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카타 구마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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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1867년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박물학자, 민속학자, 비교문화학자로, 근대 일본의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고,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했으며, 특히 점균류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신사 합사 정책에 반대하는 등 자연 보호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연구하며 50편의 논문을 네이처지에 기고하는 등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일본 민속학 연구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이 건립되고 명예 시민 칭호가 수여되는 등 다양한 현창 사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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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카타 구마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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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미나카타 구마구스 (南方 熊楠) |
| 출생 | 1867년 5월 18일 |
| 사망 | 1941년 12월 29일 |
| 국적 | 일본 |
| 출생지 | 와카야마현, 일본 |
| 사망지 | 와카야마, 일본 제국 |
| 학문 분야 | |
| 분야 | 자연사, 생물학, 민속학 |
| 연구 기관 | 대영 박물관 |
| 알려진 업적 | 변형균 연구 |
2. 생애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1867년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에서 태어나 1941년 사망할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1904년부터는 다나베시에서 거주했다. 그는 평생을 자연사 및 민속학 연구에 헌신했으며,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와 민속 잡지 '노츠 앤 쿼리즈'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했다. 또한 신사 합사 정책 반대 시위와 일본의 자연 보존 운동에도 참여했다.[25]
1883년 도쿄로 이주한 미나카타는 예비 학교인 교류학교에 입학했고, 교장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그의 식물학 연구를 격려하고 영어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었다. 이듬해 도쿄 대학 예비 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나쓰메 소세키 등과 동급생이 되었다. 1886년 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이듬해 1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약 6개월 동안 공부했다. 이후 미시간 농업대학으로 가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그곳 입학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1888년 기숙사에서 문제를 일으켜 자퇴했다. 앤아버로 이주하여 동식물 관찰과 독서에 몰두하며, 시카고의 지의류 학자 윌리엄 W. 칼킨스에게 표본 제작을 배웠다.[9] [10] [11]
1891년 5월, 플로리다주 잭슨빌로 이주하여 생물 조사를 하던 중, 새로 발견한 녹조류를 과학 잡지 네이처에 발표했고, 워싱턴 D.C.의 국립 박물관에서 양도 요청을 받았다. 그해 9월, 쿠바로 건너가 채집 여행을 하며 석회암 지의류를 발견했다.[12] 1892년 1월, 플로리다로 돌아왔다.
1892년 9월, 영국으로 향한 미나카타는 런던에서 요코하마 쇼킨 은행 런던 지점장 나카이 요시키쿠스를 방문했고,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런던 시내에서 저렴한 임대료로 살면서 대영 박물관,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 등을 방문하며 표본집을 연구했다. 가타오카 프린스는 미나카타의 박식함에 주목하여 그를 대영 박물관의 어거스터스 울라스턴 프랑크스 경에게 소개했다. 미나카타는 "The Constellations in the Far East"라는 기사를 30일 만에 완성하여 ''Nature''에 게재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노츠 앤 쿼리즈''에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프레더릭 V. 디킨스 런던 대학교 총장 등 저명한 인물들과 우정을 쌓았다. 거의 매일 대영 박물관을 방문하여 동서양의 고대 서적을 탐독하고 공책에 베껴 적었다. 이 시기의 52권의 공책 모음인 '런던 발췌본'은 미나카타 자택과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더글라스는 미나카타에게 대영 박물관에서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자유를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도서관의 책과 원고 목록을 만드는 것을 도왔고, 박물관의 불상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수행했다. 1897년 3월, 대영 박물관에서 쑨원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1893년 10월, 고야산 사찰 단지의 주지 승려가 된 도키 호류를 만났고, 종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많은 일본 인물들이 런던에서 미나카타를 방문했다. 일부 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때때로 인종 차별을 경험했고, 1898년 12월, 대영 박물관에서 쫓겨났다. 1899년, 가족으로부터의 송금이 중단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케임브리지 또는 옥스퍼드에서 곧 개설될 일본학 프로그램의 조교수가 되려는 희망은 사라졌다. 궁핍한 상황에 놓인 그는 8년 동안 머물렀던 영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1900년 9월, 템스 강에서 ''아와 마루''호에 탑승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1900년 10월, 14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미나카타는 쑨원이 요코하마에 망명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1901년 2월, 쑨원은 와카야마를 방문하여 미나카타와 재회했다. 쑨원은 파나마 모자를 선물로 남겼고, 이누카이 쓰요시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 주었다. 이 편지는 미나카타 저택에 보관되어 있으며, 모자는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01년 10월, 와카야마를 떠나 가쓰우라로 간 미나카타는 1904년 10월까지 형이 운영하는 양조장 지점에서 살며 나치산 지역의 균류와 조류를 수집했다. 이치노타키 폭포에서 지의류를 수집하던 중 고아제 시로를 만나 제자로 삼았고, 고아제는 평생 동안 미나카타의 점균 연구를 도왔다. 프레데릭 빅터 디킨스와 공동 집필한 Hojoki: The Ten Square Feet Hut|호조키: 10제곱피트 오두막영어의 영어 번역 초고를 완성하고, 디킨스의 Primal Text of Japan|일본의 원시 텍스트영어의 교정을 보았다. Nature|네이처영어와 Notes and Queries|노츠 앤 쿼리즈영어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마노 산맥의 야생 동물들과 교감하며, 미나카타는 광범위한 세계 지식을 바탕으로 정신과 물질 세계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고, 도키 호류와의 종교적 논쟁을 포함하여 자연과 삶에 대한 열띤 토론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영국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계획했던 연구인 The Origin of the Swallow-Stone Myth (Ensekiko)|제비돌 신화의 기원(엔세키코)영어을 완성했는데, 이는 그가 영어로 발표한 연구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1904년 10월, 와카야마현 다나베시로 이주하여 정착한 그는 다나베를 "친절한 사람들이 있고 물건값이 싸며 날씨와 풍경이 아름다운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1905년 가을, 점균류 표본 46점을 대영 박물관에 기증했다. 영국 균학회 회장 아서 리스터는 이를 Journal of Botany|식물학 저널영어 49권에 "일본 균류의 두 번째 보고서"로 소개했다.
1906년 7월, 토케이 신사의 수석 사제 타무라 무네조의 넷째 딸인 마츠에와 결혼했고, 1907년 7월, 첫 아들 구마야가 태어났다. 미나카타는 아들의 성장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며 깊은 애정을 보였다. 1911년 10월에는 딸 후미에가 태어났다. 1909년경부터 책 복사를 재개했다. 호린지 사찰 소장 경전인 대장경 발췌는 3년이나 걸린 힘든 작업이었다. 그는 "읽는 것은 베끼는 것이다. 그냥 읽으면 잊어버리지만, 베끼면 절대 잊지 않는다."라고 믿었다.
