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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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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대외 관계는 중국, 일본, 여진, 서양 등 주변 국가 및 세력과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통해 전개되었다. 건국 초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으며, 조공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 교류를 이어갔다. 일본과는 교린 정책을 바탕으로 제한적인 통상 교류를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여진과는 북방 개척과 무력 충돌을 반복하며 국경을 확장해 나갔다. 19세기에는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교류를 제한했으나, 이후 문호 개방을 통해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며 국제 사회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자주성을 잃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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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외 관계

2. 대 중국 관계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사대 정책을 펼치며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다. 고려 시대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고 왕조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해 사대 외교를 선택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적극적으로 사절을 파견했고, 명나라는 조선 사절을 우대하며 양국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게 유지되었다.[4] 조선은 명나라의 공격 요구를 거부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5]

2. 1. 정치 및 외교 관계

조선은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던 고려와 달리, 사대(事大) 정책을 통해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고 왕조의 권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적극적으로 사절을 파견했고, 명나라도 조선 사절을 우대하여 양국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16]

조선은 국왕의 즉위와 죽음을 명나라에 알려 시호를 받았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 정조사(正祖使), 동지사(冬至使) 등 정기 사행과 필요에 따른 사신 파견으로 명나라와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은 명나라나 청나라에 종속되거나 간섭받지 않고 독립국 지위를 유지했다.[16]

1401년 명나라는 조선을 조공국으로 인정, 중화 중심 외교 관계를 맺었다. 1403년 영락제조선 태종에게 인신과 금도장을 하사해 지위와 왕조의 지위를 확정했다.[4]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는 중국 도적 침략에 대응해 중국 공격 요구를 거부하는 등 중국과 관계 개선에 힘썼다.[5]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자, 조선에서는 청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북벌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북벌론은 실행되지 못했고,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에 사대 정책을 유지했다. 하지만 청나라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군신 간 여러 차례 북벌 계획이 논의될 정도로 깊었다.

2. 2. 경제 및 교역 관계

조선과 명나라의 경제 교류는 조공과 회사(回賜)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관무역 외에도 사신들이 오갈 때마다 북경의 회동관(會同館)과 서울의 태평관에서는 양국 간의 사무역(私貿易)이 이루어졌다. (후시 참조) 조선이 명나라에 보내는 사행(使行)은 일정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 했는데, 주요 공물로는 , , 마필(馬匹), 인삼, 저포(苧布), 마포(麻布), 석자류(席子類), 호피(虎皮), 나전(螺銓) 등이 있었다. 때로는 처녀와 환관(宦官)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중 국내 생산이 부족했던 금과 은의 세공은 큰 부담이었다. 조선은 함경도 단천 등지에서 금광 채광을 장려하고 민간의 사용을 제한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금과 은이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토산물로 대신 바칠 것을 요청했고, 세종 때에 이르러 마필과 포자(布子)로 대신 납부할 수 있게 되었다. 명나라는 조공에 대한 회사품으로 각종 견직물, 약재, 서적, 문방구 등을 주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으로 경제적 의미도 컸다.

관무역 외에, 사신이 오갈 때마다 북경의 회동관, 서울의 태평관에서 양국 간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명나라에 조공하기 위해 국내 물산을 거둬들이고,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국내 산업이 위축되기도 했다. 또한 금, 은, 인삼 등 각종 무역 통제는 상업 활동을 침체시키는 단점도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수준을 높이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일본과의 교역은 왜사선(倭使船)이 삼포에 도착하면 도서(圖書)나 문인(文引)을 검사하고 서울에 보내 진상물(進上物)을 바치게 하고, 조선은 이에 대해 회사품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사신은 서울의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일본의 주요 진상물은 은, 동, 연, 유황, 소목(蘇木), 단목(丹木), 백반(白礬), 감초, 호초, 수우각(水牛角), 상아 등이었으며, 회사품은 면포와 쌀을 비롯하여 서적, 저포, 마포, 인삼, 표피(表皮) 등이었다. 이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처럼 일종의 관무역이었다. 이 밖에도 왜관을 중심으로 사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류가 정상화되면서 왜구도 훨씬 줄어들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관계가 단절되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자 조선과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조선은 다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과의 교류를 재개했다.

