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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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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세노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기원전 396/5년에 태어나 기원전 314/3년에 사망했다. 그는 칼케돈 출신으로, 플라톤의 제자이자 아카데미아의 제3대 교장으로 25년간 재직했다.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이데아와 수를 동일시하는 등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저술은 광범위하며,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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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크라테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크세노크라테스
이름크세노크라테스
출생기원전 396/5년
출생지칼케돈(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카드쾨이)
사망기원전 314/3년
사망지아테네
학파/전통플라톤주의
주요 관심사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수학
윤리학
주요 아이디어플라톤의 철학을 발전시킴
영향을 준 인물플라톤
스페우시포스
피타고라스 학설
영향을 받은 인물폴레몬
크란토르
다수

2. 생애와 일화

크세노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철학자로, 칼케돈 출신이다.[1] 그는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기원전 361년에는 스승과 함께 시칠리아로 가기도 했다. 플라톤 사후에는 스페우시포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메이아의 제3대 학장이 되어 25년간 학교를 이끌었다.[54]

그는 빠른 이해력보다는 성실함과 끈기, 그리고 높은 도덕성으로 알려졌다.[8][9][11] 이러한 성품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으며, 법정에서 선서 없이 증언하는 것이 허용될 정도였다.[55] 또한, 당시 아테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케도니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아테네 시민권을 제안받았으나 특정 조건 하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하기도 했다.[6]

크세노크라테스는 폴레몬, 포키온, 크란토르, 제논, 에피쿠로스 등 여러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은 그의 성품과 철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2. 1. 생애

크세노크라테스는 칼케돈 출신으로,[1] 기원전 396/5년에 태어나 기원전 314/3년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의 아버지는 아가톤(Ἀγάθωνοςgrc) 또는 아가타노르(Ἀγαθάνοροςgrc)였다.[3][54]

어린 시절 아테네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아이스키네스 소크라티쿠스의 제자가 되었으나,[4] 이후 플라톤에게 합류하여 기원전 361년에는 플라톤과 함께 시칠리아로 갔다. 플라톤은 이해가 빠르지 않았던 크세노크라테스를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며 "한쪽에는 굴레가 필요하지만, 다른 한쪽에는 박차가 필요하다"고 평하기도 했다.[55] 스승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헤르미아스를 방문했다.[5]

기원전 339/8년, 크세노크라테스는 스페우시포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메이아의 제3대 학장이 되었다. 그는 피르라의 메네데무스와 폰투스의 헤라클레이데스와의 경쟁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으며, 이후 25년간 학장직을 맡았다.[54] 그는 세 차례 아테네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는데, 한 번은 필리포스 2세에게, 두 번은 안티파트로스에게 갔다.

크세노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를 지배하던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기원전 322년경 데모스테네스가 사망한 직후, 아테네가 반란 실패 후 안티파트로스와 평화 협상을 맺자 포키온은 크세노크라테스의 공로를 인정하여 아테네 시민권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 평화 협정은 수천 명의 가난한 아테네인들의 참정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크세노크라테스는 "자신이 막으려고 애썼던 헌법 안에서 시민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6] 그는 거주 외국인에게 부과된 세금을 내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웅변가 리쿠르고스의 도움으로 구제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7] 다른 설에 따르면 팔레레우스의 데메트리우스에게 팔렸다가 풀려났다고도 한다.

크세노크라테스는 빠른 이해력이나 타고난 우아함은 부족했을지 몰라도,[8] 끈기 있고 철저한 노력,[9] 순수한 자선심,[10] 도덕적 순수함,[11] 이타심[12] 등으로 이를 보완했다. 그는 위엄 있고 진지한 인격자로 알려져,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13] 아테네인들은 그의 정직함을 믿었기에 법정에서 선서 없이 증언하는 것을 허락할 정도였다.[55]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폴레몬에게 학장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폴레몬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크세노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인물이다. 폴레몬 외에도 정치가 포키온, 펠레네의 참주였던 카이론, 아카데미아 학자 크란토르,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제논, 에피쿠로스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크세노크라테스는 기원전 314/3년, 집 안에서 청동 냄비에 걸려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사고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6]

2. 2. 일화

크세노크라테스는 이해가 빠르거나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8] 꾸준하고 성실한 노력,[9] 순수한 마음씨,[10] 높은 도덕성,[11] 그리고 이타적인 태도를[12] 지녔다. 이러한 진지한 태도는 당시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게 했다.[13] 스승 플라톤은 그가 다소 둔하다고 여겨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며 "한쪽(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굴레가 필요하고, 다른 한쪽(크세노크라테스)에게는 박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엄 있고 올곧은 성품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은 법정에서 그가 증언할 때 선서 없이도 증언을 인정할 정도였다.[55]

