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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 (핵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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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리니티 실험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에서 진행된 최초의 핵무기 실험으로,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폭격 훈련장에서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실험은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플루토늄을 사용한 내폭형 핵무기 '가젯'의 폭발력을 시험했다. 실험 결과는 25킬로톤 규모의 폭발로,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개발 및 사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실험 장소는 현재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있으며, 핵 시대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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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 (핵 실험)
개요
가젯 폭발 장면 (잭 아에비 촬영)
가젯 폭발 장면 (잭 아에비 촬영)
국가미국
실험 장소뉴멕시코 트리니티 실험장
날짜1945년 7월 16일
실험 종류대기 중 핵 실험
장치 종류플루토늄 내폭 핵분열
폭발력
다음 실험크로스로드 작전
위치 정보
역사적 지정
뉴멕시코 주 등록1968년 12월 20일
미국 국립 역사 랜드마크 지정1965년 12월 21일
국립 사적 등록1966년 10월 15일
지정 번호66000493
실험 정보
실험명 (영어)Trinity, Trinity test
실험 목적핵무기 성능 시험
실험 장치 별칭"가젯" (The Gadget)
실험 장소 설명빙엄에서 떨어진 지역
폭발력 관련 정보
폭발력 (추정)(최근 평가)
이전 추정치에서
기타 정보
인류세 논쟁이 실험이 새로운 인류세의 시작인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함.

2. 역사적 배경

핵무기 개발은 1930년대의 과학적 발견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핵분열의 발견 등 원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크게 진전된 때였다. 동시에 유럽에서는 파시즘 정권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특히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미국영국의 과학자 및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커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핵무기의 이론적 가능성이 확인되자, 양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노력은 1942년 6월 미국 육군 주도 하에 맨해튼 계획으로 통합되었다. 레슬리 그로브스 준장이 총책임을 맡았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무기 설계 및 개발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계획의 주요 목표는 우라늄-235플루토늄-239라는 두 가지 핵분열성 물질을 이용한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라늄 기반 폭탄(리틀 보이)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조였으나, 플루토늄 기반 폭탄(팻 맨)은 핵물질의 특성상 내폭형이라는 복잡하고 검증되지 않은 설계 방식을 채택해야 했다. 이 내폭형 설계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실제 사용 전에 반드시 실험을 통해 그 성능을 검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이 실시된 직접적인 배경이며, 이 실험은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될 원자폭탄의 실전 능력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단계가 되었다.

2. 1. 맨해튼 계획

핵무기 개발은 1930년대 후반의 과학적, 정치적 발전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는 핵분열의 발견을 포함하여 원자의 본질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때였다. 동시에 유럽에서는 파시스트 정부가 등장했는데, 이로 인해 특히 나치 독일 등 파시스트 국가에서 망명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독일 핵무기 계획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이론적으로 핵무기 제조가 가능해지자, 영국미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전면적인 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은 1942년 6월 미국 육군의 권한으로 이관되어 맨해튼 계획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레슬리 그로브스 준장이 계획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무기 개발의 핵심 연구는 뉴멕시코주 북부에 위치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이루어졌으며,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이 외에도 시카고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 등 여러 기관에서 개발 작업이 분담되어 진행되었다.[87]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은 폭탄 제조에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핵분열 물질로 우라늄-235플루토늄-239를 확인했다. 우라늄-235는 리틀 보이 폭탄의 기반이 되었고, 이 폭탄은 별도의 실험 없이 히로시마에 처음 사용되었다. 반면, 트리니티 실험과 나가사키에 사용된 팻 맨 폭탄은 플루토늄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초기 플루토늄 폭탄 설계안은 '띤 맨'으로 불렸는데, 이는 우라늄 폭탄(리틀 보이)과 유사하게 임계 질량에 미치지 못하는 두 개의 플루토늄 덩어리를 빠르게 충돌시켜 하나의 임계 질량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맨해튼 계획에서 연구된 두 가지 유형의 원자 폭탄 작동 원리. 내폭형(아래)은 구조가 복잡하여 실전 사용 전 실험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플루토늄은 복잡한 특성을 지닌 인공 원소였고, 초기에는 그 성질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44년까지 사이클로트론을 통해 극소량의 순수한 플루토늄만 생산되었지만, 실제 무기에는 원자로에서 생산된 킬로그램 단위의 플루토늄이 필요했다. 1944년 4월, 로스앨러모스의 물리학자 에밀리오 세그레는 클린턴 엔지니어 웍스의 X-10 흑연 원자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에 불순물로 플루토늄-240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플루토늄-240은 플루토늄-239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연 핵분열을 일으키는 특성이 있었다. 이로 인해 방출되는 추가 중성자는 총형 방식의 플루토늄 폭탄이 임계 질량에 도달하는 순간 너무 일찍 연쇄 반응을 일으켜, 완전한 폭발이 아닌 약한 핵폭발('피즐')을 유발할 가능성이 컸다. 결과적으로 '띤 맨' 설계는 플루토늄 폭탄에 적용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이 문제에 직면한 과학자들은 기술적으로 더 어려운 내폭형 핵무기 설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43년 9월,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은 핵분열성 물질로 이루어진 '코어'를 서로 다른 폭발 속도를 가진 두 종류의 고성능 폭약으로 감싸는 방식을 제안했다. 빠르게 연소하는 폭약과 느리게 연소하는 폭약을 정교하게 계산된 형태로 배열하고 동시에 폭발시키면, 안쪽으로 향하는 강력한 압축파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폭발 렌즈라고 불리는 이 구조는 충격파를 내부로 집중시켜 고체 플루토늄 코어를 원래 밀도의 몇 배로 순식간에 압축시킨다. 밀도가 높아지면서 임계 질량 미만이었던 코어는 임계 질량을 초과하게 된다. 동시에 충격파는 코어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중성자 발생 장치를 작동시켜, 압축이 완료되는 순간 즉시 핵 연쇄 반응이 시작되도록 유도했다. 이 복잡한 설계는 공학유체역학 분야에서 상당한 연구와 실험을 필요로 했으며, 1944년 8월에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전체가 이 내폭형 설계 개발에 집중하도록 조직이 재편되었다.

2. 2. 핵분열 물질 개발 및 핵무기 설계

1939년 독일의 오토 한프리츠 슈트라스만이 핵분열 반응을 발견한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는 핵무기의 실현 가능성을 조사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1942년 12월 시카고 파일 1호가 가동되어 플루토늄 생산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연구는 미국 육군의 주도 하에 맨해튼 계획으로 본격화되었다. 맨해튼 계획의 주요 목표는 핵무기 내부에서 핵분열연쇄 반응을 일으킬 핵분열성 물질을 개발하고 핵무기 자체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중심으로 여러 시설에서 최고 수준의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다[87]

1944년 1월부터 1945년 7월까지 핵물질 생산을 위한 대규모 공장들이 가동되었고, 여기서 생산된 핵물질의 특성은 핵무기 설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초기 연구 단계에서는 극미량의 우라늄 235 (농축 우라늄)와 플루토늄을 이용하여 무기 설계를 진행했다. 당시에는 핵분열성 물질의 작은 조각을 다른 조각에 빠르게 충돌시켜 전체가 임계 질량에 도달하게 하는 비교적 단순한 총열형(gun type) 방식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우라늄 235는 농축 과정이 당시 기술로는 매우 어려웠던 반면, 플루토늄은 1942년 엔리코 페르미가 개발한 원자로의 부산물로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자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은 사이클로트론에서 만들어진 플루토늄보다 순도가 낮았는데, 특히 Pu-240이라는 동위 원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Pu-240은 자연적으로 핵분열하는 속도가 빨라서, 총열형 폭탄에 사용될 경우 핵분열성 물질 조각들이 완전히 결합하기도 전에 너무 일찍 핵반응이 시작되는 조기 폭발(pre-detonation)을 일으킬 위험이 컸다. 이는 폭탄의 위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이 문제가 1942년에 밝혀지면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총열형 폭탄 설계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새로운 방식의 설계가 필요해졌다.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구형의 플루토늄 코어 주변을 고성능 폭약으로 감싸 동시에 폭발시켜, 그 폭발력으로 플루토늄 코어를 안쪽으로 강력하고 균일하게 압축하는 '''폭축'''(implosion)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플루토늄의 밀도를 순간적으로 높여 임계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원리였다.

