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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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스바겐 비틀은 1938년부터 2003년까지 생산된 소형 승용차로,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설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용으로 생산되었으며, 종전 후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2,100만 대 이상 생산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중 하나가 되었다. 비틀은 공랭식 엔진과 후륜구동 방식을 특징으로 하며, 1967년 미국 시장 진출을 계기로 '비틀'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쟁 차종의 등장으로 판매가 감소하여, 1978년 독일 생산을 중단하고 2003년 멕시코 공장에서 최종 생산을 종료했다. 이후 뉴 비틀과 더 비틀 등 후속 모델이 출시되었으나, 2019년에 단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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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비틀 - [자동차]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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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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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폭스바겐 1200/1300/1302/1303/1500/1600 Käfer (케퍼) Carocha (카로차) Coccinelle (코시넬) Fusca (푸스카) Vocho (보초) Buba (부바) Garbus (가르부스) |
제작사 | 폭스바겐 |
설계자 | 페르디난트 포르셰 |
차급 | 소형차 |
차체 스타일 | 2도어 세단 2도어 컨버터블 |
생산 기간 | 1938년–2003년 |
생산 대수 | 21,529,464대 생산 |
후속 차종 | 폭스바겐 골프 Mk1 폭스바겐 골 (G1) 폭스바겐 뉴 비틀 |
구동 방식 | 후방 엔진, 후륜 구동 |
엔진 | |
가솔린 | 1100 cc H4 1200 cc H4 1300 cc H4 1500 cc H4 1600 cc H4 (플렉스 연료) |
변속기 | |
차체 크기 | |
축거 | 2400–2420 mm |
전장 | 4079–4140 mm |
전폭 | 1539–1585 mm |
전고 | 1500 mm |
차량 중량 | 730–930 kg |
유사 차종 | |
생산 | |
생산지 | 니더작센 주 볼프스부르크(1938년~1978년) 푸에블라주 푸에블라(1964년~2019년) |
생산 기간 | 1938년~2019년 |
2. 역사
초대 비틀은 1938년부터 2003년까지 생산된 폭스바겐의 상징적인 모델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국민차 생산 의뢰를 받아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설계했으며[85], 이로 인해 폭스바겐과 포르쉐 가문 및 회사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비틀의 플랫폼은 전후 포르쉐 356 스포츠카 개발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원래 모델명은 폭스바겐 타입 1이었으나, 1967년 미국 시장 진출 시 마케팅 목적으로 '비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특징적인 수평대향식 공랭 엔진을 차량 뒤쪽에 배치하고 후륜구동(RR-Layout) 방식을 채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민간용 생산이 중단되고 군용 차량 생산에 주력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공장이 파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종전 후 영국군 장교 아이번 허스트의 노력으로 공장이 복구되었고, 1945년 말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재개되었다. 이후 전 오펠 간부 출신 하인리히 노르트호프의 경영 아래 비틀은 서독 경제 부흥의 상징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총 2,152만 9,464대가 생산되어, 포드 모델 T의 기록을 넘어 단일 모델로는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사륜 자동차 기록을 세웠다.
1978년 독일 본토에서의 생산은 중단되었으나 유럽 판매는 1985년까지 이어졌고, 멕시코 푸에블라 공장에서는 2003년 7월 30일까지 생산이 계속되었다.
폭스바겐 타입 1은 65년 동안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주요 생산 지역은 다음과 같다.
국가 | 도시 | 비고 |
---|---|---|
독일 | 엠덴 | |
독일 | 하노버 | |
독일 | 잉골슈타트 | |
독일 | 오스나브뤼크 | |
독일 | 볼프스부르크 | [58] |
호주 | 멜버른 | |
벨기에 | 브뤼셀 | |
브라질 | 상베르나르두두캄푸 | [59] |
핀란드 | 헤이놀라 | [60] |
인도네시아 | 자카르타 | |
아일랜드 | 더블린 | [61] |
말레이시아 | 샤알람 | [62] |
멕시코 | 푸에블라 | |
뉴질랜드 | 오클랜드 | |
나이지리아 | 라고스 | |
필리핀 | 마닐라 |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우이텐하헤 | |
태국 | 방콕 | [63] |
베네수엘라 | 카라카스 | |
유고슬라비아 | 사라예보 |
1998년에는 타입 1의 디자인을 계승한 뉴 비틀이, 2011년에는 후속 모델인 더 비틀이 출시되었으나, 2019년 생산이 종료되면서[73][74] 타입 1부터 이어진 약 80년의 비틀 역사는 막을 내렸다.
2. 1. 개발 배경: 히틀러와 포르셰
폭스바겐 타입 1, 즉 비틀의 개발은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자동차 쇼에서 아우토반 건설과 함께 '국민차'(독: Volkswagen) 구상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자동차는 매우 비싼 물건이었기에, "국민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차"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히틀러가 이끌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히틀러는 이 국민차 설계를 당대 최고의 자동차 기술자 중 한 명인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에게 맡겼다. 포르셰는 다임러-벤츠에서 일하다가 1931년 슈투트가르트에 자신의 설계 사무소를 열어 자동차 설계를 해왔으며, 나치의 지원을 받던 아우토 우니온의 경주차 설계에도 참여한 바 있다. 포르셰는 이전부터 우수한 소형 대중차 개발을 꿈꿔왔지만, 1932년 췬다프, 1933년 NSU 등 여러 회사와의 협력 시도는 예산 부족이나 회사의 소극적인 태도 등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따라서 히틀러의 국민차 개발 제안은 포르셰에게는 자신의 오랜 숙원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였다.
자동차광이었던 히틀러는 포르셰에게 국민차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이고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 튼튼하고 유지비가 적게 들며, 오랫동안 큰 수리가 필요 없을 것.
-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 즉 성인 4명이 탈 수 있을 것.
-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계속 달릴 수 있을 것.[75]
- 연료 7L로 100km를 주행할 수 있을 것 (리터당 14.3km 이상).
- 공랭식 엔진을 사용할 것.[76] 히틀러는 냉각수를 관리할 차고가 없는 시골 의사들을 위해 공랭식을 고집했다고 설명했다.
