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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고가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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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계고가도로는 1969년 개통되어 2003년 철거된 서울의 고가도로이다. 일제강점기 청계천 복개 사업과 고가철도 건설 구상에서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 김현옥 시장의 도시 개발 계획에 따라 청계천 위에 고가도로 건설이 추진되었다. 1967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재정난과 도시 계획 변화로 인해 노선이 수정되면서 용두동에서 삼일로 구간이 먼저 개통되었다. 이후 남산1호터널 연결 계획이 추가되었으나, 2000년대 들어 노후화로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과 연계되어 2003년 폐쇄 및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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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고가도로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1971년의 청계고가도로 풍경
1971년의 청계고가도로 풍경
공식 명칭청계고가도로
교통 시설청계천로
횡단 위치서울특별시 청계천
위치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 동대문구 용두동
관리서울특별시청
구조 및 크기
구조 형식거더교
총 길이5 ~ 6km
너비16m
운행 높이알 수 없음
형하 공간알 수 없음
교통량알 수 없음
연혁
착공일1967년 8월 15일
완공일1976년 8월 15일
개통일1976년 8월 15일
폐쇄일2003년 6월 30일
기타 정보
통행 요금알 수 없음

2. 명칭

1967년 서울시가 건설부에 제출한 고가도로 계획안에는 '서울시 고가고속도로'라는 공식 명칭이 사용되었다.[1] 1차 구간 준공 후에는 삼일빌딩의 이름을 따서 삼일고가도로(3.1고가도로)로 불렸다.[2] 그러나 1984년 11월 16일, 서울시는 고가도로가 청계천 복개 위에 건설된 점을 들어 청계고가로(靑溪高架路)로 명칭을 변경하였다.[3]

이후 언론에서는 청계고가도로와 삼일고가도로 두 명칭을 혼용하다가, 마장동에서 삼일빌딩(청계2가) 구간은 청계고가도로, 삼일빌딩에서 남산1호터널 구간은 삼일고가도로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4][5]

3. 역사

1950년대 중반,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청계천은 슬럼가가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 복개 사업이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개 사업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5년에 재개되어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광교(廣橋)에서 청계6가(동대문야구장 부근)까지,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에서 청계8가(신설동)까지,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8가에서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복개된 도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청계천 주변 판자촌은 철거되었고, 아파트와 상가가 건설되었다. 청계천 복개로 인해 주변 주민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1967년 8월 15일 중구 광교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에 이르는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이 고가도로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고가도로였다. 청계고가도로 아래 도로는 청계천로라고 불렸으며, 교통 분산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주변에 의류 및 전기 부품 도매상가가 밀집하여 짐을 싣고 내리는 차량으로 인해 청계천로는 심각한 교통 체증을 겪었다.

2000년대 들어 청계고가도로는 노후화 문제가 제기되었다. 2002년 7월부터 대형 차량 진입이 금지되었고, 2003년 6월 30일 정오를 기해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후 청계고가도로 철거 작업이 시작되어 2005년 9월 청계천이 복원되었다.

도시 경관 문제와 관련하여 도쿄의 일본교 위의 수도 고속도로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일본교 위의 수도 고속도로는 도로 폐쇄가 아닌 지하 이설이 계획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3. 1. 일제강점기

1918년부터 일본 제국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위생 환경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 정비 사업을 시작했다. 남촌(청계천 이남) 일대의 지류와 청계천 본류를 준설하여 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고, 도심 침수를 막고자 했다.[6]

당시 기술로는 하천을 덮는 복개가 준설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여겨졌지만, 예산 문제로 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1930년대 후반 경성시가지계획이 수립되면서 청계천 복개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7]

1935년 경성부 토목과장 마치다 쿠스오(町田久壽男일본어)는 청계천을 완전히 덮고 그 위에 도로와 고가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늘어나는 교통 수요를 해결하고, 용산구영등포구의 공업 단지에서 생산되는 군사용품을 만주로 빠르게 운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이 도로와 철도는 경성과 의주, 경성과 원산 간 도로 및 철도를 보조하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9] 그러나 토지 수용 비용이 들지 않는 청계천 위에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은 재정 문제로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0]

