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흐마스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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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흐마스프 1세는 사파비 제국의 2대 샤로, 1524년부터 1576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이스마일 1세의 아들이자, 1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크즐바쉬 수령들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부하라 칸국과의 전쟁과 오스만 제국과의 잦은 전쟁을 겪으며, 영토를 방어하고 칸다하르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시아파 부흥 정책을 추진하고, 예술 후원을 통해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말년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혼란을 겪었으며, 독살당한 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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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흐마스프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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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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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타흐마스프 1세 |
페르시아어 음역 | Tahmâsb |
전체 이름 | 아불-파스 타흐마스프 () |
출생일 | 1514년 2월 22일 |
출생지 | 이스파한의 샤하바드 |
사망일 | 1576년 5월 25일 |
사망지 | 카즈빈 |
종교 | 12이맘 시아파 이슬람 |
통치 정보 | |
작위 | 이란의 샤 |
통치 기간 | 1524년 5월 23일 ~ 1576년 5월 25일 |
대관식 | 1524년 6월 2일 |
이전 통치자 | 이스마일 1세 |
섭정 | 디브 술탄 룸루 코페크 술탄 추하 술탄 호세인 칸 |
후임 통치자 | 이스마일 2세 |
서명 | Khalili Collection Islamic Art TLS-2714-back.jpg |
서명 종류 | 인장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스마일 1세 |
어머니 | 타즐루 하눔 |
배우자 | 술타눔 베굼 술탄-아가 하눔 |
자녀 | 무함마드 호다반데, 이스마일 2세, 하이다르, 파리 칸 하눔 등 |
관련 정보 | |
왕조 | 사파비 왕조 |
2. 생애
타흐마스프(طهماسب|타흐마스프fa)는 신 페르시아어 이름으로, "용감한 말을 가진"이라는 의미의 고대 이란어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은 이란의 이슬람 시대 왕조들이 서사시 『샤나메』에서 따온 몇 안 되는 이름 중 하나이다.
1514년 3월 3일에 태어나 1524년 아버지 이스마일 1세의 뒤를 이어 10세의 나이로 샤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 초기는 어린 나이와 크즐바시 부족 간의 권력 다툼, 동쪽 우즈베크족의 침입 등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성인이 된 타흐마스프 1세는 1533년 크즐바시의 유력 지도자 후세인 칸 샴루를 처형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크즐바시 세력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는 크즐바시를 견제하기 위해 군사 및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재상을 임명하여 지방 총독으로 파견된 크즐바시를 감시하게 했고, 부족 간 경쟁을 유도하여 특정 세력의 독주를 막았다. 또한 크즐바시 출신 인재를 등용하여 친위대(코르치)를 강화하는 한편, 캅카스 원정 등을 통해 확보한 포로들을 군인(굴람)으로 삼아 샤에게 충성하는 직속 군대를 육성했다. 이는 이후 압바스 1세 시대에 강력한 군사력의 기반이 되었다[17]。
타흐마스프 1세의 긴 치세(52년)는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동쪽의 샤이바니 왕조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는 여러 차례 충돌했으며, 1534년에는 수도 타브리즈를 일시적으로 빼앗기고 바그다드를 포함한 이라크 지역을 상실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흐마스프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초토화 전술과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오스만 군대의 추가 진격을 막아냈다. 결국 1555년 아마시아 조약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일단락 짓고 이후 20여 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피해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내륙의 가즈빈으로 옮겼으며, 1540년부터 155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북서부의 조지아를 원정하여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이들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포로들은 굴람 군대의 병력 충원 및 관료 등용에 활용되어 사파비 왕조의 중앙 집권 강화에 기여했다.
