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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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지키스탄의 역사는 고대 시대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포함한 여러 제국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아케메네스 제국, 헬레니즘 시대, 쿠샨 제국 시대를 거치며 불교가 전파되었고, 사산 왕조, 에프탈, 돌궐의 지배를 받았다. 7세기부터 아랍의 지배를 받으며 이슬람화되었고, 사만 왕조, 카라한 왕조, 호라즘 왕조, 몽골 제국, 티무르 제국 시대를 거쳤다. 16세기부터 튀르크계 왕조와 이란, 부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바스마치 운동이 일어났고, 타지키스탄은 1920년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하여 타지키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후 내전을 겪었으며, 현재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이 장기 집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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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키스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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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역사 개요 | |
기원 | 타지키스탄의 역사는 다양한 제국과 문화의 흥망성쇠를 거치며 형성되었음. 고대에는 아케메네스 제국,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등의 일부였으며, 이후 사산 왕조, 돌궐, 당나라의 지배를 받음. |
이슬람 시대 | 8세기에는 이슬람 제국에 정복되어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사만 왕조를 거쳐 튀르크족의 지배를 받음. |
근세 |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이후 여러 칸국으로 분열됨.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됨. |
소련 시대 | 20세기 초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가 되었으며,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존재함. |
독립 |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언했으나, 곧바로 타지키스탄 내전을 겪음. |
선사 시대 | |
문화 | 안드로노보 문화 (기원전 17세기~기원전 9세기)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적 복합체 (기원전 23세기~기원전 18세기) |
종족 | 스키타이 (사카, 마사게타이족, 다하에) (기원전 18세기~기원전 4세기) 소그디아나 (~기원전 6세기) 박트리아 (기원전 8세기~기원전 6세기) 마르기아나 (~기원전 6세기) |
국가 | 아케메네스 제국 (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제국 (기원전 334년~기원전 146년) 셀레우코스 제국 (기원전 312년~기원전 64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기원전 250년~125년) 인도-스키타이 (기원전 2세기~4세기) 강거 (기원전 3세기~5세기) 대원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250년~224년) |
고대 | |
국가 | 쿠샨 제국 (1세기~3세기) 사산 제국 (224년~652년) 우스투르샤나 (4세기~5세기) 서융 (4세기~5세기) 키다라인 (4세기~5세기) 에프탈 (4세기~6세기) 돌궐 가칸국 (552년~603년) 서돌궐 가칸국 (603년~698년) 투르기스 칸국 (698년~766년) 카를루크 칸국 (766년~940년) |
이슬람화 시대 | |
왕조 | 우마이야 왕조 (661년~750년) 아바스 왕조 (750년~1258년) |
페르시아계 왕조 | |
토후국 | 사파르 토후국 (821년~873년) 타히르 토후국 (821년~873년) 사만 토후국 (861년~1003년) |
튀르크 제국 시대 | |
국가 | 카라한 칸국 (840년~1040년) 가즈나 제국 (963년~1187년) 고르 왕조 (1011년~1215년) 셀주크 제국 (1037년~1194년) 서카라한 칸국 (1040년~1212년) 동카라한 칸국 (1042년~1212년) 서요 (1141년~1212년) 화레즘 제국 (1077년~1231년) |
칸국 시대 | |
국가 | 부하라 칸국 (1500년~1785년) 히바 칸국 (1512년~1920년) 야르칸드 칸국 (1514년~1679년) 코칸트 칸국 (1709년~1876년) 부하라 토후국 (1785년~1920년) 두라니 제국 점령 (1747년~1826년) 쿤두즈 칸국 (1800년~1850년) |
러시아 제국, 소련, 독립 이후 | |
주요 사건 | 바스마치 운동 (1916년~1934년) |
자치 공화국 | 투르키스탄 자치 공화국 (1917년~1918년)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 (1918년~1924년) |
임시 정부 | 페르가나 임시정부 (1919년~1920년) |
공화국 | 부하라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 (1920년~1924년)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9년~1991년) |
내전 | 타지키스탄 내전 (1992년~1997년) |
현재 | 타지키스탄 (1991년~) |
2. 고대 (기원전 600년 – 서기 710년)
타지키스탄은 고대 시대에 북쪽으로 스키토-시베리아 세계와 접해 있었다.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메르브, 호라즘은 오늘날 타지키스탄 타지크인의 조상이 거주했던 고대 중앙아시아의 네 주요 지역이었다. 타지크인은 현재 역사적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에서만 발견된다. 메르브는 투르크멘이, 호라즘은 우즈벡인과 카자흐인이 거주한다. 소그디아나는 제라프샨 강과 카슈카다리아 강 계곡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소그드어 방언을 사용하는 소그디아나의 생존 민족은 야그노비와 슈그난족이다.
