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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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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루프는 1587년 에센의 상인 길드에 가입한 아르트 크루프 가문에서 시작된 독일의 기업이다. 18세기 중반, 미망인 크루프가 사업을 확장하여 철강 단조 공장을 인수하면서 철강 산업과 연관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주강 공장을 세웠고, 그의 아들 알프레트 크루프는 철도 산업과 군수 산업에 진출하여 '대포왕'으로 불리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20세기 초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시대에는 제1차 세계 대전과 나치 정권과의 협력으로 군수 산업을 주도했으나, 전쟁 범죄와 강제 노동으로 비판을 받았다. 알프리트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시대에는 전후 재건과 사업 다각화를 통해 기업을 확장했으나, 1960년대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99년에는 티센과 합병하여 티센크루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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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프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2. 초기 역사 (16세기-18세기)

크루프 가문은 1587년 아르트 크루프가 에센의 상인 길드에 가입하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아르트는 흑사병 발생 직전에 도시에 도착하여 전염병을 피해 도망간 가족들의 재산을 구매하여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1] 1624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안톤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안톤은 30년 전쟁(1618–48) 동안 총포상 사업을 감독했는데, 이는 가문이 무기 제조와 오랫동안 연관된 첫 번째 사례였다.[1]

이후 크루프 가문은 계속해서 재산을 늘리고 에센의 시정에 관여했다.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요도쿠스 크루프가 가문을 이끌었다. 1751년 그는 헬레네 아말리에 아셔펠트와 결혼했다. 요도쿠스는 6년 후 사망했고, 그의 미망인이 사업을 운영하게 되었다. 미망인 크루프는 수십 년 동안 가문의 재산을 크게 확장하여 방축 공장, 4개의 탄광 지분, 그리고 1800년에 에센 근처의 개울가에 위치한 철강 단조 공장을 인수했다.[1]

2. 1. 아르트 크루프와 상인 가문의 시작

아르트 크루프는 1587년 에센의 상인 길드에 가입하면서 크루프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상인이었던 아르트는 흑사병 발생 직전에 도시에 도착하여 전염병을 피해 도망간 가족들의 재산을 구매하여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1] 1624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안톤이 가업을 물려받았다.[1] 안톤은 30년 전쟁(1618–48) 동안 총포상 사업을 감독했는데, 이는 가문이 무기 제조와 오랫동안 연관된 첫 번째 사례였다.[1]

그 다음 세기 동안 크루프 가문은 계속해서 재산을 늘리고 에센의 시정에 관여했다.[1] 18세기 중반, 아르트의 증손자인 프리드리히 요도쿠스 크루프가 크루프 가문을 이끌었다.[1] 1751년 그는 헬레네 아말리에 아셔펠트(아르트의 또 다른 증손녀)와 결혼했다.[1] 요도쿠스는 6년 후 사망했고, 그의 미망인이 사업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는 가문 최초의 일이었다.[1] 미망인 크루프는 수십 년 동안 가문의 재산을 크게 확장하여 방축 공장, 4개의 탄광 지분, 그리고 1800년에 에센 근처의 개울가에 위치한 철강 단조 공장을 인수했다.[1]

2. 2. 30년 전쟁과 총포상 사업

크루프 가문은 1587년 아르트 크루프가 에센의 상인 길드에 가입하면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했다. 상인이었던 아르트는 흑사병 발생 직전에 도시에 도착하여 전염병을 피해 도망간 가족들의 재산을 구매하여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1624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안톤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안톤은 30년 전쟁(1618–48) 동안 총포상 사업을 감독했는데, 이는 가문이 무기 제조와 오랫동안 연관된 첫 번째 사례였다.

2. 3. 18세기: 프리드리히 요도쿠스 크루프와 가문의 확장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요도쿠스 크루프는 헬레네 아말리에 아셔펠트(아르트의 또 다른 증손녀)와 1751년에 결혼하여 크루프 가문을 이끌었다.[1] 그는 6년 뒤 사망했고, 그의 미망인이 가문 최초로 사업을 운영하게 되었다.[1] 미망인 크루프는 수십 년 동안 가문의 재산을 크게 확장하여 방축 공장, 4개의 탄광 지분, 그리고 1800년에는 에센 근처의 개울가에 위치한 철강 단조 공장을 인수했다.[1]

3. 프리드리히 크루프 시대 (19세기 초)

크루프 가는 프리드리히 크루프(1787~1826)가 1810년 에센에 강철 주물 공장을 세우면서 철강 기반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강철은 전통적으로 대장장이모루에 철재를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겨서 단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크기나 형태에 제한이 있었다. 주형에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철은 큰 것을 만들 수 있고 형태의 자유도는 높았지만, 약하고 부서지기 쉬웠다. 이러한 이유로 주형으로 강철을 만드는 주강 기술이 연구되었고, 18세기 말 영국 셰필드에서 주강 기술이 확립되어 세계의 수요를 독점했다.

1807년,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19세의 나이에 상업적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주강의 비밀을 발견하기로 결심하고, 1811년 크루프 구스슈탈파브리크(주강 공장)를 설립했다. 나폴레옹대영 제국에 대한 봉쇄(대륙 봉쇄령)를 시작했을 때, 영국 강철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나폴레옹은 영국 공정을 복제하는 사람에게 4천 프랑의 상금을 제시했고, 이것이 프리드리히의 관심을 끌었다.[1]

이후 그의 아들 알프레트 크루프는 주강 제조에 성공하여, 공구나 식탁용 나이프, 스푼의 제조를 시작했다. 특히, 주형에 무늬를 새겨 손잡이에 꽃 등의 무늬가 있는 스푼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은 크루프였다. 훗날에는 화폐 주조기나 증기 기관차바퀴 제조를 시작하여, 크루프의 사업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1]

알프레트 크루프는 철도 차륜이나 식기 제조에 사용되는 강철 롤러의 주요 공급자가 되기 위해 신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고, 베서머 법을 비롯한 독자적인 주강 제조 기술에 투자하였으며 독일프랑스에서 대량의 광산을 매입하였다. 또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택이나 의료, 퇴직금 등을 제공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를 제공하였다.[1]

에센 브레데니 묘지에 있는 프리드리히 크루프와 부인 테레제 빌헬미의 묘비

3. 1. 주강 생산을 향한 도전

프리드리히 크루프(1787~1826)는 영국이 독점하던 주강 제조 기술을 알아내고자 라인강 강변에 물레방앗간을 짓고 수력을 이용하는 연구실을 만들었다. 이것이 훗날 크루프의 시초가 된다. 그는 주강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빚만 늘어가다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업실과 종업원들은 14세였던 장남 알프레트 크루프(1812~1887)에게 넘겨졌다.

