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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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미주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나타난 예술 사조로,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독일 낭만주의,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영국에서는 월터 페이터를 중심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외치며 도덕적, 교훈적 목적에서 벗어나 감각적 쾌락을 추구했다. 문학, 미술, 장식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맥닐 휘슬러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이 탐미주의 문학을 발전시켰으며, 한국에서는 개화기 이후 서구 문학의 영향을 받아 시문학 동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영화, 대중음악,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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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주의 | |
---|---|
일반 정보 | |
![]() | |
운동 | 모더니즘 |
핵심 원칙 | 예술을 위한 예술 |
특징 | 아름다움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강조 |
중요 인물 | 오스카 와일드 월터 페이터 알저넌 찰스 스윈번 제임스 맥닐 휘슬러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에드워드 번-존스 윌리엄 모리스 시어도어 드 방빌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
역사적 배경 | |
기원 | 19세기 후반 유럽 |
절정 | 1860년대 ~ 1900년대 |
철학적 기반 | |
영향 | 낭만주의 유물론 실증주의 |
반대 | 산업화 |
파생 운동 | |
영향 받은 운동 | 상징주의 데카당스 초현실주의 |
예술적 표현 | |
문학 | 감각적이고 세련된 스타일 아방가르드 탐미주의적 시 반도덕주의 |
시각 예술 | 섬세한 선과 형태 풍부한 색채 아름다운 인물 묘사 |
건축 및 디자인 | 아르누보 아트 앤 크래프트 실내 장식 패션 |
추가 정보 | |
관련 개념 | 도피주의 에고이즘 쾌락주의 |
2. 역사적 배경
유미주의는 18세기 중후반 독일의 관념론 미학과 독일 낭만주의에서 그 사상적 뿌리를 찾을 수 있다.[6] 앨저넌 찰스 스윈번이 어떤 그림을 평하여 "이 그림의 의미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존재하는 것만이 이 그림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이다"라고 한 표현은 유미주의의 본질을 잘 나타낸다.[22]
19세기 말에 이르러 유미주의는 데카당스의 양상을 띠며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낙관적인 진보주의 사상에 대한 반테제로서 반사회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악마주의 등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유미주의 자체가 반드시 악마주의나 퇴폐 예술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감성의 부활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르네상스와 통하는 면이 있으며, 신비주의와도 유사한 지점을 공유한다. 프랑스 작가 Joséphin Péladan|조제팽 펠라당프랑스어은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것은 감정을 관념으로 승화시키는 기쁨이다"라고 말하며 유미주의의 지향점을 설명했다. 유미주의 작품 경향 속에는 동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에로티시즘 등의 주제가 포함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유미주의의 흐름은 일본의 지식인, 문화인,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유미주의 소설가로 꼽히며, 이즈미 교카와 에도가와 란포 역시 유미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미시마 유키오 또한 유미주의 경향을 보인 작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2. 1.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
유미주의는 독일 낭만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미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지만, 독일에서는 알렉산더 고틀리프 바움가르텐이 그의 저서 ''미학(Aesthetica)'' (1750)에서 이 용어를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 (1790)에서 이 용어를 자신의 철학 체계 안에 포함시켰다.칸트의 사상은 다시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영향을 미쳤다. 실러는 ''미학적 편지'' (1794)를 통해 예술을 '놀이(Spiel|슈필de)'로 보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은 놀이를 할 때만큼 진지하지 않으며, 놀이를 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다"고 주장하며, 예술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과 구원을 강조했다. 실러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간은 존엄성을 잃었지만, 예술이 그것을 구원하여 표현적인 대리석 조각으로 보존했다. 진실은 여전히 허구 속에 살아 있으며, 복제본으로부터 원본이 복원될 것이다.
