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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오스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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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오스만 전쟁은 1265년부터 1453년까지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함께 시작되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나갔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종결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내부 분열과 라틴 세력의 개입,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 등의 요인으로 인해 쇠퇴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에 굴복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유럽으로 진출했으며, 동로마 제국 멸망은 유럽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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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오스만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명동로마-오스만 전쟁
일부오스만 제국의 흥망성쇠와 동로마 제국의 쇠퇴
기간1299년–1453년
장소아나톨리아, 발칸 반도
결과오스만 제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만 제국
교전국 1-1세르비아 공국
교전국 2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동로마 제국
교전국 2-1모레아 전제공국
교전국 2-2카탈루냐 용병
교전국 2-3오스만 망명자
지원국제노바 공화국
지원국 2베네치아 공화국
지원국 3시칠리아 왕국
지원국 4트라페준타 제국
지원국 5에피로스 전제공국
지원국 6테오도로 공국
지원국 7헝가리 왕국
지원국 8교황령
지원국 9세르비아 공국
주요 전투
전투 목록쿨라자 히사르 공성전
이네괼 공성전
바페우스 전투
딤보스 전투
카탈루냐의 소아시아 원정
부르사 공성전
펠레카논 전투
니케아
니코메디아 공성전
갈리폴리 함락
사보이아 십자군
아드리아노플
필라델피아 함락
1차 테살로니카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2차 테살로니카
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레아
트라페준타
이미지
동로마-오스만 전쟁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오스만 예니체리, 동로마 제국 국기, 오스만 청동 대포
지휘관
동로마 제국 지휘관요안니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동로마 제국 지휘관 2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
동로마 제국 지휘관 3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
동로마 제국 지휘관 4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
오스만 제국 지휘관오르한 1세
오스만 제국 지휘관 2무라트 1세
오스만 제국 지휘관 3바예지트 1세
오스만 제국 지휘관 4무라트 2세
오스만 제국 지휘관 5메흐메트 2세

2. 역사

동로마 제국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지만, 제국은 이미 서쪽의 라틴 세력과 북쪽의 세르비아 왕국 등 여러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오스만 1세가 이끄는 튀르크족 세력이 점차 힘을 키우며 오스만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세력은 13세기 후반부터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를 꾸준히 잠식해 나갔고, 14세기 초에는 부르사와 같은 중요 도시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동로마 제국은 내부적으로 황제 계승 문제를 둘러싼 내전흑사병 등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이는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르한 1세, 무라트 1세, 바예지드 1세와 같은 오스만 술탄들은 발칸 반도의 여러 세력을 격파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를 새로운 수도로 삼는 등 유럽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점차 영토를 잃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과 같은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에 대패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구원하려는 서유럽의 시도도 좌절되었다.

15세기 초, 티무르 제국의 침입으로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며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메흐메트 1세무라트 2세 시기를 거치며 제국은 빠르게 재건되었다. 재건된 오스만 제국은 다시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고, 1422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했다.

결국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이 사건으로 천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의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모레아 전제공국, 트레비존드 제국 등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완전히 종결지었다.

2. 1. 오스만 제국의 발흥: 1265년–1328년

1263년경 동지중해 상황. 밝은 빨간색은 동로마 제국, 밝은 녹색은 튀르크 영토를 나타낸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제국이 재정복했지만, 제국은 여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서쪽에서는 라틴 제국의 부활을 노리는 라틴 공국들의 위협이 있었고, 북쪽에서는 스테판 우로시 1세가 이끄는 세르비아 왕국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며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이러한 위협에 맞서 미카일 8세는 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는 어린 공동 황제 요한 4세의 눈을 멀게 하여 많은 반감을 샀다. 또한 라틴 세력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이는 내부적인 반발을 더욱 키웠다. 미카일 8세가 서방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동쪽의 아나톨리아 국경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부상했다. 오스만 1세가 이끄는 튀르크족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하여, 1265년에는 쇠위트를, 1289년에는 에스키셰히르를 점령했다. 서쪽 국경 문제로 인해 미카일 8세는 아나톨리아의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1282년 미카일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제위에 올랐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는 무능함과 근시안적인 결정으로 점철되어 제국에 장기적으로 큰 해를 끼쳤다. 그는 제국의 화폐인 ''히페르피론''의 가치를 떨어뜨려 경제를 악화시켰고, 세금 제도를 변경하여 토지 귀족의 부담은 줄이고 기사 계급인 ''프로노이아''의 부담을 늘렸다. 또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리옹 제2차 공의회에서 결정된 동서 교회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라틴 세력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오스만 튀르크가 아나톨리아 영토를 잠식해 나가자, 일부 아나톨리아 주민들은 오스만 통치를 더 선호하며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하여 동로마 제국의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나톨리아 방어에 관심을 보이며 요새를 건설하고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는 직접 아나톨리아로 가서 군사 작전을 감독하려 했고, 장군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페노스에게 튀르크족 격퇴를 명령했다. 필란트로페노스는 초기에 일부 성공을 거두었으나, 곧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눈이 멀게 되고 군사 활동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군은 1301년 니케아를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1302년에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 미카일 9세와 장군 요르요스 무잘론이 마그네시아와 바페우스 전투에서 오스만군에게 패배했다.