1940년, 중일 전쟁으로 군수물자 운송과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청계천을 덮어 전차 궤도를 설치하고, 지하철을 건설하는 계획이 포함되었으나,[11] 군수물자 부족으로 실행되지 못했다.[10] 1942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예산 부족으로 청계천 준설 및 복개 사업이 중단되었다.[12]

3. 1. 1. 청계천 준설 사업

1918년부터 일본 제국은 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불량한 위생 환경을 정비하기 위해 남촌(청계천 이남) 일대 지류청계천 본류 등 개천 준설을 실시하였다. 이는 콜레라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고, 준설을 통해 하천 소통을 원활히 하여 도심부 침수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6]

3. 1. 2. 청계천 복개 사업과 중단

1918년부터 일본 제국은 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불량한 위생 환경을 정비하기 위해 남촌(일제강점기에 청계천 이남 지역을 부르는 명칭으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여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북촌과 대비되었다.) 일대 지류청계천 본류 등 개천 준설을 실시하였다. 이는 콜레라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고, 준설을 통해 하천 소통을 원활히 하여 도심부 침수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6]

당시 기술 수준에서 하천 복개는 준설보다 하천 오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인식되었으나, 예산 부족으로 즉시 시행되지 못했다. 1930년대 후반 경성시가지계획이 수립되면서 청계천 복개가 진행될 수 있었다.[7]

1935년 경성부 토목과장 마치다 쿠스오(町田久壽男일본어)는 청계천 전면 복개 후 도로를 건설하고 그 위에 고가철도를 설치하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이는 1936년 시행될 경성부의 시역 확장[8]으로 늘어날 교통 수요를 감당하고, 용산영등포에 조성된 공업 단지에서 생산되는 군수품을 만주로 빠르게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계획된 도로와 철도는 경성과 의주 또는 경성과 원산 간 부설된 도로와 철도를 보완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9] 그러나 토지 수용비가 필요 없는 청계천 위에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은 재정 문제로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거부하면서 좌초되었다.[10]

1940년, 중일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자 운송과 방공책을 대비한 경성부 계획에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위에 전차 궤도를 부설하고, 공습에 대비하여 지하철을 건설하는 구상이 포함되었다.[11] 그러나 이 계획은 군수물자 부족으로 무산되었다.[10] 이후 1942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예산 부족으로 청계천 준설 및 복개 사업이 중단되었다.[12]

3. 2. 해방 이후 (1940년대 ~ 1950년대)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 서울에서 가장 대표적인 슬럼 지역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 복개사업이 추진되었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광교 ~ 청계6가(동대문 야구장 부근) 구간이 복개되었다. 이후 복개 공사는 여러 차례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으며,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청계6가 ~ 청계8가(신설동) 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8가 ~ 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었다.

청계천 복개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1960년)

3. 2. 1. 잇따른 준설 시도와 실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가을, 서울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청계천 준설을 시도하였다.[13] 그러나 해외 귀국 동포들과 월남한 사람들에 의해 서울 인구가 폭증하면서 청계천변에 무허가 판잣집이 대거 지어졌고, 이로 인해 공사에 난항을 겪어 무산되었다.[15] 그로부터 6년 뒤인 1955년에 서울시가 다시 청계천 준설을 시도하였으나,[16] 서울시와 내무부 치안국과의 상충된 입장으로 인한 충돌[17][18]에서 드러난 서울시의 미비한 행정력과 청계천변 소매상들의 반발[16]로 인해 청계천 입구에서 관수동 일대까지 준설하는 데 그치고 동대문시장 동쪽으로는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다.