당시 아테네를 장악하고 있던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데모스테네스가 사망한 직후인 기원전 322년경,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 대항한 반란에서 패배한 후 안티파트로스와 평화 협상을 맺는 과정에서 포키온의 추천으로 아테네 시민권이 제안되었으나 이를 거부했다. 당시 평화 협정은 수천 명의 가난한 아테네 시민들의 참정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크세노크라테스는 "자신이 막으려 했던 헌법 체제 안에서 시민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6] 또한, 그는 아테네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내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이때 웅변가 리쿠르고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으며,[7]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에게 팔려갔다가 풀려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죽음 또한 다소 특이한데, 기원전 314/3년에 집 안에서 청동 냄비에 걸려 넘어져 머리를 부딪힌 사고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56]

3. 철학 사상

크세노크라테스는 스페우시포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메이아의 학두가 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스페우시포스보다 철학의 세 분야인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더 명확하게 구분했지만,[17] 플라톤이 중시했던 문답을 통한 탐구 방식(aporiai|아포리아이el) 대신, 철학적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세우고 발전시키는 방식을 택했다.[18]

그의 철학은 플라톤 후기 사상을 피타고라스 학파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데아와 수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세계의 근본적인 생명 원리인 영혼을 '스스로 움직이는 수'로 규정한 것이 대표적이다.[23]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이상적인 수를 수학적인 수와 동일시하는 입장이다.[33]

인식론에서는 지식(episteme|에피스테메el), 감각(aisthesis|아이스테시스el), 의견(doxa|독사el)이라는 세 단계를 설정하고, 특히 의견을 지식과 감각 사이의 매개체로 중시하며 수학의 역할을 강조했다.[19] 형이상학에서는 통일성(monas|모나스el)과 이중성(duas|두아스el)을 신적인 원리로 설정하고, 세계 영혼과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려 했다.[24] 윤리학에서는 행복의 일치를 주장하며, 미덕만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44] [45] 그는 선과 악 외에 건강, 명성 등 '선도 악도 아닌 중간적인 것들'을 구별하고, 이것들이 미덕을 통해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39] [41] [42]

크세노크라테스는 여러 개념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삼분법(三分法)을 선호했으며, 이는 그의 철학 체계 전반에 나타난다. 그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고 전해지지만,[57] 현재는 대부분 소실되어 다른 고대 작가들의 인용을 통해 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3. 1. 인식론

크세노크라테스는 스페우시포스보다 철학의 세 분야(논리학, 자연학, 윤리학)를 더 명확하게 구분했지만,[17] 동시에 플라톤이 사용했던 의문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발견법(aporiai|아포리아이grc)을 버리고, 대신 철학적 교리들을 독단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18]

그는 지식, 감각, 그리고 의견이라는 세 가지 인지 단계를 설정했다.

  • 지식(episteme|에피스테메grc): 순수한 사고의 대상이며 현상 세계 너머에 있는 본질에 대한 앎이다.
  • 감각(aisthesis|아이스테시스grc): 현상 세계에 속하는 것들에 대한 앎이다.
  • 의견(doxa|독사grc): 감각적 지각과 수학적으로 파악되는 순수한 이성의 대상인 본질(예: 하늘이나 별의 본질)을 연결하는 앎이다.


크세노크라테스는 특히 의견(doxa|독사grc)을 지식과 감각적 지각 사이의 중요한 매개체로 보았으며, 이 과정에서 수학의 역할을 플라톤보다 더 명확하게 강조하려 했다.[19]

이 세 가지 인식 방식 모두 진실을 일정 부분 담고 있다고 보았으나, '과학적 지각'(epistemonike aisthesis|에피스테모니케 아이스테시스grc)이 어떻게 진실을 공유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상징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지식 단계를 각각 모이라(운명의 여신)인 아트로포스, 클로토, 라케시스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크세노크라테스가 자신의 변증법을 어떻게 전개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특징들이 그의 변증법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를 구분한 것[20]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이론과는 다른 입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 후기의 사상을 피타고라스 학파에 가깝게 해석하여 이데아와 수(數)를 동일시했으며, 세계의 생명 원리를 스스로 움직이는 수로 규정했다. 그는 삼분법(三分法)을 선호하여, 지각의 종류를 감각, 의견(doxa|독사grc), 지(知)의 세 가지로 나누는 등 여러 개념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려 시도했다.

