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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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흑인은 일반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원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적으로 노예 무역과 식민 지배를 겪으며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에 시달려 왔다.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 제도가 1860년대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지속되었고, 20세기 후반 민권 운동을 통해 개선을 이루었다. 흑인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아프로-아시안 등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한다. 흑인성은 문화적, 정치적 개념으로도 사용되며, 일방울 법칙과 같은 인종 분류와 관련된 논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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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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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분류 | |
개요 | |
사용 범위 | 이 용어는 아프리카계 조상을 가진 사람들을 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일부 오세아니아 지역의 사람들과 같이 피부색이 어두운 다른 인종 그룹에도 사용될 수 있다. |
인종적 분류 | |
주요 문화 | |
역사 | |
인종 관련 개념 | |
관련 용어 | |
기타 | 인종 세탁과 블랑케아미엔토는 인종적 정체성을 변형시키는 과정과 관련된 개념이다. |
오세아니아 | |
관련 주제 | |
관련 목록 | 흑인 목록 |
2. 역사
일본에서 흑인에 대한 기록은 전국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남만인이라 불리던 유럽인들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을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그 수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89] 덴쇼 천황의 유럽 파견 사절단이 아프리카에 갔을 때, 일행은 "이전에도 저 검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 것을 많이 본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동남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피부가 검은 사람으로 묶여 "흑방" 등으로 불렸다.[189]
전국 시대에 예수회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데려온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는 야스케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가신으로 등용되었다.
2. 1. 노예 무역과 식민 지배
미국 역사에서 흑인은 백인과 함께 북미 대륙에 상륙했으나,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제도를 법적으로 종식시킬 때까지 흑인 노예는 미국 사회를 왜곡시키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다.[196] 남부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은 흑인 노예를 매우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자원으로 만들었으며,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흑인을 종속 상태에 두고 백인의 기득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체계적인 차별이 지속되었다.남부에 정착한 영국인은 북부의 청교도와는 달리 큰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에서 북미 대륙에 건너왔다. 남부에는 온화한 기후와 충분한 용수와 비옥한 토지가 잘 결합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상품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여 유럽에 수출해서 귀족과 같은 생활을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북미 대륙에는 농노나 농업 노동자와 같이 무임금 노동력을 공급할 기존의 하층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어떻게 조달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노동자 수급은 흑인 노예를 수입해 농사에 투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흑인들은 아프리카의 중부·서해안 지역에서 포획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오랜 감금 생활을 거치면서 사기가 꺾이게 되었다. 또한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기존에 익숙하던 환경에서 뿌리째 뽑히는 경험을 육체적·심리적으로 거치면서 현실에 체념하고 순응하는 태도가 형성되었다.[196]
아프리카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서로 지연이나 핏줄의 연대가 없으며 언어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집단적인 반항을 덜 우려해도 되었다. 이들은 노예이므로 임금을 주거나 계약 종료로 새 사람을 구할 걱정도 없었다. 남부 백인 사회에서 노예는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어 매매는 물론 재산 상속의 중요한 항목으로 토지, 집, 가축과 함께 기록되었다. 흑인은 노예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열등한 방식으로 생활했으며, 그들이 열등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노예 지배자의 비인도적인 대우에 정당성을 제공했다.[196]
이런 생각들 때문에 심지어 지배층이 초기에는 유일하게 노예 제도를 금지하고 피지배층을 위해 헌신하는 이상적인 정부를 구성한 조지아에서도 흑인은 태생적으로 노예와 같다고 하여 금지되었다.[197] 그러나 조지아 지배층의 경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의 백인 피지배층 역시 노동과 성적 착취를 위한 노예를 원하였으며 마침내 노예 제도가 인정되고 말았다.[198][199]
남부의 평야 지역에는 대농장에서 노예를 이용해 대규모로 면화를 재배하는 농업이 지배했다. 남부의 면화는 유럽과 산업화가 진행되던 북부지역에서 대량으로 필요로 했다. 남부의 대지주들은 면화의 힘을 믿고 북부에 반기를 들어 자기네들만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에 패한 이후에도 남부의 면화 산업 의존도는 여전했다.
북부의 산업화에 남부의 면화가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북부군의 지휘 아래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 미 대통령의 선포로 노예제의 폐지가 이루어진 후에도 소작제가 도입되어 유사한 강제 노역이 여전히 시행되었다. 남북 전쟁 후 북군은 남부의 해방 노예들이 과거 자신이 일하던 농장을 벗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즉 흑인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사실상 자신이 과거에 노예로 일하던 농장을 떠나는 것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다만 이들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억압적 지위에 계속 붙들어 매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들을 소작신분으로 면화 생산에 묶어 놓으려는 백인 사회의 끈질긴 노력은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196]
흑인을 구속하고 있던 면화 생산 체제는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균열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에 그 때까지 면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남부의 경제·사회구조가 면화 재배 기술의 발달, 화학 비료의 보급, 기계화로 생산성이 크게 오르자 인력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과거와 같이 흑인의 강제 노동에 의존해 생산할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다.


북아프리카에는 여러 흑인 공동체가 존재하며, 일부는 선사 시대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른 공동체들은 역사적인 사하라 횡단 무역을 통해, 또는 7세기 아랍의 북아프리카 침략 이후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횡단 노예 무역을 통해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7][8] 18세기, 모로코 술탄 무라이 이스마일(1672~1727)은 15만 명의 흑인 병사로 구성된 군대, 즉 흑색 근위대를 조직했다.[9][10]
브라질 바이아 주립대학교의 상주 학자인 카를로스 무어에 따르면, 21세기 아랍 세계,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을 포함한 아프로-다인종 사람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다인종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확인한다. 그는 어두운 피부색의 아랍인들은 어두운 피부색의 라틴 아메리카인들과 마찬가지로, 먼 백인 조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백인으로 여긴다고 주장한다.[11]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어머니는 피부색이 어두운 누비아계 수단 여성(수단 아랍인)이었고, 아버지는 피부색이 밝은 이집트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연기자 모집 광고에 응하면서 "나는 백인이 아니지만, 완전히 흑인도 아닙니다. 제 흑인 피부는 약간 붉은 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2]
아랍 사회의 가부장적인 성격 때문에, 북아프리카 노예 무역 시대를 포함하여 아랍 남성들은 아프리카 여성 노예를 남성 노예보다 더 많이 노예로 삼았다. 여성 노예들은 종종 가사 노동과 농업에 종사했다. 남성들은 꾸란을 해석하여 남성 주인과 그의 여성 노예 간의 결혼 외 성관계를 허용한다고 해석했다(마 말라카트 아이마누쿰과 성 참조).[13][14] 이로 인해 많은 혼혈 아이들이 태어났다. 노예 여성이 아랍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면, 그녀는 '움 발라드' 즉 "아이의 어머니"로 간주되어 특권적인 권리를 부여받았다. 아이는 아버지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혼혈 아이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공유할 수 있었다.[15] 사회가 부계 사회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태어날 때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상속받아 자유롭게 태어났다.