1906년, 정부의 신사 통합 규정 시행에 대해, 미나카타는 신사 통합이 역사적 건물과 고대 유물을 훼손하고, 주변 자연 생태계에도 피해를 줄 것을 우려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지역 신문 '무로 신포'에 자신의 의견을 기고하고, 마츠무라 진조 등 주요 연구자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미나카타의 편지를 배포하여 캠페인을 지원했다. 그는 또한 젊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로부터 지역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1910년 8월, 타나베 중학교에서 열린 회의에 무단 침입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1920년, 이 규정은 폐지되었다. 미나카타는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했고, 그의 싸움은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생태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11년 2월, 야나기타 구니오로부터 편지를 받으며 두 사람의 서신이 시작되었다.
1914년 7월, 미국 농무부의 월터 T. 스윙글이 미나카타를 미국으로 초청할 것이라는 신문 보도가 나왔다. 스윙글 박사는 1915년 5월 다나베를 방문하여 이 임명을 직접 발표했지만, 가정 문제로 인해 거절했다.
1916년 4월, 현재 미나카타 저택인 재산을 얻었다. 넓은 정원은 야외 실험실, 서재는 글쓰기와 현미경 연구 장소, 창고는 서고로 사용되었다. 1917년, 정원의 감나무에서 영국균학회 회장 굴리엘마 리스터가 명명한 새로운 점균 속인 *Minakatella longifilala* 리스터를 발견했다.
다나카 조자부로가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하라 다카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 30명의 거물들이 홍보하여 미나카타 식물 연구소 건립 계획이 추진되었다. 미나카타는 도쿄에서 5개월 동안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 등 저명인사들을 방문하여 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25년, 미나카타는 병으로 입원했다가 퇴원 후 3년간 방문객을 거절했다. 1926년에는 재정적 어려움을 덜기 위해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쇼와 천황은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점균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26년, 미나카타는 코아제 시로와 함께 일본산 점균류 37속 90개의 표본을 히로히토 황태자에게 헌상했다. 1929년, 하토리 박사의 요청으로 미나카타는 와카야마현을 방문한 히로히토 천황에게 점균류에 대한 강연을 했다. 황실 전함 나가토에서 점균류 표본을 보여주며 점균류와 해양 생물에 대한 강연을 하고, 110개의 점균류 표본을 천황에게 전달했다.
1962년, 천황과 황후는 다시 와카야마 남부를 방문했다. 시라하마 해변에서 카시마 섬을 보며 지은 와카는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 앞에 세워진 기념비에 새겨졌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미나카타는 건강이 악화되어 침대에 누워 지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사망하여 다나베시의 고잔지 절에 묻혔다.
2. 1. 유년기와 도쿄 유학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에서 태어난 미나카타는 1883년 도쿄로 이주하여 예비 학교인 교류학교에 입학했다. 교류학교 교장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미나카타의 식물학 연구를 격려하고 영어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었다. 이듬해 미나카타는 나쓰메 소세키 등이 동급생으로 있던 도쿄 대학 예비 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8]1867년 4월 15일 와카야마 성성하마을에서 금속상·잡화점을 운영하는 미나카타 야헤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미나카타 가는 가이난시에 있는 후지시로 신사를 신앙했는데, 후지시로 신사에는 구마노 신이 깃든다고 하는 자수나무 신사가 있었다. "후지"와 구마노의 "구마", 녹나무의 "쿠스" 세 글자에서 이름을 따면 건강하고 장수를 누린다는 풍습에 따라, 몸이 약했던 미나카타는 "구마"와 "쿠스" 두 글자를 받았다.[3]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흥미를 가져, 데라코야, 한학 숙소, 심학 숙소에 다녔다. 1873년 웅(오노) 초등학교(현 와카야마 시립 오노미나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874년경 이웃집에서 『화한삼재도회』를 처음 보았고, 만 10세 때 아버지에게 졸랐지만 사주지 않았다. 1876년 웅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쇼슈 학교에 입학했다.[8]
1876년부터 이와이야・쓰무라 다가사부로에게 『화한삼재도회』 105권을 빌려 기억하면서 '''필사'''를 시작했다. 이 외에도 12세까지 『본초강목』, 『여러 나라 명승도회』, 『대화본초』 등을 필사했다. 1879년 와카야마 중학교(현 와카야마현립 도인 고등학교)가 창설되어 입학했다. 교사 도리야마 아키라에게 박물학을 권유받아 훈도를 받았다. 1882년 『화한삼재도회』 필사를 마쳤다.[8]
1883년 와카야마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간다의 교리츠 학교(현 개성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에게 영어를 배웠다. 이 무렵, 균류학자 버클리가 균류 6,000점을 수집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넘어 7,000점 채집을 목표로 표본·도보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1884년 대학 예비문에 입학했다. 동창으로는 나쓰메 소세키, 마사오카 시키, 아키야마 사네유키 등이 있었다. 학업은 뒷전으로 하고 유적 발굴이나 균류 표본 채집 등에 몰두했다. 1885년부터 1941년 사망 때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1885년 12월 29일, 기말 시험에서 대수학 한 과목만 합격점에 미치지 못해 낙제하고 예비문을 중퇴했다.[8] [9]
2. 2. 미국과 영국 유학
미나카타는 1883년 도쿄로 이주하여 예비 학교인 교류학교에 입학했다. 교류학교 교장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미나카타의 식물학 연구를 격려하고 영어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이듬해 미나카타는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도쿄 대학 예비 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8]1886년 말, 미나카타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듬해 1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약 6개월 동안 퍼시픽 비즈니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그 후 미시간 농업대학으로 가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그곳 입학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9] 그러나 1888년, 기숙사에서 음주를 금지하는 교칙을 어기고 소동을 일으켜 자퇴했다. 그는 앤아버로 이주하여 동식물 관찰과 독서에 몰두하며, 시카고의 지의류 학자 William Wirt Calkins영어[10][11]에게 표본 제작을 배웠다.
1891년 5월, 미나카타는 플로리다주잭슨빌로 이주하여 생물 조사를 했다. 그는 중국인 장성총이 경영하는 식품점에서 함께 살며 일했다. 그는 새로 발견한 녹조류를 과학 잡지 『네이처』에 발표했고, 워싱턴 D.C.의 국립 박물관에서 양도 요청을 받았다. 그해 9월, 쿠바로 건너가 채집 여행을 하며 석회암 지의류를 발견했다.[12] 1892년 1월, 플로리다로 돌아와 장성총과 다시 함께 살았다.