3. 대 일본 관계

조선은 일본과 기본적으로 교린 정책을 유지하며 평화적인 교류를 추구했다. 1402년 조선은 외교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양국 간 우호 관계 재건을 추진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호감을 얻으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6] 에도 시대 이전까지 70개가 넘는 외교 사절단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다.[7]

조선 국왕과 일본 쇼군은 상호 사절단을 통해 소통했으며, 당시 일본 천황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였다.[8][9] 조선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쇼군과 소통했고, 외교 문서에서 쇼군은 "일본의 대군"으로 불렸다. 이는 중국 황제를 최고 권위자로 여기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10]

3. 1. 초기 관계 및 교류

1402년, 조선은 일본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양국 간 우호 관계 재건을 추진했다. 이 사절단은 고대에 존재했던 양국 간 좋은 관계를 기념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호감을 얻으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6] 에도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70개가 넘는 외교 사절단이 조선 수도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다.[7]

조선 국왕과 일본 쇼군은 상호 사절단을 통해 소통했으며, 당시 일본 천황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였다.[8][9] 조선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쇼군과 소통했고, 외교 문서에서 쇼군은 "일본의 대군"으로 불렸다. 이는 중국 황제를 최고 권위자로 여기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10]

3. 2. 임진왜란과 관계 단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임진왜란(1592~1598)이 발발하면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17]

3. 3. 관계 회복 및 교류 재개

주어진 요약과 섹션 제목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본 소스에 없기 때문에, 이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원본 소스는 청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는 섹션 제목("관계 회복 및 교류 재개") 및 요약(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과의 관계 회복 및 교류 재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4. 대 여진 및 청나라 관계

조선은 초기부터 여진족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기본적으로 명나라사대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여진과는 교린 정책을 병행했다. 교린 정책은 평화적인 관계 유지를 목표로 했지만, 필요에 따라 무력 진압도 함께 이루어졌다.

태조명나라와 친선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사대 정책을 펼치고, 책봉체제 아래에서 국호와 왕위를 승인받았다.[24] 태조는 즉위 전부터 친명 정책을 표방했으며, 조선 건국 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 왕조의 승인을 요청하고 '화령'과 '조선' 두 가지 국호를 제시하여 홍무제의 선택을 받았다.[25] 그러나 홍무제는 태조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렸다.

조선은 여진, 일본, 류큐 왕국, 시암, 자바 등과 교린 외교를 펼쳤다.[11] 교린은 다자간 외교 정책에 적용되었으며,[12] 이러한 양자 외교는 중국의 개념적 틀에서 발전하여 점차 독특한 형태로 변화했다.[13]

이후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에 사대 정책을 취했지만, 내면에는 청나라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이 존재했다.

4. 1. 여진과의 교린 정책

조선은 여진과의 관계에서 '교린'(鄰交) 정책을 펼쳤다.[11] 여진족과의 교류를 위해 무역소를 설치하고, 여진족 추장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등 회유책을 썼으며, 귀화 장려 정책도 시행하였다.

4. 2. 여진 정벌과 국경 확장

태조는 명나라사대하고 그 책봉체제 아래 국호 및 왕위 승인을 받아 양국 간 친선을 도모하는 한편, 여진, 일본, 류큐 왕국, 시암, 자바 등 다른 나라와는 교린 정책을 펼쳤다.[11] 교린은 다자간 외교 정책에 적용되었다.[12] 이러한 양자 외교 교류의 독특한 성격은 중국에서 발전된 개념적 틀에서 진화했으며, 점차 독특한 관계의 진화를 반영하며 수정되었다.[13]

4. 3. 청나라와의 양란과 군신 관계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들은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결국 정묘호란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다.[16]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표면상으로는 청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이 깊었다.[16]

4. 4.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청나라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고 내정과 외교에 더욱 깊숙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에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다.

