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현대극
1. 개요
독일의 현대극은 20세기 초 표현주의 연극을 시작으로 신즉물주의, 정치극, 서사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였다. 표현주의 연극은 주관적인 표현을 강조하며 게오르크 뷔히너,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르크 등의 영향을 받았고, 신즉물주의는 객관적 묘사를 중시하며 에르빈 피스카토르의 정치극으로 이어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사극 이론을 통해 연극의 혁신을 시도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주요 작가로는 게오르크 카이저, 에른스트 톨러, 베르톨트 브레히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막스 프리쉬, 페터 바이스 등이 있으며, 막스 라인하르트, 에르빈 피스카토르, 레오폴트 예스너 등 연출가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2. 독일 현대극의 흐름
독일 현대극은 20세기 초부터 격동의 사회 변화 속에서 다양한 사조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에는 기존의 자연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목소리와 주관적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표현주의가 등장하여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오르크 카이저, 에른스트 톨러 등 주요 작가들은 기성 사회에 대한 반항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갈망을 작품에 담아냈다.
1920년대에는 표현주의의 주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신즉물주의와 사회 비판 및 정치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 정치극이 부상했다. 특히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영화, 르포르타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혁신적인 연출로 정치극을 발전시켰으며, 이 시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역시 초기 활동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브레히트는 이후 서사극 이론을 정립하며 독일 현대극에 가장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관객의 감정적 몰입 대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이화 효과( Verfremdungseffekt독일어 )를 통해 사회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도록 유도했다. 나치즘 정권을 피해 망명하는 동안에도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등 그의 대표작들을 완성하며 서사극 이론을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폐허 속에서 독일 연극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전쟁의 상처와 개인 및 사회의 책임을 다룬 작품들이 등장했으며, 특히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 밖에서>는 전후 세대의 절망과 고발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면서 연극계 역시 각기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동독에서는 브레히트가 창단한 베를리너 앙상블을 중심으로 서사극이 발전했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극도 명맥을 이었다. 서독에서는 브레히트의 영향과 함께 프랑스 등지에서 유입된 부조리 연극이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고, 1960년대에는 홀로코스트나 나치즘과 같은 과거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기록극이 등장하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롤프 호흐후트, 페터 바이스 등이 이 흐름을 이끌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는 빈의 연극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탐구하는 프리츠 호흐발더와 같은 작가들이 활동했으며, 페터 한트케는 기존 연극의 관습에 도전하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처럼 독일어권 현대극은 끊임없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연극 형식의 혁신을 추구해왔다.
2.1. 표현주의 연극 (1910년대 ~ 1920년대)
자연주의(自然主義)의 객관적이고 수동적인 예술 방법에 반대하여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영혼의 외침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세상 만물의 본질을 찾으려는 표현주의 운동은 연극 분야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는 기존의 환상을 주는 연극의 틀을 깨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게오르크 뷔흐너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그리고 근대의 반(反)시민적인 작가 프랑크 베데킨트나 카를 슈테른하임 등에게서 표현주의의 선구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젊은 표현주의 작가들이 독일 극장에 등장한 것은 1910년경부터 수십 년에 걸쳐서였다. 인상주의(印象主義)나 상징주의(象徵主義) 운동에서 출발하여 빈의 전통을 강하게 나타내는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나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에서도 헤르만 바르, 오스카 코코슈카, 발 등에 의해 표현주의가 시작되었다.
표현주의 희곡은 극장의 제약을 무시한 자유로운 장면 배열, 절규하는 듯한 독백(모놀로그), 기성 사회에 대한 반항, 인류애적인 종교성, 원시적인 도취 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평화주의와 반전(反戰)주의적 경향에서 나아가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했으며(에른스트 톨러),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종교적인 표현을 얻기도 했다(에른스트 바를라하).