1892년 9월, 미나카타는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에서 요코하마 쇼킨 은행 런던 지점장 나카이 요시키쿠스를 방문했고,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그는 런던 시내에서 저렴한 임대료로 살면서 대영 박물관,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 등을 방문하며 표본집을 연구했다. 1893년 8월, 미나카타는 ''Nature''에서 "별자리의 구성에 관한 다섯 개의 기사"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고 답장을 썼다.
가타오카 프린스는 초라한 모습의 미나카타의 박식함에 주목하여 그를 대영 박물관의 어거스터스 울라스턴 프랑크스 경에게 소개했다. 미나카타는 프랑크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자주 박물관을 방문했다. 그는 "The Constellations in the Far East"라는 기사를 30일 만에 완성하여 ''Nature''에 게재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Notes and Queries''에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프레더릭 V. 디킨스 런던 대학교 총장 등 저명한 인물들과 우정을 쌓았다. 그는 거의 매일 대영 박물관을 방문하여 동서양의 고대 서적을 탐독하고 공책에 베껴 적었다. 이 시기의 52권의 공책 모음인 ''런던 발췌본''은 미나카타 자택과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더글라스는 미나카타에게 대영 박물관에서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자유를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그는 도서관의 책과 원고 목록을 만드는 것을 도왔고, 박물관의 불상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수행했다.
런던에서 미나카타는 쑨원과 만났다. 1897년 3월 대영 박물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즉시 친해졌고, 거의 매일 서로 방문하며 우정을 쌓았다.
1893년 10월, 그는 고야산 사찰 단지의 주지 승려가 된 도키 호류를 만났다. 미나카타와 도키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종교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교환했다.
많은 일본 인물들이 런던에서 미나카타를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그의 박식함에 놀랐고, 그의 일상생활에 대한 무관심에 충격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나카타는 때때로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 1898년 12월, 대영 박물관에서 쫓겨났다.
1899년,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송금이 중단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케임브리지 또는 옥스퍼드에서 곧 개설될 일본학 프로그램의 조교수가 되려는 희망은 사라졌다. 궁핍한 상황에 놓인 그는 8년 동안 머물렀던 영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1900년 9월, 미나카타는 템스 강에서 ''아와 마루''호에 탑승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2. 3. 귀국과 와카야마현에서의 활동
1900년 10월,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14년간의 미국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 당시 형은 얇은 천으로 만든 초라한 양복을 입은 구마구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미나카타가 학위 없이 방대한 양의 책과 표본을 가지고 돌아온 것에 놀랐다.[1] 그는 와카야마에 있는 형의 집에서 임시로 머물렀다.얼마 후, 미나카타는 쑨원이 요코하마에 망명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1901년 2월, 쑨원은 와카야마를 방문하여 미나카타와 4년 만에 재회했다. 쑨원은 파나마 모자를 선물로 남겼고, 미나카타에게 이누카이 쓰요시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 주었다. 이 편지는 미나카타 저택에 보관되어 있으며, 모자는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쑨원은 하와이에서 채취한 지의류 표본을 보냈고, 미나카타는 답장을 보냈지만, 결국 둘은 멀어졌다.[1]
1901년 10월, 미나카타는 와카야마를 떠나 가쓰우라로 갔다. 1904년 10월까지 형이 운영하는 양조장 지점에서 살며 나치 지역의 균류와 조류를 수집했다. 이치노타키 폭포에서 지의류를 수집하던 중 고아제 시로를 만나 제자로 삼았다. 고아제는 평생 동안 미나카타의 점균 연구를 도왔다.[1]
미나카타는 나치에서 곤충과 식물을 수집하고, 현미경 슬라이드를 만들고, 채색 도감을 만들었다. 프레데릭 빅터 디킨스와 공동 집필한 Hojoki: The Ten Square Feet Hut|호조키: 10제곱피트 오두막영어의 영어 번역 초고를 완성하고, 디킨스의 Primal Text of Japan|일본의 원시 텍스트영어의 교정을 보았다. 그는 Nature|네이처영어와 Notes and Queries|노츠 앤 쿼리즈영어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마노 산맥의 야생 동물들과 교감하며, 미나카타는 광범위한 세계 지식을 바탕으로 정신과 물질 세계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고, 도키 호류와의 종교적 논쟁을 포함하여 자연과 삶에 대한 열띤 토론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영국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계획했던 연구인 The Origin of the Swallow-Stone Myth (Ensekiko)|제비돌 신화의 기원(엔세키코)영어을 완성했는데, 이는 그가 영어로 발표한 연구의 정점으로 여겨진다.[1]
1904년 10월, 구마구스는 다나베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는 다나베를 "친절한 사람들이 있고 물건값이 싸며 날씨와 풍경이 아름다운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1] 그는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고, 게이샤를 고용하여 술을 마시고 공연을 했다.
