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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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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인홍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경상남도 합천 출신이다. 1573년 관직에 진출하여 동인과 북인에 속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광해군 시기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는 스승 조식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으나, 당쟁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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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정인홍
한글정인홍
한자鄭仁弘
로마자 표기Jeong In-hong
문화어 표기Chŏng Inhong
덕원
래암 또는 내암
관직 정보
직위영의정
임기 시작1618년 2월 12일
임기 종료1619년 4월 26일
이전기자헌
다음박승종
직위좌의정
임기 시작1614년 2월 27일
임기 종료1618년 1월 25일
이전이항복
다음정창연
직위우의정
임기 시작1612년 9월 29일
임기 종료1614년 2월 27일
이전이항복
다음정창연
생애
출생일1536년 3월 8일
출생지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사망일1623년 4월 3일
사망 장소조선 한성부 (사형 (참수형))
가족 관계
배우자남원 양씨 부인
자녀정연 (아들)
정륜
진주 강씨, 강눌 딸
조부정언우
숙부정건
장인양희
형제남동생 1명
학력 및 경력
수학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
직업학자, 문신, 의병장, 정치가
기타 정보
종교유교 (성리학)
소속 정당북인 잔존 후예 중 대북 세력
군주조선 광해군 이혼
웹사이트영의정 내암 정인홍 연보

2. 생애

1535년 또는 1536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김우옹의 천거로 관직에 진출했다. 1573년 6품직에 올랐고, 1576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1580년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했다.[9] 1575년 사림파가 동인서인으로 분열될 때 동인에 속했고, 1591년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분열될 때 북인에 가담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발발하자, 이듬해 스승인 성혼의 책임을 추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3000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성주, 합천, 고령, 함안을 방어하며 강력한 지방 기반을 구축했다.[1] 1594년 제용감 정으로 임명되고, 통정으로 승진하여 상주목사영해부사를 역임했다.[1]

1606년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 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다. 광해군 즉위 후 1609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하고, 1618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대북의 수장으로서 처형되었다.

2. 1. 생애 초기

1535년 또는 1536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우옹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 1573년 6품직에 올랐고, 1575년 황간현감으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었다. 1576년 사헌부지평, 1580년 12월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9]

정인홍은 법령 준수와 기강 확립을 위해 노력하여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했다.[9] 1575년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동인에, 1591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자 북인에 가담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이후 성혼의 책임을 추궁하기도 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배경

정인홍은 1535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서릉부원군(瑞陵府院君)에 추봉된 정륜(鄭倫)과 진주 강씨의 3남 중 첫째 아들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출생했다. 군수와 정자를 지낸 정희(鄭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언우(鄭彦佑)이다. 생년은 다소 불확실하여 1536년생 설도 있다. 이후 동생이 두 명 더 태어났다.

아버지 정륜은 훗날 정인홍이 현달하여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의정부영의정 서릉부원군에 추증되었다.

한 조정의 수상까지 지냈지만 정인홍은 출생 연도조차 확실하지 않다.[4] 이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된[4] 것의 영향 때문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강한 기 때문에 정인홍이 태어나던 해 가야산의 한 봉우리였던 성왕산의 풀과 나무가 마르기 시작하더니 3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4]

정인홍은 고조부 정성검(成儉) 대에 합천에 옮겨와 터를 잡고 살았다. 정성검은 외아들 정희(僖)를 두었는데,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학문을 닦도록 독려했고, 증조부 정희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1496년(연산군 2) 과거에 급제했다.[5] 그러나 그리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조부 정언우(鄭彦佑)와 아버지 정륜은 오직 학문에만 힘썼을 뿐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5] 그의 집안은 그저 평범한 양반 가문[5]이었다.

2. 1. 2. 유년기와 수학

그는 일찍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했다고 한다. 3세 때 아버지 정륜의 사랑방에 몰래 들어가 아버지 정륜이 읽던 성리서를 보다가 실수로 몇 장을 찢었다. 아버지 정륜이 화를 내며 야단치자, 그는 "잘못했습니다. 책을 갖고 놀다가 찢었습니다. 지필묵을 주시면 찢어진 부분의 글을 다시 적어 붙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륜이 지필묵을 주자 정인홍은 찢어진 부분의 글귀를 기억해 내어 내용을 그대로 썼다. 이를 본 정륜은 아들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한번 가르쳐준 글이나 문장은 두 번 가르치지 않아도 줄줄 외웠다고 한다.