- 유선형 디자인을 채택할 것.[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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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건들은 포르셰가 원래 구상했던 대중차의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했지만, 가장 큰 난관은 히틀러가 제시한 판매 가격 1,000 라이히스마르크 이하라는 조건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대량 생산되던 소형차인 오펠 P4조차 가격이 1,450 마르크였고, 성능(최고 속도 90km/h 미만)이나 디자인 면에서도 히틀러의 요구 수준에 크게 못 미쳤다. 1,000 마르크 이하로 요구 성능을 만족하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당시 기술과 생산 여건으로는 매우 어려운 목표였다.
1934년 6월, 독일 자동차 산업 연맹(RDA)은 포르셰 설계 사무소와 정식 개발 계약을 맺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포르셰는 제한된 예산 속에서도 과거 소형차 개발 경험을 살려 설계를 진행했다. 그의 팀에는 차체 전문가 에르빈 코멘다, 엔진 설계 담당 요제프 칼레스, 수석 엔지니어 카를 라베 등이 참여했으며, 폭스바겐 로고는 프란츠 자버 라임스피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10월, 첫 프로토타입인 V1(세단)과 V2(컨버터블)가 완성되었고, 1936년에는 V3 프로토타입 3대가 제작되어 히틀러의 검사를 받는 등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V3 프로토타입은 다양한 지형에서 50000km 이상 주행 테스트를 거쳤다. 1937년에는 다임러-벤츠가 제작한 30대의 W30 개발 모델이 총 290만km 이상 주행하는 혹독한 테스트를 받았다. 이 차량들은 모두 특징적인 둥근 차체와 공랭식, 후방 장착 엔진을 가지고 있었다. 1938년에는 뒷유리가 두 개로 나뉜 VW38 생산 전 모델 44대가, 1939년에는 VW39 모델 50대가 제작되었다.

국민차 프로젝트는 나치의 노동자 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이 주관하게 되었다. KdF의 지도자 로베르트 라이는 1938년 모든 독일인이 10년 안에 폭스바겐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높은 유류세 때문에 자동차 소유 비용이 비쌌고, 휘발유는 군사용으로 우선 배급되었다. 그럼에도 나치 정권은 대량 생산 자동차를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자동차가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닌, 평범한 독일인도 가질 수 있는 꿈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특히 히틀러는 이 차가 군용으로 쉽게 개조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7]
그러나 1938년 5월 폴러스레벤(현 볼프스부르크)에 폭스바겐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공장은 완공되지 못했고, 'KdF-Wagen'이라 불린 이 차는 전쟁 전에 대량 생산되지 못했다. 전쟁 중 공장은 군용 차량과 무기 생산에 동원되었고, 민간용 자동차 생산은 평화 시기까지 미뤄졌다. 1941년부터 소수의 차량이 군인이나 나치 간부들에게 지급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부품은 군용 차량 생산에 쓰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산된 KdF-Wagen은 210대에 불과했다. 결국 히틀러의 야심 찬 국민차 계획은 전쟁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고, 공장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비운을 겪었다.
2. 2. 개발 과정과 나치 정권
뛰어난 자동차 설계자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1920년대부터 고성능 소형 대중차 개발을 구상해왔다. 이 계획은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의 대중 정책과 결합되면서 현실화되었다.[85] 히틀러는 1933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아우토반 건설과 함께 '국민차'(Volkswagen) 구상을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고가품이었던 자동차를 모든 국민이 소유하게 하겠다는 나치당의 대중 선전 및 지지 확보 전략의 일환이었다.
히틀러는 다임러-벤츠 출신으로 1931년부터 자신의 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며 아우토 우니온 레이싱 카 설계에도 참여했던 포르쉐에게 국민차 설계를 의뢰했다. 포르쉐는 이전에도 췬다프(1932년), NSU(1933년) 등과 협력하여 리어 엔진 방식의 소형차 개발을 시도했으나 예산 부족, 경기 불황 등으로 번번이 좌절되었기에, 히틀러의 제안은 그의 오랜 염원을 이룰 기회였다.
자동차 애호가였던 히틀러는 포르쉐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이고 엄격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7]
- 튼튼하고 유지비가 저렴하며, 큰 수리가 필요 없을 것.
-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또는 성인 4명) 탑승 가능.
- 최소 100 km/h의 속도로 지속 주행 가능.[75]
- 연료 7L로 100km 이상 주행 가능 (리터당 약 14.3km 이상의 연비).
- 공랭식 엔진 채택 (히틀러는 냉각수 관리가 어려운 시골 의사들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76]
- 유선형 디자인 적용.[77]
- 모든 부품은 빠르고 저렴하게 교체 가능하도록 설계.
- 판매 가격은 '''1,000 라이히스마르크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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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마르크라는 가격 목표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저렴했던 P4 (정가 1,450 마르크, 최고 속도 90 km/h 미만)와 비교해도 매우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독일 자동차 산업 연합(RDA)은 1934년 6월 22일 포르쉐 사무소와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포르쉐는 에르빈 코멘다(차체), 요제프 칼레스(엔진), 카를 라베(수석 엔지니어), 프란츠 자버 라임스피스(폭스바겐 배지 디자인) 등 팀과 함께 개발을 진행했다.
개발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계획보다 지연되었으나 히틀러의 비호 아래 계속되었다.
- 1935년 10월: 첫 프로토타입 Type 60, V1(세단)과 V2(컨버터블) 완성.
- 1936년: V3 프로토타입 3대 제작 완료, 히틀러 및 나치 관계자 검토. 50000km 이상의 주행 테스트 실시.
- 1937년: 다임러-벤츠에서 제작한 W30 개발 모델 30대가 나치 친위대(SS) 대원들에 의해 총 290만 km(180만 마일) 이상의 혹독한 주행 테스트를 거침.
- 1938년: 분할된 뒷유리가 특징인 VW38 생산 전 차량 44대 제작.