타지키스탄은 청동기 시대에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의 일부였으며, 원시 인도-이란어 또는 원시 이란어 문화의 후보지로 여겨진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야(옥수스) 강 사이의 북부 아프가니스탄(현재의 아프간 투르키스탄)과 현재 남부 타지키스탄 일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다양한 시기에 박트리아는 여러 왕국 또는 제국의 중심지였으며, 조로아스터교가 기원한 곳일 가능성이 높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서인 "아베스타"는 고대 박트리아 방언으로 기록되었으며, 조로아스터 역시 박트리아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일부 저자는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 제라프샨 계곡의 영토를 포함한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일부 지역이 마하바라타 서사시에 파라마 캄보자로 언급된 캄보자의 일부를 형성했으며, 그 후 아케메네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2] 언어학적 증거는 고대 문헌 및 비문 증거와 결합하여 캄보자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왔음을 시사한다.[3]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 이후, 헬레니즘 시기, 쿠샨 제국 시기를 거쳐 사산 왕조가 타지키스탄 지역을 통치했다. 사산 왕조는 페로즈 1세 시대에 에프탈에게 영토를 잃었다.[2] 에프탈은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으나, 565년 사산 왕조와 튀르크 군대의 연합에 의해 정복되었다.[2] 이후 타지키스탄은 돌궐과 사산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산 제국 멸망 후 튀르크가 지배권을 유지했다. 이후 당나라에 복속되기도 했으나, 다시 튀르크가 타지키스탄을 장악했다가 710년에 아랍에게 빼앗겼다.[2]
2. 1.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29년)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는 제국의 일부였다. 소그디아인과 박트리아인은 제국의 행정과 군대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2. 2. 헬레니즘 시기 (기원전 329년 – 기원전 90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케메네스 제국을 무너뜨린 후,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메르브는 새로운 침략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마케도니아 군은 소그디아나 통치자 스피타메네스가 이끄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지역 통치자의 딸 록사네와 결혼하여 그 땅을 물려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잠시 점령한 후, 헬레니즘 시대의 셀레우코스 제국과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이 지역을 200년 동안 더 지배했다. 기원전 90년에서 기원전 30년 사이, 월지가 마지막 헬레니즘 국가를 무너뜨렸고, 토하리족과 함께 (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기 30년경 쿠샨 제국을 세웠다.[1]2. 3. 쿠샨 제국 (기원전 30년 – 서기 410년)
쿠샨 제국 시기에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1] 기원전 2세기에는 한나라의 사절단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현지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1] 쿠샨 제국은 로마 제국, 파르티아, 한과 함께 이 지역의 주요 세력이었다.[1] 쿠샨 시대 말기에 제국은 규모가 작아졌고, 파르티아 제국을 대체한 사산 왕조에 맞서야 했다.[1] 카니슈카 왕은 불교를 장려했다.[1]2. 4. 사산 왕조, 에프탈, 돌궐 (224년 – 710년)
사산 왕조는 한때 현재 타지키스탄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지만, 페로즈 1세 시대에 이란계일 가능성이 있는 에프탈에게 영토를 잃었다.[2]에프탈은 483년에서 485년경에 이란을 조공국으로 만들면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페르시아의 샤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 세 번의 전쟁을 벌였다. 첫 번째 전쟁에서 그는 에프탈 군에게 사로잡혔고, 이후 비잔틴 제국 황제가 그를 위해 몸값을 지불한 후에 풀려났다. 두 번째 전쟁에서 페로즈는 다시 사로잡혔고, 에프탈 왕에게 막대한 공물을 지불한 후에 풀려났다. 세 번째 전쟁에서 페로즈는 사망했다. 에프탈은 565년 사산 왕조와 튀르크 군대의 연합에 의해 정복되었다.[2] 이후 현재의 타지키스탄은 돌궐과 사산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산 제국이 멸망하자 튀르크가 타지키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이후 당나라에 빼앗겼지만, 나중에 다시 타지키스탄을 장악했다. 710년에 아랍에게 빼앗겼다.[2]