3. 2. 크루프 구스슈탈파브리크 설립과 초기 어려움

프리드리히 크루프1811년 영국의 도가니 강철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크루프 구스슈탈파브리크(주강 공장)를 설립했다. 그는 루르 강에 수차와 주조소를 건설했지만, 수량이 일정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물레방아 동력 시설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지만, 1816년 용해 강철 생산에 성공했다.

프로이센의 탄광 마을 에센 출신의 발명가 프리드리히 크루프(1787년1826년)는 영국이 독점하던 주강 제조 기술을 파악하기 위해 라인강 강가에 작은 목조 물레방앗간을 짓고 수력을 이용한 연구실을 만들었다. 이 물레방앗간은 훗날 거대 기업 크루프의 시초가 된다. 그는 공방에서 주강 제조법을 연구했지만,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빚을 지다가 39세에 사망했다.

4. 알프레트 크루프 시대 (19세기 중후반)

프리드리히 크루프의 아들 알프레드 크루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크루프 사를 19세기 중후반 동안 크게 성장시켰다. 알프레드는 철도 차륜, 식기 제조용 강철 롤러 등 다양한 분야에 필요한 강철 생산 기술에 집중 투자했다. 특히 베서머 법을 비롯한 독자적인 주강 제조 기술을 개발하고, 독일프랑스의 광산을 매입하여 원료 공급을 안정화했다.[1]

1840년대, 미국의 철강 산업이 성장하면서 크루프의 주요 생산품이었던 철도 관련 부품 수입이 감소하자, 러시아, 터키, 프로이센 등에 강철 대포를 판매하며 무기 산업의 비중을 높였다. 1880년대 후반에는 무기 제조가 전체 생산량의 약 5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당시 크루프 사의 직원 수는 약 20,000명에 달했다.[1]

알프레드 크루프는 노동자 복지에도 힘썼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택, 의료, 퇴직금 등을 제공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를 제공하였다.[1]

1903년, 크루프는 정식으로 기업 법인을 설립하여 주식합명회사가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공업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1]

4. 1. 주강 생산 성공과 사업 확장

프리드리히 크루프의 아들 알프레드 크루프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14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 테레제 크루프와 함께 제철소 운영을 맡게 되었다. 초기에는 경영난을 겪었으나, 1841년 동생 헤르만이 수저 롤러를 발명하고 특허를 내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를 통해 공장을 확장하고 강철 생산과 주강 블록 제조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1]

알프레드 크루프는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베서머 법을 비롯한 독자적인 주강 제조 기술을 개발하고, 독일프랑스의 광산을 매입하여 원료 공급을 안정화했다. 또한, 1847년에는 최초로 주강 대포를 제작했다.[1] 1851년 만국 박람회(런던)에서는 무게 약 1950.45kg의 강철 잉곳과 6파운더포를,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약 45359.20kg 잉곳을 전시하여 기술력을 과시했다.[1]

1851년에는 용접하지 않은 철도 바퀴를 개발하여 미국 철도에 판매하며 주요 수입원을 확보했다. 그는 후장포 개발에 주력했는데, 이는 당시 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견해였다. 그는 프로이센 궁정에 후장식 곡사포를 기증하기도 했다.[1]

프로이센은 크루프의 기술력을 인정하여 1859년 312문의 강철 대포를 구매했고, 크루프는 프로이센 군대의 주요 무기 제조사가 되었다. 프로이센은 크루프의 대포를 활용하여 독일 통일 전쟁에서 승리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크루프 강철" 대 청동 대포의 대결로 여겨지기도 하며, 독일 포병의 성공은 국제적인 군비 경쟁을 촉발시켰다.[1]

1873년 공황 당시 크루프는 사업 확장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했으나, 프로이센 국립은행의 도움으로 3천만 마르크의 대출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다. 1878년과 1879년에는 국제 구매자를 위한 대포 시연회인 ''Völkerschiessen''을 개최하여 46개국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1887년 알프레드 크루프 사망 당시 직원 수는 75,000명에 달했으며, 총 24,576문의 대포를 제조했다.[2]

크루프는 ''Generalregulativ''라는 회사 기본 헌법을 제정하여 단독 소유 및 장자 상속을 확립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회 복지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주택, 의료, 퇴직금 등이 포함되었으며, 협동 조합을 설립하고 사고, 생명, 질병 보험 회사를 지원했다. 기술 및 수동 훈련 학교도 제공되었다.[2] 이러한 크루프의 가부장적 경영 방식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아돌프 히틀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4. 2. 철도 산업 진출과 성장

프리드리히 크루프의 아들 알프레드 크루프는 철도 차륜, 식기 제조용 강철 롤러 공급을 위해 신기술에 투자했다. 베서머 법 등 독자적인 주강 제조 기술을 개발하고 독일, 프랑스 광산을 매입했으며, 노동자 복지를 개선했다.[1]

1840년대 미국 철강 산업이 성장하면서 철도 부품 수입이 감소하자, 러시아, 터키, 프로이센에 강철 대포를 판매하며 무기 산업 비중을 높였다. 1880년대 후반에는 무기 제조 비중이 50%에 달했고, 직원 수는 약 2만 명이었다. 1903년 주식합명회사가 되어 세계 최대 공업 기업으로 성장했다.[1]

1834년 독일 관세 동맹 성립으로 가맹국 간 관세와 통행료가 폐지되자, 알프레트는 대량의 철도 차륜 주문을 받았다. 크루프 공장은 수력 대신 증기 기관을 설치했다.[1]

1835년 독일 최초의 철도 부설은 철강 산업에 큰 기회를 제공했다. 알프레트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고 있다. 강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철도는 교역을 발달시키고 국민 경제 형성에 기여했다. 크루프는 철강 제품 제조업체로 성장했으며, 회사 문장의 세 고리는 철도 차륜을 상징한다.

