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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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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정도는 1881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유교 가문에서 성장하여 한학을 수학했으나, 1902년 기독교로 개종한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1910년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김일성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1931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북한에서 김일성의 은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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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손정도
이름손정도
원어명孫貞道
본관밀양
출생일1881년 7월 26일
출생지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 (現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사망일1931년 2월 19일 (향년 49세)
사망지동양병원
배우자박신일
국가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책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
임기1919년 4월 13일 ~ 1921년 5월 6일

2. 생애

손정도는 1881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태어났다. 출생년도는 1872년, 1881년, 1882년생 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유교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강서 지방의 유명한 부농이었다. 유년기에 서당과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관리 지망생이었으나, 1902년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중 기독교로 개종하였다.[1]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친족들에게 패륜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 어머니의 도움으로 야간 도주, 개신교 선교사 문요한을 만나 비서한국어 선생으로 채용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1]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중퇴하였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 감리교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미국 감리회 연회에서 “내외국선교회” 창립에 참여하고 중국 선교사를 지원했으며,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910년 정동교회 연회에서 청나라 파견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조성환을 만나 신민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안창호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받았다.[2] 1915년 감리교에서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로 발령되었다. 1917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6월 23일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3]

1919년 초, 만세운동 여론이 형성되자 민족대표 33인에 서명하려 했으나, 파리평화회의의친왕 이강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손정도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조직망 가동 책임을 맡았다.[3] 1919년 2월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 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4월 13일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 김철, 김구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21년 3월 3일 이원익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한국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1] 1921년 8월 임시정부 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김구,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을 지냈다.[1]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 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24년 만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북만주 길림성에서 활동했다. 안창호의 설득으로 흥사단에 입단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1927년 만주 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손정도는 과로와 격무, 체력 저하, 스트레스, 고문 후유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1년 1월 한 동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1] 향년 50세였다.

2. 1. 생애 초기

孫貞道|손정도중국어는 1881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아 1872년생 설, 1881년생 설, 1882년생 설이 있다.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으며 강서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부농이기도 했다. 손정도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88년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 관리 지망생이었다. 1895년 23세에 중매로 고향 이웃 아저씨인 박용(朴鏞)의 첫째 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박신일에게서 장녀 진실(眞實, 다른 이름은 원미(元美)), 차녀 성실(誠實), 장남 원일(元一), 차남 원태(元泰), 삼녀 인실(仁實)이 태어났다.

2. 2. 과거 포기와 기독교 개종

1902년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날 상투 틀고 갓을 쓴 손정도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1]

1976년 그의 장남 손원일은 손정도의 개종 과정에 대해 회고 하기를, 평소 괄괄하고 열정적인 성품이었던 청년은 당장에 몸을 떠는 감동을 맛보았고, 불과 하룻밤도 안 되는 사이에 기독교에 몸을 맡기는 변신을 이룬 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하였다. 유교 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1]

2. 3. 도피와 학업

사당 철거 사건으로 손정도는 친족들에게 패륜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오신도의 도움으로 야간 도주를 감행했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밤, 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1] 그는 아내 박신일과 함께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 목사의 소개로 평양 주재 개신교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만나게 되었다.

문요한과 상담한 후, 문요한은 손정도를 비서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추천하여 숭실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여 동기인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선배인 김형직과도 친분을 쌓았는데, 김형직은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의 아버지였다.

2. 4. 선교 활동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중퇴하였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사역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 감리교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미국 감리회 연회에서 “내외국선교회” 창립에 참여하고 중국 선교사를 지원했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910년 정동교회 연회에서 청나라 파견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조성환을 만나 신민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안창호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안창호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는 연락책 역할을 하였다. 중국 체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다.

2. 4. 1. 감리교 성직자가 되다

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다. 이 때 탁사 최병헌이 큰 역할을 하였다.[2] 이후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에 감동받은 신도들이 몰려왔고 교회 건물이 꽉 차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동대문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당시 교회의 규모는 전도사 6명, 지교회 수 12곳, 입교인 312명, 학습자 142명, 원입자 469명 등 924명이었으며, 주일학교 학생은 786명이었다. 성직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평일에도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무엇인가 열심히 의논했다고 한다.

1915년 감리교로부터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로 발령되었다. 손정도 목사를 존경한 동대문교회 교우들은 연판장을 돌리며 손정도의 교회 이임을 극구 반대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억압과 덕수궁에 살았던 고종을 위해 근처의 가옥들을 이전시켜 이화학당,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로 참여했다. 그는 1916년 이전에 해산된 엡워스 청년회를 10년 만에 재조직하고, 남반 여반을 갈라놓았던 휘장도 제거했다. ‘손정도식 설교’, ‘손정도식 목회’는 여기서도 효력을 발휘하여 1916년 교세는 입교자가 747명, 학습인 275명, 원입자 930명, 주일학생 820명 등 총 2,772명으로 국내 최대의 교회로 발전되었다. 이 때 600원의 헌금으로 교회를 증축, 수리하기도 했다.

2. 5. 독립 운동

1917년 손정도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6월 23일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평양으로 이사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3]

1919년 초, 한국인의 주장을 알리기 위한 만세운동 여론이 형성되자 그는 민족대표 33인에 서명하려 했으나, 파리평화회의의친왕 이강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당시 가정 생계는 박신일이 맡았는데,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며 어려움 속에서도 일경의 감시와 압박을 견뎌냈다.[3]

손정도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조직망 가동 책임을 맡았다. 그는 김란사를 통해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시키고 경비 문제를 해결했다. 가족을 평양에 두고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나, 이강의 평화회의 참석은 하란사의 급사로 실패했다. 이 일에는 감리교 목사들이 핵심 역할을 했으며, 손정도는 '입정(立丁)'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했다.

