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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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파키스탄은 1947년 파키스탄 건국 당시 파키스탄의 서부 지역을 지칭하던 행정 구역으로, 민족 및 인종 갈등, 종교적 폭력, 자원 분배 문제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다.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 건국 초기 연방 의회 민주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수립했으나, 동파키스탄과의 정치적,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해 1954년 '하나의 단위' 정책을 통해 통합되었다. 이후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정국이 불안정해졌고, 1970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이후 해체되었다. 서파키스탄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로 구성되었으며,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를 가졌다.
서파키스탄은 1947년 국가 수립 당시 시릴 래드클리프 경이 이끈 경계 위원회를 통해 인도와 약 1609.34km 떨어진 두 지역, 즉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분할되어 탄생했다. 서파키스탄은 3개의 총독 관할 지역 (북서 변경, 서 펀자브, 신드주), 1개의 최고 위원 관할 지역 (발루치스탄주), 발루치스탄 주 연합, 여러 토후국 (특히 바하왈푸르, 치트랄, 디르, 훈자, 카이푸르, 스와트), 연방 수도 지역 (카라치 주변) 및 부족 지역으로 구성되었다.[1]
2. 역사
그러나 서파키스탄은 민족 및 인종 갈등, 정보 부족, 국경 문제 등 분할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3] 특히 남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은 동 펀자브 지역이 인도 행정부와 통합되면서 수백만 명의 펀자브 무슬림이 추방되고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로 대체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4] 종교적 폭력은 인도 아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경제 재건 노력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4]
분할 과정에서 천연 자원, 산업, 경제 기반 시설, 노동력, 군사력 등이 분할되었는데, 인도가 더 큰 점유율을 차지했다.[5] 인도는 인구의 91%(3억 4,500만 명)[6], 토지 면적의 78%를 차지한 반면, 파키스탄은 인구의 9%(3,500만 명)[7], 토지 면적의 22%를 차지했다. 군사력 또한 인도가 64%, 파키스탄이 36%를 차지했으며, 대부분의 군사 자산은 인도 내에 위치해 있었다.[8] 서파키스탄에는 4개의 사단이, 동파키스탄에는 1개의 사단이 창설되었다.[8]
1954년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는 하나의 단위 정책을 발표하여 서파키스탄의 4개 주와 지역을 동파키스탄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통합했다. 서파키스탄 주는 12개의 구획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도는 카라치에서 라호르를 거쳐 1965년 이슬라마바드로 이전되었다. 동벵골 주는 동파키스탄으로 개명되었고, 주도는 다카에 위치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서로 다른 정치 이념, 언어,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서파키스탄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의회 민주주의를 지향한 반면, 동파키스탄은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며 국가 세속주의를 선언했다. 또한 서파키스탄은 미국 및 NATO 동맹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반면, 동파키스탄은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나의 단위 정책은 지역주의를 해소하고 지출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지만,[25] 실제로는 뚜렷한 언어적, 민족적 차이를 가진 서파키스탄의 여러 주들을 완전히 통합하지 못했다.[26] 신드인과 우르두어 사용자들은 신드주에서 이 정책에 반발했고,[27] 이는 발루치스탄주,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주, 펀자브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27]
1958년, 미국은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여 파키스탄 육군 사령부에 의해 계엄령이 시행되었다. 아유브 칸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수도는 라왈핀디로 이전되었고, 연방 입법부는 다카로 이전되었다. 1965년, 수도는 다시 이슬라마바드로 이전되었다.[25]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외무 장관이 해임되면서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부토는 파키스탄 인민당을 결성하여 파업과 시민 불복종을 통해 칸의 권위에 도전했다. 1969년, 칸은 야히야 칸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1970년 총선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43] 야히야 칸 군사 정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43] 이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동파키스탄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1971년 12월 16일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였고,[43] 이로써 서파키스탄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2. 1. 영국 식민지 시대
1947년 국가 수립 당시, 파키스탄의 건국 지도자들은 경계 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다. 시릴 래드클리프 경이 이끈 위원회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배치, 지역 분할, 미래 정치 체제를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1]
파키스탄은 인도에 의해 약 1609.34km 떨어진 두 개의 뚜렷한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서부 지역은 3개의 총독 관할 지역 (북서 변경, 서 펀자브, 신드주), 1개의 최고 위원 관할 지역 (발루치스탄주), 발루치스탄 주 연합, 여러 다른 토후국 (특히 바하왈푸르, 치트랄, 디르, 훈자, 카이푸르, 스와트), 연방 수도 지역 (카라치 주변) 및 부족 지역으로 구성되었다.[1] 새 국가의 동부 지역인 동파키스탄은 이전 아삼의 실렛 지역과 힐 트랙츠를 포함하는 동벵골의 단일 주로 형성되었다.
서파키스탄은 민족 및 인종 갈등, 정보 부족, 영구적인 국경을 어디에 그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포함하여 분할과 관련된 큰 문제들을 겪었다.[3] 동파키스탄, 발루치스탄, 북서 변경주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남부 파키스탄 펀자브는 해결해야 할 상당한 문제에 직면했다.[3] 이전 동 펀자브는 인도 행정부와 통합되었고, 수백만 명의 펀자브 무슬림이 추방되어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로 대체되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4] 종교적 폭력은 인도 아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파키스탄 건국 지도자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경제 재건 노력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4]
분할은 또한 천연 자원, 산업, 경제 기반 시설, 노동력, 군사력을 분할했으며, 인도가 더 큰 점유율을 차지했다.[5] 인도는 인구 3억 4,500만 명[6] (91%)을 차지했고, 파키스탄은 3,500만 명[7] (9%)을 차지했다. 토지 면적은 인도 78%, 파키스탄 22%로 분할되었다. 군사력은 인도가 64%, 파키스탄이 36%의 비율로 분할되었다.[8] 무기 창고 및 군사 기지와 같은 대부분의 군사 자산은 인도 내에 위치해 있었고, 파키스탄의 시설은 대부분 노후화되었으며, 위험할 정도로 적은 1주치의 탄약 비축량을 가지고 있었다.[8] 서파키스탄에는 4개의 사단이, 동파키스탄에는 1개의 사단이 창설되었다.[8]
2. 2. 독립과 분할 (1947)
1947년 파키스탄 운동을 통해 국가가 수립될 당시, 파키스탄의 건국 지도자들은 경계 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다. 시릴 래드클리프 경이 이끈 위원회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배치, 지역 분할, 미래 정치 체제를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
파키스탄은 인도에 의해 약 1609.34km 떨어진 두 개의 뚜렷한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서부 지역은 3개의 총독 관할 지역 (북서 변경, 서 펀자브, 신드주), 1개의 최고 위원 관할 지역 (발루치스탄주), 발루치스탄 주 연합, 여러 다른 토후국 (특히 바하왈푸르, 치트랄, 디르, 훈자, 카이푸르, 스와트), 연방 수도 지역 (카라치 주변) 및 부족 지역으로 구성되었다.[1] 새 국가의 동부 지역인 동파키스탄은 이전 아삼의 실렛 지역과 힐 트랙츠를 포함하는 동벵골의 단일 주로 형성되었다.