일부 혼혈 아이들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통치자가 되었다. 예를 들어, 1578년부터 1608년까지 모로코를 통치한 술탄 아마드 알 만수르는 기술적으로 노예의 혼혈 자녀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풀라니족이었고 아버지의 후궁이었다.[15]
1991년 초, 수단 자가와 족의 비아랍인들은 아랍과 비아랍인(특히 닐로트족 혈통의 사람들)을 분리하는 아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강화의 피해자라고 증언했다.[16] 정부를 장악한 수단 아랍인들은 수단의 비아랍 시민들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를 행하고 있다고 널리 비난받았다.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민족 청소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교묘하게 아랍 연대를 조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7]
수단 아랍인들은 문화적, 언어적으로 아랍화된 수단의 원주민들로, 대부분 닐로사하라어족, 누비아어족, 쿠시트어족[19]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흑인이다. 그들의 피부색과 외모는 다른 흑인들과 유사하다.[18]
미국 대학교의 경제학자 조지 아이테이는 수단 아랍 정부가 흑인 시민에 대해 인종 차별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20] 아이테이에 따르면, "수단에서... 아랍인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흑인들을 배제했습니다 – 아랍 아파르트헤이트입니다."[21] 많은 아프리카 논평가들이 아이테이에 동참하여 수단의 아랍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했다.[22]

사하라 사막에서는 투아레그족 베르베르인들이 "흑인" 노예를 두었다. 이 포로들의 대부분은 닐로사하라어족 계통 출신이었으며, 투아레그 귀족들이 서수단(Western Sudan)의 노예 시장에서 구입하거나 습격 과정에서 얻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기원은 타마하크어 아하가르 베르베르어 단어인 ''이켈란''(단수 ''에벤헤르'')로 표시되는데, 이는 닐로사하라어족 언어만 사용하는 노예를 가리킨다. 이러한 노예들은 때때로 송하이어에서 차용된 ''벨라''라는 용어로도 알려져 있었다.[23]
마찬가지로 서사하라의 사하라위족 원주민들은 고위 카스트와 저위 카스트로 구성된 계급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부족 경계 밖에는 주변 지역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24]
2. 2. 탈식민화와 민권 운동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에서는 노예 계급이 주로 수단-에티오피아 및 케냐-소말리아 국경[25] 또는 주변 지역의 닐로트족과 반투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통틀어 ''샨켈라''[26]와 ''아도네''(영어권에서 "흑인"과 유사한 의미)[27]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 노예 중 일부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발생한 영토 분쟁 중에 포획되어 노예 상인들에게 팔렸다.[28] 이러한 전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7세기 또는 8세기의 담마트 왕국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29]이 포로들과 유사한 외모를 가진 다른 사람들은 아프로아시아어를 사용하는 귀족이나 ''사바 카이''("붉은 사람들") 또는 밝은 피부색의 노예와 대조적으로 ''차림 바리아''(검은 피부색의 노예)로 구분되었다. 반면 서구의 인종 범주 기준은 ''사바 카이''("붉은 사람들"—밝은 피부색) 또는 ''사바 티쿠르''("검은 사람들"—어두운 피부색) 아프리카의 뿔 사람들(아프로아시아어 사용자, 닐로트어 사용자 또는 반투어 사용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흑인"(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흑인" negro)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서구 사회의 인종 개념에 따른 것이다.[30][31][32]
3. 각 지역별 흑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식민 시대는 여러 부족 출신의 유럽계와 아프리카인들(남아프리카의 반투족, 코이산족) 사이에 많은 결합과 혼인을 초래하여 혼혈 아동들이 태어났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영토를 장악하면서 혼혈과 아프리카 인구를 2등 시민으로 몰아붙였다. 20세기 전반기에 백인 중심 정부는 인구를 '흑인', '백인', '아시아인'(주로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그리고 '컬러드'의 네 가지 주요 인종 집단으로 분류했다. 컬러드족은 반투족, 코이산족, 유럽계 조상의 혼혈(특히 케이프 말레이인 조상, 특히 서케이프 지역)을 포함했으며, 흑인과 백인의 정의 사이에 중간적인 정치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법적 인종 차별 시스템을 부과했다.
아파르트헤이트 관료들은 1945년 인구등록법에서 누가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복잡하고 종종 임의적인 기준을 고안했다. 하급 관리들은 분류를 강화하기 위해 테스트를 시행했다. 개인의 외모만으로 컬러드족인지 흑인인지 불분명한 경우 "연필 테스트"를 사용했다.[33] 이러한 분류는 때때로 가족을 분열시켰다.
산드라 레잉은 피부색과 머리카락 질감 때문에 당국에 의해 컬러드족으로 분류되었으나, 그녀의 부모는 적어도 3대에 걸쳐 유럽계 조상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10세에 백인 전용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그녀의 가족과 성인 생활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2008년 전기 드라마 영화 ''스킨''의 주인공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컬러드"로 분류된 사람들은 억압과 차별을 받았지만, 제한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전반적으로 "흑인"으로 분류된 사람들보다 약간 더 나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흑인과 컬러드족이 백인과 분리된 지역에 거주하도록 요구하여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규모 타운십을 흑인 지역으로 조성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시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은 이 나라를 "비인종주의 민주주의"로 선언했다.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ANC 정부는 흑인을 위한 적극적 조치 정책을 지원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흑인"을 "아프리카인", "컬러드", "아시아인"을 포함하도록 정의했다. 일부 적극적 조치 정책은 특정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면에서 "아프리카인"을 "컬러드"보다 우선시한다.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분류된 일부 남아프리카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컬러드"가 자신들만큼 고통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컬러드" 남아프리카인들은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는 충분히 백인이 아니었고,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하에서는 충분히 흑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딜레마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4][35][36]
200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고등법원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거주했던 중국계 남아프리카인(그리고 그들의 자손)이 인종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적극적 조치 혜택을 받는 목적으로만 "흑인"으로 재분류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입국한 중국인은 이러한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37]
외모 외에도 "컬러드"는 보통 언어로 "흑인"과 구별할 수 있다. 대부분은 줄루어 또는 코사어와 같은 반투어와는 달리 아프리칸스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또한 반투족 이름보다 유럽식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38]
일본에서 흑인에 대한 기록은 전국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남만인이라고 불리던 유럽인들은 종자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그 수가 적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덴쇼 천황의 유럽 파견 사절단이 아프리카에 갔을 때, 일행은 "이전에도 저 검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 것을 많이 본 적이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동남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피부가 검은 사람으로 묶여 "흑방" 등으로 불렸다.[189] 예수회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데려온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는 야스케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흑인”의 동의어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로서 “아프리카계”가 사용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의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은 아프리카계에서 제외된다.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아프리카계”는 단순히 인종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예의 후손이라는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민족 집단으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Debra Dickerson영어은 “흑인[190]”이나 “아프리카계[191]”라는 용어는 노예와 그 후손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흑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흑인이 아니다[190][192].
1967년까지, 일부 주에서는 조상 중 한 명이라도 흑인인 사람은 흑인으로 간주하는 “일방울 법칙”이 있었다[193].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버락 오바마나 할리 베리, 흑인 쿼터에 불과한 타이거 우즈 등이 흑인으로 간주되는 것도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194].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애보리진과 토레스 해협 제도 주민)이 흑인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195]
3. 1. 아프리카
본래 흑인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도 해당 지역의 인구는 주로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전근대 시절 유럽인들도 흑인들을 인종차별하였으나, 흑인 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사람들은 중동의 이슬람인들이었다. 이슬람인들은 흑인 노예 무역의 기득권[202]을 가졌으며,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한 흑인들조차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노예로 삼았다. 이슬람을 전파한 아랍어에서 흑인은 노예(Abeed)로 불렸으며, 이븐 할둔은 흑인을 짐승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노예 종족으로 기록하였다.[203] 이슬람인들은 흑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성욕을 지녔다고 생각하여, 일반적[204]으로 흑인 남성은 거세를 당했다. 흑인 여성에게서 태어난 자녀들 대다수는 출생 직후 살해되었기에, 유럽과 아메리카로 끌려간 흑인 노예들의 후손은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반면, 중동으로 팔려간 흑인들의 후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중동의 노예 무역은 주로 홍해와 사하라, 인도양에서 이루어졌으며, 파티마 칼리파국 같은 이슬람 국가들은 이전 지배층과 달리 흑인들을 배신하고 수만 명의 흑인 군대를 학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학살과 배신 때문에 이슬람 제국 전성기 때 20~30만 명에 달하던 흑인 노예 군대는 중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슬람 치하에서 흑인들은 결혼과 가족을 가질 권리를 탄압받았고, 후손을 남기기도 어려웠다. 중동에서 대부분의 흑인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운이 좋은 일부는 인도나 중국으로 팔려 가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는 빈곤, 전쟁, 독재 등의 문제로 제대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인프라 및 위생 부재 속에 많은 흑인 인구가 에이즈 창궐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겪고 있다. 흑인 사회 내부에서도 차별이 존재하여, 르완다 학살 당시 투치족은 바퀴벌레 취급을 받았고, 피그미족은 사냥감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3. 1. 1.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1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내세워 백인을 옹호하였고 흑인을 차별하였다. 1970년대에 가장 심했는데, 흑인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흑인에게는 재판 없이 강제로 농장의 노예가 되는 현상도 있었다.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는 폐지되었고, 흑인 인권은 빠르게 신장되었다.[33]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식민 시대는 여러 부족 출신의 유럽계(유럽 민족 집단)와 아프리카인들(남아프리카의 반투족과 코이산족) 사이에 많은 결합과 혼인을 초래하여 혼혈 아동들이 태어났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영토를 장악하면서 혼혈과 아프리카 인구를 2등 시민으로 몰아붙였다. 20세기 전반기에 백인 중심 정부는 인구를 '흑인', '백인', '아시아인'(주로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그리고 '컬러드'의 네 가지 주요 인종 집단으로 분류했다. 컬러드족은 반투족, 코이산족, 유럽계 조상의 혼혈(특히 케이프 말레이인 조상, 특히 서케이프 지역)을 포함했다. 컬러드족의 정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과 백인의 정의 사이에 중간적인 정치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알려진 법률의 복합체인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라는 법적 인종 차별 시스템을 부과했다.