초기 대표작 중에는 기성세대의 부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자(父子) 간의 대립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 라인하르트 조르게의 <거지>, 발터 하젠클레버의 <자식>, 아르놀트 브로넨의 <부친살해> 등이 대표적이다. 반전(反戰) 경향을 나타낸 작품으로는 라인하르트 괴링의 <해전(海戰)>, 프리츠 폰 운루흐의 <일족(一族)>, 프란츠 베르펠의 <트로이의 여인> 등이 있다. 기교적인 작품을 쓴 게오르크 카이저에게서도 표현주의의 영향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주요 표현주의 작가와 작품
| 작가 (생몰년) | 주요 작품 및 특징 |
|---|---|
| 카를 슈테른하임 (1878-1942) | 냉정한 희화적 필치로 소시민 생활 폭로. 연작 <즈로스>, <스노프>, <1913>, <부르주아 시펠>, <금고> 등. 전보적 문체, 지적·풍자적 태도. |
| 게오르크 카이저 (1878-1945) | '사고(思考)의 유희자'. 기교적 드라마. <칼레의 시민>(1916), <아침부터 밤까지>, 2부작 <가스>(기술문명과 인간 대결). 반전극 <병사 타나카>. |
| 라인하르트 조르게 (1892-1916) | <거지>(1910): 부자 대립, 기성사회 부정, 새로운 창조 갈망. 표현주의극 선구.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사. |
| 발터 하젠클레버 (1890-1940) | <아들>(부자 반항), <안티고네>(반전), <인간>(종교). 인간성 회복 갈망과 정치적 자세 결합. 나치 박해로 망명 후 자살. |
|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 화가 겸 극작가. 초기 표현주의극 개척자. <불타는 가시밭>(1911), <살인자, 희망, 여성>: 남녀의 원초적 본질 탐구. |
| 아우구스트 슈트람 (1874-1915) | 간결한 전보문체 창시자. <황야의 신부(新婦)>, <사건>: 언어를 원시적 단어의 절규로 환원.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사. |
| 라인하르트 괴링 (1887-1936) | <해전>: 반전 표현주의극. 포탑 안 수병들의 전투와 죽음을 압축된 대사로 그림. 합창극 <스코트의 남극탐험>. 나치 치하에서 자살. |
| 프리츠 폰 운루흐 (1885-1970) | 프로이센 사관 출신 반전론자. <일족>, <광장>, <결정하기 전에>: 표현주의 희곡. 미국 망명 후 귀환, 괴테상 수상. |
| 에른스트 톨러 (1893-1939) | 혁명운동 참여. <변전(變轉)>(전쟁 체험과 혁명), <군집(群集) 인간>(사회혁명가 비극), <기계파괴자>(기계문명 비판), <힌케만>(전상불구자). 미국 망명 후 자살. |
| 프란츠 베르펠 (1890-1945) |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트로이의 여인>(반전극), <경인(鏡人)>(1920, 분신 다룬 신비극). 초기작은 세계 동포주의 특색. 미국 망명 후 병사. |
| 에른스트 바를라하 (1870-1938) | 표현주의 조각가 겸 극작가. 지상 권력 비판, '인간에 내재하는 신' 탐구. <죽는 날>, <참다운 세데문트족(族)>, <푸른 볼>, <대홍수(大洪水)>: 초험적, 신비적, 우의적 희곡. |
무대와 연출
표현주의 연극은 무대 연출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바우하우스의 조형 미술가들은 다양한 예술을 통합한 전체적인 표현주의 연극 실험을 시도했다. 거장 막스 라인하르트는 표현주의의 도래를 예감하고 자신의 극장에서 이미 1910년대에 <거지>, <아들>, <해전> 등 몇몇 표현주의극을 상연했지만, 기존의 환상적인 극장 틀을 완전히 파괴하는 급진적인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표현주의 운동 초기에는 뮌헨 예술좌(藝術座)의 양식무대(樣式舞臺), 빈에서의 발, 코코시카의 실험, 베를린 슈트름 무대(바덴), 정치적인 트리뷰네(칼하인츠 마르틴)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레오폴트 예스너(Leopold Jessner)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베를린 국립극장 총감독이 되어 자연주의적 장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무대 중앙에 계단을 설치한 '계단 무대(Treppenbühne)'를 도입했는데, 이는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새로운 조명 기술은 표현주의 특유의 서정적인 독백을 스포트라이트로 강조하거나, 극장 공간을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표현하는 데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2.2. 신즉물주의와 정치극 (1920년대)
표현주의 연극의 주관적이고 때로는 허무한 도취에 대한 반작용으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경향이 대두되었다. 이는 보고 형식이나 르포르타주를 연극의 주제로 삼는 특징을 보였다.
1920년대에는 에르빈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가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정치극(Politisches Theater)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그는 사회 비판과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아지프로극(Agitproptheater)을 발전시켰다. 피스카토르는 기계 장치를 활용한 무대 기술, 영화 필름 삽입, 환등기 사용, 르포르타주 형식 도입 등 혁신적인 서사적 기법을 통해 연극의 표현 영역을 확장했다. 이러한 기법들은 관객에게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깃발>, <해소(海嘯)>, <병사 슈베이크의 모험>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피스카토르를 위해 구상했던 '총체극장(Totaltheater)'은 시대를 앞서간 설계였으나 아쉽게도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많은 극작가들은 표현주의와 신즉물주의 양쪽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카를 추크마이어(Carl Zuckmayer), 프리드리히 볼프(Friedrich Wolf) 등은 초기 작품에서 표현주의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1920년대에는 프랑크(Bruno Frank), 브루크너(Ferdinand Bruckner), 브론넨(Arnolt Bronnen), 람펠(Otto Ernst Lampel), 클라우스(Erich Klaus), 외된 폰 호르바트(Ödön von Horváth) 등이 활동했다.