서파키스탄은 민족 및 인종 갈등, 정보 부족, 영구적인 국경을 어디에 그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포함하여 분할과 관련된 큰 문제들을 겪었다.[3] 동파키스탄, 발루치스탄, 북서 변경주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남부 파키스탄 펀자브는 해결해야 할 상당한 문제에 직면했다.[3] 이전 동 펀자브는 인도 행정부와 통합되었고, 수백만 명의 펀자브 무슬림이 추방되어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로 대체되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4] 종교적 폭력은 인도 아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파키스탄 건국 지도자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경제 재건 노력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4]
분할은 또한 천연 자원, 산업, 경제 기반 시설, 노동력, 군사력을 분할했으며, 인도가 더 큰 점유율을 차지했다.[5] 인도는 인구 3억 4,500만 명[6] (91%)을 차지했고, 파키스탄은 3,500만 명[7] (9%)을 차지했다. 토지 면적은 인도 78%, 파키스탄 22%로 분할되었다. 군사력은 인도가 64%, 파키스탄이 36%의 비율로 분할되었다.[8] 무기 창고 및 군사 기지와 같은 대부분의 군사 자산은 인도 내에 위치해 있었고, 파키스탄의 시설은 대부분 노후화되었으며, 위험할 정도로 적은 1주치의 탄약 비축량을 가지고 있었다.[8] 서파키스탄에는 4개의 사단이, 동파키스탄에는 1개의 사단이 창설되었다.[8]
영국령 인도의 분할 당시, 1,500만 명이 이주했고, 200만 명 이상의 힌두교도, 무슬림, 시크교도가 치명적인 폭동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16] 1947년과 1950년 사이, 860만 명의 무슬림이 파키스탄의 서부 펀자브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약 670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인도의 동부 펀자브 지역으로 이동하여 파키스탄의 인구 구성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이 지역에 압도적인 무슬림 다수를 초래했다.[17]
2. 3. 의회 민주주의 시기 (1947-1958)
파키스탄은 건국 당시부터 연방 의회 민주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지향했다. 리야카트 알리 칸이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고,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파키스탄 전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주장했다. 1949년 파키스탄 제헌 의회는 목표 결의안과 파키스탄 헌법 부록을 통과시켜 자유 민주주의적인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서파키스탄은 신생 국가의 정치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했다. 동파키스탄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제헌 의회 의석 수는 불균형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불평등과 두 지역 간의 지리적 거리는 파키스탄 헌법 채택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국가를 두 개의 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했다.
1954년 11월 22일,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가 발표한 하나의 단위 정책에 따라 서파키스탄의 4개 주와 지역은 동파키스탄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었다. 서파키스탄 주는 기존의 주, 자치령, 부족 지역을 병합하여 설립되었으며, 12개의 구획으로 구성되었다. 주도는 카라치에 설치되었다가 라호르를 거쳐 1965년 이슬라마바드로 최종 이전되었다. 동벵골 주는 동파키스탄으로 개명되었고, 주도는 다카에 위치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충돌은 곧바로 발생하여 국가 전체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두 지역은 서로 다른 정치 이념과 언어, 문화적 차이를 보였다. 서파키스탄은 의회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은 반면(1947년부터 의회 공화국 형태), 동파키스탄은 1954년 선거 이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며 국가 세속주의를 선언했다. 또한 서파키스탄은 미국 및 NATO 동맹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반면, 동파키스탄은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56년 파키스탄 헌법은 의회 정부 형태를 승인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우르두어, 영어,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파키스탄 의회와 파키스탄 대법원을 설립했다.
하나의 단위 정책은 지출을 줄이고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합리적인 행정 개혁으로 여겨졌다.[25] 그러나 서파키스탄은 겉으로는 동질적인 통합을 이루었지만, 실제로는 뚜렷한 언어적, 민족적 차이를 내포하고 있었다. 네 개의 주는 단일 국가라는 공식적인 정의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았다.[26]
신드인과 우르두어 사용자들은 신드주에서 하나의 단위 정책에 반발했다.[27] 이 반발은 발루치스탄주,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주, 펀자브주로 확산되었다. 결국 하나의 단위 정책은 서파키스탄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27]
2. 4. 군사 독재 시기 (1958-1971)
1947년부터 1959년까지 파키스탄 정부는 불안정했다. 7명의 총리, 4명의 총독, 1명의 대통령이 합헌적 쿠데타 또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하나의 단위 프로그램은 거센 반대와 시민 불안,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무슬림 연맹과 파키스탄 사회당의 지지 증가는 파키스탄의 기술 관료주의를 위협했다. 1954년 선거에서 무슬림 연맹이 패배한 후, 사회당은 대통령 이스칸다르 미르자의 공화당 지지 기반을 위협하며 세력을 키웠다.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미국은 양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58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쿠데타가 파키스탄 육군 사령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유브 칸 장군이 주도한 계엄령이 시행되면서, 수도는 1959년 카라치에서 육군 장군 전투 본부 (GHQ)가 있는 라왈핀디로 이전되었고, 연방 입법부는 다카로 이전되었다. 1963년, 라왈핀디는 연방 수도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새로운 도시가 계획되어 건설되었으며, 1965년에 마침내 완공되었다. 1965년, 수도는 마침내 이슬라마바드로 이전되었다.[25]
하나의 단위 정책은 서파키스탄에서 실패했고, 그 유지는 불가능해 보였다.[27]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주 총리직이 폐지되고 대통령이 서파키스탄의 행정 권한을 넘겨받으면서 이 지역에 문제가 발생했다.[25]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카슈미르주의"가 아유브 칸 대통령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사람들이 느끼면서 정부에 대한 문화 혁명, 분노, 반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외무 장관이 해임되어 복수를 공약하자 문제는 더욱 증대되었다. 부토는 흩어진 민주 사회주의 대중과 마르크스주의 대중을 모아 연합하여 1967년에 파키스탄 인민당을 결성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과 동맹하는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이용했다. 이들은 좋은 미래에 투표할 사람들을 교육하면서 서파키스탄의 가난한 도시들에 녹아들었고,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전국에 알렸다. 부토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자들은 칸의 권위에 도전하는 파업과 시민 불복종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사 정권은 상급 사회주의 지도부(부토나 Mubashir Hassan|무바시르 하산영어, Malik Meraj Khalid|말리크 메라지 칼리드영어 등)를 체포하며 맹렬하게 반응했다. 이로 인해 서파키스탄에서 격렬한 폭력 행위가 촉발되었고, 칸에 대한 압력이 커졌다. 칸은 라왈핀디에서 원탁 회의를 소집했지만, 부토가 이끄는 사회주의자들은 아유브의 임기 유지를 거부했고, 동파키스탄의 정치인 무지부르 라흐만이 제출한 지방 자치를 위한 Six point movement|6점 운동영어을 거절했다.