오스만 술탄국은 숙련된 기병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운용했다.


궁지에 몰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다.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약 6,500명의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3년 봄과 여름에 걸쳐 튀르크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필라델피아에서 키지코스까지 몰아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용병들은 아나톨리아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설상가상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약속한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용병대 지도자 로제 드 플로르가 암살당하자, 분노한 카탈루냐 용병대는 복수를 명분으로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1307년 트라키아로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지역까지 휩쓸었으며, 심지어 아테네 공국 군대를 격파하고 아테네를 점령하여 아라곤 왕국에 넘겨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이러한 행패는 동로마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아나톨리아의 주민들은 차라리 오스만 제국을 환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내부 분열과 혼란을 틈타 소아시아의 주요 거점들을 다시 포위하기 시작했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권력을 잡을 당시의 동로마 제국 상황. 오스만 세력(녹색)이 아나톨리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다.


거듭된 패배와 혼란 속에서 안드로니코스 2세는 더 이상 효과적인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1320년에는 황제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미카일 9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가 제위 계승 자격을 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고, 트라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는 계속해서 제위 계승권을 주장하여 1322년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이는 결국 1321-1328년 동로마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에는 세르비아가 안드로니코스 2세를, 불가리아가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하며 국제적인 양상까지 띠게 되었다. 내전으로 제국이 더욱 황폐해지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1326년 중요한 도시인 부르사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328년 5월 23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단독 황제가 되었다.

2. 2. 1326년–1337년: 오스만 제국의 성장

오스만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오르한은 사카리아 강을 넘어 동로마 제국 영토로 진출하여 1326년에 부르사를 점령했다. 이는 오스만 군후국의 성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오스만의 확장을 막으려 했으나, 1329년 6월 10일 펠레카논 전투에서 오르한이 이끄는 오스만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아나톨리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니케아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결국 1331년, 니케아는 오스만 군대에 항복했으며,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를 상실한 동로마 제국에게 큰 타격이었다.

군사력이 소진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외교를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했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남은 동로마 영토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고, 1333년 오스만 제국이 니코메디아를 포위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결국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마저 오스만 군대에 함락되었다.

이 시기 오르한은 동로마 영토를 잠식하는 동시에 주변의 다른 튀르크계 후국들을 병합하며 세력을 꾸준히 확장해 나갔다. 이를 통해 오스만 군후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의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2. 3. 동로마 제국의 내전과 오스만 제국의 개입: 1341년–1371년

1355년경의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잃었고, 마케도니아와 에피루스는 두샨의 세르비아에 정복되었으며, 신생 오스만 베이리크는 비티니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에 사망하여 10살 된 아들 요안니스 5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4] 어린 황제를 대신해 어머니 사보이의 안나,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그리고 유력 귀족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가 섭정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칸타쿠제노스와 칼레카스 사이의 권력 다툼은 곧 파괴적인 내전으로 번졌고, 칸타쿠제노스는 1347년 2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요안니스 5세와 함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4][5]

이 내전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흑사병의 창궐과 지진[4], 그리고 끊임없는 오스만 제국의 약탈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필라델피아만이 명목상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쳐야 유지될 수 있었다. 내전 중 양측은 투르크인과 세르비아인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이들은 제국 영토를 마음껏 유린했다.[4] 그 결과 마케도니아의 상당 부분이 황폐화되었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세르비아 제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칸타쿠제노스와 요안니스 5세의 불안정한 공동 통치는 결국 두 번째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은 동로마 제국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1352년, 오스만 제국의 오르한 1세는 칸타쿠제노스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트라키아에서 요안니스 5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칸타쿠제노스는 다시 한번 승리하여 요안니스 5세를 추방하고, 자신의 아들 마태오 칸타쿠제노스를 공동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개입은 동로마 제국에게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1354년, 오스만 군대는 유럽 대륙으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갈리폴리 요새를 점령했다.[4][5] 이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 본토에 교두보를 마련한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제노바 공화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요안니스 5세는 1354년 11월 쿠데타를 감행하여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를 축출했다. 권좌에서 물러난 칸타쿠제노스는 수도사가 되었다.[4]