3. 2. 2. 청계천 복개 사업 재개와 난항

1957년 허정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청계천 복개 사업이 서울시 주요 과제로 선정되었다. 1958년 3월, 시는 연내에 광교~주교동 구간을 복개하고, 1959년에는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복개하며, 청계천변 무허가 판자 점포를 철거하는 계획을 세웠다.[19] 1958년 말까지 광교~주교동 구간 복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20][21] 이후 구간의 복개 사업은 서울시와 경찰의 조치가 상충되는 등 행정 난맥상으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22]

1959년 6월 허정 시장이 경질되고 임흥순 시장이 부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23] 서울시는 평화시장을 원래 자리에 상가로 신축하는 조건으로 복개 비용 일부를 평화시장 상인들이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복개 공사를 3개월 간 중단했다.[24] 1960년 5월까지 천변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오간수교까지 복개를 완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선거 등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25] 4·19 혁명 이후에도 김상돈 시장, 시의회, 기존 서울시 공무원 간 극심한 대립으로 행정 마비가 지속되었다.[26]

3. 3. 1960년대

1950년대 중반 한국 전쟁 직후, 청계천은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 지역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던 청계천 복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광교에서 청계6가(현 동대문 야구장 부근) 구간이 복개되었고,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에서 청계8가(신설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고가도로 건설 계획이 김현옥 서울시장 취임 이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다. 1966년 10월, 주우원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장은 늘어난 교통량으로 인한 교통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면교통 효율성을 높이는 개선안을 제시하며 고가도로를 제안하였다. 1967년 3월경 김현옥 서울시장은 김수근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에게 고가도로 건설 자문을 구하였다. 1967년 6월 14일, 서울시는 3년에 걸쳐 공사비 63억을 투입하여 청계천 위에 자동차전용 고속고가도로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청계천 주변 판잣집들은 복개 과정에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맨션과 상점가가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 사절들과 워커힐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청계고가도로를 설치했다는 비화가 서울시립대 손정목 명예교수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소개되기도 했다.

3. 3. 1. 복개도로 개통과 구간 연장

5·16 군사정변 이후 공사가 다시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1961년 7월 서울시는 청계천변 무허가 건물 철거와 하천 복개 사업을 재개했고, 같은 해 12월 5일 오간수교에서 청계천 복개도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27] 1962년 7월, 서울시는 오간수교부터 제1청계교까지 총 연장 520m 구간을 도로로 복개할 계획을 세웠다. 이 사업은 시 재정이 아닌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공사를 시행하고 복개 구간을 시에 기부하는 대신, 복개 도로변의 일정한 대지를 사업자에게 양도하려는 계획이었다.[28]

3. 3. 2. 고가도로 건설 구상과 구체화

김현옥 서울시장 취임 이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 고가도로 건설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1966년 10월, 주우원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노면교통 효율성 증대를 위한 교통 개선안을 제시하며 고가도로 건설을 주장했다.[29] 1966년 12월 30일, 김현옥 시장은 서울시민회관 시정종합보고에서 고가도로 건설을 공익건설 사업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30][31] 1967년 3월, 김수근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이 고가도로 건설 자문에 참여했다.[33]

3. 3. 3. 고가도로 건설 시작

김현옥 서울시장 취임 이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 건설이 구체화되었다. 1966년 10월, 주우원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장은 늘어난 교통량으로 인한 서울시의 교통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면교통의 효율성을 높이는 교통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시내 일반 교통을 담당하는 도로와 도심 통과 교통을 처리하는 도로를 분리하여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도심 관통 교통 처리를 위해 고가도로를 제안하였다. 그는 고가도로가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2.4km 연장의 도로여야 하며, 도심에 3개소의 입체교차로와 20여 개소의 램프를 설치하여 고가도로와 기존 도로를 연결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29]

1966년 12월 30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서울시 시정종합보고에서 고가도로에 대한 서울시의 공식 입장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공익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고가도로 건설을 진행할 것이며,[30] 청계천에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31]