카를 추크마이어는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소박한 자연 묘사와 삶에 대한 긍정을 담은 희곡 <즐거운 포도산>(Der fröhliche Weinberg, 1925)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표현주의에 식상함을 느끼던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 이후 관료주의를 풍자한 <케페니크의 대위>(Der Hauptmann von Köpenick, 1931)를 통해 극작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20년대부터 기존의 연극 문법에 도전하며 서사극(Episches Theater)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작인 <바알>(Baal), <밤의 북>(Trommeln in der Nacht), <도시의 정글>(Im Dickicht der Städte) 등에서는 표현주의의 영향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관객이 극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기보다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이화 효과(Verfremdungseffekt)를 중요한 연극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사나이는 사나이다>(Mann ist Mann)와 일련의 교육극(Lehrstücke)에서 이러한 시도가 나타난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Kurt Weill)과의 협업을 통해 음악과 극의 새로운 결합을 모색했으며, 그 결과물인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1928)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 1930)를 발표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2.3. 서사극 (1920년대 ~ 1950년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서사극(敍事的演劇, Epic theatre) 이론을 통해 연극의 혁신을 추구한 독일의 극작가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 등을 통해 기존 사회 질서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점차 혁명적인 사상에 입각하여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초기 희곡인 <바알>(Baal), <밤의 타악기>(Trommeln in der Nacht), <도시의 정글>(Im Dickicht der Städte) 등에서는 표현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었으나,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면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작품의 중심에 두기 시작했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무대 위의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전통적인 연극 방식에서 벗어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극을 분석하고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연극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낯설게 하기]](이화 효과, Verfremdungseffekt독일어) 기법을 고안하여 서사극 이론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이 기법은 관객이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낯설게 보이도록 하여, 현상의 본질과 사회 구조적 모순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극장을 단순한 감정 이입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를 배우고 인식하는 '인식의 터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은 인간이다>(Mann ist Mann)와 교훈극(Lehrstück) 작품들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브레히트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Kurt Weill)과 협력하여 음악과 극의 새로운 통합을 모색했는데, 이는 감상적인 정서에 기대지 않으면서 극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 협력의 결과물인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1928)와 <마하고니 시의 흥망>(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 1930)은 큰 성공을 거두며 서사극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후 발표된 <도살장의 성 요한나>(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öfe)와 <어머니>(Die Mutter)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나치즘 정권을 피해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 이론을 체계화하고 주요 작품들을 집필했다. 이 시기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 <사천의 선인>(Der gute Mensch von Sezuan),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 <갈릴레이의 생애>(Leben des Galilei) 등 그의 대표작들이 탄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베를린으로 돌아온 브레히트는 아내이자 배우인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여 자신의 연극 이론을 실제 무대에서 구현했다. 이를 통해 서사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증명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동독에서 그의 서사극은 당시 교조적으로 해석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때때로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 이론을 변증법적 연극으로 더욱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1956년 세상을 떠났다.
2.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연극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화 이후 독일 연극계는 폐허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전쟁의 상처와 개인의 책임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등장했는데, 특히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 1921-1947)의 복원병극(復員兵劇) <문 밖에서>(원제: Draußen vor der Tür독일어, 초연 당시 제목 <집 밖>)는 전후 폐허 속 젊은 세대의 절망과 고발을 담아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르헤르트는 이 작품의 초연 전날 요절했다. 또한 군터 바이젠보른(Gunter Weisenborn, 1902-1969)처럼 전쟁 전부터 반나치 저항 운동을 벌였던 작가들은 전후에도 반전(反戰)적 정치 자세를 견지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전통적인 감동 위주의 연극은 점차 힘을 잃어갔는데, 이는 카를 추크마이어가 <차가운 빛> 이후 부진을 겪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 연극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동독에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고 서사극 이론을 발전시키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극도 명맥을 유지했다. (자세한 내용은 #동독의 연극 참고)
서독에서는 브레히트의 영향과 더불어 프랑스 등지에서 수입된 부조리 연극이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볼프강 힐데스하이머(Wolfgang Hildesheimer, 1916-1991)나 귄터 그라스의 초기 작품 등에서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스위스 작가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drich Dürrenmatt, 1921-1990)의 <노부인의 방문>(1956)과 막스 프리슈(Max Frisch, 1911-1991)의 <안도라>는 서독 연극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실제 기록과 자료에 기반한 기록극(記錄演劇)이 등장하며 서독 연극은 다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롤프 호흐후트의 <신의 대리인>(1963), 하이나르 키프하르트의 <오펜하이머 사건>(1964),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1964)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홀로코스트, 나치즘, 핵 문제, 정치적 책임 등 민감한 사회적, 역사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자세한 내용은 #서독의 연극 참고)
연출 분야에서는 에르빈 피스카토르가 말년에 서베를린 민중극장으로 복귀하여 호흐후트, 키프하르트 등 기록극 작가들을 발굴하며 마지막 생애를 장식했다. 한편, 나치 시대에 독일어권의 유일한 자유 극장 역할을 했던 스위스 극장의 공적도 빼놓을 수 없다.
2.4.1. 동독의 연극
1949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망명 중에 쓴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화 효과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통해 극장을 사회적 인식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서사극을 추구했다. 이는 당시 동독에서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실질적으로는 낡고 감정적인 연극 형태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브레히트의 혁신적인 시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 이론을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레히트의 영향 아래 동독에서는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페터 하크스, 에르빈 슈트리트마터, 헬무트 바이에르, 하이네 뮐러 등이 있다. 이들은 브레히트의 연극 기법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페터 하크스는 브레히트 희곡의 중요한 계승자로 평가받으며, 브레히트의 기법을 응용한 역사극 <무우궁(無憂宮)의 풍차집>, <로보지츠의 싸움>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 과정의 모순을 비판하는 현대극 <우려와 힘>, <모리츠, 타소> 등을 발표했으나, 이로 인해 교조적인 문화 관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볼프가 이끌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을 따르는 작가들도 있었다. 헤다 치너, 쿠어트 쿠버, 하랄트 자트코프스키, 쿠어트 푸파이퍼, 하랄트 하우저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주로 직장 작가로서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우대받았다. 프리드리히 볼프는 의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안칼리>, 유대인 문제를 다룬 <맘로크 교수> 등 사회 문제극과 혁명극 <카타로의 수병(水兵)>을 썼다. 전후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극작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브레히트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여촌장 안나>, <토마스 뮌처>, <보말슈> 등을 발표했다.
