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신앙고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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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1559년 프랑스 개혁 교회가 채택한 신앙 고백서로, 프랑스 종교개혁 시기에 위그노들의 신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1557년 박해 시기에 존 칼빈에게 보낸 신앙 고백서를 토대로, 칼빈과 그의 제자들이 35개 조항으로 구성하여 프랑스 국왕에게 제출되었다. 이후 전국 시노드에서 40개 조항으로 수정되어 채택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에 대한 교리를 담고 있다.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벨기에 신앙 고백서와 왈도파 신앙 고백서에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개혁 교회와 유럽 개혁 교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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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명확히 진술하는 문서들을 총칭하며, 장로교, 회중교회, 침례교 등 다양한 교파의 신학적 입장을 담고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와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갈리아 신앙고백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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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갈리아 신앙고백서 |
다른 이름 | 프랑스 신앙고백 라 로셸 신앙고백 |
원어명 | la: Confessio Gallicana fr: Confession de La Rochelle |
유형 | 신앙고백 |
기원 | 프랑스 |
작성 시기 | 1559년 |
채택 | 1559년 프랑스 개혁 교회 전국 시노드 |
관련 인물 | 존 칼빈 앙투안 드 샹디외 |
언어 | 프랑스어 |
역사적 배경 | |
목적 | 프랑스 내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을 명확히 정의 가톨릭 교회와 구별 박해에 대한 저항의 상징 |
영향 | 프랑스 위그노 신앙의 기초 유럽 전역의 개혁 교회에 영향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 영향 |
내용 | |
핵심 내용 | 성경의 권위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교회의 본질과 직무 성례의 의미 |
특징 | 칼뱅주의 신학 강조 교황의 수위권 부정 성인 숭배 반대 화체설 부정 |
영향 및 중요성 | |
현대적 의의 | 개혁교회 신앙의 중요한 문서 역사적 신앙고백의 가치 신학 연구의 자료 |
비판적 시각 | 일부 내용에 대한 다양한 해석 존재 시대적 배경에 따른 한계 |
2. 역사적 배경
프랑스 개혁교회 신자들, 즉 위그노들은 초기에는 통일된 신조나 중앙 조직 없이 활동했다. 16세기 중반, 개신교도들은 프랑스어 성경 번역본들을 출판하며 교리적 기반을 다져나갔다.[2]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위그노의 수가 약 40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1555년에서 1558년 사이 프랑스 곳곳에서 공식적인 교회 조직과 정기 예배가 생겨났다.[1][3] 점차 단일한 교회 조직과 공동의 신앙 고백 문서의 필요성이 커졌으며, 특히 1558년 푸아티에 지역 교회들 간의 교리적 차이는 이러한 요구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에 파리의 목사 앙투안 드 라 로슈 샹디외는 공동 신앙 고백과 규율서 제정을 위한 전국 시노드 소집을 제안했다.[1][2]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앙리 2세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앙리 2세는 1555년 이단 혐의자에게 사형을 명령하는 칙령을 내렸고,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 이후에는 더욱 박해를 강화하여 각 파르르망(고등법원)에 이단 색출을 위한 특별 위원회 '샹브르 아르당트(불타는 방)'를 설치했다. 이러한 혹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559년 5월 말, 장 칼뱅의 제자인 장 모렐의 주재 하에 첫 번째 전국 시노드가 파리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어, 갈리아 신앙고백서 제정의 기초를 마련했다.[2]
2. 1. 프랑스 종교개혁 초기
프랑스 개혁교회 신자들, 즉 위그노들은 초기에 공식적인 신조나 중앙 집권적인 조직 없이 활동했다. 교리적 원칙인 "성경적 진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그들이 사용하던 성경 판본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16세기 중반 개신교도들이 번역하고 출판한 것이었다. 1534년,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프랑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출판했으며, 1552년에는 로베르 에티엔이 라틴어로 성경과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이듬해인 1553년에는 J. 제라드가 프랑스어 성경 번역본을 출판했다.[2]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개혁파 교인들은 더 이상 숨어서 활동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 수는 약 40만 명까지 증가했다. 1555년부터 1558년 사이에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고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1][3] 점차 통일된 중앙 교회 조직과 공동의 신앙 고백 문서의 필요성이 커졌다. 1558년, 푸아티에의 개혁 교회들 사이에서 교리적 차이가 발생하자, 파리에서 방문 온 목사 앙투안 드 라 로슈 샹디외 (1534–1591)는 파리로 돌아가 공동 신앙 고백과 규율서를 만들기 위한 시노드(종교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그 결과 1559년, 파리에서 첫 번째 전국 프랑스 개혁 시노드가 열려 두 개의 문서가 만들어졌다.[1][2]
