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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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킵차크인은 9세기부터 유라시아 초원을 누비며 활동한 튀르크계 유목 민족이다. 킵차크라는 이름은 "속이 빈 나무"를 뜻하며, 폴로베츠, 쿠만 등으로도 불렸다. 킵차크인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흑해 북쪽과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주변 민족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킵차크인의 일부는 헝가리로 이주하거나 맘루크 왕조의 용병으로 활동했다. 킵차크어는 킵차크어파 언어의 기반이 되었으며, 현대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등 여러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 킵차크인의 외모와 쿠만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과 연구가 존재하며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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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킵차크인 | |
|---|---|
| 지도 | |
| 명칭 | |
| 다른 이름 | 폴로베츠인, 쿠만인 |
| 민족 명칭의 기원 | 몽골어로 '불운한 사람, 불행한 사람'을 의미하는 '쿠박(qubāq)'에서 유래 |
| 역사 | |
| 기원 | 시르다리아 강 유역에서 기원 |
| 이동 | 11세기 초 볼가 강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동 |
| 주요 활동 지역 | 킵차크 초원 |
| 멸망 |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 |
| 사회 | |
| 사회 구조 | 유목 사회, 부족 연맹 체제 |
| 언어 | 킵차크어 |
| 종교 | 샤머니즘 일부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 이슬람교 |
| 문화 | |
| 언어 계통 | 튀르크어족 |
| 문화적 영향 | 러시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기타 동유럽 국가 |
| 기타 | |
| 후예 민족 |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크림 타타르인 노가이인 카라차이인 발카르인 쿠미크인 기타 튀르크계 민족 |
2. 명칭
킵차크인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킵차크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속이 빈 나무"로 해석했는데, 이는 중세 튀르크어로 '''''kuv''' ağaç''이다.[1] 그들에 따르면, 속이 빈 나무 안에서 그들의 최초의 인간 조상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2] 네메스는 시베리아 사가이 방언(하카스어)에서만 증명된 시베리아어 ''qıpčaq'' ("화난, 성미가 급한")에 주목했다.[3] 클랴슈토르니는 킵차크를 "불행한, 운이 없는"을 뜻하는 ''qovı'', ''qovuq''과 연결짓는다. 그러나 골든은 "행운"을 뜻하는 ''qıv''와 형용사 접미사 ''-čāq''의 조합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어찌됐든 골든은 민족 이름의 원래 형태와 어원은 "논쟁과 추측의 대상"으로 남아있다고 언급한다.[4]
한국에서는 주로 '킵차크'로 불리며, 한자로는 '欽察'(흠찰) 등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원사』 등의 중국 사료에 따른 표기이다.
- '''킵차크''', '''킴차크''': 원조비사에 따른 표기.
- '''흠찰'''(Qīnchá), '''흠차'''(Qīnchā): 원사에 따른 표기. "킵차크"를 한자로 음역한 것.
- '''가불차''': 서유록에 따른 표기.
- '''극비초''': 흑달사략에 따른 표기.
이슬람 문헌에서는 키프샤크(Khifshākh), 키프차크(Khifchākh), 킵차크(Qïpčāq) 등으로 표기했다. 어원은 "속이 빈 나무 줄기"라는 의미의 "qobūq"이다.[46]
루스의 연대기인 『원초 연대기』, 『키예프 연대기』, 『갈리치-볼린 연대기』에서는 폴로베츠(Половецru, Половецuk), 폴로브치(Половциuk) 등으로 표기했다.[47] 의미는 "평원의 민족"[48], 혹은 "누르스름한 색의 사람들"[46]이다.
비잔틴 제국, 헝가리 왕국의 기록에서는 쿠만(Kumanla, Cumanla)으로 표기했다. 이는 쿠반 강에서 유래했다.[45]
헝가리어로는 쿤(Kun・복수형 Kunokhu)으로 부르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3. 역사
킵차크인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다양한 기원설이 있지만 대체로 투르크계로 분류된다. 킵차크인은 유라시아의 광대한 초원 지역에 걸쳐 살았으며, 아랄해 북쪽과 흑해 북쪽(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남서부 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다. 이들은 몰다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등을 침입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약탈하기도 했다.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 킵차크인들은 비잔티움 제국, 키예프 루스, 헝가리인, 페체네그인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1089년에는 헝가리의 라디슬라오 1세에게 패배했고, 12세기에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에게 패배했으며, 1241년에는 몽골족에게 크게 패했다. 몽골 제국 붕괴 후에는 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에 킵차크 칸국이라는 몽골 제국의 서쪽 구성국이 세워졌다.