- 1939년 7월: 프레스 금형으로 차체 패널을 제작한 최종 프로토타입 격인 VW39 차량 약 14~50대 완성. (소스 간 수치 상이)
포르쉐는 저렴한 대량 생산 노하우를 얻기 위해 두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포드 자동차 등의 공장을 시찰했다. 당시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했던 헨리 포드는 히틀러 정권에 공감하며 포르쉐에게 협조적이었으나, 폭스바겐의 진보적인 설계(리어 엔진, 공랭식 등)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78]

1938년 5월, 브라운슈바이크 인근에서 공장 기공식이 열렸고,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프로토타입 V303을 보고 차명을 'KdF-Wagen'(크라프트 두르히 프로이데 바겐, '기쁨을 통한 힘'의 차)으로 명명했다.[79] 공장 주변에 건설될 도시 이름도 'KdF-Stadt'(크데에프 슈타트, 현재의 볼프스부르크)로 정해졌다. 차량 생산 및 보급은 나치 산하 조직인 KdF가 담당하게 되었다. KdF는 모든 독일인이 10년 안에 폭스바겐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했으며, 국민들이 매주 쿠폰을 구매하여 저축하면 차량을 인도받는 방식의 판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39년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민간용 KdF-Wagen의 대량 생산 계획은 중단되었다. KdF 공장은 완공되지 못한 상태에서 군용 차량 생산 기지로 전환되어, 큐벨바겐(Kübelwagen)과 슈빔바겐(Schwimmwagen)을 주로 생산했다. 전쟁 중 약 210대의 KdF-Wagen 세단이 생산되었으나, 대부분 군 간부나 나치 요인들에게 지급되었다. 이 공장에서는 전쟁 포로와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종전 무렵에는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으로 인해 KdF 쿠폰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종전 후 쿠폰 구매자 일부는 폭스바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1960년대 초반, 원고에게 타입 1 차량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폭스바겐은 전후 이 강제 노동 문제에 대해 역사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1998년부터 전쟁 보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 디자인 영향 및 논란 ===
폭스바겐 비틀의 디자인은 주로 페르디난트 포르셰의 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설계자들의 영향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 벨라 바레니: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엔지니어로, 1925년에 이미 비틀과 유사한 후방 공랭식 박서 엔진, 둥근 차체 디자인 컨셉을 구상했다.[10] 1953년 법원 판결을 통해 그의 기여가 인정되었으며, 포르쉐 역사 기록 보관소 책임자도 바레니가 비틀 저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확인했다.[11]
- 파울 야라이: 공기역학 전문가로, 그의 유선형 차체 연구가 비틀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12][13][14]
- 요제프 간츠: 독일 엔지니어로, 중앙 튜브 프레임, 독립식 서스펜션, 후방 엔진 등의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그가 설계한 Standard Superior 차량은 비틀과 유사한 특징을 가졌다. 히틀러가 1933년 모터쇼에서 간츠의 차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15][16][17]
- 한스 레드윙카: 오스트리아 출신 디자이너로, 체코슬로바키아 타트라사에서 근무하며 비틀과 유사한 Tatra V570(1931년 프로토타입) 및 Tatra 97(1936년)을 설계했다. 히틀러는 타트라 차량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포르쉐 역시 레드윙카와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인정했다.[18] 타트라는 전쟁 발발 직전 폭스바겐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중단되었다.[19] 이 문제는 전후에 다시 제기되어 1965년 폭스바겐이 타트라 측에 1백만 독일 마르크를 지불하며 합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괴된 공장은 영국 점령군 장교 아이번 허스트의 노력으로 복구되어 1945년 말까지 1,785대의 차량을 생산, 점령군과 우편 서비스 등에 납품하며 폭스바겐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9]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군용 생산
1938년 5월, 브라운슈바이크 부근에서 폭스바겐 제조 공장 기공식이 거행되었고,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포르셰는 프로토타입 V303을 공개했다.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생산형 차명을 'KdF-Wagende'(환희력행단의 차)이라고 명명했다.[79][20] 공장이 들어설 계획 도시 역시 'KdF 시'(독일어: Stadt des KdF-Wagensde)로 이름 붙여졌다(현재의 볼프스부르크). KdF-Wagen은 나치 조직인 'Kraft durch Freude'(힘을 통한 기쁨)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노동자들에게 "매주 5마르크를 저축해서 차를 구입하라"고 촉구하는 계획이 세워졌다.[21][22]그러나 1939년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양산 직전 단계에 있던 국민차 보급 구상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KdF-Wagen 구매를 위해 저축 쿠폰을 구입했던 33만 명 이상의 독일 국민들은[23] 결국 차를 받지 못했고, 전쟁과 나치 정권 붕괴로 인해 쿠폰은 무가치한 종잇조각이 되었다. 이 문제는 전후 폭스바겐을 상대로 소송으로 이어졌으며, 1960년대 초반 원고에게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타입 1을 판매하는 것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전시 체제 하에서 폭스바겐 공장은 군수품 생산 기지로 전환되어, 주로 군용 차량인 퀴벨바겐(Type 82)과 슈빔바겐(Type 166)을 생산했다.[85] 이 차량들은 비틀(Type 1)의 설계를 기반으로 했으며 나치 독일의 국방군에서 널리 사용되었다.[24] 또한 소수의 KdF-Wagen 세단 모델도 군용으로 납품되었다.
코만도어바겐(Type 87)이라는 파생형 모델도 수백 대 생산되었는데, 이는 비틀의 차체를 사륜구동 퀴벨바겐 섀시에 얹고 포탈 액슬, 슈빔바겐 구동계, 넓은 펜더, 전지형 타이어 등을 장착한 차량이었다. 코만도어바겐의 생산은 1944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공장이 크게 파괴되면서 중단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가솔린 부족으로 인해 나무 가스 발생기를 이용해 목재로 연료를 공급하는 'Holzbrennerde'(나무 연소기) 비틀도 소수 제작되었다.

