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친위대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친위대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알바니아인으로 구성하여 조직한 무장친위대 사단이다. 1944년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 하에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창설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및 세르비아인, 유대인 탄압에 관여했다. 사단은 민족 청소, 전쟁 범죄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으며, 1944년 말 내부 붕괴로 해체되었다. 사단장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알바니아의 군사사 - 케르키라 해협 사건
    케르키라 해협 사건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케르키라 해협에서 발생한 영국 해군과 알바니아 간의 갈등으로, 일련의 함정 피격 및 기뢰 피해 사건과 영국 해군의 기뢰 제거 작전을 포함하며 국제 분쟁으로 이어져 국제사법재판소 판결과 무해통항권 정립에 영향을 미쳤다.
  • 알바니아의 군사사 - 스트라디오트
    스트라디오트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남부 및 중부 유럽에서 용병으로 활동한 발칸 출신 병사들을 지칭하는 이탈리아어 용어로, 알바니아인, 그리스인, 슬라브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뛰어난 기병술과 독특한 전술로 명성을 떨쳤다.
  • 무장친위대 산악사단 - 친위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
    친위대 제13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 무장친위대가 보스니아 무슬림을 주축으로 창설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 파르티잔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창설 배경, 반란, 잔혹 행위 등으로 악명을 떨치다 전쟁 후 구성원들이 전범 재판에 회부되거나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 무장친위대 산악사단 - 제6SS산악사단 노르트
    제6SS산악사단 노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 무장친위대에 소속되어 동부 및 서부 전선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독일 항복과 함께 해산된 산악 사단이었다.
친위대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제21SS무장산악사단의 차량 표식
사단 표식
부대 명칭제21SS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 (제1알바니아)
원어 명칭(독일어)
별칭스칸데르베그
소속무장친위대
병과산악엽병
역할대게릴라전
규모사단 (사단 규모에 미달)
주둔지프리즈렌
해체1944년 11월 1일
활동 기간
창설1944년 5월 1일
해체1944년 11월 1일
지휘부
지휘 구조제21산악군단
주요 지휘관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상징
식별 기호알바니아 쌍두독수리
전투 및 작전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작전엔틀리히 작전
팔켄아우게 작전
뤼베찰 작전
드라우프갱어 작전
스트라친-쿠마노보 작전
코소보 작전

2. 역사적 배경

2. 1. 발칸반도의 민족 갈등과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칸반도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며 갈등이 끊이지 않던 지역이었다. 특히 코소보 지역은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에서 차별받는다고 느꼈고, 제2차 세계 대전이탈리아 왕국이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이를 환영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코소보 대부분을 알바니아에 병합하고 알바니아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며 알바니아어 학교 개교를 허용하고 알바니아 국기 게양을 허용하는 등 유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간기에 코소보에 정착했던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추방했고,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에 대한 억압에 대한 복수로 세르비아인 정착민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보복 행위를 하기도 했다.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자 나치 독일은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반공주의민족주의 민병대인 발리 콤베타르를 포함하여 이탈리아와 협력했던 알바니아군을 접수했다. 독일은 알바니아인들을 제13 SS 무장 산악사단 한자르에 모집했는데,
예복을 입은 남자가 군인들의 사열을 보고 있다
예루살렘무프티무하마드 아민 알 후사이니가 1943년 11월 제13 SS 사단의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다. 이 사단에는 코소보와 산자크 출신의 알바니아인 약 1,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나중에 ''스칸데르베그''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 사단은 주로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되었지만, 코소보와 산자크 출신 알바니아인 약 1,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는 무슬림들을 무장 친위대에 모집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제13 SS 사단을 방문하여 나치식 경례를 하기도 했다.

2. 2. 이탈리아와 독일의 점령

1939년 4월 7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5개월 전, 이탈리아 왕국알바니아를 침공하여 5일 만에 점령했다.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알바니아 의회가 제안한 왕관을 받아들였고, 알바니아 왕립군은 이탈리아 왕립군에 편입되었으며, 총독이 임명되어 보호령으로 관리되었다. 1941년 4월 추축국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바르다르와 모라바 등 인접 지역을 병합하여 확장되었다.

코소보 대부분이 알바니아에 병합되면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초기에는 이탈리아 점령을 열렬히 환영했다. 일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알바니아인이 "아리아인이며 일리리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통치 하에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알바니아어 학교를 개교하고 알바니아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알바니아 국기를 게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립군은 전간기에 코소보에 정착했던 대부분의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추방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유고슬라비아 통치하에서 겪었던 억압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을 혐오했고,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세르비아인 이웃을 공격하고 30,000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 정착민들의 집을 불태웠다.

