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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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스포츠는 전통 스포츠와 근대 스포츠의 도입 및 발전을 거쳐 남북 분단 이후 각기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왔다. 전통 스포츠로는 씨름, 연날리기, 황소싸움 등이 있으며, 근대 스포츠는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어 조선체육회 등을 통해 발전했다. 남북 분단 이후, 대한민국은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을 4대 프로 스포츠로 육성하고 있으며, 올림픽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축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며,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종합격투기, 무술, 공영 경마, 럭비, 프로레슬링 등 다양한 스포츠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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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단일팀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수들로 구성되어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가하며, 1991년 처음 결성된 이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시작으로 다양한 종목에서 구성되어 남북 관계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 한국의 스포츠 | |
|---|---|
| 스포츠 정보 | |
| 스포츠 | 스포츠는 한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임. |
| 역사 | 한국 스포츠는 전통적인 활동과 현대적인 활동이 혼합되어 있음. |
| 종류 | 인기 있는 스포츠로는 태권도, 축구, 야구, 농구, 골프, 배구, 씨름 등이 있음. |
| 전통 스포츠 | |
| 설명 | 한국의 전통 스포츠는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 |
| 종류 | 태권도 씨름 국궁 택견 줄다리기 |
| 현대 스포츠 | |
| 설명 | 현대 스포츠는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도입되었으며, 현재는 한국 스포츠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 |
| 인기 스포츠 |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골프 E스포츠 |
| 국제 스포츠 | |
| 설명 | 한국은 다양한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음. |
| 주요 대회 |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 게임 유니버시아드 |
| 스포츠 단체 | |
| 설명 | 한국에는 다양한 스포츠 단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한국 스포츠의 발전과 국제적인 교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
| 주요 단체 | 대한체육회 각 종목별 협회 |
| 스포츠 시설 | |
| 설명 | 한국에는 다양한 스포츠 시설이 있으며, 이들은 선수들의 훈련과 일반인들의 스포츠 활동을 지원하고 있음. |
| 주요 시설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고척스카이돔 |
| 스포츠와 사회 | |
| 설명 |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는 건강 증진, 사회 통합, 국가 이미지 제고 등 다양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
| 영향 | 스포츠는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 |
2. 전통 스포츠

한국에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민속 춤이 전해지고 있다. 스포츠로 널리 간주되지는 않지만, 전통 탈춤은 신체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놀이이다.
연날리기 (연 날리기/Yeon Nalligi영어)는 동아시아에서 스포츠로 간주된다. 연은 설날과 추석 연휴 동안 날린다. 그러나 태국처럼 주요 스포츠는 아니다. 전통적인 한국 연은 대나무 막대와 한지로 만들어진다.
황소싸움 (황소싸움/Huangso Ssaum영어)은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싸우는 한국의 전통 놀이이다. 황소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대를 뒤로 밀어내려 한다. 먼저 뒤로 물러서는 황소가 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길 것 같은 황소에 돈을 건다. '글래머러스'라는 황소의 주인은 배팅으로만 120만 달러를 벌었다.
씨름 (씨름/Ssireum영어)은 일본의 스모와 유사하다. 씨름은 모래판에서 진행되며, 상대를 넘어뜨린 선수가 점수를 얻는다.
2. 1.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동아시아에서 스포츠로 간주된다. 연은 설날과 추석 연휴 동안 날린다. 그러나 태국처럼 주요 스포츠는 아니다. 전통적인 한국 연은 대나무 막대와 한지로 만들어진다.2. 2. 황소싸움
한국의 황소싸움(Huangso Ssaum)은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싸우는 경기이다. 황소는 머리를 맞대고 상대를 뒤로 밀려고 시도하며, 먼저 뒤로 물러서는 황소가 패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는 황소에 돈을 걸기도 한다. '글래머러스'라는 황소의 주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120만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2. 3. 씨름
씨름은 일본의 스모와 유사하다. 씨름은 모래판에서 진행되며, 상대를 넘어뜨린 선수가 점수를 얻는다. 황소싸움은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싸우는 한국의 전통 놀이로, 머리를 맞대고 상대를 뒤로 밀어내려 하며, 먼저 뒤로 물러서는 황소가 지게 된다. 연날리기는 동아시아에서 스포츠로 간주되며, 설날과 추석 연휴 동안 연을 날린다. 전통적인 한국 연은 대나무 막대와 한지로 만들어진다.3. 근대 스포츠의 도입과 발전
조선 시대에는 육체적 활동을 천시하는 유교 때문에 체육과 스포츠는 발달하지 못했다. 숭문비무(학문을 숭상하고 무예를 천시함)의 사상이 널리 퍼져 문관은 도덕과 지위가 높다 하여 숭배받았고, 무관은 도덕과 지위가 낮다 하여 경멸받았기에 무예 또한 부진했다.[1]
근대적인 스포츠는 일제강점기에 널리 퍼졌다. 조선의 교육은 과거 시험을 위한 고전 한문 교육에 치우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하의 새로운 학교 교육 안에서 체육이 도입되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각종 경기 단체가 설립되고, 경기 대회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선수들이 일본의 국내 대회에 참가하거나, 일본 대표로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도 참가했다.