이 모든 활동은 엄격한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다. 1555년 초, 앙리 2세는 이단 혐의가 있는 모든 이에게 사형을 명령하는 칙령을 발표하며 위그노들을 화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1559년 3월에서 4월 사이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이탈리아 전쟁이 끝나자, 국왕은 더욱 열성적으로 이단 척결에 나섰다. 1559년에는 각 파르르망(고등법원)에 이단 관련 칙령의 실행을 감시하는 특별 위원회인 '샹브르 아르당트(불타는 방)'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559년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파리 회중의 목사이자 장 칼뱅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장 모렐의 주재 하에 프랑스 개혁 교회의 첫 번째 전국 시노드가 파리에서 열렸다. 시노드에 참석한 대표의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2]
2. 2. 전국 시노드 소집과 신앙고백서 채택
프랑스 개혁교회 신자들, 즉 위그노들은 초기에 공식적인 신조나 중앙 집권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했다. 성경 판본에 교리 원칙("성경적 진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포함되었고, 16세기 중반 개신교도들이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했다. 1534년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프랑스어 신약성서를 출판했고, 1552년 로베르 에티엔은 라틴어로 성경과 신약성서를 출판했으며, 1553년에는 J. 제라드가 프랑스어 성경 번역본을 출판했다.[2]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개혁파 교인들은 더 이상 지하에서 활동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 수가 약 40만 명으로 증가했다. 1555년부터 1558년 사이에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고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조직화했다.[1][3] 이에 따라 통일된 교회 조직과 공동 신앙고백의 필요성이 커졌다. 1558년 푸아티에의 개혁 교회들 사이에 교리적 차이가 발생하자, 파리에서 방문한 목사 앙투안 드 라 로슈 샹디외 (1534–1591)는 파리로 돌아가 공동 신앙 고백과 규율서를 만들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1][2]
이러한 활동은 앙리 2세의 박해 속에서 엄격한 비밀 유지 하에 이루어졌다. 앙리 2세는 1555년 초 칙령을 통해 이단 혐의가 있는 모든 이에게 사형을 명령하고 위그노들을 화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1559년 3월에서 4월 사이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이탈리아 전쟁이 끝나자, 국왕은 더욱 열성적으로 이단 척결에 나섰다. 1559년에는 이단 관련 칙령의 실행을 감시하기 위해 각 파르망(고등법원)에 특별 위원회(Chambre ardente|샹브르 아르당트프랑스어, '불타는 방'이라는 뜻)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개혁교회의 첫 번째 전국 시노드가 1559년 5월 파리에서 열렸다. 시노드는 파리 회중의 목사이자 장 칼뱅의 제자이자 친구인 장 모렐의 주재하에 진행되었으며, 정확한 대표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2]
갈리아 신앙고백서의 기초는 1557년 박해가 심했던 시기 프랑스 개혁교회가 장 칼뱅에게 보낸 신앙 고백서였다. 이를 바탕으로 칼뱅과 그의 제자 앙투안 드 라 로슈 샹디외는, 아마도 테오도르 베자와 피에르 비레의 도움을 받아, 35개 조항으로 구성된 프랑스어 신앙 고백서를 작성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자신들의 원칙을 옹호하는 편지와 함께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에게 전달되었다.[1][4]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72개 교회를 대표하는 20명의 대표들이 1559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파리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프랑수아 드 모렐을 사회자로 하여, 대표들은 ''교회 규율 헌장''과 ''신앙 고백서''를 작성했다. 이때 장 칼뱅이 작성한 35개 조항을 바탕으로 하되, 이를 수정하고 확장하여 총 40개 조항(처음 두 조항을 여섯 개 조항으로 확장)으로 이루어진 신앙 고백서를 최종적으로 채택했다.[1]