알바니아는 1943년 9월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이탈리아에 점령되어 있었다. 1943년 8월, 나치 독일은 제2 기갑군을 발칸 반도로 배치하여 이전에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지역을 인수했다. 독일이 점령한 이탈리아 지역 중 하나는 알바니아였으며, 제21 산악군이 배치되었다. 베르마흐트 전권 대사와 하인리히 힘러의 특별 대표, 요제프 피츠툼은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 주둔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가 항복하기 전에 이탈리아와 협력했던 반공주의민족주의 민병대인 발리 콤베타르를 포함하여 모든 알바니아군을 접수했으나, 곧 이 부대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해, 코소보와 산자크 지역 출신의 알바니아인들이 제13 무장 산악사단 SS ''한자르''(크로아티아 제1)에 모집되었다. 이 사단은 주로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괴뢰 국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활동했다. 알바니아인들의 무장 친위대 모집을 담당한 주요 인물은 카를 폰 크렘플러였다. 약 6개월 동안 이 사단에는 코소보와 산자크 출신 알바니아인 약 1,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의 무프티인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는 무장 친위대 및 기타 부대에서 무슬림들을 조직하고 모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무프티는 또한 제13 SS 사단을 축복하고 검열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이때 그는 나치식 경례를 사용했다.

알바니아 무장 친위대 사단을 창설하려는 것은 피츠툼의 아이디어였으며, 처음에는 헤르만 노이바허와 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반대하여 힘러에게 이 계획을 보류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부는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어려움이 증가하자 힘러는 곧 마음을 바꾸었고, 1944년 2월에는 이 아이디어가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을 받았다.

3. 사단 편성

1944년 2월, 아돌프 히틀러코소보 내에서만 복무하고, 민족 알바니아인을 보호하며 독일의 통제를 받는 알바니아 무장친위대 사단의 창설을 승인했다. 이는 발칸 반도에서 활동하는 세 개의 무슬림 무장친위대 사단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발칸 반도에서 무장친위대 모집을 확대하고 두 개의 군단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한 군단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보스니아 지역에서, 다른 군단은 알바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할 계획이었다. 이 군단들은 제7 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과 결합하여 발칸 무장친위대 산악군을 형성할 예정이었다.

1944년 3월, 프리즈렌 동맹의 의장 베드리 페자니는 히틀러에게 12만~15만 명의 코소보 알바니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유고슬라비아 및 알바니아 파르티잔과 싸울 것을 제안했다. 페자니는 독일 지도부에 공산주의 반란에 맞서 싸울 알바니아인에게 장비와 물자를 제공하고, 독일 점령 세르비아 영토와 독일 점령 몬테네그로 영토를 희생하여 독일 괴뢰 국가인 알바니아의 국경 확장을 요청했으나, 이러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4월, 히믈러는 히틀러가 승인한 새로운 알바니아 의용 사단의 창설을 명령했고, 이 사단은 이후 중세 알바니아 전사 스칸데르베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독일은 알바니아 SS 사단을 위해 1만~1만 2천 명의 병력을 구상했다. 히믈러는 무슬림 알바니아인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맞선 독일의 전쟁에서 잠재적인 인력으로 간주했다. 1944년 4월 17일, 제13 SS 사단의 알바니아 대대는 보스니아 전투에서 코소보로 직접 철도를 통해 이송되어 새로운 알바니아 사단의 일부를 형성했다.

발칸 반도는 민족·종교 간의 대립이 격심한 지역으로,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의 코소보 지역에서 오랫동안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으로부터 이류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었다.[1]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알바니아와 합병되기를 갈망했고, 추축국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1] 이 사단은 1944년3월 편성되었으며, 알바니아인 지역의 독립과 통일 알바니아 건설의 약속과 함께 창설되었다.[1]

1944년 3월, 독일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스칸데르베그 사단을 편성했다.[1] 이 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알바니아인이 유일하게 입대할 수 있었던 부대였다. 사단은 제13SS무장산악사단 출신 알바니아인 300명, 알바니아인 지원병,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인 장교 및 부사관으로 구성되었다.[1]

히믈러는 발칸 반도에서 무장친위대 모집을 확대하여 두 개의 군단을 형성하고자 했으며, 스칸데르베그 사단은 그 중 하나였다. 1944년 4월, 히믈러는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알바니아 의용 사단을 창설했고, 이는 중세 알바니아 전사 스칸데르베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독일은 처음에 1만~1만 2천 명의 병력을 구상했으나, 실제로는 8,500명에서 9,000명 사이였다.