쿠만인들은 헝가리로 도망쳐 로마 가톨릭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이 되었다. 이집트 맘루크의 첫 번째 왕조인 바흐리 왕조는 킵차크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크림반도 솔하트 출신의 바이바르스이다.
쿠만 평원에서는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복잡한 민족 동화와 통합 과정이 일어났다.[5] 서부 킵차크 부족은 오구즈 튀르크인, 페체네그인, 바슈키르인, 불가르족 등 다양한 민족을 흡수했고, 동부 킵차크는 키메크족, 카를루크족, 카라키타이 등과 융합했다. 이들은 모두 "킵차크"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5] 몽골어족 또는 준몽골어족 계통의 집단과 부족도 동부 킵차크에 통합되었다.[5]
중국 역사에서는 킵차크에 대해 몇 번 언급하는데, 예를 들어 원나라 장군 투투하가 욀베르리 킵차크 부족 출신이라는 기록[7], 킵차크의 고향, 말, 외모, 심리에 대한 정보 등이 있다.[8]
킵차크는 페르시아 지리학자 이븐 호르다드베의 도로와 왕국의 책에 처음으로 북쪽 튀르크 부족으로 언급되었으며, 토쿠즈 오구즈, 카를루크족 등 다른 부족들보다 먼저 언급되었다.[10] 킵차크와 쿠만족의 관계는 불분명하다.[10]
1068년 알리타 강 전투를 시작으로 킵차크인과 루스인들 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 1055년: 폴로베츠족(킵차크족)은 보루시라는 자에게 이끌려 루스 땅에 나타났고, 페레야슬라블 공 세뱌토슬라프는 그들과 화해를 맺었다.[53]
- 1061년: 폴로베츠족(킵차크족)은 소칼이라는 자에 이끌려 처음으로 루스 땅을 침략했다.
- 1068년: 다수의 폴로베츠족(킵차크족)이 루스 땅을 침략, 키예프 대공이쟈슬라프 1세 등이 레타(알리타) 강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55]
- 1071년: 폴로베츠족(킵차크족)은 로스토베츠와 네아친 근처를 공격했다.[57]
- 1078년: 스뱌토슬라프의 아들 올레크(ru) 등이 폴로베츠족(킵차크족)과 함께 키예프 대공 세뱌토슬라프 2세를 공격했다.[58]
- 1079년: 스뱌토슬라프의 아들 로만이 폴로베츠족(킵차크족)을 이끌고 볼리니로 왔으나, 폴로베츠족(킵차크족)에 의해 살해되었다.[59]
- 1092년: 폴로베츠족(킵차크족)은 페소첸, 페레볼로카, 프리루크의 3개 도시를 점령하고, 많은 마을들을 공격했다.[60]
- 1093년: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가 포로베츠(킵차크) 사절을 체포, 포로베츠(킵차크)는 토르체스크를 포위했다.[61]
- 1094년: 스뱌토폴크 2세는 포로베츠(킵차크)와 화해하고, 투고르칸의 딸과 결혼했다. 올레크는 포로베츠(킵차크)와 함께 체르니고프로 왔다.[64]
- 1095년: 페레야슬라프 공작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에게 포로베츠인 칸(왕) 이트라리와 퀴탄이 화해를 위해 찾아왔다.[65]
- 1096년: 보냐크가 포로베츠인을 이끌고 키예프 근교를 파괴했다.[66]
- 1101년: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 등이 포로베츠(킵차크)와 화해했다.[67]
- 1103년: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등이 포로베츠(킵차크) 원정을 시작했다.[68]
- 1107년: 보니야크 등이 루벤 주변에 머물렀다.[71]
- 1110년: 포로베츠(킵차크)는 페레야슬라블 근처와 다른 마을들을 공격, 약탈했다.[72]
- 1112년: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등이 포로베츠(킵차크)를 공격했다.[73]
- 1117년: 포로베츠인들이 볼가르 (불가르)인들에게 갔으나,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아에바 등이 죽었다.[74]
- 1126년: 포로베츠인들이 바루치를 공격했다.[75]
- 1128년: 오레크의 아들 세볼로트 2세가 포로베츠(킵차크)를 불렀다.[76]
- 1135년: 포로베츠인이 세볼로트 2세에게 도착, 페레야슬라블 영지를 공격했다.[77]
- 1136년: 세볼로트 2세가 포로베츠(킵차크)와 함께 페레야슬라블에 머물렀다.[78]
- 1140년: 세볼로트 2세가 포로베츠(킵차크)와 화해했다.[79]
- 1146년: 노브고로드 세베르스키 공작 스뱌토슬라프가 포로베츠(킵차크) 300명을 불렀다.[80]
- 1147년: 스뱌토슬라프가 포로베츠인들과 만났다.[83]
- 1149년: 유리(유리 도лго루키)가 포로베츠인들과 함께 출발했다.[85]
- 1151년: 유리가 포로베츠인들을 이끌고 키예프를 공격했다.[88]
