 폴란드는 프랑스 입국을 위한 코로나19 검사가 필요한 운전자들을 돕기 위해 의료 및 군 병력을 파견하여 1만 5천 건 이상의 검사를 지원했다.[20]

2021년 11월 2021년 벨라루스-유럽 연합 국경 위기가 발생했을 때, 영국은 폴란드의 국경 보안 강화를 지원하기 위해 영국 육군 왕립 공병대 소속 병력 150명을 파견했다.[21]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러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이 증가하자, 2022년 2월 17일 영국, 폴란드, 우크라이나는 3국 간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영국-폴란드-우크라이나 3자 협정 체결에 합의했다.[22] 당시 우크라이나 내 여론조사에서는 NATO 가입보다 폴란드 및 영국과의 관계 강화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23]

2. 6. 21세기

2000년대 들어 민주주의 국가로 새롭게 발돋움한 폴란드는 영국과 국방 문제 및 유럽 연합 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국은 2004년 폴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한 후 폴란드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으며, 이후 37만 5천 명의 폴란드인이 영국에서 일하기 위해 등록했다.

2011년 영국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폴란드어북아일랜드에서 영어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모국어가 되어 얼스터 스코트 방언과 아일랜드어 사용자를 넘어섰다. 폴란드와 영국은 여러 차례 정부 간 협의를 개최했으며,[16][17] 마지막 협의는 2018년 12월 런던에서 당시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와 폴란드 총리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및 양국 내각 구성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18]

영국은 EU 외 폴란드 상품의 최대 수입국이자 전체 폴란드 상품 수입국 중 세 번째로 큰 국가이다(2019년 기준).[19]

2020년 12월, 폴란드는 15,000건 이상의 코로나19 검사를 실시하기 위해 의료 및 군 병력을 파견하여 잉글리시 채널 밖 켄트에서 엄청난 교통 체증에 갇힌 사람들을 돕고, 프랑스 입국을 허용하여 교통 체증을 완화했다.[20]

2021년 11월, 2021년 벨라루스-유럽 연합 국경 위기 동안 영국은 150명의 영국 육군 왕립 공병대를 폴란드의 국경 보안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했다.[21]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진행된 러시아 군사력 증강에 대응하여, 2022년 2월 17일 영국, 폴란드, 우크라이나는 세 국가 간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영국-폴란드-우크라이나 3자 협정에 합의했다.[22] Rating Group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우크라이나 응답자들은 NATO 가입보다 폴란드 및 영국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선호했다.[23]

3. 경제 관계

영국과 폴란드 간의 무역은 2021년 1월 1일부터 영국-EU 무역 및 협력 협정에 의해 규제된다.[26][27]

4. 외교 관계

폴란드는 런던에 대사관을, 벨파스트, 에든버러, 맨체스터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24] 영국은 바르샤바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25]

5. 자매 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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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도시/지역폴란드 도시/지역
앰버 밸리, 더비셔주그워구프, 돌니실롱스크주
아머샴, 버킹엄셔주크르니차즈드루이, 마워폴스카주
베드퍼드, 베드퍼드셔주브워츠와베크, 쿠야비포모제주
바킹 앤드 대건햄, 런던트체프, 포모제주
베릭어폰트위드, 노섬벌랜드주트슈치안카, 비엘코폴스카주
블랙번, 랭커셔주타르누프, 마워폴스카주
버턴어폰트렌트, 스태퍼드셔주비엘라바, 돌니실롱스크주
시티오브칼라일, 컴브리아주스웁스크, 포모제주
코번트리, 웨스트미들랜즈주바르샤바, 마조프셰주
동커스터, 사우스요크셔주글리비체, 실롱스크주
던스, 스코티시보더스자간, 루부시주
일링, 런던비엘라니, 바르샤바, 마조프셰주
에든버러크라쿠프, 마워폴스카주
,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주즈워투프, 비엘코폴스카주
킹스턴어폰헐,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주슈체친, 서포모제주
커클리스, 웨스트요크셔주비엘스코비아와, 실롱스크주
랭커셔, 랭커셔주루블린, 루블린주
링컨, 링컨셔주라돔스코, 우치주
러프버러, 레스터셔주자모시치, 루블린주
니스포트탤벗, 웨일스피오트르쿠프트리부날스키, 우치주
노팅엄셔포즈난, 비엘코폴스카주
퍼스, 퍼스 킨로스비드고슈치, 쿠야비포모제주
플리머스, 데번주그디니아, 포모제주
프레스턴, 랭커셔주칼리슈, 비엘코폴스카주
샌디, 베드퍼드셔주스카르셰비, 포모제주
스컨소프, 링컨셔주오스트로비에츠시비엥토크시스키,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세프턴, 머지사이드주그단스크, 포모제주
사우스엔드온시, 에식스주소포트, 포모제주
스태포드, 스태퍼드셔주스카르지스코카미엔나,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
스윈던, 윌트셔주토룬, 쿠야비포모제주
세트퍼드, 노퍽주스카비나, 마워폴스카주
트로우브릿지, 윌트셔주엘블롱크, 바르미아마주리주
웨이크필드, 웨스트요크셔주코닌, 비엘코폴스카주
렉섬, 웨일스라치부시, 실롱스크주