프리즈렌 동맹의 의장 베드리 페자니는 12만~15만 명의 코소보 알바니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파르티잔과 싸울 것을 제안하고, 독일 괴뢰 국가인 알바니아의 국경 확장을 요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알바니아 내무부 장관 자페르 데바는 새로운 사단에 알바니아인을 모집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최초 편성 당시 알바니아의 징집병 11,398명 중, 조건을 충족하는 인원은 9,275명이었고, 그 중 6,491명이 무장 친위대에 채용되었다. 사단의 최종 전력은 8,500명에서 9,000명이었으며, 2개 보병 연대, 포병 연대, 정찰 대대, 산악 공병 대대, 통신 대대, 대전차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바니아인들은 현대식 무기와 군사 훈련에 대한 접근, 알바니아 국경을 개정하는 데 도움, 복수, 심지어 약탈의 기회 등 다양한 이유로 입대했을 수 있다. 이 신병들의 질은 대부분 좋지 않았고, 6,000명에서 6,500명 정도만이 훈련을 받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약 1,500명의 전 유고슬라비아 왕립군 포로, 실패한 알바니아 육군 및 헌병대, 전전 및 확장된 알바니아 출신 지원병, 그리고 아들이 두 명 이상 있는 가족에서 징집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제13 SS 사단과는 달리 이슬람을 무장친위대에 가입하는 인센티브로 사용하는 것은 독일의 의제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민족적 긴장의 활용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3. 1. 창설 배경 및 목적

1944년 2월, 아돌프 히틀러코소보 내에서만 복무하고, 민족 알바니아인을 보호하며 독일의 통제를 받는 알바니아 무장친위대 사단의 창설을 승인했다. 이는 발칸 반도에서 활동하는 세 개의 무슬림 무장친위대 사단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발칸 반도에서 무장친위대 모집을 확대하고 두 개의 군단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한 군단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보스니아 지역에서, 다른 군단은 알바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할 계획이었다. 이 군단들은 제7 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과 결합하여 발칸 무장친위대 산악군을 형성할 예정이었다.

1944년 3월, 프리즈렌 동맹의 의장 베드리 페자니는 히틀러에게 12만~15만 명의 코소보 알바니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유고슬라비아 및 알바니아 파르티잔과 싸울 것을 제안했다. 페자니는 독일 지도부에 공산주의 반란에 맞서 싸울 알바니아인에게 장비와 물자를 제공하고, 독일 점령 세르비아 영토와 독일 점령 몬테네그로 영토를 희생하여 독일 괴뢰 국가인 알바니아의 국경 확장을 요청했으나, 이러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4월, 히믈러는 히틀러가 승인한 새로운 알바니아 의용 사단의 창설을 명령했고, 이 사단은 이후 중세 알바니아 전사 스칸데르베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독일은 알바니아 SS 사단을 위해 1만~1만 2천 명의 병력을 구상했다. 히믈러는 무슬림 알바니아인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맞선 독일의 전쟁에서 잠재적인 인력으로 간주했다. 1944년 4월 17일, 제13 SS 사단의 알바니아 대대는 보스니아 전투에서 코소보로 직접 철도를 통해 이송되어 새로운 알바니아 사단의 일부를 형성했다.

발칸 반도는 민족·종교 간의 대립이 격심한 지역으로,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의 코소보 지역에서 오랫동안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으로부터 이류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었다.[1]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알바니아와 합병되기를 갈망했고, 추축국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1] 이 사단은 1944년3월 편성되었으며, 알바니아인 지역의 독립과 통일 알바니아 건설의 약속과 함께 창설되었다.[1]

3. 2. 모집 및 구성

1944년 3월, 독일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스칸데르베그 사단을 편성했다.[1] 이 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알바니아인이 유일하게 입대할 수 있었던 부대였다. 사단은 제13SS무장산악사단 출신 알바니아인 300명, 알바니아인 지원병,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인 장교 및 부사관으로 구성되었다.[1]

히믈러는 발칸 반도에서 무장친위대 모집을 확대하여 두 개의 군단을 형성하고자 했으며, 스칸데르베그 사단은 그 중 하나였다. 1944년 4월, 히믈러는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알바니아 의용 사단을 창설했고, 이는 중세 알바니아 전사 스칸데르베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독일은 처음에 1만~1만 2천 명의 병력을 구상했으나, 실제로는 8,500명에서 9,000명 사이였다.