1969년, 칸은 2년 이내의 선거 실시를 약속하는 참모총장 Yahya Khan|야히야 칸영어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그 사이에 부토는 좌익 조직을 모아 연합하는 데 힘을 축적하여 서파키스탄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2. 5.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과 서파키스탄의 해체 (1971)
1970년 1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에 할당된 162석 중 160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3]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의 자치권 확대를 주장했지만, 야히야 칸 군사 정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43]
이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동파키스탄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1971년 12월 16일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였다.[43] 이로써 서파키스탄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은 서파키스탄의 동파키스탄에 대한 오랜 차별과 억압의 결과였다. 서파키스탄 중심의 정책은 동파키스탄의 경제 발전을 저해했고, 정치적 권리 또한 제한했다. 1970년 총선 결과는 이러한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파키스탄 군사 정부의 강경 진압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3. 정치
파키스탄 건국 당시, 파키스탄 운동에 참여했던 건국 지도자들은 시릴 래드클리프 경이 이끄는 경계 위원회에 참여하여 인도와의 배치, 지역 분할, 미래 정치 체제를 협상했다.[1]
파키스탄은 인도에 의해 약 1609.34km 떨어진 두 지역으로 구성되었는데, 서파키스탄은 3개의 총독 관할 지역(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서 펀자브, 신드주), 1개의 최고 위원 관할 지역(발루치스탄주), 발루치스탄 주 연합, 여러 토후국(바하왈푸르, 치트랄, 디르, 훈자, 카이푸르, 스와트 등), 연방 수도 지역(카라치 주변) 및 부족 지역으로 구성되었다.[1]
서파키스탄은 민족 및 인종 갈등, 정보 부족, 국경 설정의 불확실성 등 분할과 관련된 큰 문제들을 겪었다.[3] 특히 남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은 큰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전 동 펀자브는 인도에 통합되었고, 수백만 명의 펀자브 무슬림이 추방되어 시크교도와 힌두교도로 대체되었다.[4] 종교적 폭력은 인도 아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경제 재건 노력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4]
분할 과정에서 천연 자원, 산업, 경제 기반 시설, 노동력, 군사력 등이 분할되었는데, 인도가 더 큰 점유율을 차지했다.[5] 인도는 인구의 91%(3억 4,500만 명),[6] 토지 면적의 78%, 군사력의 64%를 차지한 반면, 파키스탄은 인구의 9%(3,500만 명),[7] 토지 면적의 22%, 군사력의 36%를 차지했다.[8] 대부분의 군사 자산은 인도 내에 위치했고, 파키스탄의 시설은 노후화되었으며, 탄약 비축량도 매우 적었다.[8]
파키스탄은 건국 당시부터 연방 의회 민주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지향했다. 무하마드 알리 진나가 총독으로, 리야카트 알리 칸이 초대 파키스탄 총리로 임명되었다.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파키스탄 전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주장했다. 1949년 파키스탄 제헌 의회는 목표 결의안과 파키스탄 헌법 부록을 통과시켜 자유 민주주의적인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서파키스탄은 신생 국가의 정치를 지배했지만, 동파키스탄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음에도 제헌 의회의 의석 수는 불균형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불평등과 지리적 거리는 새로운 파키스탄 헌법 채택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54년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가 발표한 하나의 단위 정책에 따라 서파키스탄의 4개 주와 지역은 동파키스탄과 함께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었다. 서파키스탄 주는 12개의 구획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도는 카라치에서 라호르를 거쳐 1965년 이슬라마바드로 옮겨졌다. 동벵골 주는 동파키스탄으로 개명되었고, 주도는 다카였다.
하지만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서로 다른 정치 이념과 언어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 있어 충돌이 발생했다. 서파키스탄은 의회 민주주의와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반면, 동파키스탄은 1954년 선거 이후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국가 세속주의를 선포했다. 또한 서파키스탄은 미국 및 NATO 동맹국과 함께했고, 동파키스탄은 소련 및 동구권에 동조했다.
1956년 파키스탄 헌법은 의회 정부 형태, 이슬람교 국교, 우르두어, 영어,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파키스탄 의회와 파키스탄 대법원을 설립했다.
1953년 1953년 라호르 폭동에서의 민족 및 종교 폭력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는 라호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지역 간의 폭력은 인도까지 확산되어 인도-파키스탄 전쟁 및 분쟁으로 이어질 뻔했다.
1947년부터 1959년까지 7명의 총리, 4명의 총독, 1명의 대통령이 합헌적 쿠데타 또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하나의 단위 프로그램은 거센 반대와 시민 불안, 정치적 혼란에 직면했다.