1543년에는 내분으로 왕위를 잃고 망명해 온 무굴 제국의 황제 후마윤을 보호하고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칸다하르를 넘겨받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는 티무르 왕조 시대의 유명 화가 비흐자드를 후원하여 궁정 화풍을 발전시켰고, 그의 감독 아래 호화로운 삽화가 담긴 『샤나메』와 『함사』 등 필사본 제작을 지원하여 페르시아 회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는 점차 정치에서 멀어져 종교 활동에 몰두하고 십이이맘파 신앙을 강요하며 다른 종파를 탄압했다. 또한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아 사후 극심한 혼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1576년 5월 14일 사망하자 아들들 간의 왕위 계승 분쟁이 격화되어 내란으로 번졌고, 이는 1578년 오스만 제국의 재침공을 초래하는 등 사파비 왕조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이 혼란은 그의 손자인 압바스 1세가 등장하여 왕조를 재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고 여러 정책을 추진했으며, 외부의 위협 속에서도 왕조를 장기간 유지했다. 비록 후계 문제 처리 미숙으로 사후 혼란을 초래했지만, 그가 추진했던 중앙 집권화 정책과 굴람 제도 등은 훗날 압바스 1세가 사파비 왕조의 최전성기를 여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19]。
2. 1. 왕자 시절
아부 알 파트 타흐마스프 미르자는 1514년 2월 22일, 이스파한 근처 마을인 샤아바드에서 사파비 제국의 창건자 이스마일 1세와 그의 주요 배우자인 타즐루 하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2][2] 이란의 naqqal|나칼fa('커피하우스' 이야기꾼)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타흐마스프가 태어난 밤에는 바람, 비,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몰아쳤다고 한다. 타즐루 하눔은 진통이 시작되자 왕실 행렬을 멈추고 샤아바드 마을로 향했다. 그 마을의 kadkhoda|카드코다fa(마을 촌장)는 수니파였기에 타즐루 하눔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을의 한 시아파 주민이 그녀를 자신의 소박한 집으로 맞이했다. 타즐루 하눔은 곧 아들을 낳았고, 이 소식을 들은 이스마일 1세는 매우 기뻐하며 점성가들이 길일을 알려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을 만났다. 점성가들은 그의 미래가 전쟁과 평화로 얽히고 많은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스마일 1세는 꿈에서 이맘 알리의 지시에 따라 아들의 이름을 타흐마스프로 지었다.튀르크·몽골식 전통에 따라, 이스마일 1세는 맏아들 타흐마스프 미르자를 호라산의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23][2] 이는 티무르 왕조가 통치자의 장남을 주요 지방인 호라산에 임명했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호라산의 중심지인 헤라트는 16세기 내내 사파비 왕자들이 성장하고 교육받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2] 1516년, 타흐마스프가 두 살 때 호라산 지방은 그의 봉토가 되었다.[2] 1517년, 이스마일 1세는 디야르바크르 총독이었던 아미르 술탄 마우스일루를 타흐마스프의 lala|랄라tr(가정교사)이자 발흐 총독으로 임명했다.[2] 이는 찰디란 전투 당시 기근을 두려워하여 군대에 합류하지 않았던 샴루 부족 출신의 호라산 총독을 교체하고, 강력한 키질바시 부족 중 하나인 샴루 부족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2] 이스마일은 헤라트의 저명한 인물인 아미르 기야스 알딘 모하마드를 타흐마스프의 종교 교사로 임명했다.[2]

그러나 타흐마스프가 8살이 된 1521년, 두 가정교사 사이에 헤라트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아미르 술탄 마우스일루는 타지크인 관료였던 기야스 알딘을 처형했지만,[23][3] 얼마 지나지 않아 우즈베크족이 아무다리야를 건너 헤라트 일부를 점령하면서 실각했다.[3][23] 이스마일 1세는 아미르 술탄과 타흐마스프를 수도 타브리즈로 불러들이고, 후일 디브 술탄 룸루로 알려질 알리 베그 룸루를 타흐마스프의 새로운 lala|랄라tr로 임명했다.[23][2] 헤라트와 호라산의 총독 자리는 타흐마스프의 동생 삼 미르자에게 넘어갔다.[23][2]
헤라트에서 지내는 동안 타흐마스프는 글쓰기와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뛰어난 화가가 되었으며, 그의 동생 바흐람 미르자 사파비에게 헌정한 그림은 음악, 노래, 음주가 특징인 사파비 궁정의 모임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
1524년 봄, 이스마일 1세는 조지아에서 사냥을 마치고 아르다빌을 거쳐 수도로 돌아오던 중 병에 걸렸다. 그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1524년 5월 23일 타브리즈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어린 타흐마스프는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2. 2. 재위 초반
> 나는 몇 년 동안 부족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신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었다.> — 샤 타흐마스프의 회고록[24]
이스마일 1세가 1524년 5월 23일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타흐마스프 미르자는 10살의 나이로 사파비 제국의 두 번째 샤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기 통치는 불안정했으며, 특히 키질바쉬 부족 수장들 간의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처음에는 룸루 부족의 디브 술탄과 우스타즐루 부족의 쾨펙 술탄이 공동 섭정을 맡았으나, 곧 두 세력은 충돌했다. 디브 술탄은 쾨펙 술탄을 몰아내고 우스타즐루 부족을 길란으로 쫓아냈다. 이후 디브 술탄은 타칼루 부족의 주헤흐 술탄(추하 술탄)과 손을 잡고 정국을 운영했다.[25] 그러나 룸루 부족의 독주는 다른 키질바쉬 부족, 특히 우스타즐루와 타칼루 부족의 반발을 샀다.[4] 1526년 봄, 이들 부족 간의 갈등은 이란 북서부에서 시작되어 호라산 지역까지 번지면서 내전으로 확대되었다.[4] 이 과정에서 우스타즐루 파벌은 빠르게 세력을 잃었고, 지도자 쾨펙 술탄은 추하 술탄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내전의 혼란 속에서 동쪽의 우즈베크족이 침입하여 일시적으로 투스와 아스타라바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 혼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디브 술탄 룸루는 1527년 처형되었는데, 이는 어린 타흐마스프가 직접 집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국왕의 요청에 따라 삼두 정치의 유일한 생존자인 추하 술탄은 1527년부터 1530년까지 왕국의 ''사실상'' 통치자가 되었다. 추하는 헤라트를 샴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고, 이는 두 부족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1530년 초, 헤라트 총독 호세인 칸 샴루와 그의 부하들은 추하를 죽이고 왕실 캠프에서 샤의 수행원 내 모든 타칼루족을 처형했다. 이것은 타칼루 부족의 반란을 촉발시켰고, 며칠 후 보복 행위로 그들은 하마단에서 샤의 수행원을 공격했다. 부족 중 한 명이 어린 타흐마스프를 납치하려 했고, 타흐마스프는 그를 처형했다. 그 후 타흐마스프는 타칼루 부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명령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바그다드로 도망쳤는데, 그곳의 총독 역시 타칼루였으며 그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를 죽였다. 결국, 남은 타칼루족은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동시대 연대기에서 추하 술탄의 몰락과 그의 부족 학살은 "타칼루 역병"으로 불린다. 그 후 호세인 칸 샴루는 키질바쉬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추하 술탄의 지위를 차지했다.