프리즈렌 동맹의 의장 베드리 페자니는 12만~15만 명의 코소보 알바니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파르티잔과 싸울 것을 제안하고, 독일 괴뢰 국가인 알바니아의 국경 확장을 요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알바니아 내무부 장관 자페르 데바는 새로운 사단에 알바니아인을 모집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최초 편성 당시 알바니아의 징집병 11,398명 중, 조건을 충족하는 인원은 9,275명이었고, 그 중 6,491명이 무장 친위대에 채용되었다. 사단의 최종 전력은 8,500명에서 9,000명이었으며, 2개 보병 연대, 포병 연대, 정찰 대대, 산악 공병 대대, 통신 대대, 대전차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바니아인들은 현대식 무기와 군사 훈련에 대한 접근, 알바니아 국경을 개정하는 데 도움, 복수, 심지어 약탈의 기회 등 다양한 이유로 입대했을 수 있다. 이 신병들의 질은 대부분 좋지 않았고, 6,000명에서 6,500명 정도만이 훈련을 받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약 1,500명의 전 유고슬라비아 왕립군 포로, 실패한 알바니아 육군 및 헌병대, 전전 및 확장된 알바니아 출신 지원병, 그리고 아들이 두 명 이상 있는 가족에서 징집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제13 SS 사단과는 달리 이슬람을 무장친위대에 가입하는 인센티브로 사용하는 것은 독일의 의제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민족적 긴장의 활용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4. 군사 활동 및 전쟁 범죄

사단장에는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SS 대령(후에 소장으로 승진)가 취임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동부 전선에는 투입되지 않고,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파르티잔과의 전투, 일반 SS의 임무에 가까운 민족 청소 등을 실시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는 1918년부터 1941년 사이에 코소보에서 광범위한 토지 수용을 실시하여, 그곳에 대량의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식민시켰다. 사단은 이러한 세르비아계 주민의 민족 청소에 종사하여, 코소보에서는 약 1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목숨을 잃었고, 7만 5천 명의 세르비아인이 주변 지역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1944년 5월 14일, 사단원들은 프리슈티나에 있는 유대인 가정을 급습하여 유대인 281명을 체포해 독일군에게 넘겼고, 이들은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사단은 알바니아 파르티잔 학살 및 코소보에서 슬라브계 가족 10,000명까지 추방하는 데에도 책임이 있었다. 1944년 5월 28일부터 7월 5일 사이에는 유대인, 공산주의자 및 기타 반파시스트 510명을 체포하여 독일군에게 넘겼으며, 사보타주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보복 처형하기도 했다.

더욱이 코소보에 있는 유대계 주민을 게슈타포에게 넘겨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러나, 전전 코소보에 있던 유대인은 520명이었지만, 이 사단이 넘겨준 유대인은 210명이었으며,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유대인의 생존율이 62%로 오히려 높은 지역이었다. 이것은, 현지 알바니아인이 유대인을 도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1944년 6월, ''스칸데르베그''는 몬테네그로 동부에서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안드리예비차에서 사단은 400명 이상의 동방 정교회 민간인을 즉결 처형했다. 6월과 7월에는 작전 Endlich (결국)와 Falkenauge (호크아이)에 참여했으며, 8월 5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작전 드라우프갱어 (무모한 짓)에도 참여했다. 작전 드라우프갱어 동안 ''스칸데르베그''는 독일군이 사용한 주력 부대였으며, 자코비차, 페치, 모크라 고라 지역의 강력한 파르티잔 병력 파괴에 초점을 맞추었다. 1944년 7월 28일 작전 중, 사단은 제7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벨리카 학살에서 몬테네그로 플라브의 벨리카에서 약 550명의 세르비아인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파르티잔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에서 철수를 시작하자, 강제 징병된 알바니아 병사들의 탈주가 잇따랐고, 편성된 지 반 년이 조금 넘은 1944년 10월에는, 벌써 사단은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11월 말에는, 사단을 구성하는 인원은 3500명밖에 남지 않아, 부대의 유지가 곤란해졌다. 그래서 잔존 부대는 스코페에서 그리스로부터 철수해 온 부대(일부 독일 해군의 수병도 포함)를 바탕으로, 독일인을 중심으로 하는 '제21SS 산악 사단 스칸데르베크'로 재편성되었다. 사단은 그리스에서 철수해 온 독일군 E 집단에 배치되어 알렉산더 뢰르상급 대장의 지휘 하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함께, 마케도니아의 바르다르 강 방어를 수행했다.

1945년1월까지, 스칸데르베크 사단은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로 철수했고, 그 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브르치코로 철수했다.

