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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죽산 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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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 죽산 안씨는 죽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안원형이다. 안면은 이색, 김광재의 문하에서 사마에 합격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이재공파, 제학공파 문중을 형성하여 경기도,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북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안노생, 안정생, 안철손, 안신손, 안방준, 안규용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16명, 무과 급제자 19명, 생원 23명, 진사 17명을 배출했다. 2000년 대한민국 인구조사에서 신 죽산 안씨는 7,66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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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산 안씨 (신) - 안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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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죽산 안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한자 표기竹山 安氏
로마자 표기Juksan Anssi
관향
관향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역사
시조안원형(安元衡)
인구 통계
2015년77,026명
주요 인물
주요 인물안방준
안규백
안호영

2. 역사

죽산 안씨 시조 안원형의 아들 안면은 이색과 함께 김광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341년(충혜왕 복위 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중서문하성 정언으로 있을 때 신돈의 부정을 문제 삼았다가 파직당한 후 주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통훈대부 광주교관을 지냈다.[1]

안면의 큰아들 안노생은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사인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된 후 경상도 영해도호부로 유배되었다.[1] 1399년(정종 1) 좌간의대부로 다시 등용되어 1400년(정종 2) 집현전 제학으로 중용된 후 경상도안렴사, 진주목사, 예조참의, 이조참의, 경기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1] 안노생의 후손들은 이재공파 문중을 형성하여 경기도 파주, 광주광역시 오치동·매월동, 함평군 나산·월야, 무안군, 전라북도 진안·고창, 경상북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1]

안면의 둘째 아들 안정생은 세종 때 보문각직제학을 지냈다.[1] 안정생의 후손들은 제학공파 문중을 형성하여 전라남도 장흥·보성·강진·화순·순천, 경기도 파주·양주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1]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죽산 안씨 시조 안원형(安元衡)의 아들 안면(安勉)은 이색(李穡)과 함께 김광재(金光載)의 문하에서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사마(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신돈의 부정을 문제 삼았다가 파직당한 뒤로는 주로 전라도 광주 지역에 머물며 전원생활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 개국 후 통훈대부(通訓大夫) 광주교관(光州敎官)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있다.[1]

안면의 큰아들 안노생(安魯生)은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강직하고 결백한 성품을 인정받아 문하사인(門下舍人)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된 후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로 유배되었다.[1] 1399년(정종 1)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출사하여 1400년(정종 2)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으로 중용된 후 경상도안렴사, 진주목사, 예조참의, 이조참의, 경기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1]

안노생의 후손들은 현재 경기도 파주, 광주광역시 오치동·매월동, 함평군 나산·월야, 무안군, 전라북도 진안·고창, 경상북도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이재공파 문중을 형성하고 있다.[1]

안면의 둘째 아들 안정생(安挺生)은 세종 때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고 한다.[1] 안정생의 후손들은 현재 전라남도 장흥·보성·강진·화순·순천, 경기도 파주·양주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제학공파 문중을 형성하고 있다.[1]

2. 2. 조선시대

조선 정종 때 문하사인, 집현전 제학 등을 역임하고, 세종 때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신 죽산 안씨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안면'''(安勉): 이색과 함께 김광재(金光載)의 문하에서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1367년(공민왕 16)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신돈의 부정을 문제 삼았다가 파직되었다. 조선 개국 뒤 통훈대부(通訓大夫) 광주교관(光州敎官)을 지냈다.[1]
  • '''안노생'''(安魯生): 안면의 큰아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강직하고 결백한 성품으로 문하사인(門下舍人)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된 후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로 유배되었다. 1399년(정종 1)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등용되어 1400년(정종 2)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으로 중용된 후 경상도안렴사·진주목사·예조참의·이조참의·경기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광주목사 등을 지냈다.[1]
  • '''안정생'''(安挺生): 안면의 둘째 아들. 세종 때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1]