2. 5. 1. 독립운동

1917년 손정도는 우여곡절 끝에 협성신학교 제5기로 졸업했다. 1918년 6월 23일 장로(elder)목사 안수를 받고, 신병 치료차 휴직원을 내고 고향 근처 평양으로 이사갔다. 이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행동이었다.

1919년 초 한국인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만세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33인 민족대표에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의친왕 이강공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가정을 돌볼 수 없었던 그는 박신일 사모[3]가 낮에는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면서 가정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박신일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경의 감시와 압박을 견뎌 내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손정도는 김란사를 통해 손병희의 애첩인 주산월(朱山月)과 접촉하여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서명하게 하고 경비 문제를 해결하는 실력을 보였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강공의 평화회의 참석은 하란사의 급사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들은 해석, 현순, 최창식 등 모두 감리교 목사들이었다. 이들의 암호명은 손정도는 입정(立丁), 현순은 석정(石丁), 최창식은 운정(雲丁)으로 입석정(立石丁)이었다.

2. 5. 2. 망명과 임시정부 참여

상해에서 안창호의 생일을 기념하여 찍은 사진. 우측이 손정도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으나 신변 노출을 우려한 그는 각종 위원회에 이름없이 참여하거나 가명, 익명으로 참여하였다. 자신의 신분 노출이 조직의 활동에 장애가 될까 하여 익명으로 노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종파를 초월하여 천도교 인사들과도 접촉했던 그는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천도교로부터 10000KRW, 미국 선교부로부터 10000KRW을 얻어낸 것도 모두 해석의 일이었다.

이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이무렵 서울에서 공포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고, 통합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기초위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 김철, 김구, 윤현진, 김순애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2. 5. 3. 임시정부 활동

1921년 3월 3일 이원익, 김병조, 김인전, 조상섭, 송병조, 장덕로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한국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1]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기를 거부하자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하여, 이승만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1]

1921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왼쪽 맨 끝이 손정도)


1921년 8월 임시정부 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김구,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을 지냈다.[1] 이와 더불어 휴일에도 교회활동과 교육활동에 참여하여 상해 한인교회 상의회(常義會) 위원, 치리 회원, 미션학원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1]

2. 6. 만년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 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24년 만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북만주 길림성에서 활동했다. 안창호의 설득으로 흥사단에 입단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 황해도의 재산을 처분하여 동생 손경도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본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되었으나 선교 사업을 이유로 풀려났다. 액목현 교회, 대분, 대강자 교회,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담당하였다. 1927년 만주 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손정도는 과로와 격무, 체력 저하, 스트레스, 고문 후유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1년 1월 한 동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1] 향년 50세였다.

2. 6. 1. 임시정부 유지 노력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 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2. 6. 2. 북만주 주민들의 복지노력

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안창호의 설득으로 흥사단에 입단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액목현 지역에 황해도의 재산을 처분하여 동생 손경도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 이는 국내에서 쫓겨나거나 생계를 찾아 떠도는 한민족의 경제 자립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이상촌 건설을 위한 다목적 사업이었다. 그러나 일본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되었으나 선교 사업을 이유로 풀려났고, 액목현 교회, 대분, 대강자 교회,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담당하였다. 이 무렵 김일성과 만나 교류하였다. 1927년 만주 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2. 6. 3. 별세

손정도는 건강을 돌보지 않아 과로와 격무, 체력 저하, 스트레스, 고문 후유증 등에 시달렸다. 1931년 1월 손정도는 한 동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1] 향년 50세였다.

3. 김일성과의 관계

1926년 무렵 만주에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친아들처럼 대했다. 북한에서는 손정도를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김일성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말했다. 2003년 10월 북한에서는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학술토론회를 남한의 신학자들과 함께 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으로 활동한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하였다.[4]

김일성과 손정도의 만남은 1992년 출판된 김일성의 회고록 7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라는 제목으로, 김일성은 손정도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한다. 부친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았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 장로와 김일성은 2살 차이였다.

김일성은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다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7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때 손정도는 옥바라지를 하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김일성을 석방시켰다. 또한 일본 군경의 위협을 피해 재판을 받지 않도록 권고하여, 10년형을 면하게 해주었다. 김일성은 손정도를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다. 손원태는 1991년 5월 네브라스키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고,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았다. 김일성은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을 평양에서 치러주었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 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자세히 소개하며 존경을 표했다.

4. 가족 관계

부인 박신일(朴信一)과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손원일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1] 맏사위 윤치창을 통해 윤치호·4대 대통령 윤보선 일가와 사돈관계를 형성했고, 증손녀 손정희는 기업인 겸 정치가 홍정욱과 결혼하여 탤런트 겸 영화배우 남궁원 일가와도 사돈관계를 형성했다.[2]

구 분내용
부인박신일(朴信一)
첫째 딸손진실(孫眞實, 1901년 ~ 1990년), 손원미(孫元美)
첫째 사위윤치창(尹致昌, 1899년 3월 5일 ~ 1973년 10월 1일)
둘째 딸손성실(孫誠實)
둘째 사위신국권
첫째 아들손원일(孫元一)
첫째 며느리홍은혜
손자손명원, 손동원, 손창원
둘째 아들손원태(孫元泰)
둘째 며느리이유신
손자/손녀손영희(미국인과 결혼), 손정국, 손정호
셋째 딸손인실(孫仁實)
셋째 사위문병기


참조

[1] 뉴스 손원일-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6-09-29
[2] 문서 엡워스
[3] 문서 개신교와 성공회 성직자의 부인을 부르는 이름
[4] 서적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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