키질바쉬 사이에서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우바이드 칸 휘하의 우즈베크족은 국경 지대를 정복했다. 1528년, 우바이드 칸은 아스타라바드와 투스를 재정복하고 헤라트를 포위했다. 14세의 타흐마스프는 군대를 지휘하여 우즈베크족을 격파하고 자므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사파비 왕조가 전투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여러 요인 때문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배운 포병의 사용이었다. 당시 헤라트 총독이자 타흐마스프의 섭정이었던 호세인 칸 샴루는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 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승리는 우즈베크족의 위협과 왕국의 내부 혼란을 줄이지 못했는데, 타흐마스프는 바그다드에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쪽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5] 그 해, 우즈베크족은 헤라트를 점령했지만, 삼 미르자가 타브리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들의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고, 타흐마스프는 1530년 여름 그들을 몰아냈다. 그는 그의 형제 바흐람 미르자를 호라산 총독으로, 가지 칸 타칼루를 바흐람의 교사로 임명했다.[6]
이 시점에서 타흐마스프는 17세가 되었고 더 이상 섭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호세인 칸 샴루는 타흐마스프의 갓 태어난 아들 모하마드 미르자의 관리인으로 임명되면서 이 도전을 회피했다. 호세인 칸은 끊임없이 샤의 권력을 약화시켰고 타흐마스프를 여러 번 분노하게 했다. 그의 권력에 대한 자신감과 호세인 칸이 타흐마스프를 폐위하고 그의 형제 삼 미르자를 왕위에 올리려는 소문이 결국 타흐마스프가 강력한 샴루 아미르를 제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호세인 칸은 축출되어 1533년에 처형되었다. 그의 몰락은 타흐마스프에게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제 그는 각 투르크멘 지도자가 자신의 부족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키질바쉬의 영향력을 줄이고 "펜을 든 사람들" 관료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하여 섭정을 끝냈다.
2. 3. 부하라 칸국과의 전쟁
부하라의 우즈베크족은 이란 동부 국경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사파비 왕조와 샤이바니 왕조는 16세기 초 거의 동시에 권력을 잡았다. 1503년, 이스마일 1세가 이란 고원의 넓은 지역을 점령했을 때, 부하라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 (재위 1500년 ~ 1510년)는 호라즘과 호라산을 정복했다. 이스마일 1세는 1510년 마르브 전투에서 무함마드 샤이바니를 물리치고 살해하여 호라산을 이란 영토로 되찾았으나, 호라즘과 트란스옥시아나의 페르시아계 도시들은 우즈베크족의 지배 하에 남았다. 이후 호라산의 소유권은 사파비 왕조와 샤이바니 왕조 사이의 주요 분쟁 원인이 되었다.이스마일 1세가 1514년 오스만 제국과의 찰디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명성과 권위가 손상되었고[1], 이는 키질바시 부족의 권력 강화를 초래하여 타흐마스프 1세의 통치 초기에 내부적인 불안정을 야기했다. 사파비 궁정의 혼란은 후라산 지역의 방위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부하라 칸국의 군주 우바이드 칸은 1524년부터 1540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후라산을 침공하였다. 이에 맞서 샤 타흐마스프 1세는 우즈베크인들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네 차례의 반격 원정을 이끌어야 했다. 타흐마스프는 1524년 11월, 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찰디란 전투나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화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우즈베크 군대를 격파했다.[26]
이 전투의 승리 결과, 사파비 제국은 후라산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고, 부하라 칸국은 마 와라 알나흐르 지역을 지배하는 것으로 국경선이 사실상 정착되었다.[26]
2. 4.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오스만 제국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타흐마스프 1세가 동쪽에서 우즈베크족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이라크를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일부를 점거했다. 당시 타흐마스프 휘하에는 고작 7,000명의 병사밖에 없었으나, 오스만 군대가 타브리즈를 점령할 능력이 부족했던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26]