1919년에 재한 일본인이 조선체육협회를 설립했다. 이어서 1920년에 조선인 단체인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1920년에 제1회 전 조선 야구 대회를 개최했고, 이후 전 조선 축구 대회(1921), 전 조선 정구 대회(1921), 육상 대회(1924), 빙상 대회(1925) 등 각종 경기 대회를 개최했다. 1925년에 조선 최초의 종합 경기장인 경성 운동장(후의 동대문운동장)이 만들어졌고, 같은 해에 조선신궁이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여 종합 경기 대회인 조선신궁경기대회(조선신궁 봉찬 체육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매년 개최되었고,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의 예선 대회 역할도 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체육회도 1934년에 야구,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의 5종목으로 구성된 종합 경기 대회를 열었으나, 개최 횟수는 1920년의 야구 대회를 제1회로 계산했기 때문에 제15회 전 조선 종합 경기 대회라고 불렸다. 조선체육회는 1938년에 해산되어 조선체육협회에 통합되었으므로, 전 조선 종합 경기 대회도 중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일본의 통치가 종료(광복)되어, 한반도는 남북 두 개의 국가로 갈라졌으나 국제 대회에 남북 합동 팀으로 참가하여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국기 대신 통일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남한에서는 현재 4대 프로 스포츠로 축구, 농구, 야구, 배구가 있다.
3. 1. 일제강점기 스포츠
1919년에 재한 일본인이 조선체육협회를 설립했다. 이어서 1920년에 조선인 단체인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1920년에 제1회 전 조선 야구 대회를 개최했고, 이후 전 조선 축구 대회(1921), 전 조선 정구 대회(1921), 육상 대회(1924), 빙상 대회(1925) 등 각종 경기 대회를 개최했다. 1925년에 조선 최초의 종합 경기장인 경성 운동장(후의 동대문운동장)이 만들어졌고, 같은 해에 조선신궁이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여 종합 경기 대회인 조선신궁경기대회(조선신궁 봉찬 체육 대회)가 개최되었다.이후 매년 개최되었고,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의 예선 대회 역할도 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체육회도 1934년에 야구,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의 5종목으로 구성된 종합 경기 대회를 열었으나, 개최 횟수는 1920년의 야구 대회를 제1회로 계산했기 때문에 제15회 전 조선 종합 경기 대회라고 불렸다. 조선체육회는 1938년에 해산되어 조선체육협회에 통합되었으므로, 전 조선 종합 경기 대회도 중단되었다.
4. 남북 분단과 스포츠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육체적 활동을 천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체육과 스포츠가 발달하지 못했다. 숭문비무(崇文榧武) 사상이 널리 퍼져 문관은 숭상받았고, 무관은 경멸받았기에 무예 또한 부진했다.[1]
근대적인 스포츠는 일제강점기에 널리 퍼졌다. 일제강점기 하의 새로운 학교 교육 안에서 체육이 도입되었고, 각종 경기 단체가 설립되고 경기 대회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선수들이 일본 국내 대회에 참가하거나, 일본 대표로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도 참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일본의 통치가 종료(광복)되어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나, 국제 대회에 남북 합동 팀으로 참가하여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통일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4. 1. 대한민국 스포츠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육체적 활동을 천시하여 스포츠가 발달하지 못했다.[1] 근대 스포츠는 일제강점기에 널리 퍼졌으며, 각종 경기 단체와 대회가 생겨났다. 선수들은 일본 대회나 국제 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광복 이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나, 국제 대회에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통일기를 사용하며 남북 합동 팀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남한에서는 현재 축구, 농구, 야구, 배구가 4대 프로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다.
1919년 재한 일본인이 조선체육협회를 설립했고, 1920년에는 조선인 단체인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1920년 제1회 전 조선 야구 대회를 시작으로 여러 경기 대회를 개최했다. 1925년에는 조선 최초의 종합 경기장인 경성 운동장(후의 동대문운동장)이 건립되었고, 조선신궁 건립 기념으로 조선신궁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체육회는 1934년 종합 경기 대회를 개최했으나, 1938년 해산되어 조선체육협회에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조선체육회(현재의 대한체육회)가 재건되었고, 전 조선 종합 경기 대회는 전국체육대회로 계승되었다.
