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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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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2세는 1642년부터 1666년까지 사파비 왕조를 통치한 이란의 샤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의 통치를 받았으나, 친정을 시작한 후 중앙 집권화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칸다하르를 탈환하여 사파비 왕조의 위신을 높였다. 국내적으로는 종교적 관용과 시아파와의 협력 체제를 유지했으며, 건축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과음으로 인한 급사로 사파비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는 사파비 왕조의 마지막 강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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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2세
기본 정보
왕관을 쓰고 앉아 있는 남자의 그림
1663년의 아바스 2세
이름아바스 2세
출생명솔탄 모하마드 미르자
출생일1632년 8월 30일
출생지카즈빈, 이란
사망일1666년 10월 26일 (34세)
사망지베흐샤르, 이란
매장지파티마 마수메 영묘, 곰, 이란
종교열두 이맘 시아 이슬람
왕조사파비 왕조
통치
이란의 샤
재위 기간1642년 5월 15일 – 1666년 10월 26일
즉위식1642년 5월 15일, 카샨
이전 통치자사피 1세
후임 통치자술레이만 1세
가족 관계
아버지사피 1세
어머니안나 하눔
배우자나키하트 하눔
아누카 공주
자녀술레이만 1세
함자 미르자
서명
아바스 2세의 투그라

2. 역사적 배경

사파비 왕조1501년 이스마일 1세아크 코윤루 투르크멘족으로부터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자신이 이란의 임을 선포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그의 뒤를 이은 타흐마스프 1세는 1532~1555년 오스만-사파비 전쟁을 겪었지만,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노예를 포함하는 "제3의 세력"을 개발하여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타흐마스프의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이스마일 2세가 즉위했지만 곧 독살당했다. 이후 그의 형제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즉위했으나, 그의 치세는 불안정했고 오스만 제국에게 코카서스와 아제르바이잔 대부분을 빼앗겼다. 1587년, 그의 아들 아바스 1세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바스 대왕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잃어버린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중앙 집권화와 상업 확장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무자비함과 정의를 결합하여 통치했으며, 백성들과 소통했다.

사피 1세 (재위 1629-1642) 치세 동안 영토 변화와 사파비 제국의 최종 국경선.


아바스 1세의 뒤를 이은 사피는 권력 공백을 채우지 못하고 실정을 거듭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하브 조약을 체결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상실했다. 또한 왕족과 신하들을 숙청하고 환관 사루 타기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 사피는 1642년 과음으로 사망했으며, 왕세자를 제대로 준비시키지 않아 사파비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2. 1. 사파비 왕조의 성립과 발전

1501년 이스마일 1세아크 코윤루를 무너뜨리고 사파비 왕조를 건국하면서 이란 지역에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확립했다.[1] 그의 아들 타흐마스프 1세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고전했지만,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노예를 포함하는 "제3의 세력"을 개발하여 사파비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2]

아바스 1세는 군사 개혁, 중앙 집권 강화, 무역 진흥 등을 통해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전의 잃어버린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국가 통제를 중앙 집중화하고, 이란의 국내 및 국제 상업 범위를 확장했다.[3] 그는 무자비함과 정의를 결합하고 그의 권위에 대한 위협을 가혹하게 처리하는 동시에 자신의 백성들과 소통했다.[4]

사파비 제국은 아바스 대왕의 치세 동안 최대 규모였다.

2. 2. 아바스 2세 즉위 전후의 상황

사피 1세의 치세는 사치와 실정으로 인해 사파비 제국의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는 굴욕적인 주하브 조약을 맺었다.[1] 이 조약으로 이란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정복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2]

사피 1세는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왕족과 주요 인물들을 숙청했는데, 이로 인해 왕국의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특히 1632년 2월 20일 밤에는 하렘의 여성 40명을 처형하기도 했다.[3]

이러한 상황 속에서 키질바시 세력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첩실, 환관, 굴람 연합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4] 특히 환관이었던 사루 타기는 왕실 하렘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하여 샤의 첩들과 관계를 맺고, 사피에게 영향을 미쳐 왕실 직할령을 늘리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5]

