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다 둘리틀
1. 개요
힐다 둘리틀(Hilda Doolittle, 1886-1961)은 미국의 시인, 소설가, 회고록 작가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미지즘 운동을 주도하며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시집 『바다 정원』, 전쟁 3부작, 장편 서사시 『이집트의 헬렌』 등을 발표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경험과 시각을 독창적으로 담아내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부상과 함께 재조명되었으며,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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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시인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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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시인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펜실베이니아주의 성소수자 인물 -
릴 피프
미국의 래퍼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릴 피프는 "이모 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정신 건강 문제와 약물 남용을 다룬 가사로 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과다 복용으로 2017년에 사망했다. -
펜실베이니아주의 성소수자 인물 -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영화 제작자로, 팝 아트 운동의 선구자로서 캠벨 수프 캔, 마릴린 먼로 초상화 등 대량 생산된 이미지와 유명인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표현하여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
양성애자 작가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양성애자 작가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초기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하고 『철학적 탐구』로 후기 일상언어철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언어 게임 개념을 제시하여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힐다 둘리틀은 1886년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1911년 런던으로 이주한 후,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이미지즘 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녀는 모더니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지지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경력을 발전시켰고, 1916년부터 1917년까지 런던의 문학 잡지 《에고이스트》 편집자로 활동하며 《잉글리시 리뷰》, 《트랜스아틀란틱 리뷰》 등 여러 매체에 시를 발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겪은 형제의 전사와 시인 리처드 올딩턴과의 결혼 파탄은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이미지즘 연구가 글렌 휴즈는 훗날 "그녀의 고독이 그녀의 시에서 절규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둘리틀은 고대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 신화에 깊은 매료를 느꼈으며, 이를 자신의 시적 제재로 삼아 자연 풍경과 사물을 통해 섬세하고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1930년대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 정신 분석을 받았는데, 이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의 양성애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일생 동안 한 번의 결혼 외에도 남성과 여성 모두와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면모는 그녀 사후 1970년대와 1980년대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부상하면서 재조명되었고, 그녀를 중요한 상징적 인물로 만들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힐다 둘리틀은 1886년 9월 10일 베들레헴의 모라비아 교도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둘리틀은 리하이 대학교의 천문학 교수였고, 어머니 헬렌(결혼 전 성은 Wolle)은 모라비아 교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힐다는 여섯 자녀 중 유일한 딸이었고, 다섯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1896년, 아버지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플라워 천문대 관리 책임을 맡으면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천문학 선임 교수로 임명되자, 가족은 어퍼 다비로 이사했다.
둘리틀은 필라델피아 15번가와 레이스 가에 위치한 퀘이커 계열 학교인 프렌즈 센트럴 스쿨에 다녔고, 1905년에 "시인의 영향"이라는 제목의 졸업 연설을 하며 졸업했다. 같은 해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브린마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훗날 유명한 시인이 되는 마리안 무어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만났다. 그러나 좋지 않은 성적으로 세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고,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웠다. 이후 1910년까지 집에서 독학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십대 시절인 1901년, 둘리틀은 시인 에즈라 파운드를 만났다. 파운드는 그녀의 평생 친구가 되었고,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부터 둘리틀과 파운드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관계를 시작했으며, 이 기간 동안 최소 두 차례 약혼했다. 파운드의 부모는 둘의 관계를 지지했지만, 둘리틀의 부모, 특히 아버지는 파운드를 탐탁지 않게 여겨 강하게 반대했다. 1907년, 파운드는 직접 만든 양피지에 자신의 초기 연애시 25편을 담아 헌정한 《힐다의 책》(Hilda's Book영어)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둘의 약혼은 파운드가 유럽으로 떠난 1908년경 파기되었다.