북한에는 백두산상 체육경기대회, 만경대상 체육경기대회, 보천보횃불상 체육경기대회 등이 있다. 주요 경기장으로는 김일성경기장, 5·1경기장, 동평양경기장, 양각도경기장 등이 있다.
4. 1. 1. 주요 스포츠 종목
한반도에서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4][5] 1921년부터 조선체육회 주최로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지만, 평양의 "관서체육회"도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를 열었다. 1933년에 조선축구협회가 설립되었다. 1935년에는 제15회 전일본 종합 축구 선수권 대회 (현: 천황배)에서 전경성축구단이 우승했고,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에서도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이 후에도 이 대회에서는 함흥축구단, 평양일곡, 평양병우가 우승했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축구 일본 대표로 김용식이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일본은 스웨덴을 꺾고 베를린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2차 세계 대전 후, 대한축구협회는 1947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는 1958년에 국제 축구 연맹 (FIFA)에 가입했다.
남한 내에서는 1946년부터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가 열렸지만, 2001년부터 대한민국 FA컵에 통합되었다. 1983년에 프로 리그인 K리그가 설립되었고, 2013년에는 2부 리그도 시작되었다. 북한 내에서는 2010년에 최상급 축구 연맹전이 설립되었고, 4.25 체육단이나 평양시 체육단 등 10개 클럽으로 구성되어 있다.
- 아래 표는 월드컵에서의 축구 북한 대표, 축구 대한민국 대표, 축구 북한 여자 대표, 축구 대한민국 여자 대표의 성적 일람이다 ('''굵은 글씨'''는 월드컵 최고 성적).
| 개최국 / 연도 | 북한 | 대한민국 |
|---|---|---|
| 1954 | 불참 | 조별 리그 탈락 |
| 1958 | 불참 | 불참 |
| 1962 | 불참 | 예선 탈락 |
| 1966 | 8강 | 불참 |
| 1970 | 기권 | 예선 탈락 |
| 1974 | 예선 탈락 | 예선 탈락 |
| 1978 | 기권 | 예선 탈락 |
| 1982 | 예선 탈락 | 예선 탈락 |
| 1986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1990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1994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1998 | 불참 | 조별 리그 탈락 |
| 2002 | 불참 | 4위 |
| 2006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10 | 조별 리그 탈락 | 16강 |
| 2014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18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22 | 예선 탈락 | 16강 |
| 2026 | - | - |
| 개최국 / 연도 | 북한 | 대한민국 |
|---|---|---|
| 1991 | 예선 탈락 | 예선 탈락 |
| 1995 | 불참 | 예선 탈락 |
| 1999 | 조별 리그 탈락 | 예선 탈락 |
| 2003 | 조별 리그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07 | 8강 | 예선 탈락 |
| 2011 | 조별 리그 탈락 | 예선 탈락 |
| 2015 | 불참 | 16강 |
| 2019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23 | 불참 | 조별 리그 탈락 |
1903년, 조선에서 농구는 필립 L. 질레트(Philip. L. Gilet영어)의 지도로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현재의 대한민국 농구 협회는 1907년 YMCA의 다목적 건물이 세워지고 농구를 포함한 실내 경기가 열린 것을 한국 농구의 시작으로 보고 있지만[6], 농구의 본격적인 지도와 보급이 시작된 것은 1916년 번하트(Barnhart)가 YMCA 간사로 취임하면서부터라는 견해도 있다.[7]
이상백은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농구를 접했고, 1923년에 발족한 와세다 대학 농구부에 참가했다. 선수로서 활약한 후 지도자로서도 활동했으며, 1930년에는 농구의 본격적인 지도서 『지도 농구의 이론과 실제』를 출판했다. 같은 해에 대일본 농구 협회 설립에 관여했으며, 1931년 이후에는 대일본 체육 협회에서 이사를 맡아 농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운동에도 관여하는 등, 일본 농구의 여명기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는 1925년 조선 농구 협회(조선바스켓볼협회, 대한민국 농구 협회는 그 전신으로 간주)가 발족했다.[6] 1925년에는 이화학당(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의 여학생과 서양 여성팀과의 경기가 열렸는데, 이것이 조선에서의 여자 농구 경기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 1933년 조선 농구 협회는 대일본 농구 협회 조선 지부에 합류했다.[6] 1936년에는 전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현재의 전일본 종합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가 우승했다.[7]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농구가 정식 종목이 된 최초의 대회)에서는, 일본 대표로 장리진, 이성구, 염은현이 출전했다.[7] 전일본 선수권에서는 그 후에도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가 우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남한에서는 조선 농구 협회(조선농구협회)가 다시 발족했고,[6] 1948년에 대한민국 농구 협회(대한농구협회, KBA)가 되었다.[6] 1983년에는 대학·실업팀·군 체육 부대가 참가하는 점보 시리즈(나중에 농구대잔치로 개칭)가 창설되었고, 프로 리그 창설 전까지 국내 최고봉의 대회였다. 1990년대에는 프로 리그 구상이 진전되어, 1996년에 여자 한국 여자 프로 농구 리그 (WKBL)가, 1997년에 남자 한국 프로 농구 리그 (KBL)가 각각 리그전을 시작했다.