3. 아바스 2세의 즉위와 통치

1642년 부친이 사망하면서 아바스 2세가 즉위했을 때는 어린 나이였기에 재상 사루 타키 에테마도돌라와 조모 딜람 하눔이 섭정을 맡았다. 1645년 타키가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친정을 시작했고, 1648년에는 조모를 살해하여 후견인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란은 궁정의 사치와 무역 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졌다. 영국 동인도 회사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인 비단의 판매가 감소했고, 반대로 이들 회사가 금은을 수출하면서 이란은 금은 부족으로 경제가 악화되었다. 재상 무함마드 베그는 직할령을 늘리고 군사비를 삭감하는 등 재정난 타개를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아바스 2세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용 정책을 유지하여 기독교 예수회의 포교를 허가했다. 그러나 이슬람교 시아파의 반발이 강해 기독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유대교를 박해하고 이슬람교로 강제 개종을 시도하기도 했다. 시아파에 대한 탄압도 병행하여 일부 무슬림의 지지를 잃었으나, 시아파와의 협력 체제는 유지되었다.

군사적으로는 1648년무굴 제국으로부터 칸다하르를 탈환했고, 1653년에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코사크의 코카서스 산맥 침공을 저지했다. 1665년우즈베크호라산을 약탈하자 출진했지만, 이듬해 1666년 10월 25일(또는 26일)에 과음이 원인이 되어 3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아들 사피 2세 술레이만이 뒤를 이었다.

아바스 2세는 칸다하르 탈환으로 사파비 왕조의 쇠퇴를 막았지만, 과음으로 급사했다. 그의 치세에서는 예술, 건축이 유럽 문화의 유입으로 번성했고, 이스파한에 세워진 체헬 소툰 궁전과 하지 다리는 사파비 건축의 하나로서 현존하고 있다.

3. 1. 즉위와 섭정

شاه عباس دومfa는 1632년 8월 30일 카즈빈에서 사피와 안나 카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왕실 하렘에서 자란 그는 라잡 알리 타브리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 안나 카눔은 체르케스인 출신 첩으로, 왕위 계승자를 낳아 하렘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2] 재상 사루 타키는 안나 카눔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녀의 대리인이자 측근 역할을 했다. 아바스 2세 즉위 후, 왕대비가 된 안나 카눔은 사루 타키를 통해 실질적으로 왕국을 통치했다.[2]

사피 1세는 아들을 눈멀게 하려 했으나, 내시의 도움으로 아바스 2세는 시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속임수는 그가 열 살까지 문맹이었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3]

1642년 5월 15일, 아홉 살 반의 어린 나이에 아바스 2세는 사피 1세가 사망한 지 4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4] 대관식에서 그는 연호 압바스를 채택하고, 50만 이란 토만의 세금 감면과 함께 알코올 음료 소비 금지령을 내렸다.[4] 재상 사루 타키는 권력 이양을 순조롭게 이끌었으며, 아바스 2세는 카즈빈에서 왕으로서 교육을 받으며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5]

통치 초기에는 사루 타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연합하여 이란을 통치했다.[6] 그러나 1645년 10월 11일, 사루 타키는 자니 칸 샴루를 비롯한 공모자들에게 암살당했다.[7] 이는 아바스 2세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관료 계급을 숙청하기 시작했다.[8]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는 그림.
압바스 2세(오른쪽)와 장관. 사파비 원본을 본떠 만든 19세기 인도 미술 작품


섭정의 필요성을 느낀 아바스 2세는 할리페 솔탄을 대재상으로 임명했다.[9] 할리페 솔탄은 샤리아 시행에 관심을 가졌으나, 종교법의 시각적 오해를 금지하는 데 그쳤다.