3. 발전 과정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1557년 박해 시기에 프랑스 개혁교회가 존 칼빈에게 보낸 신앙 고백서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존 칼빈과 그의 제자 앙투안 드 라 로슈 샹디외는 아마도 테오도르 베자와 피에르 비레의 도움을 받아 35개 조항으로 구성된 프랑스어 신앙 고백서 초안을 작성했다.[1][4]
박해가 잠시 잦아든 1559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72개 교회를 대표하는 20명의 대표들이 파리에서 비밀리에 모였다. 프랑수아 드 모렐의 사회 아래, 대표들은 '교회 규율 헌장'과 '신앙 고백서'를 작성했다. 이때 칼빈이 작성한 35개 조항의 초안이 사용되었으나, 일부 수정과 확장을 거쳐 총 40개 조항으로 완성되었다(기존 첫 두 조항이 여섯 개 조항으로 확장됨).[1] 이 신앙 고백서는 이후 프랑스 왕실에 제출되기도 하였다.[2]
한편, 이 신앙 고백서는 프랑스 외 지역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1568년 베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1571년 엠덴 (니더작센)에서 열린 독일 시노드에서 승인을 받았다.[2] 또한, 1532년부터 개혁 교회와 연합했던 피에몬테의 왈도파는 1560년에 이 신앙 고백서를 사보이 공작에게 자신들의 신앙 고백으로 제출했으며, 1655년에 축약 및 개정된 형태는 오늘날까지도 왈도파의 신앙 고백서로 여겨진다.[5]
벨기에 신앙 고백서 (1561) 역시 갈리아 신앙고백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저자인 귀도 드 브레스는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며 갈리아 신앙고백서의 교리 순서를 참고하고 많은 부분을 따랐다.[1]
3. 1. 왕실에 제출과 푸아시 회의
1560년, 신앙 고백서는 프랑스의 새로운 왕 프랑수아 2세에게 앙부아즈에서 전달되었다. 이 문서에는 서문이 추가되었는데, 왕에게 개신교도 박해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2] 그러나 1560년 12월 5일, 왕이 오를레앙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년 후인 1561년, 테오도르 드 베자는 푸아시 회의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왕 샤를 9세에게 이 신앙 고백서를 소개했다.[2]3. 2. 라로셸 시노드와 공인
1571년, 프랑스 개혁교회의 제7차 전국 시노드가 당시 프랑스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던 라 로셸에서 개최되었다.[1] 이 시노드에는 나바라의 여왕 잔 3세와 그의 아들인 나바라의 앙리(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 국왕), 콩데 공 루이 1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프랑스의 주요 위그노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시노드에서는 갈리아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모든 참석자 앞에서 낭독되었고, 이후 대표들과 주요 인사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라 로셸 신앙고백서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다.[2]라 로셸 시노드(1571)의 주요 참석자들:




이 신앙 고백서는 19세기까지 프랑스 개혁교회에서 중요한 문서로 여겨졌다.
4. 주요 내용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수함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프랑스 국민들의 일치된 신앙 고백, 서기 1559년"이라는 부제를 가지며, 각 조항에는 성경 구절이 함께 제시된다. 전체 구조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1559) 및 제네바 요리 문답(1542/1545)과 유사하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부 (제1-8조)''': 하나님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하나님의 본성, 속성, 창조와 성경을 통한 계시, 성경의 권위와 정경, 삼위일체 교리, 창조와 섭리 등을 설명한다. 특히 제5조에서는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니케아 신경이 성경과 일치함을 고백하며, 제6조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관련 이단들을 배격한다.
- '''제2부 (제9-24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의 타락과 원죄, 하나님의 예정 교리(제12조),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의 신성 및 인성(제13-15조), 십자가 희생을 통한 화해와 용서(제16-17조), 믿음을 통한 칭의(제18-20조), 믿음과 성화(제21-22조),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자 역할과 그 외의 중보 수단(성인 중보, 연옥 등) 거부(제23-24조) 등을 포함한다.
- '''제3부 (제25-28조, 제34-38조)''': 성령의 사역과 성례를 중심으로 다룬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말씀 선포를 통해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이며(제25-28조), 참된 교회의 표지와 '교황주의'(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다. 성례는 말씀을 보완하는 은혜의 표징으로 세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만 인정하며, 각 성례의 의미와 효력을 설명한다(제34-38조). 특히 주의 만찬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강조하며 화체설을 부정한다.