1851년, 알프레드는 용접하지 않은 철도 바퀴를 개발하여 미국 철도에 판매하며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다. 그는 후장포 개발에 힘썼으며, 프로이센에 곡사포를 기증하기도 했다.[1]

프로이센은 크루프의 기술을 활용하여 독일 통일 전쟁에서 승리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크루프 강철" 대 청동 대포의 대결이었다. 독일 포병의 성공은 국제적인 군비 경쟁을 촉발시켰다. 크루프는 여러 국가에 개량된 포병과 강철 방패를 판매했다.[1]

1873년 공황 동안 알프레드는 사업을 확장하여 유럽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파산 위기를 겪기도 했다. 프로이센 국립은행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했다.[1]

1878년과 1879년, 크루프는 메펜에서 국제 대포 시연회 ''Völkerschiessen''을 개최하여 46개국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1887년 사망 당시 직원 수는 75,000명이었고, 총 24,576문의 대포를 제조했다.[2]

크루프는 ''Generalregulativ''라는 회사 헌법을 제정하여 단독 소유와 장자 상속을 확립하고, 노동자 통제를 강화했다. 대신 주택, 의료, 퇴직금 등 진보적인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여 기업 도시 에센을 만들고, "크루피아너"라는 충성스러운 노동자 집단을 형성했다. 크루프의 가부장적 전략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아돌프 히틀러에게 영향을 주었다.[2]

크루프는 C-96 야전포 설계를 거부한 전쟁 장관들을 해고한 카이저의 존경을 받았다.[3][4]

4. 3. 군수 산업 진출과 '대포왕'

알프레드 크루프는 1840년대 미국의 철강 산업 성장으로 철도 부품 수입이 감소하자, 러시아, 터키, 프로이센 등에 강철 대포를 판매하며 무기 산업 비중을 높였다. 1851년 만국 박람회에서 6파운더포를 출품하여 금상을 받고,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약 45359.20kg 잉곳으로 만든 대포를 전시하여 이목을 끌었다.[1]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 전쟁에서 크루프의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오스트리아프랑스를 격파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크루프 강철" 대 청동 대포의 대결로 여겨졌으며, 독일 포병의 성공은 군비 경쟁을 촉발했다. 크루프는 러시아에서 칠레, 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에 포병과 강철 방패를 판매했다.[1]

1873년 공황에도 불구하고 크루프는 사업을 확장하여 유럽 최대 기업 중 하나가 되었지만, 한때 파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메펜에 위치한 세계 최대 시험장에서 ''Völkerschiessen''이라는 대포 시연회를 개최하여 46개국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1887년 알프레드 사망 당시, 크루프는 75,000명의 직원을 고용했으며, 총 24,576문의 대포를 제조했다.[1]

크루프는 ''Generalregulativ''라는 회사 기본 헌법을 제정하여 단독 소유와 장자 상속을 확립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엄격한 통제와 함께 진보적인 사회 서비스를 제공했다. 에센은 거대한 기업 도시가 되었고, 크루프는 가부장적 경영으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아돌프 히틀러에게 영향을 주었다.[2]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거대한 대포를 출품하였고, 일본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아카마츠 노리요시는 크루프를 방문하여 군함 카이요마루에 탑재할 대포 18문을 주문했다. 일본은 크루프 화포를 바탕으로 다수의 화포를 제조하여 러일 전쟁에서 활용했다.[13]

1903년 프리드리히 크루프 AG 설립 후, 크루프는 1900년에 약 45,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사택을 제공하는 등 복리 후생에도 힘썼다.

4. 4. 국제 시장 진출과 경쟁

1851년, 알프레드 크루프는 런던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6파운드 대포를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했다. 이 대포는 완전히 주강으로 제작되었으며, 흠 없는 강철 잉곳은 이전보다 두 배 이상 컸다.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더 큰 잉곳을 전시하여 기록을 경신했다. 이러한 크루프의 전시품은 엔지니어링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에센 제철소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1]

알프레드는 용접하지 않은 철도 바퀴를 발명하여 미국 철도에 판매함으로써 회사의 주요 수입원을 확보했다. 또한, 그는 후장포 개발에 주력하여 프로이센 궁정에 곡사포를 기증하기도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알프레드의 기술력을 인정하여 1859년 312문의 강철 대포를 주문했고, 크루프는 프로이센 군대의 주요 무기 제조사가 되었다. 프로이센은 크루프의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독일 통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했다. 특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크루프 강철" 대 청동 대포의 대결로 여겨졌으며, 독일 포병의 성공은 국제적인 군비 경쟁을 촉발시켰다. 크루프는 러시아, 칠레, 태국 등 다양한 국가에 포병과 강철 방패를 판매하며 국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

1878년과 1879년, 크루프는 국제 구매자를 대상으로 ''Völkerschiessen''이라는 대포 시연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세계 최대의 시험장인 메펜에서 열렸으며, 크루프는 46개국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알프레드가 사망할 당시, 크루프는 75,0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으며, 총 24,576문의 대포를 제조했다. 이 중 10,666문은 독일 정부에, 13,910문은 수출용이었다.[1]