한편, 전쟁 발발 직전인 1939년 9월에는 KdF-Wagen의 생산 시작을 홍보하고 독일의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과시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자동차 경주가 계획되었다.[25] 이 경주를 위해 포르쉐 AG의 엔지니어들은 Type 60 K 10, 공식적으로 포르쉐 64로 알려진 차량을 설계했다. 엔지니어들이 세 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예정된 날짜 전에 전쟁의 발발로 인해 경주에 참가하지 못했다.[25]
전쟁 기간 동안 폭스바겐 공장에서는 전쟁 포로와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동원되어 혹독한 노동에 종사했다. 전후 폭스바겐은 이 전시 중의 강제 노동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사는 역사 담당 부문을 설치하고, 1998년부터 각종 전쟁 보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2. 4. 종전 후 생산과 성공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지만,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폭스바겐(당시 KdF-Wagen) 공장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공장을 관리하게 된 영국군 장교 아이반 허스트(Ivan Hirst)는 공장 상태가 마치 독일 측이 스스로 폭파한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전후 혼란 속에서 자재는 부족했고, 연합국은 모겐소 플랜과 같은 정책을 통해 독일의 중공업을 해체하여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따라 독일 내 여러 공장과 자재가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등 점령국에 의해 수탈당했다. 그러나 폭스바겐 공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설계를 갖추고 있었기에 이러한 수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점령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공장 설비를 노렸던 소련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설계의 오펠 카데트 공장을 선택해 가져갔고(이는 후에 '모스크비치'라는 이름으로 소련에서 생산됨), 영국과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들도 폭스바겐의 독특하고 진보적인 설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 제조사 시찰단이나 포드의 헨리 포드 2세조차 폭스바겐을 검토했지만 "가치 없음"으로 판단하여, 설계나 설비를 가져가기는커녕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폭스바겐 공장은 1949년까지 연합국의 접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아이반 허스트 소령은 독일인 노동자들의 협조적인 태도와 폭스바겐 자동차 자체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여 공장을 복구하고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폭스바겐의 본격적인 양산이 시작될 수 있었고, 1945년 한 해 동안 이미 1,785대의 차량이 생산되었다. '타입 1'이라는 공식 명칭도 영국군 점령 하에 들어간 1945년 이후에 정해졌다. 허스트는 영국군에게 지프를 대체할 내후성 높은 스태프카로 폭스바겐 사용을 제안했고, 1946년에는 1만 대의 타입 1이 생산되어 영국군에 납품되었다.
1947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해외 수출이 이루어졌고, 1949년에는 최대 시장이 될 미국에도 진출했다. 이후 독일계 이민자가 많았던 브라질의 현지 법인 '폭스바겐 두 브라질'(Volkswagen do Brasil)과 멕시코에서도 생산이 시작되었다. 전 오펠 간부였던 하인리히 노르트호프(Heinz Nordhoff)가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면서 폭스바겐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의 뛰어난 경영 수완 아래 폭스바겐은 서독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고, 이는 전후 서독 경제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수출 시장에서는 차량 성능뿐 아니라, 각국에 구축된 촘촘하고 수준 높은 딜러 서비스망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5년에는 누적 생산 100만 대를 돌파했고, 공장 증설을 거듭하며 1964년에는 누적 생산 1,000만 대에 도달했다.
폭스바겐 비틀은 꾸준히 개량되었다. 엔진 배기량은 초기 1.0 L에서 1.1 L, 1954년부터 1.2 L가 되었고, 1960년대에 들어 수출 모델을 중심으로 1.3 L, 1.5 L로의 이행이 진행되어, 후기에는 1.6 L도 등장했다. 전장 시스템도 1968년 이후 기존 6V에서 12V로 강화되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는 세컨드카로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합리성을 중시하는 지식인층 사이에서 당시 디트로이트에서 생산되던 대형차에 대한 반발 심리와 맞물려 '반체제'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폭스바겐의 성공에는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광고 전략도 큰 역할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광고를 담당한 대행사 DDB(Doyle Dane Bernbach)의 대표 윌리엄 번백(William Bernbach)은 독일계 유대인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평가받는다.
일본에서는 1952년부터 자동차 수입 판매 회사인 야나세(Yanase)가 수입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차들은 추운 날 시동을 걸기 어려웠지만, 공랭식 엔진을 사용한 비틀은 추운 날씨에도 쉽게 시동이 걸렸고 잔고장이 적어 '튼튼한 독일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특히 긴급 왕진이 잦은 의사들 사이에서 실용성을 인정받아 '닥터스 카(Doctor's Car)'로 애용되었고, 이 때문에 1950~60년대 일본 일반 대중에게 '의사 선생님 차'로 알려지기도 했다. 비틀은 야나세에게 1960년대 이후 미국차를 대신하는 주력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초대 비틀은 1938년부터 2003년까지, 총 2,152만 9,464대가 생산되었다. 이는, 사륜 승용차의 역사에서 '''단일 모델의 최다 생산 기록'''이며, 수송용 기기 전체에서도 혼다 슈퍼 커브 (2017년 10월 현재 1억 대 이상)에 이은 대수이다. 독일 본국에서 세단의 생산이 종료된 1978년에 주력 생산품으로서의 최전선에서 물러났으며, 배기가스 규제 강화가 진행된 미국 등의 일부 지역에서는 차량 등록 불가[72] 등의 불운도 겪었지만, 현재까지 세계적인 인기는 높다. 멕시코 푸에블라 공장에서 2003년 7월 30일 마지막 차량이 생산 라인을 떠나면서 최종적으로 단종되었다.
1998년에는, 타입 1의 디자인을 모티브로 한 신형차 "뉴 비틀"이, 2011년에는 후속 모델 "더 비틀"이 출시되었지만, 2019년까지 생산을 종료하여[73][74], 타입 1부터 통산 약 80년의 역사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5. 개량과 생산 종료
1960년대 이후, 타입 1의 구식 설계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공간 효율성이 떨어졌고, 리어 엔진과 스윙 액슬 방식의 독립 현가 장치는 고속 주행 시 불안정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공랭식 엔진의 소음도 문제였다. 폭스바겐은 후속 차량 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며 1970년 전후로 경영 악화를 겪었고, 1974년 전륜구동 방식의 후속 차량인 골프를 출시하기 전까지는 기존 비틀을 개량하며 생산을 이어갔다.1968년에는 몇 가지 주요 개량이 이루어졌다. 전장 계통이 기존의 6V에서 당시 일반적이던 12V로 변경되었고, 전면 헤드라이트가 수직으로 세워진 형태로 바뀌었다. 후륜 트레드(바퀴 간 거리)도 넓혀 고속 주행 안정성을 다소 개선했다. 같은 해, 북미 시장을 겨냥한 대대적인 변경도 있었다. 충돌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앞뒤 범퍼가 강화되었고, 테일 라이트 크기도 커졌다. 또한, "VW 오토매틱"이라 불리는 세미 오토매틱 변속기 모델이 추가되었다. 이는 포르쉐의 "스포르트마틱"과 같은 구조로, 완전 자동 변속기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스포르트마틱"이라고도 불린다. VW 오토매틱과 북미 수출형 모델에는 리어 서스펜션에 더블 조인트 방식 드라이브 샤프트가 적용되어 코너링 안정성이 향상되었다.