이러한 독일 낭만주의의 미학 사상은 주로 토머스 칼라일의 노력을 통해 영어권 세계에 소개되었다. 칼라일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생애'' (1825), ''비평 및 잡문집'', 그리고 ''사르토르 레사르투스'' (1833–1834)와 같은 저작들을 통해 독일의 미학 이론을 영국에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비록 영어에서 '미학(aesthetic)'이라는 단어의 초기 사용 기록은 칼라일 이전에도 존재하지만, 그가 이 단어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루스 아프 로버츠는 칼라일의 선구적인 역할을 인정하며 그를 "1825~1827년 영국의 미학의 사도"라고 평가했다.[6]
2. 2.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2. 3. 영국의 탐미주의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였던 월터 페이터는 1867년부터 1868년 사이에 발표한 에세이와 그의 저서 『르네상스 시대의 연구』(1873)를 통해 영국 탐미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생을 최대한 강렬하게 경험하고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세기 후반 예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영국 탐미주의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탐미주의 운동에 참여한 작가들은 L'art pour l'art|라르 푸르 라르프랑스어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 구호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빅토르 쿠쟁 혹은 벤자민 콘스탄트[7]),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테오필 고티에가 예술과 도덕은 별개임을 주장하며 대중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탐미주의 예술가와 작가들 역시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감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예술이 어떠한 교훈적인 목적도 가질 필요 없이 오직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으며, 아름다움 자체를 숭배하고 예술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나아가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은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탐미주의 양식은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암시, 관능미, 상징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단어, 색채, 음악 사이의 조응을 추구하는 공감각적 효과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탐미주의의 경향은 예술의 사회적, 도덕적 역할을 강조했던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과는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예술이 진실을 추구하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기에, 탐미주의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8]
영국 탐미주의의 선구자로는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라파엘 전파 화가들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라파엘 전파는 '예술을 위한 예술' 정신,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와 추구, 현실로부터의 도피 경향, 세심하고 자의식적인 장인 정신, 그리고 시각 예술과 문학 등 다양한 매체를 융합하려는 시도 등 여러 측면에서 탐미주의와 유사성을 공유했다.[9]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에드워드 번 존스는 라파엘 전파 중에서도 탐미주의와 특히 깊은 관련을 맺은 인물들이다. 다만 이들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당시 "칙칙하고 격동적이며 실망스러운" 19세기 중반의 현실 속에서 "색채, 아름다움, 사랑, 청결의 원칙"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10] 이러한 아름다움의 재확인은 라파엘 전파 예술과 시에서 나타나는 도피주의적 경향과도 연결된다.
영국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오스카 와일드, 앨저넌 찰스 스윈번, 제임스 맥닐 휘슬러, 그리고 앞서 언급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이 있었다. 스윈번은 어떤 그림에 대해 "이 그림의 의미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존재하는 것만이 이 그림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이다"라고 평하며 탐미주의의 본질을 잘 보여주었다. 이러한 탐미주의자들의 태도와 양식은 당시 사회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페이션스》나 F. C. 버낸드의 희곡 《더 콜로넬》, 그리고 조지 뒤 모리에의 삽화를 비롯한 《펀치》 잡지의 만평들이 대표적이다.[11]
19세기 말에 이르러 탐미주의는 종종 퇴폐주의(데카당스)와 연결되며 반사회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낙관적인 진보주의 사상에 대한 반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악마주의 등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탐미주의 자체가 반드시 악마주의나 퇴폐 예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성의 부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르네상스와 통하는 면이 있으며, 신비주의와도 유사한 지점을 공유한다. 탐미주의 작품들에서는 동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에로티시즘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3. 주요 특징
유미주의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등장한 예술 사조로,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라르 푸르 라르fra)이라는 구호 아래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7] 이는 존 러스킨이나 매튜 아놀드 등이 주장했던 것처럼 예술이 도덕적 교훈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8] 유미주의자들은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감상자에게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월터 페이터는 그의 저서를 통해 강렬한 삶과 아름다움의 추구를 강조하며 유미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미주의자들은 아름다움 자체를 숭배했으며, 예술이 자연보다 우월하고 오히려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술 형식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암시와 상징을 선호했으며, 색채, 소리, 단어 등이 서로 조응하는 공감각적 효과를 추구했다.