일본의 경우,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아카마츠 노리요시 등이 크루프를 방문하여 군함 카이요마루에 탑재할 대포를 주문했다. 일본은 크루프의 화포를 바탕으로 다수의 화포를 제조했으며, 러일 전쟁 당시 크루프식 화포("극식")를 다수 장비했다. 중국에도 크루프 화포가 제공되었으며, 중일 전쟁 당시 일본 군함을 포격한 胡里山砲台|후리산 포대중국어가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13]

4. 5. 복지 정책과 기업 도시

알프레드 크루프는 노동자가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을 때 전례 없는 수준의 임금과 기술 교육, 사고·질병·생명 보험과 주택, 복지 시설, 공원, 학교, 백화점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하였다. 미망인과 고아 역시 각각의 남편이나 부모가 사망했을 경우 보상금 지급이 보장되었다.[2]

크루프의 사회 서비스 프로그램은 1861년경, 회사 직원들을 위한 주택이 시내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되었고, 회사는 주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62년에는 감독관을 위해 10채의 주택이 준비되었고, 1863년에는 알트 베스트엔에 노동자들을 위한 최초의 주택이 건설되었다. 노이 베스트엔은 1871년과 1872년에 건설되었다. 1905년까지 400채의 주택이 제공되었으며, 많은 주택이 전 노동자의 미망인에게 임대료 없이 제공되었다. 협동 조합은 1868년에 설립되어 Consum-Anstalt가 되었다. 수익은 구매 금액에 따라 분배되었다. 독신 남성을 위한 기숙사인 Ménage는 1865년에 200명의 하숙생으로 시작되었고, 1905년에는 1000명을 수용했다. 목욕탕이 제공되었고 직원들은 무료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 사고, 생명 및 질병 보험 회사가 설립되었고, 회사는 그들을 지원했다. 기술 및 수동 훈련 학교가 제공되었다.[2]

크루프는 회사의 기본 헌법인 ''Generalregulativ''를 제정했다. 회사는 단독 소유였으며, 엄격한 노동자 통제와 함께 장자 상속을 통해 상속되었다. 크루프는 충성 서약을 요구하고,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감독관의 서면 허가를 받도록 했으며, 노동자들에게 국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 대가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진보적인 사회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공원, 학교, 레크리에이션 시설이 있는 "식민지"가 포함되었으며, 과부 및 고아, 기타 복지 제도를 통해 질병이나 사망 시 남성과 그 가족을 보장했다. 에센은 거대한 기업 도시가 되었고, 크루프는 "크루피아너"가 국가와 호엔촐레른 가문만큼이나 회사와 크루프 가문에 충성하는, 사실상의 국가 내 국가가 되었다. 크루프의 가부장적 전략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 사회 민주당의 경향에 대한 예방책으로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었으며, 이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지도자 원칙''의 개발 및 채택에 영향을 미쳤다.[2]

5.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크루프 시대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크루프, 1900년


1905년의 노동자들


알프레트 크루프가 1887년에 사망한 후, 그의 외아들인 프리드리히 알프레드(프리츠)가 사업을 이어받았다. 프리드리히 알프레드는 평생 "프리츠"라고 불렸으며, 아버지와 외모와 성격이 매우 달랐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루르 지역 산업 지도자들 사이에서 드물게 자선가였다.

프리츠는 마그다와 결혼하여 두 딸, 베르타 (1886–1957)와 바르바라 (1887–1972)를 두었다. 바르바라는 1907년에 틸로 프라이헤어 폰 빌모프스키 (1878–1966)와 결혼했다.

5. 1. 사업 확장과 신기술 개발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크루프(프리츠)는 아버지 알프레트 크루프가 1887년에 사망한 후 사업을 이어받았다. 프리츠는 아버지와 달리 루르 지역 산업 지도자들 사이에서 드물게 자선가였으며, 그의 자선 활동 중 일부는 우생학 연구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5] 그는 특히 유전학을 사회 과학 및 공공 정책에 적용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5][6]

프리츠는 은밀한 판매의 달인이었고, 빌헬름 2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회사 사업을 전 세계로 확장했다. 그는 미국 철도 시장의 변화에 따라 무기 제조에 집중했다.

프리츠 크루프는 역사를 바꿀 많은 신제품 개발을 승인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890년: 니켈강을 개발하여 얇은 전함 장갑과 노벨의 개량된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를 만들 수 있었다.
  • 1892년: 적대적 인수를 통해 그루손을 매입하여 크루프-판처를 설립하고 장갑판과 선박 포탑을 제조했다.
  • 1893년: 루돌프 디젤의 새로운 엔진 제작을 지원했다.
  • 1896년: 에 있는 게르마니아베르프트를 매입하여 독일의 주요 군함 건조소로 만들었으며, 1906년 최초의 독일 잠수함을 건조했다.

5. 2. 카프리 섬 스캔들과 죽음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크루프는 1902년 10월 15일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40명 정도의 이탈리아 청소년 소년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었다.[7] 이 사건으로 인해 홍보 문제가 발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침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7] 자살로 추정되었지만, 타살 의혹도 제기되었으며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7] 그의 아내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시설에 수용되었다.[7]

6.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시대 (20세기 초-중반)

