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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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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노라는 유대교의 중요한 상징으로,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계시한 설계에 따라 순금으로 제작된 일곱 개의 등불을 의미한다. 성전 시대에는 성전의 신성한 지역에 위치했으며, 이후 유대교의 상징으로 회당, 석관 등 다양한 곳에 묘사되었다.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부조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메노라를 약탈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국장에 반영되었다. 메노라는 빛과 지혜, 계몽을 상징하며, 현대 유대교에서는 회당, 이스라엘 국장, 홀로코스트 추모비 등에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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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라

2. 성서에서의 기원

출애굽기 25장 31절부터 36절에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메노라를 만들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순금으로 등잔대 받침과 기둥을 만들고, 꽃 모양의 잔과 봉오리, 꽃을 한 덩어리로 만들도록 하였다. 등잔대 옆으로 여섯 개의 가지를 뻗게 하고, 각 가지에 아몬드꽃 모양의 잔 셋과 봉오리, 꽃을 만들도록 했다. 등잔대 위에는 아몬드꽃 모양의 잔 넷과 봉오리, 꽃을 만들고,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를 하나씩 만들도록 했다. 봉오리와 가지는 등잔대와 한 덩어리가 되게 하고 순금으로 두들겨 만들도록 지시하였다.[4]

2. 1. 히브리 성서

히브리어 성경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메노라의 설계를 보여주셨다고 기록하며, 메노라의 제작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4]

31 순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받침과 기둥을 두들겨 만들고, 그 위에 꽃 모양의 잔과 봉오리와 꽃을 한 덩어리로 만들라.32 등대 옆으로 여섯 개의 가지를 뻗게 하되, 한쪽에 셋, 다른 쪽에 셋을 만들라.33 한 가지에는 아몬드꽃 모양의 잔 셋을 만들고, 봉오리와 꽃도 만들되, 등대에서 뻗어나온 여섯 가지 모두에 이와 같이 하라.34 등대 위에는 아몬드꽃 모양의 잔 넷을 만들고, 봉오리와 꽃도 만들라.35 등대에서 뻗어나온 첫 번째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 하나, 두 번째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 하나, 세 번째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 하나를 만들되, 모두 여섯 가지가 되게 하라.36 봉오리와 가지는 등대와 한 덩어리가 되게 하여 순금으로 두들겨 만들라.37 그런 다음 일곱 잔을 만들어 등대 위에 놓고, 그 앞을 비추게 하라.38 심지 자르개와 받침은 순금으로 만들라.39 등대와 그 모든 부속품에는 순금 한 타렌트를 사용하라.40 산에서 네게 보여준 모형대로 만들도록 하라.[5]



민수기(8장)는 일곱 잔이 등대 앞을 비추도록 하며, 등대가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대로 만들어졌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6]

마이모니데스가 그린 메노라 그림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 18 손가락 너비(세 개의 일반적인 큐빗(팔꿈치 길이)) 또는 약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지만, 탈무드 (''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두 학자 간의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예술적으로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일부 현대 해석에 따르면)와 마이모니데스(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논평한 스케치에서)[9]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10] 고전 시대(예: 필론과 요세푸스)와 중세 시대(예: 이븐 에즈라)의 다른 모든 유대인 권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성전 파괴를 목격한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2. 2. 기타 자료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지만, 탈무드(''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두 학자 간의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예술적으로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일부 현대 해석에 따르면)와 마이모니데스(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논평한 스케치에서)[9]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10]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 고전 시대(예: 필론과 요세푸스)와 중세 시대(예: 이븐 에즈라)의 다른 모든 유대인 권위자들은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성전 파괴를 목격한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3. 역사

메노라는 일찍이 유대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리코 회당이 유명함), 주두, 석관 등 여러 기구에 문양이 그려졌다.

로마에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13] 이 부조의 메노라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후에는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

3. 1. 성막과 성전 시대

히브리 성경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메노라의 설계를 보여주셨다고 기록하며, 메노라의 제작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4]

מְנוֹרָהhe

>31 순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받침과 기둥을 두들겨 만들고, 그 위에 꽃 모양의 잔과 봉오리와 꽃을 한 덩어리로 만들라.32 등대 옆으로 여섯 개의 가지를 뻗게 하되, 한쪽에 셋, 다른 쪽에 셋을 만들라.33 한 가지에는 아몬드꽃 모양의 잔 셋을 만들고, 봉오리와 꽃도 만들되, 등대에서 뻗어나온 여섯 가지 모두에 이와 같이 하라.34 등대 위에는 아몬드꽃 모양의 잔 넷을 만들고, 봉오리와 꽃도 만들라.35 등대에서 뻗어나온 첫 번째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 하나, 두 번째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 하나, 세 번째 가지 쌍 아래에 봉오리 하나를 만들되, 모두 여섯 가지가 되게 하라.36 봉오리와 가지는 등대와 한 덩어리가 되게 하여 순금으로 두들겨 만들라.