오스카 와일드, 앨저넌 찰스 스윈번, 제임스 맥닐 휘슬러,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이 대표적인 유미주의 예술가 및 작가로 꼽힌다. 이들의 독특한 예술관과 생활 방식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때로는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1] 유미주의는 라파엘 전파와 같은 이전의 예술 운동과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후대의 문학과 예술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3. 1. 예술의 자율성
유미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옥스퍼드 대학 교수 월터 페이터이다. 그는 1867년부터 1868년 사이에 발표한 에세이와 저서 『르네상스 시대의 연구』(1873)를 통해 인생을 강렬하게 살고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당시 예술 지향적인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유미주의자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라르 푸르 라르fra)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 구호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철학자 빅토르 쿠쟁이 만들었다는 주장과 벤자민 콘스탄트가 1804년에 이미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다.[7]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테오필 고티에가 프랑스에서 이 구호를 대중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이를 통해 예술과 도덕은 분리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미주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예술이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이 주장했던 것처럼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8] 대신 예술은 오직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아름다움 자체를 숭배하며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삼았고,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자연은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유미주의 예술의 주요 특징으로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암시, 관능미, 상징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단어, 색채, 음악 사이의 일치를 추구하는 공감각적 또는 관념미적 효과 등이 있다. 음악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미주의의 선구자로는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과 라파엘 전파의 일부 화가들이 꼽힌다. 라파엘 전파와 유미주의 사이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 정신,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와 추구, 예술을 통한 현실 도피, 세심하고 자의식적인 장인 정신, 다양한 예술 매체의 융합 시도 등 여러 공통점이 있다. 특히 예술 매체의 융합은 테오필 고티에가 시 「예술」에서 시인을 조각가나 화가에 비유하며 강조한 바이기도 하다.[9]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에드워드 번-존스는 라파엘 전파 중에서도 유미주의와 특히 관련이 깊지만, 이들의 예술관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19세기 중반의 칙칙하고 격동적이며 실망스러운 세계가 그토록 필요로 했던 색채, 아름다움, 사랑, 청결의 원칙을 옹호"하고자 했다.[10] 이러한 생각은 라파엘 전파 예술과 시에 나타나는 도피주의적 경향과도 연결된다.
영국 유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오스카 와일드, 앨저넌 찰스 스윈번, 제임스 맥닐 휘슬러,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이 있다. 이들의 예술관과 생활 방식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페이션스''나 F. C. 번앤드의 희곡 ''더 콜로넬'', 그리고 조지 뒤 모리에의 삽화가 실린 ''펀치'' 같은 풍자 잡지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1]
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유미주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컴턴 매켄지의 소설 ''시니스터 스트리트''에서는 주인공이 퇴폐적인 유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는 과정을 묘사하며, 에블린 워는 자신의 옥스퍼드 대학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속에서 유미주의자들을 풍자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당시 옥스퍼드의 유미주의 그룹에는 로버트 바이런, 에블린 워, 해롤드 액턴, 낸시 미트포드, A.E. 하우스먼, 앤서니 파월 등이 속해 있었다.
3. 2. 감각적 쾌락 추구
유미주의 양식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감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이 주장한 것처럼 예술이 "진리를 위한 예술"과 같이 도덕적이거나 유용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과는 대조적이었다.[8] 유미주의자들은 예술에 어떠한 교훈적인 목적도 필요 없으며, 오직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이러한 생각은 "L'art pour l'art|라르 푸르 라르fra"(예술을 위한 예술)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슬로건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7],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테오필 고티에가 대중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티에는 이 문구를 통해 예술과 도덕이 분리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유미주의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를 발전시켰고, 이를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여겼다. 그들은 현실의 삶이 오히려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경향은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월터 페이터의 영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인생을 강렬하게 살며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르네상스 시대의 연구』(1873)는 당시 예술 지향적인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미주의 양식의 주요 특징으로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암시의 사용, 관능적인 표현, 상징의 광범위한 활용, 그리고 단어, 색채, 음악 사이의 일치를 추구하는 공감각적 또는 관념미적 효과 등이 있다. 