1967년 3월경 김현옥 서울시장은 김수근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에게 고가도로 건설 자문을 구하였다.[33] 김수근이 작성한 조감도[34]에 따르면, 그는 종로 중심의 단핵 방사형 도시 구조였던 서울을 종로-여의도-마포-인천으로 이어지는 선형 구조로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동서로 길게 뻗은 간선도로에 직교하는 선형 축을 설정하여 하나의 도시 단위로 이해하려는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그의 스승이었던 단게 겐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5] 이 계획에서 는 서울 도심부를 관통하는 동서 간선도로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설계되었다.[36] 김수근의 구상도를 바탕으로 서울시는 건설 조사 용역을 발주하였고, 1967년 5월 신촌에서 마장동까지의 공사 구간을 확정하는 계획서가 서울시에 제출되는 등[37] 고가도로 공사와 관련한 내부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38]

용두동 ~ 삼일로 구간 교각 공사가 진행된 모습


1967년 6월 14일, 서울시는 언론을 통해 3년에 걸쳐 공사비 63억을 투입하여 청계천 위에 자동차전용 고속고가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34] 당시 계획에서는 가 두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구간은 연희IC를 기점으로 서대문, 광교, 동대문을 지나 마장동으로 이어지는 연장 10.5km, 폭 24m의 6차선 도로였고, 두 번째 구간은 독립문을 기점으로 사직터널, 중앙청, 동대문, 퇴계로, 서울역, 서대문을 거쳐 다시 독립문으로 돌아오는 총 연장 10km의 순환 노선이었다.[39][40] 이 중 첫 번째 안인 관통형 고가도로만 실제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두 번째 안이었던 환형 고가도로는 우선순위에 밀려 계획이 무산되었다.[41]

3. 3. 4. 재정난과 계획 변경, 그리고 1차 개통

1967년 7월, 당초 계획대로 시 예산 2억 원을 투입하여 기초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42] 재정 문제로 착공되지 못했다.[41] 한 달 뒤인 1967년 8월 15일, 추가경정예산 확보 전이었음에도 광화문 중부소방서 옆에서 고가도로 기공식을 우선 진행했다.[40][43] 8월 16일, 서울시는 고가도로 건설비 2억 원을 포함한 2차 추경 예산안을 확정하여 총리실에 신청했고,[44] 이후 10월에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정감사와 예산 심의를 거쳐 원안대로 통과되어 자금 조달이 가능해짐에 따라 10월 14일부터 교각 공사를 시작했다.[45][46]

1968년, 서울시는 고가도로 건설 예산 부족으로 전년도와 같이 예산안에 고속도로 예산 10억 원을 신청했으나 전액 삭감되어 공사 중단 위기를 맞았다.[47] 그러나 시 당국은 시유지 매각, 개발 이익, 세수 확보 등 여러 대책을 마련하여 예산을 확보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보하지 못한 예산은 국외 차관을 통해 조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48]

서울시의 재원 조달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계고가도로 건설 계획은 착공 도중 몇 차례 변경되었다.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도로가 영구보존도로로 지정되면서,[49] 세종로를 관통하여 연희IC까지 연결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결국 1968년 8월 14일, 청계로-세종로-서대문-연희동으로 이어지는 원안을 폐기했다. 대신 삼일로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퇴계로서울역을 거쳐 아현 입체교차로로 연결하고, 다른 하나는 마포대교와 연결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예산 확보의 어려움과 자재 수급 불안으로 실현될 수 없게 되자, 용두동-삼일로 구간을 우선 개통하고 나머지 구간은 추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50][51] 1969년 3월 22일, 용두동-삼일로 구간이 먼저 개통되었다.[52]

3. 3. 5. 도시계획 변화에 따른 추가 계획 수정

1967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인천을 축으로 개발하는 기존 서울 도시계획과 배치되는[53]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54]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을 제3한강교로 결정하면서[55] 강남 개발의 중요성이 높아졌고, 서울의 기본 구조 또한 서울 도심 지역과 한강 이남을 연결하는 계획으로 변화하였다.[56]

