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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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담명은 1646년 태어나 1701년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허목, 윤휴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7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남인으로 활동하며 개혁 정치를 추구했다.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복귀하여 서인 세력을 공격하고, 갑술환국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 중 노모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으며, 저서로 《정재문집》 등이 있다.
이담명은 1646년 이조판서를 지낸 이원정과 벽진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과 시를 잘 지었다.[1] 이황과 정구의 학통을 계승한 미수 허목과 윤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서우, 이하진, 목래선, 유형원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1]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이후 학문에 전념하다가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그해 과거 합격자 방(榜)에서 빠진 것 때문에 아버지 이원정과 그는 서인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1]
2. 생애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 급제 과정에서 아버지 이원정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어 서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1]
1674년(현종 15) 성균관 학유,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1675년 4월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이후 춘추관에 들어가 승정원 주서로서 사초와 승정원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홍문록에 추천되었고,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갈라지자 일단 관망하였다. 1675년 7월과 10월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11월 1일 북평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자 11월 2일 사간원 정언으로 변경되었다. 1676년 1월 5도 체찰사 허적의 천거로 종사관이 되었다.
1676년 3월 지평, 4월 부수찬, 5월 경연검토관, 헌납, 6월 수찬, 이조좌랑, 1677년 1월 수찬, 교리, 4월 교리를 지냈다. 이 기간 중 경연관을 겸하였다.
1677년 6월 송시열 고묘가 무산되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7월 이조정랑이 되었다. 9월 이조정랑 재직 중 숙종에게 문관 인사 적체 해소와, 호조와 형조의 낭관에 사간원과 승정원 출신 인사를 임명하는 것을 건의하여 숙종이 들어주었다. 그해 12월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1678년 1월 집의, 3월 교리, 응교, 윤 3월 부응교를 지냈다. 이어 대사헌 오정위와 함께 김수흥, 최석정을 공격하였다. 4월 시독관으로 공명첩 남발을 없앨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5월 특별 승진하여 승지가 되었다. 6월 17일 가뭄의 원인을 1670년, 71년, 75년에 굶어죽은 사람들 때문이라며 굶어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3]
1678년 8월 다시 승지가 되고, 1679년 1월 대사간이 되었다. 그해 2월 사사로이 역마를 탔다 하여, 아버지 이원정과 함께 심단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4월 승지, 5월 다시 승지가 되었다. 그해 7월 홍우원이 떠날 때 그를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고, 홍우원이 편당이 없음을 변호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79년 8월말 비변사 회의에 의해 서용의 명이 내려졌다.
승려 처경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자 이를 거짓이라 판단하고 그를 처형케 하였으며, 호포제에 극력 반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견해가 채택되자 송시열이 왕실 전례를 그르쳤다며 계속 공격하였고, 효종을 서자, 중자로 규정한 서인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과 그것을 추종한 김수항 등을 공격하며 남인 중진으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에는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해야 된다며 공세를 폈다. 서인들은 그의 사소한 흠까지 들춰내며 공격했다.
1679년 승지로 재직 중 서인들에 의해 홍우원, 윤휴의 당으로 몰리면서 파직되었다.[4]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강경파인 관계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81년 가례 후 특별사면령이 내려질 때 이담명을 서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 경신환국으로 아버지 이원정이 유배되고 얼마 후 장살되는 억울한 화를 모두 지켜보면서 울분을 품었고,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히 여겨 아버지의 피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녔다고 한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경신환국과 허새의 옥사 사건, 역모 날조를 주동했던 김익훈,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 인사들을 맹공격하여 이들의 처벌을 주도하였다.[6] 그해 2월 형조 참의가 되고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이 원통하다며 상소를 올렸다.
3월 승지가 되었다. 윤 3월 5일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윤 3월 19일 대사간에 임명되어 부임하던 길에 다시 되돌아왔다. 이때 다른 남인 중진들과 함께 송시열의 사형을 적극 건의하였다. 4월 부제학, 5월 다시 부제학, 8월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0월 예조 참판으로 경연에서 민정중을 성토하였다. 11월 행부제학이 되었다.