참조

[1] 서적 Zarys gospodarczych dziejów Polski w czasach przedrozbiorowych
[2] 간행물 Anglo-Polish Relations in the Past
[3] 서적 Zarys gospodarczych dziejów Polski w czasach przedrozbiorowych
[4] 서적 Stosunki dawnej Rzeczypospolitej z Persją Safawidów i katolikosatem w Eczmiadzynie w świetle dokumentów archiwalnych Archiwum Główne Akt Dawnych
[5] 서적 Pod wspólnym niebem. Narody dawnej Rzeczypospolitej Muzeum Historii Polski, Bellona
[6] 문서 'House of Lords Journal Volume 31: January 1765, 1-10' http://www.british-h[...] British History Online 1765
[7] 문서 Rutkowski, p. 213
[8] 간행물 "Great Britain and Poland 1762-72." http://www.jstor.org[...]
[9] 서적 The lights that failed : European international history, 1919-1933 https://www.worldcat[...]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0] 서적 The war in France and Flanders http://www.ibiblio.o[...] Naval & Military Press 2004
[11] 서적 The war in France and Flanders http://www.ibiblio.o[...] Naval & Military Press 2004
[12] 서적 The war in France and Flanders Naval & Military Press 2004
[13] 웹사이트 WWII Occupation https://www.visitald[...] 2021-12-23
[14] 간행물 Organizacja sieci przerzutów drogą morską z Polski do Szwecji w latach okupacji hitlerowskiej (1939–1945)
[15] 웹사이트 '"Dorsze" z Poznania' https://przystanekhi[...] 2022-09-03
[16] 뉴스 UK-Poland intergovernmental consultations, 28 November 2016: Joint Communiqué https://www.gov.uk/g[...] 2020-07-26
[17] 뉴스 Polish-British intergovernmental consultations this fall - FM https://www.thefirst[...] 2020-07-26
[18] 뉴스 Polsko-brytyjskie konsultacje międzyrządowe w Londynie https://premier.gov.[...] 2020-07-25
[19] 웹사이트 Poland trade balance, exports and imports by country and region 2019 https://wits.worldba[...] 2021-12-23
[20] 뉴스 Brytyjska wiceminister dziękuje Polsce za pomoc w Dover https://wydarzenia.i[...] 2021-12-23
[21] 뉴스 Belarus migrant crisis: British army engineers to help at Polish border https://www.bbc.co.u[...] 2021-12-23
[22] 뉴스 United Kingdom, Poland and Ukraine foreign ministers' joint statement, February 2022 https://www.gov.uk/g[...] 2022-02-17
[23] 뉴스 "П'ЯТЕ ЗАГАЛЬНОНАЦІОНАЛЬНЕ ОПИТУВАННЯ: УКРАЇНА В УМОВАХ ВІЙНИ (18 БЕРЕЗНЯ 2022)" https://ratinggroup.[...] 2022-03-18
[24] 웹사이트 Embassy of Poland in London https://londyn.msz.g[...] 2023-12-27
[25] 웹사이트 British Embassy Warsaw - GOV.UK https://www.gov.uk/w[...] 2023-12-27
[26] 웹사이트 UK and EU agree Brexit trade deal https://www.gov.uk/g[...] 2020-12-24
[27] 뉴스 Brexit: Landmark UK-EU trade deal to be signed https://www.bbc.com/[...]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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