1882년 조선청나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들의 조선 내 활동 범위를 크게 넓혔다. 이는 조선의 경제 주권을 침해하는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불평등한 외교 관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40]

5. 서양과의 관계

1653년(효종 4) 김육 등의 요청으로 청나라에 연구생을 파견하여 개량력(改良曆) 연구를 진행했고, 시헌력을 도입했다. 같은 해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무기 제조와 역법(曆法) 사용을 가르쳤다. 1668년 하멜은 조선을 탈출하여 표류기를 통해 조선의 생활상을 서양에 최초로 알렸다.

5. 1. 서양 문물의 전래

1603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마테오 리치1602년에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를 조선에 가져왔다.[37] 이를 통해 서양에 관한 지식과 문화가 조선에 처음으로 전해졌다. 이어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1593년이나 1594년)가 전래되어 일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1611년(광해군 3년) 이수광은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갔을 때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유변(劉汴)의《속이담(續耳譚)》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38] 이수광은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신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 《지봉유설》(1614년)을 저술하였다.

1630년(인조 8년)에는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갔던 정두원이 귀국 길에 이탈리아 사람 로드리게스로부터 한역(漢譯) 과학서적(《천문서》,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및 천주교 서적과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鍾) 등 서양 기계 등 여러 문물을 가져왔다.(1631년)[39] 정두원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온 것은 연대가 가장 명확한 천주교 전래에 관한 기사로 평가된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인질로 갔었던(1637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예수회 신부이자 선교사인 아담 샬과 교류하고(1644년), 귀국하는 길에 과학 및 천주교 서적과 지구의 등을 가지고 왔다(1645년).

5. 2. 천주교 전래와 박해

1779년 겨울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서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 강학회를 열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이승훈1784년 베이징 북천주당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에 돌아와 십자가, 교리서, 묵주 등과 천주교 문서들을 가져왔다.[42] 그는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에게 대세(代洗)를 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천주교회의 포교 활동이 진행되었다. 1785년 3월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집회를 하다가 발각되어 장소를 제공한 중인 김범우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성직자 없이 집전되는 이들의 집회(가성직제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다 교리 문답 중 자신들의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맞는지 의문이 생겼고, 1789년 윤유일을 보내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제도로 교회법을 어긴 것은 책망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칭찬하며 조선에 천주교 신부를 보내기로 약속하고,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1790년)

1791년 금지령에 따라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권상연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불태우자,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회를 조선의 유교가치관에 반대하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하였다.(신해박해) 1793년 북경 교구는 청나라 사람 오 신부를 보냈으나 신해박해의 여파로 조선 입국에 실패하고 병사하였다. 1794년 구베아 주교는 조선 사람과 외모가 비슷한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1800년 사망하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하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43]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1786년 사망)가 주축이었던 벽파가 정권을 잡았고, 벽파는 사학(邪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1801년 음력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한 하교를 내렸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44] 이에 따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신유박해) 주문모 신부의 사망으로 조선 천주교회에는 공백이 생겼다.