브레히트 사후, 그의 아내이자 배우인 헬레네 바이겔을 중심으로 베를리너 앙상블이 결성되었다. 이 극단은 감상적인 연극을 거부하고, 극장을 관객에게 실질적인 교훈과 인식을 제공하는 장으로 만들려는 브레히트의 연극 이념을 계승하며 많은 후계자를 양성했다. 브레히트의 오랜 협력자였던 에리히 엥겔이 1965년 세상을 떠난 후에는 만프레트 베크벨트가 기대를 모았다. 베를린의 또 다른 주요 극장인 도이체스 테아터는 볼프강 랑크호프가 오랫동안 감독을 맡았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브레히트에게 배운 벤노 베손이 극장을 혁신했다. 한때 브레히트 이론과 대립하며 교조적인 역할을 했던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은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유지되었으나, 점차 브레히트 이론과 통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오페라 분야에서는 발터 펠젠슈타인이 극 자체에 중점을 둔 새로운 연출로 명성을 얻었다.
2.4.2. 서독의 연극
브레히트는 서독에서도 젊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변화를 추구하고 '오늘의 세계를 연극으로 재현하는' 사회적 자세와 함께 예술적 시도 역시 중요하게 여겨졌다. 전후 수입된 부조리 연극의 영향도 상당했는데, 볼프강 힐데스하이머(Wolfgang Hildesheimer), 귄터 그라스 등이 대표적이다. 낡은 감동 위주의 연극이 관객의 마음을 더 이상 사로잡기 어려워졌다는 점은 카를 추크마이어의 <차가운 빛> 이후 부진에서도 드러난다.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여러 작가들이 등장했으나, 스위스 작가인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이나 프리슈의 <안도라>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은 드물었다.
1963-1964년 롤프 호흐후트의 <신의 대리인>, 하이나르 키프하르트의 <오펜하이머 사건>,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 등이 등장하면서 서독 연극은 다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록극(記錄演劇)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이끌며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 [[귄터 그라스]]: 소설가로도 유명하며, 부조리극적인 소품들을 발표하다가 동서독 분열이라는 현실 문제에 직접적으로 맞선 <천민(賤民)의 폭동연습>(1965)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1953년 동독 폭동 당시 브레히트를 모델로 삼아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탐구했다.
* [[마르틴 발저]]: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 독일 소시민의 본질(<도토리나무와 앙골라 토끼>), 유태인 문제(<검은 스완>), 퇴폐적인 현대 자본가 풍자(<등신대 이상의 크로트씨>) 등 사회 비판적인 희곡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그는 브레히트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 [[롤프 호흐후트]]: <신의 대리인>에서 교황 비오 12세가 유태인 박해에 침묵한 책임을 물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두 번째 작품 <병자들>(1968)에서는 무차별 폭격을 강행한 윈스턴 처칠의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며 '권력과 도덕'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철저한 사실 고증에 기반한 기록극 형식을 사용하면서도, 극적인 부분에서는 고전적인 영웅상을 등장시키는 정통적 기법을 활용했다. 이후 미국의 정치 지향을 비판한 <게릴라>(1970)를 발표하며 정치극 경향을 강화했다.
* [[하이나르 키프하르트]]: 의사 출신으로 동독에서 활동하다 서독으로 이주했다. 다큐멘터리적 소재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능했으며, 특히 미국 비미활동위원회의 조사 기록을 바탕으로 한 <오펜하이머 사건>은 기록극으로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정치 참여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원수(元首)가 피살되는 밤>에서는 허구적 꿈의 세계를 통해 소시민 내면에 잠재된 권력욕의 위험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 볼프강 힐데스하이머([[Wolfgang Hildesheimer]]): <용좌(龍座)>로 데뷔한 후, 부조리극적인 단막극(<야곡>)이나 카프카적 허구를 다룬 작품(<지연>) 등을 발표하며 부조리극 경향을 대표했다.
이러한 작가들의 활동은 현실 참여적인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반면, 프리슈나 뒤렌마트 같은 작가들은 희곡의 직접적인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브레히트를 비판하기도 했고, 페터 바이스는 점차 명확한 사회주의적 정치 성향을 작품에 반영했다. 가장 젊은 세대로는 서독의 슈펠, 랑게 등이 기대된다.
2.5. 오스트리아의 현대극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인 작극술을 계승한 프리츠 호흐발더(de, 1911~)가 메르, 쵸콜 등 이전 세대 작가들의 뒤를 이어 전후 연극계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 호흐발더는 스위스 망명 중 상연된 <성스러운 실험>으로 데뷔했으며, 빈의 연극 전통을 바탕으로 엄격한 극 형식을 지키면서 역사적 소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검찰총장>과 <도나듀>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후 현대판 에브리만 극이라 할 수 있는 <목요일>에서는 형식과 주제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으며, 근작인 <들딸기 따기>에서는 전쟁 책임을 날카롭게 묻는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호흐발더 외에도 전후 오스트리아 연극계에서는 프우바아레크, 츠자네크, 큐넬트, 베티, 라팔트 등 여러 작가들이 활동했다.
한편, 페터 한트케(de)는 기존 연극의 관습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작품 <관객을 욕한다>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비트 세대의 영향을 받은 듯한 신선하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독일 연극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3. 주요 작가와 작품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인 작극술을 계승한 Fritz Hochwalder독일어(1911- )가 전후에 등장했으며, Peter Handke독일어는 도발적인 작품 <관객을 욕한다>로 독일 극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현대극 초기에는 표현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 Carl Sternheim독일어(1878-1942)은 냉정한 시선으로 소시민의 위선적인 삶을 폭로하는 희극 연작(<즈로스>, <스노프>, <1913>, <부르주아 시펠>, <금고>)을 남겼다. 그의 지적이고 풍자적인 스타일은 표현주의와 구분되면서도 연관성을 가진다.