- 1152년: 유리(Yuri)가 포로베츠인들을 모아 체르니고프를 공격했다.[91]
- 1154년: 유리의 아들 글레프가 포로베츠인들을 이끌고 페레야슬라블을 침공했다.[92]
- 1155년: 유리가 포로베츠(킵차크)와 함께 키예프를 공격했다.[94]
- 1161년: 이쟈슬라프 3세가 포로베츠인과 연합하여 키예프를 공격했다.[95]
- 1170년: 이자슬라프 2세의 아들 므스티슬라프 2세가 포로베츠(킵차크) 원정을 준비했다.
- 1172년: 글레프가 콘차크가 이끄는 포로베츠인 등의 원군을 받았다.[97]
- 1185년: 이호르가 포로베츠 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98]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는 포로베츠 원정을 준비했다.[99] 포로베츠인은 리모프 마을을 공격했다.[100] 이고리는 포로베츠인 라브르의 협력으로 탈출에 성공했다.[102]
킵차크인에 관한 전승으로, 오구즈 칸 시대에 임신한 여성이 거대한 나무 구멍에 들어가 낳은 아이가 킵차크인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1]
10세기의 지리서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세계의 경계』(Hudūd al-'Alām) 등에 따르면, 킵차크(Qipcaq)는 키마크(Kīmāk)라는 종족에서 분리된 부족이며, 그 수장은 키마크 전체를 대표했다고 한다.[51]
3. 1. 초기 역사
킵차크인은 투르크계 유목민으로, 유르트라는 이동식 천막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이르티시강 유역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 볼가강 유역을 거쳐 흑해 북부 지역까지 진출했다.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 킵차크인은 비잔티움 제국, 키예프 루스, 헝가리 등 주변 국가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약탈을 하기도 했다. 1089년, 헝가리의 라디슬라오 1세에게 패배하기도 했고, 12세기에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킵차크는 8세기 무윤 추르 비문에 '튀르크-키프차크'로 나타나 튀르크 카간국의 일부였다고 언급되었지만, 비문 손상으로 인해 확실하지 않다.[10] 9세기에 이븐 호르다드베는 그들이 키메크 연맹 내에서 자율성을 유지했다고 언급했다. 10세기 ''후두드 알-알람''에는 키메크가 키프차크 왕을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초, 튀르크 유목민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 쿠만족이 키프차크를 정복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키프차크-튀르크 부족 연맹의 지도자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3. 2. 몽골의 침입과 킵차크 칸국
1223년, 이란에서 코카서스를 거쳐 몽골 제국의 장군 제베와 수베데이가 이끄는 몽골 군이 킵차크 땅에 침입했다.[103] 킵차크족은 알란족(아스족), 레즈기족, 체르케스족 등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양군은 팽팽하게 맞서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몽골이 킵차크에게만 금과 아름다운 의복 등의 선물을 보내 이간질을 시도했기 때문에, 아스족 등의 다른 부족들은 곧 몽골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했다. 킵차크는 그 틈에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갔고, 몽골은 킵차크 또한 공격 대상으로 삼아 다수의 킵차크인을 살해하고, 한 번 보낸 선물을 되찾았다.[103]전 킵차크(포로베츠)의 수령인 콩차크의 아들 유리는 몽골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망쳤지만, 대부분의 킵차크인들은 드네프르 강에 이르기 전에 살해당했다. 몽골군은 일단 물러나 천막으로 돌아갔다. 킵차크(포로베츠)인은 루스 땅으로 도망쳤고, 킵차크의 대공 바스티가 루스의 세례를 받았다.[104]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키예프 공국으로 피난한 킵차크 망명자 중에는 코탄이라는 수령이 있었는데, 그는 갈리치 공작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낙타, 말, 물소, 노예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는 남부 루스의 제후들을 키예프로 소집하여 킵차크에 협력하여 타타르(몽골)족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105]