그러나 폭축 방식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플루토늄 구체 전체 표면에 모든 방향에서 정확히 동일한 압력이 동시에 가해져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압축력에 조금이라도 불균형이 발생하면, 귀중한 플루토늄 물질이 핵반응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고 밖으로 튕겨나가 폭발이 실패하거나 위력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었다. 이러한 완벽한 동시 압축을 구현하기 위한 특수 폭약 장치, 이른바 "폭축 렌즈"를 개발하는 것은 당시 기술 수준에서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러한 기술적 불확실성 때문에 맨해튼 계획의 군사 부문 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과 과학 부문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폭축형 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실제 기폭 장치의 성능을 검증하는 실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폭축 방식의 설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1945년 2월경 실험을 진행하기로 최종 결정되었고, 실험 시기는 같은 해 7월로 정해졌다[88]

3. 트리니티 실험 준비

트리니티 부지 지도


플루토늄을 이용한 폭축 방식 핵무기의 실제 성능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 아이디어는 1944년 1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처음 논의되었다.[94]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 아이디어를 맨해튼 계획 총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에게 제안했고, 그로브스는 실험을 승인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맨해튼 계획이 플루토늄 생산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만약 실험이 실패할 경우 값비싼 플루토늄을 회수할 방법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연구소 운영 위원회는 노먼 램지에게 플루토늄 회수 방안 연구를 지시했다.

1944년 2월, 램지는 폭발 규모를 줄이고 플루토늄을 회수할 수 있도록 밀폐된 용기 안에서 소규모 실험을 진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된 실험 방식은 불확실성이 컸고, 여기서 얻는 데이터는 실제와 같은 전면적인 폭발 실험에서 얻는 데이터만큼 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실제 사용될 때와 유사한 에너지 방출 범위에서" 실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4년 3월,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로부터 밀폐 용기 내에서 전면적인 폭발 실험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잠정적인 승인을 얻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여전히 실험 실패 시 발생할 막대한 플루토늄 손실 가능성을 걱정했다.

같은 해 3월, 실험 계획 수립 및 실행 책임은 하버드 대학교의 실험 물리학자 케네스 베인브리지에게 맡겨졌다. 그는 폭발물 전문가인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의 지휘 아래 실험 준비를 진행했다. 실험의 성공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준비가 필요했다. 핵폭발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험 결과를 비밀로 유지하고 참가자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외딴 실험 장소를 신중하게 선정해야 했다. 또한, 폭발 위력과 효과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다양한 계측 장비를 설치하고, 실험 진행을 위한 안전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실험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공식 사진가로 버린 브릭스너가 임명되어 수십 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기도 했다.

실험 준비 과정에서는 만일의 실패에 대비하여 플루토늄을 회수하기 위한 거대한 강철 용기인 '''점보'''가 제작되었으며[96], 실제 실험에 사용될 핵폭탄인 '''가젯'''이 조립되어 30m 높이의 철탑 위에 설치되었다.[93] 이는 폭발 효과를 극대화하고 방사성 낙진을 줄이며, 항공기 투하 상황을 모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계측 장비의 정확도를 높이고 절차를 점검하기 위해 본 실험 전 5월 7일에는 약 97975.98kg의 TNT를 이용한 예비 폭발 실험이 실시되기도 했다.[93]

3. 1. 암호명 '트리니티'

실험에는 암호명이 필요했고,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이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이 명칭의 정확한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오펜하이머가 존 던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명이 자주 언급된다. 오펜하이머는 과거 교제했던 진 태틀록을 통해 던의 작품을 접했는데, 그녀는 1944년 7월 자살했다.

1962년, 레슬리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실험 이름의 유래에 대해 물었다. 그는 "트리니티"라는 이름이 미국 서부의 이나 이름으로 흔하게 사용되므로, 실험이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이 이름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 확실히 제가 트리니티라는 이름을 제안했지만, 그 유래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제가 왜 이 이름을 선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가 당시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기억합니다. 제가 잘 알고 사랑하는 존 던의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쓴 것입니다. 다음은 이 시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As West and East / In all flatt Maps—and I am one—are one, / So death doth touch the Resurrection.'|'서쪽과 동쪽이 / 모든 평면 지도에서—나 또한 그러하듯—하나이듯, / 그렇게 죽음은 부활에 닿으리.'영어 ("Hymn to God My God, in My Sicknesses")」

오펜하이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이 시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기술은 없지만, 던이 쓴 또 다른 잘 알려진 찬송가는 다음 구절로 시작합니다. 「'Batter my heart, three person'd God;—.'|'내 마음을 두드리소서, 세 위격의 신이여;—.'영어 (Holy Sonnets XIV)」 이 이상의 단서는 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89]

한편, 오펜하이머의 모호한 답변과 그가 산스크리트어에 친숙했다는 점을 들어, 트리니티가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힌두교의 트리무르티, 즉 창조신 브라흐마,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가 하나의 존재로서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개념에서 유래했다는 추측도 제기된다[90]。오펜하이머의 전기를 저술한 역사학자 마틴 셔윈 등도 오펜하이머가 언급한 던의 시가 이러한 힌두교적 개념을 연상시킨다고 본다[91]

3. 2. 실험 부지 선정 및 시설 구축



트리니티 실험장(붉은색 화살표)


베이스 캠프. 앞에 보이는 건물 2동과 풍차 펌프는 데이비드 맥도날드의 목장 시설이었다.


1944년 3월, 실험 계획은 하버드 대학교의 실험 물리학자 케네스 베인브리지에게 맡겨졌으며, 그는 폭발물 전문가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의 지휘 아래 이 임무를 수행했다. 실험의 비밀 유지와 참가자 안전 확보를 위해 외진 장소가 필수적이었다.

로스앨러모스와의 거리, 접근성 등을 고려하여 캘리포니아주에서 텍사스주에 이르는 8곳의 후보지를 검토했다. 베인브리지 등이 직접 현지 조사를 거쳐 뉴멕시코주 중남부 사막 지대인 호르나다 델 무에르토(Jornada del Muerto, 스페인어로 '죽은 자의 여정'이라는 뜻)가 최종 실험 장소로 선정되었다.[88] 이곳은 과거 미국 육군이 징발했던 맥도날드 가문의 넓은 목장 부지의 일부였으며, 당시 앨러모고도 폭격 시험장(현 화이트 샌즈 미사일 발사 시험장)의 북쪽 끝에 해당했다. 구체적인 위치는 뉴멕시코주 카리조조와 소코로의 중간 지점(북위 33.675도, 서경 106.4756도)이었다.

실험을 위해 다양한 시설이 건설되었다. 폭발 중심점(그라운드 제로)에서 북쪽, 서쪽, 남쪽으로 각각 1만 야드(약 9km) 떨어진 지점에 N-10000, W-10000, S-10000으로 명명된 대피소가 만들어졌다. 이 대피소들은 두꺼운 콘크리트 지붕과 목재 지지대로 강화되었다. 특히 남쪽의 S-10000 대피소는 실험 전체를 지휘하는 사령 센터로 사용되었다. 사령 센터에서 다시 남쪽으로 5마일(약 8km) 떨어진 곳에는 베이스 캠프가 설치되었고, 그라운드 제로에서 북서쪽으로 20마일(약 32km) 떨어진 콤파니아(Compañia|콤파니아es) 언덕에는 주요 인사들을 위한 관측소가 마련되었다.[92] 또한, 실험 장비와 자재를 원활하게 운반하기 위해 그라운드 제로까지 이어지는 약 40km 길이의 포장도로가 건설되었다.[93]

3. 3. 예비 실험 (100톤 TNT)

108톤 TNT를 이용한 예비 실험 장면


100톤 시험을 위해 고성능 폭발물 상자를 쌓는 모습


본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기회가 단 한 번뿐이었기 때문에, 케네스 베인브리지는 계획과 절차를 검증하고 계측 장비를 시험하며 보정하기 위한 예비 실험(rehearsal)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으나 이를 승인했고, 나중에 이 결정이 트리니티 실험 성공에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했다.[13][14]

예비 실험을 위해 트리니티 핵실험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남동쪽으로 약 731.52m 떨어진 지점에 약 6.10m 높이의 나무 플랫폼이 건설되었다. 플랫폼 위에는 약 81419.85kg의 TNT와 약 13526.13kg의 Composition B가 나무 상자에 담겨 팔각형 프리즘 형태로 쌓였다. 총 폭발력은 약 108톤 TNT에 해당했으며, 이는 명목상의 "100톤"보다 약간 많은 양이었다.[13][14]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는 사용된 폭발물이 충격에 안전하다고 베인브리지를 안심시켰는데, 실제로 상자를 플랫폼으로 옮기던 중 일부가 떨어졌음에도 폭발하지 않아 안전성이 증명되었다. 폭발물의 방사능 확산을 추적하기 위해, 워싱턴주 핸퍼드에서 가져온 방사성 슬러그를 녹인 용액(베타선 1000Ci, 감마선 400Ci)을 해밀턴이 유연한 튜브를 통해 폭발물 더미에 주입했다.