1958년 파키스탄 육군 사령부에 의해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아유브 칸 장군이 주도한 계엄령 하에 수도는 카라치에서 라왈핀디로 이전되었고, 연방 입법부는 다카로 이전되었다.
하나의 단위 프로그램은 경제 발전의 혜택을 주지 못하고 중앙 정부를 강화했으며,[9] 서파키스탄의 4개 주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그램 폐지를 위해 투쟁했다.[10] 임시 권력 위원회는 시민 불복종, 거리 폭력 등을 통해 중앙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9][10] 1970년 7월 1일 발루치스탄, 북서 변경주, 펀자브, 신드 주에 모든 권한이 이양되면서 서파키스탄의 "하나의 단위"는 해체되었다.[9][11]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군사 정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의 정부 구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1971년 12월 16일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했고, 서파키스탄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서파키스탄은 복수 정당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엘리트 우익 세력에 맞서는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는 좌익 세력으로 구성된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3. 1. 정부 형태
파키스탄 건국 당시부터 파키스탄은 연방 의회 민주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구상했다. 리야카트 알리 칸이 초대 파키스탄 총리로 임명되었고, 무하마드 알리 진나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파키스탄 제헌 의회는 목표 결의안과 파키스탄 헌법 부록을 통과시켜 자유 민주주의적인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파키스탄의 서부 지역(서파키스탄)은 신생 국가의 정치를 지배했다. 동파키스탄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제헌 의회의 의석 수는 불균형적으로 적었다. 이 두 지역의 불평등과 지리적 거리는 새로운 파키스탄 헌법의 채택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여겨졌다.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가 1954년 11월 22일에 발표한 하나의 단위 정책에 따라 서파키스탄의 4개 주와 지역은 동부의 단일 주를 반영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었다. 서파키스탄 주는 서파키스탄의 주, 자치령, 부족 지역을 병합하여 설립되었다. 이 주는 12개의 구획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도는 카라치에 설치되었다. 이후 주도는 라호르로 옮겨졌고, 1965년에는 마침내 이슬라마바드에 설치되었다. 동벵골 주는 동파키스탄으로 개명되었고, 주의 주도는 다카에 위치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충돌은 국가 전체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두 주는 서로 다른 정치 이념과 언어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서파키스탄은 의회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설립되었으며,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았다. 반면에 동파키스탄은 1954년 선거 이후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국가 세속주의를 선포했다. 서파키스탄은 미국 및 NATO 동맹국과 함께했고, 동파키스탄은 소련 및 동구권에 동조했다.
1956년 파키스탄 헌법은 의회 정부 형태를 승인했으며, 이슬람교를 국교로, 우르두어, 영어,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1956년 헌법은 또한 파키스탄 의회와 파키스탄 대법원을 설립했다.
1953년에 시작된 1953년 라호르 폭동에서의 민족 및 종교 폭력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는 폭력을 진압하기 위해 라호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지역 간의 폭력은 곧 인도까지 확산되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 및 분쟁으로 서파키스탄과 인도는 전쟁 위협 상황에 놓였다.
1947년부터 1959년까지 정부는 부분적으로만 안정되었다. 7명의 총리, 4명의 총독, 그리고 1명의 대통령이 합헌적 쿠데타 또는 군사 쿠데타로 강제로 축출되었다. 하나의 단위 프로그램은 거센 반대, 시민 불안, 정치적 혼란에 직면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쿠데타가 1958년 파키스탄 육군 사령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육군 총사령관 아유브 칸 장군이 주도한 계엄령이 시행되면서, 수도는 1959년 카라치에서 육군 장군 전투 본부 (GHQ)가 있는 라왈핀디로 이전되었고, 연방 입법부는 다카로 이전되었다.
반대되는 인식과는 달리, 주들은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오히려 하나의 단위 프로그램이 중앙 정부를 강화했다.[9] 서파키스탄에서는 네 개의 주도 자신들에게 부당함을 초래한 하나의 단위 프로그램을 폐지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했다.[10]
임시 권력 위원회는 시민 불복종, 거리 폭력, 계엄령 반대 구호 제창, 경찰력과 같은 정부 기관 공격 등의 수단을 통해 중앙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9][10] 마침내, 1970년 7월 1일에 위원회의 계획이 발효되어 서파키스탄의 "하나의 단위"가 해체되었고, 모든 권한은 발루치스탄, 북서 변경주, 펀자브, 신드 주에 이양되었다.[9][11]
1970년 파키스탄 총선 (1970년 12월에 실시)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벵골의 아와미 연맹은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고, 동파키스탄에 할당된 162석 중 2석을 제외한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의 더 큰 자치를 옹호했지만, 군사 정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파키스탄은 1971년 12월 16일에 독립 국가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서파키스탄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독립 이후 연방제 의원 내각제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으며(현재까지도 의원 내각제가 파키스탄의 공식 정부 형태이다), 총리가 정부 수반을 맡고 군주가 의례적인 직위의 국가 원수를 맡았다.
1956년 헌법은 파키스탄에 의회 정부 형태를 제공했으며, 대통령직은 같은 해에 시작되었다. 직업 문관 소장 (퇴역) 이스칸데르 미르자가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 제도는 3년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미르자는 1958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르자는 육군 총사령관 아유브 칸 장군을 수석 계엄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나중에 군사 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을 배신하고 그를 영국으로 추방했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사법 당국이자, 파키스탄 의회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 정치의 권력 중개자였다. 대법원은 1965년 이슬라마바드로 이전되었고, 대법원장 알빈 로버트 코르넬리우스는 모든 사법 중재자, 인력 및 주요 사건을 이슬라마바드로 이전했다.