4. 1. 대(對) 파르티잔 작전

1944년 5월 1일,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알바니아 제1호)는 제21 산악군단의 일부로 창설되었다. 사단은 주로 코소보의 치안 유지, 운송로 및 크롬철광 광산과 같은 경제적 시설 방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대한 공격 작전을 담당했다.

사단은 SS-Standartenführer 아우구스트 슈미드후버의 지휘를 받았으며, 6월에 SS-Oberführer로 진급했다. 사단원들은 쿠란을 사용하여 "불신자에 대한 지하드"를 맹세하는 종교적 서약을 했다. 초기에는 사단의 무슬림 알바니아인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계 세르비아인 적들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세르비아인들이 수많은 잔학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독일군은 페치와 프리즈렌에서 사단 병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알바니아 장교들을 체포해야 했다.

1944년 5월 14일, 사단원들은 프리슈티나에 있는 유대인 가정을 급습하여 유대인 281명을 체포해 독일군에게 넘겼고, 이들은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사단은 알바니아 파르티잔 학살 및 코소보에서 슬라브계 가족 10,000명까지 추방하는 데에도 책임이 있었다. 1944년 5월 28일부터 7월 5일 사이에는 유대인, 공산주의자 및 기타 반파시스트 510명을 체포하여 독일군에게 넘겼으며, 사보타주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보복 처형하기도 했다.

1944년 6월, ''스칸데르베그''는 몬테네그로 동부에서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안드리예비차에서 사단은 400명 이상의 동방 정교회 민간인을 즉결 처형했다. 6월과 7월에는 작전 Endlich (결국)와 Falkenauge (호크아이)에 참여했으며, 8월 5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작전 드라우프갱어 (무모한 짓)에도 참여했다. 작전 드라우프갱어 동안 ''스칸데르베그''는 독일군이 사용한 주력 부대였으며, 자코비차, 페치, 모크라 고라 지역의 강력한 파르티잔 병력 파괴에 초점을 맞추었다. 1944년 7월 28일 작전 중, 사단은 제7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벨리카 학살에서 몬테네그로 플라브의 벨리카에서 약 550명의 세르비아인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

작전 드라우프갱어 종료 시점에 사단의 400명 이상이 탈영하거나 실종되었다. 8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단은 데바르를 오가며 파르티잔과 전투를 벌였지만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8월 말까지 독일군은 사단이 기본적인 경비 임무에만 쓸모가 있다고 결정했다. 일부 사단원은 파르티잔이 그 지역을 장악하기 전에 코소보 근처의 크롬 광산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으나, 그 뒤의 충돌에서 사단의 연대 중 하나가 1,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탈영했다. 육군 집단 E는 사단의 수행 능력이 "군사적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보고했다.

사단장에는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SS 대령(후에 소장으로 승진)가 취임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동부 전선에는 투입되지 않고,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파르티잔과의 전투, 일반 SS의 임무에 가까운 민족 청소 등을 실시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는 1918년부터 1941년 사이에 코소보에서 광범위한 토지 수용을 실시하여, 그곳에 대량의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식민시켰는데, 사단은 이러한 세르비아계 주민의 민족 청소에 종사하여, 코소보에서는 약 1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목숨을 잃었고, 7만 5천 명의 세르비아인이 주변 지역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파르티잔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에서 철수를 시작하자, 강제 징병된 알바니아 병사들의 탈주가 잇따랐고, 편성된 지 반 년이 조금 넘은 1944년 10월에는, 벌써 사단은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4. 2. 세르비아인 및 유대인 탄압

사단은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추방하는 등 민족 청소에 관여했다. 초기에는 사단의 무슬림 알바니아인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계 세르비아인 적들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세르비아인들이 수많은 잔학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 범죄를 막기 위해 독일군은 페치프리즈렌에서 사단 병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알바니아 장교들을 체포해야 했으며, 지휘관 한 명은 심지어 독일 감옥으로 보내졌다. 1944년 5월 14일, 사단원들은 프리슈티나에 있는 유대인 가정을 급습하여 유대인 281명을 체포해 독일군에게 넘겼고, 독일군은 이들을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보냈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역사가 노엘 말콤은 이 사건을 "코소보의 전쟁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에피소드"라고 묘사했다. 사단은 나중에 알바니아 파르티잔 학살에 연루되었다. 또한 새로운 알바니아 정착민들이 알바니아 북부의 가난한 지역에서 도착하면서 코소보에서 슬라브계 가족 10,000명까지 추방하는 데 책임이 있었다. 1944년 5월 28일부터 7월 5일 사이에, 사단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및 기타 반파시스트 510명을 체포하여 독일군에게 넘겼다. 또한 사보타주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보복 처형했다.