1690년(숙종 16) 2월 부제학, 5월 도승지를 거쳐 겸우부빈객으로 세자를 보도하였다. 5월 겸 부제학이 되었다. 7월 3일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90년 12월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신역을 감면했다는 이유로 좌의정 목내선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7] 1691년 2월 대동 수미를 대여하거나 원하는 사람에게만 주었다 하여 성균관 좨주 이현일에게 탄핵당하였다.[8]
1691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 10월 대사성이 되었다. 1692년 3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경신대출척 당시 아버지 이원정을 심문한 위관이 민정중이었기 때문에 보복으로 여겨졌다.[1] 1692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 1693년 3월 대사간, 5월 부제학, 7월 이조참판이 되었다.
1694년 이조참판을 거쳐 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4월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서인들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고, 창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장희재의 집에 들어가 모의했다는 이유로 공격받았으나 혐의점이 밝혀지지 않아 역률은 추시되지 않았다.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으나, 숙종은 죄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배를 떠나면서 노모 정경부인 벽진 이씨(완석정 이언영의 딸)와 헤어져야 하는 심정을 표현한 사로친곡, <사로친곡십이장>은 널리 알려져 폭넓게 인용되었다.[1]
1696년 7월 유배에서 풀려나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1697년 다시 충청남도 남포로 유배되었다가 1699년 풀려났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1] 관직 생활 중 청렴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1701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
2. 1. 초기 활동
이담명은 1646년 이조판서 이원정과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원정, 어머니 벽진 이씨는 승정원좌부승지 이언영(李彦英)의 딸이며, 공조참의를 지낸 이윤우(李潤雨)의 증손이자 수찬 이도장(李道長)의 손자였다.[1]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글과 시를 잘 지었다.[1]
이황과 정구의 학통을 계승한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그리고 윤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서우, 이하진, 목래선, 유형원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1]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 급제 과정에서 아버지 이원정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어 서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1]
2. 1. 1. 출생과 가계
1646년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과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원정, 어머니는 벽진 이씨로 승정원좌부승지 이언영(李彦英)의 딸이며, 공조참의를 지낸 이윤우(李潤雨)의 증손이자 수찬 이도장(李道長)의 손자였다.[1]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글과 시를 잘 지었다.[1]
일찍이 아버지 이원정의 스승이자 이황과 정구의 학통을 계승한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학문과 글을 배웠고, 이서우, 이하진, 목래선, 유형원 등을 만났다.[1] 뒤이어 윤휴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사서육경을 배웠다.[1]
2. 1. 2. 수학과 과거 급제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이후에도 학문 수학에 전념하다가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그해의 과거 합격자 방(榜)에서 빠진 것 때문에 아버지 이원정과 그는 서인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1]
당시 고시관의 한사람이던 아버지 이원정이 자신의 시험 때를 설명하여 시관들이 취하게 되었는데, 그해 12월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그를 파방해야 된다고 탄핵하였다. 그가 시험볼 때 고시관이었던 아버지 이원정의 개입은 두고두고 서인에서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2. 2. 관료 생활
이담명은 1674년(현종 15년) 성균관학유, 승정원가주서를 거쳐 1675년 4월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춘추관에 들어가 승정원 주서로서 사초와 승정원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홍문록에 추천되었고,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갈라지자 일단 관망하였다.
1675년 7월 부제학 이당규 등이 추천한 홍문록 16인, 10월 의정부 추천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11월 1일 북평사가 되었는데, 멀리 가는 것을 꺼려 부임하지 않으려 하자 11월 2일 사간원정언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1676년 1월 5도체찰사 허적의 천거로 종사관이 되었다.
1676년 3월 지평, 4월 부수찬을 거쳐 체찰사부 종사관 자격으로 경연에 입시하였고, 5월 경연검토관, 헌납을 지냈다. 6월 수찬, 이조좌랑, 1677년 1월 수찬, 교리를 거쳐 4월 교리를 지냈다. 이 기간 중 경연관을 겸하였다.