아파르트헤이트 관료들은 1945년 인구등록법에서 누가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복잡하고 종종 임의적인 기준을 고안했다. 하급 관리들은 분류를 강화하기 위해 테스트를 시행했다. 개인의 외모만으로 컬러드족인지 흑인인지 불분명한 경우 "연필 테스트"를 사용했다. 연필을 머리카락에 꽂아서 매끄러운 머리카락처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곱슬머리가 연필을 잡을 만큼 충분히 곱슬거리는지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흑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분류는 때때로 가족을 분열시켰다.
산드라 레잉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피부색과 머리카락 질감 때문에 당국에 의해 컬러드족으로 분류된 남아프리카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적어도 3대에 걸쳐 유럽계 조상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10세에 백인 전용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외모를 바탕으로 한 관리들의 결정은 그녀의 가족과 성인 생활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녀는 수많은 상을 수상한 2008년 전기 드라마 영화 ''스킨''의 주인공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컬러드"로 분류된 사람들은 억압과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제한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전반적으로 "흑인"으로 분류된 사람들보다 약간 더 나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흑인과 컬러드족이 백인과 분리된 지역에 거주하도록 요구하여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규모 타운십을 흑인 지역으로 조성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시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은 이 나라를 "비인종주의 민주주의"로 선언했다.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ANC 정부는 흑인을 위한 적극적 조치 정책을 지원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흑인"을 "아프리카인", "컬러드", "아시아인"을 포함하도록 정의했다. 일부 적극적 조치 정책은 특정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면에서 "아프리카인"을 "컬러드"보다 우선시한다.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분류된 일부 남아프리카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컬러드"가 자신들만큼 고통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컬러드" 남아프리카인들은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는 충분히 백인이 아니었고,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하에서는 충분히 흑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딜레마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4][35][36]
200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고등법원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거주했던 중국계 남아프리카인(그리고 그들의 자손)이 인종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적극적 조치 혜택을 받는 목적으로만 "흑인"으로 재분류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입국한 중국인은 이러한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37]
외모 외에도 "컬러드"는 보통 언어로 "흑인"과 구별할 수 있다. 대부분은 줄루어 또는 코사어와 같은 반투어와는 달리 아프리칸스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또한 반투족 이름보다 유럽식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38]
3. 1. 2. 북아프리카
북아프리카에는 여러 흑인 공동체가 존재하며, 일부는 선사 시대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른 공동체들은 역사적인 사하라 횡단 무역을 통해, 또는 7세기 아랍의 북아프리카 침략 이후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횡단 노예 무역을 통해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7][8] 18세기, 모로코 술탄 무라이 이스마일 "전사 왕"(1672~1727)은 15만 명의 흑인 병사로 구성된 군대인 흑색 근위대를 조직했다.[9][10]브라질 바이아 주립대학교의 상주 학자인 카를로스 무어에 따르면, 21세기 아랍 세계에서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을 포함한 아프로-다인종 사람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다인종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확인한다. 그는 어두운 피부색의 아랍인들은 어두운 피부색의 라틴 아메리카인들과 마찬가지로, 먼 백인 조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백인으로 여긴다고 주장한다.[11]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어머니는 피부색이 어두운 누비아계 수단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피부색이 밝은 이집트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연기자 모집 광고에 응하면서 "나는 백인이 아니지만, 완전히 흑인도 아닙니다. 제 흑인 피부는 약간 붉은 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2]
아랍 사회의 가부장적인 성격 때문에, 북아프리카 노예 무역 시대를 포함하여 아랍 남성들은 아프리카 여성 노예를 남성 노예보다 더 많이 노예로 삼았다. 여성 노예들은 종종 가사 노동과 농업에 종사했다. 남성들은 꾸란을 해석하여 남성 주인과 그의 여성 노예 간의 결혼 외 성관계를 허용한다고 해석했다(마 말라카트 아이마누쿰과 성 참조).[13][14] 이로 인해 많은 혼혈 아이들이 태어났다. 노예 여성이 아랍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면, '움 발라드'(아이의 어머니)로 간주되어 특권적인 권리를 부여받았다. 아이는 아버지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혼혈 아이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공유할 수 있었다.[15] 사회가 부계 사회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태어날 때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상속받아 자유롭게 태어났다.
일부 혼혈 아이들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통치자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578년부터 1608년까지 모로코를 통치한 술탄 아마드 알 만수르는 그의 어머니가 풀라니족 출신이자 아버지의 후궁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노예의 혼혈 자녀는 아니었다.[15]
1991년 초, 수단 자가와 족의 비아랍인들은 아랍과 비아랍인(특히 닐로트족 혈통의 사람들)을 분리하는 아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 강화되면서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16] 수단 아랍인들은 수단의 비아랍 시민들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를 행하고 있다고 널리 비난받았으며,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민족 청소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교묘하게 아랍 연대를 조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7]
수단 아랍인들은 문화적, 언어적으로 아랍화된 수단의 원주민들로, 대부분 닐로사하라어족, 누비아어족, 쿠시트어족[19]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흑인이다. 그들의 피부색과 외모는 다른 흑인들과 유사하다.[18]
미국 대학교의 경제학자 조지 아이테이는 수단 아랍 정부가 흑인 시민에 대해 인종 차별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20] 아이테이에 따르면, "수단에서... 아랍인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흑인들을 배제했습니다 – 아랍 아파르트헤이트입니다."[21] 많은 아프리카 논평가들이 아이테이에 동참하여 수단의 아랍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했다.[22]
사하라 사막에서는 투아레그족 베르베르인들이 "흑인" 노예를 두었다. 이 포로들의 대부분은 닐로사하라어족 계통 출신이었으며, 투아레그 귀족들이 서수단(Western Sudan)의 노예 시장에서 구입하거나 습격 과정에서 얻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기원은 타마하크어(Tamahaq language) 아하가르 베르베르어(Ahaggar Berber) 단어인 ''이켈란(Ikelan, Ibenheren)''(단수 ''에벤헤르(Ébenher)'')로 표시되는데, 이는 닐로사하라어족 언어만 사용하는 노예를 가리킨다. 이러한 노예들은 때때로 송하이어에서 차용된 ''벨라(Bella)''라는 용어로도 알려져 있었다.[23]
마찬가지로 서사하라(Western Sahara)의 사하라위족 원주민들은 고위 카스트와 저위 카스트로 구성된 계급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부족 경계 밖에는 주변 지역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24]
3. 2. 아메리카
미국은 1861년까지 흑인 노예 제도를 시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흑인들의 권리는 향상되었지만, 일부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미국의 사회문화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인종 문제이다. 산업화와 함께 선진 산업국에서 나타나는 사회문제는 미국에서 인종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문제 해결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20세기 후반, 흑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백인 헤게모니에 저항하며 자신들이 열등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맞서 싸웠다.[196]브라질에는 흑인이 많으며, 주로 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펠레, 호나우두 등 유명 선수들이 흑인이다.[169] 브라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한 국가로, 1492년부터 1888년까지 약 55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강제 이송되었다.[170] 오늘날 브라질에는 약 1억 5천만 명의 흑인 후손들이 살고 있다.[171]

멕시코에서는 2015년 예비 조사에서 아프로 멕시코인들이 처음으로 자기 확인을 할 수 있었으며, 총 140만 명(멕시코 전체 인구의 1.2%)이 기록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게레로주의 코스타 치카 지역에 거주한다.[168] 도미니카 공화국과 푸에르토리코에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피부색 외에도 얼굴 특징이나 머리카락 질감 등 다양한 신체적 특징으로 흑인을 분류한다.[172][173] 흑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사회적 지위, 사회경제적 변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블랑케아미엔토(blanqueamiento, 백인화)"라는 개념도 작용한다.[173][174]
아프로콜롬비아인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아프리카계 디아스포라 인구이다. 베네수엘라 흑인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직접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의 후손이며,[188] 탐보르와 같은 음악 장르와 요리 등 베네수엘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아프리카 유산을 가지고 있다.