원래 5월 5일로 예정되었던 실험은 추가 장비 설치를 위해 이틀 연기되었다. 더 이상의 연기는 본 실험 일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 거부되었다. 폭발 시각은 5월 7일 산악 전쟁 시간(MWT) 04:00로 정해졌으나, 관측 임무를 맡은 216 공군 기지 부대 소속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조종사: 클라이드 "스탠" 쉴즈 소령)가 제 위치를 잡을 시간을 주기 위해 37분 지연된 04:37에 실시되었다.

폭발로 발생한 화구는 약 96.56km 떨어진 앨러모고도 육군 비행장에서도 관측될 정도였으나, 약 16.09km 거리의 베이스캠프에서는 충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약 4572.00m 상공의 B-29에서도 폭발은 "아름답게" 보였지만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고 보고되었다. 허버트 L. 앤더슨은 납으로 보강된 M4 셔먼 전차를 이용해 폭발 지점에 생성된 약 1.52m 깊이, 약 9.14m 너비의 크레이터에 접근하여 토양 샘플을 채취하는 연습을 했다. 이때 방사능 수치는 보호 장비 없이 몇 시간 동안 노출되어도 안전할 정도로 낮았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전기 신호 문제로 폭발이 예정보다 0.25초 일찍 일어나면서 정밀한 타이밍이 요구되는 일부 실험은 실패했다. 앤더슨 팀이 개발한 압전 게이지는 108톤 TNT 폭발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했지만, 루이스 알바레즈와 로버트 월드먼이 사용한 공중 콘덴서 게이지는 정확도가 훨씬 떨어졌다. 이 예비 실험은 핵폭발 위력을 TNT 환산 톤 단위로 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93]

이 예행 연습을 통해 과학적, 기술적 문제점 외에도 여러 실질적인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예행 연습에 100대 이상의 차량이 동원되었음에도 본 실험에는 더 많은 차량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더 나은 도로와 정비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통신 강화를 위해 더 많은 라디오와 전화선이 필요했고, 차량으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전선들을 땅에 묻어야 했다. 로스 앨러모스와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 텔레타이프가 설치되었다. 대규모 회의와 브리핑을 위한 공간(타운 홀) 건설과 식당 시설 개선도 필요했다. 또한 차량 이동으로 발생하는 먼지가 일부 계측 장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약 약 32.19km의 도로를 포장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보완하며 본 실험 준비가 진행되었다.

3. 4. '점보' (격납 용기)

실험 실패 시 귀중한 플루토늄을 회수할 필요성에 따라,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명령으로 거대한 강철 압력 용기가 준비되었다.[96] 이 용기는 '''점보'''(Jumbo)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렸다.[96]

점보의 무게는 240ton에 달했으며,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밥콕 앤 윌콕스(Babcock & Wilcox)사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제작되어 철도를 통해 실험장까지 운반되었다.[96] 초기 계획은 플루토늄 코어와 5ton의 재래식 폭약을 점보 내부에 넣고 폭발시키는 것이었다.[96] 폭축이 성공하여 핵 연쇄 반응이 일어나면 점보는 고열로 증발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만약 연쇄 반응이 실패하면 점보가 폭발을 막아 고가의 플루토늄을 회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96]

트리니티 실험을 위해 준비된 점보(Jumbo) 강철 격납 용기.


하지만 점보가 실험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폭축 설계에 대한 과학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실제 실험에서는 점보를 사용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되었다.[96] 대신 점보는 폭발의 위력을 측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폭발 지점('그라운드 제로')에서 약 730m 떨어진 다른 강철탑 위에 설치되었다.[96] 이 거리는 사전에 계산된 예상 폭발력에 기반하여 결정되었다.[96] 트리니티 실험의 폭발 이후 점보 자체는 파괴되지 않고 남았으나, 점보를 지탱하던 철탑은 강력한 폭풍에 의해 붕괴되었다.[96]

3. 5. '가젯' (핵폭탄) 조립

"가젯(gadget)"이라는 용어는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폭탄을 완곡하게 부르는 말로[15], 1944년 8월 로스앨러모스의 무기 물리학 부서인 "G 부서"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특정 장치를 지칭하지 않았지만, 개발이 진행되면서 트리니티 실험 장치의 암호명이 되었다.[15] 트리니티 폭탄의 공식 명칭은 Y-1561 장치였으며, 이는 이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팻 맨과 동일한 설계였다. 다만, 트리니티 폭탄에는 퓨즈 장치와 외부 탄도 케이싱이 없었으며, 폭탄 설계는 계속해서 작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폭탄의 기본 핵 구성 요소. 플루토늄 구체를 포함하는 우라늄 슬러그는 조립 과정의 후반부에 삽입되었다.


설계를 단순하게 유지하기 위해, 속이 빈 코어가 플루토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계산 결과에도 불구하고 거의 속이 꽉 찬 구형 코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6] 이 코어는 고성능 폭축 렌즈에 의해 생성된 내파 충격으로 즉발 초임계 상태로 압축되도록 설계되었다. 이 설계는 물리학자 로버트 F. 크리스티(Robert F. Christy)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 코어" 또는 "크리스티 핏"으로 알려졌는데,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가 처음 제안한 아이디어를 크리스티가 실현 가능한 설계로 만들었다.[16][17][18]

사용된 플루토늄은 여러 플루토늄 동소체 중 가공성이 좋은 δ(델타) 상이었으며, 갈륨과의 합금을 통해 실온에서 안정화시켰다. 두 개의 동일한 플루토늄-갈륨 합금 반구(일련 번호 HS-1, HS-2)는 처음에 은으로 도금되었으나,[19] 6.19kg의 방사성 코어에서 발생하는 15W의 열로 인해 약 약 37.8°C 에서 약 43.3°C까지 온도가 올라가면서[20] 은 도금에 물집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물집을 갈아내고 금박으로 다시 덮었으며, 이후 제작된 코어는 니켈로 도금되었다.[20]

핵심 부품이나 폭발 렌즈 없이 폭탄의 시험 조립이 7월 3일 로스 알라모스에서 노리스 브래드버리(Norris Bradbury)가 이끄는 폭탄 조립 팀에 의해 수행되었다. 7월 7일과 10일에 폭발 렌즈 세트들이 도착했고, 브래드버리와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George Kistiakowsky)가 검사하여 가장 좋은 렌즈를 선택했다. 나머지 렌즈들은 에드워드 크루츠(Edward Creutz)에게 넘겨져 로스 알라모스 근처 파하리토 캐년에서 핵 물질 없이 시험 폭발을 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시험의 자기 측정 결과는 내파가 충분히 동시에 일어나지 않아 폭탄이 실패할 수 있음을 시사했지만, 한스 베테는 밤새 결과를 분석하여 완벽한 폭발과 일치한다고 보고했다.

오른쪽


핵 캡슐 조립은 1945년 7월 13일, 클린룸으로 개조된 맥도날드 목장 주택의 침실에서 시작되었다. 폴로늄-베릴륨으로 만들어진 "어친"(Urchin) 개시제가 먼저 조립되었고, 루이스 슬로틴(Louis Slotin)이 이를 플루토늄 코어의 두 반구 사이에 조심스럽게 배치했다. 이후 시릴 스탠리 스미스(Cyril Smith)는 이 코어를 천연 우라늄으로 만들어진 탬퍼 플러그("슬러그") 안에 넣었다. 코어와 탬퍼 사이의 미세한 공기 간격은 0.5mil 두께의 금박으로 채워졌고, 탬퍼 플러그의 두 반쪽은 우라늄 와셔와 나사를 사용하여 단단히 고정되었다.

최종 조립을 위해 타워 기저부에서 내려지고 있는 폭탄


조립된 핵 캡슐(내부 폭발물 어셈블리)은 실험 타워 기저부로 옮겨졌다. 약 47.63kg 무게의 캡슐에 임시 아이 볼트를 나사로 고정하고, 체인 호이스트를 사용하여 캡슐을 외부 폭발물 어셈블리 안으로 천천히 내렸다. 캡슐이 우라늄 탬퍼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도중 걸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로버트 바처(Robert Bacher)는 플루토늄 코어 자체의 열로 인해 캡슐이 미세하게 팽창한 반면, 탬퍼를 포함한 외부 폭발물 어셈블리는 사막의 밤 기온으로 인해 냉각되었기 때문임을 파악했다. 캡슐을 탬퍼에 접촉시킨 상태로 잠시 기다리자 두 부품의 온도가 같아졌고, 몇 분 후 캡슐은 제자리로 완전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캡슐에서 아이 볼트를 제거하고 나사산이 있는 우라늄 플러그로 교체한 뒤, 붕소 디스크를 캡슐 위에 놓아 탬퍼 주변의 얇은 구형 붕소 쉘을 완성했다. 이후 알루미늄 플러그를 푸셔(탬퍼를 감싸는 알루미늄 쉘)의 구멍에 나사로 고정하고, 나머지 두 개의 고성능 폭발 렌즈를 제자리에 설치했다. 마지막으로 상부 두랄루민(Duralumin) 극관을 볼트로 고정하여 활성 물질과 고성능 폭발물의 조립을 1945년 7월 13일 17시 45분에 완료했다.