대학 중퇴 후, 둘리틀은 천문학 관련 내용을 포함한 어린이 이야기를 써서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신문 《더 코머레이드》(The Comrade영어)에 '에디스 그레이'라는 필명으로 1909년부터 1913년까지 기고했다. 1910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다니던 젊은 여성 미술학도 프랜시스 조세파 그레그와 관계를 시작했다. 그레그에게 영감을 받아 둘리틀은 고대 그리스 시인 테오크리토스의 작품을 본떠 초기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2.2. 이미지즘 운동과 문학적 성장
1911년 5월, H.D.는 친구 프랜시스 그레그 모녀와 함께 휴가차 런던으로 갔다가,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홀로 남았다. 에즈라 파운드는 그녀를 잉글랜드 작가 브리짓 팻모어 등 자신의 친구들에게 소개했고, 팻모어는 훗날 H.D.의 남편이 되는 리처드 올딩턴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H.D., 파운드, 올딩턴 세 사람은 켄싱턴의 처치 워크(Church Walk)에 이웃하여 살면서(파운드 10번지, 올딩턴 8번지, H.D. 6번지) 매일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 모여 함께 작업했다.
당시 파운드는 시를 개혁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논의하기 위해 런던의 다른 시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다른 예술 분야의 모더니스트들처럼 H.D. 역시 "새롭게 만들 것"을 추구했으며, 자유시, 단가, 하이쿠 형식의 간결함과 불필요한 표현의 제거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파운드, H.D., 올딩턴은 "세 명의 오리지널 영상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영상주의(이미지즘)의 핵심 원칙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파운드에 따르면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룰 것.
# 표현에 기여하지 않는 단어는 절대 사용하지 말 것.
# 리듬에 관해서는 메트로놈의 순서가 아닌, 음악적 구절의 순서로 시를 구성할 것.
1912년 파운드와의 대화에서 H.D.는 "힐다 둘리틀"이라는 이름이 너무 구식이라고 느낀다고 말했고, 파운드는 H.D.라는 이니셜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이후 작가 생활 내내 이 필명을 사용했다. 파운드가 그녀의 시 "길의 헤르메스(Hermes of the Ways)" 원고 하단에 "H.D. 영상주의자(H.D. Imagiste)"라고 적은 것을 계기로, H.D.는 이를 공식적인 필명으로 채택했다. 파운드는 사적으로 그녀를 "드라이어드"라고 부르기도 했다.
1912년 10월, 파운드는 '영상주의자'라는 표제 하에 H.D.의 시들을 해리엇 먼로가 편집하는 잡지 시(Poetry)에 보냈다. 1913년 1월호에는 파운드가 읽고 "이것이 시다"라고 평했던 "길의 헤르메스", 이후 "과수원(Orchard)"으로 제목이 바뀐 "프리아푸스: 과수원의 관리자(Priapus: Keeper-of-the-Orchards)", 그리고 "경구(Epigram)" 등 세 편의 시가 올딩턴의 시 세 편과 함께 실렸다. 이 초기 시들은 고대 그리스 문학, 특히 사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데, 이는 올딩턴, 파운드와 공유하는 관심사였다. 그녀의 영상주의 시는 간결한 언어와 고전적이고 절제된 순수성을 특징으로 하며, 초기 대표작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시 중 하나인 오리드(Oread, 1915)에서 잘 드러난다.
> 소용돌이쳐라, 바다여—
> 뾰족한 소나무를 소용돌이쳐라,
> 커다란 소나무를 흩뿌려라
> 우리의 바위에,
> 너의 초록색을 우리 위로 던져라,
> 너의 전나무 웅덩이로 우리를 덮어라.
이러한 스타일이 항상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다. 1915년 5월 에고이스트(The Egoist) 잡지의 영상주의 특별호에서 잉글랜드 시인 해롤드 먼로는 H.D.를 "가장 진실한 영상주의자"라고 칭하면서도, 그녀의 초기 작품을 "사소한 시", "상상력의 빈곤이나 불필요하게 과도한 억제"라고 평가절하했다. 반면, 1927년 영국의 모더니스트 작가이자 비평가인 메이 싱클레어는 "오리드의 간결함"을 "기적"이라고 칭송하며 먼로의 비판을 반박했다.
