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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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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유교는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성리학이 불교를 대체하며 지배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았고, 정도전, 권근 등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론적 기반을 다졌다. 세종 시대에는 성리학 관련 서적이 간행되고 교육이 강화되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16세기 이후에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뉘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서경덕과 조식과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들도 등장했다. 후기에는 실학이 등장하여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주자학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유교는 사회 전반의 윤리관념 형성에 기여했지만, 배타적인 성격으로 인해 당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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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교
기본 정보
조선시대 성균관 문묘의 대성전
조선시대 성균관 문묘의 대성전
유형유교
기원중국
지역한반도
시대조선
창시자공자
주요 경전사서
오경
주요 인물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조광조
이황
조식
서경덕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윤휴
박세당
최한기
주요 종파성리학
양명학
관련 문화문묘
서원
향교
역사적 맥락
고려 말성리학 도입
조선 건국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
숭유억불 정책불교 억압 및 유교 장려
사림 세력 등장훈구파 견제 및 유교 정치 구현 시도
붕당 정치유교적 이상을 둘러싼 갈등 심화
실학 등장유교 경직성 극복 및 실용적 학문 추구
주요 사상
성리학이기론
심성론
수양론
양명학심즉리
지행합일
실학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
교육 기관
성균관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
향교지방의 교육 기관
서원사림 세력의 교육 기관
영향
정치왕도정치 구현 목표
사회향촌 질서 유지
문화예학 발달
윤리삼강오륜 강조
비판
형식주의유교적 이상과 현실 괴리
당쟁 심화유교적 명분 내세운 권력 다툼
여성 억압유교적 가부장제 강화
과학 기술 경시실용적 학문 소홀
현대적 의의
전통 문화 계승유교적 가치 재조명 노력
윤리적 성찰현대 사회 문제 해결 위한 유교적 지혜 모색

2. 조선 초기 유학의 발전

조선 건국과 함께 유교, 특히 성리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백이정이 주자학을 도입한 이후, 조선 초기에는 정도전, 권근 등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1] 초기 유학은 정치, 경제, 법률, 문장 등의 이념에 머물렀으나, 이후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수기지학(修己之學)으로서 성리학이 깊이 연구되었다.[2]

세종 전후 시기에는 김말·김반·김구 등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는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나와 성균관 중심의 국가성리학을 꽃피게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숭상하는 사림(士林) 학자들은 공리나 실용보다는 의리(義理)를 숭상하고, 자율성이 존중되는 향촌 질서와 가족 질서 수립에 관심을 크게 두었다. 이들은 주자가례를 도입하여 집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학풍은 특히 정몽주길재와 같은 절신(節臣)의 연고지인 영남지방에 현저했는데, 선산의 김숙자·김종직 부자가 많은 문인들을 길러내면서 15세기 말에는 뚜렷한 붕당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의 관학파 성리학이 초창기의 국가건설에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재야의 사림파 성리학은 개인의 도덕수양, 향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2. 1. 성리학의 수용과 전파

정도전권근 등은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를 장려하며 성리학의 이론적 기반을 다졌다.[2] 정도전은 《불씨잡변》(1398년)을 저술하여 불교 교리의 핵심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성리학이 실학(實學)임을 주장했다. 권근은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을 저술하여 성리학의 이론적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세종 시대에는 성리대전, 사서대전, 오경대전 등이 간행되고 과거시험 교재로 사용되면서 성리학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각급 교육기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과거시험 과목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여 성리학은 더욱 널리 퍼져 갔다.[3][4]

2. 2. 경세적 측면의 강조

초기 성리학은 정치 질서 변혁과 관련된 경세적(經世的) 측면이 강조되었다. 백성을 존중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의 발전이 그 핵심이었다. 조선 왕조 개창 과정에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무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도, 백성을 위한 혁명이 가능하다는 성리학의 가치관으로 이를 정당화했다.[4]

조선 초기에 여러 기술학이 존중된 것은 공리(功利)와 실용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와 관련이 있었다. 성리학 하나만으로는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다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

3. 조선 중기 성리학의 심화

16세기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도덕적 자기 완성을 위한 학문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훈척과 왕의 비리를 경험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정여창, 김굉필 등 초기 사림은 삼강오륜의 수신교과서인 《소학》을 중시하였고, 기묘사림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7]

이황의 《성학십도》(1568)와 이이의 《성학집요》(1575)는 왕의 수신 교과서로 편찬되었다. 특히 《성학집요》는 수신(修身)·제가(齊家)·위정(爲政)에 걸쳐 왕이 지켜야 할 왕도정치의 규범을 체계화하여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저서로 평가받는다. 박세무의 《동몽선습》과 이이의 《격몽요결》은 아동용 성리학 교재였다.[7]

주자대전은 성종 7년에 정효상과 박양신이 명나라에서 가져왔으나, 홍문관에 소장되어 민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중종 38년(1543년)에 《주자대전》이 국내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3. 1. 성리학 관련 서적의 간행