5. 3. 쇄국정책과 서양과의 충돌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을 펼쳐 조선의 국경을 굳게 닫았다. 그는 천주교를 탄압하고 프랑스인 성직자들을 처형했다.[1]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에 체류하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W. B. Preston)은 자신의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이끌고 대동강에 침입,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배를 불태웠다.[1]

같은 해, 프랑스는 성직자 처형을 구실로 삼아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는 조선에 사과와 손해 배상,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했다.[1]

1871년 음력 4월, 미국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미군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결국 물러갔다.[1]

미국과의 전쟁 이후,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1871년).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했고,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외세의 침범은 없었다.[1]

이러한 쇄국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일시적인 안정은 가져왔으나, 결국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다.[1]

5. 4. 문호 개방과 외세 침탈

임오군란 진압 이후 민씨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청나라는 원세개가 지휘하는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53]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6. 연도별 주요 사건

시기주요 사건 및 대외 관계 변화
태조
(1392~1398)
태종, 세종
(1400~1450)
중종
(1506~1544)
선조
(1567~1608)
광해군, 인조
(1608~1649)
효종, 현종, 숙종
(1649~1720)
경종, 영조, 정조
(1720~1800)
순조
(1800~1834)
헌종, 철종
(1834~1863)
흥선대원군 집권기
(1864~1873)
고종 친정 시기
(1873~)


6. 1. 태조 (1392~1398)

조선은 고려 시대 때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대명(對明) 외교에서 사대(事大) 정책을 사용하면서 명나라와 충돌을 피하고 왕조의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에 적극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여 명나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였다.[16]

조선 왕조 건국(1392년) 이후, 중화 제국은 즉시 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1401년, 명나라는 조선을 조공국으로 인정하며 중화 중심의 외교 관계를 맺었다. 1403년, 영락제조선 태종에게 인신과 금도장을 하사하여 그의 지위와 왕조의 지위를 확정했다.[4]

조선 건국 초기 주요 업적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조선은 이성계 장군이 중국 도적의 침략에 대응하여 중국을 공격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데서 시작되었다.[5]

6. 2. 태종, 세종 (1400~1450)

1398년 정도전 등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1400년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즉위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책봉)을 청하였다. 명나라홍무제(재위: 1368~98년)는 태조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렸으나, 정종은 명으로부터 왕으로 책봉을 받았다.[24][25]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명나라는 조선에 회사를 하는 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는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서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 관무역 외에도 사신이 서로 왕래할 때마다 북경의 회동관, 서울의 태평관에서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후시 참조) 명나라에 보내는 주요 조공품으로는 , , , 인삼, 모시, 삼베, 돗자리, 표범 가죽, 나전칠기 등이 있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을 요구받기도 했다. 이 중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 은의 조달은 큰 부담이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과 베로 대신 납부할 수 있게 되었다. 명나라의 회사품으로는 각종 비단, 약재, 서적, 문방구 등이 있었다.[25]

1393년 3월부터 5월까지 비교적 많은 왜구의 침입 사례들이 나타난다.[26] 1394년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28] 1394년 음력 3월 17일,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과 만호 김윤검·김문발 등이 왜적의 배 3척을 잡아 몰살했다는 보고,[29] 1394년 음력 8월 15일, 왜구가 충청도 안성에 침입하였는데, 수군 만호 장용검이 왜선 9척을 노획하였다는 내용[30]이 그것이다. 1396년(태조 5년)에는 왜구가 동래(東萊)의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다소 완화되었으며, 1443년에는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였다. 삼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무역을 허용하고, 왜관을 통해 사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1402년 일본에 외교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조선 사절은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재건하려 했으며, 고대에 존재했던 좋은 관계를 기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사절단은 성공적이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이 첫 번째 사절단에 호감을 보였다고 전해진다.[6]

조선은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대체로 교린정책을 쓰는 한편, 때에 따라서는 무력행사를 취하기도 하였다.