1944년 6월, ''스칸데르베그''는 몬테네그로 동부에서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안드리예비차에서 사단은 400명 이상의 동방 정교회 민간인을 즉결 처형했다. 1944년 7월 28일 작전 중, 사단은 제7SS 의용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벨리카 학살에서 몬테네그로 플라브의 벨리카에서 약 550명의 세르비아인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는 1918년부터 1941년 사이에 코소보에서 광범위한 토지 수용을 실시하여, 그곳에 대량의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식민시켰다. 사단은 이러한 세르비아계 주민의 민족 청소에 종사하여, 코소보에서는 약 1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목숨을 잃었고, 7만 5천 명의 세르비아인이 주변 지역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4. 3. 사단 해체

1944년 9월 1일, 테토보고스티바르에 주둔한 사단 구성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일 장교와 부사관을 살해했다. 이 시점에서 사단의 병력은 계획된 병력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000명 미만이었다. 배치된 지 두 달 만에 3,500명이 탈영했다. 크리그스마리네(독일 해군) 인력 3,000~4,000명이 충원되었지만, 사단의 전투 능력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탈영은 독일의 패배, 식량과 장비 부족, 미국 육군 항공대의 지속적인 감시, 연합군의 선전, 발칸 반도에서 독일의 군사적 지배가 끝나가는 상황,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연합군 합류 소식,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면 종료, 알바니아 노동당의 알바니아 민족해방운동 합류 요구 등이 원인이었다.

1944년 10월 초, 사단 병력은 약 4,900명으로 감소했고, 이 중 전투 적합 인원은 1,500명 미만이었다. 4월에서 10월 사이에 3,425명이 탈영하여 사단 병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슈미트후버는 제13 SS 사단에서 복무했던 대대원 697명조차 탈영했다고 보고했다. 부대는 장비와 무기가 부족했고, 신병 훈련을 위한 독일인 인력도 부족하여 여름과 가을 동안 단 하나의 대대만이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다. 슈미트후버는 부하들을 경멸했고, 그와 그의 상관들, 그리고 피츠툼은 알바니아인의 문화와 군사적 명성을 깎아내려 효과적인 치안 부대 창설 실패를 정당화하려 했다. 또한 사단 실패의 원인을 적절한 군사 훈련, 이념 훈련, 교관 부족과 연결시켰다. 베르마흐트의 덜 관여된 구성원들은 부대 신뢰성 문제는 독일인들이 현지에서 알바니아인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진술했다. 10월 중순, 사단은 자코비차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베르마흐트의 코소보 철수를 지원하며 측면을 방어하고 파르티잔과 교전했다. 탈영으로 인해 86명의 장교와 467명의 부사관, 899명의 병력만 남았으며, 이 중 약 절반이 알바니아인이었다. 10월 24일, E 집단군 사령관 알렉산더 뢰어 상급대장은 모든 알바니아인 구성원에게 무장 해제 및 석방을 명령했다. 9월 19일부터 10월 23일까지 131명의 반파시스트 게릴라가 슈미트후버의 명령에 따라 사단 구성원들에게 총살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4년 11월 1일, 사단은 해산되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전쟁 후 이 지역이 알바니아와 통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3만 명의 파르티잔이 코소보로 파견되어 알바니아 저항을 진압하면서 잔학 행위가 발생했다. 이 폭력 사태로 3,000명에서 25,000명의 코소보 알바니아인이 사망했다.일부 알바니아 소식통은 사망자 수를 36,000명에서 47,000명 사이로 추정하지만, 이는 과장된 주장이다.

1945년 5월에는 오스트리아까지 도달하여 독일 항복까지 전투를 벌였다. 사단은 서방 연합군에 항복했고, 장병들은 각자 흩어져 도주를 시도했다. 일부는 일반인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유격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슈미트후버(Schmidhuber) 사단장은 1945년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당국에 인도되었다. 그는 베오그라드 군사 법정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과 잔학 행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은 교수형이었으며, 1947년2월 27일에 처형이 집행되었다.