1913년, H.D.는 리처드 올딩턴과 결혼했다. 이듬해 파운드는 영국의 예술가 도로시 셰익스피어와 결혼했다. H.D.와 올딩턴 사이의 외동딸은 1915년에 사산되었다. 올딩턴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 육군에 입대하자, H.D.는 1916년부터 1917년까지 그를 대신하여 에고이스트의 보조 편집자로 일했다. 1916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인 바다 정원(Sea Garden)이 출판되었다. 한편, H.D.와 올딩턴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고, 올딩턴은 1917년에 다른 연인을 두었으며, H.D.는 영국의 작가 D. H. 로렌스와 가깝지만 플라토닉한 관계를 맺었다.
H.D.는 일본의 전통 시가 담긴 우키요에 판화를 대영 박물관에서 접하며 초기 영상주의의 모델을 탐구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주된 영감의 원천은 그리스 고전 문학, 특히 사포였다. 그녀는 올딩턴과 함께 그리스 및 라틴어 고전 번역 시리즈인 "시인의 번역 시리즈(Poets' Translation Series)"를 1915년에 시작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번역에 힘썼다. 그녀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1916년 부분 번역, 1919년 합창 번역), 히폴리토스(1919년 합창 번역, 1927년 각색), 바쿠스의 여신도(1931년 합창 번역), 헤카베(1931년 합창 번역), 이온(1937년 발췌 번역) 등을 번역 및 출판했다.
H.D.는 1917년 마지막 영상주의 선집이 나올 때까지 그룹 활동을 이어갔으며, 1915년 선집 편집에 깊이 관여했다. 그녀의 작품은 올딩턴이 편집한 영상주의 선집 1930년(Imagist Anthology 1930)에도 실렸다. 1930년대 후반까지 그녀의 시는 영상주의의 특징인 언어의 절제와 고전적이고 엄격한 순수성을 유지했다. 그녀는 시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사상과 비전에 대한 노트(Notes on Thought and Vision)를 1919년에 썼지만, 이는 1982년에야 출판되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시인들을 "인간 사상의 흐름 전체를 바꿀" 수 있는 비전가 집단으로 묘사했다. 이 시기 그녀는 페미니즘 사상을 자신의 시에 통합하기 시작했다.
2.3. 제1차 세계 대전과 개인적 시련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인 1913년, 힐다 둘리틀은 시인 리처드 올딩턴과 결혼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올딩턴이 군에 입대하면서 부부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1915년, 둘리틀은 첫 아이를 사산했고, RMS 루시타니아호 침몰 소식에 충격을 받아 유산했다고 믿기도 했다. 전쟁 중 부부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으며, 올딩턴은 1917년 다른 연인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 둘리틀은 D.H. 로렌스와 친밀했지만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했다.
1918년은 둘리틀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해였다. 오빠 길버트가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했고,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3월, 둘리틀은 작곡가 세실 그레이와 잠시 함께 지내며 그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올딩턴은 전투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었고, 이는 부부가 결국 별거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이혼은 1938년에야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19년, 둘리틀은 스페인 독감을 심하게 앓는 와중에 딸 프랜시스 퍼디타를 출산했다. 아이의 생부는 올딩턴이 아닌 세실 그레이였다. 이 무렵, 그녀는 이후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브라이허를 만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겪은 오빠와 아버지의 죽음, 사산, 남편과의 불화 등 연이은 개인적인 비극은 둘리틀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으며, 그녀의 이후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미지즘 연구가 글렌 휴즈는 "그녀의 고독이 그녀의 시에서 절규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2.4. 브라이어와의 관계와 정신 분석
힐다 둘리틀(H.D.)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빠의 죽음, 아버지의 사망, 남편 리처드 올딩턴과의 결혼 파탄 등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의 이후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전쟁의 트라우마는 이후 정신 분석을 받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 H.D.의 삶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927년 어머니가 사망했고, 같은 해 소설가 브라이어(Bryher)는 로버트 맥알몬과 이혼하고 당시 H.D.의 연인이었던 영화 제작자 케네스 맥퍼슨(Kenneth Macpherson)과 결혼했다. H.D., 브라이어, 맥퍼슨 세 사람은 이후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살았는데, 시인 바바라 게스트(Barbara Guest)는 이들의 관계를 "세 명의 동물원(menagerie of three)"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브라이어는 맥퍼슨과 결혼한 상태에서 H.D.의 딸 페르디타(Perdita)를 법적으로 입양하여 '페르디타 맥퍼슨'으로 개명했으며, 훗날 페르디타를 자신의 유산 상속자로 지정했다. 이들은 제네바 호수 근처의 바우하우스 양식 빌라에 거주하기도 했다. 1928년, H.D.는 임신했으나 낙태를 선택했다.