1677년 6월 송시열 고묘가 무산되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7월 이조정랑이 되었다. 9월 이조정랑 재직 중 숙종에게 문관 인사 적체 해소와, 호조와 형조의 낭관에 사간원과 승정원 출신 인사를 임명하는 것을 건의하여 숙종이 들어주었다. 그해 12월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1678년 4월 시독관으로 공명첩 남발을 없앨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승려 처경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자 이를 거짓이라 판단하고 그를 처형케 하였으며, 호포제에 극력 반대하였다. 서인들은 그의 개혁안을 거부하였다.
스승 허목과 동문인 유형원 등의 영향을 받아 부정 부패와 시정의 폐단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민생을 직접 탐방, 견문하여 민생고를 파악하고 이 사실과 군정·호포·시재 등의 시폐를 지적하여 이를 시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숙종에게 여러 번 상소로 올렸다. 충주의 관둔전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1678년 1월 집의, 3월 교리, 응교, 윤 3월 부응교를 지냈다. 이어 대사헌 오정위와 함께 김수흥, 최석정을 공격하였다.
1678년 5월 특별 승진하여 승지가 되었다. 6월 17일 가뭄의 원인을 1670년, 71년, 75년에 굶어죽은 사람들 때문이라며 굶어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3]
1678년 8월 다시 승지가 되고, 1679년 1월 대사간이 되었다. 그해 2월 사사로이 역마를 탔다 하여, 아버지 이원정과 함께 심단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4월 승지, 5월 다시 승지가 되었다. 그해 7월 홍우원이 떠날 때 그를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고, 홍우원이 편당이 없음을 변호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79년 8월말 비변사 회의에 의해 서용의 명이 내려졌다.
이후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해야 된다며 공세를 폈다. 서인들은 그의 사소한 흠까지 들춰내며 공격했다. 1679년 승지로 재직 중 서인들에 의해 홍우원, 윤휴의 당으로 몰리면서 파직되었다.[4]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강경파인 관계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아버지 이원정이 유배되고 얼마 후 장살되는 억울한 화를 모두 지켜보면서 울분을 품게 되고, 허견의 옥사나 허새의 옥사와 관련없는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히 여겨 아버지의 피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녔다고 한다. 1681년 가례 후 특별사면령이 내려질 때 이담명을 서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
2. 2. 1. 초기 관직 생활
1674년(현종 15년) 성균관학유, 승정원가주서를 거쳐 1675년 4월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춘추관에 들고 승정원 주서로 사초와 승정원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홍문록에 추천되었고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갈라지자 일단 관망하였다.
1675년 7월 부제학 이당규 등이 추천한 홍문록 16인, 10월 의정부 추천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이때 검열 조지겸이 윤휴의 복제 3년 논의를 비윤리적이라고 공격하고, 청남에서 그를 예문관에 천거하였으나 조지겸은 거절하였다. 11월 1일 북평사가 되었는데, 멀리 가는 것을 꺼려 부임하지 않으려 하자 11월 2일 사간원정언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1676년 1월 5도체찰사 허적의 천거로 종사관이 되었다.
1676년 3월 지평, 4월 부수찬을 거쳐 체찰사부 종사관 자격으로 경연에 입시하였고, 5월 경연검토관, 헌납을 지냈다. 6월 수찬, 이조 좌랑, 1677년 1월 수찬, 교리를 거쳐 4월 교리를 지냈다. 이 기간 중 경연관을 겸하였다.
1677년 6월 송시열 고묘가 무산되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7월 이조 정랑이 되었다. 9월 이조정랑 재직 중 숙종에게 건의하여 '여러 관사(官司)마다 문관(文官) 1인을 각기 정하여, 문관이 지체되는 걱정을 없앨 것과,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낭관(郞官) 각 1명은 반드시 일찍이 사간원과 승정원의 관직을 지낸 사람으로 차출(差出)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숙종이 들어주었다. 그해 12월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2. 2. 2. 승진과 개혁안 제시
1677년 9월 이조정랑 재직 중 숙종에게 건의하여 '여러 관사(官司)마다 문관(文官) 1인을 각기 정하여, 문관이 지체되는 걱정을 없앨 것과,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낭관(郞官) 각 1명은 반드시 일찍이 사간원과 승정원의 관직을 지낸 사람으로 차출(差出)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숙종이 들어주었다.[2]
1678년 4월 시독관(侍讀官)으로 공명첩 남발을 없앨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승려 처경(處瓊)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자 이를 거짓이라 판단하고 그를 처형케 하였으며, 호포제(戶布制)의 의견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에 극력 반대하는 등 부세(賦稅) 문제 등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개혁안을 거부하였다.