1540년경, 집 밖에서 어린 참새를 잡아 놀다가 부주의로 죽이자, 정인홍은 죽은 참새가 불쌍하여 통곡하다가 집 근처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 참새 무덤을 만들고, 지필묵을 가져다가 참새를 추도하는 제문(祭鳥文, 弔鄒文)을 지어 조곡하였다.

지나가던 선비가 이유를 묻자 어린 정인홍은 참새 무덤을 만든다고 답하였다. 선비는 사람이 참새 무덤을 만들어 주며 곡을 하느냐고 묻자, 정인홍은 자신이 지은 제문을 보여주었다. 선비는 어린이가 쓴 제문인데도 실력이 있음을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2. 1. 3. 관료 생활 초반

정인홍은 청소년기에 거창 안음에 사는 유학자 갈천 임훈(葛川 林薰)의 문하에서 잠시 공부했다.[6]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그가 임훈의 문하를 나온 배경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6] 한번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임훈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밤을 새웠는데, 밤중이 되자 모두 잠이 들었으나 정인홍만은 바르게 앉은 채 밤을 새웠다.[7] 그의 살갗에는 많은 손톱자국이 나 있고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졸음을 쫓았던 것이다.[7]

한번은 임훈이 집안의 가장 예쁜 계집종을 뽑아 정인홍이 글 읽는 방으로 보내 유혹했지만, 그는 밤새워 태연히 글만 읽고 계집종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7] 이 두 가지 일을 본 임훈은 이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문하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초인적인 인내력과 집념을 지녀 임훈이 문하에 두기조차 꺼렸던 정인홍을 거둔 이가 바로 합천의 남명 조식이었다.[7]

학행으로 이름을 날려, 소년 시절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김우옹의 천거로 선조 초 관직에 나갔다. 1572년(선조 5년) 스승 조식은 임종에 이르러 그에게 자신의 칼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죽기 전 그에게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로 칼을 수여한 것이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랐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중앙으로 복귀,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가 영천군수로 나갔다. 그 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에 가담, 서인 정철·윤두수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또한 정인홍은 세조부터 명종 시기까지 권력을 장악해 온 훈구파와 척신정치와 훈구파 잔존세력 청산에 소극적인 서인을 여러 차례 탄핵했다.

1580년 12월 정4품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9] 정인홍은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이서들의 부정과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는 등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탄핵을 가했다. 그로 인해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정신을 차렸으며, 시장의 장사치들이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서 내놓지 못했다.[9]

2. 2. 정치 활동과 임진왜란

정인홍은 어릴적부터 비범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정인홍이 소년기에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8] 11세에 산사에서 글을 읽을 때, 그 도의 감사가 밤에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찾아와 시를 짓게 하였는데,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으로, 1573년 천거되어 6품직을 맡았다. 1576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장령으로 승진했다. 1575년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자 동인에 속했고, 1591년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될 때 북인에 속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발발하자, 이듬해에는 그의 스승인 성혼의 책임을 추궁했다.

2. 2. 1. 동인과 북인의 중진

그는 당시 감사 또는 판결사이던 양희가 왜송을 주제로 내고 시를 지으라 하니 바로 시를 지었다 한다.