1223년 5월, 루스 제후 군이 드네프르강에 도착했을 때, 몽골 측에서 "킵차크와 손을 잡지 말고 우리와 동맹을 맺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이 왔지만, 루스 제후들은 이를 거절하고 몽골 측 사자를 살해했다. 드네프르 강을 건너 칼카 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루스-킵차크 연합군은 곧 패배하여 궤멸되었고, 6명의 루스 제후가 전사하고 9할의 병력을 잃었다. 그 후, 키예프 대공 므스티슬라프 3세는 칼카 강 근처 언덕 위에 세운 요새에서 3일 동안 방어전을 펼쳤지만, 항복 후 몽골식으로 시간을 들여 살해당했다.[106]
1236년에는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몽골 제국의 서방 대원정군이 파견되었는데, 킵차크는 이듬해 1237년 봄에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킵차크의 일부는 저항하여 멸망했고, 코찬 등 일부는 동유럽으로 도망갔지만, 대부분은 거의 싸우지 않고 몽골군에 항복하여 원정군에 협력했다.
저항한 킵차크 유목민 중에서는 오르베를리부의 수장 바추만이 유일하게 완강한 저항을 계속했다. 바추만은 몽골군의 군수 물자를 기습하여 괴롭혔다. 바추만은 볼가강 유역의 숲에 숨어 게릴라전을 계속했으므로, 원정군에 참가한 왕족 중 한 명인 몽케는 숲을 포위하여 바추만을 몰아냈다. 궁지에 몰린 바추만은 볼가강의 중주도 섬으로 도망갔지만 따라잡혀 붙잡혀 결국 처형되었고, 킵차크의 모든 영토는 몽골에 병합되었다.[107]
몽골의 정복 후, 저항하다가 포로가 된 많은 킵차크 유목민들이 맘루크로 팔려갔다. 그중 바이바르스와 칼라운 등은 이집트에서 권력을 확립하여 맘루크 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또한, 4만 호의 킵차크는 몽골군의 지배를 피해 헝가리로 이주하여 쿤인이라고 불리는 헝가리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이 되었다.
3. 3. 킵차크인의 이주와 영향
몽골의 침입 이후, 일부 킵차크인은 헝가리로 이주하여 정착했다.[50]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킵차크인 4만 호를 받아들여 그들이 자신의 영토에 살게 했다.[109] 헝가리로 이주한 킵차크인들은 쿤인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했다.[107] 벨라 4세의 후계자인 스테판 5세는 킵차크인 수장 코찬의 딸(쿤 에르제베트)과 결혼했다.[109]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초기 구성원 중에는 킵차크인 출신이 많았다.[50] 킵차크인은 몽골의 정복 이후 포로가 되어 맘루크로 팔려가기도 했다.[107] 대표적인 인물로 바이바르스가 있다.[50] 그는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아이유브 왕조의 맘루크 군에 편입되었으나,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내 맘루크 왕조의 제5대 술탄이 되었다. 그는 시리아 방면으로 서진 중이던 몽골군을 격파하고, 동지중해의 십자군 도시들을 함락시키는 활약을 보였다.[109]
4. 언어와 문화
킵차크인은 튀르크어계 언어인 킵차크어를 사용했다.[27] 13세기 후반에 편찬된 킵차크어-라틴어 사전인 쿠마니쿠스 사본(Codex Cumanicus)은 킵차크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27] 맘루크 왕조 시대 이집트에서 킵차크-아랍어 사전과 문법책이 편찬되기도 했다. 13세기 말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구성원들이 크림반도에서 폴란드-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킵차크어를 함께 가져갔다.[27] 16세기와 17세기 동안, 킵차크인 공동체의 아르메니아인 사이에서 사용된 튀르크어는 아르메노-킵차크어였다.[28]
쿠만어의 문어체는 헝가리 왕국의 쿠만 지역에서 18세기에 사라졌지만, 크림반도의 쿠만어는 크림 타타르어 중앙 방언의 조상이 되었다.[29]
킵차크인의 문화와 관련된 문학 작품으로는 12세기 말 키예프 루스의 문학 작품인 『이고르 군기』가 있는데, 이고르 2세가 킵차크인의 콘차크 칸과의 싸움에서 포로가 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110] 『이고르 공』은 『이고르 군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로, 이고르 스뱌토슬라비치 공의 용감한 싸움을 그린다.