오스만 제국은 1532년부터 1555년까지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사파비 제국을 공격했다. 주요 침공은 1534년, 1548년, 1553년에 이루어졌다. 쉴레이만 1세는 타흐마스프의 동생인 삼 미르자 (1533년)와 알카스 미르자 (1548년)를 사파비 왕조의 꼭두각시 군주로 내세워 사파비 제국을 크림 칸국과 같은 봉신국으로 만들려 시도했다.[27] 타흐마스프는 매번 정면 대결을 피하고 영토를 내주는 대신, 초토화 전술과 게릴라전을 사용하여 오스만 군대를 괴롭히는 전략을 사용했다. 수도 타브리즈는 여러 차례 함락되었으나 오스만 군대는 점령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차 침공 (1532–1535)1532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쉴레이만 1세는 필 파샤 휘하의 5만 명의 군대와 함께, 사파비 제국에서 축출된 타칼루 부족의 올라마 베그를 이란으로 보냈다.[26] 오스만 군대는 타브리즈와 쿠르디스탄을 점령하고 길란 주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28] 타흐마스프는 오스만 군대를 몰아냈지만, 동쪽에서 우즈베크족이 다시 침입했다는 소식 때문에 완전히 격퇴하지는 못했다.[26]
1533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은 타흐마스프에게 큰 위기였다. 샴루 부족과 타칼루 부족 일부가 타흐마스프를 암살하고 헤라트 태수였던 동생 삼 미르자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삼 미르자는 쉴레이만 1세에게 사신을 보내 아제르바이잔 동쪽 영토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을 이란의 통치자로 임명해달라고 제안했다.[28] 이 소식은 사파비 조정을 충격에 빠뜨렸으나, 삼 미르자는 쉴레이만 1세가 메소포타미아로 퇴각할 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스만 군대가 물러나자 타흐마스프는 반란 세력을 제압하고 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했다.[28]
1534년 7월, 쉴레이만 1세는 대재상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를 보내 타브리즈를 점령하게 했고, 두 달 뒤 직접 합류했다.[27] 그는 바그다드와 나자프 같은 시아파 성지들을 큰 저항 없이 점령했다.[28] 타흐마스프는 쉴레이만 1세가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 틈을 타 점령된 영토 일부를 되찾고 오스만 군대의 후위를 공격했다. 결국 쉴레이만 1세는 바그다드를 제외한 점령지를 대부분 잃고 1535년 말 이스탄불로 후퇴해야 했다.[27] 이후 타흐마스프는 호라산으로 가서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삼 미르자를 격파했다. 삼 미르자는 항복했고, 타흐마스프는 그를 가즈빈으로 추방하는 대신 그의 측근들을 처형했다.[27]
2차 침공 (1548–1549)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는 타흐마스프의 또 다른 동생인 알카스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다시 악화되었다. 알카스 미르자는 1534-35년 오스만 침공 당시 사파비 군대를 이끌었으며, 시르반의 총독이었다.[27] 그는 타흐마스프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타흐마스프는 1547년 봄 데르벤트를 정복하고 아들 이스마일 2세를 총독으로 임명했다.[27] 알카스 미르자는 남은 병력과 함께 크림 반도를 거쳐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쉴레이만 1세에게 의탁했다. 그는 이란에 수니파 이슬람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술탄에게 다시 한번 사파비 침공을 촉구했다.[27][27]
1548년 7월 시작된 새로운 침공은 타브리즈를 빠르게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알카스 미르자가 주장했던 키질바쉬 지도자들의 지지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스만 군대는 하마단, 곰, 카샨 등을 약탈하며 진격했으나 이스파한 앞에서 멈췄다.[26] 타흐마스프는 이번에도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타브리즈에서 국경까지의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다. 보급에 어려움을 겪은 오스만 군대는 점령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했다.[27] 결국 알카스 미르자는 사파비 군대에 체포되어 요새에 갇혔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쉴레이만 1세는 1549년 가을까지 남은 군대를 철수시키며 원정을 마무리했다.[27]
3차 침공 및 아마시아 조약 (1553–1555)

쉴레이만 1세는 1554년 5월, 사파비 제국에 대한 마지막 원정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타흐마스프의 아들 이스마일 미르자가 동부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에르주룸 총독 이스칸다르 파샤를 격파했다. 쉴레이만 1세는 디야르바키르에서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지역으로 진군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27] 타흐마스프는 군대를 네 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내 대응했는데, 이는 이전 전쟁 때보다 사파비 군대의 규모가 훨씬 커졌음을 의미했다. 사파비 군대가 우위를 점하자 쉴레이만 1세는 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27]
