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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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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계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서손자이자 은언군의 서자이며, 훗날 철종의 생부이다. 1785년에 출생하여 1841년에 사망했으며, 처음에는 작위가 없었으나, 아들 철종이 즉위한 후 전계군으로 추존되었다가 전계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묘소는 포천시 선단동에 있으며,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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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증군, 증 대원군
이광 (李㼅), 이쾌득 (李快得), 이해동 (李海東)
창강 (昌康)
시호없음
생년1785년 4월 29일
몰년1841년 12월 14일
묘소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276-1
가계
선원장조
대수2
족보상 관계은언군의 7번째 서자
아버지은언군
어머니전산군부인 이씨
배우자완양부대부인 최씨, 이씨, 용성부대부인 염씨
자녀회평군, 영평군, 철종
추존 정보
추존 작위조선대원군
추존 호전계대원군 (全溪大院君)

2. 생애

1785년 음력 3월 21일 강화도에서 은언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쾌득(快得)이었으나 후에 광(㼅)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서자였으나,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은언군이 사사되자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유배 생활 중 여러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나, 1822년 순조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7]

이후 잠시 한성부에 머무르기도 했으나, 1841년 음력 11월 2일 한성부 경행방 자택에서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망 당시에는 작위가 없었으나, 1849년 그의 셋째 아들 이원범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후에 전계군(全溪君)으로 추존되었고, 며칠 뒤 다시 대원군으로 격상되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었다.[3] 그의 부인으로는 완양부대부인 최씨와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 염씨가 있다.

전계대원군의 생애 초기 및 활동 기록과 은언군 일가의 기록은 철종과 고종 시대에 정치적 이유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상당 부분 세초(洗草)되거나 은멸(隱滅)·묵칠(墨漆) 처리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7]

2. 1. 출생과 가계

1785년(정조 9) 4월 29일(음력 3월 21일) 강화도에서 은언군 이인(李䄄)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5] 아명은 쾌득(快得)이었고, 후에 해동(海東), 창강(滄江)을 거쳐 광(㼅)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이며, 어머니는 은언군의 첩인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이다. 전산군부인 이씨는 전주 사람 이덕희(李德喜)의 딸로, 전계대원군 이광 이전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나 일찍 요절하여 이광이 실질적인 장남이 되었다.[5] 전계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서손자이자 정조의 서조카이며, 순조에게는 서사촌 형이 된다. 훗날 왕위에 오른 철종의 생부이다.

그에게는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 소생의 이복 형 상계군 담(湛), 풍계군 당(瑭)과 아버지의 또 다른 서자들인 이성득, 이철득 등 여러 이복 형제들이 있었다.

아버지 은언군과 삼촌 은신군은 어린 시절 상인들에게 진 빚 문제로 1771년(영조 47) 영조의 노여움을 사 직산(稷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74년 은신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한 후에야 은언군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은언군상계군 추대 사건[6]과 부인 송씨 및 며느리 신씨의 로마 가톨릭 신봉 사건 등으로 계속된 탄핵을 받아 유배 생활을 전전했고, 이광 본인 역시 서자였기 때문에 생전에는 아무런 작위도 받지 못했다. 1797년에는 아버지 은언군이 울화증으로 인해 형 또는 이복형인 이철득과 함께 강화도 탈출을 시도하다가 교동도(喬桐島)가 보이는 해변에서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해 온 가족이 강화도 내 다른 지역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은언군의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상계군의 부인 신씨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성리학을 국교로 삼던 조선 왕조로부터 반역죄로 규정되어 은언군과 함께 사사되었다. 이때 이광을 포함한 은언군의 남은 아들들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전산군부인 이씨의 존재는 1970년대 이후에야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에서 그녀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전까지 일부 역사 기록에서는 그를 상산군부인 송씨의 아들로 잘못 기록하기도 했다.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비명은 순조 때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아들이자 훗날 철종의 장인이 되는 김문근(金汶根)이 지었다. 이 묘비명을 통해 전계대원군이 전산군부인 이씨의 둘째 아들이며, 첫째 아들은 일찍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전계대원군의 초기 생애와 활동, 그리고 은언군 일가의 기록 상당수는 철종과 고종 시대에 정치적인 이유로 대량 세초(洗草)되거나 은멸(隱滅)·묵칠(墨漆) 처리되어 자세히 알기 어렵다.