>37 그런 다음 일곱 잔을 만들어 등대 위에 놓고, 그 앞을 비추게 하라.38 심지 자르개와 받침은 순금으로 만들라.39 등대와 그 모든 부속품에는 순금 한 타렌트를 사용하라.40 산에서 네게 보여준 모형대로 만들도록 하라.[5]

민수기(8장)는 일곱 잔이 등대 앞을 비추도록 하며, 등대가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대로 만들어졌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6]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 18 손가락 너비(세 개의 일반적인 큐빗(팔꿈치 길이)) 또는 약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지만, 탈무드 (''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두 학자 간의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예술적으로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일부 현대 해석에 따르면)와 마이모니데스(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논평한 스케치에서)[9]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10] 고전 시대(예: 필론과 요세푸스)와 중세 시대(예: 이븐 에즈라)의 다른 모든 유대인 권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성전 파괴를 목격한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최초의 메노라는 성막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널 때까지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막 천막이 실로에 설치되었을 때,[21][22] 메노라 또한 그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무엘사울 시대에 언약궤가 옮겨진 기간 동안에는 메노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23]

열왕기 상하역대기 상하에 따르면, 솔로몬은 성전의 지성소(heikal)에 놓인 등대(menorah) 열 개를 만들었다.[24][25][26] 등대의 무게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자세한 지시 사항의 일부이다.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7년) 이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장군 느부사라단에 의해 등대가 가져가졌다.[27]

3. 2. 제2성전 시대와 로마 시대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가 18 손가락 너비(약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다. 탈무드 (''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마이모니데스[9][10]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 반면, 고전 시대와 중세 시대의 다른 유대인 권위자들은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제2성전 건설 당시 시온으로의 귀환 이후에는 메노라의 반환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성기물"만 언급되어 있다.[28] 마카비서에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약탈할 때 등대(복수)를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다.[29] 이후 "새로운 성기물"을 제작했다는 기록은 새로운 등대를 제작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30] 탈무드에 따르면, 귀환한 하스모니아 왕조는 가난하여 메노라를 나무로 만들었고, 나중에 은으로, 그리고 마침내 금으로 업그레이드했다고 한다.[31]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그림 왼쪽 아래에 로마 병사들이 메노라를 가져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원후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메노라는 로마로 옮겨졌다.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로마로 옮겨져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의 개선식에 포함되었다고 전한다.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부조에는 로마 병사들이 메노라를 포함한 제2성전의 전리품을 가져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메노라와 다른 성전 보물들은 로마의 평화 신전이나 황궁에 전리품으로 전시되었다.[32] 기원후 455년 로마가 반달족에 의해 약탈당했을 때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33]

이후 메노라는 유대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리코 회당이 유명함), 주두, 석관 등 여러 기구에 문양이 그려지게 되었다.

3. 2. 1. 티투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에 묘사된 메노라


로마에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13] 이 부조의 메노라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후에는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

제2성전 시대 메노라를 가장 유명하게 보존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은 티투스 개선문의 프리즈에 묘사되어 있다. 이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로마에서 열린 티투스의 개선식을 기념하는 것이다.[13] 프리즈에서 메노라는 육각형 받침대 위에 놓여 있으며, 이 받침대는 다시 약간 크지만 동심원이며 모양이 같은 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 따라서 모든 면에서 계단식 모양이 만들어진다. 육각형 받침대의 각 면은 두 개의 수직 기둥과 두 개의 수평 난간(상단 난간과 하단 난간)으로 만들어져, 움푹 들어간 패널에 맞춰 튀어나온 틀을 닮았다. 이 패널에는 부조 장식이 새겨져 있거나 조각되어 있다.

3. 2. 2. 마그달라 돌

마그달라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된 메노라가 새겨진 돌


2009년, 레지오 마리스 소유 부지 아래에서 마그달라 회당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제2성전 파괴 이전 시대의 토기가 발견되었다.[14] 회당 유적 내부에서는 조각된 돌 블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는 다른 정교한 조각들과 함께 일곱 갈래의 메노라가 묘사되어 있었다. 이는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진 묘사와는 상당히 달랐다. 티투스 개선문의 묘사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실제 메노라를 목격한 사람이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 마그달라 돌에 새겨진 메노라의 가지는 둥글지 않고 다각형이며, 받침대는 층층이 쌓인 형태가 아니라 삼각형이다. 이 유물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 발견되었으며, 티투스 개선문은 종종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된 원래 메노라에 대한 목격자 기록으로 해석되어 왔다.