안노생의 후손들은 경기도 파주, 광주광역시 오치동·매월동, 함평군 나산·월야, 무안군, 전라북도 진안·고창, 경상북도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이재공파 문중을 형성하고 있다.[1] 안정생의 후손들은 전라남도 장흥·보성·강진·화순·순천, 경기도 파주·양주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제학공파 문중을 형성하고 있다.[1]

3. 주요 인물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던 안극지(安克智), 병법에 능하여 정유재란이순신을 도운 안중묵(安重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절의를 실천한 문강공 안방준(安邦俊), 병자호란남한산성까지 인조를 모셨던 안유신(安由愼) 등이 있다.[1]

1680년 보사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안음(安崟), 성균관직강을 지낸 안여기(安汝器), 송시열과 함께했던 안여해(安汝諧), 의술에 뛰어났고 동복현감을 지낸 안수상(安壽相), 향약과 의고로 빈민을 구제하고 학재를 지어 인재를 가르쳤던 안후상(安後相), 시가에 뛰어났던 안창후(安昌後), 사간원정언·장령·사헌부지평을 지내면서 바른말을 했던 안치택(安致宅), 뛰어난 문장으로 예조좌랑을 지낸 안치방(安致邦) 등이 있다.[1]

1795년 79세로 과거에 급제한 안형직(安衡稷), 정약용이 칭찬했던 안호(安浩), 목미암에서 향촌교육에 힘썼던 안수록(安壽祿), 도학을 이념으로 교육활동에 헌신했던 안규용(安圭容), 1907년 정미의병 때 의병장 안규홍(安圭洪), 유격대장 안택환(安宅煥), 군량담당 안규창(安圭昌) 등이 있다.[1]

1919년 3.1 운동 당시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안규용(安圭瑢)과 낙안과 벌교장터에서 '낙안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안규삼(安圭三), 안규진(安圭晉), 안덕환(安德煥), 안상규(安尙圭)가 있다.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했던 독립운동가 안후덕(安厚德),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안종변(安鍾卞), 1950년 한국 전쟁 때 보도연맹원 480명을 풀어준 안종삼(安鍾三), 1971년 베트남 전쟁에서 순국한 안도열(安道烈), 안평호 등이 있다.[1]

3. 1. 고려

안복초(安復初)는 회양부사를 지냈다. 안철손(安哲孫)과 안신손(安信孫) 형제는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안철손은 사헌부감찰·의금부도사를 지내다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된 후 개성부경력·호조참의·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내금위장을 지냈고, 안신손은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로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찬 때 편수기사관(編修記事官)을 지냈고

3. 2. 조선

조선 시대 죽산 안씨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회양부사를 지낸 '''안복초(安復初)''', 사헌부감찰·의금부도사를 지내고 좌익원종공신 3등에 오른 안철손(安哲孫)과 예문관 대교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좌익원종공신 2등에 오른 안신손(安信孫) 형제, 1467년 이시애의 난에 순국한 '''안민(安民)''', 정국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청안‧진안‧예안 세 고을의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 불렸던 '''안범(安範)''', 의정부사록을 지낸 '''안수륜(安秀崙)'''이 있다.[1]

1522년 과거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우아한 문장과 재행(才行)으로 당세에 으뜸이었던 '''안수잠(安秀岑)''', 이황과 동년(同年)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고 문장이 뛰어났던 '''안충달(安忠達)''',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나주목사·남원부사를 지내고 물러나와 ‘호남삼고(湖南三高)’로 불렸던 '''안축(安舳)''' 등이 있다.[1]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던 '''안극지(安克智)''', 병법에도 능해 정유재란 중에 이순신을 도왔던 '''안중묵(安重默)''',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평생 동안 절의(節義)를 실천해서 보성 죽산안씨의 위상을 높인 문강공 '''안방준(安邦俊)''', 병자호란남한산성까지 호종했던 '''안유신(安由愼)'''이 있다.[1]