결국 양측은 1555년 아마시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쿠르디스탄의 상당 부분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사파비 왕조는 타브리즈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지켜냈다.[27] 타흐마스프는 수니파 이슬람과 초대 칼리프들에 대한 비방을 금지하고, 두 번째 칼리프 우마르의 암살을 기념하는 축제인 오마르 코샨fa 개최를 금지하는 등 종교적인 양보를 했다. 대신 오스만 제국은 이란 순례자들이 메카, 메디나, 카르발라, 나자프 등 시아파 성지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7][27] 이 조약은 이후 20년 이상 양국 간의 평화를 가져왔으며, 사파비 제국은 이 기간 동안 군대와 자원을 재정비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부 지역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27] 아마시아 조약의 조건들은 사파비 측에 비교적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이는 쉴레이만 1세가 사파비 제국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7]
2. 5. 칸다하르 정복

우즈베크와의 전쟁 과정에서 헤라트는 여러 차례 함락되었으나, 타흐마스프 1세는 1537년 원정을 통해 헤라트를 되찾았다. 이 기세를 몰아 칸다하르 역시 티무르 왕조로부터 잠시 점령했다. 당시 칸다하르는 이란 고원과 인도 사이의 무역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543년, 무굴 제국의 황제 후마윤이 권력을 잃고 타흐마스프 1세의 궁정으로 망명해왔다. 타흐마스프는 후마윤에게 시아파로 개종할 것을 강요한 뒤,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 지원의 대가로 후마윤은 칸다하르를 탈환한 후 이를 사파비 제국에 넘겨주었다. 이후 칸다하르는 무굴 제국과 사파비 제국 사이에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1558년 타흐마스프 1세는 최종적으로 칸다하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29]
2. 6. 재위 후반

타흐마스프 1세는 재위 후반 동쪽 국경에서는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으나,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후일 압바스 1세 시대 개혁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캅카스 지역에 대한 여러 차례의 성공적인 원정(1540년~1554년 사이 4차례)을 통해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등을 포로로 잡아 군사 노예(굴람)로 삼았다.[17] 이들은 압바스 1세 시대에 강력한 군사 노예 군단을 형성하여 사파비 제국의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관료로도 등용되어 중앙 집권 강화에 기여했다. 한편, 타흐마스프는 오스만 제국의 지속적인 위협을 피하고 호라산과 아제르바이잔 지역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남동쪽의 카즈빈으로 옮겼다.[29] 이 천도는 사파비 왕조가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타흐마스프 치세의 중요한 외교적 사건 중 하나는 1543년 무굴 제국 황제 후마윤의 망명이었다. 형제들의 반란으로 왕위를 잃은 후마윤은 헤라트를 거쳐 1544년 솔타니예에서 타흐마스프를 만났다.[18][8] 타흐마스프는 후마윤을 귀빈으로 대접했으나, 시아파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후마윤은 이를 받아들였고(나중에 인도로 돌아가 수니파로 복귀했다), 타흐마스프는 군대를 지원하는 대가로 칸다하르를 자신의 어린 아들 모라드 미르자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8] 후마윤은 1545년 사파비 군대의 도움으로 영토 회복에 나섰고 약속대로 칸다하르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모라드 미르자가 곧 사망하면서 칸다하르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두 제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파비 측은 영구 할양을 주장한 반면, 무굴 측은 일시적인 영지 하사였다고 주장했다. 결국 타흐마스프는 후마윤 사후인 1558년 칸다하르를 무력으로 다시 점령했다.[8]
1559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들 셰흐자데 바예지드가 타흐마스프에게 망명해왔다. 바예지드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재개를 부추겼으나, 타흐마스프는 1555년 체결된 아마시야 조약을 존중하여 이를 거절했다. 오히려 바예지드가 쿠데타를 꾸민다고 의심하여 그를 체포하고 오스만 측에 넘겨주었으며, 바예지드와 그의 아들들은 처형되었다.[18] 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타흐마스프의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보여준다.
타흐마스프는 예술 후원에도 힘썼다. 티무르 왕조 시절 활동했던 유명 화가 비흐자드를 등용하여 궁정 화풍을 발전시켰고, 그의 감독 아래 258점의 삽화가 포함된 『샤나메』와 14점의 삽화가 담긴 『함사』 등 정교한 채색 필사본 제작을 지원하여 페르시아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8]
그러나 재위 말년의 타흐마스프는 점차 정치에서 멀어져 카즈빈의 궁궐에 머물며 개인적인 부 축적과 종교 활동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십이이맘파 신앙에 깊이 빠져 다른 종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으며, 1568년부터 1573년 사이에 발생한 여러 차례의 폭동 진압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하렘에 거주하던 차녀 파리 한 하눔을 비롯한 여성들과 조지아 출신 측근들의 정치 개입이 늘어나면서 궁정 내 권력 투쟁의 씨앗이 뿌려졌다.[18] 무엇보다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였다. 크즐바시 부족 지도자들, 굴람 세력, 그리고 왕족들은 각자 지지하는 왕자를 내세워 타흐마스프 사후의 권력을 노리고 있었다.
