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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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 후 건립된 유교 사당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398년 완공되었으나 여러 차례 화재와 전란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69년 대수리 이후의 모습이다. 문묘에서는 공자 외에 그의 제자들과 한국 유학자들을 기리고 있으며, 석전대제와 문묘제례악 등 유교 의례가 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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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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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문묘 (文廟) |
종류 | 유교 사당 |
위치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3가 53번지 |
건립 | 1398년 |
지정 | 사적 제143호 (1964년 11월 10일) |
보물 지정 | 보물 제141호 (1963년 1월 21일): 대성전, 동무, 서무, 삼문, 명륜당 |
상세 정보 | |
관련 | 성균관 |
면적 | 40,089m² |
추가 정보 | |
웹사이트 | Munmyo Shrine |
참고 | 성균관 |
2. 역사
서울 문묘는 태조가 한양에 천도하여 경복궁 등을 건설한 후 문묘 조영을 명하여 만들어졌다. 처음 만들어진 문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었고, 태종 때 중건되었다. 성종 때 정비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연산군 때 훼손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정비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다시 소실되었고, 선조 때 중건되어 영조 때까지 시설이 완비되었다. 고종 때 대수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묘는 중국 유교 관습에 기초하여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당나라 시대에 널리 퍼진 이 사상은 한국으로 전해져 수용되었다. 문묘는 1592~1598년 임진왜란 때 다시 파괴되었고, 대성전은 1601년에, 명륜당은 성균관 학생들의 기금으로 1606년에 재건되었다.[4][5]
공자를 제외하고, 공자의 가장 가까운 네 제자(안회, 증자, 자사, 맹자), 공자가 칭찬한 10명의 철학자, 여섯 명의 송나라 신유학자들도 사당에서 숭배받고 있다.[6] 또한, "한국 18현" 또는 "동방 18현"(동방18현|東方十八賢한국어)이라 불리는 18명의 유명한 한국 유학자들이 사당에 모셔져 있다. 이들은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조헌,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그리고 김집이다.[7]
2. 1. 건립과 소실, 재건
태조는 한양 천도 후 경복궁, 종묘, 사직단 영조 사업이 끝난 직후인 1395년에 문묘 조영을 명하여 1398년에 완공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문묘는 공자를 봉사(奉祀)한 묘우(廟宇)를 높은 자리에 배치하고 종사(從祀)는 옆에 배치하였으며, 학당(學堂)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실(夾室)을 만들고 그 밖의 청랑(廳廊)을 만들었는데, 대소 건물이 모두 96칸이었다.[4]태조가 창건한 문묘는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종 2년(1402)에 화재로 소실되어[4] 태종 7년(1407)에 중건되었다.[4][5] 태종 10년(1410) 9월에는 문묘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이 비문을 통해 창건 당시 성균관·문묘 건축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후 성종 6년에서 1490년까지 진사식당, 전사청, 존경각 및 향관청 건물과 비, 비각, 반수(泮水) 수축 공사 등 정비작업이 계속되었으나, 연산군 때 문묘는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짐승을 기르는 장소나 놀이터로 변했다. 중종 원년(1506)에서 6년까지 모두 정비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거의 소실되었다.[4]
선조 34년(1601)부터 39년 사이에 거의 원 모습으로 중건되고,[4] 대성전은 1601년에, 명륜당은 성균관 학생들의 기금으로 1606년에 재건되었다.[5] 영조 때까지 모든 시설이 거의 완비되었으며, 고종 6년(1869)에 대수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4][5] 조선 말기 성균관·문묘는 개화 분위기에 밀려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성균관에 경학원이 설치되고, 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성균관이 학무아문의 성균관급상교서국(成均館及庠敎書局)으로 되어 교육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학제가 바뀌면서 향사(享祀) 기능만 유지되고 있다.