3. 3. 로마 약탈 이후



기원후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예루살렘 함락(예루살렘 파괴) 이후 제2성전의 메노라는 로마로 옮겨졌다.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로마로 옮겨져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의 개선식에서 행렬에 포함되었다고 전한다.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부조에는 로마 병사들이 메노라를 포함한 제2성전의 전리품을 가져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메노라와 다른 성전 보물들은 로마의 평화 신전이나 황궁에 전리품으로 전시되었다.[32] 기원후 455년 로마가 반달족에 의해 약탈당했을 때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33]

카를 브리울로프(Karl Bryullov)가 그린 게세리크의 로마 약탈 그림(1833~1836년). 반달족이 빼앗아간 메노라를 묘사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메노라 복원품. 성전 연구소에서 제작하였다.


반달족의 로마 약탈 이후 메노라의 위치와 상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많은 학자들은 메노라가 로마를 떠나 카르타고와 그 이후의 여러 장소로 이동했다고 추정하지만, 일부는 메노라가 오늘날까지 로마에 남아 있다고 믿는다.

  • 많은 학자들은 메노라가 455년 반달족에 의한 로마 약탈 중에 빼앗겨 반달 왕국의 수도인 카르타고로 옮겨졌다고 본다.[34][35][36][37] 533년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가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반달족을 패배시켰을 때에도 보물들은 그곳에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메노라와 다른 보물들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메노라는 벨리사리우스의 개선 행렬 중 콘스탄티노플 거리를 따라 운반되었다.[38][35][36][37]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로마와 카르타고에 불운을 가져왔다는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보물들을 예루살렘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성역"으로 돌려보냈다고 덧붙였다. 그리하여 메노라는 오늘날 구시가지의 바테이 마흐세 광장 부근에 있는 네아 교회에 안치되었다.[39] 그러나 그곳에 도착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메노라를 위한 사당에 순례를 갔다는 흔적도 없다. 메노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면, 614년 페르시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약탈했을 때 파괴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네부카드네자르 침략 이전에 원래 메노라가 숨겨졌던 것처럼 성직자들에 의해 비밀리에 숨겨졌다고 한다.[35][36][40][38]

  • 전설과 이론에 따르면 메노라는 정복자들에 의해 녹여졌거나 금덩이로 부서졌거나, 화재로 파괴되었거나, 콘스탄티노플에 보관되었거나 반환되었거나, 난파선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주목할 만한 전통 중 하나는 메노라가 반달족과 함께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종종 구전 전승을 증거로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유대인 보물 목록이 있으며, 유대인 구전 전승에 따르면 이 보물들은 수세기 동안 로마에 있었다.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바티칸은 수세기 동안 메노라와 다른 언급된 성전 보물들을 숨겨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티칸 시국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지하실에 있다고 주장한다.[33][41] 이 구전 전승은 바빌론 탈무드와 함께 인쇄된 소전 중 하나인 랍비 나탄의 아보트에 기록되어 있다.


> 제작된 후 숨겨진 물건들은 다음과 같다. 회막과 그 안에 있는 그릇들, 계약궤와 깨진 돌판, 만나 단지와 기름 부음 기름 병, 아론의 지팡이와 그 아몬드와 꽃들, 제사장의 의복, 그리고 기름 부음 받은 대제사장의 의복.

>

> 그러나 아브티나스 가문의 향료 절구(성전에서 독특한 향을 만들 때 사용됨), 보리떡상, ''메노라'', (지성소와 지극히 거룩한 곳을 나누는) 휘장, 그리고 머리띠는 아직도 로마에 있다.[42]

예루살렘 포스트는 2022년 2월 기사에서 "메노라 촛대를 포함한 성전 그릇을 바티칸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명 살아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바티칸이 이 성물들을 '상속받아' 오늘날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적이고 유형적인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이스라엘 외교부와 보안 당국은 이미 증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약 50년 전, 바티칸 대학교인 우르바니아나에서 통신 과정에 등록한 특정 유대인 학생(DM)이 있었다. 그는 박사 학위 과정 마지막 학기 수업을 직접 수강하기 위해 왔고, 1만 7천 명의 학생 중 유일한 유대인이었다. DM은 사랑받았지만, 궁지에 몰리자 교수와 학생 모두 그를 존중하여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는 거절했지만, 그의 친구(나중에 바티칸 사서인 안토니오 사모레 추기경이 됨)는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과거' 그의 유대인 유산이었던 성전 그릇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DM은 몇 달 후 밤에 그곳에 갔다. 그 동굴에 성전에 속했던 것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정말 무언가를 보았을까, 아니면 가까이 갔을까? 여러 해 후인 2002년에 DM은 당시 고위 바티칸 관계자들과 협상 중이었던 시몬 페레스 당시 외무장관과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한 증거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은 이미 확실하고 잘 문서화된 사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 결국 증거는 젤라토에 있다. 메노라 촛대를 포함한 성전 그릇을 바티칸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명 살아 있다. 그들 중 누군가 나서서 자신이 아는 것을 폭로할까? 아닐 것이고, 솔직히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명하지 않을 수 있다.[43]