음악은 특히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유미주의 운동의 선구자로는 존 키츠나 퍼시 비시 셸리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과 일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꼽힌다. 특히 라파엘 전파와 유미주의 사이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 정신,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와 추구, 예술을 통한 도피주의, 신중하고 자의식적인 장인 정신, 그리고 다양한 예술 매체의 융합 시도 등 여러 공통점이 발견된다.[9]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에드워드 번-존스는 라파엘 전파 중에서도 유미주의와 특히 강하게 연결되는 인물들이다. 다만 그들의 예술관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칙칙하고 격동적이며 실망스러운 세계"에 맞서 "색상, 아름다움, 사랑, 청결의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에 더 가까웠다.[10]
영국에서 최고의 대표자로는 오스카 와일드, 앨저넌 찰스 스윈번 (둘 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음), 제임스 맥닐 휘슬러 및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있었다. 이 작가들과 그들의 스타일은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페이션스''와 F. C. 번앤드의 드라마 ''더 콜로넬''과 같은 다른 작품에서, 그리고 특히 조지 뒤 모리에의 작품을 포함하여 ''펀치''와 같은 만화 잡지에서 풍자되었다.[11]
3. 3. 형식주의
유미주의 양식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감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이 주장한 예술의 도덕적 또는 유용성, 즉 "진리를 위한 예술"과 같은 개념과는 대조적인 입장이었다.[8] 유미주의자들은 예술에 어떤 교훈적인 목적도 필요 없으며, 오직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이 슬로건의 기원에 대해서는 철학자 빅토르 쿠쟁이 만들었다는 주장과 벤자민 콘스탄트가 1804년에 이미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으나,[7] 일반적으로는 테오필 고티에가 프랑스에서 대중화시킨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고티에는 이 문구를 통해 예술과 도덕이 별개임을 강조했다.유미주의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를 발전시켰으며, 이를 예술의 기본 요소로 간주했다. 그들은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은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유미주의 양식의 주요 특징으로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암시, 관능미, 상징의 광범위한 사용, 그리고 공감각/관념미 효과, 즉 단어, 색상, 음악 간의 조응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음악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미주의의 선구자로는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라파엘 전파의 일부 화가들을 꼽을 수 있다. 라파엘 전파와 유미주의 사이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헌신,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와 추구, 시각 및 문학 예술을 통한 도피주의, 신중하고 자의식적인 장인 정신, 다양한 매체의 예술 융합에 대한 상호 관심 등 여러 중요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예술 매체 융합 아이디어는 테오필 고티에의 시 『예술』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시인을 조각가나 화가에 비유했다.[9] 라파엘 전파 중에서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에드워드 번-존스가 유미주의와 가장 강하게 연관되지만, 그들의 접근 방식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기보다는 "19세기 중반의 칙칙하고 격동적이며 실망스러운 세계가 그토록 필요로 했던 색상, 아름다움, 사랑, 청결의 원칙을 옹호하는 것"에 가까웠다.[10] 이는 당시 사회 현실로부터의 도피주의적 경향과도 연결된다.
영국에서의 대표적인 유미주의자로는 오스카 와일드, 앨저넌 찰스 스윈번 (두 사람 모두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음), 제임스 맥닐 휘슬러,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이 있다. 이러한 작가들과 그들의 양식은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페이션스'', F. C. 번앤드의 희곡 ''더 콜로넬'', 그리고 조지 뒤 모리에의 작품을 비롯한 ''펀치'' 잡지의 만화 등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1]
3. 4. 자연에 대한 태도
유미주의 양식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감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이 예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거나 도덕적, 실용적 가치를 중시했던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입장이었다.[8] 유미주의자들은 예술이 어떤 교훈적인 목적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오직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이러한 관점에서 유미주의자들은 자연을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아름다움은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으며, 예술을 통해 감각적인 경험과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4. 주요 분야
유미주의는 19세기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문학, 미술, 장식 예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걸쳐 나타난 운동이다. 이 운동의 핵심에는 흔히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프랑스어)이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예술의 도덕적, 교훈적 기능보다는 순수한 미적 가치와 감각적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추구했다.