1·21 사태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등 대외적인 사건으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김현옥 서울시장은 유사시 군사적 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을 짓는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발표하였다.[57] 이 계획에는 남산1호터널남산2호터널 착공도 포함되었는데, 이를 활용하기 위해 1969년 11월 20일 청계고가도로 삼일로 구간과 남산1호터널을 연결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58] 이로 인해 기존 계획 구간 중 삼일로-아현입체교차로 구간은 백지화되었다.

4. 철거 및 청계천 복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계고가도로는 노후화로 인해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다. 2002년 7월부터 안전 문제로 대형차의 진입이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일부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청계천 복개 역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한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사업과 연계하여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추진했다. 2003년 6월 30일 청계고가도로를 폐쇄하고,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10월 1일까지 3.6조을 투입하여 청계천 복원 사업을 시행하였다.

5. 노선 (2003년 6월 30일 폐쇄 직전 기준)

소파로서울특별시 중구나들목영락교회 앞 램프서울특별시도 제27호선 (삼일대로)남산1호터널 방향 진출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나들목광교(청계2가) 램프서울특별시도 제50호선 (청계천로)남산1호터널 방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나들목청계3가 램프광교 방향 진출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나들목청계6가 램프광교 방향 진입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출만 가능나들목청계7가(평화시장 앞) 램프광교 방향 진출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나들목청계8가(삼일아파트) 램프광교 방향 진입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출만 가능분기점청계램프서울특별시도 제30호선 (내부순환로)서울특별시 성동구성산 방향 진출입 불가능


6. 운행 제한

청계고가도로는 구조 보전 및 차량 운행 위험 방지를 위해 1997년 5월 15일부터 승용차 이외 차량의 통행을 제한했다.[61] 이후 2001년 1월 1일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어 10인승 이하 승합차도 승용차 기준에 포함되면서, 2001년 4월 1일부터 기존에 등록된 10인승 이하 승합차도 통행할 수 있게 변경되었다.[62]

참조

[1] 저널 서울市高架道路建設計劃 건설부 1967
[2] 저널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 개발 2022-03-02
[3] 문서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 노선인정변경폐지에관한공고 1984-11-16
[4] 뉴스 서울 삼일고가도로 내일 철거 https://news.kbs.co.[...] 한국방송공사 2022-03-05
[5] 뉴스 삼일고가도 8일 `역사 속으로' https://www.hankyung[...] 2022-03-05
[6] 저널 기획연재 : 도시 50년사 ⑧ ; 청계천 복개공사와 고가도로 건설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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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저널 청계천 복개와‘1960년대적 공간’의 탄생 역사비평사 2022-04-30
[15] 뉴스 이름 좋은 淸溪川 뚜껑 더플 用意는 없나 2022-03-02
[16] 뉴스 淸溪川 浚渫 왜 늦나 2022-04-30
[17] 뉴스 東大門市場의 假建築도 撤去 2022-04-30
[18] 뉴스 混線 이룬 淸溪川 板子집 2022-04-30
[19] 뉴스 淸溪川 덮을 計劃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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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뉴스 追豫案 國會통과 2022-03-02
[47] 뉴스 高架道路中斷위기 豫算깎여 2022-03-02
[48] 저널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 개발 2022-03-02
[49] 뉴스 「路上文化財」…대한門 當局의 어설픈 妥協이 빚은 말썽의 언저리 2022-03-02
[50] 뉴스 청계천고가도로 2월25일 개통 2022-03-02
[51] 뉴스 地下鐵등 연내착공 2022-03-03
[52] 뉴스 三·一高價道路 개통 2022-03-03
[53] 저널 1960년대 이후부터의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제도 변화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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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뉴스 京釜高速道路 明2月初에着工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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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뉴스 高架道路대폭연장 202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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