브라이어와 맥퍼슨은 1927년 영화 전문 월간지 클로즈 업(Close Up)을 창간했고, H.D.도 이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또한 세 사람은 브라이어의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독립 영화 그룹인 POOL(또는 풀 그룹(Pool Group))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POOL 그룹이 제작한 영화 중 하나인 《보더라인(Borderline)》(1930)에는 H.D.와 브라이어가 직접 출연했으며, 폴 로베슨과 에슬란다 로베슨 부부도 함께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심리 상태, 인종 차별, 인종 간 관계 등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H.D.는 영화의 해설 소책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1928년, H.D.는 프로이트 학파의 한스 삭스(Hanns Sachs)에게 정신 분석을 받기 시작했으며, 1933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빈으로 가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직접 분석을 받았다. 그녀는 이미 1909년에 프로이트의 저작을 독일어 원서로 읽으며 그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H.D.가 프로이트를 찾은 주된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깊은 트라우마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부상으로 인한 편집증적 불안감 때문이었다. 전쟁 중 오빠를 잃고, 아버지 역시 그 충격으로 사망했으며, 남편은 전쟁 후유증을 앓았다. 또한 H.D.는 루시타니아호 침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유산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와의 분석 과정은 그녀가 이러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의 양성애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전쟁 경험을 다룬 소설 『나에게 살라고 말해 줘(Bid me to Live)』(1960년 출판)를 쓰도록 격려했으며, H.D.는 프로이트와의 분석 경험을 담은 회고록 『벽에 쓰는 글(Writing on the Wall)』(1944년 출판, 1956년 『프로이트에게 바치는 헌사(Tribute to Freud)』로 재출간)을 집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H.D.는 브라이어와 함께 런던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녀는 전쟁의 경험, 특히 런던 대공습(the Blitz)에 대한 반응을 담은 시집 『3부작(Trilogy)』(『벽은 무너지지 않는다(The Walls Do Not Fall)』(1944), 『천사에게 바치는 헌사(Tribute to the Angels)』(1945), 『지팡이의 개화(The Flowering of the Rod)』(1946))를 집필했다. 이 시집에서 그녀는 파괴된 런던의 모습을 고대 이집트와 고전 그리스의 폐허에 비유하며 전쟁의 참상과 그 속에서의 희망을 탐구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H.D.와 브라이어의 연인 관계는 끝났지만, 두 사람은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H.D.는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1946년 심각한 정신적 붕괴를 겪고 요양소에 머물렀다. 그녀는 남은 생애를 스위스에서 보냈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정신 분석가 에리히 하이프트(Erich Heydt)의 도움을 받아 에즈라 파운드와의 관계를 다룬 회고록 『고통의 종말(End to Torment)』을 집필했다. H.D.는 자신의 양성애적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으며, 이러한 솔직함은 훗날 그녀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모두에게 중요한 상징적 인물로 재조명받는 계기가 되었다.
2.5. 제2차 세계 대전과 후기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힐다 둘리틀(H.D.)은 브라이허와 함께 런던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녀는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에서의 어린 시절과 가족 생활을 회상하는 『선물』(The Gift)을 썼다. 이 책은 그녀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들과 사건들을 다루며, 1960년과 사후인 1982년에 출판되었다. 또한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3부작』(Trilogy)을 집필했는데, 이는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The Walls Do Not Fall, 1944), 『천사에게 바치는 헌사』(Tribute to the Angels, 1945), 『지팡이의 개화』(The Flowering of the Rod, 1946)로 각각 출판되었다.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서두의 문장은 그녀의 초기 작품 스타일과의 분명한 단절을 보여준다.
| 원문 | 번역 |
|---|---|
전쟁 후, 둘리틀과 브라이허는 더 이상 함께 살지 않았지만 연락은 계속 유지했다. 둘리틀은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1946년 봄 심각한 신경쇠약을 겪고 그해 가을까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후 생애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냈으며, 가끔 미국을 방문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정신분석가 에릭 하이트로부터 추가적인 치료를 받았다. 하이트의 권유로 그녀는 젊은 시절 에즈라 파운드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 『고뇌의 종말』(End to Torment)을 썼다.