2. 2. 강화도에서의 삶

1801년 아버지 은언군이 천주교 신자였던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형수 신씨(상계군의 처)의 일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전계대원군(당시 이름 이쾌득) 역시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빈농으로서 불우한 삶을 시작했다. 아버지 사사 후에는 천극죄인으로 취급되어 강화도 내 거주지에 가시울타리가 둘러쳐지는 위리안치 형벌을 받았다.[7] 그는 강화도 내의 위리안치된 집이나 움막 등지에서 거주하며, 다른 집의 머슴살이를 하거나 날품팔이 잡역부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1805년 8월 27일에는 그와 형제들(이철득, 이성득)이 감금되어 있던 집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7]

유배 생활 중 그는 여러 차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위기를 겪었다. 1812년에는 박종일(朴鍾一) 등이 은언군의 아들 중 한 명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순조의 개입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1817년에는 채수영은언군의 아들(이철득)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채수영의 난으로 또다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후 강화도 내에서의 이주가 허용되어 강화군 강화읍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살았던 초가집은 훗날 아들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인 철종 4년(1853년) 강화부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이름 붙였다.[8][9] 강화도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아, 부임해 오는 강화부 유수의 감시를 받았고 주민들의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철종실록의 행장에 따르면, 동네의 불량한 자가 술에 취해 집 문 앞에서 행패를 부리며 모욕적인 말을 했으나 훗날 아들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어떤 강화부 유수는 감시를 너무 가혹하게 하여 집안사람들이 고통스러워했지만, 훗날 철종은 그 유수를 오히려 승정원승지로 임명했다고 전해진다.

1820년(순조 20) 순조는 은언군의 생존한 아들들을 석방했으나, 전계대원군은 한성으로 잠시 갔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강화도로 보내졌다. 마침내 1822년(순조 22) 2월 순조가 임오년을 다시 맞이했다는 명분으로 특별 사면하여 최종적으로 석방되었다.[7] 그해 음력 윤 3월에야 비로소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치렀다고 한다.

철종과 고종 대에 은언군 및 그 일가와 관련된 기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이 대량으로 세초되거나 인멸되어, 전계대원군의 강화도 시절을 포함한 생애 전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7]

2. 3. 생애 후반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수감되어 노비가 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826년(순조 26년) 노비 신분으로 충청남도 온양으로 보내졌으나,[10] 같은 해 5월 2일 형조의 건의로 이루어진 죄수 석방 때 풀려났다.[10]

1830년(순조 30년) 순조의 특별 명령으로 다른 은언군의 자손들과 함께 강화도 유배에서 잠시 풀려나 도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덕분에 1831년 서자인 이원범(훗날 철종)이 한성 경행방 향교동의 사가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비록 왕족으로서의 공식적인 예우나 작호, 관직 등은 받지 못했지만, 말년에는 첩을 두는 등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1836년 잠시 경기도 여주로 이주하여 생활하기도 했으나, 얼마 후 다시 한성 경행방의 사저로 돌아왔다. 1841년(헌종 7년) 12월 14일(음력 11월 2일) 한성 경행방 향교동 사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향년 57세에 사망하였다.