3. 중세 (710년 – 1506년)
705년 이븐 쿠타이바가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 칼리프는 옥수스강 너머의 땅을 병합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715년에 완료하였다. 이 지역 전체는 칼리프와 이슬람의 통제를 받게 되었지만, 아랍인들은 현지 소그드 왕들과 ''데흐칸''을 통해 통치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통치 (750–1258)는 중앙 아시아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우마이야 왕조 (661–750)는 아랍 부족들의 느슨한 연맹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 아바스 왕조는 사산 왕조 정부 기구를 모방하여 거대한 다민족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후 부족했던 근동과 트란스옥시아나에 통일성을 부여했다.[1]
사만 왕조는 819년부터 1005년까지 호라산(동부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 포함)을 통치했으며 사만 후다에 의해 건국되었다. 사만 왕조는 무슬림의 아랍 정복 이후 페르시아를 통치한 최초의 순수 토착 왕조 중 하나였다.[6] 이스마일 1세(이스마일 사마니로 알려짐)의 통치 기간(892년–907년) 동안 사만 왕조는 호라산에서 확장되었다. 900년 이스마일은 호라산(현재 북서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동부 지역)에서 사파르 왕조를 물리쳤고, 그의 형제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이었다. 그리하여 사만 왕조의 지배는 이 두 지역 모두에서 인정받았다. 부하라(사만 왕조의 수도)와 사마르칸트는 예술, 과학,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요 산업으로는 도자기 제조와 청동 주조가 있었다. 950년 이후 사만 왕조의 권력은 약화되었지만, 976년부터 997년까지 통치한 누 2세 치하에서 잠시 부활했다. 그러나 무슬림 튀르크 민족의 침략이 다가오면서 사만 왕조는 옥수스 강 남쪽의 영토를 잃었고, 그곳은 가즈나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999년 부하라는 카라한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문타시르(1005년 사망)는 왕조를 재건하려 했지만(1000년–1005년), 아랍 베두인 족장에 의해 암살당했다.[6]
사만 왕조가 붕괴된 후, 중앙아시아는 북동쪽에서 온 여러 아시아 침략자들의 격전지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휩쓸었고, 호라즘 제국을 침략하여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1]
티무르는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로, 1336년 4월 8일 사마르칸트 근처 케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몽골의 하위 집단으로, 칭기즈 칸의 아들 차카타이가 그 지역에서 벌인 원정에 참여한 후 트란스옥시아나에 정착한 투르크화된 바를라스 부족의 일원이었다. 티무르는 생애를 산적 두목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다리에 화살을 맞아 ‘티무르-에 랑’(티무르-에 랑|티무르에 랑dr, 다리어) 또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을 얻었다.[1]
3. 1. 아랍 칼리프 시대 (710년 – 867년)
705년 이븐 쿠타이바가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 칼리프는 옥수스강 너머의 땅을 병합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715년에 완료하였다. 이 지역 전체가 칼리프와 이슬람의 통제를 받게 되었지만, 아랍인들은 현지 소그드 왕들과 ''데흐칸''을 통해 통치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통치 (750–1258)는 중앙 아시아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우마이야 왕조 (661–750)는 아랍 부족들의 느슨한 연맹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 아바스 왕조는 사산 왕조 정부 기구를 모방하여 거대한 다민족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후 부족했던 근동과 트란스옥시아나에 통일성을 부여했다.[1]3. 2. 사만 왕조 (819년 – 999년)