로마에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의 메노라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후에는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

4. 사용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 18 손가락 너비(세 개의 일반적인 큐빗(팔꿈치 길이)) 또는 약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지만, 탈무드 (''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두 학자 간의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예술적으로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일부 현대 해석에 따르면)와 마이모니데스(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논평한 스케치에서)[9]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10] 고전 시대(예: 필론과 요세푸스)와 중세 시대(예: 이븐 에즈라)의 다른 모든 유대인 권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성전 파괴를 목격한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탈출기에 따르면 메노라의 등불은 매일 신성하게 봉헌된 신선한 올리브 기름으로 켜졌으며 저녁부터 아침까지 타도록 했다.[15]

요세푸스는 일곱 개의 등불 중 세 개는 낮에도 계속 켜져 있었다고 기록했다.[16] 그러나 탈무드의 한 견해에 따르면 중앙 등불 하나만 하루 종일 계속 켜져 있었고, 그 등불에도 다른 등불들과 같은 양의 기름이 채워졌다.[17] 다른 모든 불은 꺼졌지만, 그 불은 처음에 불을 붙였을 때에도 계속해서 기름을 태우며 타고 있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이 기적은 쉐키나(Shechinah)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머물렀다는 표징으로 여겨졌다.[18] 이 등불은 심지의 방향 때문에 '네르 하마아라비'(서쪽 등불)라고 불렸다. 이 등불은 사무엘상 3장 3절에 언급된 '네르 엘로힘'(하나님의 등불)으로도 불렸다.[19][1] 탈무드에 따르면 '네르 하마아라비'의 기적은 기원전 3세기 또는 4세기 시몬 착한 자(Simeon the Just)의 대제사장 시대 이후로 끝났다.[20]

일부 현대 디자인과는 달리 고대 메노라는 기름을 태웠으며, 서기 400년경까지는 중동 지역에 알려지지 않았던 촛불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5. 상징

메노라는 유대교의 상징적인 존재로,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리코 회당이 유명함), 주두, 석관 등 여러 기구에 문양이 그려졌다.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의 메노라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48] [49]

메노라(Menorah)


카지미에시의 집의 하누키아

5. 1. 유대교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 18 손가락 너비(세 개의 일반적인 큐빗(팔꿈치 길이)) 또는 약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지만, 탈무드 (''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두 학자 간의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예술적으로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일부 현대 해석에 따르면)와 마이모니데스(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논평한 스케치에서)[9]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10] 고전 시대(예: 필론과 요세푸스)와 중세 시대(예: 이븐 에즈라)의 다른 모든 유대인 권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성전 파괴를 목격한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탈출기에 따르면 메노라의 등불은 매일 신성하게 봉헌된 신선한 올리브 기름으로 켜졌으며 저녁부터 아침까지 타도록 했다.[15]

요세푸스는 일곱 개의 등불 중 세 개는 낮에도 계속 켜져 있었다고 기록했다.[16] 그러나 탈무드의 한 견해에 따르면 중앙 등불 하나만 하루 종일 계속 켜져 있었고, 그 등불에도 다른 등불들과 같은 양의 기름이 채워졌다.[17] 다른 모든 불은 꺼졌지만, 그 불은 처음에 불을 붙였을 때에도 계속해서 기름을 태우며 타고 있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이 기적은 쉐키나(Shechinah)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머물렀다는 표징으로 여겨졌다.[18] 이 등불은 심지의 방향 때문에 '네르 하마아라비'(서쪽 등불)라고 불렸다. 이 등불은 사무엘상 3장 3절에 언급된 '네르 엘로힘'(하나님의 등불)으로도 불렸다.[19][1] 탈무드에 따르면 '네르 하마아라비'의 기적은 기원전 3세기 또는 4세기 시몬 착한 자(Simeon the Just)의 대제사장 시대 이후로 끝났다.[20]

일부 현대 디자인과는 달리 고대 메노라는 기름을 태웠으며, 서기 400년경까지는 중동 지역에 알려지지 않았던 촛불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7개 가지의 메노라, 에시트모아 회당(4~5세기). 록펠러 박물관


메노라는 보편적인 계몽의 이상을 상징했다.[44] 메노라가 지혜를 상징한다는 생각은 탈무드에서도 언급되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이삭 랍비는 말했습니다.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자는 (기도할 때) 남쪽으로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한 상징은… 메노라가 성전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45]