1970년에는 1971년형 모델로 1302 시리즈가 발표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전륜 서스펜션이 기존의 토션 바 방식에서 스트럿 방식으로 변경된 점이다. 이 설계 변경에는 포르쉐 사가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출시된 포르쉐 924와 유사한 점도 발견된다. 스트럿 서스펜션 채택으로 조종 안정성이 개선되었고, 약간의 적재 공간 확대도 이루어졌다. 리어 서스펜션은 VW 오토매틱 모델 등과 동일한 더블 조인트 방식이 적용되었다. 외관상 큰 변화는 없었지만, 서스펜션은 상당히 현대화되었다.
1973년에는 1303 시리즈로 발전했다. 전면 유리창이 곡면 유리로 바뀌고 테일 라이트가 더욱 커지는 등 외형적인 변화가 있었다. 1303 시리즈는 1975년까지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트럿 서스펜션 모델(1302, 1303)과 별개로, 기존의 토션 바 서스펜션을 사용한 모델도 계속해서 생산되었다.
이러한 개량이 이루어지는 동안, 1972년 2월 17일에는 비틀의 누적 생산 대수가 15,007,034대를 기록하며, 포드 모델 T(1908 - 1927)가 세웠던 단일 차종 최다 생산 기록(15,007,033대)을 넘어섰다.
1974년 골프를 시작으로 전륜구동 차량으로 전환하면서, 본국 독일의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는 1978년을 마지막으로 비틀 제조가 종료되었다. 독일 최종 생산 시기의 500대에, 야나세가 전용 시트와 노벨티 상품을 붙여 글로리 비틀이라는 이름의 한정판 차량을 준비하여, 일본으로 운반되는 도중에 모두 예약 완판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장기 생산에 따른 코스트 다운으로 수요가 높았던 멕시코에서는 생산을 지속, 브라질에서도 일시 생산 중지했던 비틀을 생산 재개한 시기가 있었다. 이들은 현지에서 국민차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타국의 마니아들로부터 "새 차 비틀"로서 병행 수입 루트 등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2003년 7월 30일[72], 멕시코 공장에서 타입 1의 최종 차량이 완성되어, 총 생산 대수 약 2,153만 대를 달성하고 생산 종료되었다. 발표 이후, 기본적인 설계를 바꾸지 않고 2,000만 대 이상을 생산한 사륜 승용차는, 그 외 존재하지 않는다.
1998년에는, 타입 1의 디자인을 모티브로 한 신형차 "뉴 비틀"이, 2011년에는 후속 모델 "더 비틀"이 출시되었지만, 2019년까지 생산을 종료하여[73][74], 타입 1부터 통산 약 80년의 역사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파생 모델
폭스바겐은 타입 1을 보완하기 위해 1960년대와 70년대에 여러 모델을 제품군에 추가했다. 여기에는 폭스바겐 타입 3,[44] 폭스바겐 타입 4,[44] 그리고 NSU 모토렌베르케를 기반으로 한 폭스바겐 K70 세단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 모델들 중 어느 것도 비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비틀을 기반으로 한 파생 모델들도 다수 생산되었다. 오픈 모델을 선호하는 독일 시장의 요구에 맞춰 타입 1을 기반으로 한 2인승 카브리오레(헤브뮐러 제조, 1949년~1953년)와 4인승 카브리오레(카르만 제조, 1949년~1979년)가 생산되었다. 1980년 1월 10일, 오스나브뤼크의 카르만 공장에서 마지막 비틀 카브리오레(330,281번째)가 생산되었으며,[48] 이 모델은 오랫동안 가장 성공적인 컨버터블로 평가받다가 1979년 첫 폭스바겐 골프 카브리올레로 대체되었다.[42]
또한, 비틀의 부품을 활용한 스포츠 쿠페인 폭스바겐 카르만 기아는 이탈리아의 기아(Ghia)가 디자인하고 독일의 카르만이 생산하여 1955년부터 판매되었다. 세련된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으며, 타입 3 기반의 카르만 기아는 1961년에 출시되었다.
비틀의 리어 엔진 섀시는 활용도가 높아 여러 파생 차종의 기반이 되었다. 넓은 화물 공간을 갖춘 혁신적인 원박스 차량인 폭스바겐 타입 2(1950년), 노치백, 패스트백, 왜건 형태를 갖춘 폭스바겐 타입 3(1961년), 다목적 차량인 폭스바겐 타입 181(1969년) 등이 대표적이다.
폭스바겐 외부에서도 비틀의 엔진과 섀시는 저렴하고 신뢰성이 높으며 개조가 용이하다는 장점 때문에 소규모 제조사의 한정 생산 차량이나 개인이 직접 만드는 자동차의 기반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포르쉐 최초의 시판 모델인 포르쉐 356(1948년 발표)으로, 엔진과 서스펜션 대부분이 비틀의 것을 기반으로 했다. 이 외에도 비틀의 섀시나 엔진을 이용하여 차체를 새로 얹은 커스텀카나 다양한 종류의 스페셜 모델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이 제작되었다.
4. 기술적 특징
폭스바겐 비틀(타입 1)은 기술적으로 독특한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차체 뒤쪽에 공랭식 4기통 수평대향 엔진을 배치하고 후륜구동 방식을 채택한 점이다. 이는 RR(Rear engine, Rear drive) 레이아웃으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설계였다.[85] 엔진, 변속기, 실린더 헤드 등에는 경합금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차체는 2도어 형태로, 4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앞쪽 보닛 아래와 뒷좌석 뒤편에 수하물 적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유선형 디자인이 적용되었으며, 초기 모델의 공기 저항 계수(Cd)는 0.48이었다. 차체는 거의 평평한 플랫폼 섀시 위에 18개의 볼트로 고정되는 구조였으며, 중앙에는 구조적 강성을 확보하기 위한 터널이 지나갔다.