1574년 타흐마스프가 병에 걸리자 후계 구도를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결국 1576년 5월 14일, 타흐마스프는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독살설과 목욕 중 입은 화상설 등이 전해진다.[18][30] 그의 오랜 치세(52년)에도 불구하고 후계 문제에 대한 대비 부족은 즉각적인 혼란으로 이어졌다. 우스타즐루 부족이 지지하던 셋째 아들 하이다르 미르자는 파리 한 하눔의 계략에 빠져 제거되었고, 결국 둘째 아들 이스마일 2세가 샤로 즉위했다.[30][18] 그러나 이는 잠시뿐이었고, 이스마일 2세의 짧은 통치와 급사,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허수아비 통치, 파리 한 하눔의 몰락, 크즐바시 부족들의 재반란, 그리고 1578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오스만-사파비 전쟁 (1578년~1590년))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내란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혼란은 손자인 압바스 1세가 등장하여 왕조를 재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8][19]
타흐마스프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고 여러 개혁 정책을 시도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장기간 평화를 유지하는 등 긍정적인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후계 문제 처리 미숙으로 인해 사후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여 그의 개혁 노력 대부분이 중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그가 시도했던 중앙 집권화 정책과 굴람 제도 확대 등은 훗날 압바스 1세가 사파비 왕조의 최전성기를 여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19]
3. 종교 정책
타흐마스프 1세의 종교 정책은 사파비 왕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스스로를 "경건한 시아파 신비주의 왕"으로 묘사했으며[10], 그의 종교관은 통치 기간 내내 큰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 역사가 비안카마리아 스카르시아 아모레티는 "페르시아 시아파의 현대적 독창성은 샤 타흐마스프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0]
초기에 키질바시 지도자들은 젊은 타흐마스프에게 아버지 이스마일 1세처럼 자신을 마흐디(구세주)로 여기도록 촉구했으나, 1533년 그는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참회하며 이전의 '불경스러운' 행동들을 금지했다.[10] 그는 아버지가 내세웠던 마흐디 주장을 거부하고, 대신 알리의 신비로운 추종자이자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따르는 군주가 되고자 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즈빈의 궁궐을 찾아온 백성들이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을 허용했으며[10], 꿈을 통해 알리나 자신의 조상인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와 같은 수피 성자들과 소통하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 또한 마흐디의 재림을 굳게 믿어, 가장 아끼던 여동생 샤자다 술타님을 마흐디의 신부로 남겨두기 위해 결혼시키지 않기도 했다.[10] 점성술과 같은 비술에도 깊이 빠져, 베네치아 외교관 빈첸초 데글리 알레산드리는 샤가 점성술 때문에 10년 동안 궁궐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10] 타흐마스프는 궁정 시인들에게 자신 대신 알리를 찬양하는 시를 쓰도록 권했으며[10],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에게 보석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쿠란 사본을 여러 차례 선물로 보냈다.[10]
타흐마스프는 내·외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아파 부흥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1540년대부터는 직접 마쉬하드에 있는 시아파 이맘 리자의 영묘를 순례하는 모범을 보였다.[21] 또한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카르발라 전투에서 순교한 것을 애도하는 아슈라 의식을 후원하고, 전국 각지의 시아파 모스크나 영묘를 보수하는 데 힘썼다.[21] 시아파를 체계화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여, 1533년에는 아버지 이스마일 1세가 총애했던 시아파 신학자 알리 카라키 알아밀리를 등용했다.[21] 알 카라키는 타흐마스프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사파비 제국의 종교 정책 전반을 총괄하며, 다른 신학자들과 함께 12이맘 시아파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21] 타흐마스프는 12이맘 시아파를 왕권의 새로운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울라마(이슬람 학자)에게 종교 및 법률 문제에 대한 권위를 부여했으며, 알 카라키를 '숨겨진 이맘'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10] 이는 물라(성직자), 사이이드(무함마드의 후손) 등 성직자 계층에게 새로운 정치적 힘과 궁정 내 영향력을 안겨주었다.[10] 특히 사이이드 계층은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로서 상당한 권력을 누렸고, 1530년대와 1540년대에는 타브리즈의 사파비 궁정을 사실상 지배했다는 기록도 있다.[10] 페르시아 학자들은 사파비 왕조가 사이이드 혈통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타흐마스프를 '후세이니드'(후세인의 후손)라고 칭했다.[10] 그는 가즈빈을 시아파 신앙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후세인 사원(8대 이맘 알리 알리다의 아들)을 확장하는 등 대규모 도시 정비 사업을 벌였다.[10]