2. 2.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경복궁, 종묘, 사직단 건설이 끝난 직후인 1395년(태조 4년)에 문묘 건설을 명하여 1398년(태조 7년)에 완공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문묘는 공자를 모신 묘우(廟宇)를 높은 곳에 배치하고, 종사(從祀)는 옆에 배치하였다. 학당(學堂)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실(夾室)을 만들고 그 밖에 청랑(廳廊)을 만들었는데, 크고 작은 건물이 모두 96칸이었다.태조가 창건한 문묘는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402년(정종 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407년(태종 7년)에 재건되었다. 1410년(태종 10년) 9월 문묘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이 비문을 통해 창건 당시 성균관·문묘 건축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 후, 1485년(성종 6년)에서 1490년(성종 21년)까지 진사식당, 전사청, 존경각 및 향관청 건물과 비, 비각, 반수(泮水) 수축 공사 등 정비 작업이 계속되었으나, 연산군 때에 문묘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짐승을 기르는 곳이나 놀이터로 변했다. 이를 중종 때인 1506년(중종 원년)에서 1511년(중종 6년)까지 모두 정비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1601년(선조 34년)부터 1606년(선조 39년) 사이에 거의 원래 모습으로 재건되었고, 영조 때까지 모든 시설이 거의 완비되었으며, 1869년(고종 6년) 대수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말기, 성균관·문묘는 개화 분위기에 밀려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성균관에 경학원이 설치되고, 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성균관이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급상교서국(成均館及庠敎書局)으로 바뀌면서 교육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학제가 바뀌면서 향사(享祀) 기능만 유지되고 있다.
3. 배치
성균관과 문묘는 크게 남쪽의 대성전 영역과 북쪽의 명륜당 영역으로 나뉘며, 각각 제사(祭享) 공간과 교육(敎學) 공간으로 기능이 분리되어 유교적 위계질서를 반영한다.
3. 1. 대성전 영역
성균관과 문묘의 배치는 크게 남쪽의 대성전 일곽과 그 뒤편의 명륜당 일곽으로 나뉜다. 대성전 일곽에는 제사(祭享)를 지내는 문묘시설 건물군이 있고, 명륜당 일곽에는 교육(敎學)을 위한 건물군들이 배치되어 있다.대성전 구역은 남향한 삼문(신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무·서무가 길게 남북 방향으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고, 그 북쪽 중앙에 대성전이 있다. 서무 북쪽으로는 제기고(祭器庫)·잡사(雜舍) 등이 있고, 동무 북쪽으로는 동삼문(東三門)이 있어 외부로 통하게 되어 있다.
대성전은 남향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건물 전면의 한 칸은 퇴칸으로 개방되어 당(堂)을 이루고 있고, 그 뒤의 실(室)은 벽으로 둘러싸인 감실형(龕室形) 공간을 이룬 묘당건축(廟堂建築)의 전형을 보여준다. 벽 아래 부분에는 낮은 벽담이 둘러져 있다. 전면 퇴칸에서 실(室)로 들어가는 문은 홀수 칸마다 3곳에 두 짝 판문을, 나머지 칸에는 살창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이중 기단으로 조성된 석계를 올라서면 다시 한 단의 낮은 장대석 기단을 설치하였다.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 초석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내·외 2출목으로 짜인 다포계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용두와 잡상들을 장식하였다. 단청은 가칠단청으로 위엄있고 소박하여 유교의 성전임을 나타낸다.
현재 문묘 대성전에는 중앙 정위(正位)에 공자를 모시고, 그 앞에 동쪽으로 안자(顔子)와 자사(子思)를 북에서 남으로 배열하여 서향하게 하고, 서쪽으로 증자(曾子)와 맹자(孟子)를 북에서 남으로 배열하여 동향하게 하였다. 동쪽 후열에는 민손(閔損)·염옹(冉雍)·단목사(端木賜)·중유(仲由)·복상(卜商)·주돈이(周敦頤)·정이(程頤)·장재(張載)를 북에서 남으로 차례로 종사하여 서향하게 하였고, 서쪽 후열에는 염경(冉耕)·재여(宰予)·염구(冉求)·언언(言偃)·전손사(顓孫師)·정호(程顥)·소옹(邵雍)·주희(朱熹)를 마찬가지로 북에서 남으로 배열하여 동향하여 종사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동쪽 제일 후열에는 설총·안유(안향)·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김집·송준길을 북에서 남으로 차례로 종사하여 서향하게 하였고, 서쪽 제일 후열에는 최치원·정몽주·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조헌·송시열·박세채 등을 같은 방법으로 동향하여 종사하였다.
대성전 기단 앞 마당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삼강목(三綱木)과 오륜목(五倫木)이라 이름한 향나무가 심겨 있는데, 이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상징한다. 대성전 기단 아래에는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심겨져 있다.
대성전 정면 앞 마당 좌·우에 배치된 정면 11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동무와 서무는 앞의 퇴칸은 개방하였고, 신실(神室)의 내부는 전체가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처리했다. 납도리로 결구된 초익공계 건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지고 중앙칸 및 양협간에 2짝의 판문을 달아 출입하게 되어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원래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원대(元代)의 현인(賢人)과 한국의 18명현 등 112명의 위패를 종향(從享)하였으나,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한국 명현 18인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묻었다.