1680년 보사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안음(安崟)''', 성균관직강을 지낸 '''안여기(安汝器)''', 송시열과 함께했던 이병재(理病齋) '''안여해(安汝諧)''', 유의(儒醫)로 추천받을 정도로 의술에 뛰어났고 동복현감을 지낸 '''안수상(安壽相)''', 향약(鄕約)과 의고(義庫)로 빈민을 구제하고 학재(學齋)를 지어 인재를 가르쳤던 '''안후상(安後相)''', 시가(詩歌)에 뛰어났던 한설당(閒說堂) '''안창후(安昌後)''', 사간원정언·장령·사헌부지평을 지내면서 서슴없이 바른말 했던 무은재(無隱齋) '''안치택(安致宅)''', 뛰어난 문장(文章)으로 예조좌랑을 지낸 '''안치방(安致邦)'''이 있다.[1]

1795년 7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안형직(安衡稷)''', 정약용이 <기변(幾辨)>을 읽고 “그 정밀하고 명석함이 사람을 감복케 하였다”고 했던 서운헌(棲雲軒) '''안호(安浩)''', 송매정(松梅亭)의 주인으로 목미암(木美庵)에서 향촌교육에 힘을 쏟았던 '''안수록(安壽祿)''', 한말·일제시대에 도학(道學)을 이념으로 삼아 교육활동에 헌신했던 도학자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유격대장 '''안택환(安宅煥)'''·군량담당 '''안규창(安圭昌)''' 등이 있다.[1]

3. 3. 대한민국

조선 사헌부감찰·의금부도사를 지내다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된 후 개성부경력·호조참의·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내금위장을 지냈던 '''안철손(安哲孫)'''과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 《문종실록(文宗實錄)》편찬 때 편수기사관(編修記事官)을 지냈고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던 '''안신손(安信孫)''' 형제,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순국한 '''안민(安民)''', 1507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되어 청안‧진안‧예안 세 고을의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 불렸던 '''안범(安範)''',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지낸 '''안수륜(安秀崙)''', 1522년 과거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우아한 문장과 재행(才行)으로 당세에 으뜸이었던 '''안수잠(安秀岑)''', 이황(李滉)과 동년(同年)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고 문장(文章)이 뛰어났던 '''안충달(安忠達)''',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나주목사·남원부사를 지내고 물러나와 ‘호남삼고(湖南三高)’로 불렸던 '''안축(安舳)''' 등이 있다.[1]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던 '''안극지(安克智)''', 병법에도 능해 정유재란 중에 이순신(李舜臣)을 도왔던 '''안중묵(安重默)''',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평생 동안 절의(節義)를 실천해서 보성 죽산안씨의 위상을 높인 '''문강공(文康公) 안방준(安邦俊)''', 병자호란에 남한산성까지 호종했던 '''안유신(安由愼)''', 1680년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 '''안음(安崟)''',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낸 '''안여기(安汝器)''', 송시열(宋時烈)과 함께했던 이병재(理病齋) '''안여해(安汝諧)''', 유의(儒醫)로 추천받을 정도로 의술에 뛰어났고 동복현감을 지낸 '''안수상(安壽相)''', 향약(鄕約)과 의고(義庫)로 빈민을 구제하고 학재(學齋)를 지어 인재를 가르쳤던 '''안후상(安後相)''', 시가(詩歌)에 뛰어났던 한설당(閒說堂) '''안창후(安昌後)''', 사간원정언·장령·사헌부지평을 지내면서 서슴없이 바른말 했던 무은재(無隱齋) '''안치택(安致宅)''', 뛰어난 문장(文章)으로 예조좌랑을 지낸 '''안치방(安致邦)''', 1795년 7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안형직(安衡稷)''', 정약용(丁若鏞)이 <기변(幾辨)>을 읽고 “그 정밀하고 명석함이 사람을 감복케 하였다”고 했던 서운헌(棲雲軒) '''안호(安浩)''', 송매정(松梅亭)의 주인으로 목미암(木美庵)에서 향촌교육에 힘을 쏟았던 '''안수록(安壽祿)''', 한말·일제강점기에 도학(道學)을 이념으로 삼아 교육활동에 헌신했던 도학자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때 나라위해 목숨 바친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유격대장 '''안택환(安宅煥)'''·군량담당 '''안규창(安圭昌)'''등이 있다.[1]