각 분야에서 유미주의는 고유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문학에서는 월터 페이터의 이론적 영향을 받아 오스카 와일드, 앨저넌 찰스 스윈번 등이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술 분야에서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이 일본 미술 등의 영향을 받아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통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장식 예술 분야에서는 크리스토퍼 드레서와 같은 인물들이 가구, 도자기, 실내 장식 등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미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삶 자체를 예술화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이처럼 유미주의는 여러 예술 장르에 영향을 미치며 당대의 예술과 디자인 경향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4. 1. 문학
영국의 퇴폐주의 작가들은 옥스퍼드의 교수 월터 페이터와 그가 1867년부터 1868년 사이에 발표한 에세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페이터는 인생을 강렬하게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저서 『르네상스 시대의 연구』(1873)는 19세기 후반 예술 지향적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유미주의 문학가들은 흔히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프랑스어)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구호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7],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테오필 고티에가 예술과 도덕은 별개임을 강조하며 대중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유미주의 작가들은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감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이 주장한 것처럼 예술이 진실을 추구하거나 어떤 유용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과는 대조적이었다.[8] 유미주의자들에게 예술은 교훈적일 필요 없이 오직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해야 했으며, 이들은 아름다움을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숭배했다. 나아가 이들은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은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유미주의 문학의 주요 특징으로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암시의 사용, 관능적인 묘사, 상징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단어, 색채, 음악 사이의 일치를 추구하는 공감각적 표현 등이 있다. 음악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문학사적으로 유미주의의 선구자로는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과, 낭만주의 정신을 계승한 일부 라파엘 전파 화가 및 시인들을 꼽을 수 있다. 라파엘 전파와 유미주의 사이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공감대,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와 추구, 현실로부터의 도피 경향, 세심하고 자의식적인 기교, 다양한 예술 매체의 융합 시도 등 여러 공통점이 존재한다. 특히 여러 예술 장르의 통합은 테오필 고티에가 그의 시 「예술」에서 시인을 조각가나 화가에 비유하며 강조한 바이기도 하다.[9]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에드워드 번-존스는 라파엘 전파 중에서도 유미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지만, 이들의 예술관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19세기 중반의 칙칙하고 격동적이며 실망스러운 세계가 그토록 필요로 했던 색상, 아름다움, 사랑, 청결의 원칙을 옹호"하고자 했다.[10] 이러한 아름다움의 재확인은 당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라파엘 전파 예술 및 시의 도피주의적 성격과도 연결된다.
영국 유미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아일랜드 출신의 오스카 와일드와 앨저넌 찰스 스윈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와일드는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0)과 희곡 『살로메』(1891) 등을 통해 유미주의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스윈번 역시 감각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시를 통해 유미주의 경향을 드러냈다. 이 외에도 화가이자 작가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역시 유미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로 언급된다. 이러한 유미주의 작가들과 그들의 생활 방식은 당시 사회의 풍자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페이션스'', F. C. 번앤드의 희곡 ''더 콜로넬'', 그리고 풍자 잡지 ''펀치'' (특히 조지 뒤 모리에의 만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11]
컴턴 매켄지의 소설 『시니스터 스트리트』에서는 주인공이 나이 든 퇴폐적인 인물들의 영향을 받으며 유미주의적인 단계를 거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젊은 시절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미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던 에블린 워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유미주의자들을 주로 풍자적으로, 때로는 과거 참여자의 시선으로 묘사했다. 이 시기 옥스퍼드의 유미주의 그룹과 관련된 인물로는 로버트 바이런, 에블린 워 자신, 해롤드 액턴, 낸시 미트포드, A.E. 하우스먼, 앤서니 파월 등이 있다.