여진족은 본래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는 형식상 명나라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분산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북방 개척에 큰 관심을 기울여, 태조 때 이미 함경도 지방의 경영에 착수하여 국토가 상당히 확장된 적도 있었다. 태종 때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한때 후퇴를 하였으나 세종은 즉위초부터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써서 김종서를 보내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공략하여 육진을 설치하고 남방의 각 도(道)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한편 압록강 상류 지방에 대한 개척은 이미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어 처음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둔 이래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세종 때 여진족이 이 지방을 노략질하자, 최윤덕, 이천 등을 차례로 보내어 정벌하고 사군을 설치하여 방어케 되었다. 이로써 압록강 상류지방의 경영도 대개 세종 때 끝마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육진·사군을 개척함으로써 압록강·두만강 이남이 한국 영토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여진족이 한국을 자주 노략질하는 동기는 생필품의 결핍에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교린정책으로서 태종 때에는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다. 여진인이 가지고 오던 물건은 , 해동청, 산삼 및 각종 모피 등이었으며, 조선에서는 그들에게 모시, 삼베, 무명, , 소금, 농기구, 종이 등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여진인의 조공·귀화(歸化)를 장려하는 한편 여진 추장들에게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하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서울에는 북평관을 두어 내조(來朝)하는 여진인을 유숙케 하였으며,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回賜物)을 주어 보냈다.

6. 3. 중종 (1506~1544)

중종 대에는 삼포왜란(1510년)이 일어나 일본과의 관계가 잠시 악화되기도 하였다. 왜관을 중심으로 사무역이 행해지기도 하였으나, 이후 조선은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1]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1]

6. 4. 선조 (1567~1608)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Céspedes)가 조선에 왔었다.[17]

1597년(선조 30) 이수광은 명나라 북경에 진위사(陳慰使)[35] 로서 베트남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며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고,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다루었다.[36]

1602년 명나라에 체류하던 마테오 리치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였고, 1603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던 이광정(李光庭)이 이를 조선에 가져왔다.[37] 이로써 서양에 관한 지식과 문화가 최초로 조선에 전파되었다. 이어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1593년이나 1594년)가 전래되어 일부 식자층의 호기심을 끌었다.

6. 5. 광해군, 인조 (1608~1649)

광해군임진왜란으로 인해 명나라의 국력이 크게 소모된 사이, 만주 지방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1616년)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았다. 광해군은 군대를 보냈으나, 명나라의 주력부대는 사르후 전투(1619년 3월)에서 패배했다. 이때 도원수 강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며 조선이 부득이하게 원병을 보낸 사실을 설명하여 양국 간 큰 문제는 없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후금의 태종(재위 1626~1643년)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 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왔다.(정묘호란, 1627년 1월~3월) 조선은 마지못해 군신의 의를 맺었다.

한편, 남쪽 바다를 통해서는 서양인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 상인 벨테브레(박연)가 표착해 온 것이다.(1627년) 조선은 벨테브레 등을 통해 서양식 무기 제조를 시도하였다.(1628년)[16] 1630년에는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던 정두원이 귀국길에 이탈리아 사람 로드리게스로부터 한역 과학서적(《천문서》, 《직방외기》, 《서양풍속기》) 및 천주교 서적과 홍이포, 천리경, 자명종 등 여러 서양 문물을 가져왔다.(1631년)[39]

후금은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으나(1632년)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후금 태종은 국력을 확장하여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淸)으로 고쳤다.(1636년) 청 태종은 군신 관계 거절을 빌미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병자호란, 1636년 음력 12월~1637년 음력 1월)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의 관계를 맺었으며,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에 막대한 세공을 보내기로 하였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1637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예수회 신부이자 선교사인 아담 샬과 교류하고(1644년), 귀국하는 길에 과학 및 천주교 서적과 지구의 등을 가지고 왔다.(1645년)

6. 6. 효종, 현종, 숙종 (1649~1720)

김육 등의 요청으로 청나라에 연구생을 파견하여 개량력(改良曆)을 연구하고, 1653년(효종 4) 시헌력(時憲曆)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H. Hamel) 일행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무기 제조와 역법(曆法) 사용을 가르쳤다. 하멜은 1668년(현종 9년) 조선을 탈출하여 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6. 7. 경종, 영조, 정조 (1720~1800)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43]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를 중심으로 한 벽파는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였고, 1801년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대한 하교를 내렸다.[44] 이에 따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 (→신유박해)

주문모 신부의 사망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공백 상태가 되었고, 1805년부터 중국 천주교회 역시 박해를 받으면서 선교사를 파견할 여력이 없어졌다.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 전교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겼고,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신부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1816년 충청도 마량진 갈곶에 영국 배가 나타났는데,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 이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문 서신을 통해 자신들이 영국인임을 밝혔다고 한다.