베르타 크루프와 결혼한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20세기 초 크루프를 이끌었다. 1911년 함 철강 공장을 인수하여 가시 철사를 제조했고, 1912년부터 스테인리스강 생산을 시작했다. 당시 크루프 무기의 절반은 독일에, 나머지는 52개국에 판매되었다. 1913년 콘왈처 스캔들(Kornwalzer-Skandalde)로 알려진 사건에서 크루프에 정보를 제공한 군 장교들이 수감되었지만, 구스타프는 처벌받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구스타프는 포병 제조에 집중하여 1914년 420mm 곡사포와 1917년~1918년 파리 대포를 제작했다. 종전 후에는 보포스 사와 함께 8.8 cm FlaK 18/36/37을 개발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봉쇄로 해외 시장을 잃었고, 1916년 독일 정부는 헤이그 협약을 위반하고 벨기에 산업을 압수, 벨기에 민간인을 루르 지역 강제 노동에 징집했다. 전쟁 중 프리드리히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르프트는 독일 해군을 위해 84척의 유보트를 건조했다. 1918년 연합군은 구스타프를 전쟁범죄자로 지명했으나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전후 크루프는 무기 제조를 중단하고 소비재 생산 전환을 시도했지만 수년간 손실을 보았다. 1920년 카프 쿠데타에 대한 반발로 루르 적군(Rote Soldatenbundde)이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에센의 크루프 공장을 점거하기도 했다. 독일 국방군이 질서를 회복했으나, 영국은 크루프 공장 대부분을 해체해 생산 능력을 절반으로 줄였다.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 동안 크루프는 에센에서 사용할 크루프마르크를 인쇄했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루르 지역 점령으로 노동자 1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크루프는 프랑스에 의해 벌금과 징역형을 받았지만 이후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크루프는 베르사유 조약을 회피하고자 국방군과 비밀리에 무기 설계 및 제조에 참여했다. 1921년 스웨덴 보포스를 인수하고, 1922년 네덜란드에 수데리우스 AG를 설립하여 중립국에 무기를 판매했다. 1924년 원료 철강 협회(Rohstahlgemeinschaft)가 설립되었지만, 독일은 할당량을 위반하고 벌금을 내면서 고품질 강철 생산을 이어갔다. 1926년 비디아 제조를 시작했고, 1928년 독일 산업은 총파업을 진압하며 노동자 25만 명을 해고했다. 1929년 크라이슬러 빌딩은 크루프 강철로 덮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 크루프는 1호 전차, 4호 전차, 6호 전차, 7호 전차, 88mm 대공포, 구스타프 열차포 등을 생산했다. 1943년 히틀러 지시로 개인 회사로 전환되었고, 구스타프의 장남 알프리드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소유주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크루프는 독일 국방군을 위해 전차, 포, 군용 트럭 등 병기를 제조했다. 1936년부터 중독 협력 3개년 계획에 따라 중국(중화민국)에 병기 공장을 건설하고 중국 국민당에 무기를 판매했다.

구스타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주요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심각한 치매로 재판을 받지 못했다. 그는 양차 세계 대전 모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유일한 독일인이었다. 1950년 사망 후 화장되어 조용히 매장되었다.

6. 1. 베르타 크루프와의 결혼과 회사 경영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1931)


프리츠 크루프가 사망하자 그의 딸 베르타가 회사를 상속받았다. 1903년, 회사는 정식으로 주식회사로 설립되어 프리드. 크루프 그루손베르크 AG로 명명되었으나, 베르타는 4주를 제외한 모든 주식을 소유했다. 빌헬름 2세는 크루프 회사가 여성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베르타와 구스타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의 결혼을 주선했다. 구스타프는 바티칸의 프로이센 궁정 신하이자 미국 남북 전쟁 장군 헨리 볼렌의 손자였다. 결혼식에서 황제의 포고령에 따라 구스타프는 "크루프"라는 성을 추가로 받았으며, 이는 회사와 함께 장자 상속으로 상속될 예정이었다.[8]

1911년, 구스타프는 가시 철사 제조를 위해 함 철강 공장을 인수했다. 1912년, 크루프는 스테인리스강 생산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크루프 무기의 50%는 독일에, 나머지는 52개국에 판매되었다. 회사는 다른 국제 회사와의 카르텔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투자했다. 에센은 회사의 본사였다. 1913년, 독일은 콘왈처 스캔들(Kornwalzer-Skandalde)로 알려진 사건에서 크루프에 정보를 팔아넘긴 군 장교들을 수감했다. 구스타프는 처벌받지 않았고, 오토 에치우스라는 이사 한 명만 해고되었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후, 크루프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베르펜에 있는 그의 사냥 별장 블뤼벤바흐 성(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전 거주지)을 구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크루프 포병 공장


구스타프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회사를 이끌었으며, 연합국의 봉쇄로 해외 시장을 잃은 후 포병 제조에 집중했다. 영국의 비커스는 전쟁 중 로열티 지불을 중단했다 (크루프는 포탄 뇌관에 대한 특허를 보유, 1926년에 미지급금이 지불됨).

1916년, 독일 정부는 벨기에 산업을 압수하고 벨기에 민간인을 루르 지역의 강제 노동에 징집했다. 이는 헤이그 협약 위반이었다. 전쟁 동안 프리드리히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르프트는 독일 해군을 위해 84척의 U보트를 생산했으며, 봉쇄에도 불구하고 원자재를 독일에 수송하기 위한 도이칠란드 잠수함 화물선도 생산했다. 1918년 연합군은 구스타프를 전범으로 지명했지만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전후 회사는 무기 제조를 중단해야 했다. 구스타프는 "Wir machen alles!"(우리는 모든 것을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소비재 전환을 시도했지만 수년간 손실을 보았다. 회사는 7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했지만, 퇴직금 지급과 사회 서비스 유지를 통해 사회주의적 불안을 막았다. 회사는 부상당한 참전 용사에게 강철 치아와 턱을 제공하기 위해 치과 병원을 열었다. 프로이센 주 철도에서 첫 번째 계약을 받아 첫 번째 기관차를 제조했다.