일곱 개의 등불은 인간 지식의 가지들을 암시하며, 여섯 개의 등불은 중앙의 등불(하나님의 빛을 상징)을 향해 안으로 기울어져 상징적으로 이끌린다. 메노라는 또한 중앙의 빛이 안식일을 나타내는 7일 창조를 상징한다.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한우카 메노라. 유대교 미술사 박물관(Musée d'Art et d'Histoire du Judaïsme)


아홉 개의 가지를 가진 메노라는 유대교 명절인 한우카와 밀접하게 관련된 상징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훼손한 후, 성전의 영원한 불꽃을 위한 봉헌된 올리브 오일은 단 하루치만 남아 있었다. 기적적으로, 그 기름은 8일 동안 타올랐고, 이는 새로운 순수한 기름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탈무드는 성전 밖에서 일곱 개의 등잔이 달린 메노라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46] 따라서 한우카 메노라는 8개의 주요 가지와 함께 다른 등불을 밝히는 데 사용되는 ''샤마쉬''(시종) 등불로 따로 놓인 아홉 번째 등불을 가지고 있다. ''샤마쉬''라는 단어는 원래 "한우카 단어"가 아니었으며, 미슈나(서기 200년경)와 탈무드(서기 500년경)에 처음 등장했지만 16세기에 이 명절과 관련되기 시작했다.[47] 이러한 유형의 메노라는 현대 히브리어로 ''하누키아''라고 불린다.[1]

카발라에서 ''오르 파님''("얼굴의 빛")은 티쿤이라고 불리는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왕국 실현을 위한 신앙의 영적 척도인 모든 ''카바노트''는 ''오르 파님''의 발현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어둠 자체는 부정적인 요소이며, 즉 완전한 헌신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는다. "어둠"은 접근할 수 없는 곳과 같고, 어둠은 시선의 깊이를 감춘다. 하시디즘에서 "아래로부터의 각성"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 즉 아보다이다.

하누카에서 케두샤의 승리 기간 동안, 코헨 가돌은 거의 ''신성한 빛''이 승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타락"의 위험이 이스라엘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체성의 심연으로서 유대교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초래할 수 있을 때, 코헨 가돌은 따라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혼들의 "각성"을 주장하여 카바나를 통해 그들을 미츠보트의 성취로 이끌려고 한다. "...왜냐하면 토라는 빛이고 미츠바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전서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금촛대의 비밀에 대해 언급한다.[50]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는 적어도 네 가지 적용이 있다. (1) 특정 도시와 교회 신자들에게 지역적으로 적용, (2)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 적용, (3) 사도 요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의 일곱 가지 뚜렷한 단계를 보여주는 예언적 적용, (4)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귀가 있는 개별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5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필로 유다이쿠스에 따르면, 금 메노라의 일곱 등불은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순서로 일곱 고전 행성을 나타낸다.[52]

그것은 또한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았던 타는 떨기나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53][54]

14세기 브르노 성모 승천 대성당(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Our Lady, Brno)의 거대한 메노라


케빈 코너는 출애굽기 25장에 묘사된 원래 메노라에 대해, 주축에서 나오는 여섯 개의 가지 각각이 "잔... 아몬드꽃 모양... 알맹이와 꽃..."(출애굽기 25:33, NASB) 세 세트로 장식되었다고 언급했다.[55] 이것은 각 가지에 세 개의 단위 세 세트, 총 가지당 아홉 개의 단위를 만든다. 그러나 주축에는 네 세트의 꽃, 알맹이, 꽃이 있어 주축에 총 열두 개의 단위가 있다(출애굽기 25:34). 이것은 총 66개의 단위를 만들어내는데, 코너는 이것이 개신교 성경 정경(66권 포함)의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코너는 주축과 세 가지의 총 장식 단위가 39개(개신교 성경의 구약 성경 권수)이고, 나머지 세 가지의 단위는 27개(신약 성경 권수)라고 지적한다.[56] 코너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나 등불로 말하는 성경 구절(예: 시편 119:105; 시편 119:130; 잠언 6:23 비교)과 연결한다.[57]

동방 정교회에서는 메노라의 사용이 보존되어 있으며, 항상 성소의 제단 위나 뒤에 놓여 있다.[58] 촛불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전통적인 관례는 일곱 등불 촛대에 올리브 오일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양한 전례 관행이 있으며, 보통 모든 일곱 등불이 예배에 사용되지만, 때로는 작은 예배에는 가운데 세 개의 등불만 켜지기도 한다. 교회에 성소등이 없다면 일곱 등불 중 가운데 등불이 영원한 불꽃으로 계속 켜질 수 있다.

일찍이 유대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리코 회당이 유명함), 주두, 석관 등 여러 기구에 문양이 그려지게 되었다.

