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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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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필균은 1685년에 태어나 1760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박세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725년 영조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사도세자의 사부로 세자를 보필했으며, 영조 연간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청백리로 알려져 청렴한 삶을 살았으며, 1760년 지돈녕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여 장간(章簡)의 시호를 받았다.

2. 생애

박필균은 1685년 (숙종 11년) 반남 박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1]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사촌형 박필하(朴弼夏)에게 양육되었으며, 재종조부인 현석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웠다.[1] 그는 서인 학통을 이은 노론 계열 학자로서 경종소론과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 나갔다.[1] 친족 박필현(朴弼顯) 등이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자, 자신의 원래 이름이었던 '필현'(弼顯)을 '필균'(弼均)으로 바꾸었다.

1729년 경종실록 봉안 임무를 마친 후 예문관 봉교가 되면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1] 그는 사간원 정언 등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소론을 비판하고 신임옥사로 희생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주장하는 등 노론 강경파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1] 그러나 그의 스승이자 재종조부인 박세채소론의 지도자였던 영향으로, 소론 공격에는 다소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736년부터는 세자시강원의 여러 관직을 맡아 어린 사도세자를 보필하는 스승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한성부 우윤 및 좌윤, 형조병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영조 시대 탕평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노론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서는 세자의 스승이었던 입장에서 다른 노론 인사들과 달리 직접적인 비판을 회피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하여 청렴한 삶을 살았다. 이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장례를 치르기조차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1758년 영조의 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60년 지돈녕부사로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2. 1. 생애 초반

박필균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85년 (숙종 11년) 반남 박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사촌형 박필하(朴弼夏)에게 양육되었으며, 재종조부인 현석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웠다.[1] 그는 서인의 학통을 이은 노론 계열의 학문적 배경을 지녔으며, 경종소론과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 나갔다.[1]

2. 1. 1. 출생과 가계

1685년 (숙종 11년) 1월 1일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필현(弼賢), 자는 정보(正甫)였으나 후에 필균으로 개명했다. 본관은 반남 박씨로, 박동량의 후손이며 박미(朴瀰)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첨정을 지내고 사후 증 이조판서 겸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된 박세교(朴世橋)이다. 아버지는 사후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박태길(朴泰吉)이며, 어머니는 진사 윤선적(尹宣績)의 딸인 칠원 윤씨(漆原尹氏)이다.

고조부 박동량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공훈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추증되었다. 증조부 박미선조의 다섯째 서녀인 정안옹주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그의 손자이며, 개화파 사상가인 환재 박규수(朴珪壽)는 그의 4대손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박세교의 사촌이자 재종조부인 현석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웠다. 스승 박세채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 서인 학통인 이이성혼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권상하 문하의 수제자 8인인 '강문 8학사' 중 한 명인 박태만(朴泰萬)은 그의 숙부였다. 당대의 저명한 노론 학자인 여호 박필주는 그의 사촌 형이며, 박필균은 아들 사근(師近)을 아들이 없던 박필주에게 양자로 보냈다. 소론의 정객으로 《사변록》의 저자인 박세당 역시 그의 할아버지뻘 되는 가까운 일족이었다. 효종의 부마인 박필성(朴弼成)은 그의 친척 형뻘이다.

2. 1. 2. 소년 시절

5세 때 아버지 박태길이 세상을 떠나고, 숙부 박태만(朴泰萬)도 곧이어 사망하면서 사촌형인 금녕군(錦寧君) 박필하(朴弼夏)에게 양육되었다. 이때 박필하의 아들들이자 5촌 조카인 박사익(朴師益)과 박사정(朴師正) 형제는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희빈 장씨의 사사를 반대했던 소론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 등을 비판하는 입장이었으나, 유상운이 고조부 박동량의 외손이라는 인척 관계 때문에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촌형인 여호(呂湖) 박필주(朴弼周) 등은 그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1. 3. 소론과의 관계

희빈 장씨의 사사를 반대한 소론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을 규탄하였다. 하지만 유상운이 고조부 박동량의 외손이라는 점 때문에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종 대에 소론이 정치적으로 득세하자, 박필균은 이를 피하여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경기도 통진(通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후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을 때, 그의 친족인 박필현(朴弼顯)과 박필몽(朴弼夢) 등이 연루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원래 이름이었던 '필현'(弼顯)을 '필균'(弼均)으로 바꾸었다.