- '''제4부 (제29-33조, 제39-40조)''': 교회의 질서와 국가와의 관계를 다룬다. 참된 교회는 목사, 감독, 집사에 의해 다스려져야 하며, 모든 목사는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함을 강조한다(제29-33조). 또한 평화 유지와 질서 확립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시민 정부에 대한 순종의 의무와 정부의 역할을 설명하며, 통치자가 불신자일지라도 세금 납부 등 시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제39-40조).
4. 1. 하나님
갈리아 신앙고백서의 첫 번째 부분(제1-8조)은 하나님에 대해 다룬다.- '''제1-2조'''는 하나님의 영원성, 불변성, 전능함과 같은 본질적인 속성과,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과 성경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신 계시에 대해 설명한다.
- '''제3-5조'''는 성경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자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겨지며, 성령은 신자들이 정경과 비정경 문서를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니케아 신경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고백한다.
- '''제6조'''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며, 한 분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함을 밝힌다. 성부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신 말씀이자 지혜이시고,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묘사된다. 이 조항은 힐라리우스,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시우스, 키릴로스 1세와 같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이 정죄했던 이단 사상을 명확히 거부한다.
- '''제7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선언한다.
- '''제8조'''는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주관하시는 섭리에 대해 다룬다. 하나님은 악을 만드신 분이 아니며, 오히려 죄인들이 행하는 악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4. 2. 그리스도
갈리아 신앙고백서의 두 번째 부분(제9-24조)은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의 유일성''': 제13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선언한다.
- '''그리스도의 본성''': 제14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합되었음을 설명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죄는 없으셨다. 이 조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같은 고대의 이단들을 명확히 거부한다. 제15조는 한 인격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한다.
- '''화해와 용서''': 제16조와 17조는 오직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 '''칭의''': 제18조부터 20조까지는 칭의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하며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 '''믿음과 성화''': 제21조와 22조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며(중생), 성령 안에서 거룩한 삶(성화)을 살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믿음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실을 낳지만, 이 행실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며, 의로움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존한다.
- '''유일한 중보자''': 제23조와 24조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으므로, 다른 구원의 길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성인들의 중보 기도, 연옥, 수도원 서약, 순례, 금식, 비밀 고해성사, 면죄부 등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을 해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4. 3. 성령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고백한다. 제6조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그분의 에너지와 능력'으로 설명하며, 한 신적 본질 안에 하나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세 위격이 존재함을 명확히 한다.[1] 이 고백서는 힐라리우스,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시우스, 키릴로스와 같은 "거룩한 교부"들이 정죄한 삼위일체 관련 이단들을 거부한다.[1]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성령은 신자들이 성경의 정경과 비정경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다(제3-5조).[1] 또한, 칭의를 받은 신자는 믿음을 통해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는다(제21-22조). 믿음은 필연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지만, 이 열매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의로움의 근거가 된다.[1]
성령은 교회 안에서 역사하며(제25-28조),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과 인이며, 이것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돕고 위로한다'고 정의된다(제34-38조).[1] 성령은 외적인 표징인 성례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한다.[1]
구체적으로 세례에서는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며(제34-38조), 주의 만찬에서는 성령의 '비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통해 신자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영양분을 공급받는다고 설명한다(제34-38조).[1] 이는 믿음으로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찬 요소 자체에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임재한다는 가톨릭의 견해는 부정된다.[1]
4. 4. 교회
갈리아 신앙고백서의 제25조부터 제38조까지는 교회와 성례에 대해 다룬다.'''교회의 본질과 제도''' (제25-33조)
교회는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통해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교회는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정의된다. 교회 안에 위선자나 부도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를 더럽힐 수는 없다고 본다.
이 신앙고백서는 '교황주의'(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미신, 우상 숭배, 말씀과 성례의 왜곡을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세례의 권능과 효력 덕분에 교황주의 안에도 참된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인정한다. 세례의 유효성은 집례자의 신앙에 달려있지 않으므로, 로마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참된 교회는 목사, 감독, 집사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참된 목사는 합법적으로 선출되어야 하며, 모든 목사는 서로 동등한 권위와 권능을 가진다. 이들은 오직 유일한 보편적 감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명시하여 교회 간의 평등을 강조한다.