서파키스탄의 지사[46]
재직 기간 | 서파키스탄 지사 | 정당 | 정치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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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0월 14일 – 1957년 8월 27일 | Mushtaq Ahmed Gurmani|무슈타크 아흐메드 구르마니영어 | Muslim League (Pakistan)|무슬림 연맹 (파키스탄)영어 | 민주 정체 |
1957년 9월 – 1960년 4월 12일 | Akhter Husain|아흐타르 후세인영어 | 무소속 | 군사 정권 |
1960년 4월 12일 – 1966년 9월 18일 | Nawab Malik Amir Mohammad Khan|나와브 말리크 아미르 모하마드 칸영어 | Muslim League (Pakistan)|무슬림 연맹 (파키스탄)영어 | 군사 정권 / 문민 통제 |
1966년 9월 18일 – 1969년 3월 20일 | Muhammad Musa|무하마드 무사영어(퇴역) 장군 | 무소속 | 문민 통제 |
1969년 3월 20일 – 1969년 3월 25일 | Yusuf Haroon|유수프 하룬영어 | 민정 | 문민 통제 |
재직 기간 | 계엄령 관리관 | 정치 형태 | 사실상의 임무 |
1969년 3월 25일 – 1969년 8월 29일 | Attiqur Rahman|아티쿠르 라흐만영어 중장 (제1기) | 군사 정권 | 파키스탄 육군 |
1969년 8월 29일 – 1969년 9월 1일 | Tikka Khan|티카 칸영어 중장 | 군사 정권 | 파키스탄 육군 |
1969년 9월 1일 – 1970년 2월 1일 | Nur Khan|누르 칸영어 Air Marshal|공군 장군영어 | 군사 정권 | 공군 |
1970년 2월 1일 – 1970년 7월 1일 | 아티쿠르 라흐만 중장 (제2기) | 군사 정권 | 파키스탄 육군 |
1970년 7월 1일 | 서파키스탄 해소 |
재직 기간 | 서파키스탄의 수석 장관 | 정당 |
---|---|---|
1955년 10월 14일 – 1957년 7월 16일 | Khan Abdul Jabbar Khan|칸 압둘 자바르 칸영어 |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Pakistan Muslim League영어 / 공화당 (파키스탄)|label=공화당|Republican Party (Pakistan)영어 |
1957년 7월 16일 – 1958년 3월 18일 | Abdur Rashid Khan (politician)|압둘 라시드 칸영어 | 공화당 (파키스탄)|label=공화당|Republican Party (Pakistan)영어 |
1958년 3월 18일 – 1958년 10월 7일 | Muzaffar Ali Khan Qizilbash|무자파르 알리 칸 키질바쉬영어 | 공화당 (파키스탄)|label=공화당|Republican Party (Pakistan)영어 |
1958년 10월 7일 | 수석 장관 직 폐지 |
3. 2. 주지사와 주 총리
임기 | 서파키스탄 주지사[23] | 정당 | 정부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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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0월 14일 ~ 1957년 8월 27일 | 무슈타크 아흐메드 구르마니 | 무슬림 연맹 | 민주 정부 |
1957년 9월 ~ 1960년 4월 12일 | 아크테르 후세인 | 무소속 | 군사 독재 |
1960년 4월 12일 ~ 1966년 9월 18일 | 아미르 모하마드 칸 | 무슬림 연맹 | 군사 독재 / 민간 정부 |
1966년 9월 18일 ~ 1969년 3월 20일 | (퇴역) 장군 무하마드 무사 | 무소속 | 민간 정부 |
1969년 3월 20일 ~ 1969년 3월 25일 | 유수프 하룬 | 민간 정부 | 민간 정부 |
임기 | 계엄 사령관 | 정부 형태 | 복무 기관 |
1969년 3월 25일 ~ 1969년 8월 29일 | 아티쿠르 라흐만 (1기) | 군사 독재 | 파키스탄 육군 |
1969년 8월 29일 ~ 1969년 9월 1일 | 티카 칸 중장 | 군사 독재 | 파키스탄 육군 |
1969년 9월 1일 ~ 1970년 2월 1일 | 누르 칸 공군 원수 | 군사 독재 | 파키스탄 공군 |
1970년 2월 1일 ~ 1970년 7월 1일 | 아티쿠르 라흐만 (2기) | 군사 독재 | 파키스탄 육군 |
1970년 7월 1일 | 서파키스탄 주 해체 |
재임 기간 | 서파키스탄의 주 총리[23]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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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0월 14일 ~ 1957년 7월 16일 | 칸 사히브 박사 |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공화당 |
1957년 7월 16일 ~ 1958년 3월 18일 | 사르다르 압두르 라시드 칸 | 공화당 |
1958년 3월 18일 ~ 1958년 10월 7일 | 나와브 무자파르 알리 칸 키질바쉬 | 공화당 |
1958년 10월 7일 | 주 총리 직책 폐지 |
서파키스탄 주지사 직은 대체로 명예직이었으나, 이후 주지사들은 어느 정도의 행정 권한도 행사했다.[23] 초대 주지사는 무슈타크 아흐메드 구르마니였으며, 그는 서 펀자브의 마지막 주지사이기도 했다. 아유브 칸은 주지사 직을 폐지하고 대신 서파키스탄 계엄 행정관(MLA West)을 설치했다.
서파키스탄의 주 총리 직은 주의 최고 행정 책임자이자 주 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의 지도자였다.[23] 초대 주 총리는 독립 이전에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의 주 총리를 두 차례 역임했던 칸 압둘 자바르 칸이었다. 주 총리 직은 1958년 아유브 칸이 서파키스탄 행정부를 장악하면서 폐지되었다.