4. 4. 잔존 병력 재편

남은 독일군과 이전 해군 병력은 SS-상급돌격대지도자 알프레드 그라프의 지휘 아래 전투단 스칸데르베그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11월 중순에 이 지역의 다른 독일군과 함께 코소보 지역에서 철수했다. 당시 7SS 사단을 지휘했던 오토 쿰은 ''Kampfgruppe Skanderbeg''가 드라바 강변의 류보비야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강을 지키고 있던 제7SS 사단의 지휘를 받았다고 썼다. 쿰에 따르면, ''Kampfgruppe''는 1944년 12월 전반기에 류보비야 교두보의 일부로 즈보르니크와 드리냐차 마을을 점령했다. 드라바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바 강변의 브르치코로 향했고, 그곳에서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국방군 부대를 구출했다. 12월 말에 ''Kampfgruppe''의 돌격포 포대는 빈코브치의 시르미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Kampfgruppe''의 나머지는 비옐리나에 배치되었다.

1945년 1월, 살아남은 소수의 해군 병력이 32SS 의용척탄병사단 30 야누아르로 이송되었고, 이전 사단의 잔여 병력은 제7SS 사단의 제14SS 의용 산악 보병 연대 제2대대로 재편성되었다. 1945년 1월 21일, 슈미드후버는 SS-''Brigadeführer und Generalmajor der Waffen-SS''로 승진하여 제7SS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1945년 2월에 대대는 완전히 해산되었고 남은 병력은 자그레브 인근의 독일 경찰 연대에 배속되었다.

사단 자체는 군사적 실패로 간주되었다. 슈미드후버와 제21산악군단의 참모들은 사단의 실패를 전적으로 알바니아인에게 돌렸다. 슈미드후버는 알바니아인들이 15세기의 스칸데르베그 시대 이후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그와 군단 참모는 알바니아인들이 국가 또는 국가 전통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슈미드후버는 알바니아 군사적 업적의 전설은 단순한 무용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은 무장친위대가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 즉 전쟁 포로 살해 및 점령 국가에서 저지른 만행에 주요하게 연루되어 형사 조직이라는 선언적 판결을 내렸다.

1945년 5월에는 오스트리아까지 도달하여 독일 항복까지 전투를 벌였다. 사단은 서방 연합군에 항복했고, 장병들은 각자 흩어져 도주를 시도했다. 일부는 일반인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유격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슈미트후버(Schmidhuber) 사단장은 1945년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당국에 인도되었다. 그는 베오그라드 군사 법정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과 잔학 행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은 교수형이었으며, 1947년2월 27일에 처형이 집행되었다.

5. 전후 처리 및 유산

남은 독일군과 전 해군 병력은 SS-오버슈투름반퓌러 알프레드 그라프의 지휘 아래 Kampfgruppe 스칸데르베그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11월 중순에 이 지역의 다른 독일군과 함께 코소보 지역에서 철수했다. 그 후 많은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린인이 특히 협력자들과 사단 구성원이었던 지역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게 복수했다. 당시 7SS 사단을 지휘했던 오토 쿰은 자신의 강력한 변호 역사에서 ''Kampfgruppe Skanderbeg''가 드라바 강변의 류보비야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강을 지키고 있던 제7SS 사단의 지휘를 받았다고 썼다. 쿰에 따르면, ''Kampfgruppe''는 1944년 12월 전반기에 류보비야 교두보의 일부로 즈보르니크와 드리냐차 마을을 점령했다. 드라바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바 강변의 브르치코로 향했고, 그곳에서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국방군 부대를 구출했다. 12월 말에 ''Kampfgruppe''의 돌격포 포대는 빈코브치의 시르미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Kampfgruppe''의 나머지는 비옐리나에 배치되었다.

1945년 1월에 살아남은 소수의 해군 병력이 32SS 의용척탄병사단 30 야누아르로 이송되었고 이전 사단의 잔여 병력은 제7SS 사단의 제14SS 의용 산악 보병 연대 제2대대로 재편성되었다. 1945년 1월 21일, 슈미드후버는 SS-''Brigadeführer und Generalmajor der Waffen-SS''로 승진하여 제7SS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전쟁 후, 그는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5년 2월에 대대는 완전히 해산되었고 남은 병력은 자그레브 인근의 독일 경찰 연대에 배속되었다.