사만 왕조는 819년부터 1005년까지 호라산(동부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 포함)을 통치했으며 사만 후다에 의해 건국되었다. 사만 왕조는 무슬림의 아랍 정복 이후 페르시아를 통치한 최초의 순수 토착 왕조 중 하나였다.[6] 사만 후다의 증손자인 이스마일 1세(이스마일 사마니로 알려짐)의 통치 기간(892년–907년) 동안 사만 왕조는 호라산에서 확장되었다. 900년 이스마일은 호라산(현재 북서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동부 지역)에서 사파르 왕조를 물리쳤고, 그의 형제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이었다. 그리하여 사만 왕조의 지배는 이 두 지역 모두에서 인정받았다. 부하라(사만 왕조의 수도)와 사마르칸트는 예술, 과학,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요 산업으로는 도자기 제조와 청동 주조가 있었다. 950년 이후 사만 왕조의 권력은 약화되었지만, 976년부터 997년까지 통치한 누 2세 치하에서 잠시 부활했다. 그러나 무슬림 튀르크 민족의 침략이 다가오면서 사만 왕조는 옥수스 강 남쪽의 영토를 잃었고, 그곳은 가즈나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999년 부하라는 카라한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문타시르(1005년 사망)는 왕조를 재건하려 했지만(1000년–1005년), 아랍 베두인 족장에 의해 암살당했다.[6]3. 3. 카라한 왕조 (999년 – 1211년)와 호라즘 왕조 (1211년 – 1218년)
사만 왕조가 붕괴된 후, 중앙아시아는 북동쪽에서 온 여러 아시아 침략자들의 격전지가 되었다.3. 4. 몽골 제국 지배 (1218년 – 1370년)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휩쓸었고, 호라즘 제국을 침략하여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1]3. 5. 티무르 제국 (1370년 – 1506년)
티무르는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로, 1336년 4월 8일 사마르칸트 근처 케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몽골의 하위 집단으로, 칭기즈 칸의 아들 차카타이가 그 지역에서 벌인 원정에 참여한 후 트란스옥시아나에 정착한 투르크화된 바를라스 부족의 일원이었다. 티무르는 생애를 산적 두목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다리에 화살을 맞아 ‘티무르-에 랑’(티무르-에 랑|티무르에 랑dr, 다리어) 또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을 얻었다.[1] 마지막 헤라트의 티무르 왕조 통치자인 바디 알자만이 1506년 우즈베크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의 군대에 결국 멸망했지만, 페르가나의 티무르 왕조 통치자 자히르 웃딘 바부르는 왕조의 붕괴에서 살아남아 1526년 인도에서 티무르 왕조를 재건했으며, 그들은 무굴로 알려지게 되었다.[1]4. 근세 (1506년 – 1868년)
1506년부터 1868년까지 타지키스탄 지역은 튀르크계 왕조와 이란, 부하라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초, 샤이바니 왕조는 분봉 제도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통치했으며, 사마르칸트가 칸의 중심지였다. 우바이드 알라 칸 시대에는 부하라가 칸의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샤이바니 왕조는 곧 조치의 후손인 자니드 왕조(아슈타르하니 왕조)로 대체되었다.
1740년, 아프샤르 왕조의 나데르 샤가 부하라 칸국을 정복하면서 자니드 칸국은 나데르 샤의 봉신이 되었다.[1] 1747년 나데르 샤 사후, 망기트 부족의 무함마드 라힘 비이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자니드 출신 꼭두각시 칸을 내세워 통치했다.[2] 1785년 샤 무라드가 망기트 왕조의 통치를 공식화하면서 부하라 칸국은 부하라 토후국이 되었다.[2]
4. 1. 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1506년 – 1598년)
샤이바니 왕조는 왕조의 모든 남성 구성원(술탄)들 사이에 분봉으로 나누어 중앙아시아를 통치했으며, 이들은 씨족의 최고 통치자(칸)를 지명했다. 칸의 자리는 처음에는 티무르 왕조의 수도인 사마르칸트였지만, 일부 칸들은 이전의 분봉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했다. 우바이드 알라 칸(재위 1533년~1539년) 치세 하에 부하라가 처음으로 칸의 자리가 되었다.정치적 팽창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는 짧게 끝났다. 압드 알라 칸이 죽은 직후, 샤이바니 왕조는 멸망했고, 조치의 또 다른 후손인 자니드 또는 아스트라한 왕조(아슈타르하니 왕조)로 대체되었다.