* Reinhard Sorge독일어(1892-1916)의 <거지>(1910)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며 표현주의 연극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사했다.
* Walter Hasenclever독일어(1890-1940)는 <아들>, <안티고네>, <인간> 등 표현주의적 작품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열정적으로 외쳤으며, 정치적인 색채도 가미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했으나 결국 자살했다.
* 화가로도 유명한 Oskar Kokoschka독일어(1886-1980)는 초기 표현주의극의 개척자로, <살인자, 희망, 여성>, <불타는 가시밭> 등에서 인간의 원초적 본질을 탐구했다.
* August Stramm독일어(1874-1915)은 극도로 압축된 전보 문체의 창시자로, <황야의 신부>, <사건> 등에서 언어를 원시적인 절규에 가깝게 환원시켰다. 그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사했다.
* Reinhardt Goering독일어(1887-1936)은 반전(反戰)적인 표현주의극 <해전>에서 포탑 안 수병들이 전투 중 전사하는 과정을 압축된 대사로 그렸다. 나치 치하에서 자살했다.
* 프로이센 사관 출신인 Fritz von Unruh독일어(1885-1970)는 반전론자로 돌아서 <일족>, <광장> 등 표현주의 희곡을 발표했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환하여 괴테상을 받았다.
*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 Franz Werfel독일어(1890-1945)은 반전극 <트로이의 여인>과 표현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경인> 등을 썼다. 초기작에는 세계 동포주의적 이상이 나타난다. 미국 망명 중 병사했다.
* Hans Henny Jahnn독일어(1894-1959)은 <목사 에프라임 마그누스> 등에서 표현주의적인 에로스 문제를 다루었다.
* 알자스 태생의 Yvan Goll독일어(1891-1950)은 초현실주의 및 입체파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그의 작품 <멧자렘, 영원한 시민>은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표현주의 이후에도 다양한 작가들이 활동했다.
* Ferdinand Bruckner독일어(1891-1958)는 당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시대극을 선보였다. <청년의 병>에서는 전후 청년들의 심리를 분석했고, <범죄인>에서는 법의 부정을, <인종>에서는 유대인 문제를 다루며 표현주의 쇠퇴 후 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 표현주의 조각가이기도 한 Ernst Barlach독일어(1870-1938)는 희곡을 통해 세속적 가치에 얽매인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인간 안에 내재한 신'을 탐구했다. <죽는 날>, <푸른 볼>, <대홍수> 등의 작품이 있다.
* 헝가리 출신의 빈 작가 Ödön von Horváth독일어(1901-1939)는 일상 속에서 사회 비판과 풍자를 담아 죄의 문제를 파고드는 <빈 숲의 이야기>, <사랑, 신앙, 희망> 등을 발표했다. 망명길에 사고로 사망했다.
* 배우이기도 했던 Curt Goetz독일어(1888-1960)는 무대 효과가 뛰어난 희극을 직접 쓰고 연기했다. <히오프 프레토리우스 박사> 등이 있다.
* Carl Zuckmayer독일어(1896-1977)는 초기 표현주의적 시도를 벗어나 생명력 넘치는 민중극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라인 지방을 배경으로 한 <즐거운 포도산>, 의적극 <신더 한네스>, 서커스 인정극 <카타리나 쿠니> 등이 있으며, 관료주의를 풍자한 <케페니크의 대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치 시대에 망명했다가 전후 귀국하여 군부와 나치의 대립을 그린 <악마의 장군> 등으로 다시 활동했다.
* 의사 출신인 Friedrich Wolf독일어(1888-1953)는 낙태 문제를 다룬 <시안칼리>와 유대인 문제를 다룬 <맘로크 교수> 등의 사회 문제극과 혁명극 <카타로의 수병>을 썼다. 전후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극작을 이끌었다.
* Günter Weisenborn독일어(1902-1969)은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반나치 저항 운동을 하며 반전극 <U보트 S4> 등을 썼다. 전후 서독에서 <비합법적인 사람들>, 핵실험 반대 합창극 등을 발표하며 반전적,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전쟁의 상처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들이 등장했다.
* Wolfgang Borchert독일어(1921-1947)는 전쟁 중 고초를 겪고 돌아와 '잃어버린 세대'의 고발이라 할 수 있는 복원병극 <집 밖>을 남겼다. 이 작품은 폐허 속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작가는 초연 전날 요절했다.
* Heinar Kipphardt독일어(1922-1982)는 의사 출신으로, 동독에서 활동하다 서독으로 이주했다. 기록극 형식을 활용하여 <오펜하이머 사건>(미국 비미 활동 위원회 청문회 기록 기반) 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 Richard Hey독일어(1926- )는 피난민 문제를 다룬 <티미안과 용의 죽음>으로 데뷔했다.
* Wolfgang Hildesheimer독일어(1916-1991)는 부조리극적인 단막극 <야곡>이나 카프카적 분위기의 <지연> 등을 썼다.
* H. G. Michelsen독일어(1922- )은 오랜 침묵 끝에 <시틴츠>(1964)로 데뷔했으며, 긴밀한 구성과 내면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헬므>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 Tankred Dorst독일어(1925-2017)는 여러 선배 작가들의 양식을 차용하며 다양한 희곡을 썼고, 특히 극중극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커브>, <성벽에서의 대탄핵 연설> 등이 있다.