1905년 가을, 미나카타는 점균류 표본 46점을 대영 박물관에 기증했다. 영국 균학회 회장 아서 리스터는 이를 Journal of Botany|식물학 저널영어 49권에 "일본 균류의 두 번째 보고서"로 소개했다. 이 기사는 미나카타가 리스터와 그의 딸 걸리엘마와의 새로운 우정의 세계로 나아가게 했고, 세계적인 점균류 연구자로 발돋움하는 그의 경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1]
1906년 7월, 미나카타는 토케이 신사의 수석 사제 타무라 무네조의 넷째 딸인 마츠에와 결혼했다. 1907년 7월, 첫 아들 구마야가 태어났다. 미나카타는 아들의 성장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며 깊은 애정을 보였다. 1911년 10월에는 딸 후미에가 태어났다.[1]
미나카타는 1909년경부터 책 복사를 재개했다. 호린지 사찰 소장 경전인 대장경 발췌는 3년이나 걸린 힘든 작업이었다. 그는 "읽는 것은 베끼는 것이다. 그냥 읽으면 잊어버리지만, 베끼면 절대 잊지 않는다."라고 믿었다. 귀국 후, 미나카타는 일본의 저널과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축적한 놀라운 기억력과 기록 보관소를 활용했다.[1]
1906년, 정부는 신사 통합 규정을 시행했다. 와카야마 현 정부는 이 규정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미나카타는 신사 통합이 역사적 건물과 고대 유물을 훼손하고, 주변 자연 생태계에도 피해를 줄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지역 신문 '무로 신포'에 자신의 의견을 기고하고, 마츠무라 진조 등 주요 연구자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미나카타의 편지를 배포하여 캠페인을 지원했다. 그는 또한 젊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로부터 지역적으로 지원을 받았다.[1]
1910년 8월, 미나카타는 타나베 중학교에서 열린 회의에 무단 침입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18일 동안 감옥에서 책을 읽고 건물에서 점균류를 채집했다.[1]
그의 노력으로 1920년, 이 규정은 폐지되었다. 미나카타는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했고, 그의 싸움은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생태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11년 2월, 미나카타는 야나기타 구니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서신이 시작된 시기였다.[1]
1914년 7월, 미농무부의 월터 T. 스윙글이 미나카타를 미국으로 초청할 것이라는 신문 보도가 나왔다. 스윙글 박사는 1915년 5월 타나베를 방문하여 이 임명을 직접 발표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지만, 가정 문제로 인해 거절했다.[1]
1916년 4월, 미나카타는 현재 미나카타 저택인 재산을 얻었다. 넓은 정원은 야외 실험실이 되었고, 서재는 글을 쓰는 장소가 되었다. 창고는 책과 자료를 보관하는 서고로 정리되었다.[1]
그는 민속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1917년, 정원의 감나무에서 영국균학회 회장 굴리엘마 리스터가 명명한 새로운 점균 속인 *미나카텔라 론기필라* 리스터를 발견했다.[1]
와카야마현 지사와 그의 친구들은 미나카타 식물 연구소 계획을 마무리했다. 다나카 조자부로가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고, 하라 다카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 30명의 거물들이 홍보했다.[1]
미나카타는 36년 만에 도쿄로 와서 5개월 동안 자금 모금에 힘썼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를 비롯한 저명인사들을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상당한 금액을 모았지만, 예상 금액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집에서 모금 활동을 계속했다.[1]
'이력서'는 오사카 일본우선 부지점장 야부키 요시오의 요청으로 작성되었다. 7.7m 길이의 이력서는 미나카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1]
1925년 3월, 쿠마야가 병에 걸려 입원했다. 미나카타는 모든 방문객을 거절했다. 1928년 5월 쿠마야가 교토의 병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쓰네구스의 약속 불이행으로 모금은 차질을 빚었다. 미나카타는 비싼 의료비 때문에 생활고를 겪었다. 재정적 부담을 덜기 위해 1926년에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1]
2. 4. 만년
1900년,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1941년 사망할 때까지 고향인 와카야마현에 정착했으며, 1904년부터 1941년까지는 다나베시에 거주했다.[25] 미나카타는 평생 자연사와 민속학 연구에 헌신했으며, 영국의 과학 잡지 Nature영어와 Notes and Queries영어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했다. 또한 반 신사 합사 시위와 일본의 자연 보존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학위 없는 위대한 학자"로 존경받았으며, 지역 주민들은 그를 미나카타 센세(선생) 또는 미나카타 씨라고 불렀다.1901년, 쑨원이 와카야마를 방문하여 4년 만에 재회했다. 쑨원은 미나카타에게 이누카이 쓰요시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남겼다. 이 편지와 쑨원이 선물한 파나마 모자는 현재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16년, 미나카타는 현재 미나카타 저택인 재산을 얻었다. 넓은 정원은 야외 실험실, 서재는 글쓰기와 현미경 연구 장소, 창고는 서고로 사용되었다. 1917년, 정원의 감나무에서 영국균학회 회장 굴리엘마 리스터가 명명한 새로운 점균 속인 *Minakatella longifilala* 리스터를 발견했다.
다나카 조자부로가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하라 다카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 30명의 거물들이 홍보하여 미나카타 식물 연구소 건립 계획이 추진되었다. 미나카타는 도쿄에서 5개월 동안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 등 저명인사들을 방문하여 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25년, 미나카타는 병으로 입원했다가 퇴원 후 3년간 방문객을 거절했다. 1926년에는 재정적 어려움을 덜기 위해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쇼와 천황은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점균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26년, 미나카타는 코아제 시로와 함께 일본산 점균류 37속 90개의 표본을 히로히토 황태자에게 헌상했다.[25]
1929년, 하토리 박사의 요청으로 미나카타는 와카야마를 방문한 히로히토 천황에게 점균류에 대한 강연을 했다.[25] 황실 전함 나가토에서 점균류 표본을 보여주며 점균류와 해양 생물에 대한 강연을 하고, 110개의 점균류 표본을 천황에게 전달했다.[25]
1962년, 천황과 황후는 다시 와카야마 남부를 방문했다. 시라하마 해변에서 카시마 섬을 보며 지은 와카는 미나카타 구마구스 박물관 앞에 세워진 기념비에 새겨졌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미나카타는 건강이 악화되어 침대에 누워 지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사망하여 다나베시의 고잔지 절에 묻혔다.
3. 학문적 업적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1900년 미국과 영국에서 14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와카야마현에 정착했다. 그는 평생 자연사와 민속학 연구에 헌신했으며, ''네이처''와 ''노츠 앤 쿼리즈''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했다.[1]
그는 1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고, 방대한 양의 책을 필사하며 실증적 문서 검토 및 비교 문화 연구 방법을 익혔다. 이는 ''Junishiko (A Study of Twelve Animals of Chinese Zodiac)''에 잘 나타나 있다.[1] 1893년 영국 체류 당시, ''네이처''에 "동양의 별자리"를 발표하고, 대영 박물관에서 9개 국어 서적을 필사한 "런던 발췌" 노트를 작성하며 인류학, 고고학, 종교학 등을 독학했다.[1] ''네이처''와 ''Notes and Queries영어''에 과학사, 민속학, 인류학 관련 영문 논고를 다수 기고했으며, 생애 동안 ''네이처''에 51편의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는 단독 저술 논문 수로는 역대 최고 기록이다.[1]
그의 학문은 박물학, 민속학, 인류학, 식물학, 생태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으며, 하나의 분야와 관련된 모든 학문을 알려고 하는 방대한 것이었다.[1] 게이오 대학교 전 총장 고이즈미 신조는 "일본 학문 역사에 괴짜 학자가 이토록 광범위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고 찬사를 보냈다.[1]
3. 1. 생물학 연구
미나카타는 점균 연구 외에도 민속, 종교, 자연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네이처''에 51편의 논문을 포함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으며, 많은 종류의 점균류를 발견했다.[7]와카야마현다나베시에 거주하며, 야나기타 구니오 등과 교류하면서 탁월한 지식과 독창적인 사고로 일본의 민속, 전설, 종교를 광범위한 세계의 사례와 비교하여 논하며, 당시로서는 빠른 단계의 비교 문화학(민속학)을 전개했다. 균류 연구에서는 새로운 종 70종을 발견했으며, 자택의 감 나무에서는 새로운 속이 된 점균을 발견했다. 민속학 연구에서는 『인류 잡지』, 『향토 연구』, 『태양』, 『일본 및 일본인』 등의 잡지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7]
1893년(메이지 25년) 영국 체류 시 과학 잡지 『네이처』지에 별자리에 관한 질문에 답한 「동양의 별자리」를 발표했다.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9개 국어 서적을 필사한 「런던 발췌」 노트를 작성하여 인류학, 고고학, 종교학, 섹스학 등을 독학했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 채집한 지의류, 균류 및 과학사, 민속학, 인류학에 관한 영문 논고를 『네이처』와 『』에 잇따라 기고했다.[7]
생애 동안 『네이처』지에 51편의 논문이 게재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단독 저술로 게재된 논문 수의 역대 최고 기록이다.[7]
구마구스는 박물학자로 소개되지만, 시대적으로는 이미 박물학이 해체되었으며, 그의 활동은 식물학 분야에 속한다. 그의 전문 분야는 은화식물이었다. 도쿄 시대에 미국의 커티스가 평생 동안 균류를 6000점 수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은 7000점을 모으기로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다.[27]
구마구스는 평생 현화식물 수집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도미 전에는 닛코 등에서, 미국에서는 각지에서 식물 채집을 했고, 귀국 후에는 와카야마현 남부 각지에서 다량의 식물 채집을 했다. 표본은 대부분 남아있는데, 초기에는 받침대에 붙인 정식 압착 표본 형태가 많지만, 후기에는 신문지에 끼워진 채이다. 일부에는 상세한 기록과 그림이 있어 그가 훌륭한 식물학 지식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구마구스는 고등 식물 전문가라고 발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 보호 운동이든, 은화식물 연구이든, 고등 식물 지식이 그 기반을 만들었다.