스승 허목과 동문인 유형원 등의 영향을 받아 부정 부패와 시정의 폐단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민생을 직접 탐방, 견문하여 민생고를 파악하고 이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지적하여 이를 시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숙종에게 여러 번 상소로 올렸다.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2. 2. 3. 남인 중진으로서의 활동
1674년(현종 15년) 승정원가주서가 된 뒤 봉상시봉사를 거쳐 1675년 4월 다시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그해 홍문록에 추천되었고,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될 때 일단 관망하였다.
1675년 7월 부제학 이당규 등이 추천한 홍문록 16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고, 10월 의정부에서 추천한 홍문록에도 선발되었다. 11월 1일 북평사가 되었는데, 멀리 가는 것을 꺼려 부임하지 않자 11월 2일 사간원정언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1676년 1월 5도체찰사 허적의 천거로 종사관이 되었다.
1676년 3월 지평을 겸하고, 4월 부수찬을 거쳐 체찰사부 종사관 자격으로 경연에 입시하였고, 5월 경연검토관, 헌납을 지냈다. 6월 수찬, 이조좌랑, 1677년 1월 수찬, 교리, 4월 교리를 지냈다.
1677년 6월 송시열 고묘가 무산되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7월 이조정랑이 되었다. 9월 이조정랑 재직 중 숙종에게 문관 인사 적체 해소와, 호조와 형조의 낭관에 사간원과 승정원 출신 인사를 임명하는 것을 건의하여 숙종이 들어주었다. 그해 12월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1678년 1월 집의, 3월 교리, 응교, 윤 3월 부응교를 지냈다. 이어 대사헌 오정위와 함께 김수흥, 최석정을 공격하였다. 4월 시독관으로 공명첩 남발을 없앨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678년 5월 특별 승진하여 승지가 되었다. 6월 17일 가뭄의 원인을 1670년, 71년, 75년에 굶어죽은 사람들 때문이라며 굶어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3]
1678년 8월 다시 승지가 되고, 1679년 1월 대사간이 되었다. 그해 2월 사사로이 역마를 탔다 하여, 아버지 이원정과 함께 심단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4월 승지, 5월 다시 승지가 되었다. 그해 7월 홍우원이 떠날 때 그를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고, 홍우원이 편당이 없음을 변호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79년 8월말 비변사 회의에 의해 서용의 명이 내려졌다.
승려 처경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자 이를 거짓이라 판단하고 그를 처형케 하였으며, 호포제에 극력 반대하였다.
이 기간 중 허목, 윤휴, 이수경, 이서우 등과 함께 서인을 공격하였다. 1674년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견해가 채택되자 송시열이 왕실 전례를 그르쳤다며 계속 공격하였고, 효종을 서자, 중자로 규정한 서인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과 그것을 추종한 김수항 등을 공격하며 남인 중진으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에는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해야 된다며 공세를 폈다. 서인들은 그의 사소한 흠까지 들춰내며 공격했다.
1679년 승지로 재직 중 서인들에 의해 홍우원, 윤휴의 당으로 몰리면서 파직되었다.[4]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강경파인 관계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축출될 때 파직되었으며 아버지 이원정을 따라 유배지로 갔다. 그러나 허적, 윤휴가 사사되면서 아버지 이원정 역시 서인들의 맹공격을 받고 사사당하였다. 또한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681년 가례 후 특별사면령이 내려질 때 이담명을 서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 경신환국으로 아버지 이원정이 유배되고 얼마 후 장살되는 억울한 화를 모두 지켜보면서 울분을 품게 되고, 허견의 옥사나 허새의 옥사와 관련없는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히 여겨 아버지의 피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녔다고 한다.