사후 1844년(헌종 10년) 8월, 몰락한 노론 가문 출신인 민진용(閔晉鏞)이 중인 이원덕(李遠德), 이종락(李鍾樂) 등과 함께 전계대원군의 장남 회평군 이원경(李元慶)을 왕위에 추대하려던 모반 사건이 발생했다. 생전에 전계대원군과 가깝게 지냈던 이원덕과, 노론 정승 민응수(閔應洙)의 후손이지만 몰락한 민진용 등은 불만 세력을 모아 이원경을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이원경 역시 사사되었고, 그의 남은 가족들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는 비극을 겪었다.

전계대원군이 사망한 지 8년 후인 1849년, 그의 셋째 아들이자 첩 염씨 소생인 이원범순원왕후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지명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전계대원군은 사후에 왕의 아버지로서 존숭받게 되었다. 1849년 6월 17일 먼저 전계군(全溪君)으로 추존되었고, 며칠 뒤 다시 대원군으로 격상되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었다. 그의 부인은 완양부대부인 최씨와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 염씨이다.

그의 묘는 처음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78-1번지)의 은언군 묘소 근처 해좌(亥坐) 방향에 마련되었으나[4], 이후 여주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276-1번지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포천시 향토유적 제1호)[3] 장남 회평군 이원경이 1844년 모반 사건으로 사사된 후, 가계는 차남 영평군 이경응(李景應, 초명 원희)이 이었다.

2. 4. 사후

사망 후 가까운 왕족에게 하사되는 예장(禮葬) 등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시신은 처음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던 아버지 은언군의 묘 아래 해좌(亥坐) 방향에 안장되었다.[4] 이후 강화군으로 이장되었다가, 선원보략에 따르면 다시 여주로 옮겨졌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1856년(철종 7년) 3월 26일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 선단리(현 포천시 선단동) 산11-13번지 해룡산 임좌(壬坐) 방향으로 이장되었다. 이때 본부인 완양부대부인 최씨의 묘소도 함께 옮겨와 합장하였고, 새로 조성된 묘소 동쪽 약 100m 지점에는 장남 회평군의 묘소도 이장되었다. 현재 묘역과 신도비1986년 4월 포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3].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 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당시 전계대원군은 작위가 없었기에, 1849년 6월 17일 의정부 좌의정 김도희(金道喜) 등의 건의로 먼저 상계군, 풍계군 등의 항렬을 고려하고 충청남도 전의 지역명을 따서 전계군(全溪君)으로 추봉되었다. 며칠 후, 송나라 복황(濮皇)과 수왕(秀王), 그리고 조선의 덕흥대원군과 정원대원군의 전례에 따라 다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었다. 이와 함께 묘(墓)를 정비하고 묘 앞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가묘(家廟)인 전계궁을 세워 신주를 불천지위로 정하고 차남 영평군 이경응과 그 후손이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11]. 한편, 숙종 때의 왕족 중에도 같은 작호인 전계군(全溪君) 이박(李溥)이 있었다.

철종 즉위 후 전계대원군의 처가에 대한 증직 논의 과정에서는, 본부인 완양부대부인 최씨의 가문만 증직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생가 역시 추증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철종의 생모인 첩 용성 부대부인 염씨의 친정 3대(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도 증직이 내려졌다. 당시 완양부대부인 최씨의 아버지에게는 증 영의정, 할아버지에게는 증 좌찬성, 증조할아버지에게는 증 판서가 추증되었다.

장남 회평군은 1844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노론 세력이 연루된 역모 사건의 추대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계대원군의 가계는 차남인 영평군 이경응이 잇게 되었다.