근대현대에 와서는 1919년 서울 파고다공원 3.1독립만세운동의 '''안규용(安圭瑢)''', 1919년 4월 낙안벌교장터에서 '낙안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안규삼(安圭三)'''·'''안규진(安圭晉)'''·'''안덕환(安德煥)'''·'''안상규(安尙圭)''', 1924년 사재를 정리하여 상하이로 망명·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했던 독립운동가 '''안후덕(安厚德)''',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안종변(安鍾卞)''', 1950년 한국 전쟁 때 보도연맹원 480명을 풀어줬던 ‘한국판 쉰들러’ '''안종삼(安鍾三)''', 1971년 월남전에서 육군대령으로 순국한 '''안도열(安道烈)''', 안평호 등이다.[1]

4. 왕실과의 인척 관계

세조와 근빈 박씨 소생의 장남 덕원군 이서(李曙, 1449~1498)의 다섯째 딸 이탁문(李托文, 1494~?)은 죽산 안씨 '''안수금(安秀嶔, 1488~1542)'''과 혼인했다.[1] 안수금은 안범(安範, 1460~1523)의 셋째 아들로, 1507년(중종 2) 4월 20일에 정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513년(중종 8) 식년시 무과에서 을과 2위로 급제했다.[1] 그는 사헌부 감찰, 정읍 현감, 함평 현감, 안동 부사(안동부 판관), 고성 현령, 평안도 우후(영변 우후), 사복시 판관, 제용감 첨정, 운산 군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1] 안수금과 이탁문 사이에는 4남 3녀가 있었는데, 아들은 안의(安艤), 안박(安舶), 안항(安航), 안방(安舫)이고, 딸은 안예종(安禮琮), 안의종(安義琮), 안임종(安任琮)이다.[1]

5. 본관 및 분파

죽산(竹山)은 경기도 용인시안성시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 때 광주로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1543년(중종 38) 죽산도호부(竹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죽산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에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원일면(遠一面)과 근삼면(近三面) 일부는 용인군에 합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안성군에 편입되었다.[1]

6. 인구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죽산 안씨는 56,051명, 신죽산(新竹山)은 7,666명으로 발표되었다. 1994년 죽산 안씨 족보 편찬 당시 생존해 있는 후손은 41,708명으로 집계되었다.

7. 과거 급제자

신 죽산 안씨는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자 1명, 사마시 합격자 1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6명, 무과 급제자 19명[1], 생원 23명, 진사 17명을 배출하였다.

고려시대 사마시 합격자는 다음과 같다.


  • 안면: 1341년(충혜왕 후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7. 1. 문과

시대성명급제년도(왕)비고
고려안노생1376년(우왕 2)동진사 21위
조선안명석1855년(철종 6)식년시 병과 5위
안민유1692년(숙종 18)춘당대시 을과 2위
안수륜1516년(중종 11)식년시 을과 7위
안수잠1522년(중종 17)식년시 갑과 2위
안신손1453년(단종 1)식년시 정과 11위
안여기1669년(현종 10)식년시 을과 4위
안여지1531년(중종 26)식년시 병과 14위
안여지1654년(효종 5)식년시 병과 14위
안정대1756년(영조 32)식년시 을과 5위
안준유1687년(숙종 13)식년시 병과 11위
안철손1441년(세종 23)식년시 정과 14위
안축1542년(중종 37)정시 을과 1위
안충달1534년(중종 29)식년시 을과 2위
안치방1756년(영조 32)식년시 을과 7위
안치택1739년(영조 15)정시 병과 7위
안형직1795년(정조 19)식년시 병과 4위