3. 2. 1. 미국
미국은 1861년까지 흑인에 대한 노예 제도가 실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흑인들의 권리는 향상되었지만, 지금도 일부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미국의 사회문화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로 인종 문제를 꼽는다. 산업화와 함께 선진 산업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의 경우,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모든 것이 인종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어 문제 해결을 복잡하게 만든다. 현대 미국 사회에서 인종 문제는 과거 노예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 백인이 주도하던 인종 관련 아이디어는 20세기 후반 들어 흑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 경제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백인의 헤게모니에 저항하게 되었다.[196]미국 역사에서 흑인은 백인과 함께 북미 대륙에 상륙했으나, 건국 초기부터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제도를 법적으로 종식시킬 때까지 흑인 노예는 미국 사회를 왜곡시키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남부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은 흑인 노예를 매우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자원으로 만들었으며,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흑인을 종속 상태에 두고 백인의 기득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체계적인 차별이 지속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서로 지연이나 핏줄의 연대가 없으며 언어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집단적인 반항을 덜 우려해도 되었다. 이들은 노예이므로 임금을 주거나 계약 종료로 새 사람을 구할 걱정도 없었다. 남부 백인 사회에서 노예는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어 매매는 물론 재산 상속의 중요한 항목으로 토지, 집, 가축과 함께 기록되었다. 요컨대 노예제도와 흑인에 대한 열등한 이미지는 서로를 정당화시켰다. 흑인은 노예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열등한 방식으로 생활했으며, 그들이 열등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노예 지배자의 비인도적인 대우에 정당성을 제공했다.[196]
이런 생각들 때문에 심지어 지배층이 초기에는 유일하게 노예 제도를 금지하고 피지배층을 위해 헌신하는 이상적인 정부를 구성한 조지아에서도 흑인은 태생적으로 노예와 같다고 하여 금지되었다.[197]
북부의 산업화에 남부의 면화가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북부군의 지휘 아래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 미 대통령의 선포로 노예제의 폐지가 이루어진 후에도 소작제(share-cropper)가 도입되어 유사한 강제 노역이 여전히 시행되었다. 남북 전쟁 후 북군은 남부의 해방 노예들이 과거 자신이 일하던 농장을 벗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북부 지방의 상공인들에게 면화는 필수적이었고, 남부 백인들을 망하게 하면 그들의 장사 기반도 망하는 것이었으므로, 남부 경제의 기반인 면화 생산과 흑인 노예 제도를 없애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즉 흑인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사실상 자신이 과거에 노예로 일하던 농장을 떠나는 것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다만 이들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억압적 지위에 계속 붙들어 매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들을 소작 신분으로 면화 생산에 묶어 놓으려는 백인 사회의 끈질긴 노력은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196]
흑인을 구속하고 있던 면화 생산 체제는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균열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 그 때까지 면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남부의 경제·사회구조가 면화 재배 기술의 발달, 화학 비료의 보급, 기계화로 생산성이 크게 오르자 인력 수요가 감소하면서 과거와 같이 흑인의 강제 노동에 의존해 생산할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다. 이에 흑인은 비로소 새로운 사회적 역할에 뛰어들도록 허락되었으며, 이와 함께 흑인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에는 흑인규범(Black Codes)이나 짐크로 법 같이 흑인과 백인 간의 접촉을 차단하고 그들에게 열등한 처우를 강요하는 사회적 규범이 폭넓게 시행되었다. 백인들에게 이러한 억압적 규정에 저항하는 흑인을 공권력은 동원하여 처벌하는 것은 물론, 사적으로 벌을 주는 린치(lynching) 방식으로 규제를 가해, 흑인이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사실상 차단했다.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한 예술 장으로 19세기 후반에 민스트럴 쇼(흑인 분장악극)라 불리는 희가극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이 악극에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외설적이거나 비속한 내용, 사회 관습에 대한 조롱, 자유로운 감정 분출이 용인되었고, 백인은 흑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해 자신의 결함적인 현실이나 불만을 배설했다. 이것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의 정당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만든 인종주의라는 불합리한 체제에 대한 풍자를 통해 마음이 가벼워지는 감정적인 승화를 경험하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었다고 분석된다.
현재의 흑인 문제에는 오랜 인종주의적 차별 결과 누적된 빈곤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요인과, 여전히 상당 부분 존재하는 인종주의적 차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이후 이것이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인종주의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어려워졌다. 1960년대 왕성했던 인종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공적인 노력은 추진력을 잃고 퇴보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인종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인 흑인의 지위는 지난 수십 년간 정체 상태를 보이며, 새로운 이민자에게 항상 '윗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 상황을 계속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196]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2012년 재선에도 성공했는데, 이는 오사마 빈 라덴을 사냥하는 데에 성공한 군사적 공로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오바마는 2016년에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2021년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조 바이든[209]은 로이드 오스틴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서 '흑인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취지를 밝혔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국방부 장관이다.