신문은 남향이고, 정면 3칸, 측면 2칸 구성으로 중앙 기둥열 세 칸에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초익공계 공포를 짰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을 하였고, 그 위에 취두ㆍ용두ㆍ잡상을 놓았다. 문 좌우에는 둘레담이 연속되어 대성전 일곽 제향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서울 문묘대성전(文廟大成殿)은 문묘의 정전으로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대성전 중에서 건물의 규모나 구조 면에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다가 2년 후에 소실되고 다시 중건했다가 임진왜란 때에 또 소실되어 선조 34년(1601년)에 재차 건립된 것이다.
3. 2. 명륜당 영역
성균관과 문묘는 크게 남쪽의 대성전 영역과 북쪽의 명륜당 영역으로 나뉜다. 명륜당 영역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1]명륜당 구역은 대성전 영역과 담으로 분리되어 북쪽에 있다. 명륜당은 남향이며, 남쪽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1]
명륜당은 성균관의 중심 건물로, 조선시대 국립대학인 국학의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본당과 좌우의 협실로 구성된 솟을지붕 형태이다. 본당은 맞배지붕, 동쪽과 서쪽 협실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익공계 건물이고, 동쪽과 서쪽 협실은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계 건물이다. 본당 바닥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과 서쪽 협실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1]
4. 시설
《태학지(太學志)》에 기록된 문묘 시설로는 대성전(大成殿)·동무(東廡)·서무(西廡)·제기고(祭器庫)·비각(碑閣)·신문(神門)·동삼문(東三門)·동고(東庫)·동서협문(東西夾門)·수복청(守僕廳)·전사청(典祀廳)·포주(庖廚)·악기고(樂器庫)·차장고(遮帳庫)·악생고(樂生庫)·향관청(享官廳)·감찰제집사방(監察諸執事房)·수라각(水刺閣)·정문이 있고, 교학시설로는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대문(大門)·존경각(尊經閣)·비천당(丕闡堂)·일량재(一兩齋)·벽입재(闢入齋)·비천당(丕闡堂)·정록청(正錄廳)·식당(食堂)·양현고(養賢庫)·육일각(六一閣)·어서비각(御書碑閣)이 있다. 이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건물과 현존하지 않는 건물을 제외한 기타 건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기고: 대성전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다. 북향이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기둥은 사각기둥이고, 벽체는 판장으로 처리하였으며, 민도리집이다.
- 비각: 대성전의 동남쪽 모퉁이에 있으며, 서향이고, 사방 1칸이다. 1409년(태종 9년)에 처음 묘정비를 세웠고, 1511년(중종 6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였다. 조선 초 변계량(卞季良)이 왕명을 받들어 1410년에 글을 짓고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것을 1626년(인조 4년)에 다시 변계량의 옛 글을 새기기로 하여 이정구(李廷龜)에게 비석의 음기(陰記)를 기술하게 하고 이홍주(李弘胄)에게 쓰게 하고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전(篆)을 쓰게 하여 다시 세웠다.
- 동삼문: 동무의 북쪽에 있으며, 동향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임금이 문묘에 들어가는 통로인 어로(御路)는 동삼문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남문에서 들어가는 신로(神路)와 구분하였다. 신로는 신문에서 대성전 앞 기단 서측 아래까지 나 있고, 어로는 동삼문에서 대성전 앞 기단 동측 아래까지 나 있다.
- 동고: 동삼문의 북쪽에 있으며, 정면 3칸이다. 동서 양쪽에 각각 협문이 있으며, 1칸이다.
- 수복청: 대성전 서쪽 담장 밖에 있는데, 남향이며 4칸이다.
- 전사청: 대성전의 서쪽에 있는데, 동향이며 6칸(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 포주: 전사청의 북쪽에 있으며 6칸(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 향관청: 대성전의 북쪽 밖, 정록청의 북쪽과 존경각의 동북쪽 사이의 땅에 있다. 건물 안에 향축(香祝)을 봉안하였으며, 좌우에는 헌관방(獻官房)이 있다. 남향을 하였으며 10칸(정면 4칸, 측면 2.5칸)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퇴를 구성하였다. 가운데 2칸은 향과 축문을 봉향하는 대청이고, 좌우의 방은 헌관청이다.