1832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가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로드 애머스트 호를 타고 충청도 홍주 고대도[45]에 나타났다.[46][47] 이들은 광동 이북 지역과의 무역 확장을 타진한다는 구실로 청나라 해안을 탐사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46][47]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는 이들과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었고, 이들은 영국이 청나라와 대등하며 교역을 원한다고 하였으나, 조선 측은 이를 거부하고 물품을 제공하여 돌려보냈다.[48]

6. 8. 순조 (1800~1834)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를 중심으로 한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벽파는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였고, 1801년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대한 하교를 내려 신유박해가 발생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44]

1816년 충청도 마량진 갈곶에 영길리국(영국)의 이양선(서양식 배)이 출몰하였다.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 이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붓으로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시도했으나, 그 글자는 전서도 언문도 아니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배 안에서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고 있었으며,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나갔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서전에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신부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1832년 영국 동인도 회사카를 귀츨라프와 휴 해밀튼 린제이를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 파견하였고, 이들이 탄 로드 애머스트 호가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 뒷바다에 나타났다.[45] 이들은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와 한자로 문답을 나누었고, 영길리국의 정보를 이야기하며 조선과의 교역을 청하였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물품을 제공하여 되돌려 보냈다.[48]

6. 9. 헌종, 철종 (1834~1863)

1839년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왕후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에 대립하여, 헌종의 모후(母后)인 신정왕후의 친정 세력 풍양 조씨벽파가 새로 등장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주교, 피에르 모방 신부, 자크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 기해박해)[50]

기해박해 5년 뒤,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앵베르 주교의 순교로 공석이 된 조선대목구에 새로 임명받은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신부 및 다른 신자들과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1845년) 입국 후 김대건 신부는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비밀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에 넘겨주려다 관헌들에게 체포되어(1846년 6월 15일) 새남터에서 처형(9월 16일)되었다.( 병오박해)

1852년 (철종 3년) 음력 12월, 미국의 포경선 1척이 동래현 용당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51][52] 이것이 조선과 미국 간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6. 10. 흥선대원군 집권기 (1864~1873)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프랑스인 성직자들을 처형하였다.[1]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국에 체류하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W. B. Preston)이 자신 소유의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와 일행을 이끌고 대동강에 침입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배를 불태워버렸다.[1] 같은 해, 프랑스(프랑스 제2제정)는 성직자 처형을 구실 삼아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고,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 이를 병인양요라고 한다.[1]

1871년 음력 4월, 미국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공격하였으나,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갔다.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1]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1] 이후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집권 시절 외세의 침범을 막았다.[1]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일시적인 안정은 찾을 수 있었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게 되었다.[1]

6. 11. 고종 친정 시기 (1873~)

임오군란(1882) 당시 일본을 배후에 둔 민씨 일족이 몰락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명성황후와 그 일족은 김윤식, 어윤중을 청나라에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육군과 해군을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했다. 이후 민씨 정권이 복귀하였고, 청군은 군란 진압에 나섰다. 일본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청나라의 신속한 대응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53]

민씨 정권은 군란 진압 과정에서 외세에 의존하여 자주성을 잃고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며 조선 군대를 훈련시켰고, 마건상과 묄렌도르프는 고문으로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관여했다.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을 통해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보장하고,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다.[53]

1887년, 조선 정부는 민영휘를 주일 변리공사로, 박정양을 주미 공사로, 조신희를 영불 각국 공사로 파견했다.[53]

7. 조선의 외교관 목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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