한편, 아버지 이스마일 1세 시대부터 시작된 순니파 탄압 정책도 계속되었다.[31] 이스마일 1세가 타브리즈를 점령했을 때 주민들에게 시아파 개종을 강요하고 알리 이전의 초기 정통 칼리파 3명을 저주하라고 명령했던 것처럼, 타흐마스프는 이들 칼리프를 저주하는 의식인 타바라를 공식화하여 모든 모스크와 광장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했다.[31] 또한 과거 순니파의 주요 인물 90명의 명단을 만들어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순니파 지도자들이나 수피 교단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여 고문이나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31]
타흐마스프는 자신의 조상들이 이끌었던 아르다빌의 수피 교단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방문객들을 장려하고 사마(수피 영적 의식)를 거행하기 위해 자나트 사라이 사원을 건설했다.[10] 또한 수피 의식을 장려하여, 이드 알피트르(라마단 종료 축제) 기간에는 수피들과 물라들이 궁정에 모여 지크르(신을 염원하는 명상)를 수행하고 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이는 백성들이 부족이나 지역 공동체를 넘어 사파비 왕조 전체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였다.[10]
이란 내에서 시아파로의 개종을 장려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다른 종교 집단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특히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오랫동안 인정하고 후원했다.[11] 1543년, 무굴 제국에서 내분으로 망명해 온 후마윤에게는 군사적 지원과 칸다하르 영유를 약속하는 대가로 시아파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후마윤은 결국 개종하지 않았다.[18]
통치 후반기에 타흐마스프는 가즈빈의 왕궁에 머물며 종교 문제에 더욱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정통 십이이맘파 신앙에 대한 경도가 심화되면서 이단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도 했다.[19]
4. 경제 정책
사파비 제국은 타흐마스프 1세 시대뿐만 아니라 16세기 내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주요 원인은 부하라 칸국에 의해 후라산 지방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이라크 지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두 지역은 제국에서 생산력이 높은 땅이었다. 이러한 재정난은 화폐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스마일 1세 시대에 9.22g이었던 샤히 은화의 무게는 타흐마스프의 지속적인 가치 절하 정책으로 인해 압바스 1세 즉위 시에는 2.3g까지 떨어졌다.[32]
타흐마스프 1세 통치 기간 동안 샤히 은화의 무게는 다음과 같이 크게 감소했다.
시기 | 지역 | 샤히 은화 무게 |
---|---|---|
통치 초기 | 전 지역 | 7.88g |
통치 말기 | 서부 지역 | 2.39g |
동부 지역 | 2.92g |
이러한 무게 감소, 즉 화폐 가치 하락은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의 침략,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무역 금지 조치 때문이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금지 조치는 무역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곧 샤의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베네치아인 미셸 멤브레에 따르면, 오스만 술탄의 허가 없이는 어떤 상인도 오스만 국경을 통해 이란으로 여행할 수 없었으며, 허가 없는 여행자는 모두 억류되었다.
한편, 타흐마스프 1세의 동전은 주조된 지역에 따라 다른 종류가 사용되기도 했다. 시르반에서는 akçe|악체ota가 사용되었고, 마잔다란에서는 tanka|탄카fa가 주조되었으며, 쿠제스탄에서는 Larin|라린fa 통화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157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지역별 자율 통화는 대부분 통일되었다.
동전의 언어에도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아랍어 외에 페르시아어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fals|팔스ar ('folus-i shahi') 동전에는 "영원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리라 / 왕실의 폴루스의 [비율]을 바꾸는 자"라는 구절이 페르시아어로 새겨졌다. 또한, 오래된 구리 동전은 새로운 가치를 나타내는 countermark|카운터마크영어('folus-i shahi', 'adl-e shahi' 등)를 찍어 다시 발행되기도 했다.
5. 문화
타흐마스프 1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직접 그림을 그리는 데도 능숙했다. 두 살 때 당시 이슬람 세계 세밀화의 중심지였던 헤라트로 보내져 궁정에서 유명 화가 비흐자드에게 세밀화를 배웠다.[33] 또한 서예에도 재능을 보여, 두 분야의 장인들을 적극 후원했다.
샤가 된 이후 타흐마스프는 예술, 특히 세밀화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업적 중 하나는 아버지 이스마일 1세 시대에 시작되어 1530년대 중반에서 1540년경 완성된 《샤나메》의 새로운 판본 제작이다. 총 258장의 삽화가 포함된 이 책은 사파비 제국 시대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평가받는다.[34] 그는 카말 웃 딘 베흐자드와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장려하고, 금박이나 청금석과 같은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왕실 화실을 운영했다. 이 화실에서는 장인, 수습공, 도제들이 함께 작업했으며, 니자미의 유명한 작품인 《함사》의 삽화 제작도 이루어졌다.[12] 타흐마스프는 카즈빈의 체헬 소툰 궁전 발코니 그림 작업에도 직접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리크-에 알람-아라-예 아바시》와 같은 역사서는 타흐마스프의 통치 시기를 사파비 왕조 서예 및 회화 예술의 절정기로 기록하고 있다.