3. 3. 지방 정부
서파키스탄은 1954년 11월 22일, 무하마드 알리 보그라 총리가 발표한 하나의 단위 정책에 따라 여러 주와 지역이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면서 설립되었다. 이 주는 12개의 구획으로 구성되었으며, 처음에는 카라치에 주도가 설치되었다가 이후 라호르로, 최종적으로는 1965년에 이슬라마바드로 옮겨졌다.서파키스탄의 12개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다:
행정 구역 | 수도 |
---|---|
바하왈푸르 | 바하왈푸르 |
데라 이스마일 칸 | 데라 이스마일 칸 |
하이데라바드 | 하이데라바드 |
칼라트 | 칼라트 |
카이푸르 | 카이푸르 |
라호르 | 라호르 |
말라칸드 | 사이두 |
물탄 | 물탄 |
페샤와르 | 페샤와르 |
퀘타 | 퀘타 |
라왈핀디 | 라왈핀디 |
사르고다 | 사르고다 |
이 주는 1958년에 매입한 이전 오만의 월경지인 과다르와 1960년에 편입된 이전 연방 수도 특별구(카라치)를 포함했다.[1]
그러나, 하나의 단위 정책은 각 지역 주민들 간의 언어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여러 지역, 특히 신드주에서 반발을 샀다.[47] 결국 1970년, 야흐야 칸 장군은 서파키스탄 주를 해체하면서 계엄령 사무소를 해산했다. 1970년 7월 1일, 발루치스탄, 북서 변경주, 펀자브, 신드 주가 다시 설치되었고, 각 주에 지방 정부가 구성되었다.[9][11]
3. 4. 사회주의의 영향
서파키스탄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영향력은 서파키스탄 주민들에게 훨씬 더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선호했지만, 공산주의와는 결코 연합하지 않았다. 파키스탄 사회당은 독립 이전 운동 당시 반파키스탄 조항 때문에 지지를 잃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유브 칸 정부 시기 국민을 위한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대중들은 파키스탄의 중산층과 젠트리 계층이 누렸던 혜택과 개혁을 누리지 못했다.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문화 혁명, 불만, 정부에 대한 적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국민들은 "카슈미르 문제"가 아유브 칸 대통령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외무부 장관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해고되어 복수를 다짐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부토는 흩어져 있던 민주 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모아 단결시킨 후, 1967년 파키스탄 인민당을 창당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과 동맹을 맺은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이용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서파키스탄의 빈곤하고 도시화된 지역에 통합되어,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표할 것을 교육했으며, 민주주의의 중요성이 전국적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부토의 지도와 지휘하에 사회주의자들은 칸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파업과 시민 불복종을 관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사 정부는 부토, 무바시르 하산, 말릭 메라지 칼리드를 비롯한 주요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한 후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로 인해 서파키스탄에서 끔찍한 폭력이 발생했고, 칸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압박을 받았다. 칸은 라왈핀디에서 원탁 회의를 소집했지만, 부토가 이끄는 사회주의자들은 아유브의 집권 연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동파키스탄 정치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1966년에 제시한 지역 자치를 위한 6개 조항 운동을 거부했다.
1969년, 칸은 권력을 참모총장 야히아 칸에게 넘겼고, 그는 2년 안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부토는 좌익 단체들을 광범위하게 모으고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지도 아래, 이 단체들은 전면적으로 참여하여 파키스탄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외교 관계
서파키스탄은 1970년 파키스탄 총선 이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명칭이다. 서파키스탄의 대외 관계는 다음과 같았다.
- 인도와의 관계: 인도 분할 이후 카슈미르 분쟁을 둘러싸고 대체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36] 1947년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 두 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 아프가니스탄과의 관계: 듀랜드 라인 문제로 인해 국경 분쟁이 있었고, 1955년에는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1961년에는 파키스탄군이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을 진압하기도 했다.
- 미국과의 관계: 냉전 시기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와 중앙 조약 기구(CENTO)의 핵심 회원국이었으며, 미국으로부터 경제, 과학,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 소련과의 관계: 냉전 시기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60년 U-2 사건으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고,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소련은 인도를 지원했다.
-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1950년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종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냉전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은 파키스탄에 경제, 군사, 기술 분야의 원조를 제공했다.
4. 1. 인도와의 관계
서파키스탄은 1947년 인도 분할 이후 카슈미르 분쟁을 둘러싸고 인도와 대체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36]1947년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은 카슈미르를 병합하려 했으나 인도 육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작전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어 카슈미르의 40%를 점령, 아자드 카슈미르를 통합했다.[42]
1965년, 지브롤터 작전은 국내외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2] 줄피카르 알리 부토 외무부 장관과 아프잘 라흐만 칸 국방부 장관은 파키스탄 육군 특수부대와 파키스탄 공군 공수부대를 이용하여 인도 측 카슈미르 침투를 위한 비밀 작전을 아유브 칸 대통령에게 승인 요청했다. 1965년 8월, 공수부대가 인도령 카슈미르에 낙하했고, 파키스탄 육군의 지상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수부대는 인도령 카슈미르의 상당 부분을 점령, 스리나가르에서 1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지만, 파키스탄군이 도시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었다. 1965년 9월, 인도는 반격하여 공수부대는 오늘날의 아자드 카슈미르까지 밀려났다.[42]
이후 파키스탄은 그랜드 슬램 작전을 개시하여 상당한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인도가 서파키스탄에 전면 공격을 가하면서 파키스탄군은 철수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은 중단되었다. 소련은 1965년 9월 분쟁에 개입했고, 한 달간의 전쟁은 영토 변화 없이 종결되었다. 서파키스탄과 인도는 1966년 1월 타슈켄트 선언에 서명했지만, 양국에서 휴전은 비판을 받았고, 서로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커졌다. 서파키스탄에서 아유브 칸은 부토를 외무 장관에서 해임했고, 칸 부제독은 작전 실패에 대해 부토를 비난했다. 그 결과 부토는 반 아유브 칸 운동을 이용하여 시민 불복종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아유브 칸은 통제력을 잃었다. 1967년, 야히아 칸 장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최고 계엄 행정관으로 지명했다.[42]
서파키스탄 분쟁 동안, 동파키스탄 군사 정부는 침묵을 지켰고, 동인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어떠한 병력도 파견하지 않았다.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이러한 무대응은 서파키스탄인들의 동파키스탄 정부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4. 2. 아프가니스탄과의 관계
서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은 길고 불안정했다. 이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파슈툰족의 독립적인 성향과 관련이 깊다. 또한, 물리적인 국경선도 명확하지 않았다. 1893년의 듀랜드 라인은 서파키스탄이 양국 간의 국경을 표시하는 데 사용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28]1955년, 파키스탄 대사관이 약탈당하면서 양국 간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1961년에는 파키스탄군과 현지 파슈툰 부족들이 파키스탄 바자우르 에이전시 지역에서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을 진압하기도 했다.
4. 3. 미국과의 관계
미국은 파키스탄 독립 후 파키스탄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33]파키스탄은 냉전 시기에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파키스탄은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와 중앙 조약 기구(CENTO)의 핵심 회원국이었으며, 이 두 기구는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파키스탄이 서방 세계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은 원조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 때문이었다.[34] 그 후 수년 동안 미국은 파키스탄에 광범위한 경제, 과학 및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35]
이 긴밀한 관계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와 군사 통치 시대를 거쳐 지속되었다. 관계는 서파키스탄이 파키스탄으로 해체된 후, 1971년 좌익 정치 성향의 파키스탄 인민당이 집권하면서 악화되었다.