조립이 완료되어 실험을 기다리는 가젯


다음 날인 7월 14일, 완성된 '가젯'은 약 30.48m 높이의 강철 실험 타워 꼭대기로 끌어 올려졌다. 타워는 콘크리트 기초 위에 세워진 네 개의 다리로 지지되었고, 꼭대기에는 참나무 플랫폼과 서쪽이 개방된 골판지로 만든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가젯은 전기 윈치를 사용하여 끌어올려졌으며, 만일의 경우 케이블이 끊어져 가젯이 떨어질 것에 대비해 타워 아래에는 매트리스 더미가 놓였다. 타워 위로 옮겨진 후, 작업자들은 32개의 Model 1773 EBW 기폭 장치를 각각 부착했다. 폭탄의 완전한 조립은 7월 14일 17시에 완료되었다. 최종 점검 및 연결 작업은 7월 15일 밤 10시 직후, 베인브리지, 키스티아코프스키, 조셉 맥키븐(Joseph McKibben)과 부시 중위 등 4명의 군인을 포함한 7명의 조립팀에 의해 수행되었다.

3. 6. 실험 참가자 및 관측

1944년 3월, 실험 계획은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교수인 케네스 베인브리지에게 할당되었으며, 그는 폭발물 전문가인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의 지휘 아래 이 임무를 수행했다. 베인브리지의 그룹은 초기에는 E-9(폭발물 개발) 그룹으로 알려졌으나, 1944년 8월 개편에서 X-2 (개발, 엔지니어링 및 테스트) 그룹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84] 이전 전미 안전 협의회 출신인 스탠리 커쇼가 안전 책임자로 임명되었고[84], 미국 육군 대위 사무엘 P. 다발로스(Samuel P. Davalos)는 로스 앨러모스 부대 공병 보좌관으로서 건설을 담당했다.[85] 미국 육군 제1중위 해럴드 C. 부시가 트리니티 기지 캠프의 사령관을 맡았다.[86] 과학자 윌리엄 페니, 빅터 바이스코프, 필립 문이 컨설턴트로 참여했으며, 실험을 위해 총 7개의 하위 그룹이 구성되었다.[87]

그룹책임자
TR-1 (서비스)존 해리 윌리엄스
TR-2 (충격 및 폭발)존 헨리 맨리
TR-3 (측정)로버트 R. 윌슨
TR-4 (기상)J. M. 허바드
TR-5 (분광 및 사진)줄리안 E. 맥
TR-6 (공중 측정)버나드 월드먼
TR-7 (의학)루이스 헴펠만



실험 장소로는 비밀 보장이 가능하고 실험 데이터 획득 및 참가자 안전 확보에 적합한 곳이 필요했다. 여러 후보지 중 뉴멕시코주 중남부 사막 지대인 Jornada del Muerto|호르나다 델 무에르토es(스페인어로 '죽은 자의 여정'이라는 뜻)가 최종 선정되었다.[88] 이곳은 화이트 샌즈 미사일 발사장의 일부였다. 실험의 그라운드 제로(폭발 중심점)에서 북, 서, 남쪽으로 각각 약 9144.00m 떨어진 지점에 N-10000, W-10000, S-10000으로 명명된 대피호가 건설되었고, 이 중 S-10000이 사령 센터였다. S-10000에서 남쪽으로 약 8.05km 떨어진 곳에는 베이스 캠프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북서쪽으로 약 32.19km 떨어진 Compañia|콤파니아es 언덕에는 주요 인사들을 위한 관측소가 마련되었다.[92] 실험의 공식 사진가로는 버린 브릭스너가 지정되어 수십 대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실험 당일인 1945년 7월 16일, 포츠담 회담 일정에 맞춰 날짜가 결정되었으나 악천후가 예상되었다. 기상학자 잭 허버드는 날씨 악화를 예측하며 우려를 표했지만[101],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원래 오전 4시로 예정되었던 실험은 심한 뇌우로 인해 연기되었고, 허버드는 오전 5시 30분으로 시간을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허버드에게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103] 오전 4시 45분 날씨가 호전되자, 5시 10분에 최종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사령 센터인 S-10000 대피호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 계획 부관인 토머스 파렐 준장 등이 있었고, 그라운드 제로에서 최종 작업을 마친 베인브리지와 키스티아코프스키도 합류했다. 그로브스 소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남서쪽 베이스 캠프에서 실험을 지켜보았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온 과학자들과 기타 참관자들은 약 32km 떨어진 콤파니아 언덕에서 관측했다.[104] 최종 카운트다운은 물리학자 새뮤얼 앨리슨이 맡았다.

현지 시간(산악부 전시 표준시) 오전 5시 29분 45초, 핵폭탄 '가젯'이 폭발했다.[106] 폭발 위력은 TNT 환산 약 25kt에 상당했다.[107][83] 폭발 순간 주변 산들이 낮처럼 밝아졌고, 베이스 캠프에서도 오븐과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폭발 섬광은 보라색에서 녹색, 그리고 흰색으로 변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일하게 지급된 보호 안경 없이 트럭 앞 유리를 통해 폭발을 관찰했다고 기록했다.[108] 폭발음은 약 40초 후에 관측자들에게 도달했으며[84], 충격파는 약 160.93km 밖에서도 감지되었다. 버섯 구름은 고도 12km까지 치솟았다. 엔리코 페르미는 폭풍이 도달하기 전후로 종이 조각을 떨어뜨려 그 이동 거리를 측정하여 폭발력을 약 10kt으로 추정했다.[109]

폭발을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를 떠올렸다고 훗날 회고했다.[110] 실험 책임자 베인브리지는 오펜하이머에게 "이제 우리 모두 개자식들이 되었군"이라고 말했다. 프랭크 오펜하이머에 따르면, 그와 형 로버트는 폭발 순간 "성공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는 폭발 위력을 18kt으로 예측하여 내기에서 이겼다.[100] 반면 에드워드 텔러는 예상보다 작은 위력에 실망감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4. 트리니티 실험 실시



맨해튼 계획에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은 중요한 기술적 과제에 직면했다. 원자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은 사이클로트론에서 만들어진 플루토늄과 달리 특정 동위 원소(플루토늄-240)의 함량이 높아, 단순한 포신형 핵무기 설계로는 핵물질이 충분히 압축되기 전에 중성자가 방출되어 조기 핵분열을 일으킬 위험이 컸다. 이는 폭탄의 위력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문제였다. 1942년 이 문제가 제기되자, 플루토늄 폭탄 설계를 근본적으로 변경하여 구형의 플루토늄 코어를 재래식 폭약으로 둘러싸 사방에서 동시에 강력한 압력을 가해 압축시키는 '''내파(implosion)''' 방식이 고안되었다.[88]

내파 방식의 성공 여부는 플루토늄 구체 전체 표면에 순간적으로 균일한 압력을 가하는 데 달려 있었다. 압축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균형이 발생하면 핵물질이 설계된 대로 압축되지 않고 일부가 밖으로 튕겨나가 핵폭발이 실패하거나 위력이 크게 줄어들 수 있었다. 당시 기술 수준으로 완벽한 구형 충격파를 생성하는 폭축 렌즈를 개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기에, 맨해튼 계획의 군사 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과 과학 부문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내파형 폭탄을 실전에 투입하기 전에 반드시 실제 실험을 통해 그 성능과 신뢰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내파 설계의 가능성이 확인된 1945년 2월경, 실험 시기는 7월로 잠정 결정되었다.[88]

실험 계획 수립은 하버드 대학교의 실험 물리학자 케네스 베인브리지가 이끌었다. 실험 장소는 폭발 위력이 불확실한 핵실험의 결과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비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으며, 동시에 실험 데이터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참가자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에 이르는 8곳의 후보지를 검토하고 현지 조사를 거친 끝에, 뉴멕시코주 남부 호르나다 델 무에르토( Jornada del Muerto|호르나다 델 무에르토es, 스페인어로 '죽음의 여로'라는 뜻) 사막 지대가 최종 선정되었다.[88] 이곳은 당시 화이트 샌즈 미사일 시험장의 일부였던 앨러모고도 폭격 시험장 북쪽 끝에 위치한 광활한 지역이었다.