로마에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의 메노라(Menorah)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후에는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

5. 2. 기독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필로 유다이쿠스에 따르면, 금 메노라의 일곱 등불은 고전 행성을 나타내는데, ,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순서이다.[52]

또한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았던 타는 떨기나무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53][54] 케빈 코너는 출애굽기 25장에 묘사된 원래 메노라에 대해, 주축에서 나오는 여섯 개의 가지 각각이 "잔... 아몬드꽃 모양... 알맹이와 꽃..." (출애굽기 25:33, NASB) 세 세트로 장식되었다고 언급했다.[55] 각 가지에는 세 개의 단위 세 세트, 총 아홉 개의 단위가 만들어진다. 주축에는 네 세트의 꽃, 알맹이, 꽃이 있어 총 열두 개의 단위가 있다 (출애굽기 25:34). 코너는 이것이 총 66개의 단위를 만들어 개신교 성경 정경 (66권)의 그림이며, 주축과 세 가지의 총 장식 단위가 39개 (개신교 성경의 구약성경 권수), 나머지 세 가지의 단위는 27개 (신약성경 권수)라고 지적한다.[56] 코너는 이것을 시편 119:105, 시편 119:130, 잠언 6:23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나 등불로 말하는 성경 구절과 연결한다.[57]

동방 정교회에서는 메노라의 사용이 보존되어, 성소의 제단 위나 뒤에 놓여 있다.[58] 촛불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일곱 등불 촛대에 올리브 오일을 사용한다. 다양한 전례 관행이 있으며, 보통 예배에 일곱 등불이 모두 사용되지만, 때로는 작은 예배에는 가운데 세 개의 등불만 켜지기도 한다. 교회에 성소등이 없다면 일곱 등불 중 가운데 등불이 영원한 불꽃으로 계속 켜질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금촛대의 비밀에 대해 언급한다.[50] 예수 그리스도가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는 적어도 네 가지 적용이 있다. (1) 특정 도시와 교회 신자들에게 지역적으로 적용, (2)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 적용, (3) 사도 요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의 일곱 가지 뚜렷한 단계를 보여주는 예언적 적용, (4)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귀가 있는 개별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51]

6. 현대 유대교에서의 사용



아홉 개의 가지를 가진 메노라는 유대교 명절인 한우카와 밀접하게 관련된 상징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훼손한 후, 성전의 영원한 불꽃을 위한 봉헌된 올리브 오일은 단 하루치만 남아 있었다. 기적적으로, 그 기름은 8일 동안 타올랐고, 이는 새로운 순수한 기름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탈무드는 성전 밖에서 일곱 개의 등잔이 달린 메노라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46] 한우카 메노라는 8개의 주요 가지와 함께 다른 등불을 밝히는 데 사용되는 ''샤마쉬''(시종) 등불로 따로 놓인 아홉 번째 등불을 가지고 있다. ''샤마쉬''라는 단어는 원래 "한우카 단어"가 아니었으며, 미슈나(서기 200년경)와 탈무드(서기 500년경)에 처음 등장했지만 16세기에 이 명절과 관련되기 시작했다.[47] 이러한 유형의 메노라는 현대 히브리어로 ''하누키아''라고 불린다.[1]

카발라에서 ''오르 파님''("얼굴의 빛")은 티쿤이라고 불리는 과정의 근본 개념이다. ''오르 파님''의 발현은 하나님의 왕국 실현을 위한 신앙의 영적 척도인 모든 ''카바노트''에 초점이 맞춰진다.

6. 1. 회당

회당에는 토라 보관함 앞에 토라 두루마리가 보관되는 곳에 항상 켜져 있는 등불이나 불빛이 있는데, 이를 ''네르 타미드(영원한 불빛)''이라고 한다. 이 등불은 성전 시대에 사용되었던 메노라의 항상 켜져 있는 ''네르 엘로힘''을 나타낸다. 또한 많은 회당에서는 메노라 또는 메노라의 예술적 표현을 전시한다.

6. 2. 이스라엘 국장

이스라엘 국장에는 양쪽에 올리브 가지가 있고, 티투스 개선문에 묘사된 것을 바탕으로 "ישראל"(이스라엘)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메노라가 그려져 있다.


티투스 개선문에 묘사된 메노라를 바탕으로 메노라가 이스라엘 국장에 등장한다.[7]

일찍이 유대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리코 회당이 유명함), 주두, 석관 등 여러 기구에 문양이 그려지게 되었다.

로마에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의 메노라(Menorah)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후에는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

6. 3. 성전 연구소 복원

템플 연구소는 금세공사 하임 오뎀(Chaim Odem)이 디자인한 실물 크기의 메노라를 제작했는데, 이는 미래의 제3성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 메노라를 "극도로 정확한 성경 규격에 따라 제작되었으며, 필요시 즉시 사용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고 묘사한다.[61] 이 메노라는 24캐럿 순금 1타란트(45kg)로 만들어졌으며, 단일 금괴를 두들겨 펴서 만들었고, 장식은 티투스 개선문에 묘사된 원본과 템플 연구소의 관련 종교 경전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6. 4. 기타 현대적 용도

메노라는 유대인 군단(1919~1921)의 제1유대인 부대 모자 휘장에 등장했다.[7]

때때로 히브리어 학습자들을 가르칠 때, 일곱 램프 메노라 모양의 차트를 사용하여 학생들이 히브리어 동사의 ''건설어형''의 역할을 기억하도록 돕는다.