둘리틀의 후기 작품들은 기독교, 고대 그리스 및 이집트 종교, 강신술, 헤르메스주의, 마르티니즘, 카발라, 연금술, 타로, 점성술 등 다양한 영적 전통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이러한 복합적인 영성을 탐구하고 표현하기 위해 장시 형식을 주로 사용했다.
1952년부터 1955년 사이, 60대였던 둘리틀은 그녀의 가장 긴 시인 『이집트의 헬렌』(Helen in Egypt)을 썼다. 이 작품은 그녀가 사망하기 직전인 1961년에 출판되었다. 이 시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헬렌』을 바탕으로 하지만, 트로이 전쟁 이후 헬레네의 삶과 그녀가 이집트로 갔다는 이야기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재구성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집트의 헬렌』은 그녀가 존경했던 파운드의 대작 『칸토스』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둘리틀 자신도 노먼 홈즈 피어슨이 이 작품을 "그녀의 '칸토스'"라고 부른 것을 인정했다.
그녀의 후기 시들을 모은 『헤르메스적 정의』(Hermetic Definition)는 1972년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시집에는 30살 연하의 남성에 대한 사랑을 다룬 시와, 파운드의 시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엉덩이뼈 골절로 침대에 누워 쓴 "사제스"("Sagesse")는 『3부작』의 코다 역할을 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 대공습(the Blitz)을 겪은 젊은 여성이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겨울의 사랑"("Winter Love")은 『고뇌의 종말』과 같은 시기에 쓰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인물인 페넬로페를 화자로 내세워 회고록의 내용을 시적으로 재현한다. 한때 둘리틀은 이 시를 『이집트의 헬렌』의 부록으로 포함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1960년, 둘리틀은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로부터 시 부문 공로 훈장을 받았다. 그녀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2.6. 사망
1961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스위스 취리히의 클리닉 힐스란덴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던 중 같은 해 9월 27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오랜 동반자였던 브라이어와 딸 페르디타가 남겨졌다.
유해는 미국 베들레헴으로 옮겨져 1961년 10월 28일 니스키힐 묘지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그녀의 초기 시 "묘비명"(Epitaph) 또는 "제우스에게 기록하게 하라"(Let Zeus Record)의 다음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당신은 말할 수 있겠지,
:그리스 꽃이여; 그리스의 황홀경이
:영원히 되찾았노라
:복잡한 노래의 뒤를 따라
:죽어간 자를
:잃어버린 척도.
3. 작품 세계
힐다 둘리틀은 1911년 런던으로 이주한 후 모더니즘 시 운동인 이미지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에즈라 파운드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이미지즘의 특징인 명료하고 절제된 시를 주로 썼다. 고대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 신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녀의 작품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특정한 감각이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뛰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겪은 형제의 죽음과 시인 리처드 올딩턴과의 결혼 파탄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녀의 시에는 개인적인 고통과 고독의 감정이 깊게 반영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만남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고, 자신의 양성애 정체성을 이해하고 작품에 반영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 모두와 관계를 맺었으며, 이러한 경험과 성적 지향에 대한 솔직한 태도는 훗날 페미니즘 운동과 LGBT 운동에서 중요한 작가로 재조명받는 배경이 되었다.
