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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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3년 2월 27일에 실시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 공포 이후 치러진 첫 번째 선거로,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제도가 도입되었다. 선거 결과,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지역구 73석을 확보하고 유신정우회 의석을 더해 국회 과반수를 차지했다. 총 투표율은 71.4%를 기록했으며, 민주공화당은 중선거구제의 이점을 활용하여 다수의 지역구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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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
---|---|
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선거 유형 | 국회의원 선거 |
선거일 | 1973년 2월 27일 |
선출 의석 | 219석 중 146석 |
과반 의석 | 110석 |
투표율 | 71.36% ( 1.86%p)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71년 |
다음 선거 |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78년 |
정당별 결과 | |
정당 | 민주공화당 |
지도자 | 박정희 |
이전 선거 의석 | 113석 |
선거 전 의석 | 114석 |
획득 의석 | 73석 |
의석 변동 | 40 |
득표수 | 4,251,754 |
득표율 | 38.68% |
득표율 변동 | 10.09%p |
정당 | 신민당 |
지도자 | 유진산 |
이전 선거 의석 | 89석 |
선거 전 의석 | 89석 |
획득 의석 | 52석 |
의석 변동 | 37 |
득표수 | 3,577,300 |
득표율 | 32.55% |
득표율 변동 | 11.83%p |
정당 | 민주통일당 |
지도자 | 양일동 |
이전 선거 의석 | 신생 정당 |
선거 전 의석 | 0석 |
획득 의석 | 3석 |
의석 변동 | 새로운 |
득표수 | 1,114,204 |
득표율 | 10.14% |
득표율 변동 | 새로운 |
선거 후 | |
국회의장 | 정일권 |
국회의장 소속 정당 | 민주공화당 |
2. 경과
민주공화당은 제8대 총선에서 과반수를 유지했으나, 제7대 총선에 비해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의석이 40%를 넘으면서 헌법 개정을 여당 단독으로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로써 3선 개헌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을 유지할 길이 막히게 되었다. 한편, 미국과 중국,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로 동서 냉전이 완화되는 가운데, 남북한에서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어 여러 차례의 비밀 회담 끝에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직후인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라는 취지의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 해산, 정당의 정치 활동 중단,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특별 조치를 취했다(10월 유신). 그리고 10월 27일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유신헌법)을 공포했고, 개정안에 대한 찬반 운동이 금지된 가운데, 입회인 없는 국민투표(11월 21일)에 부쳐 90% 이상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어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는 폐지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선출하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대통령 중임 제한도 폐지되었다. 국민의 기본적 인권도 제한되었고, 국회는 국정감사권이 폐지되었으며, 제3공화국 시대의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에서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정수 2명의 중선거구에서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국회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다.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유일하게 출마한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 체제가 출범하고, 이듬해인 1973년 2월 27일에 국회 중선거구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2. 1. 선거 방식
유신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1선거구에서 2인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하여 전국을 73개 선거구로 나누었다. 국회의원 정수는 선거구 선출 146명, 의원정수의 1/3인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73명으로 모두 219명이었다.[9] 유신 정권은 여촌야도라는 전통적인 선거경향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도시선거구를 45개에서 17개로 줄이고, 농촌선거구를 도시선거구와 통합시키는 게리맨더링 선거구를 확정하기도 하였다.각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단기 비례 대표제를 통해 선출하였다.
1972년 12월 30일 공포된 개정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실시되었다. 새로운 선거법의 특징은 ①무소속 후보자의 출마 허용, ②중선거구제 채택, ③선거운동의 공영화를 철저히 하고 후보자 개인에 의한 선거운동을 일절 금지하는 것이다. 정당법도 개정(1972년 12월 31일)되어 정당 요건이 엄격해짐에 따라 군소 정당이 일소되어 본 선거에 참여한 정당은 민주공화당, 신민당, 민주통일당 3당뿐이었다.