* Peter Hacks독일어(1928-2003)는 서독에서 데뷔했으나 동독으로 이주하여 브레히트의 기법을 응용한 역사극 <무우궁의 풍차집>, <로보지츠의 싸움> 등으로 성공했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의 모순을 비판하는 현대극 <우려와 힘> 등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브레히트의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 소설가로 유명한 Martin Walser독일어(1927-2023)는 독일 소시민의 본질을 파고드는 <도토리나무와 앙골라 토끼>, 유대인 문제를 다룬 <검은 스완>, 현대 자본가를 희화화한 <등신대 이상의 크로트씨> 등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브레히트의 연극을 비판적으로 계승,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 역시 소설가로 유명한 Günter Grass독일어(1927-2015)는 부조리극적인 소품(<요리사>, <홍수> 등)을 발표했으며, 정치에도 적극 참여했다. 동·서독 분단 문제를 다룬 <천민의 폭동연습>(1965)은 1953년 동독 봉기 당시 브레히트를 모델로 삼아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이다.
* Rolf Hochhuth독일어(1931-2020)는 면밀한 사실 고증에 기반한 기록극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신의 대리인>에서는 교황 비오 12세의 유대인 박해 방조 책임을, <병사들>에서는 무차별 폭격을 강행한 처칠의 책임을 물으며 '권력과 도덕'의 문제를 첨예하게 제기했다.
* Martin Sperr독일어(1944-2002)는 전후 바이에른 시골 마을의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그린 <니다바이에른의 사냥>(1966)으로 주목받으며 데뷔했다.
3.1. 게오르크 카이저 (Georg Kaiser)
Georg Kaiser독일어(1878-1945)는 '사고(思考)의 유희자(遊戱者)'로 불리며, 기교적으로 뛰어난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대표작 중 하나인 `<칼레의 시민>`(1916)에서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며 표현주의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작품 `<아침부터 밤까지>` 역시 형식적인 측면에서 표현주의적 특징을 나타낸다.
카이저는 흥행에 성공한 `<평행>`, `<오페라의 화재>`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으며, 특히 2부작 희곡 `<가스>`에서는 기술문명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며 사회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나치 독일 정권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말년에는 반전(反戰) 메시지를 담은 희곡 `<병사 타나카>`와 고전극을 개작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3.2. 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독일어, 1893~1939)는 표현주의 작가로, 특히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희곡을 많이 남겼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톨러는 감옥에 있는 동안 표현주의적인 반전(反戰) 희곡 '변전(Die Wandlung독일어)'을 썼고, 이 작품은 상연되어 주목받았다. '변전'은 한 청년이 전쟁의 참혹함을 겪으면서 혁명 사상에 눈뜨게 되는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열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의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사회 혁명가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군중 인간(Masse Mensch독일어)', 기계 문명의 비인간성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기계 파괴자(Die Maschinenstürmer독일어)', 전쟁으로 인해 몸을 다친 상이 용사의 이야기를 다룬 '힌케만(Hinkemann독일어)'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사회 문제와 인간 소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힘차게 살고 있다(Hoppla, wir leben!독일어)'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유명 연출가 피스카토르에 의해 공연되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Bertolt Brecht독일어(1898-1956)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제지소장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쟁 체험을 통해 자신의 계급에 등을 돌리고 점차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초기 희곡에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남아 있었는데, 처녀작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 이야기 <밤의 북>, 인간 소외 문제를 다룬 <도시의 정글> 등이 있다. 이 작품들에는 양가적인 도취감이나 익살, 조소의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브레히트는 점차 마르크스주의로 기울면서, 대상에 거리를 두는 태도를 발전시켜 사회적 인식을 추구하는 새로운 서사극(敍事劇)의 주요 기법인 이화 효과(de: Verfremdungseffekt)를 창안했다. <사나이는 사나이다>와 실질적인 교훈을 중시한 교육극(Lehrstück독일어)들은 이러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그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의 협력을 통해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추구하여, <서푼짜리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 시의 흥망>(1930)과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으로는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어머니>가 있다.
나치 집권 후 불우한 망명 생활 동안 그의 연극 이론은 더욱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표작들이 집필되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사천의 선인>, <코카서스의 백묵원>, <갈릴레이의 생애> 등이 이 시기에 쓰여졌다.
1949년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망명 중에 쓴 작품들을 차례로 발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그는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고 실제 연극 활동을 통해 자신의 연극이 지닌 혁신적 의미를 무대 위에서 증명했다. 극장을 인식의 장으로 만들려는 그의 서사극은 당시 동독에서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실제로는 낡고 감정적인 연극에 기반한) 신봉자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을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던 중 세상을 떠났다.
서독에서도 브레히트는 젊은 작가들에게 큰 지표이자 자극이 되었으며, 사회 변혁을 지향하고 '오늘날의 세계를 연극으로 재현하려는' 사회적 자세와 예술적 시도 모두 중요하게 평가받았다.
3.4.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Friedrich Dürrenmatt)
Friedrich Dürrenmatt독일어(1921년 ~ 1990년)는 스위스의 극작가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기괴하고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는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확립했다. 뒤렌마트는 현대 사회의 도덕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들었으며, 주로 영웅적이지 않은 희극 형식을 사용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천사 바빌론에 오다, 미시시피씨의 결혼 등이 있다. 1956년 발표한 노부인의 방문(원제: Der Besuch der alten Dame)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논문 연극의 여러 문제와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과학과 정치 문제까지 다루는 허구적인 희극 물리학자들에서는 브레히트와는 다른 연극적 입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는 혜성, 재세례파의 사람들 등이 있다.