실험 준비를 위해 폭심지(Ground Zero)로 설정된 지점에서 북쪽, 서쪽, 남쪽으로 각각 약 9144.00m(약 9km) 떨어진 곳에 N-10000, W-10000, S-10000으로 명명된 지하 대피호가 건설되었다. 이 중 남쪽의 S-10000 대피호가 실험 통제를 위한 사령 센터 역할을 맡았다. S-10000에서 남쪽으로 약 약 8.05km(약 8km) 떨어진 지점에는 베이스 캠프가 설치되었고, 폭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약 32.19km(약 32km) 떨어진 콤파니아(Compañia) 언덕에는 주요 인사들을 위한 관측소가 마련되었다.[92] 실험 장비와 자재 운반을 위해 총 40km에 달하는 도로가 새로 포장되었으며,[93] 폭발 위력과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 지진계, 지중 청음기, 전리층 측정기, 분광기 등 다양한 과학 장비가 설치되었다.[94] 계측 장비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1945년 5월 7일에는 108ton의 TNT를 폭발시키는 예비 실험이 실시되었다. 이 실험은 핵폭발 위력을 TNT 기준으로 환산하는 계기가 되었다.[93]

실제 원자 폭탄 투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을 만들고 지표면 낙진 생성을 줄이기 위해, 실험용 핵 장치는 지상 30m 높이의 견고한 강철 실험탑 위에 설치하기로 결정되었다.[93] '가젯'(Gadget)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실험 장치는 7월 12일, 실험장 내에 있던 옛 맥도날드 목장 건물에서 플루토늄 코어를 포함한 최종 조립에 들어갔다. 조립은 7월 13일에 완료되었고, 다음 날인 14일 실험탑 꼭대기로 조심스럽게 인양되었다.

한편, 그로브스 소장은 만약 내파가 실패하여 핵폭발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매우 귀하고 값비싼 플루토늄을 회수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의 지시로 '점보(Jumbo)'라는 코드네임의 거대한 강철 용기가 제작되었다. 무게가 240ton에 달하는 점보는 내부에 '가젯'을 넣고 폭발시켜, 만약 핵 연쇄 반응이 실패하더라도 폭발력을 용기 내부에 가두어 플루토늄이 흩어지는 것을 막도록 설계되었다.[96]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제작된 점보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철도로 실험장까지 운반되었다. 그러나 점보가 도착할 무렵에는 과학자들이 내파 설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자신감을 갖게 되어, 실제 실험에서 점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점보는 폭심지에서 약 730m 떨어진 다른 철탑에 설치되어 폭발의 위력을 견뎌내는 시험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실험 결과, 점보 자체는 파괴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지지하던 철탑은 강력한 폭풍파에 의해 붕괴되었다.

실험 예정일 결정에는 임박한 포츠담 회담 일정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과의 협상에 앞서 미국의 새로운 강력한 무기 보유 사실을 알기를 원했고, 이에 따라 실험은 회담 시작일인 7월 16일에 맞춰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부품 준비가 완료되는 가장 빠른 날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날씨가 변수로 작용했다. 실험장의 기상 예측 책임자였던 잭 허버드(Jack Hubbard)는 실험 예정일 며칠 전부터 당일 악천후를 예보하며 실험 연기를 건의했지만, 정치적 일정을 우선시하는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101]

예정대로 7월 16일 새벽이 밝았지만, 실험장은 예보대로 심한 뇌우에 휩싸였다. 실험을 강행할 경우, 비는 방사능 낙진의 위험을 증가시키고 번개는 실험탑 위의 '가젯'에 전기적 충격을 주어 오작동이나 조기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원래 예정되었던 오전 4시 실험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허버드는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는 날씨가 잠시 호전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에 따라 실험 시각은 오전 5시 30분으로 재조정되었다.[102][103]

오전 4시 45분, 마침내 날씨가 개기 시작했다는 기상 보고가 들어왔고, 오전 5시 10분, 물리학자 새뮤얼 킹 앨리슨은 최종 20분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오펜하이머 형제, 토머스 파렐 준장 등 맨해튼 계획의 핵심 인물들은 사령 센터인 S-10000 대피호에서 숨죽이며 결과를 기다렸다. 그로브스 소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더 남쪽에 위치한 베이스 캠프에서 실험을 지켜보았다. 베인브리지와 조지 키스차코프스키 등 실험 준비의 마지막 단계를 수행한 과학자들도 카운트다운 시작 직전 S-10000 대피호로 합류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온 다른 과학자들과 군 관계자, 소수의 참관인들은 약 32km 떨어진 콤파니아 언덕을 비롯한 여러 지정된 관측 지점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104]

현지 시각(산악부 전시 표준시, MWT[105]) 오전 5시 29분 45초,[106] 인류 최초의 핵폭탄 '가젯'은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폭발 위력은 TNT 환산 약 25kt[107][83] (2021년 재분석 결과 24.8 ± 2kt[30])으로 측정되었다. 이 실험의 성공은 내파형 플루토늄 폭탄의 실용성을 입증했으며, 곧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4. 1. 폭발 및 관측 결과

고속 카메라로 촬영된, 가젯 폭발 후 0.016초 후의 화구 (크기는 약 ). 지평선에 있는 검은 점은 나무이다.


트리니티 실험 비디오


폭발은 원래 7월 16일 오전 4시(산악부 전시 표준시, MWT)로 예정되었으나, 새벽에 내린 비와 번개 때문에 연기되었다. 비는 방사능 낙진의 위험을 높였고, 번개는 전기 시스템 오작동으로 인한 조기 폭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오전 4시 45분에 날씨가 좋아졌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5시 10분에 새뮤얼 앨리슨이 최종 20분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현지 시간 5시 29분 45초[106] (11시 29분 21초 GMT ± 15초)에 장치가 폭발했다.

폭발 순간, 주변 산들은 1~2초 동안 "낮보다 더 밝게" 빛났고, 약 16km 떨어진 베이스 캠프에서는 "오븐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고 보고되었다. 관찰된 빛의 색깔은 보라색에서 녹색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흰색으로 변했다. 폭발을 목격한 많은 이들이 그 강렬한 빛에 놀라움을 표했다. 제임스 코넌트는 "빛의 거대함과 그 지속 시간에 나는 완전히 멍해졌다"고 썼고, 약 43km 떨어진 곳에 있던 어니스트 로런스는 "순식간에 어둠에서 눈부신 햇빛으로 따뜻하고 밝은 노란색 흰색 빛에 휩싸였다"고 기록했다. 랄프 칼라일 스미스와 조안 힌튼 등 다른 관찰자들도 폭발 순간의 강렬한 빛과 이후 변화하는 불덩어리의 색깔, 연기 기둥의 모습, 그리고 뒤따라온 굉음을 생생하게 묘사했다.[32][34]

폭발 후 약 40초 만에 충격파의 굉음이 관측자들에게 도달했다. 충격파는 약 160.93km (약 16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되었으며, 버섯구름은 고도 약 12.07km (약 12km)까지 치솟았다. 엔리코 페르미는 폭풍파가 도달하기 직전과 직후에 작은 종이 조각들을 떨어뜨려 그 이동 거리를 측정하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폭발 위력을 추정했다. 그는 종이 조각이 약 2.5m 밀려난 것을 보고 폭발력이 TNT 환산 약 10kt에 해당한다고 추산했다.[42][109]

실험 책임자 케네스 베인브리지는 폭발 직후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이제 우리 모두 개자식들이 되었군(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이라고 말했다.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는 오펜하이머가 성공 후 의기양양하게 걷는 모습을 "마치 하이 눈... 이런 종류의 뽐내는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오펜하이머 자신은 나중에 폭발을 보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 "이제 나는 죽음이 되었고, 세상을 파괴하는 자가 되었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38]가 떠올랐다고 회고했다.[38][110]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T(이론) 부서는 폭발 위력을 TNT 환산 5~10kt 사이로 예측했다. 폭발 직후, 납으로 보강된 두 대의 M4 셔먼 탱크가 폭심지로 투입되어 토양 샘플을 채취했다. 이 샘플의 방사화학 분석 결과, 실제 폭발 위력은 약 18.6kt TNT로 밝혀졌다. 다른 측정 방법들도 사용되었다. 폭풍파의 압력을 측정한 결과는 9.9kt TNT ± 1.0kt TNT 또는 약 10kt TNT로 나타났다. 다양한 측정 방법과 방사선 측정 결과 등을 종합하여, 트리니티 폭탄의 총 위력은 공식적으로 21kt TNT로 추정되었다.[47] 이 중 약 15kt TNT는 플루토늄 코어의 핵분열에서, 나머지 약 6kt TNT는 천연 우라늄 탬퍼의 핵분열에서 발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48] 2021년에 발표된 데이터 재분석 결과는 위력을 24.8 ± 2kt TNT로 제시했다.[30]

해수면 근처에서 "중간" 킬로톤 범위의 핵분열 폭탄의 에너지 분포
에너지 형태비율
폭발50%
열 에너지35%
초기 전리 방사선5%
잔류 낙진 방사선10%
트리니티 실험 및 기타 실험에서 얻은 현대적 기본 물리학 데이터는 해수면 근처에서 핵분열 폭발에 대해 위와 같은 총 폭발 및 열 에너지 분획을 관찰했다.[43][44][45]



실험 직후 트리니티 크레이터의 항공 사진. 화면 오른쪽 하단(남동) 모서리에 보이는 작은 크레이터는 TNT 약 100t을 사용한 예비 실험으로 생긴 크레이터


실험 후 폭심지


납으로 내장한 셔먼 전차. 폭발 몇 시간 후 폭심지로 향했다.