중종 38년(1543년) 주자대전(朱子大全)이 국내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면서 조선 성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까지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해 주희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했으나, 주자대전 간행 이후 주희의 모든 저술이 소개되면서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었다.[7]

명종 때에는 주자대전의 주요 내용을 발췌, 편집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이황은 1556년(명종 11) 주희의 중요한 서찰을 정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하였고,[7] 이듬해 기대승(奇大升)은 《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편찬하였다. 《주자서절요》는 1561년 성주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간행되며 주자학의 보편적인 입문서가 되었고, 일본에 전해져 일본 주자학 발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7]

《주자서절요》 이후 주자대전을 이해하기 위한 서적들이 많이 저술되었는데, 이덕홍의 주자서절요강록, 조익의 주서요류, 정경세의 주문작해, 이재의 주서강록간보, 박세채의 주자대전습유,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 김창협의 주자대천의문목, 정조의 주서백선 등이 대표적이다.[7]

3. 2. 성리학 논쟁의 전개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큰 관심을 가졌다. 도덕정치의 출발이 수기(修己)에 있는 만큼, 수기의 전제조건으로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우주자연과 인간본성을 설명했지만,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된 사단(四端)[7]이나 칠정(七情)[8]과 같은 심학(心學)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황, 기대승, 김인후, 이항, 노수신, 이이, 성혼 같은 학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하는 가운데 인간본성에 대한 인식을 깊이 가질 수 있었다. 이는 동양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

16세기 중엽부터 활발한 철학논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학파이이의 학설을 추종하는 기호학파가 그것이다.

이황은 선배학자인 이언적의 철학사상을 발전시켜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성립시켰다. ‘이(理)’는 우주만물의 보편적 원리인 형이상(形而上)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물현상인 형이하(形而下)의 ‘기(氣)’는 ‘이’의 발현이며, ‘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를 절대시하는 주리론은 현실보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이런 입장에서 인간세계를 볼 때에는 인간의 내면적 수양, 즉 철저한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고, 도덕규범인 삼강오륜이나 그에 바탕을 둔 계급질서가 절대적인 명분으로 긍정된다. 이황의 학설은 유성룡, 김성일, 정구, 오운, 홍여하, 장현광 등 영남학인들과 일부 근경사림 사이에 추종을 얻었는데, 그의 학설은 주희의 견해를 심학의 차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이황을 ‘동방의 주자’라고도 불렀다.

이황보다 35세 후배인 이이는 ‘이(理)’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기(氣)’의 작용에 따라 착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형이하(形而下)의 현실이 형이상(形而上)의 관념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형이하의 세계를 개혁해야 형이상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제도개혁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이이가 《동호문답》을 비롯한 여러 저술과 상소문에 변법경장(變法更張)을 통한 개선책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그의 철학사상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이이주희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한국 왕도정치의 시발을 기자(箕子)로부터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이의 철학사상은 기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성혼, 정엽 등이 유명하다.

이황의 학설을 추종한 학자들이 초기의 남인을 형성했으나, 서경덕, 조식의 문인들로 구성된 북인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남인에 합류하여, 17세기 이후의 남인학풍은 지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이이의 학풍을 따르는 학인들이 16세기 말에 서인을 구성했으나, 17세기 말에 서인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학풍도 달라지고, 또 18세기에는 노론 안에서도 충청도의 ‘호파’와 서울의 ‘낙파’가 갈려 이른바 ‘호락시비(湖洛是非)’로 불리는 철학논쟁이 일어났다.

16세기 철학사상에서 독창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사상가로 개성의 서경덕과 경상남도 덕천의 조식을 들 수 있다. 바닷가의 상업문화의 영향을 받은 두 사람의 사상은 내륙의 농업문화와 연결된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학풍을 보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중종 때의 학자 서경덕은 일평생 처사로 지내면서 독창적인 유기철학(唯氣哲學)을 수립했다. 그에 따르면, 우주자연은 미세한 입자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는 영원 불멸하면서 사물 현상을 낳는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는 윤리적으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유기론은 15세기 말의 김시습을 거쳐 내려온 한국 도가의 학풍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임진강 부근의 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지화, 이지함, 허엽 등이 배출되고, 이이의 주기철학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학인들이 도맥(道脈)을 형성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나섰다.

지리산 부근의 덕천과 김해 바닷가에서 처사로 지낸 조식은 경(敬)과 의(義)를 근본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을 창도하고 도교에도 기울어져 서경덕과 상통하는 학풍을 이루었다. 이 두 사람의 문인이 이황 문인과 합세하여 동인을 형성했으나, 이황의 학풍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을 가져 뒤에는 북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나주의 기대승, 장성김인후, 태인(정읍)의 이항이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기대승이황과 8차례의 편지 왕래를 통해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변을 벌여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16세기 후반에는 서경덕을 비롯한 개성 문화가 서울로 남하하며 서울 부근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추구하면서 실용적인 잡술(雜術)에 관심을 갖고 현실을 급진적으로 개조하려는 이단적인 사상가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지함, 임제, 정렴, 정작, 정여립 등은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이다.