구분 | 선거구 선출 | 대통령 추천 |
---|---|---|
의석수 | 146석 | 73석 |
의원 임기 | 6년 | 3년 |
- 선거 제도: 중선거구 단기 투표제(일률 정수 2명으로 73개 선거구). 무소속 후보의 출마도 허용
- 투표일: 1973년 2월 27일
2. 2. 입후보 및 선거 운동
지역구에는 339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2.3:1의 비교적 저조한 경쟁률을 보였다. 이는 유신 정권으로 인해 정치적 자유가 위축되고 출마 자체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 때문이었다.[13]야당인 신민당은 유신 정권의 영향으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신민당이 낼 수 있는 목소리 강도의 상한선은 ‘민주 헌정의 지향’, ‘불법 부당한 침해로부터의 민권 보장’ 같이 극히 추상적인 공약들이었다.[13]
2. 3. 선거 결과
투표율은 72.9%로, 제8대 총선보다 0.3%p 소폭 하락했다.[10] 민주공화당은 지역구 의원 정수의 50%인 73석을 확보했으며, 유신정우회를 합치면 여당의 의석 점유율은 66.7%에 달했다. 신민당은 52석(35.6%), 민주통일당은 2석(1.4%), 무소속은 19석(13.0%)을 차지했다.지역구 득표율은 민주공화당 38.7%, 신민당 32.5%, 민주통일당 10.2%, 무소속 18.6%였다. 민주공화당은 고양시·김포시·강화군, 충주시·중원군·제천시·단양군, 청송군·영덕군·울진군, 통영시·거제시·고성군의 4개 선거구에서 복수 후보를 공천하여 모두 당선시키는 등 중선거구제의 이점을 활용했다.[12]
3. 선거 정보
4. 투표율
전국 선거인수 15,690,830명 중 11,196,484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71.4%를 기록하였다.[10] 이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0.3% 낮아진 수치이며, 역대 선거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5. 정당별 결과
1972년 12월 30일에 공포된 개정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이번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제1당이 되었다. 유신정우회의 73석을 더하면 여당이 국회 3분의 2를 차지하는 결과가 되었다.[9] 민주공화당 후보는 모두 당선되었으며, 8대 총선에서 1석에 그쳤던 서울특별시에서도 신민당에 단 1석 차이로까지 따라붙었다.
민주공화당은 지역구 의원 정수의 50%에 해당하는 73명을 확보했다.[10] 신민당은 52명(35.6%), 민주통일당은 2명(1.4%), 무소속은 19명(13.0%)을 확보하였다.[10]
정당별 득표율을 살펴보면, 민주공화당은 38.68%로 가장 높았고, 신민당은 32.55%, 민주통일당은 10.14%를 기록했다. 무소속 후보들의 득표율은 18.63%였다.[10]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 | |
---|---|---|---|---|
bgcolor= | 민주공화당 | 4,251,754 | 38.68 | 73 |
bgcolor= | 신민당 | 3,577,300 | 32.55 | 52 |
bgcolor= | 민주통일당 | 1,114,204 | 10.14 | 2 |
bgcolor=#DDDDDD | 무소속 | 2,048,178 | 18.63 | 19 |
bgcolor=#000000 | 유신정우회 | 73 | ||
기권/무효 | 205,048 | colspan=4 bgcolor=#F4F4F4 | | ||
합계 | 11,196,484 | 100 | 219 | |
등록 유권자 / 투표율 | 15,690,130 | 72.9 | colspan=3 bgcolor=#F4F4F4 | |
5. 1. 지역구
민주공화당은 집권당의 위력과 중선거구제의 수혜를 받아 지역구 의원 정수의 50%에 해당하는 73명을 확보했다.[10] 신민당은 52명(35.6%), 민주통일당은 2명(1.4%), 무소속은 19명(13.0%)을 확보하였다.[10]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은 민주공화당 38.7%, 신민당 32.5%, 민주통일당 10.2%였다.[10]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
민주공화당 | 4,251,754 | 38.7 | 73 |
신민당 | 3,577,300 | 32.5 | 52 |
민주통일당 | 1,114,204 | 10.1 | 2 |
무소속 | 2,048,178 | 18.7 | 19 |
합계 | 10,991,436 | 146 | |
시·도 | 정수 | 정당 | |||
---|---|---|---|---|---|
민주공화당 | 신민당 | 민주통일당 | 무소속 | ||
합계 | 146 | 73 | 52 | 2 | 19 |
서울특별시 | 16 | 7 | 8 | 0 | 1 |
부산광역시 | 8 | 4 | 4 | 0 | 0 |
경기도 | 16 | 9 | 6 | 0 | 1 |
강원도 | 10 | 5 | 3 | 0 | 2 |
충청북도 | 8 | 5 | 2 | 0 | 1 |
충청남도 | 14 | 6 | 6 | 0 | 2 |
전라북도 | 12 | 4 | 4 | 0 | 4 |
전라남도 | 20 | 10 | 6 | 2 | 2 |
경상북도 | 22 | 12 | 5 | 0 | 5 |
경상남도 | 18 | 10 | 8 | 0 | 0 |
제주특별자치도 | 2 | 1 | 0 | 0 | 1 |
굵은 숫자는 해당 지역에서 제1당이 된 것을 나타낸다.