3.1. 주요 특징
힐다 둘리틀(H.D.)의 작품 세계는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이미지즘 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간결하고 명확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를 썼다. 1911년 런던으로 이주한 후, 에즈라 파운드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했으며, 파운드, 리처드 올딩턴과 함께 이미지즘의 3가지 원칙(사물을 직접 다룰 것, 불필요한 단어를 쓰지 말 것, 자유 운율을 사용할 것)을 정립했다. 파운드는 그녀의 시에 'H.D. 이미지스트'라는 서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 시기 그녀는 고대 그리스 문학, 특히 사포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자연 풍경이나 대상을 통해 특정 감각이나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그녀의 초기 시는 언어의 절제와 고전적이고 엄격한 순수성을 특징으로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겪은 형제의 죽음과 올딩턴과의 결혼 생활 파탄은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녀의 시는 점차 개인적인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엮어내며, 여성의 정체성, 전쟁, 트라우마와 같은 더 깊은 주제를 탐구하는 장시 형식으로 나아갔다. 후기 작품에서는 기독교, 고대 그리스 및 이집트 종교, 강신술, 헤르메스주의, 마르티니즘, 카발라, 연금술, 타로, 점성술 등 다양한 영적 전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은 복합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녀의 대표적인 장시로는 이집트의 헬렌(1961)이 있다. 이 작품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헬렌을 바탕으로 트로이의 헬레네의 삶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재해석했으며, 파운드의 칸토스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후 출판된 시집 헤르메스적 정의(1972)에는 핵무기에 대한 공포를 다룬 '사제스'나 호메로스의 페넬로페를 화자로 내세운 '겨울의 사랑' 등이 포함되어 있다.
힐다 둘리틀은 1930년대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양성애 정체성을 이해하고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 모두와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과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서 중요한 작가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3.2. 대표작
힐다 둘리틀(H.D.)의 후기 작품들은 기독교, 고대 그리스 및 이집트 종교, 강신술, 헤르메스주의, 마르티니즘, 카발라(로베르 앙블랭의 저작을 통해), 연금술, 타로, 점성술,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사상과 신념 체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이러한 복합적인 영성을 탐구하고 표현하기 위해 장시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H.D.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집트의 헬렌(Helen in Egypt)은 그녀가 60대였던 1952년부터 1955년 사이에 집필되어 1961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출판된 가장 긴 시이다. 이 작품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헬렌을 바탕으로, 트로이 전쟁 이후 트로이의 헬레네의 삶과 그녀가 이집트로 이주한 이야기를 새롭게 상상한다. 특히 원전을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를 비판적으로 탐구하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탐색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집트의 헬렌의 방대한 길이와 역사적 범위는 그녀가 존경했던 파운드의 대작 칸토스에 대한 응답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H.D. 자신도 회고록 고통의 종말에서 노먼 홈즈 피어슨이 이 시를 "그녀의 '칸토스'"라고 칭한 것에 동의를 표했다.
1972년에는 그녀의 후기 시들을 모은 헤르메스적 정의(Hermetic Definition)가 사후 출판되었다. 이 시집에는 동명의 표제작을 비롯해 "사제스"(Sagesse), "겨울의 사랑"(Winter Love) 등이 수록되어 있다. "헤르메스적 정의"는 H.D.가 30살 연하의 남성을 향한 사랑과 파운드의 칸토 106의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다. "사제스"는 엉덩이뼈 골절로 침상에 누워 쓴 작품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블리츠를 겪으며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 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아 3부작(Trilogy)의 코다 역할을 한다. "겨울의 사랑"은 회고록 고통의 종말과 비슷한 시기에 쓰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등장인물 페넬로페를 화자로 내세워 회고록의 내용을 시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H.D.는 한때 이 시를 이집트의 헬렌의 부록으로 추가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H.D.는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남겼다. 1920년대 초에는 세 편의 소설 3부작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첫 번째 3부작 『마그나 그라이카』(Magna Graeca)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1926년 출판)와 『헤듀라스』(Hedylus, 1928년 출판)로 구성되며, 고전 시대를 배경으로 남성 중심의 문학계에서 여성 시인의 소명을 탐구한다. 다음 3부작 『마드리갈』(Madrigal)은 『HERmione』(1981년 출판), 『나에게 살라고 명령해』(Bid Me to Live, 1960년 출판), 『그것은 오늘 칠해지리라』(Paint it To-day), 『아스포델』(Asphodel)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성 화가의 성장을 자전적으로 그리면서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마지막 3부작 『보더라인』(Borderline)은 『코라와 카』(Kora and Ka)와 『언제나의 별』(The Usual Star)로 구성되어 1933년에 출판되었다. 이 외에도 『해적의 아내』(Pilate's Wife), 『미라 메어』(Mira-Mare), 『밤』(Narthex) 등의 소설을 집필했다.