서스펜션은 모든 바퀴에 독립 서스펜션 방식을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전후륜 모두 토션 바를 사용했으며, 전륜에는 스태빌라이저 바가 추가되었다. 전륜은 이중 트레일링 암 방식, 후륜은 스윙 액슬 방식이 초기 모델의 기본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는 험로 주행 성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브레이크 시스템은 초기 기계식에서 유압식으로, 이후 일부 모델에는 전륜 디스크 브레이크가 도입되는 등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4. 1. 섀시

1930년대에 설계된 폭스바겐 비틀의 섀시는 강관 백본 프레임과 플로어 팬을 결합한 플랫폼 프레임 구조이다. Y자형으로 갈라지는 섀시 후부에는 변속기와 차동 장치를 통합한 트랜스액슬 및 엔진이 탑재된다. 이는 당시 자동차 설계로는 진보적인 방식이었다. 플로어 시프트 레버와 페달은 로드나 와이어를 통해 운전석에서 후방 구동계와 연결된다.
서스펜션:
- 전후 모두 가로로 배치된 토션 바에 트레일링 암이 연결된 구조이다.
- 전륜: 포르쉐 타입의 상하 2단 트레일링 암
- 후륜: 싱글 트레일링 암으로 지지되는 조인트가 없는 스윙 액슬 방식이다.
이 서스펜션과 차체 크기에 비해 큰 지름의 타이어 덕분에 험로 주행 성능이 우수했다. 반면, 포르쉐 타입 전륜 서스펜션 구조의 한계로 조향각이 제한되어 최소 회전 반경은 동급 차종에 비해 다소 컸다.
토션 바 스프링은 원래 단조된 강철 봉 하나로 제작되지만, 1930년대에는 이를 저렴하게 대량 생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트로엥 트락시옹 아방(1934년 발표) 등이 사용한 단일 봉 형태의 토션 바 대신, 폭스바겐은 전륜에 가늘고 긴 판 스프링 여러 개를 묶어 막대 형태로 만든 '토션 리프'를 사용했다. 이를 튜브 안에 넣어 토션 바와 유사한 비틀림 저항을 갖도록 했다.
초기의 조인트 없는 스윙 액슬 방식은 1960년대 이후 랠프 네이더 등에 의해 조종 안정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69년 모델부터 주로 미국 수출형 모델과 파생형인 1302, 1303 모델 등에는 안정성이 향상된 더블 조인트 스윙 액슬(IRS = Independent Rear Suspensioneng)이 후륜에 적용되었다. 또한, 1302, 1303 파생 모델에서는 전륜 서스펜션도 트렁크 용량을 늘리고 회전 반경을 줄이는 데 유리한 스트럿 서스펜션으로 변경되었다.
브레이크:
연료 탱크:
- 이러한 개선에도 불구하고, 연료 탱크는 계속해서 전면 보닛 아래에 위치했다. 1930년대에는 앞 엔진 차량에서도 보닛 내에 연료 탱크를 두는 경우가 있었지만, 안전성이 중요해진 197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배치가 안전상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4. 2. 엔진

폭스바겐 타입 1의 엔진은 차량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경합금을 많이 사용하여 가볍고 단순하게 설계된 4행정 강제 공랭식 수평대향 4기통 OHV 엔진이다. 개발 당시에는 부동액 관련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겨울철 야외에서도 고장 없이 작동하도록 공랭식을 채택했으며, 이로 인해 각 실린더는 독립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엔진은 차체 뒤쪽에 배치되고 후륜으로 구동하는 RR(리어 엔진, 리어 드라이브) 방식을 전제로 설계되었으며, 보통 4단 기어박스를 포함한 트랜스액슬과 결합되어 탑재된다. 엔진의 원 설계는 포르쉐 사무소의 프란츠 라임슈피스가 담당했다.[85]
개발 초기에는 수평대향 2기통이나 2행정 엔진도 고려되었으나, 배기량 대비 효율성과 고회전 내구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수평대향 4기통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 기본 구조는 매우 완성도가 높아, 비틀 생산 기간 동안 초기 1.0 L에서 최종 1.6 L까지 여러 차례 배기량 확대와 개선이 이루어졌음에도 기본적인 레이아웃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만약 다른 방식이었다면 1.6 L급까지 배기량을 늘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엔진 구조를 살펴보면, 캠 샤프트는 크랭크 샤프트보다 아래에 위치하며, 흡기와 배기 밸브 모두 실린더 아래쪽에 배치된 푸시 로드에 의해 구동된다. 이 때문에 연소실은 흡배기 밸브가 같은 방향으로 나열된 바스타브형 턴 플로우 방식으로, 연소 효율 자체는 뛰어나지 않지만 생산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초기에는 높은 정밀도를 요구하는 설계 때문에 가공 및 조립 과정에서 신뢰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생산이 안정화된 후에는 오히려 이 고정밀 설계가 뛰어난 내구성과 신뢰성을 발휘하는 데 기여했다.
공랭식 엔진이지만 오일 쿨러를 장착하여 오일 냉각을 통해 엔진 전체의 냉각 효율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강제 공랭을 위한 냉각 팬은 크랭크 샤프트 회전 속도의 2배로 구동되어 충분한 냉각 성능을 확보했으며, 각 실린더는 냉각 효율을 높이기 위해 슈라우드(도풍판)로 덮여 있다.
수평대향 강제 공랭 엔진 특유의 독특한 작동 소음을 냈지만, 내구성은 매우 뛰어나서 혹독한 더위나 추위 속에서도 가혹한 사용 조건을 잘 견뎌냈다. 또한, 구름 저항이 적은 큰 직경의 타이어와 최고 단 기어가 오버드라이브 성향인 기어비 설정 덕분에 고속으로 계속 주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내구성과 신뢰성을 우선시한 대가로, 비틀의 엔진은 동시대 동급 차량들에 비해 출력이 낮은 편이었다. 이는 의도적인 설계로, 엔진 회전수를 억제했기 때문이다. 2배속으로 회전하는 냉각 팬이 과도한 회전수에서는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는 제약도 있어 어느 정도 회전수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고출력을 추구하는 엔진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경우 독일 소렉스(Solex) 제 싱글 카뷰레터를 장착한 단순한 사양이 표준이었다.