3. 2. 형이상학

플루타르코스[21]의 기록에 따르면,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세계 영혼 개념을 직접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의 크란토르처럼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우주가 시작도 없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플라톤 이론의 시간적 순서를 개념적 계승 관계로 해석한 초기 인물 중 하나였다.[22] 플루타르코스는 크세노크라테스가 영혼을 스스로 움직이는 수(數)라고 정의했다고 기록했는데,[23] 이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크세노크라테스는 통일성(μονάς|모나스grc)과 이중성(δυάς|두아스grc)을 신적인 원리로 보았다. 통일성은 하늘을 다스리는 첫 번째 남성적 존재, 아버지이자 제우스, 홀수, 정신으로, 이중성은 여성적 존재, 신들의 어머니, 그리고 하늘 아래 변화무쌍한 세계를 지배하는 우주의 영혼으로 특징지었다.[24] 다른 설명에 따르면, 그는 불변의 영역을 다스리는 제우스를 최고신으로, 변화하는 하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을 최후의 신으로 구분하기도 했다.[25]

다른 플라톤주의자들처럼 그가 물질적 원리를 '정의되지 않은 이중성'으로 보았다면, 세계 영혼은 그에게 '첫 번째 정의된 이중성'으로서, 물질적이고 변화 가능한 영역의 모든 개별적 존재를 규정하는 원리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는 이를 개별 영혼의 가장 높은 형태로 보았고, 파생된 의미에서는 운동 능력을 부여받은 첫 번째 수, 즉 '스스로 움직이는 수'라고 불렀다. 제우스(세계 정신)는 이 세계 영혼에게 변화 가능한 것들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세계 영혼의 신성한 힘은 우주의 여러 영역에서 행성, 태양, 달에 깃들어 있으며, 이는 더 순수한 형태로 올림포스 신으로 나타난다. 하위 세계에서는 악마적 힘(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등)으로 원소 안에 존재하며, 이 악마적 본성은 신과 인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이는 마치 이등변 삼각형이 정삼각형과 부등변 삼각형 사이에 있는 것과 유사하다.[26] 그는 하위 세계의 변화를 지배하는 신성한 세계 영혼을 '최후의 제우스' 또는 '최후의 신성한 활동'으로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선과 악의 대립은 자연의 개별적인 악마적 힘의 영역에서 시작된다.[27] 악마적 힘은 그들이 선호하는 완고함을 통해 달래질 수 있다고 보았다. 좋은 악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쁜 악마는 파멸시킨다. 에우다이모니아(행복)는 좋은 악마가 내재한 상태이며, 그 반대는 나쁜 악마가 내재한 상태라고 설명했다.[28]

크세노크라테스의 근본적인 생각 중 하나는 모든 존재의 등급에 신성한 힘이 스며들어 있으며, 개별적인 존재로 내려갈수록 그 힘이 점차 약해진다는 것이다.[29] 그는 의식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심지어 비합리적인 동물들조차 지배적인 신성한 힘에 대한 직관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30] 그러나 물질적 존재 자체(두껍거나 얇은 것 등)는 영혼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31] 영혼의 비물질성을 몸이 영양을 공급받는 방식과 다르다는 점을 통해 증명하려 했다.[32]

그는 플라톤을 따라 신성한 ''원리''를 나눌 수 없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을 분할 가능하고 다양한 형태를 지니는 것으로 구분했다. 수(數)는 이 두 원리의 결합, 즉 절대적 통일성에 의해 무한한 것이 제한됨으로써 생겨난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우주 영혼과 개별 영혼을 스스로 움직이는 수라고 불렀다. 이 영혼은 동일성과 상이함이라는 이중적 근원을 가지므로 영속성과 운동에 동시에 참여하며, 이러한 대립의 조화를 통해 의식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33]에서 당시 플라톤주의자들의 수(數)와 이데아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주요 견해를 제시했다.

# 플라톤처럼 ''이상적'' 수와 ''수학적'' 수를 구별하는 입장

# 크세노크라테스처럼 ''이상적'' 수를 ''수학적'' 수와 동일시하는 입장

# 스페우시포스처럼 ''수학적'' 수만을 가정하는 입장

아리스토텔레스는 크세노크라테스의 이론에 대해, 특히 이상적 수가 산술 단위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원리가 될 수 없고 단지 산술 연산의 대상이 될 뿐이라고 비판했다.