남한은 올림픽 농구나 아시안 게임·유니버시아드 등의 국제 경기에서 종종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올림픽 첫 출전(남자 대표)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8위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남자 대표의 올림픽 최고 순위이며, 1996년을 마지막으로 올림픽 출전을 계속 놓치고 있다. 여자 대표는 1967년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7]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6] 일본과의 정기적인 대표 대항전으로, 대학생 선발에 의한 이상백배 한일 대학 농구 대회가 열리고 있다.
북한 농구의 특기할 만한 전적으로는, 1993년 아시아 선수권에서 대표팀이 준우승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1920년에 조선체육회가 제1회 전조선 야구 대회를 개최했다.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도 제1회 대회 (1927)부터 조선 대표(도시 대항 야구 대회 (조선))가 출전했으며, 제14회 대회 (1940)와 제16회 대회 (1942)에서 전경성이 우승했다. 이영민은 1928년에 조선 최초의 홈런을 쳤다. 1934년에 미일 야구에도 출전했고, 조선야구협회(현재의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58년에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남쪽의 고교 야구에서 최고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이 제정되었다.
남쪽에서는 1982년에 한국야구위원회에 의한 프로 야구(KBO 리그)가 시작되었다. 과거에 일본과의 사이에 한일 프로 야구 슈퍼 게임(1991, 1995, 1999), 한일 클럽 챔피언십(2009, 2010)이 열렸다. 아시아 시리즈에도 참가하고 있다. 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09년 WBC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북쪽은 대표팀이 1993년 아시아 선수권에 1회 출전했지만, 야구는 비주류 스포츠가 되어 인기가 없다.
1925년에 일본에서 사에구사 유류를 초빙하여 배구 강습회가 열렸고, 같은 해 제1회 전 조선 배구 대회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여자고등학교)의 교정에서 개최되었다. 1927년에는 남자 배구가, 1931년에는 여자 배구가 조선신궁 경기 대회의 정식 종목이 되었다[8].올림픽 배구에서는, 여자 배구는 1972년에 북한이, 1976년에 남한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남자 배구는 남한은 1984년 5위가 최고 성적이며, 북한은 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없다(2012년 현재). 남한에서는 2005년에 프로 리그인 V리그가 시작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과 한일 V-리그 톱 매치가 시작되었다.
1936년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이병학이 조선으로 돌아와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교)에서 핸드볼을 한 것이 시초이다[9]。1940년에 조선 핸드볼 협회가 설립되었다.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인기가 없었지만, 198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올림픽 핸드볼에서는 남한 여자팀이 1988년과 1992년에 연패를 기록했다. 남한의 국내 리그로는 핸드볼 코리아 리그가 있다.
봉안창태는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체육 교사로서 육상 경기를 지도하여,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오사카-고베 간 중등학교 역전(한신 역전)에서 3연패를 달성했다. 봉안의 제자인 김은배와 권태하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6위와 9위를 기록했다.[10]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손기정이 금메달, 남승룡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유약한은 1934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10회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원반던지기 4위를 했다.[16]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서윤복이 우승했고, 1950년에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이 우승, 송길윤이 2위, 최윤칠이 3위를 차지하며 1~3위를 휩쓸었다. 1992년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역도라고 한다. 1936년 제1회 전일본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김용성과 김성집이 우승했다. 남수일은 1938년 제3회 일본 선수권 대회와 1939년 제4회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11] 제2차 세계 대전 후, 김성집과 남수일은 대한민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김성집은 1948년과 1952년에 연속 동메달을, 남수일은 1948년에 4위를 기록했다. 올림픽 역도에서 2012년까지 획득한 금메달은 대한민국이 3개(여자 1개 포함), 북한이 4개(여자 2개 포함)이다.