미국에서 흑인성(Blackness)이란 개념은 주류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정치,[159][160] 그리고 가치관과 얼마나 자신을 동일시하는가의 정도로 설명될 수 있다.[161] 어느 정도까지는 이 개념이 인종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성향,[159][160] 문화 및 행동에 대한 것이다. 흑인성은 "흑인처럼 행동하지 않기"와 대조될 수 있는데, 이는 흑인 미국인들이 유행, 방언, 음악 취향,[162] 그리고 상당수의 흑인 청소년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학업 성취도와 관련하여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의 특성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63]
미국에서 흑인성이 종종 정치적[159][160]이고 문화적인 윤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흑인성이라는 개념은 비흑인들에게도 확장될 수 있다.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한때 빌 클린턴(Bill Clinton)을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이라고 묘사했는데,[164]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는 "흑인성의 거의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165] 클린턴은 이러한 칭호를 받아들였다.[166]
흑인성에 대한 질문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의 2008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도 제기되었다. 해설가들은 흑인 조상을 가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오바마가 "충분히 흑인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어머니가 백인 미국인이고 아버지가 케냐 출신의 흑인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배경이 전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156][158] 오바마는 자신을 흑인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밝혔다.[167]
3. 2. 2. 브라질
브라질에는 흑인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주로 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펠레, 호나우두와 같은 유명한 스타 선수들이 흑인이다.[169] 브라질은 1492년부터 1888년까지 대서양 노예 무역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강제로 이송된 약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 중 550만 명을 받아들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한 국가였다.[170] 오늘날 브라질에는 그들의 후손 약 1억 5천만 명이 살고 있다.[171]브라질에서의 인종 개념은 복잡하다. 브라질에서는 외모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며, 머리 색깔, 머리 질감, 눈 색깔, 피부색의 다양한 조합에 따라 12가지가 넘는 인종 범주가 인정된다.[175]
학자들은 브라질에서 사회적 지위가 인종 분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상향 이동성과 교육을 달성하면 개인이 더 밝은 피부색의 범주로 분류된다고 여겨지지만, 일부 학자들은 ''프레투(preto)''(흑인)로 인식되는 사람은 부 또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흑인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176][177]
연도 | 백인 | 파르두(갈색 피부) | 흑인 |
---|---|---|---|
1835 | 24.4% | 18.2% | 51.4% |
2000 | 53.7% | 38.5% | 6.2% |
2010 | 48.4% | 42.4% | 6.7% |
1500년부터 1850년까지 약 35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브라질로 강제로 이송되었다.[179] 브라질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아프리카계 혈통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미국과는 달리, 브라질에서는 공식적인 인종 혼혈 금지나 인종 차별 법이 없었으며, 혼혈 결혼이 널리 퍼졌다. 19세기에는 백색화라는 철학이 등장하여 혼혈 사람들의 백인 인구로의 동화를 추구했다.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6.2%가 흑인, 40%가 파르두, 55%가 백인으로 자신을 식별했다.[175] 2007년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중산층 백인 브라질 인구의 최소 29%가 최근 아프리카계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81] 2022년 인구 조사에서는 흑인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10.2%로 증가했으며, 혼혈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5.3%로 증가했다.[182]
브라질의 인종 민주주의 철학은 경제적 문제를 바탕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소득 불균형이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이며, 상위 10%는 거의 전적으로 백인 또는 유럽계 혈통이 우세하다. 빈곤층의 70%가 흑인과 기타 유색인종이다.[183] 2014년 브라질의 흑인과 혼혈 인종의 소득은 백인의 평균 58% 수준이었다.[184]
부분적으로 아프리카 유산을 가진 브라질인이 인구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지만,[186] 정치인으로 선출된 흑인은 거의 없다.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패턴으로 인해 일부 학자 및 활동가들은 모든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포괄하는 포르투갈어 용어 ''negro''를 사용할 것을 옹호하고 있다.[187]
3. 2. 3. 기타 중남미 및 카리브 제도 국가
2020년 인구 조사를 위한 2015년 예비 조사에서 멕시코 아프로 멕시코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확인을 할 수 있었으며, 총 140만 명(멕시코 전체 인구의 1.2%)이 기록되었다. 대다수의 아프로 멕시코인들은 게레로주의 코스타 치카 지역에 거주한다.[168]최초의 아프로 도미니카인 노예들은 대서양 노예 무역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이송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푸에르토리코로 수송했다. 아프로푸에르토리코인들은 부분적으로 이 섬의 식민화에 그 조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1492년부터 1888년까지 대서양 노예 무역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약 1200만 명이 강제로 이송되었다. 이 중 1150만 명이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로 이송되었다.[169]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한 국가는 브라질(550만 명)이었고, 그 뒤를 영국령 카리브해(276만 명), 스페인령 카리브해 및 스페인 본토(159만 명), 프랑스령 카리브해(132만 명)가 뒤따랐다.[170] 오늘날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는 그들의 후손 약 1억 5천만 명이 살고 있다.[171]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피부색 외에도 얼굴 특징이나 머리카락 질감과 같은 다른 신체적 특징들이 흑인으로 분류하는 데 다양하게 사용된다.[172][173]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흑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블랑케아미엔토(blanqueamiento, 백인화)"와 관련 개념을 고려할 때 사회적 지위와 사회경제적 변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173][174]
아프로콜롬비아인은 아프로브라질인과 아프로아이티인 다음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아프리카계 디아스포라 인구다.
대부분의 베네수엘라 흑인들은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베네수엘라로 직접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의 후손이다.[188] 다른 사람들은 안틸레스 제도와 콜롬비아 출신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많은 흑인들이 독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여러 명이 영웅이 되었다. 탐보르(Tambor)와 같이 식민지 시대 흑인 사회에서 유래한 음악 장르나 야네라 음악(Llanera music) 또는 가이타 술리아나(Gaita zuliana)처럼 베네수엘라 문화에는 아프리카 문화의 깊이 뿌리내린 유산이 있으며, 이들 음악은 문화 유산에 기여하는 세 가지 주요 민족의 융합을 보여준다. 또한 흑인의 유산은 이 나라의 요리에도 나타난다.
바를로벤토 지역과 볼리바르 주의 일부 지역, 그리고 다른 작은 마을들에는 흑인 공동체가 있다. 또한 나머지 베네수엘라에서는 일반 주민들과 평화롭게 함께 살고 있다. 현재 흑인들은 베네수엘라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혼혈이다.
3. 3. 유럽
유럽에는 다양한 흑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프랑스에는 약 250만~500만 명[75][76], 독일에는 약 백만 명[77], 포르투갈에는 최소 232,000명의 흑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네덜란드에는 흑인 아프리카계 또는 아프로-카리브계 혈통을 가진 아프로-네덜란드인 거주민이 있으며, 상당한 규모의 카보베르데 및 기타 아프리카계 커뮤니티도 존재한다.
"무어인(Moors)"은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나 이베리아 반도에 살았던 아랍인(Arab people)이나 베르베르인(Berber people) 혈통의 무슬림(Muslim)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83] 7세기 이스티도르(Isidore of Seville)는 "마우루스(Maurus)"가 그리스어 "마우론(mauron)"(검은색)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85]
스페인에는 약 68만 3천 명의 아프로 스페인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1년 인구 조사 당시 영국에는 백만 명이 넘는 흑인 인구가 있었다.[86] 영국은 2차 세계 대전 후 카리브해 출신 노동자들의 이민을 장려했으며, 이들을 "윈드러시 세대"라고 부른다.
소비에트 연방은 1960년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후 많은 아프리카 시민들에게 유학 기회를 제공했다.[88][89]
오스만 제국의 노예 무역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의 울치니에는 흑인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90]
3. 3. 1. 서유럽
프랑스에서는 인종적 배경에 대한 인구조사가 불법이지만, 약 250만~500만 명의 흑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75][76]
2020년 기준으로 독일에는 약 백만 명의 흑인이 거주하고 있다.[77]
아프로-네덜란드인은 흑인 아프리카계 또는 아프로-카리브계 혈통을 가진 네덜란드 거주민이다. 이들은 주로 과거와 현재 네덜란드 해외 영토인 아루바, 보네르, 퀴라소, 신트마르턴 및 수리남 출신이다. 네덜란드에는 상당한 규모의 카보베르데 및 기타 아프리카계 커뮤니티도 있다.