회고록으로는 프로이트와의 정신분석 경험을 다룬 『벽 위에 쓰다』(Writing on the Wall, 1944년 출판, 1956년 『프로이트에게 헌정』(Tribute to Freud)으로 재게재) 와 파운드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고통의 종말: 에즈라 파운드 회고록』(End to Torment: A Memoir of Ezra Pound, 1979년 사후 출판) 등이 있다. 특히 『벽 위에 쓰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집필된 시 『3부작』과 함께 전쟁의 충격과 개인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에서의 어린 시절과 가족 생활을 회상하는 『선물』(The Gift)은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집필되어 1982년에 사후 출판되었다.
1960년, H.D.는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에서 시 부문 공로 훈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아래는 H.D.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 구분 | 작품명 (원제) | 발표/집필 연도 |
|---|---|---|
| 시 | 바다 정원 (Sea Garden) | 1916 |
|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 합창 (Choruses from the Iphigeneia in Aulis and The Hippollytus of Euripides) | 1919 | |
| 결혼의 찬가 (Hymen) | 1921 | |
| 헬리오도라 (Heliodora) | 1924 | |
| H.D. 시 전집 (Collected Poems of H.D.) (바다 정원, 결혼의 찬가, 헬리오도라 및 신작 시집 신(The God), 번역(Translations) 포함) | 1925 | |
| 청동을 위한 붉은 장미 (Red Roses for Bronze) | 1931 | |
| 수집되지 않은 시와 미출간 시 1912–1944 (Uncollected and Unpublished Poems 1912–1944) (1983년 시 전집: 1912–1944에 처음 수록) | 1912–1944 (1983 출판) | |
| 3부작 (Trilogy) | ||
| 이집트의 헬렌 (Helen in Egypt) | 1952–1955 집필 (1961 출판) | |
| 밸 에이브 (Vale Ave) | 1957 | |
| 헤르메스적 정의 (Hermetic Definition) | ||
| 시 전집: 1912–1944 (Collected Poems: 1912–1944) | 1983 출판 | |
| 소설 | 팔림프세스트 (Palimpsest) (『마그나 그라이카』 3부작) | 1926 |
| 헤듀라스 (Hedylus) (『마그나 그라이카』 3부작) | 1928 | |
| HERmione (『마드리갈』 3부작) | 1927 집필 (1981 출판) | |
| 나에게 살라고 명령해 (Bid Me to Live) (『마드리갈』 3부작) | 1960 | |
| 보더라인 (Borderline) (『보더라인』 3부작) | 1933 | |
| 회고록 및 기타 | 벽 위에 쓰다 (Writing on the Wall) (1956년 프로이트에게 헌정(Tribute to Freud)으로 재게재) | 1944 |
| 선물 (The Gift) | 1941-1944 집필 (1982 출판) | |
| 고통의 종말: 에즈라 파운드 회고록 (End to Torment: A Memoir of Ezra Pound) | 1958 집필 (1979 출판) |
4. 유산 및 평가
H.D.는 생애 동안 다양한 스타일과 형식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10년대 "바다 정원"과 같은 서정시에서 시작하여 초기 이미지즘 시와 자유시를 거쳐, 복잡한 장시 "3부작"(1942-1944년 집필), "이집트의 헬렌"(1952-1955), "베일 애브"(1957), 그리고 "헤르메틱 정의"(1971년 출간, "사게스"(1957), "겨울의 사랑"(1959) 포함) 등으로 작품 세계를 넓혀갔다.
그러나 생전에 그녀의 후기 시, 소설, 고전 번역 등은 거의 연구되거나 주목받지 못했으며, 주로 초기 시 "오레아드"와 "열기"만이 선집에 실렸다. 수십 년간 H.D.는 1920년대에 정점을 찍은 이미지즘 시인으로만 주로 알려졌는데, 문학 평론가 수전 프리드먼은 이러한 평가가 H.D.를 "포로이자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1972년 휴 켄너 역시 그녀를 단순히 이미지스트로 분류하는 것은 월리스 스티븐스의 평생 작품을 하모니엄에 실린 가장 짧은 시 몇 편으로 축소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에즈라 파운드는 1930년대에 자신이 H.D.와 올딩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미지즘 운동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에이미 로웰을 포함한 그룹 내 다른 주요 시인들은 H.D.를 그룹의 "취향 혁명"을 이끈 핵심적인 혁신가로 평가했다.