민주공화당은 고양시·김포시·강화군, 충주시·제천시·단양군, 청송군·영덕군·울진군, 통영시·거제시·고성군의 4개 선거구에서 2명을 공천하여 모두 당선되었다.[12]
5. 2. 유신정우회
1973년 3월 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 73명과 예비후보 14명을 찬반투표를 통해 선출하였다. 출석 대의원 수는 2,354명이었으므로 통과에는 과반인 1,178표가 필요했다.[14]찬성 | 반대 | 무효 | 투표수 | 불참 | 재적 대의원수 | |
---|---|---|---|---|---|---|
서울 | 229 | 2 | 0 | 301 | 2 | 303 |
부산 | 95 | 7 | 1 | 103 | 1 | 104 |
경기 | 274 | 4 | 2 | 280 | 0 | 280 |
강원 | 135 | 10 | 0 | 145 | 0 | 145 |
충북 | 125 | 2 | 0 | 127 | 0 | 127 |
충남 | 226 | 5 | 0 | 231 | 0 | 231 |
전북 | 187 | 10 | 3 | 200 | 0 | 200 |
전남 | 297 | 11 | 3 | 311 | 1 | 312 |
경북 | 335 | 13 | 5 | 353 | 1 | 354 |
경남 | 253 | 18 | 7 | 278 | 0 | 278 |
제주 | 25 | 0 | 0 | 25 | 0 | 25 |
합계 | 2,251 | 82 | 21 | 2,354 | 5 | 2,359 |
대통령 추천으로 당선된 의원 73명 중 18명은 공화당 당적, 2명은 신민당 당적, 53명은 무소속이었다.[15] 그러나 당적 보유 당선자들은 모두 개원 후 소속 정당을 탈당하고 유신정우회에 가입하였다.
1976년 2월 1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 73명과 예비후보 5명에 대한 찬반투표를 진행,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출석 대의원 수는 2,289명이었으므로 통과에는 과반인 1,145표가 필요했다.[16]
찬성 | 반대 | 무효 | 투표수 | 불참 | 재적 대의원수 | |
---|---|---|---|---|---|---|
서울 | 287 | 0 | 2 | 289 | 3 | 292 |
부산 | 99 | 1 | 1 | 101 | 0 | 101 |
경기 | 269 | 0 | 1 | 270 | 2 | 272 |
강원 | 142 | 0 | 0 | 142 | 1 | 143 |
충북 | 122 | 0 | 0 | 122 | 0 | 122 |
충남 | 219 | 0 | 2 | 221 | 1 | 222 |
전북 | 196 | 0 | 0 | 196 | 2 | 198 |
전남 | 301 | 2 | 0 | 303 | 2 | 305 |
경북 | 348 | 1 | 0 | 349 | 1 | 350 |
경남 | 267 | 4 | 1 | 272 | 2 | 274 |
제주 | 24 | 0 | 0 | 24 | 0 | 24 |
합계 | 2,274 | 8 | 7 | 2,289 | 14 | 2,303 |
5. 3. 지역별 결과
지역 | 민주공화당 | 신민당 | 민주통일당 | 무소속 | 합계 |
---|---|---|---|---|---|
서울특별시 | 7 | 8 | 0 | 1 | 16 |
부산광역시 | 4 | 4 | 0 | 0 | 8 |
경기도 | 9 | 6 | 0 | 1 | 16 |
강원도 | 5 | 3 | 0 | 2 | 10 |
충청북도 | 5 | 2 | 0 | 1 | 8 |
충청남도 | 6 | 6 | 0 | 2 | 14 |
전라북도 | 4 | 4 | 0 | 4 | 12 |
전라남도 | 10 | 6 | 2 | 2 | 20 |
경상북도 | 12 | 5 | 0 | 5 | 22 |
경상남도 | 10 | 8 | 0 | 0 | 18 |
제주특별자치도 | 1 | 0 | 0 | 1 | 2 |
합계 | 73 | 52 | 2 | 19 | 146 |
6. 주요 당선자
대통령 선거를 통해 유신정우회 의원들이 선출되었고,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각 지역구별 국회의원들이 선출되었다. 김종필, 백두진 등 여권 핵심 인사들이 유신정우회에 포함되었다.[1]
6. 1. 지역구
6. 2. 유신정우회
1973년 3월 12일부터 1976년 3월 11일까지 임기였던 전반기 유신정우회 의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1]
1976년 3월 12일부터 1979년 3월 11일까지 임기였던 후반기 유신정우회 의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1]
7. 평가 및 영향