유미주의 문학과 관련된 주요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국가/지역 | 작가 | 비고 |
---|---|---|
미국 | 에드거 앨런 포 | 유미주의의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받음 |
아일랜드 | 오스카 와일드 | 대표작: 『살로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영국 | 월터 페이터 | 와일드의 스승, 이론적 토대 제공 |
앨저넌 찰스 스윈번 | 프랑스 상징주의 영향 받음 | |
매튜 아놀드 | 탐미주의 시인 |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 라파엘 전파 시인이자 화가 | |
프랑스 | 샤를 보들레르 | 상징주의 시인, 유미주의에 큰 영향 |
테오필 고티에 | 예술을 위한 예술 주창 | |
피에르 루이스 | ||
피에르 로티 | 일본 방문 경험 바탕 작품 저술 (『오키쿠 씨』, 『가을의 일본』) | |
일본 | 다니자키 준이치로 | |
에도가와 란포 | ||
유메노 큐사쿠 | ||
누마 쇼조 | ||
미시마 유키오 | ||
시부사와 타츠히코 | ||
나카이 히데오 | ||
우에다 빈 | ||
이즈미 쿄카 | ||
나가이 가후 | ||
요시이 이사무 | 빵의 회 | |
키노시타 모쿠타로 | 빵의 회 | |
이시이 하쿠테이 | 빵의 회 (화가이나 문학 그룹 활동) | |
키타하라 하쿠슈 | ||
히나츠 코노스케 | 작가론 저술 |
4. 2. 미술
유미주의 양식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감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세련된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존 러스킨, 매튜 아놀드, 조지 맥도널드 등이 주장한 예술의 도덕적 또는 유용성을 강조하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8] 대신, 예술은 어떤 교훈적인 목적 없이 오직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다. 유미주의자들은 아름다움 자체를 숭배했으며, 이를 예술의 기본 요소로 여겼다. 그들은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하며, 자연은 예술에 비해 조잡하고 디자인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이 양식의 주요 특징은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암시, 관능성, 상징의 광범위한 사용, 그리고 단어, 색상, 음악 간의 일치를 추구하는 공감각적 효과 등이었다. 음악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었다.유미주의의 선구자로는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라파엘 전파의 일부 화가들을 들 수 있다. 라파엘 전파와 유미주의 사이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생각,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와 추구, 예술을 통한 도피주의, 신중하고 자의식적인 장인 정신, 다양한 예술 매체의 융합 시도 등 여러 중요한 연속성이 존재한다.[9]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에드워드 번-존스는 라파엘 전파 중에서도 유미주의와 가장 강하게 연관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접근 방식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칙칙하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색채, 아름다움, 사랑, 청결의 가치를 옹호하려는 경향을 보였다.[10]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레이디 릴리스"(1866-1868)나 "모나 반나"(1866)와 같은 작품에서 도덕적 메시지보다는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를 통해 아름다움 자체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12][13] 그의 친구였던 존 러스킨은 로세티가 세속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14] 로세티는 이후에도 "비너스 버티코르디아", "프로서파인" 등 유미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계속 제작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유미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흰색 교향곡 1번: 백의 소녀'(1862), '야상곡: 푸른색과 금색 - 오래된 배터시 다리'(1872-1875) 등의 작품에서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통해 순수한 미적 효과를 추구했다. 특히 선박왕 프레더릭 레이랜드의 저택 식당을 장식한 '공작의 방'(1876-1877)은 유미주의 실내 장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휘슬러는 건축주의 소장품인 청백색 자기 컬렉션과 자신의 그림 '도자기의 나라의 공주'에 맞춰 방 전체를 남색과 금색으로 칠하고 공작을 그려 넣어 화려하고 이국적인 공간을 창조했다.[23]

앨버트 조셉 무어와 조지 프레데릭 왓츠 역시 유미주의와 관련된 예술가로, 고전적인 주제를 탐미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3]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는 흑백의 강렬한 대비와 유려한 곡선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삽화로 유미주의 운동에 기여했다.[3] 이 외에도 시메온 솔로몬 등이 유미주의와 관련된 예술가로 언급된다.[3] 에드워드 번 존스의 작품도 그로스베너 갤러리에서 전시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서사적이고 도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엄밀한 의미의 유미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유미주의 미술은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지만, 고전주의와 특히 일본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70년대부터 1900년대에 걸쳐 유행했으며[23], 공작 깃털, 해바라기, 청백색 세라믹(염부), 강렬한 색채 등이 특징적인 모티프로 사용되었다.[23] 실내 장식에는 일본의 판화나 병풍, 부채 등이 자주 활용되었다.[23]
유미주의와 관련된 주요 미술가들은 다음과 같다.