구마구스는 은화식물 전반을 전문으로 했으며, 많은 표본을 제작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담수 조류에 대해서도 많은 프레파라트 표본을 제작했지만, 발표가 적고 표본 보존도 좋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균류 중 버섯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건조 표본 외에도 버섯 채색도에 전문적인 기재문을 붙인 것을 3,500매나 제작했다. 점균학자 하기와라 히로미츠는 "구마구스만큼 많은 그림과 기재문을 남긴 연구자는 적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점균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지만, 초기에는 식물이나 담수 조류에 노력을 기울였고, 타나베에 자리를 잡은 후 정력을 쏟았다. 6,000점 이상의 변형균 표본을 남겼고, 수차례 변형균 목록을 발표했다. 구마구스가 발견한 신종은 10종 정도이며, 그중 미나카타 먼지버섯에는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하기와라는 미나카타 먼지버섯이 살아있는 수목 수피에 발생한다는 점, 1970년대 이후 주목받은 환경 서식 변형균 연구, 1990년대 주목받은 동계 발생 점균에 주목한 점 등에서 구마구스의 선진성을 인정했다.[27]
3. 2. 민속학과 비교문화학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평생 자연사 및 민속학을 연구했으며, 특히 민속학과 비교문화학 분야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1900년 미국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Nature)와 민속 잡지 ''노츠 앤 쿼리즈''(Notes and Queries)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했다.[1] 귀국 후에는 와카야마현 다나베시에 거주하며 야나기타 구니오 등과 교류하면서 일본의 민속, 전설, 종교를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와 비교 연구하는 비교문화학(민속학)을 전개했다.[1]1893년 영국 체류 당시, ''네이처''지에 "동양의 별자리"를 발표하고, 대영 박물관에서 9개 국어 서적을 필사한 "런던 발췌" 노트를 작성하며 인류학, 고고학, 종교학 등을 독학했다.[1] 또한 ''네이처''와 ''Notes and Queries영어''에 과학사, 민속학, 인류학 관련 영문 논고를 다수 기고했다.[1] 그는 생애 동안 ''네이처''지에 51편의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는 단독 저술 논문 수로는 역대 최고 기록이다.[1]
그는 1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고, 방대한 양의 책을 필사하며 실증적 문서 검토 및 비교 문화 연구 방법을 익혔다. 이는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Junishiko (A Study of Twelve Animals of Chinese Zodiac)''에 잘 나타나 있다.[1]
야나기타 구니오와의 서신 교류는 동서양 역사적 증거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일본 민속학 연구의 탄생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 그는 또한 당시로서는 이른 단계의 비교문화학(민속학)을 전개했다.[1]
1903년, 도키 호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방 만다라" 그림을 통해 "어느 쪽으로든 사리가 투철하여 이 우주를 이룬다"는 독자적인 만다라 사상을 설명했다.[14]
3. 3. 자연 보호 운동과 생태학적 선구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1906년 일본 정부의 신사 합사령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신사 합사가 지역 신앙과 습속을 훼손하고, 신사 숲(진수림)을 벌채하여 고유 생태계를 파괴할 것을 우려했다.[30] 그는 지역 신문인 '무로 신포'에 자신의 의견을 기고하고, 마쓰무라 진조를 비롯한 저명한 학자들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펼쳤다. 특히 다나베만의 작은 섬인 가미시마 보호 운동에 힘썼으며, 섬의 희귀 식물을 언급하며 섬 전체를 생태학적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주장이었다.야나기타 구니오는 미나카타의 편지를 배포하며 이 운동을 지원했고, 젊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지역적으로 힘을 보탰다.[1] 미나카타의 열정은 여론을 움직여 1920년 신사 합사령은 폐지되었다. 비록 10년 동안 많은 신사와 숲이 사라졌지만, 그의 노력으로 일부 숲은 지켜졌다.
이후에도 미나카타는 환경 보호를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과 공공 기관에 참여했다. 그의 신사 합병 반대 운동은 주민들의 정신적 중심지 상실과 자연 생태계 파괴에 대한 깊은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오늘날 생태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유가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구마노 고도가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30]
4. 성격과 에피소드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어린 시절부터 경이로운 기억력을 가진 신동이었다. 장서가의 집에서 100권이 넘는 책을 빌려와 통째로 암기하여 필사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나[28], 이는 과장된 면이 있으며, 실제로는 책을 베껴 쓰면서 내용을 구석구석까지 기억하는 방식이었다.[28]
구마구스는 자신의 기억법을 도기 호류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28]
1. 자신이 이해한 것을 분류한다.
2. 분류된 덩어리를 서로 연관시켜 연상 네트워크를 만든다.
3. 그것들을 반복한다.