1933년에 제5회 전일본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가 압록강에서 개최되었다. 1936년 2월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으로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이 출전했다. 1934년에 제8회 전일본 빙상 선수권 대회(쇼와 9년 학생 빙상 대회)가 닛코에서 개최되었고, 최용진이 500m(일본 및 학생 신기록) 및 1500m(학생 신기록)에서 우승했다[16]。 현재, 최용진은 대한빙상경기연맹 상임 고문이 되었다[12]。
남쪽에서는, 2010년에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남자 500m에서 모태범, 남자 10000m에서 이승훈, 여자 500m에서 이상화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1992년에 정식 종목이 된 이후, 19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국가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김기훈, 안현수, 전이경, 진선유 등의 선수가 활약했다. 피겨 스케이팅은, 오랫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북쪽에서는, 북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 골프 클럽, 부산 골프 클럽, 원산 골프 클럽, 평양 골프 클럽 등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에는 기술 지도를 할 수 있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에 내지에서 아사미 료쿠조, 야스다 코키치, 나카무라 켄키치라는 최고 수준의 프로들을 초빙했다. 그중에서 성장한 연덕춘(당시에는 일본식 이름인 엔바라 토쿠하루를 사용했다)이 1941년 일본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전쟁으로 인해 다음 해부터 대회가 중단되어 우승컵은 조선에 넘어간 채 행방불명되었다. 종전 후, 연덕춘은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여러 번 일본에 왔지만, 우승컵의 행방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13]。근래에는 박세리 등 남한 출신 골퍼들이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올림픽 복싱 경기에서는, 일제강점기에 1932년 황을수가 웰터급의 일본 대표로[14], 1936년에는 이규환이 라이트급의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15]。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북한은 최철수 등이 금메달 2개, 남한은 김광선 등이 금메달 3개를 획득했다. 여자부에서는 북한은 윤금주, 남한은 성수연이 모두 2010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2012년 올림픽에는 북한에서 김혜성이 출전했다.
남한에서는 프로 복싱의 커미션인 한국권투위원회(KBC)가 창설되었으며, 세계 타이틀 관리 단체 중 세계복싱협회(WBA), 세계권투평의회(WBC), 세계복싱기구(WBO)에 가맹했다. (국제복싱연맹(IBF)에는 1980년대에 가맹했으나, 후에 탈퇴). 그러나 KBC에서 내부 항쟁이 일어나, 그 결과 2014년에 신 단체인 한국권투연맹(KBF)이 결성되었다. WBC와 WBO는 KBC만, WBA는 KBF만 공인하고 있으며, IBF는 양 단체 모두 공인하고 있지만, KBF와의 관계가 친밀하다.
1966년에 김기수가 최초의 세계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 이후 지금까지 43명의 남자 세계 챔피언이 탄생했다. 특히 유명한 챔피언으로는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에 성공한 유명우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2007년에 지인진이 타이틀을 박탈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2014년 현재까지 남자 세계 챔피언은 부재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여자 프로 복싱은 2000년부터 공식적으로 인가되었으며, 2003년에는 이인영이 최초의 여자 세계 챔피언(국제여자복싱협회)이 되었고, WBA, WBC, WBO의 3단체(IBF는 없음)의 여자 세계 챔피언은 2017년 4월까지 13명(잠정 포함)이 탄생했다.
북한에서는 앞서 언급한 최철수가 일본에서 프로로 전향한 후, 중국으로 거점을 옮겨 활동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여자 프로 복싱에 힘을 쏟아 국내에서 흥행을 펼쳤고, 3명의 WBC 여자 세계 챔피언이 탄생했지만, 현재는 그 활동도 끊겼다.
4.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스포츠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육체적 활동을 천시하여 체육과 스포츠가 발달하지 못했다. 숭문비무(崇文榧武) 사상이 널리 퍼져 문관은 숭배받았고, 무관은 경멸받았기에 무예 또한 부진했다.[1]근대 스포츠는 일제강점기에 널리 퍼졌다. 일제강점기 하의 새로운 학교 교육 안에서 체육이 도입되었고, 각종 경기 단체가 설립되고 경기 대회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선수들이 일본 국내 대회에 참가하거나, 일본 대표로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도 참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광복으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나, 국제 대회에 남북 합동 팀으로 참가하여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통일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4. 2. 1. 주요 스포츠 종목
한반도에서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4][5] 1921년부터 조선체육회 주최로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지만, 평양의 "관서체육회"도 "전조선축구대회"를 열었다. 1933년에 조선축구협회가 설립되었다. 1935년에는 제15회 전일본 종합 축구 선수권 대회(현 천황배)에서 전경성축구단이 우승했고, 제8회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 축구 경기에서도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함흥축구단, 평양일곡, 평양병우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에는 축구 일본 대표로 김용식이 출전했다. 일본은 이 대회에서 스웨덴을 꺾고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한축구협회는 1947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협회는 1958년에 국제 축구 연맹(FIFA)에 가입했다.