사루 타키의 죽음과 할리페 솔탄의 임명은 아바스 2세가 절대 군주제를 시작하고 섭정을 끝낸 시점으로 여겨진다. 열다섯 살이 된 그는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3. 2. 국내 정책

아바스 2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재상 사루 타키와 조모 딜람 하눔이 정치를 맡았다. 1645년 타키가 암살된 후 친정을 시작했고, 1648년에는 조모를 살해하여 후견인을 배제했다.[3]

이 시기 이란은 궁정의 사치와 무역 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졌다. 영국 동인도 회사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인 비단의 판매가 감소했고, 반대로 이들 회사가 금은을 수출하면서 이란은 금은 부족으로 경제가 악화되었다. 재상 무함마드 베그는 직할령을 늘리고 군사비를 삭감하는 등 재정난 타개를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3]

아바스 2세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용 정책을 유지하여 기독교 예수회의 포교를 허가했다. 그러나 이슬람교 시아파의 반발이 강해 기독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유대교를 박해하고 이슬람교로 강제 개종을 시도하기도 했다. 시아파에 대한 탄압도 병행하여 일부 무슬림의 지지를 잃었으나, 시아파와의 협력 체제는 유지되었다.[3]

3. 3. 대외 관계

A crowd, in middle of them, a sitted Abbas II, and the Mughal ambassador
아바스 2세가 무굴 제국 대사와 협상하는 그림.


아바스 2세의 치세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를 선호했으며, 칸다하르를 되찾기 위한 1649년 무굴 제국과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주변 국가들과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3]

1638년 칸다하르 총독 알리 마르단 칸이 샤 자한에게 항복하면서 칸다하르는 무굴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사피는 말년에 군대를 소집해 도시를 되찾으려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전쟁은 중단되었다.[3] 1648년, 샤 자한이 사마르칸트 정복에 실패하자, 아바스 2세는 칸다하르를 재정복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1649년 1월, 아바스 2세는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칸다하르로 진군하여 두 달간의 전투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3] 이란군은 압제적인 지휘관, 급여 부족, 열악한 숙소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어 큰 손실을 입었다.[3]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왕자가 이끄는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2년 후 샤 자한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칸다하르를 탈환하려 했으나, 4개월간의 포위 공격 후 추운 계절 때문에 퇴각해야 했다.[3] 1653년 다라 시코 왕자가 이끄는 마지막 칸다하르 탈환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칸다하르는 1709년 아프간 반란 전까지 이란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바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이란의 코카서스 영향력은 러시아와 충돌했다. 러시아는 1646년부터 이란을 통해 스웨덴으로 비단을 운송하는 외국 상인들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고, 1649년에는 소보르노예 우로제니예라는 새로운 경제 규제 정책을 발표하여 외국인의 권리를 더욱 제한했다.[3]

이러한 긴장은 1651년1653년 사이의 소규모 분쟁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테레크 강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폐위된 카케티의 왕 테이무라즈 1세를 위해 요새를 건설하려 했다. 아바스 2세는 칸다하르 원정을 수행하는 동시에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다빌, 카라바흐, 아스타라의 군대는 아르메니아 출신 굴람인 호스로우 솔탄의 지휘 아래 집결하여 요새를 공격했다. 그들은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기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3] 이후 10년 동안 미해결 문제에 대한 협상이 계속되었다.

아바스 2세 시대 카자르 시대의 그림으로, 1651~1653년 러시아 군대에 대한 사파비 왕조의 승리를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묘사한 그림.


아바스 2세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로운 관계는 계속되었다.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4세는 크레타 전쟁과 1660년 이스탄불 대화재 등 내부 위기에 몰두해 있었다.[5] 1657년에는 두 제국 간에 새로운 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

아바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시라즈이스파한에 기지를 두었던 영국네덜란드는 특권을 통해 아바스 2세의 지원을 받았다.[4]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비단을 구매했고, 그 대가로 페르시아 만을 통해 향신료, 설탕, 섬유 제품을 이란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1645년 VOC가 비단 구매에 불리한 조건을 이유로 반다르 아바스 주변에 해상 봉쇄를 가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봉쇄는 오래가지 못했고, 네덜란드는 1652년에 새로운 비단 조약을 체결했다.[4] 프랑스 동인도 회사 또한 이란과의 무역 관계를 수립하려 시도했고, 아바스 2세는 사망 직전에 이를 승인하는 ''칙령''을 발표했지만, 당분간은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아바스 2세가 우즈베크 대사를 접견하는 모습. 카자르 시대의 그림, 1880년경.