1921년 2월 15일 발행된 프리드. 크루프 AG 채권


1920년, 카프 쿠데타에 대한 반발로 루르 봉기가 발생했다. 루르 적군(Rote Soldatenbundde)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 대부분을 점령했다. 에센에 있는 크루프 공장이 점령되고 독립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독일 국방군이 베스트팔렌에서 침략하여 질서를 회복했다. 그해 말 영국은 크루프 공장 대부분을 해체하여 생산 능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산업 장비를 전쟁 배상금으로 프랑스에 보냈다.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 동안, 회사는 에센에서 사용할 크루프마르크를 인쇄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르 지역을 점령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에센 크루프 공장을 조사하던 프랑스 군인들은 차고에 갇혀 기관총을 발사하여 13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라인란트 전역에서 보복 살인과 파괴 행위를 촉발했으며, 크루프는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공개 장례식을 열었다가 프랑스에 의해 벌금과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7개월 후 프랑스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크루프는 군주주의자였지만, 바이마르 공화국과 협력했다. 무기 제조업자로서 그의 첫 충성은 정부에 있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을 회피하기 위해 국방군과 비밀리에 무기 설계 및 제조에 참여했다. 1921년 크루프는 전선 회사로 스웨덴의 보포스를 인수하고,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포함한 중립국에 무기를 판매했다. 1922년, 크루프는 조선을 위한 전선 회사로 네덜란드에 수데리우스 AG를 설립하고, 네덜란드, 스페인, 터키, 핀란드, 일본 등에 잠수함 설계를 판매했다. 독일 총리 요제프 비르트는 크루프가 포병 및 탱크 설계를 비밀리에 계속하도록 주선했으며, 한스 폰 젝트 육군 참모총장 및 파울 벤케 해군 참모총장과 협력했다. 크루프는 5년 동안 연합국 조사관들로부터 이 활동을 숨길 수 있었으며,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정부에 엔지니어를 고용하여 기술을 유지했다.

1924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이 참여하는 탄광 및 철강 생산량 할당 카르텔인 원료 철강 협회(Rohstahlgemeinschaft)가 룩셈부르크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루르의 생산량을 독점하고 고품질 강철 생산을 계속하기 위해 할당량을 위반하고 벌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크루프는 비디아("Wie Diamant") 코발트-텅스텐 카바이드 제조를 시작했다. 1928년, 크루프 지도하의 독일 산업은 총파업을 진압하여 25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정부가 임금을 15% 삭감하도록 장려했다. 1929년, 크라이슬러 빌딩은 크루프 강철로 덮였다.

구스타프와 베르타는 처음에 히틀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히틀러가 사업 국유화 계획을 포기하고, 11월 6일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의석을 얻었으며, 쿠르트 폰 슐라이허 총리가 가격 통제를 통한 계획 경제를 제안하자 구스타프의 나치에 대한 회의론은 약해졌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기 전날, 구스타프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히틀러 집권 후, 구스타프는 나치에 매료되었다. 프리츠 티센은 그를 "수퍼 나치"라고 묘사했다.

1933년, 히틀러는 구스타프를 독일 산업 연맹 회장으로 임명했다. 구스타프는 조직에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이사회를 해산하여 단독 의사 결정자가 되었다. 1934년 룀 숙청 직전, 히틀러는 구스타프를 방문했다.[8] 구스타프는 마르틴 보르만이 관리하는 "독일 산업 아돌프 히틀러 기금"을 지원했으며, 보르만은 이를 통해 독일 사업가로부터 수백만 마르크를 징수했다. 히틀러의 비밀 재무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크루프는 직원 수를 3만 5천 명에서 11만 2천 명으로 확장했다.

구스타프는 뮌헨 협정 이후 히틀러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에 놀랐지만, 당시 그는 노망으로 인해 아들 알프리트에게 실질적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주요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심각한 치매로 인해 재판을 받지 못했다.[9] 그는 양차 세계 대전 모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유일한 독일인이 되었다. 그는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블뤼벤바흐 근처의 길가 여관에서 아내의 간호를 받았으며, 이후 화장되어 조용히 매장되었다. 그의 채택된 이름은 당시 미국 점령 구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6. 2. 제1차 세계 대전과 군수 산업 주도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1914년에 암살된 후, 크루프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베르펜에 있는 그의 사냥 별장 블뤼벤바흐 성을 구입했다.

구스타프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회사를 이끌었으며, 연합국의 봉쇄로 인해 해외 시장을 잃은 후 특히 포병 제조에 거의 전념했다. 영국의 비커스는 전쟁 중 로열티 지불을 중단했다(크루프는 포탄 뇌관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1926년에 미지급금이 지불되었다).[9]

1916년, 독일 정부는 벨기에 산업을 압수하고 벨기에 민간인을 루르 지역의 강제 노동에 징집했다. 이것은 현대전에서 새로운 것이었고, 독일이 서명한 헤이그 협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9] 전쟁 동안 프리드리히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르프트는 독일 해군을 위해 84척의 U보트를 생산했으며, 봉쇄에도 불구하고 원자재를 독일에 수송하기 위한 도이칠란드 잠수함 화물선도 생산했다. 1918년 연합군은 구스타프를 전범으로 지명했지만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9]

티거 I 중전차. 헨셸사의 설계지만, 포탑은 크루프사 제작


독일 육군을 위해, 1914년 420mm 곡사포를, 1917년~1918년에는 파리 대포를 제작했다. 종전 후, 보포스 사와 함께 8.8 cm FlaK 18/36/37을 개발했다.

6. 3. 전간기와 경제 위기

1920년, 카프 쿠데타에 대한 반발로 루르 봉기가 발생했다. 루르 적군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에센에 있는 크루프의 공장이 점령되었고 독립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독일 국방군이 베스트팔렌에서 침략하여 빠르게 질서를 회복했다. 그해 말 영국은 크루프 공장의 대부분을 해체하여 생산 능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산업 장비를 전쟁 배상금으로 프랑스로 보냈다.[8]

1923년의 하이퍼인플레이션 동안, 회사는 에센에서 사용할 크루프마르크를 인쇄했는데, 이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통화였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르 지역을 점령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에센에 있는 크루프 공장을 조사하던 프랑스 군인들은 차고에 갇혀 기관총을 발사하여 13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라인란트 전역에서 보복 살인과 파괴 행위를 촉발했으며, 크루프가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공개 장례식을 열었을 때 프랑스에 의해 벌금과 징역형을 받았다. 이것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고, 7개월 후에 프랑스로부터 사면을 받았다.[8]