남한 내에서는 1946년부터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가 열렸지만, 2001년부터 대한민국 FA컵에 통합되었다. 1983년에 프로 리그인 K리그가 설립되었고, 2013년에는 2부 리그도 시작되었다.
| 개최국 / 연도 | 북한 | 대한민국 |
|---|---|---|
| 1954 | 불참 | 조별 리그 탈락 |
| 1958 | 불참 | 불참 |
| 1962 | 불참 | 예선 탈락 |
| 1966 | 8강 | 불참 |
| 1970 | 기권 | 예선 탈락 |
| 1974 | 예선 탈락 | 예선 탈락 |
| 1978 | 기권 | 예선 탈락 |
| 1982 | 예선 탈락 | 예선 탈락 |
| 1986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1990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1994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1998 | 불참 | 조별 리그 탈락 |
| 2002 | 불참 | 4위 |
| 2006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10 | 조별 리그 탈락 | 16강 |
| 2014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18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22 | 예선 탈락 | 16강 |
| 2026 | - | - |
| 개최국 / 연도 | 북한 | 대한민국 |
|---|---|---|
| 1991 | 예선 탈락 | 예선 탈락 |
| 1995 | 불참 | 예선 탈락 |
| 1999 | 조별 리그 탈락 | 예선 탈락 |
| 2003 | 조별 리그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07 | 8강 | 예선 탈락 |
| 2011 | 조별 리그 탈락 | 예선 탈락 |
| 2015 | 불참 | 16강 |
| 2019 | 예선 탈락 | 조별 리그 탈락 |
| 2023 | 불참 | 조별 리그 탈락 |
1903년, 조선에서 농구는 필립 L. 질레트(Philip. L. Gilet)의 지도로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현재의 대한민국 농구 협회는 1907년 YMCA의 다목적 건물이 세워지고 농구를 포함한 실내 경기가 열린 것을 한국 농구의 시작으로 보고 있지만[6], 농구의 본격적인 지도와 보급이 시작된 것은 1916년 번하트(Barnhart)가 YMCA 간사로 취임하면서부터라는 견해도 있다.[7]
이상백은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농구를 접했고, 1923년에 발족한 와세다 대학 농구부에 참가했다.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30년에는 농구 지도서 『지도 농구의 이론과 실제』를 출판했다. 같은 해에 대일본 농구 협회 설립에 관여했으며, 1931년 이후에는 대일본 체육 협회에서 이사를 맡아 농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운동에도 관여하는 등, 일본 농구의 여명기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는 1925년 조선 농구 협회(조선바스켓볼협회, 대한민국 농구 협회는 그 전신으로 간주)가 발족했다.[6] 1925년에는 이화학당의 여학생과 서양 여성팀과의 경기가 열렸는데, 이것이 조선에서의 여자 농구 경기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 1933년 조선 농구 협회는 대일본 농구 협회 조선 지부에 합류했다.[6] 1936년에는 전일본 종합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연희전문학교가 우승했다.[7]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농구가 정식 종목이 된 최초의 대회)에서는, 일본 대표로 장리진, 이성구, 염은현이 출전했다.[7] 전일본 선수권에서는 그 후에도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가 우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남한에서는 조선 농구 협회가 다시 발족했고,[6] 1948년에 대한민국 농구 협회(KBA)가 되었다.[6] 1983년에는 농구대잔치가 창설되었고, 프로 리그 창설 전까지 국내 최고봉의 대회였다. 1990년대에는 프로 리그 구상이 진전되어, 1996년에 여자 한국 여자 프로 농구 리그(WKBL)가, 1997년에 남자 한국 프로 농구 리그(KBL)가 각각 리그전을 시작했다.
남한은 올림픽 농구나 아시안 게임·유니버시아드 등의 국제 경기에서 종종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남자 대표의 올림픽 첫 출전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8위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남자 대표의 올림픽 최고 순위이며, 1996년을 마지막으로 올림픽 출전을 계속 놓치고 있다. 여자 대표는 1967년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7]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6] 일본과의 정기적인 대표 대항전으로, 대학생 선발에 의한 이상백배 한일 대학 농구 대회가 열리고 있다.
1920년에 조선체육회가 제1회 전조선 야구 대회를 개최했다.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도 제1회 대회 (1927)부터 조선 대표(도시 대항 야구 대회 (조선))가 출전했으며, 제14회 대회 (1940)와 제16회 대회 (1942)에서 전경성이 우승했다. 이영민은 1928년에 조선 최초의 홈런을 쳤다. 1934년에 미일 야구에도 출전했고, 조선야구협회(현재의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58년에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남쪽의 고교 야구에서 최고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이 제정되었다.
남쪽에서는 1982년에 한국야구위원회에 의한 프로 야구(KBO 리그)가 시작되었다. 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09년 WBC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1925년에 일본에서 배구 강습회가 열렸고, 같은 해 제1회 전 조선 배구 대회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정에서 개최되었다. 1927년에는 남자 배구가, 1931년에는 여자 배구가 조선신궁 경기 대회의 정식 종목이 되었다[8].올림픽 배구에서는, 남한이 1976년에 동메달을 획득했다. 남자 배구는 남한은 1984년 5위가 최고 성적이다. 남한에서는 2005년에 프로 리그인 V리그가 시작되었다.