우즈베크인과의 관계도 평화로웠다. 아바스 시대에 히바 칸국의 새로운 칸 아부 알-가지 바하두르가 즉위했다. 그는 대호라산에서 이란의 국경을 위협하지 않았다.[6] 그러나 부하라 칸국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는데, 이는 우즈베크인의 습격보다는 부하라의 통치 왕조 내 갈등과 이란으로 피신한 칸의 망명 때문이었다. 1646년, 당시 부하라 칸이었던 나데르 모하마드 칸은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발흐를 무굴 제국에 빼앗긴 후 아바스 2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아바스 2세는 그를 극진히 배려하고 존경했다.[6] 처음에는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려 했지만, 결국 이란의 협조로 휴전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 휴전은 1650년대 초에 더 많은 분쟁으로 이어졌고, 모하마드 칸은 1653년 사망했다.[6] 이후 아바스 2세는 부하라의 우즈베크인과 협정을 맺었다.

4. 문화와 예술

아바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건축과 예술이 발전하였다. 체헬 소툰 궁전, 카주 다리 등 사파비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3] 모엔 모사베르 등 페르시아 미니어처 화가들이 활동하며 예술적 다양성을 추구했고,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파란기-사지라는 서양식 회화 양식이 등장했다.[3]

이스파한에서의 건축은 도시의 공공 영역을 확장하여, 왕실의 후원과 ''나칼리''(샤나메 이야기) 형태의 대중적인 오락을 결합한 활기찬 커피하우스 문화를 만들었다.[3] 아바스 2세는 예술에 대한 후원을 지속하여 17세기 중후반에 예술이 번성했다. 페르시아 미니어처는 레자 아바시의 제자였던 모엔 모사베르를 선두로 새로운 수준의 다양성을 달성했는데, 그는 샤나메의 최소 5개의 원고에 기여했으며, 단일 페이지 삽화로 유명했다.[3]

전통 미니어처에 대한 대중의 수요 역시 이 시대에 강세를 보였다. 아프잘 알-후사이니와 말리크 후사인 이스파하니와 같은 화가들은 샤나메를 위한 작품과 술병과 과일을 든 젊은 남자들의 그림을 제작했다.[3] 아바스는 네덜란드 화가를 고용하여 그들에게서 그림을 배웠지만, 파란기-사지 또는 유럽식 회화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란 화가도 지원했다.[3] 아바스의 궁정 화가 중 두 명인 모하마드 자만과 알리굴리 자바다르는 유럽 회화 양식의 영향을 받아 이를 모방하거나 서양 양식으로 전통적인 이란 테마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3] 아바스 자신도 유럽 회화에 매료되어, 추가적인 교육을 위해 이란 화가 그룹을 유럽으로 보냈으며, 그중에는 2~3년을 로마에서 보낸 모하마드 자만이 있었다.[3]

아바스 2세 통치 기간의 걸작은 체헬 소툰 벽화이다. 노루즈 축제를 위한 궁전이었던 체헬 소툰의 벽화는 궁전 장식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며, 종종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마르브 전투 (이스마일 1세와 무하마드 샤이바니 사이), 무굴 제국의 황제 후마윤을 만나는 타흐마스프 1세, 아바스 1세와 발리 무하마드 칸(부하라 칸), 아바스 2세와 나데르 모하마드 칸의 그림 등이 있다.[3]