크루프는 마음속으로는 군주주의자였지만, 바이마르 공화국과 협력했다. 그는 무기 제조업자로서 그의 첫 번째 충성은 권력을 잡고 있는 정부에 있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을 회피하기 위해 국방군과 비밀리에 무기 설계 및 제조에 깊이 관여했다. 1921년 크루프는 전선 회사로 스웨덴의 보포스를 인수하고,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포함한 중립국에 무기를 판매했다. 1922년, 크루프는 조선을 위한 전선 회사로 네덜란드에 수데리우스 AG를 설립하고, 네덜란드, 스페인, 터키, 핀란드, 일본을 포함한 중립국에 잠수함 설계를 판매했다. 독일 총리 요제프 비르트는 크루프가 포병 및 탱크 설계를 비밀리에 계속하도록 주선했으며, 육군 참모총장 한스 폰 젝트 및 해군 참모총장 파울 벤케와 협력했다. 크루프는 이 활동을 5년 동안 연합국 조사관들로부터 숨길 수 있었으며,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정부에 엔지니어를 고용하여 기술을 유지했다.[8]

1924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및 독일이 참여하여 룩셈부르크에 탄광 및 철강 생산량 할당 카르텔인 원료 철강 협회(Rohstahlgemeinschaft)를 설립했다. 그러나 독일은 루르의 생산량을 독점하고 고품질 강철 생산을 계속하기 위해 할당량을 위반하고 벌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크루프는 비디아("Wie Diamant") 코발트-텅스텐 카바이드의 제조를 시작했다. 1928년, 크루프 지도하의 독일 산업은 총파업을 진압하여 25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정부가 임금을 15% 삭감하도록 장려했다. 1929년, 크라이슬러 빌딩은 크루프 강철로 덮였다.[8]

6. 4. 나치 정권과의 협력과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크루프는 1호 전차, 4호 전차, 6호 전차, 7호 전차, 88mm 대공포, 구스타프 열차포 등의 무기를 생산하였다.[8] 크루프 산하의 조선소에서는 유보트 역시 131척 규모로 제조하였다.[8]

1943년에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크루프는 개인 회사로 전환되었고, 구스타프의 장남인 알프리드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Alfried Krupp von Bohlen und Halbach)가 소유주가 되었다.[8]

독일 국방군을 위해 전차, 포, 군용 트럭 등 병기를 제조했다. 연합군점령을 피하기 위해 독일 국내에서 공장을 이전하면서 종전까지 제조를 계속했다. 1호 전차, 4호 전차는 크루프 사의 설계였고, 전시 중에는 크루프-글루손 공장이 4호 전차의 주 생산 공장이었다. 하지만 3호 돌격포의 주 공장이었던 알케트 사가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자, 1943년 말부터는 4호 전차 생산은 니벨룽겐베르케로 인계되었고, 크루프 사는 3호 돌격포의 대체 차량인 4호 돌격포 생산을 담당했다. 또한 세계 최대의 열차포인 80cm 열차포의 개발·제조도 담당했다.

1936년부터의 중독 협력 3개년 계획에서는 지멘스 등과 함께 중국(중화민국)에 병기 공장을 건설하여 중국 국민당에 무기를 판매했다.

6. 5. 강제 노동과 전쟁 범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구스타프는 크루프 사를 이끌면서 포병 제조에 집중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봉쇄로 인해 해외 시장을 잃게 되었다. 1916년, 독일 정부는 벨기에 산업을 압수하고 벨기에 민간인들을 루르 지역으로 강제 징집하여 노동에 투입했다. 이는 당시 독일이 서명했던 헤이그 협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8] 전쟁 기간 동안 프리드리히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르프트는 독일 해군을 위해 84척의 U보트를 생산하였다. 1918년에 연합군은 구스타프를 전쟁범죄자로 지명했지만,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 구스타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주요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심각한 치매 증세로 인해 재판을 받지 못했다.[9] 이로써 그는 양차 세계 대전에서 모두 전범으로 기소된 유일한 독일인이 되었다.

7. 알프리트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시대 (20세기 중후반)

알프리트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는 베르타 크루프의 장남으로, 1931년 SS에 가입하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등 나치즘을 지지했다.[10] 아버지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의 건강이 악화되자 1941년부터 회사를 실질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1943년 히틀러의 렉스 크루프 법령에 따라 크루프 가문의 단독 소유주가 되었다.[1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크루프는 점령 국가의 산업 시설을 인수하고, 강제 노동을 통해 전쟁 물자를 생산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인종 정책에 따라 슬라브족과 유대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처우를 받았으며, "노동을 통한 절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0]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의 패배를 예감한 알프리트는 비밀리에 국채를 청산하여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알프리트는 뉘른베르크 계속재판의 일환인 크루프 재판에서 전쟁범죄 혐의로 징역 12년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14] 그러나 냉전 심화와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반공주의가 중요해지면서 1951년에 사면받고 재산도 돌려받았다.[11]

1953년, 알프리트는 미국, 영국, 프랑스 정부와 멜렘 협정을 체결하여 크루프의 광산 및 철강 사업을 매각하기로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매각을 지연시키고 계속해서 로열티를 받았다. 그는 또한 공동 시장의 허가를 받아 경쟁 철강 회사를 인수하는 등 독점적 지위를 강화했다.

1961년 5월 17일 빌라 휘겔을 방문한 토고 대통령 실바누스 올림피오와 함께 있는 알프리트 크루프 폰 보렌 운트 할바흐(오른쪽)


알프리트는 콘라트 아데나워를 비롯한 여러 국가 원수들과의 개인 외교를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구 식민지 국가와 철의 장막 뒤의 국가 등에서 사업을 확장했다. 그 결과, 크루프는 1959년에 유럽에서 네 번째,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경기 침체와 과도한 신용, 세금 면제 혜택 폐지 등으로 인해 크루프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알프리트는 회사를 주식회사와 재단으로 재편성하고, 외아들 아른트 폰 보렌 운트 할바흐에게 상속을 포기하는 대가로 상당한 연금을 제공했다. 1967년 알프리트가 사망한 후, 크루프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었고, 1999년에는 경쟁사였던 티센과 합병하여 티센크루프가 되었다.