10월 유신 이후 유신 체제 하에서 치러진 첫 총선으로, 대통령의 권력 강화와 국회의 권한 약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공화당은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과반수를 유지했으나, 제7대 총선에 비해 의석수가 크게 줄었고, 반대로 야당인 신민당이 약진하여 의석이 40%를 넘으면서 여당 단독으로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는 3선 개헌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국과 중국,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로 동서 냉전이 완화되는 가운데, 남북한에서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어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직후인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라는 취지의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 해산, 정당의 정치 활동 중단,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특별 조치를 취했다.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는 폐지되고, 새롭게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이 선출하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대통령의 중임 제한도 폐지되었다.[1] 국민의 기본적 인권도 제한되었고, 국회의 경우 국정감사권이 폐지되었다.[1] 또한 제3공화국 시대의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에서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명단에서 선출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정수 2명의 중선거구에서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국회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다.[1]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
웹사이트
三年制議員(삼년제의원)73명 大統領推薦(대통령추천)대로選出(선출)
https://newslibrary.[...]
[3]
서적
Elections in Japan, Korea, and Taiwan Under the Single Non-Transferable Vote: The Comparative Study of an Embedded Institution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4]
뉴스
新民全黨大會 珍山系만으로 强行
http://newslibrary.n[...]
1972-09-26
[5]
뉴스
金弘壹씨系 新民黨 떠나기로 鄭一亨씨는 殘留
http://newslibrary.n[...]
1973-01-18
[6]
뉴스
金弘壹씨新民脫党 民統党에參与할듯
http://newslibrary.n[...]
1973-01-19
[7]
뉴스
統一黨간부들, 總選참여를후회
http://newslibrary.n[...]
1973-03-03
[8]
웹사이트
三年制議員(삼년제의원)73명 大統領推薦(대통령추천)대로選出(선출)
https://newslibrary.[...]
[9]
문서
1973년 3월 7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자 명부에 대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일괄 투표하여 선출. 자세한 내용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를 참조
[10]
문서
한국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대선거정보시스템」에서 인용
[11]
서적
現代韓国と女性
新幹社
[12]
PDF
9代議員당선자(9代議員当選者)
http://gonews.kinds.[...]
1973-03-01
[13]
서적
청와대 비서실 2
중앙일보사
[14]
웹인용
三年制議員(삼년제의원)73명 大統領推薦(대통령추천)대로選出(선출)
https://newslibrary.[...]
2019-03-12
[15]
웹인용
새로운 의정 궤도 - 9대 국회의 향방
https://newslibrary.[...]
2019-07-20
[16]
웹인용
第(제)2期(기)「維政議員(유정의원)」73名當選(명당선)
https://newslibrary.[...]
20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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