전계대원군과 관련된 기록은 그의 아들인 철종과 손자인 고종 대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서 상당 부분 의도적으로 삭제(세초, 은멸, 묵칠)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3. 가족 관계

wikitext

'''전계대원군 가계도'''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조부사도세자1735년 ~ 1762년
조모숙빈 임씨? ~ 1773년
아버지은언군 이인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13일
적모상산군부인 송씨1753년 10월 15일 ~ 1801년 3월 17일참봉 송낙휴(宋樂休)의 딸
이복 형상계군 이담1769년 1월 21일 ~ 1786년 11월 20일
이복 형이창순
이복 형이창덕
이복 형풍계군 이당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숙부 은전군 이찬에게 출계
이복 누이이씨1796년 8월 4일 ~ 1872년 4월 4일참봉 한각신(韓覺新)에게 출가
서모이름 미상? ~ 1821년 12월 16일[12]
이복 형이성득1775년 ~ 1817년 11월 27일[13]
이복 형이철득1780년 ~ ?
생모전산군부인 이씨1764년 12월 19일 ~ 1819년 6월 4일이덕희(李德喜)의 딸
친형이름 미상요절
본인전계대원군 이광1785년 4월 29일 ~ 1841년 12월 14일
정실완양부대부인 최씨1804년 2월 19일 ~ 1840년 2월 19일학생(學生) 증 의정부영의정 최수창(崔秀昌)의 딸
장남 (적자)회평군 이명 (원경)1827년 9월 11일 ~ 1844년 9월 6일
측실이씨(李氏)
차남 (서자)영평군 이경응1828년 7월 20일 ~ 1902년 2월 1일
서며느리정경부인 평산 신씨1832년 7월 22일 ~ 1857년 5월 8일신재준(申在準)의 딸 (영평군 처)
서며느리정경부인 청도 김씨1839년 3월 23일 ~ 1921년김재협(金在協)의 딸 (영평군 처)
서손녀숙부인 이씨군수 황연수(黃演秀)에게 출가 (영평군의 딸)
양손자청안군 이재순1851년 ~ 1904년영평군의 양자.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 이휘응(李徽應)의 아들.
측실용성부대부인 염씨1793년 7월 20일 ~ 1834년 3월영의정 증직 염성화(廉成化)의 딸. 아들 철종 즉위 후 부대부인으로 추증됨.
삼남 (서자)철종 이변 (덕완군)1831년 7월 25일 ~ 1864년 1월 16일조선 제25대 국왕
서며느리철인왕후 김씨1837년 4월 27일 ~ 1878년 6월 12일안동 김씨. 철종의 정비


4. 묘소

묘소는 포천시 선단동에 있으며, 본부인인 완양부대부인 전주 최씨와 합장하였다. 묘소 옆에는 부실이자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의 묘소, 회평군 묘, 영평군 묘가 인근에 있다. 1986년 4월 9일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1호 《전계대원군 묘 및 신도비》로 지정되었다.


  •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403&contents_id=GC050P03198 전계대원군 묘: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 전계대원군 묘 및 신도비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632 전계대원군 신도비 금석문] (한국어 번역)
  • [http://royal.kostma.net/ContentsList/Desc?did=19&book=JSK_WH_25333&page=1 전계대원군 묘 신도비 탁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5. 기타

조선 말의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본명은 이광로(李光老)였다. 그러나 최익현에 의하면,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휘(諱) 광(㼅)자와, 이항로의 본명인 광로(光老)의 광자가 음이 서로 같다는 이유로, 이름을 광로에서 항로로 고쳐야 했다.[14]

참조

[1] 웹사이트 전계대원군신도비(全溪大院君神道碑) 해석문 http://gsm.nricp.go.[...]
[2] 웹사이트 철종대왕팔고조도哲宗大王八高祖圖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
[3] 웹사이트 전계대원군 묘 및 신도비 - 경기사랑닷컴 http://www.ggsarang.[...]
[4] 웹사이트 전계대원군신도비(全溪大院君神道碑) http://gsm.nricp.go.[...]
[5] 문서 전산군부인 묘비명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산 13-48 소재
[6] 문서
[7] 승정원일기 1805-08-29
[8] 문서
[9] 웹인용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 http://ganghwado.com[...] 2015-09-22
[10] 승정원일기 1826-05-02
[11] 문서
[12] 승정원일기 1821-12-17
[13] 실록 순조실록 1817-11-27
[14] 문서 화서 이항로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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