短短孤松在塔西|단단고송재탑서|중국어

塔高松下不相齊|탑고송하불상제|중국어

莫言今日孤松短|막언금일고송단|중국어

松長他時塔反低|송장타시탑반저|중국어[6]

감사가 감탄해 마지않으며 "후일에 반드시 현달하리라. 그러나 뜻이 참람하니 부디 경계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정인홍은 일찍부터 아이답지 않은 강한 자아의식과 승부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6] 여기에서 소나무는 만 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당시 감사 또는 판결사(判決使)를 지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였다. 훗날 정인홍은 양희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 뒤 정인홍은 남명 조식(曺植)을 찾아 문하생이 되었으며 이후 조식의 수제자로서 최영경, 오건, 곽재우, 김효원, 이산해, 김우옹, 정구, 이발, 하진보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이들 중 하진보는 후일 그의 사돈이 되기도 했다. 친분이 있던 이산해는 그가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도 후대에 제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스승 조식은 그에게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를 지어 주며 학문에 더욱 정진하도록 당부하였다. 남명은 내암의 자질이 비범함을 알아, 만년에 차고 다니던 칼을 주면서 경계를 삼도록 하였는데 그는 늘 꿇어앉아 칼을 턱밑에 대고 정신 가다듬기를 계속하였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를 포기했다. 학행으로 이름을 날려, 소년 시절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김우옹의 천거로 선조 초 관직에 나갔다. 1572년(선조 5년) 스승 조식은 임종에 이르러 그에게 자신의 칼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죽기 전 그에게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로 칼을 수여한 것이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랐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중앙으로 복귀,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가 영천군수로 나갔다. 그 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에 가담, 서인 정철, 윤두수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또한 정인홍은 세조부터 명종 시기까지 권력을 장악해 온 훈구파와 척신정치와 훈구파 잔존세력 청산에 소극적인 서인을 여러 차례 탄핵했다.

1580년 12월 정4품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9] 정인홍은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이서들의 부정과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는 등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탄핵을 가했다. 그로 인해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정신을 차렸으며, 시장의 장사치들이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서 내놓지 못했다.[9]

2. 2. 2.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3000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성주, 합천, 고령, 함안을 방어하며 강력한 지방 기반을 구축했다.[1] 1594년 제용감 정으로 임명되고, 통정으로 승진하여 상주목사영해부사를 역임했다.[1]

2. 2. 3. 이언적, 이황 문묘종사 비판

광해군이언적이황문묘 종사론이 나타났을 때, 정인홍은 스승 조식이 제외된 것에 반발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였다.[9]

1610년(광해군 2년) 9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결정이 내려졌다. 정인홍은 병문안을 온 왕의 사자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며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황이 스승 조식을 비난했던 것을 언급하며 조식을 변호하였다.[10]

정인홍은 조식을 섬기며 가르침을 받았고, 성운에게도 인정을 받아 의리상 두 사람 모두 스승이라 하였다. 그는 이황조식을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하며, 노장(老莊)을 숭상한다고 비방한 것에 분개하여 변론하고자 했다. 정인홍은 이황조식성운을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비방했다고 지적하며, 이황은 과거에 급제하여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고 세상을 기롱하며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지만, 조식성운은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도를 지키며 부름에도 나서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한 조식성운이 선대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임금을 존중하고 치안과 시무를 진언한 것을 들어 이황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1]

정인홍은 이황의 출처가 분명치 못함을 비판하였으나, 이 일로 이황의 제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정인홍은 성균관의 청금록(유생들의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11]

2. 3. 생애 후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서인이 득세하고 동인이 몰락하면서 정인홍은 삭탈관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16] 1591년 건저 문제로 동인이 득세했을 때, 동인 내에서 정철을 사형시키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했다. 정인홍은 유성룡 등의 온건파에 맞서 이산해와 함께 정철 사형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입장에 섰다. 1606년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소북으로 갈라졌다. 정인홍은 이산해, 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다.[16]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으로, 1573년 천거되어 6품직을 맡았고, 1576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장령으로 승진했다. 1575년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동인에 속했고, 1591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될 때 북인에 속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일어나자 이듬해 스승인 성혼의 책임을 추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3000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성주, 합천, 고령, 함안을 방어하며 강력한 지방 기반을 구축했다. 1594년 제용감 정으로 임명되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상주목사와 영해부사를 역임했다. 1606년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자 대북을 이끌고 형조참의, 승정원 부승지,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당시 가장 큰 정치 문제는 선조의 후계자 선정이었는데, 대북이 추대하는 광해군이 즉위했다. 1609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하고, 1618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폭정은 모두 대북에게 돌아갔고, 정인홍은 대북의 수장으로서 처형되었다.