3.5. 막스 프리쉬 (Max Frisch)
Max Frisch독일어(1911년 ~ )는 스위스 출신의 작가이자 건축가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전쟁 문제를 다룬 <<전쟁이 끝났을 때>>, <<또다시 노래하네>>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건축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기술 시대인 현대 사회와 대결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의 장성>>, <<돈 환>>, <<에델란트 백작>>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비더만과 방화범>>, <<안도라>>와 같은 작품에서는 개인이 전쟁과 유대인 박해에 대해 져야 할 책임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후기로 갈수록 극장이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근작 <<연희>>에서는 소설 분야에서 시도했던 일기체나 자전적 형식을 빌려 강한 자기 성찰의 경향을 드러냈다.
3.6. 페터 바이스 (Peter Weiss)
Peter Weiss독일어(1916-1982)는 유태계 출신으로, 소년 시절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화가로 활동했으나, 1950년대부터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습작극 <손님이 오는 밤>에 이어 1964년 발표한 <마라의 박해와 암살>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개인주의와 혁명가를 대립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발표 초기 작가는 제3의 입장을 취하는 듯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후 그는 급진적인 정치극으로 평가받는 <추구>, <루시타니아의 괴물의 노래>, <베트남 토론> 등을 발표했으며, 1970년에는 <망명의 트로츠키>를 선보였다. 그의 작품들은 기록극적 성격과 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독일의 연출가와 배우
독일 현대 연극의 발전에는 수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의 노력이 있었다. 표현주의 시기에는 막스 라인하르트, 레오폴트 예스너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뮌헨 예술좌, 빈에서의 코코시카 활동, 베를린 슈트름 무대, 칼하인츠 마르틴의 정치적인 트리뷰네 등 다양한 실험적 시도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조명 기술은 표현주의 연극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모홀리 나기, 슐레머, 칸딘스키 등은 조형미술과 조명 기술을 통합하여 무대의 종합 예술을 시도했다.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정치극을 주창하며 선전 선동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신즉물주의 시대에는 기계 장치를 동원하고 르포르타주 형식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연극 양식을 모색했다. 그의 액자 무대 파괴, 영화 및 환등기 사용, 보고 형식 등 서사적 수법 개발은 이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부터는 펠링, 구스타프 그륀트겐스, 힐펠트, 콜트나 등의 연출가들이 활약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치스 시대에도 독일에 남아 활동하며 베를린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려 애썼다. 펠링은 극작가 바를라흐를 발굴하고 배우의 정밀한 연기를 강조했으며, 그륀트겐스는 라인하르트의 유산을 이어받아 전후 서독 연극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그는 함부르크에서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극단 통솔자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연극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서독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발로크, 슈톨크스, 오스카 플리츠슈, 에버딩 등이 주요 극장의 총감독으로 부임했다. 젤너는 다름슈타트를 중요한 연극 도시로 만든 후 서베를린 독일 오페라로 옮겨 현대적인 고전 해석을 선보였다. 중견 연출가 중에서는 브레히트의 제자였던 파아리츄가 슈투트가르트에서 급진적인 연출을 시도했고, 차데크는 브레멘에서 충격적인 연출로 주목받았다. 피스카토르는 말년에 서베를린 민중극장으로 돌아와 롤프 호흐후트, 하이마르 키프하르트 같은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했다.
동독에서는 망명에서 돌아온 브레히트가 아내이자 배우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극장을 사회 비판적 인식의 장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브레히트의 오랜 협력자였던 에리히 엥겔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만프레트 베크볼트가 기대를 모았다. 베를린의 유서 깊은 독일 극장(Deutsches Theater)은 볼프강 랑호프 감독 이후 브레히트에게 배운 벤노 베손이 혁신을 이끌었다. 한때 브레히트 이론과 대립했던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은 점차 브레히트 이론과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 오페라 분야에서는 발터 펠젠슈타인이 극적인 해석을 강조한 연출로 유명했다.
스위스의 독일어권 극장은 나치 시대에 망명 작가들의 작품을 상연하는 등 자유로운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는 릴트벨크, 웰타린 등 연출가들의 공이 컸다.
독일 현대극을 빛낸 배우들 역시 많다.
| 시대 | 주요 배우 |
|---|---|
| 라인하르트 시대 ~ 전후 | 알렉산더 모이시, 엘리자베트 베르크너, 폰 빈터시타인, 슈타인리에츠크, 하르트만, 에카스벨크, 에밀 야닝스, 베르너 크라우스, 알베르트 바서만, 팔렌베르크, 아델레 잔트록, 헬레네 티미히, 루돌프 실트크라우트, 파울 베게너, 아이벤슈츠, 파가이, 테이미히 일족(헬레네 티미히, 헤르만 티미히, 한스 티미히) 등 |
| 나치 시대 망명 배우 | 에른스트 부슈, 페터 로레, 에른스트 도이치 등 |
| 현대 (전후 ~) |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 테레제 기제, 케르너, 파울라 베셀리, 하이데마리 하타이어, 흐리켄실트, 돌슈, 우이머, 골빈, 셀, 코티언, 팔머, 엘자 바그너, 핑크, 슈타인, 기젤라 마이, 풀비츠, 호프, 라이헬 등 남배우: 오토 에두아르트 하세, 테오 링겐, 파울 헤르비거, 데 코버, 하인츠 뤼만, 보와, 만케, 긴스베르크, 플레르힝거, 에른스트 카이저, 에케하르트 샬, 타아테, 슈뢰더, 베른하르트 미네티, 볼헬트, 크바트프리크, 차이틀러, 헬트, 요제프 마인라트, 크바트링거 등 |
나치 시대에는 도류나 하인리히 게오르게처럼 독일에 남아 활동한 배우들도 있었지만, 유대인 배우였던 에른스트 도이치를 비롯해 에른스트 부슈, 페터 로레 등 많은 배우가 망명길에 올랐다.