아바스 대제와 발리 무하마드 칸


아바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경제적 쇠퇴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도자기 생산도 계속되었다. 중국의 영향으로 1640년대와 1650년대의 도자기는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오던 자기에 따라 청백색 테마가 되었다.[3] 케르만 공방에서 주로 제작된 이 도자기는 1643~1645년 명청 교체기 이후 명나라가 멸망한 후 1683년까지 수출이 중단된 중국 자기의 대안을 찾던 반다르 아바스의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의 관심을 끌 만큼 충분한 품질을 갖추었다.[3] 케르만은 도자기 외에도 이스파한, 카샨과 함께 페르시아 카펫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이란 궁정과 궁정 밖 시장을 위해 금과 은 금실로 장식된 실크 카펫을 생산했다.[3]

5. 아바스 2세의 죽음과 사파비 왕조의 쇠퇴

عباس دومfa는 1666년 10월 26일, 베흐샤르에서 매독, 목암 등 여러 질병으로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3] 그의 장남 삼 미르자가 뒤를 이었다. 삼 미르자의 어머니는 조지아 출신 첩 나키하트 카눔이었다.

아바스 2세는 서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재판에 개입하여 관리들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하는 등 정의로운 통치를 펼쳤으며, 칸다하르 탈환과 같은 군사적 업적을 통해 왕조의 쇠퇴를 일시적으로 막았다.[7] 그러나 그의 이른 죽음은 이러한 노력을 무위로 돌렸다. 그의 사후, 술레이만 1세가 즉위했으나, 무능하고 향락적인 통치로 인해 사파비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후궁 세력의 정치 개입과 부정부패 심화는 왕조 몰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9]

6. 평가

아바스 2세는 칸다하르 탈환과 러시아의 남하 저지 등 일부 군사적 업적을 통해 사파비 왕조의 쇠퇴를 일시적으로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7] 그는 국가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는 술에 취하거나 병을 앓았을 때조차 줄어들지 않았다.[8] 루디 마테에와 같은 역사가들은 아바스 2세를 사파비 왕조의 마지막 강한 왕으로 묘사하며,[9] 이스마일 1세, 아바스 1세와 함께 사파비 왕조의 세 명의 뛰어난 통치자로 언급하기도 한다.[7]

그러나 아바스 2세는 재정난 해결에 실패하고,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그의 사후 정치 부패를 심화시켜 사파비 왕조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7] 유럽 관찰자들은 아바스 2세 치하의 번영과 안전을 칭찬했지만, 내부 관료들의 부패와 칸다하르 원정이 경제적 쇠퇴를 초래했다는 점은 간과했다.[7]

아바스 2세의 시대는 조선 효종, 현종 시대와 겹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북벌론이 대두되는 등 대외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였다. 아바스 2세의 군사적 업적은 이러한 조선의 대외 정책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또한, 아바스 2세의 재정난과 사후 정치 부패는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과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아바스 2세는 관료 내부의 부패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공공 정의 실현에 힘썼다.[8] 그는 현명하게 대재상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충분한 영향력을 부여하여 자신의 정책을 시행하도록 했다.[8] 그의 노력으로 그의 24년 통치는 비교적 평화롭고 반란이 없었다.[8] 이란 연대기에는 그의 통치 기간 중 여러 해가 "별일 없었던"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서구 관찰자들은 이란 시골 인구의 복지에 놀라워했다.[8]

이스파한 포위전 이후, 1722년 사파비 왕조가 멸망했을 때, 논평가들은 아바스 2세를 사파비 국가의 쇠퇴를 일시적으로 되돌린 강력한 통치자라고 평가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정의롭고 관대하며 심지어 자유주의적인 왕이라고 부르며, 그의 죽음은 사파비의 오랜 번영과 평화의 종말을 알렸다고 평가한다.[9]

아바스 2세는 무굴 제국으로부터 칸다하르를 탈환하고, 1653년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코사크의 코카서스 산맥 침공을 저지하는 등의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과음으로 급사하였다. 아들 사피 2세 술레이만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후궁에 빠지면서 정치가 부패해졌고, 결국 사파비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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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2] 서적
[3] 서적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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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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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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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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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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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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