2. 2. 관료 생활

박필균은 1729년 경종실록 봉안 임무를 마친 후 예문관 봉교가 되면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1] 그는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비판하고 신임옥사로 희생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주장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1], 그의 스승이자 재종조부인 박세채소론의 지도자였던 영향으로 소론 공격에는 다소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736년부터는 세자시강원의 여러 관직을 맡아 어린 사도세자를 보필하는 스승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한성부 우윤 및 좌윤, 형조병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인척인 홍계희와의 갈등을 겪거나, 1746년 소론 재상 추탈 사건 이후 외직인 춘천 부사를 자청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2. 2. 1. 관료 생활 초반

1729년 춘추관기주관으로서 경종실록을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봉안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예문관 봉교가 되었다. 후임자를 추천할 때 김약로를 반대하고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추천하면서 김약로 등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후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30년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어 소론을 비판하고, 경종영조 양대에 걸쳐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김창집, 이이명노론 4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사적인 당파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다른 대간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다시 정언으로 복직하였다. 이후 노론의 강경파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연잉군 시절, 그를 지지하다가 희생된 노론 4대신의 복권을 여러 차례 주장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노론소론으로 나뉘었을 때, 친척 중에는 소론에 속한 이들이 많았고, 특히 그의 재종조부이자 스승인 박세채소론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소론을 공격하는 데는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2. 2. 노론의 입장

1729년 춘추관기주관으로서 경종실록을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봉안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예문관 봉교가 되었다.[1] 후임자를 추천할 때 김약로를 반대하고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추천하면서 김약로 등과 갈등을 빚었다.[1] 이후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쳐 1730년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소론을 비판하고, 양조(경종, 영조) 시기의 일을 변무(辨誣, 억울함을 밝힘)하고 김창집, 이이명 등 신임옥사로 처형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회복시켜줄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1] 이로 인해 사당(私黨)을 편든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다른 대간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다시 정언에 복직했다.[1] 이후에도 그는 노론의 강경파로서 입장을 분명히 했다.[1]

박필균은 영조가 연잉군 시절 왕으로 추대하려다 희생된 노론 4대신의 복권을 여러 차례 주장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을 때, 그의 친척 중에는 소론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론을 공격하는 데에는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재종조부이자 스승이었던 박세채는 소론의 영수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2. 2. 3. 사도세자의 사부

1736년 이후 세자시강원의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문학(文學), 보덕(輔德) 등의 관직을 지내면서 어린 사도세자의 사부가 되어 보필하였다. 이 시기에 사학(四學)의 교수인 학교수(學敎授)를 겸임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별겸춘추(別兼春秋), 훈련도감 낭청,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의 직책을 맡았다.

1740년에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효종의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에서 대축(大祝, 축문을 읽는 제관의 우두머리)의 역할을 맡은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2. 2. 4. 정치 활동

1740년 8월 영조에게 존호를 올릴 때 예방승지를 지냈고, 이후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형조 참판을 거쳐 병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인 1741년에는 동지의금부사를 지내고 8월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며, 이후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한성부 좌윤과 호조 참판을 역임했다.

한편, 인척 관계였던 홍계희가 자신의 측근을 부제학 자리에 앉히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홍계희와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1744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나, 1746년 9월 소론 계열 재상이었던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하는 일이 벌어지자 같은 해 겨울 스스로 외직을 자청하여 춘천 부사로 나갔다.

2. 3. 생애 후반

영조 시대에 활동한 노론의 주요 인물로, 탕평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정계에서 활동했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을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여러 관직을 거쳐 1758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60년 지돈녕부사로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2. 3. 1. 노론의 맹장

그는 영조 연간에 정계에서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의 맹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탕평파의 지도자인 조현명을 공격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할 때에는 사도세자의 서연(書筵) 중지 문제, 조정의 언로 폐쇄, 과거제의 문란, 백관들의 기강 해이 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영조의 인정을 받았다.

한편 노론에서 당론으로 사도세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세자의 사부였으므로 홍인한, 홍계희와는 달리 한발 물러서서 세자의 비행을 직접 지적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효종의 부마인 박필성(朴弼成)의 친척이며 영조의 서녀 화평옹주(和平翁主)의 남편인 금양위 박명원(朴明源)의 종조(從祖)였다. 그 자신도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지만, 척신이 발호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중요한 관직(청요직) 제안을 여러 번 사양하였다. 또한 청렴하게 생활하여 집안에 재물을 쌓아두지 않았다. 왕가의 사위가 된 이들의 집에는 방문조차 꺼렸는데, 이 때문에 박명원은 '우리 선대에도 왕가와 혼인한 분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나를 이리도 멀리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 여기는가. 우리 아버지가 어릴 적 그(박필균)의 고아 신세를 돌봐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라며 그를 원망했다고 전해진다.