그는 필요한 정보가 어느 책의 어느 페이지에 있는지 기억하고 있다가 바로 펼쳐 보거나, 기억을 바탕으로 원고를 써내려갔다.[9] 창고 안을 드나들며 책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몇 페이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있었다"라며 기뻐했다.[31]
타나베의 지인 노구치 리타로는 구마구스가 특정 인물의 선조 이야기까지 기억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전 타나베 서장 오가와 슈키치는 구마구스가 20년 전 술자리에 동석했던 기생의 이름과 본적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구제 중학교 입학 전에는 『화한삼재도회』, 『본초강목』 등을 필사했으며, 중학교 재학 중에는 한역 대장경을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연구가 진전되면서 구마구스가 『화엄경』 자체를 읽은 흔적이 없다는 지적과 함께, 도기 호류는 구마구스가 불교 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만년에는 기억력 저하를 겪으며 여러 대책을 강구했다. 책의 색인을 작성하고, 자신의 논문을 활용했으며, 지인에게 문헌 출처를 묻기도 했다.[28] 밤새도록 혼잣말을 하며 기억력 감퇴를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31]
구마구스는 괴팍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비정상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 한 번 화가 나면 난폭해져 주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기질을 자각하고 학문에 몰두하는 것이 이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야나기타 구니오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다한증 때문에 얇은 옷을 입거나 벌거벗은 채로 지내는 일이 많았다. 타나베의 산에서 채집할 때 샅바만 걸친 채 산을 뛰어 내려가 사람들을 놀라게 해 '텐갼'(기슈 방언으로 텐구를 뜻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벌거벗는 것은 6월부터 9월 중순까지였으며, 한여름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다.[31]
도미 전에는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일대 사업을 이룬 뒤 천하의 남자라고 불리고 싶다"라는 결의를 담은 도도이츠를 남겼다.
어린 시절에는 흥미 없는 과목에 무관심하고 산만한 태도를 보여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고, 대학 시절에는 학문에 몰두하는 동급생을 보며 "이런 걸로 목숨을 거는 건 바보 같다"며 대학 교육에 실망했다.
고양이를 좋아해 런던 유학에서 귀국 후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름은 '쵸보로쿠'로, 런던 시대에는 고양이를 껴안고 잤다고 한다. 아내가 되는 마츠에를 만날 구실로 더러운 고양이를 데려와 씻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구마구스는 야나기타 쿠니오에게 'The handbook of folklore (민속학 편람)'을 빌려주었는데, 이는 일본 민속학 체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중세 일본에 전해져 『유리 와카 대신』에 번안되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평생 직업이 없어 수입이 없었기에 아버지의 유산과 동생 츠네구스의 원조에 의존했다. 츠네구스는 기행이 많고 원조를 요구하는 형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연구소 설립 자금 모금 중 유산 상속 문제로 충돌한 후 평생 절연했다.
입에서 위 내용물을 자유자재로 구토할 수 있는 반추 위를 가진 체질로, 초등학교 시절 싸움을 하면 "팟"하고 토해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장서가였지만 불필요한 책은 반환했고, "학문은 활물(살아있는 것)이고 서적은 찌꺼기다"[33]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남아있는 장서는 대부분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34]
술고래였으며, 친구들과 유흥가에서 기생을 불러 광대짓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술에 취해 싸움을 하고 경찰 신세를 지는 등 술에 얽힌 실패도 많았다.
에도가와 란포 등과 함께 남색 관련 문헌 연구를 열심히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마구스 자신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인간으로는 드물게 많은 사진이 남아있어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다고 여겨진다.
임종 시 의사를 부를 거냐는 질문에 "자주색 꽃이 사라지니까"라고 거절했다고 한다.[35]
구마구스의 뇌는 오사카 대학 의학부에 포르말린에 절여 보존되어 있다. 그는 유체 이탈 등을 자주 체험했기 때문에 사후 자신의 뇌를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MRI 조사 결과 오른쪽 측두엽 안쪽 해마에 위축이 있어 환각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단 것을 좋아했고, 특히 앙팡을 좋아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주었다. 이웃 아이들에게도 주었다.[31]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잘 못해 맥주를 마셨지만, 쇼와 시대에는 술을 끊었다. 딸 문에 따르면 술에 취해 쑨원의 편지를 속였다는 것이 이유라고 한다. 담배는 골든 배트나 담배 입이 달린 시키시마였다. 브런치는 버터를 바른 식빵이 중심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부추 된장국, 고기(특히 스테이크), 장어 덮밥, 닭 간, 잠두 간장 조림, 닭고기 튀김이었다. 싫어하는 것은 생선회였는데, 기생충을 걱정했기 때문이다.[36]
밤샘을 할 때는 앙팡 6개로 정해져 있었다.[31]
양복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까지 맞지 않는다고 싫어해 사계절 내내 일본 옷을 입었다.[31]
목욕을 좋아했다. 미지근한 욕조에 눈을 감고 오랫동안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2시간 정도 목욕을 하며 구상을 하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오면 목욕하는 곳에 서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31]
아침 8시에 연구실에서 나와 침실로 들어가 저녁 6시에 깨어 연구실로 들어가는 야행성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낮 동안의 방문객은 문전 박대를 당했고, 인간 혐오로 평가받았다.[37]
편지나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 파지하지 않고 한 번에 썼다. 쉬더라도 2시간 정도에 일어나 밤중에도 개의치 않았다.[31]
책상 위에서는 글을 쓰지 않고 다다미 위에 아무것도 깔지 않고 앉아 글을 썼다. 젊었을 때는 책상이나 테이블을 사용했지만, 만년에는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다다미를 사용했다.[31]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여덟 칸짜리 별채에서 지냈고, 거기에서 일절 나가지 않았다. "밥도 가져오지 마"라며 식사를 거부했지만, 배가 고프면 나와 "오늘 아침부터 밥을 먹었나"라며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몰두했다.[31]
여름에는 별채 방에서 낮잠을 자는 정도의 취침 습관으로, 모기장에 들어가 자는 일이 없었고 대개 깨어 있었다. 이러한 수면 시간으로도 3일 정도는 괜찮았다.[31]
구마구스가 기르던 거북은 2001년까지 살아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100세 정도라고 한다.
1941년 11월 2일, 카이난시 후지시로에 있는 구마야에게 '일본 동물 도감'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일기에 있다. 11월 16일에는 '고금이야기' 상권에 딸 후미에에게 준다는 글을 적어 넣었다. 12월 8일 진주만 공격 보도에는 아무런 기재가 없다.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들은 구마구스는 박치기를 하여 3개월간 입관 금지를 당했다. 1년 후 다시 같은 사람을 구타하여 박물관에서 추방되었지만, 유력한 영국인들의 탄원서로 복직했다.