포르쉐는 정비성에도 신경을 써서, 비틀의 엔진룸은 콤팩트하면서도 정비에 필요한 충분한 공간을 확보했다. 엔진 교환도 비교적 쉬워서, 1970년대 팬 미팅에서는 "엔진 탈착 경쟁"(르망 스타트 방식으로 두 명씩 팀을 이뤄 차에서 엔진을 분리하고 다시 장착하여 시동을 거는 시간을 겨루는 경기, 평균 20분 소요)이 열리기도 했다.
VW 공랭 엔진은 콤팩트한 구조 덕분에 폭스바겐 자체적으로 산업용 엔진으로도 판매되어 발전기나 차량용 냉동기 구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함부르크의 상용차 제조사 템포(Tempo)는 1949년 출시한 전륜구동 상용차 마타도르에 이 엔진을 사용했으나, 1950년 출시된 폭스바겐 타입 2와 직접 경쟁하게 되면서 1952년 엔진 공급이 중단되었다.
저렴하고 가벼우며 튼튼하다는 장점 때문에 오토바이나 경비행기 엔진으로도 활용되었다. 브라질의 오토바이 브랜드 아마조네스(Amazonas)는 1.6 L VW 엔진을 탑재한 모델을 출시하여 당시 세계 최대 배기량 오토바이로 주목받았으나, 차량 자체의 신뢰성 문제와 높은 가격 때문에 후속 모델 없이 단종되었다. VW 엔진을 사용한 포뮬러 카 경주인 Vee(1.2 L 엔진)와 Super Vee(1.6 L 엔진) 시리즈도 있었으며, 이 시리즈를 통해 니키 라우다 같은 선수가 F1 무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연도 | 모델 | 엔진 배기량 | 최고 출력 | 비고 |
---|---|---|---|---|
초기 | 타입 1 | 1.0 L / 1.1 L | ||
1954년 | 타입 1 | 1.2 L | 22kW | Type 122 엔진, 보어 77mm로 증가 |
1961년형 | 타입 1 | 1.2 L | 30kW | 3,900 rpm, 토크 83 Nm (2,000 rpm) |
1965년 | 1300 | 1.3 L | 29.5kW | 스트로크 69mm로 증가 (Type 3 크랭크축) |
1967년 | 1500 | 1.5 L | 32kW | |
1971년 | 1302S (슈퍼 비틀) | 1.6 L | 37kW | 트윈 포트 실린더 헤드 적용 |
최종 | 타입 1 | 1.6 L | 멕시코 생산 모델 등 |
4. 3. 차체 및 편의 장비
비틀은 뒤쪽에 공랭식 4기통 수평대향 엔진을 얹고 후륜구동 방식을 채택한 2도어 차체 구조를 가졌다. 평평한 앞 유리가 특징이며, 4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다. 수하물은 앞쪽 보닛 아래와 뒷좌석 뒤 공간에 보관할 수 있었다. 공기 저항 계수는 0.48이었다.[85] 차체는 거의 평평한 플랫폼 섀시 위에 18개의 볼트로 고정되었으며, 중앙에는 구조적 강성을 위한 터널이 있었다. 앞뒤 서스펜션에는 토션 바와 전방 스태빌라이저 바가 적용되어 모든 바퀴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독립 서스펜션을 구현했다. 앞 차축은 이중 종방향 트레일링 암 방식이었고, 뒤 차축은 스윙 액슬 방식이었다. 엔진, 변속기, 실린더 헤드 등에는 경합금이 사용되었다.






섀시, 보디 유용의 험로 주파를 중시한 커스텀 카의 부류에 들어간다
바하 버그와 마찬가지로 섀시만 유용한 커스텀 카.
차체는 전체가 강철로 이루어진 세미 모노코크 구조이며, "딱정벌레"라는 별명처럼 유선형 디자인이 특징이다. 독일에서 아직 나무 골격 차체가 많던 1930년대에 프레스 강판을 사용한 전강철 차체를 채택한 것은 대량 생산성, 내구성, 안전성 면에서 앞선 선택이었다. 둥근 차체는 공기 저항을 줄일 뿐 아니라 강재를 절약하고 강도를 높여 무게를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차체 형태는 기본적으로 2도어 세단과 컨버터블만 존재했으며, 특수 제작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4도어 모델은 없었다. 그럼에도 택시나 순찰차 등 4도어 모델이 더 적합한 용도로도 종종 사용되었다. 뒷좌석에 타기 쉽도록 앞좌석은 좌우가 분리된 형태였다.
디자인은 포르쉐 356의 초기 디자인도 담당했던 포르쉐 소속 디자이너 에르빈 코멘다가 맡았다. 일부에서 "히틀러가 디자인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다. 비슷한 유선형 차체는 1930년대 유행이었지만, 코멘다의 디자인은 독립된 펜더와 휠베이스 사이의 발판(사이드 스텝)을 남기는 고전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았다.

오랜 생산 기간 동안 창문 모양, 후드, 펜더, 범퍼 등 수많은 부분이 변경되어 연식 구분이 가능하지만, "독립 펜더와 사이드 스텝을 가진 딱정벌레 모양"이라는 기본적인 디자인 특징은 계속 유지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그러나 보닛 아래 공간이나 차 폭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등 실용적인 단점도 있었다. 1930년대 기준의 디자인은 1950년대 중반에는 이미 구식으로 평가받았지만, 큰 변경 없이 생산이 계속되었다.
전강철 차체는 당시 기준으로 기밀성이 높아 "물에 뜨는 차"로도 유명했다. 거의 개조하지 않은 비틀이 이탈리아의 메시나 해협을 건너거나, 폭스바겐의 실험에서 엔진을 켠 채 물에 가라앉혔을 때 9분가량 가라앉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홍수에 휩쓸렸지만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스페어 타이어는 일반 크기의 타이어가 앞쪽 노즈 부분에 비스듬히 수납되었는데, 이 타이어의 공기압을 높게 설정하여 윈도 워셔액 분사 펌프의 동력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타이어 공기압이 주행에 적합한 수준까지 떨어지면 워셔액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밸브가 있어 공기압 관리에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기가 새는 경우가 많아, 나중에 전동 펌프식으로 개조하는 사용자가 많았다.)