크세노크라테스는 수를 통해 사물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그의 선배들보다 더 나아갔으며,[34] 피타고라스 학파에 가까운 입장을 보였다. 그는 수를 의식과 지식의 조건적 원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설에 플라톤에게서 가져온 정의, 즉 수가 동일성과 상이함 사이의 대립을 조화시키고 스스로 움직일 때 비로소 영혼이 된다는 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분할할 수 없는 선'을 가정함으로써 플라톤 교리를 보충하려 했는데,[35] 이것이 플라톤이 말한[36] 신만이 아는 요소, 즉 플라톤 삼각형의 원리라고 생각하며 이를 최초의, 원래의 선으로 묘사했다. 그는 존재의 ''원리''가 물질적인 것(분할 가능한 현상)이 아니라 형태의 이상적 정의에 있다고 확신했기에, 원래의 평면 도형과 입체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언급했다.[37]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점(點)에 관한 가설[38] 역시 크세노크라테스의 주장으로 추정된다.

요약하자면,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 만년의 사상을 피타고라스 학파에 가깝게 해석하여 이데아와 수(數)를 동일시하고, 세계의 생명 원리를 자기 운동하는 수로 규정했다. 그는 삼분법을 선호하여, 학문을 논리학·자연학·윤리학으로, 세계를 천상·천공·지상으로, 지각을 감각·독사(doxa, 억견)·지(知)로 나누었다. 도덕설에서는 지(知)와 덕(德), 그리고 덕과 행복의 일치를 주장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자연에 관하여』 6권, 『지혜에 관하여』 6권, 『부에 관하여』 1권 등을 포함하여 총 22만 4239행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고 한다.[57]

3. 3. 윤리학

크세노크라테스의 윤리에 대한 정보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는 여러 관점에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삶에 더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는 선(善)과 악(惡)으로부터 선도 악도 아닌 것을 구별했다.[39] 그의 스승인 플라톤이나 아카데미 선배들의 생각을 따라, 그는 선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고, 악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40] 결과적으로, 선도 악도 아닌 것은 그 자체로는 추구하거나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지만, 선과 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 가치를 얻거나 잃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크세노크라테스와 스페우시포스를 비롯한 초기 아카데미 철학자들은[41] 건강, , 명성, 좋은 과 같은 중간적인 것들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는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무가치하거나 무관심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42] 따라서 중간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선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정도에 따라, 크세노크라테스는 이를 선 또는 악으로 규정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선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악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악이라도 미덕을 통해 선이 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덕만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의 가치는 조건적이라고 주장했다.[44] 이에 따라 행복은 미덕을 의식하는 것과 일치해야 하며,[45] 인간의 삶 속에서 본래 자연이 의도한 좋은 것들과 환경을 누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것들에 감각적인 만족은 포함되지 않았다.[46]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한편으로 (완전한) 행복을 개인적인 미덕의 소유와 그에 걸맞은 능력으로 보았고, 따라서 도덕적 행동 외에도 외부적인 좋은 것들을 얻기 위한 조건과 편의, 활동과 관계 역시 행복의 구성 요소로 간주했다.[47] 다른 한편으로는, 최초 원인이나 지적 본질에 대한 학문, 즉 이론적 이해로서의 지혜만을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지혜로 인정하지는 않았다.[48] 오히려 그는 인간적인 지혜를 탐구하고, 정의하며, 실제 삶에 적용하는 실천적인 측면을 동시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49] 그가 도덕적 탁월함의 무조건적인 본질을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의 도덕성까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다른 사람의 재산에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나 실제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나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고 선언한 데서 드러난다.[50] 그의 도덕적 진지함은 아이들의 귀를 비도덕적인 말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경고에서도 나타난다.[51]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 말년의 사상을 피타고라스 학파에 가깝게 해석하여 이데아와 수를 동일시했고, 세계의 생명 원리를 스스로 움직이는 수로 규정했다. 그는 삼분법(三分法)을 선호하여, 논리학·자연학·윤리학의 세 학문 분야, 천상(天上)·천(天)·지상(地上)의 세 세계, 감각·독사(억견, Doxa)·지(知)의 세 가지 인식 단계를 구분하려 시도했다. 도덕론에서는 앎(知)과 덕(德), 그리고 덕과 행복의 일치를 주장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크세노크라테스는 『자연에 관하여』 6권, 『지혜에 관하여』 6권, 『부에 관하여』 1권 등을 포함하여 총 22만 4239행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57]