1936년 이병학이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교)에서 핸드볼을 한 것이 시초이다[9]。1940년에 조선 핸드볼 협회가 설립되었다. 올림픽 핸드볼에서는 남한 여자팀이 1988년과 1992년에 연패를 기록했다. 남한의 국내 리그로는 핸드볼 코리아 리그가 있다.
봉안창태는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체육 교사로서 육상 경기를 지도하여,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오사카-고베 간 중등학교 역전(한신 역전)에서 3연패를 달성했다. 봉안의 제자인 김은배와 권태하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6위와 9위를 기록했다.[10]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손기정이 금메달, 남승룡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서윤복이 우승했고, 1950년에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이 우승, 송길윤이 2위, 최윤칠이 3위를 차지하며 1~3위를 휩쓸었다. 1992년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역도는 1936년 제1회 전일본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김용성과 김성집이 우승했다. 남수일은 1938년 제3회 일본 선수권 대회와 1939년 제4회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11] 제2차 세계 대전 후, 김성집과 남수일은 대한민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김성집은 1948년과 1952년에 연속 동메달을, 남수일은 1948년에 4위를 기록했다. 올림픽 역도에서 2012년까지 획득한 금메달은 대한민국이 3개(여자 1개 포함)이다.
1936년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으로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이 출전했다. 1934년에 최용진이 500m(일본 및 학생 신기록) 및 1500m(학생 신기록)에서 우승했다[16]。 현재, 최용진은 대한빙상경기연맹 상임 고문이 되었다[12]。
남쪽에서는, 2010년에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남자 500m에서 모태범, 남자 10000m에서 이승훈, 여자 500m에서 이상화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1992년에 정식 종목이 된 이후, 19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국가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김기훈, 안현수, 전이경, 진선유 등의 선수가 활약했다. 피겨 스케이팅은, 오랫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 골프 클럽 등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에는 기술 지도를 할 수 있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에 아사미 료쿠조등 일본의 최고 수준의 프로들을 초빙했다. 그중에서 성장한 연덕춘(당시에는 일본식 이름인 엔바라 토쿠하루를 사용했다)이 1941년 일본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근래에는 박세리 등 남한 출신 골퍼들이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올림픽 복싱 경기에서는, 일제강점기에 1932년 황을수가 웰터급의 일본 대표로[14], 1936년에는 이규환이 라이트급의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15]。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남한은 김광선 등이 금메달 3개를 획득했다.
남한에서는 프로 복싱의 커미션인 한국권투위원회(KBC)가 창설되었으며, 세계복싱협회(WBA), 세계권투평의회(WBC), 세계복싱기구(WBO)에 가맹했다. 1966년에 김기수가 최초의 세계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 이후 지금까지 43명의 남자 세계 챔피언이 탄생했다. 특히 유명한 챔피언으로는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에 성공한 유명우를 꼽을 수 있다. 여자 프로 복싱은 2000년부터 공식적으로 인가되었으며, 2003년에는 이인영이 최초의 여자 세계 챔피언(국제여자복싱협회)이 되었고, WBA, WBC, WBO의 3단체의 여자 세계 챔피언은 2017년 4월까지 13명(잠정 포함)이 탄생했다.
5. 남북 스포츠 교류와 협력
6. 올림픽과 대한민국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선수단으로 3명(마라톤 2명, 복싱 1명)이 조선인으로서 처음 올림픽에 출전했다.[2] 이어서 동계 올림픽에도 1936년 2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으로 스피드 스케이팅에 3명이 출전했다. 1936년 8월에는 베를린 올림픽 일본 선수단으로 조선인 7명(마라톤 2명, 농구 3명, 축구 1명, 복싱 1명)이 출전하여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남쪽의 대한민국은 하계 및 동계 모두 1948년부터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다. 금메달은 하계 및 동계 합하여 127개를 획득했는데, 종목별로 많은 것은 양궁 27개,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24개, 태권도 12개, 레슬링 11개, 유도 11개 등이다(2022년 현재).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계는 1964년, 하계는 1972년부터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다. 금메달은 하계 16개(역도 5개, 레슬링 3개, 체조 3개, 복싱 2개, 유도 2개, 사격 1개)를 획득했으나 동계는 아직 없다(2022년 현재).