2. 3. 1. 인목대비 폐모론과 계축옥사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서인이 득세하고 동인이 몰락하면서, 이발의 80대 노모와 10세 미만의 자녀, 그의 동문인 최영경 등 2천여 명의 동인 당원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이때 정인홍도 삭탈관직되었다. 이 일로 그는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16]

1591년 건저 문제로 서인이 숙청되고 동인이 득세했을 때, 동인 내에서 정철을 사형시키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했다. 그는 유성룡, 우성전 등의 온건파에 맞서 정철이 옥사를 날조했음을 주장하며, 이산해와 함께 정철 사형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입장에 섰다. 1606년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적통계승을 주장하며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소북과 광해군의 즉위를 주장하는 대북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산해, 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다.[16]

1612년 의정부좌찬성을 거쳐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이이첨, 허균 등과 함께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탄핵하는 데 지지하였다. 1613년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김제남을 비판하고, 영창대군을 지원하는 세력을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1614년 영창대군 사형 여론에 반대하며 영창대군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5년 좌의정에 올랐다.[16]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하였으며, 1618년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킨 뒤 의정부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인륜에 어긋난다 하여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나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대북정권의 고문(顧問)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 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이황을 비판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16]

2. 3. 2. 인조반정과 최후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인홍은 바로 체포되었고, 3월 28일 한성부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했다.[17]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죄목을 씌웠다.

  • 사림 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품관(品官)이었다는 것
  •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무단으로 위세를 부렸다는 것
  • 괴귀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
  • 이언적, 이황을 배척하고 그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는 것
  • 폐비를 반대한 동료이자 후배인 정온, 이대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


정인홍은 국문에서 자신은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7] 서인 정권은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수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어기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7] 정인홍은 죽음에 임하여서도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1623년 4월 3일, 정인홍은 명나라를 배신한 죄와 폐모살제의 죄명으로 역적으로 몰려 참형당했다.[17] 당시 그의 나이는 89세였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이후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

정인홍이 처형되자 그의 문도들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이로 인해 합천 등 여러 고을에서는 벼슬하는 사람이 끊어졌다고 한다.[17] 합천 사람들은 정인홍의 초상화를 안치해 놓고 제사를 지내는 등, 합천에서 정인홍은 여전히 위엄 있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17] 정인홍이 사형당하고, 이이첨이 그의 문하생이었으므로, 그의 다른 문하생들 다수가 화를 입었다.[17] 합천 묘산의 교리 조정립은 중도부처, 정언 조성생은 파직, 가회의 우참찬 윤선은 파직, 고령의 이조좌랑 박종윤은 중도부처, 의령의 이조정랑 유활은 파직, 합천 가야의 지평 정결, 율곡의 대사간 문려, 고령의 승지 박종주 등은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하고 출사길이 막혔다.[17]

1629년(인조 7년)에는 합천군이 정인홍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합천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년 후인 1644년(인조 22년)에야 합천군으로 복귀되었다. 1631년(인조 9년) 2월에는 합천의 정한(鄭澣), 고령 도진의 박희집(朴禧集), 창녕 성지도(成至道) 등이 북인(대북)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다가 정한, 박희집 등 40여 명이 죽고 6명이 유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 사상과 평가

정인홍은 현실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실학적인 위민사상을 가졌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외교와 국방 정책을 논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보민(保民)과 위민(爲民) 사상을 강조했다. 또한 절약과 형평을 중시하며 실용적인 생활을 강조했고, 사회적 지위와 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했다.

그러나 정인홍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노론은 그를 역적으로 폄하했지만, 황현신채호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헌신한 그의 우국충정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재평가했다. 신채호을지문덕, 이순신, 최영과 함께 정인홍을 언급하며 그의 혁명 정신을 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날조된 문집 등을 근거로 정인홍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그의 출신 지역인 경상우도 지역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4] 발터 벤야민은 과거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구원해야 역사의 진보와 미래가 있다고 말했는데, 정인홍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의 삶은 지식인의 자세와 의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4]

정인홍은 조식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 벼슬길에 거의 나아가지 않고 고향 합천에서 학문 활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조식의 문인들이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한 점이 선조 말기부터 광해군 시기에 걸쳐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3. 1. 경세관

정인홍은 현실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외교·국방책을 논했으며, 보민제산(保民制産)·외우민암(畏于民암) 등 실학적인 보민(保民)의 위민사상(爲民思想)에 투철하였다. 한편으로는 절용(節用)과 형평(衡平)을 말하면서 실제적이고 유용한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富)가 고루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2. 평가와 비판

정인홍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노론 세력은 그를 '만고의 역적'으로 폄훼했지만, 구한말 황현신채호는 그를 재평가했다.