4. 4. 소련과의 관계
냉전 시기 서파키스탄과 소련의 관계는 냉랭함에서 극도로 긴장된 상태까지 다양했다. 파키스탄이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32]1960년 U-2 사건 당시 소련이 미국의 정찰기를 격추하면서 소련-파키스탄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파키스탄 육군 참모총장 아유브 칸은 미국에 소련 상공에 대한 정찰 및 비밀 감시 임무를 위해 페샤와르 공군 기지에서 이륙하는 것을 허가했다.
소련은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를 지원했다. 당시 소련은 인도에 가장 많은 군사 장비를 공급했다.[32]
4. 5.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서파키스탄은 북쪽으로 좁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950년, 파키스탄은 중화민국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종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그 이후, 양국은 매우 긴밀하고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51][52] 냉전 시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은 파키스탄에 경제, 군사, 기술 분야의 원조를 제공했으며, 양국은 서로를 긴밀한 전략적 동맹으로 간주했다.[53]
5. 사회
1947년 인도 분할로 인해 서파키스탄 지역은 급격한 인구 변화를 겪었다. 많은 무슬림들이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으로 이동해 왔고, 반대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인도로 이동했다.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은 서파키스탄의 종교 구성을 크게 변화시켰다.[17]
서파키스탄은 펀자브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파슈툰족, 신드인, 무하지르, 발로치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25] 196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주민 대다수는 이슬람교를 믿었으며, 기독교와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13]
종교 집단 | 서파키스탄 | 펀자브 | 신드 |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 발루치스탄 | 아자드 카슈미르 | 길기트- 발티스탄 | |||||||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
이슬람교 | 21,113,214 | 77.43% | 13,022,160 | 75.03% | 3,462,015 | 71.51% | 2,788,797 | 91.79% | 785,181 | 91.53% | 939,460 | 87.54% | 115,601 | 99.62% |
힌두교 | 3,981,565 | 14.60% | 2,373,466 | 13.68% | 1,279,530 | 26.43% | 180,321 | 5.94% | 54,394 | 6.34% | 93,559 | 8.72% | 295 | 0.25% |
시크교 | 1,672,753 | 6.13% | 1,530,112 | 8.82% | 32,627 | 0.67% | 57,939 | 1.91% | 12,044 | 1.40% | 39,910 | 3.72% | 121 | 0.10% |
기독교 | 432,724 | 1.59% | 395,311 | 2.28% | 20,304 | 0.42% | 10,889 | 0.36% | 6,056 | 0.71% | 136 | 0.01% | 28 | 0.02% |
토착 종교 | 37,603 | 0.14% | - | - | 37,598 | 0.78% | - | - | 3 | 0.00% | 0 | 0.00% | 2 | 0.00% |
자이나교 | 13,215 | 0.05% | 9,520 | 0.05% | 3,687 | 0.08% | 1 | 0.00% | 7 | 0.00% | 0 | 0.00% | 0 | 0.00% |
조로아스터교 | 4,253 | 0.02% | 312 | 0.00% | 3,841 | 0.08% | 24 | 0.00% | 76 | 0.01% | 0 | 0.00% | 0 | 0.00% |
유대교 | 1,180 | 0.00% | 7 | 0.00% | 1,082 | 0.02% | 71 | 0.00% | 20 | 0.00% | 0 | 0.00% | 0 | 0.00% |
불교 | 266 | 0.00% | 87 | 0.00% | 111 | 0.00% | 25 | 0.00% | 43 | 0.01% | 0 | 0.00% | 0 | 0.00% |
기타 | 19,228 | 0.07% | 19,128 | 0.11% | 0 | 0.00% | 0 | 0.00% | 11 | 0.00% | 89 | 0.01% | 0 | 0.00% |
총 응답 | 27,266,001 | 91.99% | 17,340,103 | 100.00% | 4,840,795 | 100.00% | 3,038,067 | 56.10% | 857,835 | 100.00% | 1,073,154 | 100.00% | 116,047 | 100.00% |
총 인구 | 29,643,600 | 100.00% | 17,340,103 | 100.00% | 4,840,795 | 100.00% | 5,415,666 | 100.00% | 857,835 | 100.00% | 1,073,154 | 100.00% | 116,047 | 100.00% |
1960년대 파키스탄의 문맹률은 19.2%였으며, 서파키스탄의 문맹률은 16.9%였다.[14][15]
5. 1. 인구 구성
1947년 인도 분할로 인해 서파키스탄 지역은 급격한 인구 구성을 겪었다. 1947년에서 1950년 사이, 약 860만 명의 무슬림이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 특히 서펀자브 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반대로 약 670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인도의 동펀자브 지역으로 이동했다.[17]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은 서파키스탄 지역의 종교 구성을 급격하게 변화시켜 무슬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17]194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서파키스탄 지역의 총 인구는 약 2,960만 명이었다. 1961년 인구 조사에서는 파키스탄 전체 인구가 9,300만 명이었으며, 이 중 4,280만 명이 서파키스탄에, 5,000만 명이 동파키스탄에 거주했다.[12][13] 즉, 동파키스탄이 전체 인구의 약 55%를 차지했고, 서파키스탄은 나머지 45%를 차지했다. 또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보다 인구 증가율이 약간 더 높았다.[12][13]
5. 2. 민족 집단