특히 선조 때의 토정(土亭) 이지함서경덕의 문인으로 유학과 더불어 수학, 의약, 점복, 천문, 지리 등 잡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이가 ‘기화이초(奇花異草)’라고 불렀다. 그는 탁행으로 천거되어 포천과 아산 현감도 지냈으나 서울 마포에 움막(土亭)을 짓고 살면서 직접 장사에도 종사하여 재리(財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3. 3.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형성

이황의 주리론은 영남학파로, 이이의 주기론은 기호학파로 이어지며 조선 성리학의 양대 학파를 형성했다.[7]

16세기 중엽부터 활발한 철학논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영남학파는 이황의 학설을 따랐고, 기호학파는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다.

이황은 선배 학자인 이언적의 철학 사상을 발전시켜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성립시켰다. 그는 ‘이(理)’를 우주만물의 보편적 원리인 형이상(形而上)으로 보았고, 모든 사물 현상인 형이하(形而下)의 ‘기(氣)’는 ‘이’의 발현이며, ‘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를 절대시하는 주리론은 현실보다 원칙을 중요시하며, 인간의 내면적 수양, 즉 철저한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고, 도덕규범인 삼강오륜이나 그에 바탕을 둔 계급질서가 절대적인 명분으로 긍정된다. 이황의 학설은 유성룡, 김성일, 정구, 오운, 홍여하, 장현광 등 영남 학자들과 일부 근경사림에게 추종을 얻었으며, 그의 학설은 주희의 견해를 심학(心學)의 차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아 이황은 ‘동방의 주자’라고도 불렸다.

이황보다 35세 후배인 율곡(栗谷) 이이는 ‘이(理)’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기(氣)’의 작용에 따라 착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형이하(形而下)의 현실이 형이상(形而上)의 관념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형이하의 세계를 개혁해야 형이상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제도개혁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이이가 《동호문답》을 비롯한 여러 저술과 상소문에 변법경장(變法更張)을 통한 개선책을 주장한 것은 그의 철학 사상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한국 왕도정치의 시발을 기자로부터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성리학을 토착화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이의 철학 사상은 성혼, 정엽 등 기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황의 학설을 추종한 학자들이 초기의 남인을 형성했으나, 서경덕, 조식의 문인들로 구성된 북인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남인에 합류하여, 17세기 이후의 남인 학풍은 지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이이의 학풍을 따르는 학인들이 16세기 말에 서인을 구성했으나, 17세기 말에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학풍도 달라졌다. 18세기에는 노론 안에서도 충청도의 ‘호파’와 서울의 ‘낙파’가 갈려 이른바 ‘호락시비(湖洛是非)’로 불리는 철학논쟁이 일어났다.

3. 4. 서경덕과 조식의 독자적 사상

개성의 화담(花潭) 서경덕과 경상남도 덕천의 남명(南冥) 조식은 16세기 조선 철학사상에서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바닷가의 상업 문화 영향을 받아, 내륙의 농업 문화와 연결된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학풍을 보였다.[7]

서경덕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독자적인 유기철학(唯氣哲學)을 수립했다. 그는 우주 자연이 미세한 입자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기는 영원불멸하며 사물 현상을 낳는다고 보았다. 이는 윤리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자연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유기론은 15세기 말 김시습을 거쳐 내려온 한국 도가(道家)의 학풍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임진강 부근 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지화, 이지함, 허엽(許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고, 이이의 주기철학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서경덕을 추종하는 학인들은 도맥(道脈)을 형성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기도 했다.[7]

지리산 부근 덕천과 김해 바닷가에서 벼슬하지 않고 지낸 조식은 경(敬)과 의(義)를 근본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을 창도하고 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서경덕과 상통하는 학풍을 이루었다. 이 두 사람의 문인은 이황 문인과 합세하여 동인을 형성했으나, 이황의 학풍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을 가져 후에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게 된다.[8]

4. 조선 후기 유학과 실학의 등장

조선 후기에는 양명학이 이단시되었지만,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실학이 등장했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자학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4. 1. 실학의 등장과 한계

조선 시대 유학은 배타적이어서 중국에서 성행하던 양명학은 조선에서 이단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주자학파라도 주자와 경주(經註)에 반대하면 심한 비난을 받았다. 학설의 차이는 당쟁을 유발시켜 정치·사회 면에도 깊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러서야 청나라고증학과 서양 문물 등에 대한 지식을 얻어 공헌할 수 있는 학문인 실학이 일어났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이 방면에 뛰어난 학자들이 나와 새로운 학풍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주자학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4. 2. 한말 유학자들의 항일운동

한말 최익현 등 유학자들은 주자학의 명분론 등을 내세워 항일운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1]

5. 조선시대 유학의 사회적 영향

유학은 조선 사회의 윤리, 가족 제도, 계급 질서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서적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2] 백과사전 조선의 철학[槪說]
[3] 문서 논어·맹자·중용·대학
[4] 문서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5] 문서 이(理)
[6] 문서 기(氣)
[7] 문서 인·의·예·지
[8] 문서 희·노·애·락·애·오·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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