황현은 자신의 저서 '오하기문'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헌신한 정인홍의 우국충정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당시 유학자들이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자수호조약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아첨하며 엎드려 있다고 비판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통탄했다.[4]

신채호는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과 함께 정인홍을 언급하며, 자신의 혁명 정신을 정인홍에게서 찾으려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정인홍의 업적이 자신과 함께 묻힐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날조된 문집 등을 근거로 정인홍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그의 출신 지역인 경상우도 지역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역사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과거의 무수한 희생자들을 지금 기억해 내어 구원하지 않으면, 역사의 진보도 미래도 없다"고 말했다. 정인홍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의 삶이 지식인의 자세와 의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은 분명하다.[4]

3. 3. 논란

정인홍은 학행으로 이름을 날려, 소년 시절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김우옹의 천거로 선조 초 관직에 나갔다. 1572년 스승 조식은 임종에 이르러 그에게 자신의 칼을 물려주었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였다.[9]

1580년 12월 정4품 사헌부 장령에 임명된 정인홍은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이서들의 부정과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는 등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탄핵을 가했다.[9] 그로 인해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정신을 차렸으며, 시장의 장사치들이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서 내놓지 못했다.[9]

정인홍은 조식의 가르침에 유의하여 젊은 시절 한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벼슬길에 거의 나아가지 않고, 대부분 고향 합천에서 강학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선조 말기부터 광해군 시기에 걸쳐 국왕의 각별한 신임으로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조 말기 정인홍 등이 갑자기 부상한 배경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식의 문인들 대부분이 의병활동에 참여한 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왜란 발발 이틀 만에 모든 성을 버리고 도주하여 나흘 만에 모든 길이 뚫린 상황과 대비되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은 곽재우 의병일기장 등 참고).

정인홍과 그의 문인 이이첨을 영수로 삼은 대북 세력은 광해군 중기 이후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 정권이 전복되자, 조식 학파는 철저히 배제, 소외되어 더 이상 독자적 학파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정언우(鄭彦佑)
아버지정륜(鄭倫)
어머니진주 강씨 (? - 1582년)
동생이름 미상
동생정인영 (1540년 - 1602년)
부인남원 양씨 (양희(梁喜)의 딸)
아들정연(鄭沇, 1571년 - 1592년)
며느리진주 하씨 (하진보(河晋寶)의 딸)
손자정능(鄭 木+菱)
장인양희(梁喜, 1515년 - 1580년)
사돈하진보(河晋寶, 1530년 - 1585년)
사돈전의 이씨 (이공도(李公度)의 딸, 하진보의 본처)
사돈정씨 (정수익(鄭壽益)의 딸, 며느리 진주 하씨의 친정어머니)


5. 저서

인조반정 이후 반대파에 의해 그의 문집과 작품 대부분이 불태워지거나 사라졌다. 현재는 《내암집》만이 전한다.

6. 관련 작품

6. 1.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Chung In-hong http://100.naver.com[...] 2024-10-01 #Dead link date로 추정.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음.
[2]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3] 웹인용 영의정 내암 정인홍 연보 https://blog.naver.c[...] 2024-06-27
[4]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5]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6]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7]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8]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9]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0]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1]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2]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13]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4]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5]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6] 문서 이 일로 북인정권을 관망하던 남인이 북인의 적으로 돌변했다.
[17]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18] 문서 연대가 190년이 차이나므로 증손이 아닐 가능성이 있고, 그보다 더 후대의 자손일 가능성이 높다.
[19] 서적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 실록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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