5. 현대의 킵차크인
킵차크어파는 현대의 북서 튀르크어족 분파를 지칭하며, 킵차크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킵차크인의 후손 중 일부는 현재 시베리아 타타르족, 노가이족, 바쉬키르족, 카자흐족, 타타르족(일부), 크림 타타르족(일부), 카라차이족(일부), 크림착인, 카라임족(일부), 쿠미크족(일부) 등으로 알려져 있다.[40]
킵차크인은 현대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 대다수의 조상이다. 킵차크라는 이름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카자흐 부족과 키르기스스탄의 키르기스 부족 이름에 남아있다. 또한 크림반도에는 킵차크라는 마을이 있다.
카자흐어에서 "킵샤크"는 카자흐인의 중가즈 연맹을 구성하는 부족 중 하나이며, 카자흐스탄의 성씨로도 나타난다. 바시키르족에도 킵삭 씨족이 존재한다.[40]
현대 킵차크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킵차크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다.
| 민족 |
|---|
| 시베리아 타타르족 |
| 노가이족 |
| 바쉬키르족 |
| 카자흐족 |
| 타타르족 |
| 크림 타타르족 |
| 카라차이족 |
| 크림착인 |
| 카라임족 |
| 쿠미크족 |
6. 킵차크인과 관련된 논란 및 쟁점
킵차크인과 관련해서는 여러 논란과 쟁점이 존재한다. 킵차크인의 외모와 킵차크인과 쿠만인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6. 1. 킵차크인의 외모
킵차크인의 외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 역사 기록에는 킵차크인이 '파란 눈과 붉은 머리카락(青目赤髪)'을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다.[9] 《대명률(大明律)》 제122조에는 킵차크인이 금발/적발에 푸른/녹색 눈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족은 킵차크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었다.[36][37]그러나 킵차크인의 외모는 단일하지 않았으며, 동아시아적 특징도 나타난다. 가르디지는 킵차크인의 적발과 흰 피부가 "사클라브(슬라브족)"와의 혼혈로 설명된다고 믿었다.[39] 러시아 인류학자 오샤닌(1964)은 현대 킵차크어를 사용하는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에게서 '몽골로이드' 표현형이 우세하며, 이는 중앙아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역사적 킵차크와 페체네그 유목민의 두개골에서도 나타난다고 언급했다.[39]
2018년 네이처에 발표된 유전 연구에서는 서기 10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매장된 두 명의 킵차크 남성 유해를 조사했다. 한 남성은 부계 하플로그룹 C2와 모계 F1b1b의 보균자로, "동아시아 조상의 증가"를 보였다.[39] 다른 남성은 모계 D4의 보균자로, "뚜렷한 유럽 조상"을 보였다.[39]
이러한 다양한 기록과 유전적 증거는 킵차크인이 키프차크 평원에서 여러 민족과 혼혈되며 다양한 외모를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6. 2. 킵차크인과 쿠만인의 관계
킵차크인과 쿠만족의 관계는 불분명하다.[10] 12세기 후반부터 쿠만과 킵차크라는 이름이 전체 연맹을 지칭하는 데 서로 바꿔 사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5]7.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추가 또는 수정할 내용
킵차크인의 역사는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민족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몽골 제국의 일부였던 킵차크 칸국은 고려와 외교적, 군사적 관계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몽골 제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과 간섭은 고려에 큰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킵차크인의 후손들은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과의 문화 교류 및 협력은 한국의 유라시아 외교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킵차크인의 역사적 경험은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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