2. 2. 4. 경신환국과 시련
이 기간 중 그는 스승인 허목, 윤휴, 이수경, 이서우 등과 함께 서인을 공격하였다. 1674년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의 견해가 채택되자 송시열이 왕실 전례를 그르쳤다며 계속 공격하였고, 효종을 서자, 중자로 규정한 서인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과 그것을 추종한 김수항 등을 공격하며 남인 중진으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에는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해야 된다며 공세를 폈다. 그의 송시열 고묘 주장에 놀란 서인들은 그의 사소한 흠까지 들춰내며 공격하고 물고늘어졌다. 그의 송시열 고묘 주장을 서인에서 송시열 사형으로 이해하자, 다른 남인들이 변호하여 고묘만 하는 것이지 사형을 시키자는 뜻은 아니라며 윤원형의 전례를 들어 그를 두둔하였다.
1679년 승지로 재직 중 서인들에 의해 홍우원, 윤휴의 당으로 몰리면서 파직되었다.[4]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강경파인 관계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축출될 때 파직되었으며 초산에 유배된 아버지 이원정을 따라 유배지로 갔다. 그러나 서인들의 맹공격으로 허적, 윤휴가 사사되면서 아버지 이원정 역시 서인들의 맹공격을 받고 사사당하였다. 그의 스승이자 남인 당수 허목을 제외한 남인의 중견 간부들이 대부분 사형당했고, 그의 아버지 이원정의 사형 역시 서인의 공작에 의해 사형되었다. 또한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681년 가례 후 특별사면령이 내려질 때 이담명을 서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그만두었다.[5] 한편 경신환국으로 아버지 이원정이 유배되고 얼마 후 장살되는 억울한 화를 모두 지켜보면서 울분을 품게 되고, 허견의 옥사나 허새의 옥사와 관련없는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히 여겨 아버지의 피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녔다 한다.
2. 2. 5. 기사환국과 복권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이담명은 경신환국과 허새의 옥사 사건, 역모 날조를 주동했던 김익훈,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 인사들을 맹공격하여 이들의 처벌을 주도하였다.[6] 그해 2월 형조 참의가 되고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이 원통하다며 상소를 올렸다.
3월 승지가 되었다. 윤 3월 5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으나, 윤 3월 19일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부임하던 길에 다시 되돌아왔다. 이때 다른 남인 중진들과 함께 송시열의 사형을 적극 건의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당성을 찾으려 하였다. 4월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5월 다시 부제학, 8월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10월 예조참판으로 경연에서 민정중을 성토하였다.
이담명은 민정중을 맹공격하여 사약을 내리게 했고, 11월 행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90년(숙종 16년) 2월 부제학, 5월 도승지를 거쳐 겸우부빈객(兼右副賓客)으로 세자를 보도하였다. 5월 겸 부제학이 되었다. 7월 3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였다.
1690년 12월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신역(身役)을 감면했다는 이유로 좌의정 목내선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7] 1691년 2월 대동 수미(大同收米)를 대여하거나 원하는 사람에게만 주었다 하여 성균관좨주 이현일에게 탄핵당하였다.[8]
2. 2. 6. 갑술환국과 유배
1691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 10월 대사성이 되었다. 1692년 3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서인이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경신대출척 당시 아버지 이원정을 심문한 위관이 민정중이었기 때문에 보복으로 여겨졌다.[1] 1692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 1693년 3월 대사간, 5월 부제학, 7월 이조참판이 되었다.
1694년 이조참판을 거쳐 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4월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서인들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고, 창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장희재의 집에 들어가 모의했다는 이유로 공격받았으나 혐의점이 밝혀지지 않아 역률은 추시되지 않았다.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으나, 숙종은 죄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배를 떠나면서 노모 정경부인 벽진 이씨(완석정 이언영의 딸)와 헤어져야 하는 심정을 표현한 사로친곡, <사로친곡십이장>은 널리 알려져 폭넓게 인용되었다.[1]
2. 3. 생애 후반
1691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 10월 대사성을 지냈다. 1692년 3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경신대출척 당시 그의 아버지 이원정을 심문한 위관이 민정중이었기 때문에 보복으로 인식되었다.[1] 1692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 1693년 3월 대사간, 5월 부제학, 7월 이조 참판을 역임했다.