- 감찰제집사방: 향관청의 동·서 월랑으로 각각 6칸이다. 향관청 앞 중간 빈 땅을 평탄하게 하여 뜰을 만들고 담을 쌓아 밖을 둘렀으며 동·서·남으로 문을 만들어 출입을 하였는데, 지금은 문 하나만 있다. 동월랑은 동향을 하였고, 서월랑은 서향을 하였다.
- 동재: 동향이며 18칸이고, 서재는 서향이며 18칸인데, 각각 본채의 앞뒤에 반칸 퇴를 덧단 규모이다. 동재와 서재는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였으며, 명륜당과 동시에 건축하였다.
- 대문: 동재의 남쪽에 있는데, 동향이며 2칸이다. 대문은 남쪽으로 동삼문에 연결되어 있다.
- 존경각: 명륜당의 북쪽에 있는데, 남향이며 6칸(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성균관의 도서관으로, 1475년(성종 6년)에 건립되었다. 1514년(중종 9년)에 화재로 불탔고, 임진왜란으로 또 불탔는데, 1626년(인조 4년)에 중건을 하고, 1772년(영조 48년)에 개축하였다.
- 비천당: 명륜당의 서북쪽에 있는데, 좌우에 협실이 있으며 남향으로 25칸(정면 5칸, 측면 5칸)이다.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1987년 12월부터 1988년 8월까지 공사를 하여 다시 복원되었다.
- 정록청: 명륜당의 동쪽에 있는데, 남향이며 8칸(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1398년(태조 7년)에 낙성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1626년(인조 4년)에 중건하였다.
- 식당: 명륜당의 동쪽에 있는데, 남향이며 'ㅁ'자형 평면의 총 33칸 규모이다. 주방 10칸, 기명고(器皿庫) 1칸, 창고 1칸, 문 1칸이 있다. 1398년(태조 7년)에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626년(인조 4년)에 중건하였다.
- 육일각: 향관청의 서쪽에 있는데, 동향이며 3칸이다.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례(六藝)중의 하나인 궁술(弓術)을 위해 궁노(弓弩)를 보관하던 곳으로 1743년(영조 19년) 건립되었다.
이외에도 진사식당의 남쪽에는 왕이 성균관에 거동할 때 가마를 내려놓는 용도로 사용한 하연대(下輦臺)가 있고, 명륜당 앞 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문묘에 모신 공자를 비롯한 여러 스승에게 드리는 제례의식인 석전대제(釋奠大祭)는 매년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거행하고 있다. 문묘 제례는 조선 왕조의 길례(吉禮) 중에서 중사(中祀)에 속하였다.
5. 문묘제례악과 석전대제
매년 봄(4월)과 가을(9월)에 음악과 춤이 수반되는 의식인 문묘제례(석전대제)가 거행된다. 이 의식에서는 중국에서 유래한 고대 음악인 문묘제례악이 연주되는데, 이는 아악의 한 형태이다.
음악가들은 국립국악원에서 파견된다. 사용되는 악기에는 피리(훈, 소, 대나무 피리), 현악기(슬, 금), 편경, 편종, 채로 연주하는 다양한 북, 호랑이 모양의 나무 긁개 (어), 나무 상자 (축), 그리고 박(박)이 있다.[1]
6. 문묘 종사 동방 18현
문묘는 중국의 유교 관습에 기초하며, 이곳에서 공자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존경받고 숭배되었다. 공자를 제외하고, 공자의 가장 가까운 네 제자 (안회, 증자, 자사, 맹자), 공자가 칭찬한 10명의 철학자, 여섯 명의 송나라 신유학자들도 사당에서 숭배받고 있다.[6] 또한, "한국 18현" 또는 "동방 18현"(東方十八賢|동방십팔현중국어) 또는 배향 선생이라고 불리는 18명의 유명한 한국 유학자들이 사당에 모셔져 있다.[7] 이들은 배향 연대순으로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조헌,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김집이다.
동배향 | 서배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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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Confucian ceremony at Seonggyungwan Munmyo
http://www.korea.net[...]
2015-03-24
[2]
웹사이트
Sunggyun-gwan, Sanctuary of Confucianism in Korea
http://koreana.kf.or[...]
[3]
웹사이트
Munmyo Shrine
http://www.parandeul[...]
[4]
서적
Notes on Things Korean
https://books.google[...]
Hollym
2012
[5]
웹사이트
Munmyo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Seoul
[6]
서적
The traditional education of Korea
https://books.google[...]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2006
[7]
서적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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