메노라는 여러 홀로코스트 추모비의 주요 요소이다.

유대인 군단 모자 휘장: 메노라와 ''카디마''(전진)라는 단어(קדימה)

7. 예술에서의 메노라

메노라는 유대교와 사마리아교 예술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성전 메노라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드물었지만, 후기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유대교 장례 예술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 주두, 석관 등에 메노라 문양이 새겨졌다.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메노라를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며, 훗날 이스라엘 국장에도 사용되었다.

7. 1. 유대교 예술

랍비 문헌에 따르면 메노라는 높이가 18 손가락 너비(세 개의 일반적인 큐빗(팔꿈치 길이)) 또는 약 1.62m였다.[7] 메노라는 성전 신성지역의 앞방, 남쪽 벽에 놓여 있었지만, 탈무드 (''메나호트'' 98b)에는 메노라가 남북으로 놓였는지 동서로 놓였는지에 대한 두 학자 간의 논쟁이 전해진다. 가지들은 종종 예술적으로 반원형으로 묘사되지만, 라시[8](일부 현대 해석에 따르면)와 마이모니데스(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논평한 스케치에서)[9]는 가지들이 곧다고 주장했다.[10] 고전 시대(예: 필론과 요세푸스)와 중세 시대(예: 이븐 에즈라)의 다른 모든 유대인 권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가지들이 둥글다고 말했다.[11]

로마-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노라가 실제로 동쪽과 남쪽으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고 말한다.[12]

베이트셰아림 묘지의 메노라


제2성전 시대부터 바르코크바 난(Bar Kokhba revolt)까지 성전 메노라를 예술적 장식으로 사용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몇몇 예시는 무크마스(고대 미크마스(Michmas)) 근처 매장 동굴,[59]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헤로디아누스 지역, 그리고 막달라(막달라 돌(Magdala Stone)에서 발견되었다. 유대교 예술, 특히 유대교 장례 예술에서 메노라의 사용은 후기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 훨씬 더 일반적이 되었다. 일찍이 유대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리코 회당이 유명함), 주두, 석관 등 여러 기구에 문양이 그려지게 되었다.

로마에 남아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파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옮기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의 메노라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었고, 후에는 이스라엘 국장에도 채택되었다.

7. 2. 사마리아 예술

메노라는 비잔틴 시대와 이슬람 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여러 사마리아 마을(카리예트 하자(Hajjah, Qalqilya), 카프르 아부쉬(Kafr Abbush), 카프르 지바드(Kafr Zibad), 카프르 까둠(Kafr Qaddum), 카프르 짓(Jit, Qalqilya))에서 식물 장식과 함께 재활용된 석재 메노라 부조가 발견되었다.[60]

8. 다른 문화권의 유사한 물건

도교에서는 칠성등(七星燈, qi xing deng)이라는 일곱 개의 등불로 된 기름등이 북두칠성의 일곱 별을 나타내기 위해 켜진다.[62] 이 등대는 모든 도교 사찰에 필요하며, 꺼서는 안 된다. 음력 9월 9일 축제의 처음 9일 동안에는 북두칠성과 두 개의 보조 별(합쳐서 구황성이라고 함)을 공경하기 위해 아홉 개의 등불이 연결된 기름등을 켤 수도 있다. 이 별들은 마리치(Marici)의 아들들로, 도교 삼위일체(Three Pure Ones)에 의해 인류의 생사록을 관리하도록 임명되었다. 등불은 7개의 별의 빛을 나타내며, 이를 밝히는 것은 죄를 속죄하고 수명을 연장한다고 믿어진다.

키나라(kinara) 또한 메노라와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촛대를 가진 것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축제인 콴자(Kwanzaa)와 관련이 있다. 한 주간의 축제 기간 동안 매일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데, 이는 하누카 메노라와 유사한 방식이다.

9. 대중 문화 속의 메노라

메노라는 도미닉 셀우드(Dominic Selwood)의 2013년 암호 스릴러 소설 《모세의 검(The Sword of Moses)》에 중요하게 등장한다. 또한 데이비드 기빈스(David Gibbins)의 고고학 소설 《십자군의 황금(Crusader Gold)》, 폴 서스만(Paul Sussman)의 《성전의 마지막 비밀(The Last Secret of the Temple)》, W.S. 마흘러(W.S. Mahler)의 《엘리아스의 유언(The Testament of Elias)》에도 등장한다. 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X-Men: First Class)》에서도 메노라가 나오는데, 찰스 자비에 교수가 에릭 렌셔의 마음을 읽어 홀로코스트 이전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을 찾던 중, 어린 에릭이 어머니와 함께 처음 메노라에 불을 밝히는 장면이 함께 나타난다.