서파키스탄의 주요 민족은 펀자브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파슈툰족, 신드인, 무하지르, 발로치족으로 구성되었다.[25] 하나의 단위 정책은 지방색을 없애기 위한 행정 개혁으로 여겨졌으나,[25] 실제로는 뚜렷한 언어적, 민족적 구분을 포함하고 있었다.[26] 신드인과 우르두어 사용자들은 신드주에서 하나의 단위 정책에 반발했다.[27]5. 3. 종교
196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서파키스탄의 무슬림은 인구의 97.2%를 차지했으며, 기독교인은 1.4%, 기타 종교는 1.4%였다.[13]종교 집단 | 서파키스탄 | 펀자브 | 신드 |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 발루치스탄 | 아자드 카슈미르 | 길기트- 발티스탄 | |||||||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총 인구 | 백분율 | |
이슬람교 | 21,113,214 | 77.43% | 13,022,160 | 75.03% | 3,462,015 | 71.51% | 2,788,797 | 91.79% | 785,181 | 91.53% | 939,460 | 87.54% | 115,601 | 99.62% |
힌두교 | 3,981,565 | 14.60% | 2,373,466 | 13.68% | 1,279,530 | 26.43% | 180,321 | 5.94% | 54,394 | 6.34% | 93,559 | 8.72% | 295 | 0.25% |
시크교 | 1,672,753 | 6.13% | 1,530,112 | 8.82% | 32,627 | 0.67% | 57,939 | 1.91% | 12,044 | 1.40% | 39,910 | 3.72% | 121 | 0.10% |
기독교 | 432,724 | 1.59% | 395,311 | 2.28% | 20,304 | 0.42% | 10,889 | 0.36% | 6,056 | 0.71% | 136 | 0.01% | 28 | 0.02% |
토착 종교 | 37,603 | 0.14% | - | - | 37,598 | 0.78% | - | - | 3 | 0.00% | 0 | 0.00% | 2 | 0.00% |
자이나교 | 13,215 | 0.05% | 9,520 | 0.05% | 3,687 | 0.08% | 1 | 0.00% | 7 | 0.00% | 0 | 0.00% | 0 | 0.00% |
조로아스터교 | 4,253 | 0.02% | 312 | 0.00% | 3,841 | 0.08% | 24 | 0.00% | 76 | 0.01% | 0 | 0.00% | 0 | 0.00% |
유대교 | 1,180 | 0.00% | 7 | 0.00% | 1,082 | 0.02% | 71 | 0.00% | 20 | 0.00% | 0 | 0.00% | 0 | 0.00% |
불교 | 266 | 0.00% | 87 | 0.00% | 111 | 0.00% | 25 | 0.00% | 43 | 0.01% | 0 | 0.00% | 0 | 0.00% |
기타 | 19,228 | 0.07% | 19,128 | 0.11% | 0 | 0.00% | 0 | 0.00% | 11 | 0.00% | 89 | 0.01% | 0 | 0.00% |
총 응답 | 27,266,001 | 91.99% | 17,340,103 | 100.00% | 4,840,795 | 100.00% | 3,038,067 | 56.10% | 857,835 | 100.00% | 1,073,154 | 100.00% | 116,047 | 100.00% |
총 인구 | 29,643,600 | 100.00% | 17,340,103 | 100.00% | 4,840,795 | 100.00% | 5,415,666 | 100.00% | 857,835 | 100.00% | 1,073,154 | 100.00% | 116,047 | 100.00% |
5. 4. 문해율
파키스탄의 문맹률은 19.2%였으며, 서파키스탄의 문맹률은 16.9%였다.[14][15]6. 지리
서파키스탄은 지형, 기후, 야생동물 등 다양한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북서부는 산악 지형이었고, 펀자브와 신드는 반건조 지역이었으며, 특히 발루치스탄 지역은 사막이 많았다. 서파키스탄은 평원, 고원, 인더스강과 그 지류에 의해 물이 공급되는 산 등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기후는 강수량이 많지 않은 대륙성 기후를 보였다. 강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주요 작물은 밀, 수수, 면화 등 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작물이었다.
6. 1. 행정 구역
1947년 국가 수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에 의해 약 1609.34km 떨어진 두 개의 뚜렷한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서부 지역(서파키스탄)은 3개의 총독 관할 지역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북서 변경]], 서 펀자브, 신드주), 1개의 최고 위원 관할 지역 (\[\[발루치스탄 (최고 위원 관할 지역)|발루치스탄주]]), 발루치스탄 주 연합, 여러 토후국 (특히 바하왈푸르, 치트랄, 디르, 훈자, 카이푸르, 스와트), 연방 수도 지역 (\[\[카라치]] 주변) 및 부족 지역으로 구성되었다.[1]서파키스탄은 민족 및 인종 갈등, 정보 부족, 영구적인 국경 설정의 불확실성 등 분할과 관련된 큰 문제들을 겪었다.[3]
1970년, 야흐야 칸 장군은 서파키스탄 주를 해체하면서 계엄령 사무소를 해산했다. 1970년 7월 1일, 발루치스탄 주 의회, 펀자브 주 의회, 신드 주 의회 및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 의회가 부활 및 재설립되었다. 4개의 주와 4개의 행정 구역은 현재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1970년 헌법에 따라 지방 정부가 설립되었다.
서파키스탄 주는 12개의 구, 45개의 군 및 6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파키스탄 주의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다.
구 | 군 | 자치구 |
---|---|---|
라호르 구 | 라호르, 구자란왈라, 셰이크푸라, 시알코트 | 해당 없음 |
라왈핀디 구 | 캠벨푸르, 라왈핀디, 잘룸, 구자라트 | 해당 없음 |
물탄 구 | 물탄, 데라 가지 칸, 무자파르가르, 몽고메리 | 해당 없음 |
바하왈푸르 구 | 바하왈푸르, 바하왈나가르, 라힘야르 칸 | 해당 없음 |
사르고다 구 | 사르고다, 라이알푸르, 미안왈리, 장 | 해당 없음 |
페샤와르 구 | 페샤와르, 마르단, 하자라, 코하트 | 말라칸드 자치구, 모흐만드 자치구, 카이베르 자치구, 쿠람 자치구 |
데라 이스마일 칸 구 | 데라 이스마일 칸, 바누 | 사우스 와지리스탄 자치구, 노스 와지리스탄 자치구 |
하이데라바드 구 | 하이데라바드, 타르파르카르, 다두, 상하르, 타타 | 해당 없음 |
카이푸르 구 | 카이푸르, 수쿠르, 자코바바드, 라르카나, 나와브샤 | 해당 없음 |
카라치 구(1960년 설립) | 카라치, 라스벨라 | 해당 없음 |
퀘타 구 | 퀘타-파신, 시비, 로랄라이, 조브, 차가이 | 해당 없음 |
칼라트 구 | 칼라트, 마크란, 카란 | 해당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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