H.D. 자신도 일찍이 이미지즘의 제약과 파운드의 지배적인 성향이 자신의 창의성을 억누를 수 있음을 깨달았고, 1920년대 중반 이후 그녀의 작품은 이미지즘의 틀을 넘어섰다. 그녀는 특히 남성 중심의 문단에서 유일한 여성으로서 객관화될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뮤즈로만 여겨져 시인이자 지식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위상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으며, 이러한 고민은 소설 "HER"에서 "여성을 위한 고전적인 딜레마: 다른 사람의 뮤즈가 되거나 스스로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필요성"이라는 주제로 탐구된다. 파운드는 평생 그녀를 지지했지만, 올딩턴이나 로렌스 같은 다른 초기 이미지스트들은 그녀의 중요성을 축소하고 부차적인 인물로 격하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중기 시와 글은 W. B. 예이츠처럼 신비주의, 비전주의, 오컬트 등을 탐구했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1970년대 이전까지 거의 읽히지 않았다.
비평가 린다 와그너는 1969년에 "H.D.가 주로 이미지스트 작품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현대 문학의 아이러니 중 하나"라고 지적하며 그녀의 방대한 후기 작품을 상기시켰지만, 본격적인 재평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그녀의 작품에 주목하고, 이후 퀴어 연구 학자들의 관심이 이어진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수전 프리드먼(1981), 재니스 로버트슨(1982), 레이첼 듀플레시스(1986)와 같은 비평가들은 남성 작가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의 영문학 모더니즘 역사에 도전하며 H.D.를 중요한 위치로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1990년, 페미니스트 학자 거트루드 레이프 휴즈는 H.D.의 중기 시가 그웬돌린 브룩스의 시처럼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을 예견했으며,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탐구한다고 평가했다. 휴즈에 따르면, H.D.의 작품은 가부장적 특권에 도전하고 "그것을 후원하는 정신을 수정"하려 했으며, 특히 "이집트의 헬렌"에서는 헬렌을 수동적인 대상이 아닌 주체적인 주인공으로 그려냄으로써 파운드와 엘리엇의 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보수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경향에 맞섰다고 분석했다.
H.D.의 글쓰기는 모더니스트 및 포스트모더니스트 전통 속에서 활동한 후대의 많은 여성 시인들에게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여기에는 뉴욕 스쿨의 바바라 게스트, 블랙 마운틴 시인 힐다 몰리, 언어 시인 수잔 하우 등이 포함된다. 영국계 미국인 시인 데니즈 레버토프는 H.D.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특히 신비주의적 주제를 다룬 그녀의 장시가 "신비를 관통하는 방법, [...] 어둠, 신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썼다. H.D.의 영향력은 여성 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로버트 던컨이나 로버트 크릴리 등 많은 남성 작가들도 그녀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던컨은 자신의 모더니즘 시 연구서 "H.D. 책"에서 H.D.를 중심에 놓고 그녀의 작품에 대해 자주 강연했다. 네덜란드 시인 H.C. 텐 베르헤는 2008년 H.D.를 기리는 시 "밟힌 신비"(Het vertrapte mysterie네덜란드어)를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 "3부작"의 일부 구절은 9.11 테러 이후 전자 토론 목록을 통해 널리 공유되기도 했다.
5. 외부 링크
* [http://drs.library.yale.edu:8083/HLTransformer/HLTransServlet?stylename=yul.ead2002.xhtml.xsl&pid=beinecke:hilda&clear-stylesheet-cache=yes H. D. Papers, 1887–1977] – 예일 대학교 베이네케 희귀 도서 및 필사본 도서관 소장 자료
* [http://beta.worldcat.org/archivegrid/?q=(hilda+doolittle)+AND+personsort%3A%22H.+D.+%28Hilda+Doolittle%29%2C+1886-1961.%22 ArchiveGrid 등재 아카이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