무대 미술 분야에서는 라인하르트 시대의 화려한 스펙터클을 담당했던 오리크, 슈테른멘첼 등이 있었고, 이후 트라우고트 뮐러는 기존의 장치를 파괴하는 시도를 했다. 브레히트와 협력했던 카스파르 네어나 테오 오토는 전후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표현주의 이후 무대 장치는 점차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공간이나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조명을 활용하여 분위기를 만드는 바이로이트 방식과, 브레히트가 추구했던 '보여주기' 연기를 보조하는 부분적으로 사실적인 무대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4.1. 막스 라인하르트 (Max Reinhardt)
막스 라인하르트는 표현주의의 도래를 미리 짐작하고, 자신의 극장 범위 안에서 이미 1910년대에 《거지》, 《아들》, 《해전》 등 몇몇 표현주의극을 상연했다. 그러나 종래의 환상적인 극장 테두리를 완전히 파괴하는 급진적인 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4.2. 에르빈 피스카토르 (Erwin Piscator)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정치극을 주장하며 선전 선동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신즉물주의 시대에는 기계 장치를 적극적으로 무대에 도입하고, 실제 사건 기록을 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 형식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존의 틀에 박힌 액자형 무대를 벗어나 영화 필름이나 환등기(슬라이드)를 장면에 삽입하고, 보고서처럼 내용을 전달하는 등 오늘날 서사극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여러 실험적인 기법들을 발전시켰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깃발>, <해소(海嘯)>, <시베이크> 등이 있으며,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명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피스카토르를 위해 혁신적인 구조의 '전체극장(Totaltheater)'을 설계하기도 했으나, 아쉽게도 실제로 건설되지는 못했다.
4.3. 레오폴트 예스너 (Leopold Jessner)
표현주의 연극의 중요한 연출가 중 한 명이다. 원본 자료에 따르면,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를린 국립극장 총감독을 역임하며 활동했다. 그는 기존의 자연주의적 장치를 과감하게 버리고, 무대 전체를 계단으로 구성하는 계단식 무대(일명 '예스너 계단', Jessnertreppe독일어)를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혁신적인 무대 디자인은 배우의 수직적인 움직임과 극적인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며, 당시 독일 연극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여러 극장에서 유행처럼 사용되었다.
예스너의 연출은 표현주의가 추구했던 주관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무대 위에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새로운 조명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표현주의 특유의 서정적인 모놀로그(독백)를 스포트라이트로 강조하거나 극장에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구현하는 등 기존 연극의 틀을 깨는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표현주의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
4.4.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Bertolt Brecht독일어(1898-1956)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기존 사회 질서와 자신의 계급에 등을 돌리고 점차 혁명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의 초기 희곡에는 표현주의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처녀작 <바알(Baal독일어)>을 비롯해 귀환병의 이야기를 다룬 <밤의 북(Trommeln in der Nacht독일어)>과 인간 소외 문제를 제기한 <도시의 정글(Im Dickicht der Städte독일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작품들에는 아직 양가적 감정의 도취나 익살, 조소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다.
이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경도되었고, 이는 그의 독창적인 연극 이론인 [[서사극]](敍事的演劇, {{lang|de|Episches Theater}})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연극이 단순한 감정 이입의 장이 아니라, 관객이 사회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성찰하는 '인식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적 관찰을 유도하는 [[이화 효과]](異化效果, {{lang|de|Verfremdungseffekt}})라는 핵심적인 연극 기법을 창안했다. 희곡 <사나이는 사나이다(Mann ist Mann독일어)>와 실제적인 교훈 전달을 목표로 한 일련의 '교육극(Lehrstücke독일어)'들은 이러한 서사극 이론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였다.
브레히트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통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협력하여 발표한 뮤지컬 <싸구려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독일어, 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독일어, 1930)>은 큰 성공을 거두며 그의 명성을 높였다. 또한 <도살장의 성 요한나(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öfe독일어)>와 <어머니(Die Mutter독일어)>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치즘 정권을 피해 망명 생활을 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론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동시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많은 걸작 희곡들을 집필했다.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독일어)>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독일어)> <세추안의 선인(Der gute Mensch von Sezuan독일어)>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독일어)> <갈릴레이의 생애(Leben des Galilei독일어)>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9년 브레히트는 동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는 아내이자 뛰어난 배우였던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했다. 이 극단을 통해 망명 시기에 쓴 주요 작품들을 직접 무대에 올리며 자신의 서사극 이론을 실제 연극으로 구현했고, 이는 세계 연극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감상적인 연극을 배격하고, 극장을 사회 비판적 인식의 장으로 삼으려는 브레히트의 연극 이념을 실현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동독에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교조적으로 따르던 이들과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을 변증법적 연극으로 더욱 발전시키려 노력하던 중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베를리너 앙상블을 통해 페터 하크스(Peter Hacks독일어), 에리히 슈트리트마터(Erwin Strittmatter독일어), 헬무트 바이에르(Helmut Baierl독일어), 하이네 뮐러 등 많은 후배 작가와 연출가를 길러내며 독일 연극뿐 아니라 세계 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