2. 3. 2. 청렴한 삶

사사로운 선물조차 거절하고 되돌려 보내 노론 내 정적들이나 소론, 남인 등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또한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것을 기피하였는데, 이는 훗날 정조가 즉위한 후 다른 노론 인사들이 숙청되거나 관직을 박탈당했을 때 그의 자손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들이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박필균은 늦은 나이까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1758년에는 동지돈녕부사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같은 해 다시 동지돈녕부사가 되어 영조의 특별한 명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지중추부사를 거쳐 1760년(영조 36년)에는 지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 승문원 제조를 겸임하였다. 같은 해 8월 2일, 지돈녕부사로 재직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벼슬에 있는 동안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으며, 그가 죽었을 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장례를 치르기조차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2. 3. 3. 최후

사사로운 선물조차 거절하고 되돌려 보내 노론 내 정적들이나 소론, 남인 등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또한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것을 기피하여, 훗날 정조 즉위 후 노론 내 다른 인사들이 숙청되거나 관직이 추탈되었을 때도 그의 자손들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1758년에는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같은 해 다시 동지돈녕부사가 되어 영조의 특별한 명령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후 지중추부사를 거쳐 1760년(영조 36년)에는 지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 승문원 제조를 겸임하였다.

그해 8월 2일, 지돈녕부사로 재직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으며, 그가 죽었을 때는 장례를 치르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 사후

그해 10월 7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草月面) 학현(鶴峴) 묘좌(卯坐)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1803년 경기도 양주군 별비면(別斐面) 성곡(星谷) 술좌(戌坐)에 이장하였다.

4. 가족 관계

박필균은 1685년 1월 1일 박동량의 후손이자 박미(朴瀰)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첨정을 지내고 사후 이조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된 박세교(朴世橋)이며,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박태길(朴泰吉)이다. 어머니는 진사 윤선적(尹宣績)의 딸인 칠원 윤씨(漆原尹氏)이다. 그의 처음 이름은 필현(弼賢)이고 자는 정보(正甫)였으나, 후에 필균으로 개명했다. 박지원은 그의 손자이며, 환재 박규수는 그의 4대손이다.

고조부 박동량의정부우참찬을 지냈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다. 증조부 박미선조의 다섯째 서녀 정안옹주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박필균은 어려서 할아버지 박세교의 사촌인 재종조부 현석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웠다. 스승 박세채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 이이성혼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숙부 박태만(朴泰萬)은 권상하 문하의 강문 8학사 중 한 명이었다. 당대의 저명한 노론 학자인 여호 박필주는 그의 사촌 형이며, 박필균은 아들 박사근(朴師近)을 아들이 없던 박필주에게 양자로 보냈다. 소론의 정객이자 사변록의 저자인 박세당 역시 그의 할아버지뻘 되는 일족이었다. 효종의 부마인 박필성(朴弼成)은 그의 친척 형뻘이다.


  • 고조부 : 박동량(朴東亮)
  • 고조모 : 민선(閔善)의 딸 여흥 민씨 - 이몽량(李夢亮)의 외손녀, 이항복(李恒福)의 질녀
  • * 증조부 : 금양위 박미(錦陽尉 朴瀰)
  • * 증조모 : 정안옹주(貞安翁主) - 선조의 서녀
  • ** 조부 : 박세교(朴世橋, 1611년 ~ 1662년) - 첨정, 증 이조판서 금흥군(錦興君)
  • ** 조모 : 전의 이씨(全義 李氏) - 종친부 전부 이석기(宗親府典簿 李碩基, 1598년 ~ 1653년)의 딸

아버지 : 박태길(朴泰吉, 1661년 ~ 1689년) - 증 이조판서
어머니 : 칠원 윤씨(漆原尹氏) - 진사 윤선적(尹宣績)의 딸
* 형 : 박필린(朴弼鄰)
* 누나 : 반남 박씨(潘南朴氏)
* 매부 : 이사주(李師周)
* 누나 : 반남 박씨(潘南朴氏)
* 매부 : 김서린(金瑞麟)
* 본인 : '''박필균'''(朴弼均)
* 부인 : 여주 이씨(驪州李氏, ? ~ 1761년) - 이응(李膺)의 딸
** 장남 : 박사헌(朴師憲)
** 차남 : 박사근(朴師近) - 당숙 박필주에게 양자로 감
*** 손자 : 박진원(朴進源)
*** 손자 : 박수원(朴綏源)
*** 손녀 : 반남 박씨(潘南朴氏)
*** 손서 : 황형(黃馨)
** 장녀 : 반남 박씨(潘南朴氏)
** 사위 : 어용림(魚用霖)
** 삼남 :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 며느리 : 함평 이씨(咸平李氏, 1700년 ~ 1759년 10월) - 이창원(李昌遠)의 딸
*** 손자 : 박희원(朴喜源, 1730년 ~ 1787년)[1]
*** 손녀 : 반남 박씨(潘南朴氏)
*** 손녀 : 반남 박씨(潘南朴氏)
*** 손자 : 박지원(朴趾源, 1737년 ~ 1805년) - 실학자, 열하일기 저자

5. 평가

영조탕평책에 반대했던 노론의 강경파 인물이었으나, 당론에만 얽매이지 않고 소론에 대한 공격에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큰 공적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관직에 있을 때는 청백리로 이름나 깨끗한 선비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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