사단 자체는 군사적 실패로 간주되었다. 사단에서 복무하는 동안 사단 구성원 중 누구도 철십자 훈장을 받지 못했다. 슈미드후버와 제21산악군단의 참모들은 사단의 실패를 전적으로 알바니아인에게 돌렸다. 슈미드후버는 알바니아인들이 15세기의 스칸데르베그 시대 이후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그와 군단 참모는 알바니아인들이 국가 또는 국가 전통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슈미드후버는 알바니아 군사적 업적의 전설은 단순한 무용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경량 박격포로 기본적으로 그 [알바니아인]를 세상 어디든 쫓아낼 수 있습니다. 공격하는 동안 그는 훔치거나 약탈할 것을 찾을 때까지만 나아갑니다. 그에게 전쟁은 염소, 쟁기 또는 재봉틀 바퀴를 잡으면 끝납니다."라고 주장했다. 피츠툼은 그들의 군인에 대한 가장 혹독한 비판자 중 한 명이었다. 피츠툼은 히틀러에게 직접 불만을 제기했다. '현재 존재하는 알바니아 부대에게는 앞으로 철저한 훈련을 통해서도 개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심각하고 사용할 수 있는 군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피츠툼은 "알바니아 군인은 규율이 없고 비겁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피츠툼은 또한 힘러에게 분노하며, 몇 대의 비행기에 공격을 받은 후 한 대대가 해산되었고 나머지는 사라졌다고 썼다. 폴 모제스 교수는 이 사단이 독일의 전쟁 노력에 기여한 것보다 세르비아인을 상대로 저지른 잔학 행위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썼다. 코소보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데 기여한 역할에 대해 알바니아 역사학자 샤반 시나니가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는 사단이 독일을 대신하여 어떠한 추방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사단의 일부 병사들이 이에 저항하여 가니 크리제우가 이끄는 유격대에 합류하기 위해 사단을 탈영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은 무장친위대가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 즉 전쟁 포로 살해 및 점령 국가에서 저지른 만행에 주요하게 연루되어 형사 조직이라는 선언적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 무장친위대에 징집되었고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를 개인적으로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1998~1999년의 코소보 전쟁 동안, 미국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는 일부 코소보 해방군 지도자들이 이 사단의 구성원의 직계 후손이며 이념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말콤은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1945년 5월에는 오스트리아까지 도달하여 독일 항복까지 전투를 벌였다. 사단은 서방 연합군에 항복했고, 장병들은 각자 흩어져 도주를 시도했다. 일부는 일반인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유격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슈미트후버 사단장은 1945년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당국에 인도되었다. 그는 베오그라드 군사 법정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과 잔학 행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은 교수형이었으며, 1947년2월 27일에 처형이 집행되었다.

5. 1. 전범 재판

사단장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는 전쟁 범죄 혐의로 유고슬라비아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1945년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당국에 인도된 그는 베오그라드 군사 법정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및 잔학 행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은 교수형이었으며, 1947년 2월 27일에 처형이 집행되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은 무장친위대가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 즉 전쟁 포로 살해 및 점령 국가에서 저지른 만행에 주요하게 연루되어 형사 조직이라는 선언적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 무장친위대에 징집되었고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를 개인적으로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5. 2. 코소보 분쟁에 미친 영향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는 군사적 실패로 평가받는다. 사단 구성원 중 누구도 철십자 훈장을 받지 못했다. 사단장 슈미드후버는 사단의 실패를 알바니아인들의 문화적 정체와 국가 전통 부재 탓으로 돌렸다. 그는 알바니아인의 군사적 업적은 무용담일 뿐이며, 규율이 없고 비겁하다고 비판했다.

폴 모제스 교수는 이 사단이 독일의 전쟁 노력에 기여한 것보다 세르비아인을 상대로 저지른 잔학 행위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역사학자 샤반 시나니는 사단이 독일을 대신하여 유대인 추방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부 병사들은 이에 저항하여 가니 크리제우가 이끄는 유격대에 합류하기 위해 사단을 탈영했다는 보고도 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은 무장친위대가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에 연루된 형사 조직이라고 판결했다. 단, 징집되어 개인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1998~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는 일부 코소보 해방군 지도자들이 이 사단의 구성원들의 후손이며 이념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6. 부대 구성

친위대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의 주요 부대 및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 제50 무장 친위대 산악보병 연대 (알바니아 제1) (제1, 제2, 제3 대대)
  • 제51 무장 친위대 산악보병 연대 (알바니아 제2) (제1, 제2, 제3 대대)
  • 제21 SS 정찰 대대 (4개 중대)
  • 제21 SS 자원병 대전차 대대 (3개 중대)
  • 제21 SS 산악 포병 연대 (4개 대대)
  • 제21 SS 자원병 공병 대대 (3개 중대)
  • 제21 SS 예비대
  • 제21 SS 자원병 통신 대대 (3개 중대)
  • 제21 SS 산악 보급 부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수훈자는 없었다.

부대 구성원은 원래 알바니아인이었으나, 도중에 독일 해군 수병 등을 추가하여 독일인 중심으로 바뀌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