편의 장비는 대중차답게 시대에 맞춰 최소한으로 갖춰졌지만, 해마다 개선되었다. 히터는 공랭식 엔진의 냉각풍을 단순히 실내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배기가스의 폐열을 열교환기를 통해 이용해 실내를 데우는 방식이었다. 정상 상태에서는 연료나 배기가스 냄새, 공기 오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되었으며, 1963년 모델부터는 난방 효율을 높이는 개량이 이루어졌다. 추운 지역에서는 별도로 가솔린 연소식 온풍 히터를 앞쪽 노즈 부분에 옵션으로 장착할 수 있었다. 생산 말기에는 엔진룸 공간을 활용한 컴프레서 장착으로 에어컨 탑재도 가능해졌다.
1950년대 이후 카 라디오 등 오디오 장비도 장착되기 시작했다. 독일 내수 사양만 해도 텔레푼켄이나 블라우푼크트 등 여러 제조사의 제품이 사용되었고, 미국이나 일본 수출 사양에서는 각국의 전파법, 방송국 상황, 유지보수 여건에 맞춰 현지 생산 카 라디오가 탑재되는 등 통일되지 않았다.
차체와 섀시 모두 구조가 단순하여 개조의 여지가 컸다. 이를 활용하여 1960년대에는 욕조 모양의 차체를 얹은 듄 버기가 등장하여 캘리포니아의 사막 지대 등에서 레저용 차량으로 인기를 끌었다. 또한, 버기카 레이스인 "바하 레이스"에서도 비틀이 활약했으며, 오프로드 사양으로 개조된 비틀을 "바하 버그"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California Look|캘리포니아 룩영어이라 불리는 스타일의 커스텀 비틀이 미국 서해안을 중심으로 젊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는 드래그 레이스 차량처럼 앞부분 차고를 낮추고 튜닝된 엔진을 얹으면서도 차체는 단순하게 유지하는 스트리트 스타일이다. 현재에도 당시 스타일을 복각한 알루미늄 휠이나 포르쉐 휠을 사용하고, 애프터마켓 부품으로 차체를 꾸미는 등 비틀 개조의 주류 스타일로 많은 애호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5. 디자인 논란
(작성할 내용 없음)
6. 모터스포츠
폭스바겐 비틀은 특유의 내구성과 정비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랠리 경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험난하기로 유명한 사파리 랠리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82] 또한, 비틀의 부품을 기반으로 한 싱글 시터 경주인 포뮬러 V 시리즈가 탄생하여 모터스포츠 저변 확대에 기여했으며, 여러 F1 월드 챔피언을 배출하기도 했다.[83]
6. 1. 랠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부흥 과정에서 랠리 경기가 각지에서 재개되었을 때, 비틀은 소형 배기량이지만 경량이고, 험로에서의 가혹한 사용에도 견디는 뛰어난 내구성과 이를 유지하는 정비성으로 인해 종종 상위 입상하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1953년, 1954년, 1962년, 세 차례나 가혹한 사파리 랠리에서 우승했다.당시에는 1.2L 엔진이었지만, 1970년대에는 1303S 모델에 1.6L 엔진과 포르쉐 914의 5단 기어 박스가 탑재되었다. 이를 통해 1973년 아크로폴리스 랠리에서는 토니 폴이 운전한 1303S가 우승자인 장-피에르 니콜라의 알핀 A110을 추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후에 폴은 "오르막길에서는 힘이 부족함을 절감했지만, 내리막길은 우리 차지였다. 항상 시프트업이 가능한 머신이었다"라고 회고했다[82]。
6. 2. 포뮬러 Vee
포뮬러 V는 1963년에 탄생한 모터스포츠 시리즈이다. 수많은 카테고리가 사라지고 재편되는 모터스포츠 역사 속에서도 50년 이상 개최되어 온 가장 오래된 부류 중 하나로, 초창기부터 지속된 몇 안 되는 카테고리이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경기가 열렸으며, 과거에는 에머슨 피티팔디, 니키 라우다, 요헨 린트와 같은 많은 F1 월드 챔피언을 배출했다.[83] 모터스포츠 초창기에 저변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대중문화
폭스바겐 비틀은 포드 모델 T, 미니, 시트로엥 DS에 이어 세기의 자동차 (COTC) 4위에 선정될 만큼 자동차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 허비 첫 시동을 걸다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자동차 '허비'의 모델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는 1954년 시장에 처음 소개되었고, 1964년부터 현지 생산이 시작되었다.[66][67] 멕시코 현지에서는 비틀을 '보초'(Vocho|보초es)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러나 2003년, 멕시코 시티에서 강도 예방을 위해 4도어 차량만 택시로 허용하는 새로운 규정이 도입되면서 2도어인 비틀의 생산이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68]
197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폭스바겐 세 대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 이른바 '폭스바겐 점'이 유행했다. 이 점은 지역이나 학교, 학년에 따라 "하루에 10대 이상 보면 안 좋다", "검은색 비틀을 보면 무효가 되고, 녹색을 보면 행운이 두 배가 된다" 등 다양한 규칙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는 전후 일본에서 수입차 중 비교적 일찍 보급되어 길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비틀만의 독특한 문화 현상이었다.
또한, 일본의 록 밴드 서프 라이더즈가 빅터 레코드에서 발표한 "노란색 폭스바겐"이라는 곡은 당시 무명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2만 장이라는 이례적인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84]
8. 후속 모델
1998년, 초대 비틀(타입 1)의 디자인을 모티브로 한 신형차 뉴 비틀이 출시되었다.[73][74] 뉴 비틀은 여러 차례 부분 변경(페이스리프트)을 거쳤으며, 골프의 플랫폼을 공유하여 엔진이 앞에 위치하는 전륜구동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2011년에는 뉴 비틀의 후속 모델인 더 비틀이 출시되었다.[73][74] 더 비틀은 뉴 비틀이 여성적인 디자인으로 평가받았던 것과 달리, 남성적인 스타일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2013년에는 지붕을 열 수 있는 컨버터블 모델도 추가되었다.
하지만 뉴 비틀과 더 비틀 모두 판매 부진을 겪었고, 결국 2019년 생산이 종료되었다.[73][74] 이로써 초대 비틀부터 이어진 약 80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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