폭발로 인해 폭심점에는 높이 약 30.48m(약 30m)의 철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깊이 약 약 1.43m (약 1.4m), 너비 약 80.47m (약 80m)의 크레이터가 생겼다.[31] 크레이터 주변 반경 약 약 301.75m (약 300m) 범위의 사막 모래는 폭발열에 녹아 트리니타이트라고 불리는 연녹색의 방사성 유리가 되었다.[31] 트리니타이트는 주로 녹은 장석석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레이터는 실험 직후 안전을 위해 메워졌다.

폭발 효율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폭발 당일 늦게 페르미와 허버트 앤더슨 등이 납으로 보강된 M4 셔먼 탱크를 타고 폭심지로 향했다. 그들의 임무는 토양 샘플을 채취하여 플루토늄과 핵분열 생성물의 비율을 분석하는 것이었다.[112][113] 페르미가 탄 탱크가 고장 나면서 앤더슨 등이 탄 탱크만 크레이터에 도달하여 샘플을 채취했다.[112][113] 이 과정에서 승무원들은 상당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된 것으로 보고되었다.[114]

4. 2. 폭심지 및 핵물질 변화



폭발로 인해 약 30.48m 높이의 발사 타워는 완전히 증발했으며,[31] 사막의 폭심지에는 깊이 3m, 직경 330m의 크레이터가 남겨졌다. 크레이터 내부에서는 주로 이산화 규소(실리카)로 이루어진 사막의 모래가 녹아 밝은 녹색을 띠며 약간의 방사능을 가진 유리질 물질로 변했다. 이 물질은 트리니타이트로 명명되었으며,[31] 열에 의해 용해된 장석석영으로 이루어진다.

폭발의 효율을 측정하기 위해 플루토늄과 핵분열 생성물의 비율을 비교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폭발 후 폭심지에 접근하여 토양 샘플을 수집해야 했다. 이를 위해 으로 내부를 덧댄 M4 셔먼 전차 두 대가 동원되었다.[112][113] 엔리코 페르미와 허버트 L. 앤더슨 등이 전차를 이용해 폭심지로 접근했다. 앤더슨 등은 전차를 타고 번갈아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샘플을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승무원들은 상당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된 것으로 보고되었다.[114] 한편, 페르미가 탑승했던 전차는 폭심지로 향하던 중 고장 나기도 했다.[112][113]

크레이터는 실험 직후 메워졌다.

5. 실험 결과 및 영향

트리니티 실험은 인류 최초의 핵폭발 성공이라는 기술적 성과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광범위하고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험의 성공은 핵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동시에,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 방식과 전후 국제 질서 형성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실험 직후 발생한 방사성 낙진은 실험장 인근 지역을 오염시키고 주민들에게 피폭 피해를 입혔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이러한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피해 주민들은 오랫동안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등 핵 개발 과정에서의 윤리적 문제와 정보 통제 논란을 야기했다. 또한, 실험으로 인해 생성된 트리니타이트는 분화구 주변의 방사능 수치를 높였다.

기술적으로 트리니티 실험은 내폭형 플루토늄 폭탄의 실용성을 입증했으며, 이는 곧이어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폭탄의 기반이 되었다. 실험 결과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전쟁 종결을 앞당겼다는 평가와 함께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국제 정치적으로 트리니티 실험 성공 소식은 포츠담 회담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되어, 그의 대(對)소련 외교 자세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스탈린은 이미 첩보 활동을 통해 미국의 핵 개발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핵무기 보유 사실 확인은 소련의 자체 핵 개발을 더욱 가속화시켜 이후 냉전 시대의 핵 경쟁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험 자체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스마이스 보고서 등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이후 다수의 영화, 다큐멘터리 등 대중문화를 통해 재현되며 핵 시대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5. 1. 방사능 낙진 및 피폭

트리니티 실험장 부근의 방사성 낙진 분포. 방사능을 포함한 구름은 고수준의 방사선을 방출하며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값은 조사선량이며, 단위는 뢴트겐.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LA-1027-Del.)




핵폭발 이후 방사능 노출을 측정하기 위해 필름 배지가 사용되었다. N-10,000 지점의 관찰자 중 누구도 0.1 뢴트겐 이상(당시 권고된 일일 방사선 노출 한계치의 절반)에 노출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지만[53], 이는 방사성 구름이 도달하기 전에 대피했기 때문일 수 있다. 폭발은 예상보다 효율적이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강력한 열 상승 기류가 방사성 구름 대부분을 상공으로 밀어 올렸기 때문에 실험장 자체에는 낙진이 비교적 적게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에 사용된 플루토늄 약 5.90kg 중 약 약 4.54kg가 핵분열하지 않고 대기 중으로 퍼져나가 방사성 낙진이 되었다.[54] 또한, 폭발 지점의 모래가 녹아 형성된 트리니타이트로 인해 분화구는 예상보다 훨씬 높은 방사능 수치를 보였다. 폭발 직후 분화구로 향했던 납으로 덮인 M4 셔먼 탱크의 승무원들은 상당한 방사선에 피폭되었다. 허버트 앤더슨의 선량계와 필름 배지에는 7~10 뢴트겐이 기록되었고, 세 차례 분화구를 오간 전차 운전자 중 한 명은 13~15 뢴트겐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장 외부에서 가장 심각한 낙진 오염이 발생한 곳은 폭발 지점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진 추파데라 메사(Chupadera Mesa) 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방사성 낙진이 마치 흰 안개처럼 내려앉아 일부 가축에게 베타 화상을 입히고 등 부위 털이 일시적으로 빠지거나 하얗게 변색되는 피해를 주었다. 미 육군은 피해를 입은 목장주로부터 총 88마리의 소를 사들였으며, 이 중 상태가 심각한 17마리는 로스앨러모스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장기 관찰을 위해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보냈다.[56][57]

2020년 미국 국립 암 연구소(NCI)의 지원으로 발표된 선량 재구성 연구[58]에 따르면, 뉴멕시코주의 5개 카운티(과달루페, 링컨, 샌미겔, 소코로, 토런스)가 가장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겪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핵실험 계획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실험 이후에도 방사능 위험에 대한 경고나 대피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은 1990년 제정된 방사선 피폭 보상법(Radiation Exposure Compensation Act, RECA)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네바다 시험장 핵실험으로 피해를 본 풍하 주민들과 달리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5][123][124] 트리니티 실험 피해 주민들을 RECA 대상에 포함하려는 미국 의회의 노력은 2024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59] 트리니티 실험장 인근 주민들은 오랫동안 뉴멕시코주 남중부 지역에서 원인 불명의 암 발병률이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주민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정부에 핵실험의 정확한 영향 평가를 요구해왔다.[125] 2020년 NCI 연구는 여러 가정을 포함하고 불확실성이 크다는 한계가 있지만, 지난 75년간 트리니티 실험으로 인해 갑상선암을 비롯한 수백 건의 초과 암 발생이 있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러한 암 발생은 주로 폭심지 하류 지역인 뉴멕시코 5개 군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126]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직후, 코닥(Kodak)은 자사 필름에서 원인 불명의 반점과 흐림 현상을 발견했다. 당시 필름은 판지 용기에 포장되어 있었다. 코닥의 연구원 J. H. 웹 박사는 이 문제가 미국 어딘가에서 발생한 핵폭발로 인한 방사성 낙진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낙진은 인디애나주의 한 제지 공장에서 판지 제조에 사용한 강물을 오염시켰고, 이 판지가 필름 포장에 사용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60] 웹 박사는 이 사실의 민감성을 인지하고 1949년까지 비밀을 유지했다.[61] 흥미롭게도, 이후 네바다 시험장에서 대기권 핵실험이 재개되자 미국 원자력 위원회는 코닥을 비롯한 사진 업계에 낙진 예상 경로 등의 정보를 미리 제공하여 피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60] 이는 일반 주민들에게는 실험 사실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가장 가까운 주민은 폭심지에서 불과 약 30.58km (약 30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지만, 정부는 주민들에게 사전 경고나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다. 핵실험 사실 자체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야 알려졌으며, 피폭 가능성은 오랫동안 은폐되었다. 당시 방사능 관측 데이터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광범위한 지역의 낙진을 추적할 시스템도 사실상 없었다. 반경 약 241.40km (약 240km) 내에는 약 50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지만, 이들에 대한 저선량 피폭의 장기적 영향은 당시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다.[123] 2023년에 발표된 한 연구는 당시 기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기 모델을 재구성하여 트리니티 실험 낙진의 확산 범위를 추정했다. 연구 결과, 낙진은 폭발 후 10일 이내에 미국 46개 주와 캐나다, 멕시코까지 도달했으며, 뉴멕시코주의 낙진 오염 수준은 네바다 시험장 주변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심각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트리니티 실험의 영향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했음을 시사한다.[123][124]