1694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4월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서인들의 공격을 받고 파직, 창성에 유배되었다. 이때 장희재의 집에 들어가 모의한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했으나 혐의점이 밝혀지지 않아 역률은 추시되지 않았다.[1]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하였으나 잘못이 없었으므로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배를 떠나면서 노모 정경부인 벽진 이씨(완석정 이언영의 딸)와 이별해야 하는 심정을 표현한 <사로친곡십이장>은 널리 알려져 폭넓게 인용되었다.[1]
==== 유배와 복직 ====
1696년 7월 유배에서 풀려나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1697년 다시 충청남도 남포로 유배되었다가 1699년 풀려났다.
==== 최후 ====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1] 관직 생활 중 청렴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시와 글을 잘 지었고, 저서로는 《정재문집》, 《서전차의》,《기뇌홍》 등이 있고, 시문을 많이 남겼다. 1701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
2. 3. 1. 유배와 복직
1691년 5월 부제학, 8월 대사헌(大司憲), 10월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692년 3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서인 온건파이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경신대출척 당시 그의 아버지 이원정을 심문한 위관이 민정중이었기 때문에 보복으로 인식되었다.[1] 1692년 5월 부제학(副提學), 8월 대사헌, 1693년 3월 대사간(大司諫), 5월 부제학, 7월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다.
1694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4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서인들의 공격을 받고 파직, 창성에 유배되었다. 이때 장희재의 집에 들어가 모의한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했으나 혐의점이 밝혀지지 않아 역률은 추시되지 않았다.[1]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하였으나 잘못이 없었으므로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배를 떠나면서 노모 정경부인 벽진 이씨(완석정 이언영의 딸)와 이별해야 하는 심정을 표현한 사로친곡, <사로친곡십이장>은 널리 알려져 폭넓게 인용되었다.[1]
2. 3. 2. 최후
1696년 7월 풀려나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러나 1697년 다시 충청남도 남포로 유배되었다가 1699년 풀려났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1]
관직 생활 중 청렴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시와 글을 잘 지었고, 저서로는 《정재문집》, 《서전차의 書傳箚疑》,《기뇌홍 記雷虹》 등이 있고, 시문을 많이 남겼다. 1701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
3. 정치 활동과 사상
1674년 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의 견해가 채택되자, 이담명은 효종을 서자, 중자로 규정한 서인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과 그것을 추종한 김수항 등을 공격하며 남인 중진으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1678년 1월 집의, 3월 교리, 응교, 윤 3월 부응교를 지냈다. 대사헌 오정위(吳挺緯)와 함께 김수흥(金壽興), 최석정(崔錫鼎)을 공격하였다. 4월 시독관으로 공명첩 남발을 없앨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5월 특별 승진하여 승지가 되었다. 6월 17일 가뭄의 원인을 1670년, 1671년, 1675년에 굶어죽은 사람들 때문이라며 위령제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3]
1679년 1월 대사간이 되었다. 2월 사사로이 역마를 탄 죄로, 아버지 이원정과 함께 교리 심단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4월과 5월에 승지를 역임했다. 7월 홍우원이 떠날 때 그를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고, 홍우원이 편당이 없음을 변호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승려 처경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자 이를 거짓이라 판단하고 처형케 하였으며, 호포제에 극력 반대하는 등 부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개혁안을 거부하였다.
1683년(숙종 9) 승정원우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전라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에는 구휼에 힘쓰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임할 때 도민들이 그를 붙잡았다고 하며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가 건립되었다.
스승 허목과 동문 유형원 등의 영향을 받아 부정부패와 시정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민생을 탐방하여 민생고를 파악하고 군정·호포·시재 등의 시폐를 지적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숙종에게 상소로 올렸다.