전등을 싫어해 등롱을 사용했지만, 작은 화재를 일으킨 후 전등을 사용하게 되었다.[31]
구마구스가 낮잠을 자는 중에 손님이 왔을 때 부재중이라고 말했지만, 뻗은 두 다리가 보여 집에 없는 척하는 것을 들켰다. 손님이 "정말입니까"라고 묻자 "본인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틀림없다"라고 대답해 집안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렸다.[31]
스토브는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언제 구마구스가 일어나도 좋도록 화로에 연탄을 넣어 따뜻하게 하고 차를 끓여 놓았다.[31]
목욕 후 젖은 몸을 닦지도 않고 유카타도 입지 않은 채 알몸으로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목욕탕에서 부엌까지 돗자리를 깔아 놓았다. 추운 날에도 변함없이 같은 행동을 했다.[31]
5. 평가와 영향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박물학, 민속학, 인류학, 식물학, 생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관련 학문을 탐구하는 방대한 것이었으며, 서재나 나치산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한 결과, 만다라에 비유되는 지식 체계를 구축했다.[8]
1893년 영국 체류 중 과학 잡지 『네이처』에 별자리에 관한 질문에 답한 「동양의 별자리」를 발표했다.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9개 국어 서적을 필사한 「런던 발췌」 노트를 작성하여 인류학, 고고학, 종교학, 섹스학 등을 독학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발견, 채집한 지의류, 균류 및 과학사, 민속학, 인류학에 관한 영문 논고를 『네이처』와 Notes and Queries영어에 잇따라 기고했다.
평생 동안 『네이처』지에 51편의 논문을 게재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단독 저술로 게재된 논문 수의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귀국 후에는 와카야마현 다나베정(현 다나베시)에 거주하며 야나기타 구니오 등과 교류하면서 탁월한 지식과 독창적인 사고로 일본의 민속, 전설, 종교를 광범위한 세계의 사례와 비교하여 논하며, 당시로서는 빠른 단계의 비교 문화학(민속학)을 전개했다.[8] 균류 연구에서는 새로운 종 70종을 발견했으며, 자택의 감 나무에서는 새로운 속이 된 점균을 발견했다. 민속학 연구에서는 『인류 잡지』, 『향토 연구』, 『태양』, 『일본 및 일본인』 등의 잡지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많은 연구를 수행하고 방대한 자료를 남겼지만, 구마구스는 해당 분야에서 논문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이는 출판된 논문을 공식적인 업적으로 간주하는 과학계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점균 분야에서 구마구스는 여러 차례 목록을 발표하여 일본 점균상에 178종을 추가했지만, '신종'을 기재하지 않았고, 구마구스의 손을 거친 신종은 모두 다른 연구자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마구스는 "뛰어난 관찰자 및 수집가(컬렉터)"로 평가받기도 한다.
국립과학박물관쓰쿠바 실험 식물원 식물 연구 부장 호소야 타케시는 『균류 도보』에 대해 "기재 방법이 자기 방식이고 내용에도 편차가 있다"며 생물학적 가치는 높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냄새나 맛에 대해서도 기록한 것은 구마구스 자신을 위한 데이터베이스적인 역할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며,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7] 와타리움 미술관 관장 와타리 에츠코는 『미나카타 구마구스 균류 도보』(신초샤)에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면을 평가하고 있다.[7]
하지만 구마구스 자신이 남긴 메모, 일기, 편지 등을 통해 그의 학문에 대해 추측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주요 평가 및 기념 사업
| 연도 | 내용 |
|---|---|
| 1946년 가을 | 만주에서 귀국한 오카다 소우조가 시부사와 케이조에게 미나카타 구마구스 현창 사업 시작 제안 |
| 1947년 10월 | 미나카타 소사이어티 준비회 개최 (시부사와 케이조 회장, 오카다 소우조 대표 간사) |
| 1948년 | 쇼와 천황이 시부사와에게 구마구스의 표본 현황 질문 |
| 1951년 | 미나카타 소사이어티 주최 "미나카타·쿠마구스전" 개최 |
| 1962년 5월 | 시라하마정을 행차한 쇼와 천황, 어제(御製) "안개 낀 가미시마를 바라보며, 기이의 나라에서 태어난 미나카타 구마구스를 생각한다" 읊음 (쇼와 천황이 민간인을 읊은 최초의 노래) |
| 1965년 4월 | 시라하마정 "반쇼산"에 "미나카타 구마구스 기념관" 개관 |
| 1987년 6월 | 와카야마현 타나베시에서 "미나카타 구마구스 저택 보존 현창회" 발족 |
| 1989년 | 모금 활동 전개 |
| 2000년 | 장녀 후미에 사망 후, 옛 저택과 장서·자료 모두 타나베시에 유증 |
| - | 와카야마시 하시쵸 생가에 미나카타 구마구스 흉상 건립 |
| 2017년 | 미나카타 구마구스 탄생 150주년, 타나베시에서 명예 시민 칭호 수여 |
6. 주요 저작
미나카타 구마구스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영국 유학 시절에는 ''Nature''지에 50편의 논문을 기고했고, ''Notes and Queries''지에 수백 편의 기사와 에세이를 기고하여 영국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등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였으며, 이는 실증적인 문헌 검토와 비교 문화 연구 방법을 숙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는 Junishiko (A Study of Twelve Animals of Chinese Zodiac)영어이다.[2]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일본 학술지와 잡지에 여러 편의 기사를 발표했다. 야나기타 구니오와의 서신 교류는 일본 민속학 연구의 탄생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업적 중 하나인 The Illustrated Book of Bionomics of Japanese Fungi영어(일본 곰팡이 생태학 도감)는 4,500종의 곰팡이를 15,000장의 그림과 함께 수록한 책으로, 곰팡이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2]
다음은 미나카타 구마구스의 주요 저작 목록이다.