4. 3. 장식 예술
크리스토퍼 드레서에 따르면 장식 미술의 주요 요소는 실용성이다. 순수 미술을 포함한 다른 에스테틱 운동 분야에서 예술 또는 아름다움을 주요 요소로 정의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격언은 이 맥락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 즉, 장식 미술은 먼저 실용성을 갖추어야 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15] 하지만 마이클 신들러는 에스테틱 운동의 장식 미술 분야가 단순히 실용적인 파생 분야라기보다는, 심미주의자들이 근본적인 디자인 전략을 실행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신들러는 심미주의가 예술가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는 시도였으며, 이를 통해 "아름다운 사물들은 예술가가 주인공인 드라마의 감각적인 무대 장치"가 되었다고 설명한다.[16]

왕립 미술 대학의 전신인 정부 디자인 학교는 영국 상품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 1837년부터 설립되었다. 1851년 만국 박람회 이후 이러한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학교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동양 물품들이 구매되었다. 건축가이자 오리엔탈리즘 학자인 오언 존스는 디자인의 핵심 원칙을 정립하도록 요청받았고, 이는 그의 저서 ''장식 문법''(1856) 서문에 제안으로 담겼다. 이 책은 역사적인 세계 장식에 대한 중요한 연구 자료이자 실용적인 참고 자료로 평가받는다. 존스는 과거 양식을 답습하기보다는 현대적 요구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과거의 교훈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존스와 함께 ''장식 문법'' 작업에 참여했던 크리스토퍼 드레서는 이후 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863년 사우스켄싱턴 박물관(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의 동양 궁정 장식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장식 디자인의 예술''(1862)과 ''디자인의 원리''(1873) 같은 저술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했다.
에스테틱 스타일 가구는 주로 19세기 후반에 생산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
특징 | 설명 |
---|---|
재질 및 색상 | 흑단 색 나무(칠하거나 염색)에 금박 하이라이트를 사용. 때로는 가구 전체가 흑단색으로 마감되기도 함. |
영향 | 동양, 특히 일본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23] |
모티프 | 꽃, 새, 은행나무 잎, 공작 깃털 등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모티프를 양식화하여 두드러지게 사용. 이는 조각되거나 채색된 그림 형태로 나타남. 해바라기 등도 특징적인 모티프.[23] |
도자기 | 도자기 및 기타 고급 중국식 식기류에 사용된 청백색(파란색과 흰색)을 가구 디자인에도 활용. 정사각형 도자기 타일에도 청백색 디자인이 인기를 끌었음.[23] |
흑단 가구는 나무를 검은색 흑단 마감으로 칠하거나 염색한 것을 의미한다. 가구는 때때로 완전히 흑단색이지만, 더 흔하게는 가구에 장식된 깃털이나 양식화된 꽃의 조각된 표면에 금박이 추가된다. 에스테틱 운동의 장식이 관능과 자연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 테마는 종종 가구에 나타난다. 전형적인 에스테틱 특징은 금박을 입힌 조각된 꽃이나 양식화된 공작 깃털이다. 새나 꽃의 채색된 그림이 자주 보인다. 흑단이 아닌 에스테틱 운동 가구는 나무에 조각된 새나 꽃의 사실적인 3차원 렌더링을 가질 수 있다.
흑단색 금박 가구와 대조적으로 도자기 및 중국식 식기에 파란색과 흰색이 사용되었다. 공작 깃털과 자연과 유사한 주제는 식기류 및 기타 도자기에 파란색과 흰색 톤으로 사용되었다. 파란색과 흰색 디자인은 또한 정사각형 도자기 타일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젊은 시절에 에스테틱 장식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1882년 오스카 와일드는 캐나다를 방문하여 우드스톡, 온타리오 등지에서 "아름다운 집"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17] 이 강연에서 그는 당시 "장식 심미주의" 스타일로 알려진 에스테틱 운동의 원리를 설명하며, 지역 동식물을 활용한 아름답고 질감이 풍부한 장식, 층을 이룬 천장 등을 강조했다.