참조

[1] 서적 A Book of Jewish Concepts https://archive.org/[...] Hebrew Publishing Company
[2] 서적 The Menorah: Evolving into the most important Jewish symbol https://www.worldcat[...] Brill 2023-12-01
[3] 서적 Age of Transition: Byzantine Culture in the Islamic World https://www.academia[...] Metropolitan Museum of Art
[4] 성경
[5] 웹사이트 Exodus 25:31-40 https://www.biblegat[...] 2019-11-29
[6] 성경
[7] 문서 Babylonian Talmud (Menahot 28b); Maimonides, Mishne Torah (Hil. Beit ha-Baḥirah 3:10 )
[8] 문서 Rashi, Exodus 25:32
[9] 문서 Commentary on Exodus, ch 7
[10] 문서 Maimonides depicted them as straight in a manuscript drawing, but see Seth Mandel's alternative interpretation below.
[11] 문서 See the Rebbe Menachem Mendel Schneerson, Likkutei Sichot, vol 21, pp 168-171.
[12] 서적 Antiquities
[13] 웹사이트 Arch of Titus http://penelope.uchi[...] 2016-06-27
[14] 뉴스 First-century Synagogue Discovered on Site of Legion’s Magdala Center in Galilee https://web.archive.[...] 2009-09-11
[15] 성경
[16] 백과사전 Seven-Branch Candlestick
[17] 웹사이트 Shabbat 22b:2 https://www.sefaria.[...] 2022-07-04
[18] 웹사이트 Menachot 86b:8 https://www.sefaria.[...] 2022-07-04
[19] 성경
[20] 웹사이트 Yoma 39a:15 https://www.sefaria.[...] 2022-07-04
[21]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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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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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성경
[28] 성경
[29] 성경
[30] 성경
[31] 문서 Rosh Hashanah 24b
[32] 서적 The Temple of Peace in Rom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11-16
[33] 뉴스 Vatican and Rome's Jewish Museum Team Up for Menorah Exhibit https://www.nytimes.[...]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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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Mountains Before the Temple https://books.google[...] Xulon Press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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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Garr, John D., ''Living Emblems Ancient Symbols of Faith'' (2009), p. 68 https://books.google[...] Golden Key Press 2007-01-22
[38] 웹사이트 The Project Gutenberg eBook of History of the Wars, Books III and IV (of 8), by Procopius https://www.gutenber[...] 2022-07-04
[39] 웹사이트 The Search for the Lost Memorah https://aish.com/the[...] 2024-09-15
[40] 서적 Garr, John D., ''Living Emblems Ancient Symbols of Faith'' (2009), p. 68 https://books.google[...] Golden Key Press 2007-01-22
[41] 서적 Donagan, Zechariah, ''Mountains Before the Temple'' (2009), pp.66–67 https://books.google[...] Xulon Press 2009-11
[42] 웹사이트 Sefaria "Avot DeRabbi Natan 41" https://www.sefaria.[...] 2022-02-10
[43] 뉴스 Is there new evidence of Jewish Temple treasures in the Vatican? https://www.jpost.co[...] 2022-02-10
[44] 서적 Gold from the Land of Israel: A New Light on the Weekly Torah Portion - From the Writings of Rabbi Abraham Isaac HaKohen Kook Urim Publications 2006
[45] 서적 Babylonian Talmud: Tractate Baba Bathra Soncino Pres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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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성경 Book of Psa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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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성경 Rev. 1:12,20
[51] 성경 Rev. 1. TPT version, translator's footnote 'ax'
[52] 서적 Morals and Dogma of the Ancient and Accepted Scottish Rite of Freemasonry L.H. Jenkins 1871
[53] 성경 Exodus 3
[54] 서적 A House of David in the Land of Jesus Pelica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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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서적 The Tabernacle of Moses City Christian Publishing 1976
[58] 서적 Service Book of the Holy Orthodox-Catholic Apostolic Church Antiochian Orthodox Christian Archdiocese 1975
[59] 논문 A Seven-Branched Menorah Graffito from Kafr Mukhmas 2018
[60] 논문 ארבע מנורות שומרוניות בכפר חג'ה שבשומרון https://www.ariel.ac[...] Ariel University Publishing 2021
[61] 뉴스 CITYsights: More than a model menorah https://www.jpost.co[...] 2022-07-04
[62] 서적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and Religion of Taoism: Pathways to Immortality Sussex Academic Press 2005
[63] 문서 출애굽기 25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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