| 제목 | 출판사 | 출판 연도 | 비고 |
|---|---|---|---|
| 『남방이서』 | 야나기타 구니오 편 | 1911년 | 사비판 소책자 |
| 『남방한화』 | 사카모토 서점 | 1926년 | |
| 『남방수필』 | 오카 서원 | 1926년 | |
| 『속 남방수필』 | 오카 서원 | 1926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전집』 (전 12권) | 겐겐샤 | 1951~1952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전집』 (전 10권, 별권 2) | 헤이본샤 | 1971~1975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선집』 (전 6권, 별권 1) | 헤이본샤 | 1984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일기』 (전 4권) | 하세가와 코조 편, 야사카 서방 | 1987~1989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서간집』 | 기난 문화재 연구회 편 | 1981년 | 기난 문화재 연구회 (기난 향토 총서・제11집), 증보판 1988년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서간 초고 미야타케 쇼조 앞으로』 | 카사이 키요시 편, 킷카와코분칸 | 1988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서간 맹우 모리 세이가에게』 | 나카세 키요 편, 일본 에디터 스쿨 출판부 | 1988년 | |
| 『문하생에게 보내는 편지 카미마츠 시게루에게』 | 나카세 키요 편, 일본 에디터 스쿨 출판부 | 1990년 | |
| 『죽마고우 오가사와라 요시오 앞으로 보낸 서간』 | 하세가와 코조・오가사와라 켄조 편, 야사카 서방 | 1993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서한 고잔지 소장 도기 호류 앞으로 1893-1922』 | 오쿠야마 나오시・운토 히토시・칸다 히데아키 편, 후지와라 쇼텐 | 2010년 | |
| 『버섯 사천왕 카시야마 카이치 앞으로 미나카타 구마구스 서간』 | 킷카와 토시히로 편, 미나카타 구마구스 기념관 | 2011년 | |
| 『야나기타 구니오·미나카타 구마구스 왕복 서간집』 | 이이쿠라 테루헤이 편, 헤이본샤 | 1976년 | 헤이본샤 라이브러리(상·하) 1994년 |
| 『미나카타 구마구스·도기 호룡 왕복 서간』 | 나카세 키요·하세가와 코조 편, 야사카 서방 | 1991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남색 담의 이와타 준이치 왕복 서간』 | 하세가와 코조·츠키카와 카즈오 편, 야사카 서방 | 1991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리스터 왕복 서간』 | 야마모토 유키노리 편, 미나카타 구마구스 저택 보존 현창회 | 1994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히라누마 다이사부로 왕복 서간〈다이쇼 15년〉』 | 미나카타 구마구스 현창관 (미나카타 구마구스 자료 총서) | 2007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코아즈 시로 왕복 서간 (전 4권)』 | 미나카타 구마구스 현창관 (미나카타 구마구스 자료 총서) | 2008~2011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수필집』 | 마스다 가쓰미 편, 지쿠마 서방〈지쿠마 총서〉 | 1968년 | 지쿠마 학예 문고 1994년 |
| 『십이지고』 (전 3권) | 이이쿠라 쇼헤이 교정, 헤이본샤 동양 문고 | 1972~73년 | 와이드판 2006년 |
| 『미나카타 구마구스 문집』 (전 2권) | 이와무라 시노부 편, 헤이본샤 동양 문고 | 1979년 | 와이드판 2006년 |
| 『구마구스 만필 미나카타 구마구스 미간 문집』 | 이이쿠라 쇼헤이・쓰루미 가즈코・하세가와 고조 편, 야사카 서방 | 1991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컬렉션』 (전 5권) | 나카자와 신이치 편・해설, 가와데 서방 신사〈가와데 문고〉 | 1991~92년, 신장판 2015년 | I 남방 만다라, II 남방 민속학, III 정(淨)의 섹스롤로지, IV 동과 부동의 코스몰로지, V 숲의 사상 |
| 『십이지고』 (상・하) | 미야타 노보루 해설, 이와나미 문고 | 1994년 | 와이드판 2003년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진사 평론』 | 하세가와 고조・다케우치 요시노부 교정, 헤이본샤 | 1995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이력서 외』 | 〈인간의 기록 84〉 일본 도서 센터 | 1999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영문 논고 「네이처」지 편』 | 이이쿠라 테루히라 감수, 마츠이 류고, 타무라 요시야, 나카니시 스미 역, 슈에이샤 | 2005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영문 논고 「노츠 앤 퀘리즈」지 편』 | 이이쿠라 테루히라 감수, 마츠이 류고, 타무라 요시야, 나카니시 스미, 시무라 마사유키, 난조 타케노리, 마에지마 시호 역, 슈에이샤 | 2014년 | |
| 『남방수필』 | 하기와라 세이분칸 | 1943년 | |
| 『남방수필 정·속』 (복각판) | 沖積舎 | 1992년 | |
| 『남방 이서 원본 번각』 | 남방구마구스 저택 보존 현창회 | 2006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균지』 (제1・2권) | 고바야시 요시오 편・해설, 야사카 서방 | 1987-89년 | 구마구스의 영문 기재・일본어 해설 |
| 『미나카타 구마구스 균지』 (제1권~제5권) | 고바야시 요시오 편・해설, 미나카타 구마구스 기념관 | 1989-96년 | 개정판 |
| 『미나카타 구마구스 균류 채색 도보 백선』 | 고바야시 요시오 편, 학신사 엔터프라이즈 | 1989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기념관 소장품 목록 자료・장서편』 | 미나카타 구마구스 기념관 | 1998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변형균 표본 목록』 | 하기와라 미츠히로 편, 미나카타 구마구스 현창관 | 1999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저택 장서 목록』 | 미나카타 구마구스 자료 연구회 편, 미나카타 구마구스 저택 보존 현창회 | 2004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저택 자료 목록』 | 미나카타 구마구스 자료 연구회 편, 미나카타 구마구스 저택 보존 현창회 | 2005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프레파라트 표본 목록』 | 하기와라 미츠히로 편, 미나카타 구마구스 현창관 | 2005년 | |
| 『미나카타 구마구스 균류 도보』 | 와타리움 미술관 편・하기와라 히로미츠 해설, 신초샤 | 2007년 | 120매 엄선 |
- [https://doi.org/10.1537/ase1887.23.446 涅齒에 대하여] - 《도쿄 인류학회 잡지》 제23권 (1907-1908) 제270호 446-452쪽
- [https://doi.org/10.15281/jplantres1887.22.260_317 본방산 점균류 목록] - 《식물학 잡지》 제22권 (1908) 제260호 317-323쪽
- [https://doi.org/10.1537/ase1887.26.63 본방에 있어서의 동물 숭배 추가] - 《도쿄 인류학회 잡지》 제26권 (1910-1911) 제296호 6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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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oi.org/10.1537/ase1911.28.559 페루국에 표착한 일본인] - 《인류학 잡지》 제28권 (1912-1913) 제10호 559-5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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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oi.org/10.1537/ase1911.31.47 눈과 목구멍에 부처가 있다는 것] - 《인류학 잡지》 제31권 (1916) 제2호 47-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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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oi.org/10.1537/ase1911.33.19 부모의 말에 거역하는 아이의 이야기] - 《인류학 잡지》 제33권 (1918) 제1호 19-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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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oi.org/10.15281/jplantres1887.41.41 현금 본방에 생산한다고 알려진 점균 종의 목록] - 《식물학 잡지》 제41권 (1927) 제482호 41-47쪽
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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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楠は日本人の夢」 生誕150周年で中沢新一さん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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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方熊楠 履歴書(口語訳13)母と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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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方熊楠 履歴書(口語訳15)帰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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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谷川興蔵集 南方熊楠が撃つ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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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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