에스테틱 운동은 장식 미술 분야에서 약 1870년부터 1900년까지 유행했으며,[23] 특히 1880년대에 두드러졌다. 이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캐나다 틸슨버그에 위치한 앤난데일 국립 사적지가 있다. 이 집은 1880년에 지어졌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강연에 참석했던 메리 앤 틸슨이 직접 장식했다. 또한 영국 런던의 18 스태포드 테라스는 중산층이 에스테틱 원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뉴욕주 업스테이트에 있는 화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의 집인 올라나 국립 사적지는 에스테틱 운동 장식 미술의 이국적인 측면을 잘 보여준다.[18] 제임스 맥닐 휘슬러가 디자인한 선박왕 프레더릭 레이랜드 저택의 식당이었던 공작의 방(The Peacock Room, 1877) 역시 탐미주의 실내 장식의 중요한 예시로 꼽힌다.[23][24] 이러한 탐미주의 실내 장식에는 일본의 판화, 병풍, 부채 등이 장식 요소로 자주 활용되었다.[23]
5. 일본의 탐미주의
유럽에서 시작된 탐미주의의 흐름은 일본의 지식인, 문화인, 예술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문학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즈미 교카, 에도가와 란포, 미시마 유키오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5. 1. 문학
토머스 칼라일은 1825년부터 1827년 사이 영국 탐미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22] 탐미주의 문학의 본질은 앨저넌 찰스 스윈번이 한 그림을 평하며 남긴 "이 그림의 의미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존재하는 것만이 이 그림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레종 데트르프랑스어)이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가로는 오스카 와일드를 들 수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탐미주의는 데카당스의 양상을 띠며 반사회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낙관적인 진보주의에 대한 반테제의 성격을 지녔다.이러한 반사회적 경향 때문에 악마주의 등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탐미주의 자체가 반드시 악마주의나 퇴폐 예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성의 부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르네상스 정신과도 통하며, 신비주의와도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프랑스 작가 Joséphin Péladan|조제팽 펠라당프랑스어은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것은 감정을 관념으로 승화시키는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탐미주의 문학 작품에서는 동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에로티시즘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탐미주의의 흐름은 일본의 지식인, 문화인,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 소설가로 꼽힌다. 이즈미 교카와 에도가와 란포 역시 탐미주의 작가로 분류되며, 미시마 유키오 또한 탐미파 작가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 나가이 가후, 요시이 이사무, 키노시타 모쿠타로, 이시이 하쿠테이 등은 '빵의 회'를 결성하여 일본 탐미주의 문학 운동에 참여했다.
주요 탐미주의 문학 작가는 다음과 같다.
- 에드거 앨런 포 (미국, 시조격 인물)
- 오스카 와일드 (아일랜드 출신, 대표작 『살로메』)
- 샤를 보들레르 (프랑스)
- 테오필 고티에 (프랑스)
- 피에르 루이스 (프랑스)
- 피에르 로티 (프랑스,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하여 『오키쿠 씨』, 『가을의 일본』 등의 작품을 남김)
- 월터 페이터 (영국, 와일드의 스승)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영국)
- 매튜 아놀드 (영국)
- 존 러스킨 (영국, 라파엘 전파에 영향을 줌)
- 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
- 에도가와 란포 (일본)
- 유메노 큐사쿠 (일본)
- 누마 쇼조 (일본)
- 미시마 유키오 (일본)
- 시부사와 타츠히코 (일본)
- 나카이 히데오 (일본)
- 우에다 빈 (일본)
- 이즈미 쿄카 (일본)
- 나가이 가후 (일본, 빵의 회)
- 요시이 이사무 (일본, 빵의 회)
- 키노시타 모쿠타로 (일본, 빵의 회)
- 이시이 하쿠테이 (일본, 빵의 회)
- 키타하라 하쿠슈 (일본)
- 히나츠 코노스케 (일본, 작가론 저술)
6. 영화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영화에서의 탐미주의는 예술의 특정 유파나 예술가 자신의 주장이라기보다는, "미를 위한 미를 추구하는" 창작 태도와 그 결과물로 나타나는 예술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주변의 평가에 따라 탐미주의적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영화 감독들의 작품은 탐미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 피터 그리너웨이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 피터 그리너웨이의 책 등)
- 루키노 비스콘티 (가젤, 이방인, 지옥에 떨어진 자들의 용기, 베니스에서의 죽음, 루트비히, 순수 등)
- 데릭 저먼 (때때로 LGBT 운동의 상징으로 다루어짐)
- 베르너 슈로터
- 장 콕토
- 마츠모토 토시오
글램 록, 고딕 록, 뉴 웨이브 등 일부 대중음악 장르에서도 탐미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음악가 및 그룹은 다음과 같다.
사진 분야에서는 호소에 에이코와 같은 작가들이 탐미주의적 작품을 선보였다.
영국의 유미주의 운동은 광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 J. 배럿의 선구적인 광고 전략 아래, 피어스 비누(Pears soap)는 1882년 영국의 유명 배우이자 사교계 명사였던 릴리 랭트리를 모델로 기용했다. 랭트리는 유미주의 예술가들의 작품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친구이기도 했다. 이는 상업 제품 홍보에 유명 인사를 활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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