타흐마스프 시대는 이스마일 1세 시대와 더불어 아제르바이잔어와 그 문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바그다드 출신의 유명한 시인 푸줄리는 아제르바이잔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아제르바이잔어 시문학의 기초를 다졌다.[35] 사파비 제국의 신하였던 무함마드 아마니와 사데키 베그 아프샤르 같은 시인들도 푸줄리의 영향을 받아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35] 타흐마스프 자신도 회고록에서 페르시아 시와 튀르크 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카즈빈으로 옮긴 이후, 타흐마스프는 역사 기록 편찬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이전까지 사파비 왕조의 역사는 주로 외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나, 타흐마스프의 후원 아래 왕실 내부에서 본격적인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타흐마스프는 사파비 군주 중 유일하게 자신의 회고록인 《타즈케라-예 샤 타흐마스브》를 남겼다. 또한 왕실 재무부의 서기였던 아브디 베그 시라지에게 세계사 《탁멜라트 알-아크바르》의 저술을 맡겼는데, 이 책은 특히 이스마일 1세와 타흐마스프의 통치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딸 파리 칸 하눔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또한 아볼-파스 호세이니에게 사파비 가문의 시조인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와 초기 수피 신앙에 관한 문헌인 《사파아트 아스-사파》를 재작성하도록 하여, 사파비 가문이 무함마드의 후손(세예드)임을 강조하려 했다. 이 시기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을 이란 역사 속 사파비 시대를 기록하는 '사파비 역사가'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수도 이전 및 사파비 왕조의 정주화 경향과 관련이 깊다. 찰스 멜빌과 숄레 퀸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타흐마스프 시대를 "사파비 역사 기록의 진정한 번영기"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통치 말년인 1555년경, 타흐마스프는 세밀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왕실 화실을 해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무굴 제국 등 다른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종교적 신념, 특히 꾸란에 대한 헌신이 깊어지면서 그는 시와 시인들을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 술에 취하는 등 비종교적인 행태를 보이는 시인들을 경건하지 못하다고 여겨 궁정 출입을 금하고 후원을 중단했다. 가잘(연애시)을 주로 쓴 바흐시 바프키나 모흐타샴 카샤니와 같은 시인들이 배척당했다. 반면 나지리 니샤푸리, 오르피 시라지 등 이란을 떠나 무굴 제국으로 이주한 시인들은 은유와 신비주의적 주제를 특징으로 하는 인도풍 시 (سبک هندی|사브케 힌디fa)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러한 말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타흐마스프 1세의 통치 시기는 사파비 왕조의 문화 예술이 크게 융성했던 시대로 평가받는다. 많은 현대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예술 후원을 높이 평가하며,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사파비 후원자'로 칭하기도 한다. 그의 문화 정책은 이란의 예술과 문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평가
타흐마스프 1세의 치세는 아버지 이스마일 1세 사후 키질바시 지도자들 간의 내전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메시아적 성격을 갖지 못했고, 즉위 당시 어린 나이였기에 전장에서 용맹함을 증명하기도 어려웠다.[1] 그러나 그는 우즈베크족과의 잠 전투에서 승리하며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고[14], 압도적인 오스만 제국 군대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며 후방을 교란하는 파비안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제국을 방어했다.[14][17]
타흐마스프는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독실한 시아파 신앙을 강조하는 공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여 키질바시 부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15] 그는 코카서스 출신 포로들을 굴람이라는 군사 노예로 편입시켜 군사 및 행정 시스템 개혁을 시도했으며, 이는 훗날 아바스 1세 시대 사파비 정권 개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17] 또한 무굴 제국의 후마윤을 보호하고 지원하며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8] 그의 치세 동안 사파비 왕조의 통치 정당성이 확립되고 시아파 백성들에게 점차 수용되었는데, 이는 무함마드의 후손(Ahl al-Bayt)이 다스린다는 이념이 정복의 권리보다 더 강력한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가들은 종종 타흐마스프를 아버지 이스마일 1세와 비교하며 "구두쇠"나 "종교적 광신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탐욕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17], 종교적인 이유로 막대한 세금을 포기하는 등 모순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예술을 후원하여 『샤 나메』와 『함사』 같은 걸작 제작을 지원하는 등 문화 후원에 힘쓴 군주였다.[18] 술레이만 1세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통치하던 시대에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시킨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통치 후반에는 가즈빈의 왕궁에 머물며 축재와 종교 정책에 몰두했고, 정통 십이 이맘파 신앙에 치우쳐 이단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다.[18] 특히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은 점은 그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극심한 혼란과 내전을 야기했다. 이는 키질바시 세력의 재발호와 함께 사파비 왕조를 위기로 몰아넣었고, 손자인 아바스 1세가 등장하여 혼란을 수습하기 전까지 제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18][19] 타흐마스프가 시도했던 중앙 집권화 정책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중단되었으나, 그가 닦아놓은 기반은 아바스 1세 시대에 사파비 왕조가 최성기를 맞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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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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