2021년 기준으로 최소 232,000명의 최근 흑인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 사람들이 포르투갈에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리스본, 포르투, 코임브라 지역에 거주한다. 포르투갈은 인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므로, 이 추정치에는 2021년 기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시민권을 소지한 사람 또는 2008년부터 2021년까지 포르투갈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만 포함되며, 따라서 후손, 더 먼 아프리카 조상을 가진 사람 또는 수 세대 전에 포르투갈에 정착하여 현재 포르투갈 시민이 된 사람은 제외된다.[78][79]
"무어인(Moors)"이라는 용어는 유럽에서, 특히 북아프리카나 이베리아 반도에 살았던 아랍인(Arab people)이나 베르베르인(Berber people) 혈통의 무슬림(Muslim)들을 가리키는 더 넓고 다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83] 무어인들은 독립적이거나 자기 정의적인 민족(ethnonym) 집단이 아니었다.[84] 중세와 근세 유럽인들은 아랍인, 베르베르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 유럽인 등 무슬림들에게 이 이름을 붙였다.[81]
7세기에 저술한 이스티도르(Isidore of Seville)는 라틴어 단어 "마우루스(Maurus)"가 그리스어 "마우론(mauron)", μαύρον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검은색"을 뜻한다. 실제로 이시도르가 그의 『어원학(Etymologies)』을 쓸 무렵에는 "마우루스" 또는 "무어인"이 라틴어에서 형용사가 되어 "그리스인들은 검은 것을 마우론이라고 부른다"는 뜻이 되었다. "이스티도르 시대에 무어인들은 정의상 흑인이었다..."[85]
아프로 스페인인은 서아프리카(West Africa)/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 혈통의 스페인 국민이다. 오늘날 그들은 주로 카메룬(Cameroon),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 가나(Ghana), 감비아(Gambia), 말리(Mali), 나이지리아(Nigeria), 세네갈(Senegal) 출신이다. 또한 스페인에서 태어난 많은 아프로 스페인인들은 전 스페인 식민지였던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 출신이다. 현재 스페인(Spain)에는 약 68만 3천 명의 아프로 스페인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01년 인구 조사 당시 영국에는 백만 명이 넘는 흑인 인구가 있었으며, 전체 인구의 1%가 "흑인 카리브해 출신", 0.8%가 "흑인 아프리카 출신", 0.2%가 "기타 흑인"으로 자신을 묘사했다.[86] 영국은 2차 세계 대전 후 카리브해 출신 노동자들의 이민을 장려했다. 최초의 상징적인 사건은 ''엠파이어 윈드러시''호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1948년부터 1970년 사이에 이주한 사람들은 "윈드러시 세대"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 선호되는 포괄적 용어는 "흑인, 아시아계 및 소수 민족"(Black, Asian and minority ethnic, BAME)이지만, 때로는 "흑인"이라는 용어가 인종차별에 대한 통합된 반대를 표현하기 위해 단독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주로 영국 아시아계 구성원으로 시작한 사우스올 흑인 여성 단체와 "아프리카, 아프리카-카리브해 및 아시아계 출신" 회원으로 구성된 영국 국립 흑인 경찰 협회가 있다.[87]
3. 3. 2. 동유럽
1960년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많은 아프리카 시민들에게 러시아에서 유학할 기회를 제공했다. 40년 동안 약 400,000명의 여러 아프리카 국가 출신 학생들이, 많은 흑인 아프리카인들을 포함하여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88][89] 이것은 소비에트 연방을 넘어 동구권의 여러 국가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번성했던 노예 무역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의 해안 도시 울치니에는 독자적인 흑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90] 1878년 당시 이 공동체는 약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91]
3. 4. 아시아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 상인들이 조선 선조를 알현했을 때, 모잠비크 출신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있었다. 선조는 이들을 신기하게 여겼고, 상인들은 이들을 선조에게 바쳤다. 선조는 이 흑인들을 이순신에게 하사하여 조선 수군으로 복무하게 했다. 이들은 "해귀"라 불렸으며,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왜군 안택선 바닥에 구멍을 뚫는 임무를 수행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남은 흑인들은 벼슬을 받고 병졸들을 훈련시키는 교관 임무를 수행했다.일본에서 흑인에 대한 기록은 전국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남만인이라고 불리던 유럽인들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을 일본에 데려왔는데, 그 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덴쇼 천황의 유럽 파견 사절단이 아프리카에 갔을 때, 일행은 "이전에도 저 검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 것을 많이 본 적이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동남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피부가 검은 사람으로 묶여 "흑방" 등으로 불렸다.[189] 예수회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데려온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는 야스케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아프로-아시안" 또는 "아프리카계 아시안"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 혈통이 혼합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블랙 아시안" 또는 "블레이션(Blasians)"이라고도 불린다.[39] 역사적으로 아프로-아시안 인구는 인류 이동과 사회 갈등으로 인해 소외되어 왔다.[40]
3. 4. 1. 서아시아
전근대 시절, 유럽의 백인들뿐만 아니라 중동의 이슬람인들도 흑인들을 인종차별했다. 특히 이슬람인들은 흑인 노예 무역의 주요 세력이었으며,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한 흑인들조차 노예로 삼았다.[202] 아랍어에서 흑인은 '노예(Abeed)'로 불렸으며, 이븐 할둔은 흑인을 짐승과 비슷한 노예 종족으로 기록했다.[203] 이슬람인들은 흑인들이 통제 불가능한 성욕을 가졌다고 여겨 흑인들을 거세했다.[204] 흑인 노예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살해되었기 때문에, 중동으로 끌려간 흑인들의 후손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중동의 노예 무역은 홍해, 사하라, 인도양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파티마 칼리파국과 같은 이슬람 국가는 흑인 군대를 학살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때 수십만 명에 달했던 흑인 노예 군대는 중동에서 사라졌다. 흑인들은 결혼과 가족을 가질 권리를 탄압받았고, 후손을 남기기도 어려웠다. 운이 좋은 흑인들은 인도나 중국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중세 아랍 세계에서 "흑인"은 잔지뿐만 아니라 주트, 신디족, 인도 아대륙 출신 인도인들도 포함했다.[41] 650년 이슬람교의 출현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천만 명에서 1천 8백만 명의 흑인 아프리카인들이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상들에 의해 아라비아 반도와 인접 국가들로 끌려갔다.[42] 이는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 수를 훨씬 능가한다.[43] 사우디아라비아의 노예 제도와 예멘의 노예 제도는 1962년에, 두바이의 노예 제도는 1963년에, 오만의 노예 제도는 1970년에 폐지되었다.[44]
상인들은 여성 노예를 선호했기 때문에 남성 노예보다 더 많은 여성 노예가 수송되었다. 남성 노예들은 하렘 경비원으로 일하기 위해 거세당했다. 강제 노역으로 인한 흑인 아프리카 노예들의 사망률은 높았다. 여성 노예와 아랍인 소유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은 부계 혈족 제도에 따라 아랍인 가족에 동화되었다.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와 인접 국가들에는 독특한 아프로-아랍 공동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45][46]
아프로-이라크인과 같이 약 120만 명의 흑인이 있다고 보고된 이라크에서는, 차별의 역사를 가진 흑인 공동체들이 정부로부터 소수 민족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47] 일반적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인접 국가들에서 이러한 공동체 대부분은 자신들을 흑인이자 아랍인으로 동시에 규정한다.[48]
아프로-이란인은 이란에 거주하는 흑인 아프리카계 사람들이다. 카자르 왕조 시대에 많은 부유한 가정들이 흑인 아프리카 여성과 어린이들을 가사노동을 위해 노예로 들여왔다. 이러한 노예 노동은 주로 아프리카 대호수를 따라 거주하던 반투어를 사용하는 잔지(Zanj) 사람들에게서 끌어왔다.[49][50]
3. 4. 2. 이스라엘


이스라엘에는 약 15만 명의 동아프리카계 흑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2%가 조금 넘는 수치이다. 이 중 대다수인 약 12만 명은 베타 이스라엘인이며,[51] 대부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에티오피아에서 온 최근 이민자들이다.[52] 이스라엘에는 20세기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후손들로 구성된 예루살렘의 아프리카계 히브리 이스라엘인 운동 신자 5,000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네게브 지역 디모나의 특정 지역에 거주한다. 영국, 캐나다, 미국 출신의 흑인 유대교 개종자들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약 6만 명의 비유대교 아프리카 이민자들도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난민 신청을 한 상태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수단과 에리트레아의 여러 지역 출신이며, 특히 남부 누바 산맥의 니제르-콩고어를 사용하는 누바 부족 사람들이 많고, 불법 이민자들도 일부 있다.[53][54]