3. 1. 예송 논쟁과 남인 중진으로의 성장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이후 학문 수학에 전념하다가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그해 과거 합격자 방(榜)에서 빠진 것 때문에 아버지 이원정과 그는 서인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1]
1674년 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의 견해가 채택되자, 남인 측은 송시열이 왕실 전례를 그르쳤다며 계속 공격하였다. 이담명은 효종을 서자, 중자로 규정한 서인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과 그것을 추종한 김수항 등을 공격하며 남인 중진으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 송시열의 죄를 고묘(誥廟, 종묘에 고하자)해야 된다며 공세를 폈다. 그의 송시열 고묘 주장에 놀란 서인들은 그의 사소한 흠까지 들춰내며 공격하고 물고늘어졌다. 그의 송시열 고묘 주장을 서인에서 송시열 사형으로 이해하자, 다른 남인들이 변호하여 고묘만 하는 것이지 사형을 시키자는 뜻은 아니라며 윤원형의 전례를 들어 그를 두둔하였다.
1678년 1월 집의(執義), 3월 교리(校理), 응교(應敎), 윤 3월 부응교(副應敎)를 지냈다. 이어 대사헌 오정위(吳挺緯)와 함께 김수흥(金壽興), 최석정(崔錫鼎)을 공격하였다. 4월 시독관(侍讀官)으로 공명첩 남발을 없앨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678년 5월 특별 승진하여 승지(承旨)가 되었다. 6월 17일 가뭄의 원인을 1670년, 71년, 75년에 굶어죽은 사람들 때문이라며 굶어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3]
1679년 1월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그해 2월 사사로이 역마를 탔다 하여, 역시 사사로이 역마를 탄 아버지 이원정과 함께, 교리(校理) 심단(沈檀)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4월 승지, 5월 다시 승지가 되었다. 그해 7월 홍우원이 떠날 때 그를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고, 홍우원이 편당이 없음을 변호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79년 8월말 비변사 회의에 의해 서용의 명이 내려졌다. 이후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승려 처경(處瓊)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자 이를 거짓이라 판단하고 그를 처형케 하였으며, 호포제(戶布制)의 의견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에 극력 반대하는 등 부세(賦稅)문제 등의 국정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개혁안을 거부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강경파인 관계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3. 2. 개혁 정치 추구
아버지의 원통한 죽음을 보고 산림에 숨어 살고자 했으나, 1682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특별히 석방되어 풀려나왔고 그해 곧 복관되었다. 1683년(숙종 9) 승정원우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되돌아와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구휼에 힘쓰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임할 때 도민들이 그를 붙잡았다고 하며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가 건립되었다.
스승 허목과 동문인 유형원 등의 영향을 받아 부정부패와 시정의 폐단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민생을 직접 탐방, 견문하여 민생고를 파악하고 이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지적하여 이를 시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숙종에게 여러 번 상소로 올렸다.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3. 3.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에서의 역할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될 때, 이담명은 남인 강경파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초산에 유배된 아버지 이원정을 따라갔으나, 서인들의 맹공격으로 허적, 윤휴가 사사되고 아버지 이원정 역시 사형당했다. 허목을 제외한 남인 중견 간부들 대부분이 사형당했고, 아버지의 죽음 역시 서인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서인들은 이담명을 죽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1]
1681년 가례 후 특별사면령이 내려질 때 서용 주장이 나왔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 이담명은 경신환국으로 아버지 이원정이 유배되고 얼마 후 장살되는 억울한 화를 모두 지켜보면서 울분을 품게 되었고, 허견의 옥사나 허새의 옥사와 관련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히 여겨 아버지의 피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녔다고 한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귀하면서 경신환국과 허영, 허새의 옥사 사건, 역모 날조를 주동했던 김익훈,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 인사들을 맹공격하여 이들의 처벌을 주도하였다. 그해 2월 형조 참의가 되고 아버지 이원정의 죽음이 원통하다며 상소를 올렸다.[1]
그해 3월 승지가 되었다. 윤 3월 옥에 갇힌 서인 이사명을 성토하였다. 윤 3월 5일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윤 3월 19일 대사간에 임명되어 부임하던 길에 다시 되돌아왔다. 이때 다른 남인 중진들과 함께 송시열의 사형을 적극 건의하였다. 이때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컬으면서 정당성을 찾으려 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서인들의 공격을 받고 파직, 창성에 유배되었다. 이때 그가 장희재의 집에 들어가 모의한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했으나 혐의점이 밝혀지지 않아 역률은 추시되지 않았다. 서인들은 그를 죽여야 된다고 여러번 주장하였으나 잘못이 없었으므로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4. 평가
배정휘(승지)가 묘비를 썼고, 청렴함을 인정받아 경상도 도민들이 영사비를 세웠으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는 공적비(이담명 공적비)가 세워졌다. 후에 불천지위로 지정되었다.[9]
4. 1. 긍정적 평가
배정휘(승지)가 이담명의 묘비를 썼다. 그의 청렴함을 인정받아 경상도 도민들이 그의 영사비를 세웠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는 그의 공적비(이담명 공적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후에 불천지위로 지정되었다.4. 2. 부정적 평가
1670년 11월 아버지 이원정이 과거 시험의 고시관으로 시험을 주관할 때, 이담명은 답안지에 '복독(伏讀)' 두 자를 빠뜨리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여러 시관들이 이담명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여 합격시키려 했고, 이원정이 자신의 과거 경험을 증명하면서 논란 끝에 합격되었다.[9]이에 대사간 남이성 등이 문제를 제기했고, 1671년 2월까지 서인계 언관들이 계속해서 이담명의 합격에 이원정이 개입했다며 공격했다.