'''성례''' (제34-38조)
성례는 말씀을 보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과 인(印)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돕고 위로하는' 외적인 표징으로 정의된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성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견해와 달리 세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만 인정된다.
-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나타내는 인(印)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고', 그의 피로 깨끗하게 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된다고 본다.
-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증거이다. 참여자는 성령의 '비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영양분을 공급받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빵과 포도주가 몸에 영양을 공급하듯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영혼에 영양을 공급한다고 이해한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교황주의자'의 주장은 거부된다.
5. 현대적 의의와 영향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작성된 이후 유럽 개혁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왕가에 전달되어 위그노 박해 중단을 요청하는 데 사용되었고,[2] 독일 개혁교회 시노드에서도 승인받았다.[2]
또한 피에몬테의 왈도파는 이를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했으며,[5] 1561년에 작성된 벨기에 신앙 고백서에도 영향을 주었다.[1] 특히 1571년 라 로셸에서 열린 프랑스 개혁교회 전국 시노드에서는 나바라 여왕 잔 3세, 나바라의 앙리(훗날 앙리 4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재확인되었다. 이 시노드를 통해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라 로셸 신앙 고백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2]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갈리아 신앙고백서는 19세기까지 프랑스 개혁 교회 내에서 중요한 신앙 문서로 자리매김했다.
5. 1. 유럽 개혁교회에 미친 영향
1559년 7월 10일, 앙리 2세가 파리에서 사망한 후, 1560년에 신앙 고백서는 프랑스의 새로운 왕 프랑수아 2세에게 앙부아즈에서 전달되었다. 이 문서에는 왕에게 개신교도 박해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을 담은 서문이 추가되었다.[2] 그러나 프랑수아 2세는 1560년 12월 5일, 17세가 되기 전에 오를레앙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년 후인 1561년, 테오도르 드 베자는 푸아티에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왕 샤를 9세에게 이 신앙 고백서를 소개했다. 몇 년 후, 이 신앙 고백서는 독일에서도 승인을 받아, 1568년 베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1571년 엠덴 (니더작센)에서 열린 독일 시노드에서 인정받았다.[2]1532년에 이미 개혁 교회와 연합했던 피에몬테의 왈도파는 1560년에 프랑스 신앙 고백서를 사보이 공작에게 자신들의 신앙 고백서로 제출했다. 1655년에 축약 및 개정된 이 신앙 고백서의 판본은 오늘날에도 왈도파의 신앙 고백서로 여겨지고 있다.[5]
벨기에 신앙 고백서 (1561)는 프랑스 신앙 고백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저자 귀도 드 브레스는 그의 신앙 고백서에서 교리의 순서를 면밀히 따르고 참조했다.[1]
1571년, 프랑스 개혁 교회의 일곱 번째 전국 시노드가 프랑스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던 라 로셸에서 열렸다.[1] 이 시노드에는 나바라 여왕 잔 3세, 그녀의 아들 나바라의 앙리 (후에 앙리 4세), 콩데 공 루이 1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 및 기타 고위 프랑스 위그노들이 주요 내빈으로 참석했다. 프랑스 신앙 고백서의 내용은 시노드에 참석한 모든 회중 대표와 내빈들에게 낭독되었고, 그 후 서명되었다. 이 엄숙한 절차를 거쳐 갈리아 신앙 고백서는 두 번째 이름, 즉 ''라 로셸 신앙 고백서''를 얻었다.[2]
'''라 로셸 시노드(1571) 주요 참가자'''
이 신앙 고백서는 19세기까지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5. 2. 한국교회와의 연관성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참조
[1]
서적
A History of Creeds and Confessions of Faith in Christendom and Beyond
T. & T. Clark
[2]
서적
Православн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https://www.pravenc.[...]
2003
[3]
서적
Gallic Confession
Marshall Morgan & Scott Publications Ltd.
1985
[4]
서적
The Creeds of Christendom: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with Translations
https://books.google[...]
Harper
[5]
서적
Reformation und Gegenreformation im Val Cluson 1532-1730
[6]
서적
Galic Confession
"//en.wikipedia.org/[...]
Marshall Morgan & Scott Publications Ltd.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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