3. 4. 3. 터키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수만 명의 잔지 노예들이 노예 상인들에 의해 안탈리아와 이스탄불 사이 농장과 농업 지역으로 끌려왔다. 이는 현재 터키의 아프로-튀르크 인구의 기원이 되었다.[55] 그들의 후손 중 일부는 그 지역에 남았고, 많은 이들이 더 큰 도시와 마을로 이주했다. 다른 흑인 노예들은 크레타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그들 또는 그들의 후손은 1923년 그리스와 터키 간 인구 교환을 통해, 또는 일자리를 찾아 아이발릭에서 간접적으로 이즈미르 지역에 도착했다.[56]
1990년대 후반 이후 터키는 상당한 규모의 흑인 이민자 인구를 수용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가나, 에티오피아, 콩고민주공화국, 수단, 나이지리아, 케냐,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세네갈 출신의 현대 이민자들이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5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터키에 거주하며, 그중 약 25%가 이스탄불에 거주한다.[57] 다른 연구에 따르면 터키 아프리카인 대다수는 이스탄불에 거주하며, 탈라바시, 돌라프데레, 쿰카피, 예니카피, 쿠르툴루슈가 아프리카인 밀집 거주 지역이다.[58]
터키의 아프리카 이민자 대부분은 유럽으로 더 이동하기 위해 터키에 온다. 동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은 대개 난민이며,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 이민은 경제적 요인이 큰 것으로 보고된다.[58] 터키의 아프리카 이민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 특히 현지인들의 인종차별과 이민 반대에 직면하는 것으로 보고된다.[59]
3. 4. 4. 남아시아

시디족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민족 집단으로, 동아프리카의 반투족에서 기원한다. 이들은 상인, 선원, 강제 노역자, 노예 또는 용병으로 활동했다. 시디족 인구는 현재 27만 명에서 35만 명으로 추산되며, 대부분 인도의 카르나타카주, 구자라트주, 하이데라바드와 파키스탄의 마크란과 카라치에 거주한다.[60] 파키스탄 남서부 신드주와 발루치스탄주의 마크란 지역에서는 이들 반투족 후손들을 마크라니라고 부른다.[61] 1960년대 신드주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흑인 권력" 운동이 있었으며, 많은 시디족은 자신의 아프리카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기념한다.[62][63]
3. 4. 5. 동남아시아
네그리토족은 서로 관련이 없는 다양한 민족들의 집합체이다. 한때 밀접하게 관련된 그룹들의 단일한 별개 인구로 간주되었지만,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현대 동아시아인의 기원이 된 고대 동아시아 메타개체군에서 유래했으며, 여러 개별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전적 이질성을 보인다.[64][65][66] 그들은 동남아시아의 고립된 지역에 거주하며, 현재는 주로 태국 남부,[67] 말레이 반도 및 인도의 안다만 제도에 국한되어 있다.[68]

네그리토(Negrito)는 스페인어로 "작은 흑인"을 의미한다. (네그리토는 스페인어로 네그로(negro, 흑인)의 지소형, 즉 "작은 흑인"을 의미함) 스페인인들이 필리핀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부르던 이름이다.[69] "네그리토"라는 용어 자체는 말레이시아와 같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세망족[70]으로 대체되는 국가들에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용어는 실제로 특정 그룹을 가리킨다.
그들은 어두운 피부, 종종 곱슬머리와 아시아인의 얼굴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체격이 단단하다.[71][72][73]
필리핀의 네그리토족은 빈번하게 차별을 겪는다. 전통적인 수렵 채집 생활 방식 때문에 사회적 소외를 받고 빈곤 속에 살며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74]
3. 4. 6. 일본
일본에서 흑인에 대한 기록은 전국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남만인이라고 불리던 유럽인들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을 일본에 데려왔는데, 그 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덴쇼 천황의 유럽 파견 사절단이 아프리카에 갔을 때, 일행은 "이전에도 저 검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 것을 많이 본 적이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동남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피부가 검은 사람으로 묶여 "흑방" 등으로 불렸다.[189]전국 시대에 예수회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데려온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는 야스케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3. 5.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Indigenous Australians)은 유럽인 정착 초기부터 "흑인(black people)"으로 불려왔다.[92] 원래는 피부색과 관련이 있었지만, 오늘날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제도 주민(Torres Strait Islander) 혈통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93]
19세기와 20세기 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흑인" 또는 "백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고용과 사회적 전망에 매우 중요했다. 각 주에는 원주민 보호위원회(Aboriginal Protection Board)가 설립되어 원주민의 삶을 사실상 완전히 통제했으며, 부모와 자녀를 분리할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94][95][96] 원주민은 투표권이 없었으며, 종종 보호구역에 갇히거나 저임금 노동 또는 사실상 노예 노동을 강요당했다.[97][98]
1913년 월터 볼드윈 스펜서(Walter Baldwin Spencer)의 보고서에는 혼혈인(half-caste)은 원주민이나 백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전자에 더 기울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백인 인구 전체가 반혈과 결코 섞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가장 좋고 친절한 방법은 그들을 원주민과 함께 보호구역에 두고, 같은 학교에서 교육을 시키고, 서로 결혼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99]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혼혈 인구가 백인 인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1930년까지는 내부에서 "반혈의 위협(half-caste menace)"이 백호주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의 이상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가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100] 세실 쿡(Cecil Cook)은 5세대, 그리고 변함없이 6세대가 되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모든 원주민적 특징이 사라질 것이며, 우리의 반혈 문제는 흑인 인종의 완전한 소멸과 그 자손의 백인으로의 빠른 융합으로 신속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언급했다.[101]
이후 공식 정책은 생물학적 및 문화적 동화 정책으로 바뀌었다. "순혈을 제거하고 반혈에게 백인 혼혈을 허용하면 결국 그 인종은 백인이 될 것이다."[102] 이로 인해 "흑인"과 "반혈" 개인에 대한 처우가 달라졌으며, 피부색이 밝은 개인은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어 "백인"으로 양육되도록 대상이 되었고, 모국어를 사용하거나 전통 관습을 실천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이 과정은 현재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로 알려져 있다.[103]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원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한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1967년 국민투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90% 이상이 헌법상의 차별을 종식하고 원주민을 국가 인구 조사에 포함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104] 이 기간 동안 많은 원주민 운동가들이 "흑인"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는 근원으로 삼기 시작했다. 운동가 밥 마자(Bob Maza)는 흑인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것이 오늘날 원주민에게 되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자긍심이라고 말했다.[105]
1978년, 원주민 작가 케빈 길버트(Kevin Gilbert)는 원주민의 이야기를 모은 책인 『검은 삶(Living Black: Blacks Talk to Kevin Gilbert)』으로 전국 도서위원회 상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원주민 사진의 시집과 전시회인 『오스트레일리아 흑인 내부(Inside Black Australia)』로 인권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수상을 거부했다.[106] 1990년에 정부는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제도 주민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주민으로 인식하고 자신이 사는 공동체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으로 원주민의 법적 정의를 변경했다.[107]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서 원주민에 대한 수용과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원주민 또는 토레스 해협 주민으로 자기 인식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108][109]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흑인"이라는 용어의 재도입은 주류 오스트레일리아 문화, 공영 언론,[110] 정부 기관,[111] 그리고 민간 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흑인 시저"라는 별명을 가진 존 시저(John Caesar)는 부모가 아프리카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태어난 유형수이자 부시레인저로서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온 최근 아프리카계 흑인 혈통 중 한 명이었다.[119]
2006년 인구 조사에서 248,605명의 거주자가 자신이 아프리카 출신이라고 밝혔다. 이 수치는 인종에 관계없이 아프리카 국가에서 태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모든 이민자를 포함하며, 백인 아프리카인도 포함한다.