4. 2. 이란과 부하라의 지배 (1740년 – 1868년)
아프샤르 왕조의 나데르 샤는 1740년에 부하라 칸국을 정복했다.[1] 자니드 칸국의 아불 파이즈 칸은 나데르 샤의 봉신이 되어 왕위를 유지했다.[1]1747년 나데르 샤가 사망한 후, 망기트 부족의 족장 무함마드 라힘 비이는 다른 부족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부하라 칸국에서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2]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자니드 출신의 꼭두각시 칸의 이름으로 통치했다.[2] 1785년 샤 무라드는 망기트 왕조의 통치를 공식화했으며, 칸국은 부하라 토후국이 되었다.[2]
5. 근대 (1868년 – 1991년)
1868년부터 1991년까지 타지키스탄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은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를 정복했다. 미국 남북 전쟁으로 면화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새로운 면화 공급지 및 상품 시장으로 확보하려 했다. 1868년 사마르칸트와 제라프샨 상류 지역이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부하라 토후국은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10]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바스마치 운동이라는 중앙아시아 전역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의 무슬림 징집에 반대하는 폭력에서 시작되었다.[12] 볼셰비키는 코칸드의 자치 정부를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이는 바스마치 운동의 지지를 확산시켰다.[13][22] 1920년대 중반, 적군의 대규모 작전과 경제 및 이슬람 관행에 대한 양보로 바스마치의 세력은 약화되었다.[14]
1924년, 타지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우즈베키스탄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부하라, 사마르칸트와 같은 주요 타지크 도시는 타지키스탄 SSR에서 제외되었다. 많은 타지크인들은 "우즈벡" 정체성을 강요받고, 타지크 학교는 폐쇄되었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농업 집단화와 면화 생산 확대 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의 저항과 바스마치 운동의 부활을 가져왔다.[16]
소련 시대에 두 차례의 숙청(1927–1934, 1937–1938)으로 타지키스탄 공산당에서 약 10,000명이 추방되었다.[17] 러시아인들이 당직을 장악했고, 타지키스탄 인구에서 러시아인 비율이 증가했다.[18] 보보존 가푸로프는 1946년부터 1956년까지 타지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약 260,000명의 타지크인들이 소련군으로 참전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9][20][21] 전쟁 이후 타지키스탄의 농업과 산업은 확대되었지만,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 생활 수준, 교육, 산업은 뒤쳐져 있었다.[22]
1980년대 타지키스탄은 소련에서 가구 저축률, 1인당 소득, 대학 졸업자 수가 가장 낮았다.[23][24][25]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타지크인들에게 불만을 표출할 기회를 주었고,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타지키스탄은 독립을 선언했다.
5. 1. 러시아 제국의 지배 (1868년 – 1920년)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은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아시아를 정복했다. 1864년부터 1885년까지 러시아는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전체를 점차적으로 장악했는데, 이 지역에는 부하라 토후국과 코칸트 한국이 지배하던 타지키스탄 지역도 포함되었다. 1865년 타슈켄트가 함락되었고, 1867년에는 투르케스탄 총독부가 설치되어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폰 카우프만이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8][9]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산업에 필요한 면화 공급이 중단되면서, 중앙아시아를 면화 공급 및 상품 시장으로 확보하려는 경제적 동기가 이러한 확장의 배경이 되었다. 1870년대 러시아는 이 지역의 경작을 곡물에서 면화로 전환하려 했다.[10]
러시아 제국은 군사력을 앞세워 타지크인 거주 지역을 정복했다. 지자크, 우라-튜베 등에서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고, 1868년에는 사마르칸트의 러시아 주둔군이 샤흐르-에 사브즈 군대와 주민들에게 포위되기도 했다. 부하라 토후국은 세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1868년 6월 18일 에미르 무자파르 알-딘이 러시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사마르칸트와 제라프샨 상류 지역은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러시아 상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에미르는 러시아의 봉신으로서 왕위를 유지하며, 러시아의 도움으로 샤흐르-에 사브즈, 제라프샨 계곡 상류 산악 지역(1870년), 서부 파미르 공국(1895년)을 통제하게 되었다.[10]
19세기 말, 자디드주의자들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이슬람 사회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근대화를 지향했지만, 러시아는 이들을 위협으로 간주했다.[11]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코칸트 한국에서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진압해야 했다. 1916년 7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제 징병 위협으로 인해 후잔드에서 시위대가 러시아 군인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군은 후잔드를 신속히 통제했지만, 타지키스탄 여러 지역에서 충돌이 계속되었다.[10]
5. 2. 바스마치 운동 (1916년 – 1924년)

바스마치 운동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발생한 러시아 제국과 소련 통치에 대한 봉기였다.
이 운동의 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제국이 군 복무를 위해 무슬림을 징집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1916년 징집 반대 폭력에 있었다.[12] 10월 혁명 이후 몇 달 동안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권력을 잡았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투르키스탄 무슬림 정치 운동은 페르가나 계곡의 도시 코칸드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려고 시도했다. 볼셰비키는 1918년 2월 코칸드를 공격하여 최대 25,000명을 학살했다.[13][22] 이 학살은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벌여 페르가나 계곡의 상당 부분과 투르케스탄의 많은 지역을 장악한 바스마치 운동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켰다.