5. 2. 전후 핵무기 개발 및 사용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은 내폭형 플루토늄 폭탄의 실용성을 입증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이후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는 우라늄-235를 핵분열 물질로 사용하는 총열형 폭탄인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다. 이 방식은 구조가 상대적으로 단순하여 실험 없이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으며, 당시 가용했던 우라늄-235의 양이 폭탄 한 발 분량에 불과하여 사전 실험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열형은 안전 조치가 어렵고 대량의 우라늄-235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어 이후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히로시마 투하 시 폭탄의 폭발 고도는 트리니티 실험 데이터를 활용하여 마흐 줄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약 574.55m로 설정되었다.[49]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는 트리니티 실험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내폭형 플루토늄 폭탄인 "팻 맨"이 투하되었다. 트리니티 실험을 통해 그 성능이 입증된 내폭형 방식은 이후 핵무기 개발의 주류가 되었다. 나가사키 투하 시 폭발 고도는 약 502.92m로 설정되어 마흐 줄기 효과가 더 일찍 발생하도록 의도되었다.[49]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최소 12만 명 이상이 즉사했으며, 이후 방사능 피폭 등으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하면 희생자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이 사건은 원폭 투하의 정당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전투원에 대한 무차별적인 대량 살상이라는 비판과 함께,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인 다운폴 작전을 피함으로써 더 많은 연합군 및 일본군, 민간인의 희생을 막았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편, 트리니티 실험에서 내폭형 설계의 효율성이 확인되자,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에게 리틀 보이에 사용될 예정이던 우라늄-235의 일부를 팻 맨과 같은 내폭형 폭탄의 복합 코어(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 혼합)에 사용하는 것이 핵물질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첫 리틀 보이 제작에는 반영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복합 코어 설계는 이후 핵무기 생산에 고려되었다.

5. 3. 포츠담 회담 영향

실험 결과는 독일 포츠담 회담에 참석 중이던 미국 육군성 장관 헨리 L. 스팀슨에게 그의 보좌관 조지 L. 해리슨이 보낸 암호화된 메시지를 통해 전달되었다.

: "오늘 아침에 작동되었습니다. 진단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이며 이미 기대를 넘어섰습니다. 관심이 멀리까지 뻗어 나가므로 현지 보도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로브스 박사는 기뻐합니다. 그는 내일 돌아옵니다. 계속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메시지는 포츠담 교외의 "리틀 화이트 하우스"인 바벨스베르크에 도착하여 즉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 장관 제임스 F. 번스에게 전달되었다. 해리슨은 7월 18일 아침에 도착한 후속 메시지를 보냈다.

: "의사가 막 돌아왔는데 아주 열정적이고, 아기가 형처럼 튼튼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눈빛은 여기에서 하이홀드까지 보였고, 그의 비명 소리는 여기에서 내 농장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스팀슨의 여름 별장인 하이홀드는 롱아일랜드에 있었고 해리슨의 농장은 버지니아주 어퍼빌 근처에 있었으므로, 이는 폭발이 약 402.33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고 약 80.47km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수 있음을 의미했다.

사흘 뒤인 7월 21일, 그로브스가 작성한 13페이지 분량의 상세 보고서가 특사를 통해 포츠담에 도착했다. 보고서는 실험의 성공과 예상보다 강력한 위력(15ktonTNT 에서 20ktonTNT)을 알리며 그 효과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 "1945년 7월 16일 05시 30분에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르도 공군 기지의 외딴 구역에서 임계 핵분열 폭탄의 첫 번째 전면적인 시험이 실시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핵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나 엄청난 폭발이었는가! ... 시험은 누구의 가장 낙관적인 예상보다 성공적이었다."

보고서는 계속해서 시험의 위력을 추정하고 그 효과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스팀슨은 이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고, 트루먼은 "그것에 의해 엄청나게 기운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트루먼의 소련에 대한 태도가 자신감 있게 변한 것을 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이 소식이 트루먼을 "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트루먼과 처칠은 실험 성공 사실을 스탈린 소련 서기장에게 은밀히 알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실험 8일 후, 회의 휴식 시간에 트루먼은 통역 없이 스탈린에게 다가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일본에 잘 이용하기를 바란다"고만 답했다. 스탈린의 이러한 반응은 트루먼과 처칠에게 그가 신무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회의에 동석했던 소련의 주코프 원수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숙소로 돌아와 몰로토프 외무상에게 트루먼과의 대화 내용을 전했다. 몰로토프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쿠르차토프(소련 핵 개발 책임자)와 상의하여 (우리 핵 개발) 속도를 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스탈린은 맨해튼 계획과 원자폭탄 개발, 심지어 트리니티 실험 자체에 대해서도 스파이 활동(소련의 첩보 활동 및 조르주 코왈리 참조)을 통해 이미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핵 독점을 우려한 일부 과학자들의 도움으로 기술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베노나 프로젝트 및 로젠버그 사건 참조). 이를 바탕으로 소련은 이미 1943년부터 자체적인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트리니티 실험과 트루먼의 발언은 이러한 소련의 핵 개발 노력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소련은 1949년 첫 핵실험(RDS-1)에 성공했고, 프랭크 보고서 등에서 일부 미국 과학자들이 우려했던 대로 미국의 핵무기 독점 상태는 불과 몇 년 만에 깨지게 되었다.

5. 4. 실험 공개 및 대중 문화

트리니티 실험에 대한 정보는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직후에 공개되었다. 1945년 8월 12일에 발표된 스마이스 보고서(Smyth Report)는 폭발 실험에 대한 일부 정보를 제공했으며, 몇 주 후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판에는 시험에 대한 전쟁부의 보도 자료와 함께 "둥근" 트리니티 화구의 유명한 사진이 포함되었다.[50] 전후 오펜하이머그로브스가 실험 타워의 잔해 옆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은 소위 "핵 시대"(atomic age)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고, 트리니티 실험은 이후 대중 문화에서도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트리니티 실험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묘사되었다.

  • 1946년: 타임사(Time Inc.)는 '타임지 행진'(The March of Time)이라는 이름으로 18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화 ''원자력''(Atomic Power)을 제작하여 극장에 개봉했다. 이 영화에는 오펜하이머와 어니스트 로런스를 포함하여 트리니티 실험에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실제 토론과 사건을 재현하는 배우로 출연했다.[70]
  • 1947년: 핵무기 개발 과정과 트리니티 실험을 묘사한 다큐드라마 ''처음 또는 마지막''(The Beginning or the End)이 제작되었다.[71][72]
  • 1980년: 영국 방송 공사(BBC)와 미국 WGBH-TV가 공동 제작한 텔레비전 드라마 미니시리즈 ''오펜하이머''(Oppenheimer)가 BBC Two에서 7개의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트리니티 실험은 이 드라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묘사되었다.[73]
  • 1981년: 트리니티 실험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 ''트리니티 그 다음 날''(The Day After Trinity)이 개봉되었다.[74]
  • 1989년: 트리니티 실험을 묘사한 장편 영화 ''팻 맨 앤 리틀 보이''(Fat Man and Little Boy)가 개봉되었다.[75]
  • 1995년: 다큐멘터리 ''트리니티와 그 너머''(Trinity and Beyond)가 개봉되었다.[76]
  • 2015년: 다큐멘터리 ''더 밤''(The Bomb)이 개봉되었다.[77]


2023년에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가 개봉되어 트리니티 실험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놀란 감독은 영화에서 이 실험의 재현을 "전체 이야기가 회전하는 중심축"이라고 언급하며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폭발 장면을 컴퓨터 생성 이미지(CGI) 없이 실제 효과를 사용하여 재현했는데, 가솔린, 프로판, 알루미늄 분말, 마그네슘 등을 이용한 소규모 폭발을 강제 원근법을 통해 트리니티 폭발의 규모처럼 보이게 연출했다.[78] 이 영화의 흥행은 ''트리니티 그 다음 날''과 같은 이전 미디어에서 트리니티 실험을 다룬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74]

6. 실험 장소 현황

트리니티 실험장은 1965년 12월 21일 미국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고,[63][1] 1966년 10월 15일에는 국가 사적지 등록부에도 등재되었다.[2] 현재 화이트 샌즈 미사일 사격장 내에 위치하고 있다.