3. 5. 1.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애보리진과 토레스 해협 제도 주민)이 흑인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195]3. 5. 2. 멜라네시아
멜라네시아라는 지역 이름은 그리스어 μέλας|멜라스grc("검은")와 νῆσος|네소스grc("섬")에서 유래했으며, "검은 사람들의 섬"을 뜻한다. 이는 원주민들의 검은 피부색을 가리킨다. 초기 유럽 정착민인 스페인 탐험가 이니고 오르티스 데 레테스(Yñigo Ortiz de Retez)는 이 지역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과 닮았다는 점을 지적했다.[115]
멜라네시아인들은 다른 태평양 섬 주민들과 함께 19세기와 20세기에 사탕수수, 목화, 커피 재배자들을 위해 고향과 먼 나라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하도록 속거나 강압당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러한 관행은 블랙버딩(blackbirding)으로 알려져 있다. 퀸즐랜드에서는 약 명에서 62500명[116]이 뉴헤브리디스 제도, 솔로몬 제도, 뉴기니아에서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끌려왔다. 1901년 태평양 섬 노동자법(Pacific Island Labourers Act 1901)에 따라 퀸즐랜드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섬 주민들은 고향으로 송환되었다.[117] 호주에 남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우스 시 섬 주민(South Sea Islanders)이라고 불렸으며, 백인 중심 사회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았다. 페스 밴들러(Faith Bandler), 에블린 스콧(Evelyn Scott), 보니타 마보(Bonita Mabo)를 포함하여 많은 원주민 권리 운동가들이 사우스 시 섬 주민 출신이다.
많은 멜라네시아인들은 '멜라네시아'라는 용어를 하나의 집단으로서 스스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스테파니 로슨은 이 용어가 "경멸의 용어에서 긍정적인 용어로 바뀌어, 현대 하위 지역 정체성과 공식 조직에 대한 긍정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썼다.[118] 예를 들어, 멜라네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는 멜라네시아 창끝 그룹(Melanesian Spearhead Group)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4. 흑인 관련 개념 및 논쟁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용어는 아프리카계라는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문자 그대로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북아프리카의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은 제외된다.
미국에서 "흑인" 또는 "아프리카계"는 단순한 인종적 특징뿐만 아니라, 노예의 후손이라는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 집단으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Debra Dickerson영어은 "흑인"이나 "아프리카계"라는 용어가 노예와 그 후손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버락 오바마는 흑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90][191][192]
1967년까지 일부 주에서는 조상 중 한 명이라도 흑인이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일방울 법칙"이 존재했다.[193] 버락 오바마, 할리 베리, 타이거 우즈 등 흑백 혼혈이나 흑인 혈통이 일부 섞인 경우에도 흑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러한 영향 때문이다.[194]
4. 1. 흑인성 (Blackness)
"흑인성(Blackness)"은 주류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정치,[159][160] 가치관과 얼마나 자신을 동일시하는가의 정도로 설명될 수 있다.[161] 이는 인종보다는 정치적 성향,[159][160] 문화, 행동과 더 관련이 깊다. "흑인성"은 "흑인처럼 행동하지 않기"와 대조되는데, 이는 흑인 미국인들이 유행, 방언, 음악 취향,[162] 그리고 상당수 흑인 청소년들의 관점에서 학업 성취도와 관련하여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의 특성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흑인성은 종종 정치적[159][160]이고 문화적인 특성을 띠기 때문에, 비흑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토니 모리슨은 빌 클린턴을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이라고 묘사하며,[164] 그가 "흑인성의 거의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165] 클린턴은 이 칭호를 받아들였다.[166]
흑인성에 대한 질문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의 2008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도 제기되었다. 해설가들은 흑인 조상을 가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오바마가 "충분히 흑인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어머니가 백인 미국인이고 아버지가 케냐 출신 흑인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배경이 전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156][158] 오바마는 자신을 흑인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밝혔다.[167]
4. 2. 일방울 법칙 (One-drop rule)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남부에서는 아프리카계 혈통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흑인으로 분류하는 일드롭 룰이라는 속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하강혼혈주의 관행은 20세기 초까지 법으로 제정되지 않았다.[152] 법적으로 그 정의는 주마다 달랐다. 미국 남북 전쟁 이전인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인종 정의가 더 유연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주 법에 따르면 당시 법적으로 백인(흑인 혈통 25% 미만)이었던 사람들을 버지니아 주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1662년 버지니아 주가 법으로 채택한 ''모친종속주의'' 원칙에 따라 노예로 태어났다.일드롭 룰은 흑인 노예의 수를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153] 백인 인종을 "순수하게" 유지하려는 시도로 유지되었다.[154] 일드롭 룰의 결과 중 하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의 통합이었다.[152] 19세기 가장 저명한 폐지론자이자 민권 운동가 중 일부는 프레더릭 더글러스, 로버트 퍼비스, 제임스 머서 랭스턴과 같이 다인종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옹호했다.
1967년까지, 일부 주에서는 조상 중 한 명이라도 흑인인 사람은 흑인으로 간주하는 “일방울 법칙”이 있었다.[193]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버락 오바마나 할리 베리, 흑인 쿼터에 불과한 타이거 우즈 등이 흑인으로 간주되는 것도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194]
4. 3.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평등
미국은 1861년까지 흑인에 대한 노예 제도를 실시하였다. 흑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권리가 향상되었지만, 지금도 일부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미국의 사회문화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로 인종 문제를 꼽는다. 산업화와 함께 선진 산업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의 경우,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모든 것이 인종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어 문제 해결을 복잡하게 만든다. 현대 미국 사회에서 인종 문제는 과거 노예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 백인이 주도하던 인종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20세기 후반 들어 흑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 경제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백인의 헤게모니에 저항하게 되었다.[196]미국 역사에서 흑인은 백인과 함께 북미 대륙에 상륙했으나, 건국 초기부터 1862년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제도를 법적으로 종식시킬 때까지 흑인 노예는 미국 사회를 왜곡시키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미국 남부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은 흑인 노예를 매우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자원으로 만들었으며,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흑인을 종속 상태에 두고 백인의 기득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체계적인 차별이 지속되었다.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한 예술 장르로 19세기 후반에 민스트럴 쇼(흑인 분장악극)라 불리는 희가극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이 악극에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외설적이거나 비속한 내용, 사회 관습에 대한 조롱, 자유로운 감정 분출이 용인되었고, 백인은 흑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해 자신의 결함적인 현실이나 불만을 배설했다. 이것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의 정당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만든 인종주의라는 불합리한 체제에 대한 풍자를 통해 마음이 가벼워지는 감정적인 승화를 경험하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었다고 분석된다.
현재의 흑인 문제에는 오랜 인종주의적 차별 결과 누적된 빈곤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요인과, 여전히 상당 부분 존재하는 인종주의적 차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이후 이것이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인종주의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어려워졌다. 1960년대 왕성했던 인종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공적인 노력은 추진력을 잃고 퇴보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인종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인 흑인의 지위는 지난 수십 년간 정체 상태를 보이며, 새로운 이민자에게 항상 '윗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 상황을 계속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196][201] 그러나 사실 흑인들도 다른 인종들을 차별하기도 하며 흑인을 포함한 미국의 민중들은 일본인을 제외한 동북아인들이나 멕시칸인, 중동인들을[205] 인간 미만으로 생각[206]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큐 등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으며 '인간'인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다운 감정이 없으며 인간이 아닌 기계, 로봇과 같다고 생각했다.[207] 따라서 비인간을 대상으로 한 잔인한 짓거리와 고문에도 찬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시아인이 흑인을 공격할 확률보다 흑인이 아시아인을 공격할 확률이 280배나 더 높으며 백인에 대해서는 약 50% 정도이다.[208]
1967년까지, 일부 미국의 주에서는 조상 중 한 명이라도 흑인인 사람은 흑인으로 간주하는 “일방울 법칙”이 있었다.[193]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버락 오바마나 할리 베리, 흑인 쿼터에 불과한 타이거 우즈 등이 흑인으로 간주되는 것도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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