4. 저술

크세노크라테스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요 저작으로는 변증법에 대한 포괄적인 저작(τῆς περὶ τὸ διαλέγεσθαι πραγματείας βιβλία ιδ΄|grc)을 비롯하여, 인식론 분야의 "περὶ ἐπιστήμης α΄|grc", "περὶ ἐπιστημοσύνης α΄|grc"(지식에 관하여, 지식 가능성에 관하여)가 있다. 또한 논리학 및 형이상학 관련 저술로 "διαιρέσεις η΄|grc" (분할에 관하여), "περὶ γενῶν καὶ εἰδῶν α΄|grc" (종과 유에 관하여), "περὶ ἰδεῶν|grc" (이데아에 관하여), "περὶ τοῦ ἐναντίου|grc" (반대에 관하여) 등이 있으며, "τῶν περὶ τὴν διάνοιαν η΄|grc" (중간적 사고에 관하여)[14]라는 저작도 이 분야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철학 분야에서는 두 권의 책(περὶ φύσεως ϛ΄ - φυσικῆς ἀκροάσεως ϛ΄|grc)을 비롯하여 "περὶ Θεῶν β΄|grc" (에 관하여)[15], "περὶ τοῦ ὄντος|grc"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περὶ τοῦ ἑνός|grc" (하나에 관하여), "περὶ τοῦ ἀορίστου|grc" (무한정에 관하여), "περὶ ψυχῆς|grc" (영혼에 관하여), "περὶ τῶν παθῶν α΄|grc" (감정에 관하여), "περὶ μνήμης|grc" (기억에 관하여) 등을 저술했다.

윤리학 분야에서는 "περὶ εὐδαιμονίας β΄|grc" (행복에 관하여)와 "περὶ ἀρετῆς|grc" (에 관하여) 같은 일반적인 논문과 더불어, 개별적인 덕목이나 자발성 등에 관한 책들도 남겼다. 정치학 관련 저술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보낸 왕족에 관한 4권의 책(στοιχεῖα πρὸς Ἀλέξανδρον περὶ βασιλείας δ΄|grc)[16], "περὶ πολιτείας α΄; πολιτικός α΄|grc" (국가에 관하여), "περὶ δυνάμεως νόμου α΄|grc" (의 힘에 관하여)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기하학, 산술, 점성술에 관한 저술과 함께 시(epē)와 교훈적인 글도 썼다.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 말년의 사상을 피타고라스 학파의 관점에 가깝게 해석하여 이데아와 수(數)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세계의 생명 원리를 스스로 움직이는 수로 정의했으며, 삼분법을 선호하여 철학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세 분야로 나누고, 세계를 천상계, 천계, 지상계의 세 영역으로, 인식 능력을 감각, 독사(억견, Doxa), 지(知)의 세 단계로 구분하고자 했다. 그의 도덕설은 지(知)와 덕(德)의 일치, 그리고 덕과 행복의 일치를 주장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크세노크라테스는 『자연에 관하여』 6권, 『지혜에 관하여』 6권, 『부에 관하여』 1권 등을 포함하여 총 22만 4239행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고 전해진다.[57]

5. 영향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주의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의 초기 학자(기원전 347년-기원전 266년) 중 한 명으로 분류된다. 이 시기 아카데미아에는 스페우시포스, 헤라클레이데스, 메네데모스,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 오프스의 필리포스, 크란토르, 폴레몬, 크라테스 등 여러 학자들이 함께 활동했다.

6. 각주


참조

[1] 서적 Academica
[2] 서적 1925
[3] 웹사이트 Suda Encyclopedia, xi,42 https://www.cs.uky.e[...]
[4] 서적
[5] 서적
[6] 서적 1988
[7] 서적 Flamin.
[8] 서적 1925
[9] 서적 1925
[10] 서적 1925
[11] 서적 1925
[12] 서적 1925
[13] 서적 1925
[14] 서적 1925
[15] 서적 1925
[16] 서적
[17] 서적 adv. Math.
[18] 서적 1925
[19] 서적 adv. Math.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Ecl. Phys.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De Natura Hominis
[33] 서적
[34] 서적 Met.
[35] 서적
[36] 서적 Timaeus
[37] 서적 in Arist. de Caelo
[38] 서적 de Anima
[39] 서적 adv. Math.
[40] 서적 de Legibus
[41] 서적 de Finibus
[42] 서적 de Legibus
[43] 서적 Tusculanae Quaestiones
[44] 서적 Tusculanae Quaestiones
[45] 서적 Topica
[46] 서적 Tusculanae Quaestiones
[47] 서적 Stromata
[48] 서적 Stromata
[49] 서적 Topica
[50] 서적 Varia Historia
[51] 서적 de Audit.
[52] 서적 Quaest. Conviv.
[53] 서적 in Arist. Phys.
[54] 서적 ギリシア哲学者列伝(上) 岩波文庫
[55] 서적 ギリシア哲学者列伝(上) 岩波文庫
[56] 서적 ギリシア哲学者列伝(上) 岩波文庫
[57] 서적 ギリシア哲学者列伝(上) 岩波文庫
[58] 서적 Chapter 2: Chronology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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