7. 1. 회사 경영권 승계와 전쟁 범죄 재판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는 베르타 크루프와 결혼하여 20세기 초반에 회사를 이끌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크루프 사는 1호-4호-6호-7호 전차, 88mm 대공포, 구스타프 열차포 등의 무기를 생산했고, 크루프 산하 조선소에서는 유보트를 131척 건조했다.[10] 1943년에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개인 회사로 전환되었고, 구스타프의 장남인 알프리드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소유주가 되었다.

1945년 에센의 크루프 공장 파괴


독일 패전 후, 뉘른베르크 계속재판크루프 재판에서 알프리드는 전쟁범죄 혐의로 징역 12년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14] 그러나 냉전 심화와 인수자 부재로 1951년에 석방되어 재산을 돌려받고, 1953년 회사 경영에 복귀했다.

전쟁 중 크루프는 점령 국가의 산업 시설을 인수하고, 포로와 민간인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특히 슬라브족과 유대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처우를 받았으며, 유대인은 "노동을 통한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10] 1942-1943년에는 마르크슈타트 강제 노동 수용소 근처에 신관 생산 공장인 베르타베르크를 건설하여 유대인 여성들을 SS로부터 임대해 노예 노동으로 사용했다.

7. 2. 전후 재건과 사업 다각화

194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개인 회사로 전환되었던 크루프는 뉘른베르크 계속재판크루프 재판에서 전쟁범죄 처벌을 받은 알프리드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1951년 석방되어 1953년 회사 경영에 복귀하면서 재건을 시작한다.[10] 알프리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고 전쟁 물자를 생산한 혐의로 징역 12년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냉전 심화와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반공주의가 중요해지면서 석방되고 재산도 돌려받았다.[11]

경영 복귀 후, 알프리트는 회사의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조선, 철도 타이어, 농업 장비 등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중단하고, 보험 임원인 베르톨트 바이트를 영입하여 회사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콘라트 아데나워를 비롯한 여러 국가 원수들과의 개인 외교를 통해 해외 시장 개척에 힘썼다. 그 결과, 크루프는 멕시코, 이집트, 이란, 그리스, 수단, 브라질, 인도 등지에 공장을 건설하며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12]

1960년대 중반까지 크루프는 유럽에서 네 번째,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큰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경기 침체와 과도한 신용, 세금 면제 혜택 폐지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알프리트는 회사를 주식회사와 재단으로 재편성했고, 1968년 크루프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1999년에는 경쟁사였던 티센과 합병하여 티센크루프가 되었다.

7. 3. 경제 위기와 회사의 변혁

프리드리히 크루프(1787~1826)가 1810년 에센에 강철 주물 공장을 세우면서 크루프 가는 철강 기반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의 아들 알프레드 크루프는 철도 차륜이나 식기 제조에 사용되는 강철 롤러의 주요 공급자가 되기 위해 신기술에 집중 투자하였고, 베서머 법 등 독자적인 주강 제조 기술에 투자하고 독일프랑스에서 대량의 광산을 매입하였다. 또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택, 의료, 퇴직금 등을 제공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를 제공하였다.[10]

1840년대 미국의 철강 산업 성장으로 철도 관련 부품 수입이 감소하자, 러시아, 터키, 프로이센에 강철 대포를 판매하는 등 무기 산업 비중을 높였다. 1880년대 후반에는 무기 제조 비중이 전체 생산량의 약 50%에 달했고, 직원 수는 약 20,000명이었다. 1903년에는 정식으로 기업법인을 설립하여 주식합명회사가 되었다.

20세기 초, 베르타 크루프와 결혼한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회사를 이끌었다. 1933년 히틀러 집권 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1호-4호-6호-7호 전차, 88mm 대공포, 구스타프 열차포, 유보트 131척 등을 생산하였다. 1943년 히틀러 지시로 개인 회사로 전환되었고, 구스타프의 장남 알프리드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소유주가 되었다.

독일 패전 후 뉘른베르크 계속재판크루프 재판에서 알프리드는 전쟁범죄로 징역 12년과 지분 75% 매각, 전 재산 몰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냉전 심화와 인수자 부재로 1951년 석방 및 재산을 돌려받고 1953년 회사 경영에 복귀하였다.

1968년 크루프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었고, 1999년 티센과 합병하여 티센크루프가 되면서 독일 기업 규모 5위, 세계 최대급 철강 생산 기업이 되었다.

8. 티센과의 합병과 티센크루프 (1999년-현재)

1999년 크루프는 가장 큰 경쟁 상대였던 티센과 합병하여 티센크루프가 되면서 독일 기업 규모 5위와 함께 세계 최대급의 철강 생산 기업이 되었다.[1]

참조

[1] 백과사전 Krupp, Alfred
[2] 뉴스 Krupp Foundries, Social Work at
[3] 서적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Alemanes en las regiones equinocciales: libro homenaje al bicentenario de la llegada de Alexander von Humboldt a Venezuela, 1799–1999 https://books.google[...] Fondo Editorial Humanidades 1999-01-01
[5] 서적 Hunting Down Social Darwinism: Will This Canard Go Extinct? Lexington Books
[6] 서적 From Cosmology to Ecology: The Monist World-view in Germany from 1770 to 1930 Peter Lang
[7] 문서 Manchester
[8] 서적 The house of Krupp : the steel dynasty that armed the Nazis Cooper Square Press 2001-01-01
[9] 서적 The Holocaust: An Encyclopedia and Document Collection [4 volumes] ABC-CLIO
[10] 서적 Final Report to the Secretary of the Army on Nuernberg War Crimes Trials Under Control Council Law No. 10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1] 문서 Manchester
[12] 서적 Night Fighters: A Development and Combat History https://books.google[...] The History Press 2013-03-31
[13] 웹사이트 胡里山炮台 http://www.xmculture[...] 厦门市文化局 2017-07-03
[14] 웹사이트 クルップとは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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