1690년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민정중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 아버지 이원정의 형관이었던 민정중에 대한 사적인 보복으로 해석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5. 저서
- 《정재문집》
- 《서전차의》
- 《기뇌홍》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이윤우(李潤雨) | 공조참의 |
할아버지 | 이도장(李道長) | 수찬 |
아버지 | 이원정(李元禎) | 이조판서 |
어머니 | 벽진이씨 | 승정원좌부승지 이언영(李彦英)의 딸 |
동생 | 이한명(李漢命) | |
제수 | 평운군부인 | 이구(李俅)의 딸 |
동생 | 이우명(李佑命) | |
부인 | 전주이씨 | 이석규(李碩揆)의 딸 |
7. 시
'''사노친곡'''[1]
봄은 오고 또 오고 풀은 푸르고 또 푸르니
나도 이 봄 오고 이 풀 푸르기 같이
어느 날 고향에 돌아가 노모께 뵈오려뇨
친년(親年)은 칠십오(七十五)요 영로(嶺路)는 수천 리오
돌아갈 기약은 갈수록 아득하다
아마도 잠 없는 중야(中夜)의 눈물겨워 설웨라
길이 멀다하다 나면 아니 가랴터냐
말이 파리하다 타면 아니 네라터냐
가고난 후면 노모 귀령(歸寧) 할 일이지만
천진우위(遄臻于衛)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라 이를 저어 하노라
적리(謫裏) 광음(光陰)은 사 년이 벌써 되고
천외가향(天外家鄕)은 만 리에 아득하니
몸이 못 가거든 기별(奇別)이나 들었으면
아무리 척흘첨망(陟屹瞻望)을 말하랴 한들 얻을손가
8. 기타
아버지 이원정이 장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원통히 여겨 아버지의 피 묻은 적삼을 9년 동안 입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공석과 사석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말하고 다녀 회자화되기도 하였다. 유배 생활 중 고향에 있는 70 고령의 노모를 그리는 시 12수인 사노친곡(思老親曲)을 지었다. 이는 널리 회자화되어 알려졌다.
참조
[1]
역사기록
이담명을 주서로 제수하다
1675-04-25
[2]
역사기록
전경 문신을 신중히 하고, 주전으로 인해 공명 고신을 주지 않게 하다
1678-04-20
[3]
역사기록
굶어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베풀어 비를 빌게 하다
1678-06-17
[4]
역사적 사건
윤휴와 홍우원의 대비 비판
1675
[5]
역사기록
가례 후 전 목사 이담명의 서용을 명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반대하여 그만 두다
1681-05-21
[6]
문서
큰 악인, 큰 악당
[7]
역사기록
경상 감사 이담명을 엄중히 추고하라고 명하다
1690-12-23
[8]
역사기록
좨주 이현일의 상소에 의거, 대동미를 대여한 수령을 죄주게 하다
1691-02-10
[9]
역사기록
대사간 남이성이 이담명의 시험지 일로 사직하니 한참 후에 답하다
167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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