분산된 이 운동의 운명은 1920년대 초반에 걸쳐 변동했지만, 1923년까지 적군의 광범위한 작전으로 바스마치는 많은 패배를 겪었다. 1920년대 중반에 주요 적군 작전과 경제 및 이슬람 관행에 대한 양보 이후 바스마치의 군사적 운명과 대중적 지지는 쇠퇴했다.[14] 소련/러시아 통치에 대한 저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시대의 소련의 집단화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더 작은 규모로 다시 발생했다.[15]
5. 3. 소련 시대 (1920년 – 1991년)
1924년, 타지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우즈베키스탄의 일부로 창설되었다. 1928년 행정 구획 분할 때,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같은 고대 타지크 도시는 타지키스탄 SSR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새로 설립된 우즈베크 SSR 시민으로서, 많은 타지크인들은 "우즈벡" 정체성에 순응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추방 위협을 받으며 여권에 "우즈벡인"으로 서명해야 했다. 타지크 학교는 폐쇄되었고 타지크인들은 민족성 때문에 지도자 자리에 임명되지 않았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농업 집단화와 면화 생산이 급격히 확대되었다.[16] 소련의 집단화 정책은 농민들에게 폭력을 가져왔고, 타지키스탄 전역에서 강제 재정착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일부 농민들은 집단화에 맞서 싸웠고 바스마치 운동을 부활시켰다. 이 시기에 관개 기반 시설 확장과 함께 소규모 산업 개발도 이루어졌다.[16]
모스크바가 지시한 두 차례의 소련 숙청(1927–1934, 1937–1938)으로 거의 10,000명이 타지키스탄 공산당에서 추방되었다.[17] 추방된 사람들을 대신하여 러시아인들이 파견되었고, 러시아인들은 최고 직위인 제1서기를 포함하여 모든 계급에서 당직을 장악했다.[17] 1926년과 1959년 사이에 타지키스탄 인구에서 러시아인 비율은 1% 미만에서 13%로 증가했다.[18] 보보존 가푸로프는 1946년부터 1956년까지 타지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했으며, 소련 시대에 타지키스탄 외부에서 중요한 유일한 타지키스탄 정치인이었다.[22]
1939년에 타지크인들은 소련군에 징집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약 260,000명의 타지크 시민들이 독일, 핀란드, 일본에 맞서 싸웠다. 타지키스탄의 1,530,000명의 시민 중 60,000명(4%)[19]에서 120,000명(8%)[20]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사망했다.[21] 전쟁과 스탈린 시대 이후 타지키스탄의 농업과 산업을 더욱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22] 1957–58년 동안 니키타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척 계획은 타지키스탄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타지키스탄의 생활 환경, 교육 및 산업은 다른 소련 공화국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22]
1980년대에 타지키스탄은 소련에서 가구 저축률이 가장 낮았고,[23] 1인당 소득 상위 2개 그룹에 속하는 가구의 비율이 가장 낮았으며,[24] 인구 1,000명당 대학 졸업자 수도 가장 낮았다.[25]

1985년부터 타지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카하르 마캄모프의 재임 동안 생활 수준이 저하되었다. 마캄모프가 타지크 경제의 시장화를 시도하면서 열악한 생활 환경과 실업이 악화되었다. 소련 붕괴 직전 타지키스탄은 경제 침체와 회복의 어두운 전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개방 정책인 글라스노스트는 불만을 품은 타지크인들에게 불만을 표출할 기회를 제공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었고, 타지키스탄은 독립을 선언했다.
6. 타지키스탄 공화국 (1991년 – 현재)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서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 중 하나였다. 1991년 9월 9일 소련 붕괴 후 타지키스탄은 독립을 선언했다.[29] 이 기간 동안 타지크어 사용이 촉진되었고, 많은 통치 직책을 가졌던 러시아인들은 영향력을 잃었으며, 더 많은 타지크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독립 직후 타지키스탄은 여러 파벌 간의 타지키스탄 내전에 돌입했다. 이 파벌들은 종종 씨족 충성심으로 구분되었다. 러시아인과 유대인 등 비이슬람교도들은 박해, 빈곤 증가, 그리고 서방이나 다른 구소련 공화국에서의 더 나은 경제적 기회로 인해 타지키스탄을 떠났다.
에모말리 라흐몬은 1994년에 권력을 잡았고, 현재까지 통치하고 있다. 내전 기간 동안 인종 청소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타지키스탄은 황폐화되었다. 사망자 수는 10만 명이 넘었고, 약 120만 명이 국내외 난민이 되었다.[29] 1997년 라흐몬과 야당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졌다.
1999년 평화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야당은 불공정하다고 주장했고, 라흐몬은 거의 만장일치로 재선되었다. 러시아군은 2005년 여름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타지키스탄 남부에 주둔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인도, 프랑스 군대도 타지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다.
2020년 10월,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은 엄격하게 통제된 선거에서 90%의 득표율로 재선되어 다음 7년 임기를 시작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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