1988년에는 남쪽에서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북쪽은 처음에는 공동 개최를 주장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불참했다. 북쪽은 서울 올림픽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이듬해인 1989년에 제13회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을 개최했다. 2018년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어 일부 종목에서 남북 합동 팀이 구성되었다. 개인 종목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특히 "경량급"에서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도 한다[2] .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런던 올림픽에서의 "GDP 수치와 선수단 규모" 비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메달 순위가 1위라는 결과를 보도했다[3] .
6. 1. 대한민국 올림픽 참가 역사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선수단으로 3명(마라톤 2명, 복싱 1명)이 조선인으로서 처음 올림픽에 출전했다.[2]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에는 일본 선수단으로 스피드 스케이팅에 3명이 출전했다.[2]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일본 선수단으로 조선인 7명(마라톤 2명, 농구 3명, 축구 1명, 복싱 1명)이 출전하여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획득했다.[2]제2차 세계 대전 후, 대한민국은 1948년부터 하계 및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다.[2] 2022년 현재까지 하계 및 동계 올림픽에서 획득한 금메달은 양궁 27개,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24개, 태권도 12개, 레슬링 11개, 유도 11개 등 총 127개이다.[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4년 동계 올림픽, 1972년 하계 올림픽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2] 2022년 현재까지 하계 올림픽에서 역도 5개, 레슬링 3개, 체조 3개, 복싱 2개, 유도 2개, 사격 1개 등 총 1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동계 올림픽에서는 아직 금메달이 없다.[2]
서울 올림픽이 1988년에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었다.[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동 개최를 주장했지만, 불가능해지자 불참했다.[2] 대신 1989년에 제13회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을 개최했다.[2]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었고, 일부 종목에서 남북 단일팀이 구성되었다.[2]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개인 종목, 특히 경량급에서 많은 활약을 보였다.[2]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GDP 수치와 선수단 규모를 비교했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메달 순위가 1위라고 보도했다.[3]
6.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 참가 역사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선수단 소속으로 조선인 3명(마라톤 2명, 복싱 1명)이 처음 올림픽에 출전했다.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에는 일본 선수단 소속으로 스피드 스케이팅에 3명이 출전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일본 선수단 소속으로 조선인 7명(마라톤 2명, 농구 3명, 축구 1명, 복싱 1명)이 출전,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한민국은 1948년부터 올림픽에 참가하여 2022년 현재 하계 및 동계 올림픽에서 총 127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4년 동계 올림픽, 1972년 하계 올림픽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2022년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 16개(역도 5개, 레슬링 3개, 체조 3개, 복싱 2개, 유도 2개, 사격 1개)를 획득했으나, 동계 올림픽에서는 아직 메달이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동 개최 무산 후 불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울 올림픽에 대항하여 1989년 제13회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을 개최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일부 종목에서 남북 단일팀이 구성되기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인 종목, 특히 경량급에서 강세를 보인다. 영국의 가디언 지는 런던 올림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메달 순위가 "GDP 수치와 선수단 규모" 비교에서 1위라는 결과를 보도했다.
7. 기타 경기
'''종합격투기'''
ROAD FC
'''무술'''
한반도의 무술 목록
조선의 전통적인 격투기로는 씨름 등이 있다. 검도, 합기도, 고합도, 태권도 등 일본 기원의 무술에 대해 한국 기원설이 언급되기도 한다.
'''공영 경마'''
공영 경마로 경마, 경륜, 경정이 남한에서 시행되고 있다.
'''럭비'''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마쓰오카 마사오가 조선에 럭비 협회를 설립했다.[16] 일본의 전국 중등 학교 럭비 축구 대회 (현재의 전국 고등학교 럭비 축구 대회)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사범학교가 3연패를 달성했고, 1936년에는 배재고보가 우승했다.
'''프로레슬링'''
일본에서 역도산이나 오오키 긴타로 등 조선 출신 프로레슬러가 활약했다. 남한에는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 등의 단체가 있다. 1995년에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문화 축전에서 프로레슬링 흥행을 했다.
7. 1. 종합격투기
한국의 전통적인 격투기로는 씨름 등이 있다. 검도, 합기도, 고합도, 태권도 등 일본 기원의 무술에 대해 한국 기원설이 언급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역도산이나 오오키 긴타로 등 조선 출신 프로레슬러가 활약했다. 남한에는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 등의 단체가 있다. 1995년에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문화 축전에서 프로레슬링 흥행을 했다.7. 2. 무술
조선의 전통적인 격투기로는 씨름 등이 있다. 검도, 합기도, 고합도, 태권도 등 일본 기원의 무술에 대해 한국 기원설이 언급되기도 한다.7. 3. 공영 경마
남한에서는 공영 경마로 경마, 경륜, 경정이 시행되고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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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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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選手数、日本の2割で金4個 北朝鮮の「な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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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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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ロンドン五輪で過去最高の成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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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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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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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大阪毎日新聞社, 東京日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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