실험장은 1953년 첫 공개 행사를 시작으로,[66] 현재는 매년 4월과 10월 첫 번째 토요일에만 일반에 공개된다.[68][69] 이 공개 행사는 핵 관광(atomic tourism영어)의 일환으로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방문객들은 폭심지에 세워진 기념비, 폭탄 조립 장소였던 맥도날드 목장 주택, 그리고 실험 실패 시 플루토늄 회수를 위해 제작되었던 거대 강철 용기 '점보'의 잔해 등을 볼 수 있다.[66][12]

실험 이후 70년 이상 지났지만 여전히 현장에는 주변 지역보다 높은 수준의 잔류 방사선이 존재한다. 미국 육군 당국은 트리니티 실험장에 1시간 체류하는 동안 받는 방사선량은 일상적인 배경 방사선 노출량의 일부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62][120][121]

실험장 부지는 원래 맥도날드 가문의 목장이었으나 군에 징발되었고, 종전 후 토지 반환을 둘러싼 오랜 법적 분쟁 끝에 가문은 배상금을 받았으나 토지를 돌려받지는 못했다.[117][118]

6. 1. 트리니티 기념비

실험장은 거주지로부터의 거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후의 핵실험에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1952년에 실험장은 정비되었고, 유적지에 남아 있던 트리니타이트는 폐기되었다. 1965년 12월 21일에 51500acre에 달하는 트리니티 부지는 미국 국립 역사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으며,[63][1] 1966년 10월 15일에는 국가 사적지 등록부(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도 등재되었다.[2] 이 사적지에는 과학자 및 지원 그룹이 생활했던 기지 캠프, 폭탄이 폭발을 위해 배치되었던 폭심지, 그리고 폭탄의 플루토늄 코어가 조립되었던 맥도날드 목장 주택이 포함된다.[64]

폭발의 폭심지에는 높이 약 약 3.66m의 거친 면의 용암석 오벨리스크 형태의 트리니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66] 이 기념비는 1965년 육군 병력이 사격장 서쪽 경계에서 가져온 현지 암석을 사용하여 세웠다.[66] 기념비에는 실험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담긴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기념비 근처에는 '점보'의 잔해가 남아 있다. 점보는 원래 실험 실패 시 플루토늄 회수를 위해 제작된 약 194137.59kg 무게의 거대한 강철 용기였으나,[10][11] 실제 실험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10] 점보는 폭발에서 살아남았지만,[10] 1946년 폭파 시도로 양쪽 끝이 날아간 채 속이 빈 상태로 남게 되었다. 녹슨 점보의 잔해는 197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12]

폭탄의 플루토늄 코어가 조립되었던 맥도날드 목장 주택도 보존되어 있다.[64] 폭발 당시 창문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건물 자체는 남았고, 1980년대에 1945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 방문객에게 공개되고 있다.[66][119]

폭발로 인해 사막의 모래가 녹아 형성된 밝은 녹색의 유리질 물질인 트리니타이트는 실험 직후 크레이터가 메워질 때 대부분 제거되었으며,[120] 현재는 부지 내에서 소량 발견되더라도 반출이 금지되어 있다.

트리니티 부지는 1953년 첫 공개 행사를 시작으로,[66] 현재는 매년 4월과 10월 첫 번째 토요일에 일반에 공개된다.[68][69] 핵실험 이후 70년 이상 지났지만, 부지의 잔류 방사선량은 여전히 해당 지역 배경 방사선의 약 10배 수준이다. 다만, 1시간 방문 시 노출되는 방사선량은 미국 성인이 하루 평균 자연 및 의료적 요인으로 받는 총 방사선량의 약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62]

트리니티 핵실험 유적지에 세워진 기념비


트리니타이트

6. 2. 잔존 방사능

핵실험 이후 70년 이상 지난 시점에도 실험 장소의 잔류 방사선량은 주변 지역의 정상 배경 방사선보다 약 10배 높은 수준이다.[62][120] 그러나 해당 장소에 1시간 동안 머물렀을 때 받는 방사선 노출량은 일상생활(음식 섭취, 햇빛 노출 등)에서 자연적으로 받는 방사선량이나 미국 성인의 하루 평균 총 방사선 노출량(자연 및 의료 요인 포함)의 절반 정도보다도 적은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62][121]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Historic Landmarks Survey, New Mexico https://www.nps.gov/[...] National Park Service 2016-12-23
[2] 간행물 NRISref
[3] 웹사이트 Trinity Site http://www.wsmr.army[...] White Sands Missile Range 2007-07-16
[4] 웹사이트 White Sands Missile Range Fact Sheet https://www.nasa.gov[...] NASA 2023-07-29
[5] 뉴스 U.S. lawmakers move urgently to recognize survivors of the first atomic bomb test https://web.archive.[...] National Geographic 2023-08-02
[6] 웹사이트 Trinity Site History: A copy of the brochure given to site visitors https://web.archive.[...] White Sands Missile Range, United States Army 2014-09-11
[7] 웹사이트 McDonald, David G http://www.nmfarmand[...] New Mexico Farm & Ranch Heritage Museum 2014-09-11
[8] 웹사이트 Building a test site http://www.atomicarc[...] atomicarchive.com 201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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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문서 ローズ 下 p. 441(原書 p. 658)
[102] 문서 ローズ 下 p. 451(原書 p. 664)
[103] 문서 ローズ 下 pp. 455-456(原書 p. 666)
[104] 문서 ローズ 下 pp. 458-459(原書 pp. 667-668)
[105] 문서 1942年2月から1945年9月にかけて実施された標準時で、山岳部夏時間を通年で実施したもの。
[106] 문서 実験当日ニューメキシコ州の日の出は5時56分 (GMT-6)で、実験はその約30分前となるが、マンハッタン計画を扱った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ドラマの再現シーンでは天候も絡めた考証が一貫せず、爆発時に薄明るい、太陽が昇っている(2007年BBCのドキュメンタリー・ドラマ"Nuclear Secrets")、或いは真っ暗(2023年の映画『[[オッペンハイマー (映画)|オッペンハイマー]]』)という違いが生じている。
[107] 문서 エネルギー換算値はロスアラモス研究所の放射化学グループにより当初TNT換算 18.6±3.7 kt(87.5 [[テラ]][[ジュール]] [TJ])とされた。その後、アメリカ・エネルギー省は 21±2 kt とした。2021年の研究における再検証では、この値は 24.8±2 kt に上方修正された。
[108] 서적 The Pleasure of Finding Things Out 2000
[109] 문서 ローズ 下 p. 472(原書 p. 674)
[110] 문서 この引用句についてはオッペンハイマー自身によるものや他の人々によるものを含めていくつかの異なる訳が存在する。この一節に関する最もよく知られた英訳は{{仮リンク|アーサー・ライダー|en|Arthur W. Ryder}}による以下のものである(オッペンハイマーは1930年代に[[カリフォルニア大学バークレイ校]]で彼から[[サンスクリット語]]を学んでいる)。 ''Death am I, and my present task'' / ''Destruction.'' (11:32) ギーターが[[1785年]]に初めて英訳されて以来、多くの翻訳者は "Death" ではなく "Time" という訳語を充てている。オッペンハイマーの引用句に関するより詳しい記述は[[1958年]]の{{仮リンク|ロベルト・ユンク|en|Robert Jungk}}による『''{{仮リンク|千の太陽よりも明るく|en|Brighter than a Thousand Suns: A Personal History of the Atomic Scientists|label=Brighter than a Thousand Suns}}''』(日本語題『千の太陽よりも明るく』)からしばしば取られている。 ''If the radiance of a thousand suns'' / ''were to burst into the sky,'' / ''that would be like'' / ''the splendor of the Mighty One—'' / ''I am become Death, the shatterer of Worlds.'' この引用句やその翻訳のバリエーション、報告されている詩句の形についての詳しい議論は、James A. Hijiya, "The ''Gita'' of Robert Oppenheimer"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44:2 (June 2000). [http://www.aps-pub.com/proceedings/1442/Hijiya.pdf] を参照。
[111] 서적 ヴェーダ アヴェスター [[筑摩書房]] 1967-01
[112] 문서 その後、フェルミはロスアラモスへの帰路に自分の体の反応がひどく鈍くなっている体験をした。そのため、普段は代わることのない運転を他人に頼まねばならなくなった。
[113] 문서 ローズ 下 p. 477(原書 p.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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