7. 2. 무과

이름급제년(왕)시험 종류등위
안경구1669년(현종 10)정시을과 15위(16/141)
안계룡1637년(인조 15)별시병과 3635위(3736/5536)
안극종1491년(성종 22)별시등수 미상
안극지1583년(선조 16)별시병과 335위(372/500)
안동일1725년(영조 1)정시병과 211위(221/432)
안명택1850년(철종 1)증광시병과 11위 [총원 미상]
안사열1771년(영조 47)식년시병과 27위(35/39)
안선지1651년(효종 2)별시병과 730위(761/1236)
안수금1513년(중종 8)식년시을과 2위(5/28)
안순홍1637년(인조 15)별시병과 1887위(1988/5536)
안유성1603년(선조 36)식년시병과 7위(15/34)
안자근쇠1637년(인조 15)별시병과 2666위(2767/5536)
안재행1723년(경종 3)별시병과 67위(96/478)
안중인1612년(광해군 4)증광시병과 17위(25/28)
안지량1644년(인조 22)별시을과 9위(10/201)
안집1835년(헌종 1)증광시병과 14위(22/410)
안풍현1845년(헌종 11)정시등수 미상
안현1728년(영조 4)별시병과 202위(218/633)
안회1651년(효종 2)별시병과 140위(171/1236)



조선시대 신 죽산 안씨 무과 급제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인원이 19명이다.[1]

7. 3. 생원시

합격 연도성명
1483년안범
1522년안여지
1525년안충달
1531년안축
1561년안중돈
1606년안처공
1610년안유경
1635년안지망
1646년안지성
1652년안국재
1657년안음
1660년안여천
1675년안선유
1678년안준유
1705년안세증
1707년안수잠
1713년안치량
1714년안헌증
1729년안치택
1849년안종벽
1859년안혁
1888년안호일
1894년안창환


7. 4. 진사시

신 죽산 안씨의 진사 합격자는 총 17명이다.

합격 연도이름
1894년안규석
1679년안민유
1780년안사검
1507년안수륜
1507년안수잠
1615년안억
1660년안여기
1682년안여해
1613년안유신
1888년안장환
1648년안전
1531년안중돈
1880년안책
1531년안축
1744년안치방
1725년안치응
1741년안치중


8. 집성촌

지역세부 지역
광주광역시서구 서창동, 매월동, 북구 용봉동(저불-봉곡), 오치동, 삼각동, 광산구 본량동
전라남도보성군 보성읍(택촌·외현·솔뫼·담안·귀골·동암·평촌), 복내면(옥평·반석), 미력면(가평), 겸백면(운림), 조성면, 웅치면(삼수), 회천면(영천), 장흥군 장흥읍(우목·건산·행원·평화), 부산면(효자), 장평면(광평·등촌), 장동면(우봉·만년), 관산읍(송촌·양촌·평화), 대덕면, 회진면(진목), 함평군 나산면(나산), 월야면(예동), 해보면(주현), 화순군 이양면(매정·초방·품평), 춘양면(변천), 동복면, 순천시 송광면(소뫼), 낙안면, 강진군 강진읍(부춘), 성전읍(월산), 대구면, 칠량면, 송지면, 무안군 현경면(수양), 담양군 창평면, 고흥군 두원면(신송), 완도군 금일읍(12세 안찬지 , 금일도 최초 입도조-완도군청 공식기록), 여수시 삼일동(당산), 시전동, 해남군, 진도군
전라북도진안군 진안읍(광주동), 용담면, 상전면 , 동향면, 고창군 무장면, 군산시 장재동
경기도파주시, 용인시, 양주시
경상북도영덕군, 청송군 진보면, 영양군 청기면, 봉화군 춘양면, 법전면(눌와), 명호면(삼동)
경상남도상청군 상청읍, 사천군


9. 항렬자

21세22세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
규(圭), 기(基)종(鍾), 용(鎔)순(淳), 태(泰)병(秉), 주(柱)섭(燮), 열(烈)재(在), 교(敎)진(鎭), 현(鉉)영(泳), 식(湜)래(來), 영(榮)찬(燦), 형(炯)철(喆), 배(培)탁(鐸), 수(銖)낙(洛), 호(浩)동(東), 병(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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