하지만 내전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마태오 칸타쿠제노스는 오르한 1세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으려 했으나, 1356년에 포로로 잡히면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4]

내전이 종식된 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다. 1361년에는 디디모테이혼이 함락되었고,[4] 오르한의 뒤를 이은 무라트 1세는 발칸 반도 공략을 본격화했다. 그의 봉신들은 1363년에서 1364년 사이에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했으며, 1369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현재의 에디르네)마저 전투 끝에 오스만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4] 아드리아노폴리스는 이후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거듭된 내전으로 국력이 쇠진한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1371년 9월 26일, 무라트 1세는 마리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를 격파하여[4] 발칸 반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목전에 다다르자, 요안니스 5세는 서방 세계에 도움을 구하고자 교황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복종을 약속했다. 그는 구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실질적인 군사 원조는 얻지 못했다. 결국 요안니스 5세는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라트 1세와 협상을 벌여,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기적으로 군대와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제국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4]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속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2. 4. 무라트 1세와 바예지드 1세 시대: 발칸 반도 정복과 동로마 제국의 종속

요안니스 5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는 오스만 제국 술탄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며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황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마누엘 2세의 통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황금문의 요새를 해체하도록 요구했고, 마누엘 2세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오르한의 뒤를 이은 무라트 1세1362년 에디르네(과거 아드리아노플)를 정복하고 이곳을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후 무라트 1세는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불가리아세르비아의 제후들을 복속시키고 이들을 오스만 군대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강화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1391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테살로니키를 점령했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무라트 1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 1세는 동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복속시킨 불가리아, 세르비아 군대까지 동원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사루한, 아이딘, 멘테셰 등 튀르크계 제후국들을 정복하며 세력을 더욱 넓혔다. 1395년에는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서유럽 국가들이 십자군을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에 맞섰으나,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에게 크게 패배했다.

니코폴리스에서의 승리 이후 바예지드 1세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1402년, 동쪽에서 침입해온 티무르 제국의 군대와 맞붙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오스만 제국은 일시적인 혼란기인 오스만 공백기를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잠시 함락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 5. 오스만 제국의 일시적 쇠퇴와 재건

차카타이 칸국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술탄에게 충성하던 베이릭들의 연합을 해체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의 군대는 바예지드 1세의 군대를 격파했는데,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패배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고, 바예지드의 아들들이 서로 술탄 자리를 놓고 다투는 오스만 제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독교 이웃 국가들 및 바예지드의 아들 중 한 명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카와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내전은 1413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메흐메트 1세가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오스만 제국을 재통일하면서 끝났다.

메흐메트 1세와 동로마 제국 사이에 수립되었던 잠시의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는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가 황제가 되면서 두 제국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어느 쪽 지도자도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않았다.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다소 무모한 시도를 했다. 그는 바예지드의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무스타파라는 인물을 지원했다.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는 유럽 지역에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모아 무라트 2세의 부하들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무라트 2세는 격렬하게 반격하여 결국 무스타파 세력을 분쇄했다. 이후 무라트 2세는 1422년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요안니스 8세는 당시 생존해 있던 아버지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 결과 오스만 군대 내에서 또 다른 반란을 선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무라트 2세의 형제인 쿠추크 무스타파의 술탄 계승 주장을 지지했다. 이 반란은 소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부르사를 포위하는 등 초반에는 유망해 보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실패한 무라트 2세는 군대를 돌려 쿠추크 무스타파를 격파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의 종속국 신세가 되었고, 매년 30만 은화를 술탄에게 조공으로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멸망 직전까지 갔던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초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재통일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무라트 2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무라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이 지원했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다시 신종시켰다. 나아가 불가리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을 공략하며 제국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2. 6. 동로마 제국의 멸망: 1424년–1453년

1422년의 공방전 실패 이후, 동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의 종속국 신세가 되어 매년 30만 은화를 술탄에게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 시점에서 제국의 영토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를 간신히 유지하는 작은 나라로 전락했다.

오스만 제국은 1424년1453년 사이에 수많은 적들과 맞섰다. 테살로니카 공방전에 묶여 있으면서도, 조르제 브란코비치 휘하의 세르비아, 야노시 후녀디 휘하의 헝가리, 스칸데르베그 휘하의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의 여러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저항은 1444년의 바르나 십자군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오스만 제국은 무라드 2세의 지휘 아래 십자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며 발칸 반도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외교적 활로를 모색했다. 1430년대에는 바젤 공의회와 피렌체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통합이 논의되었으나, 여러 복잡한 문제로 인해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391년–1425년)와 그의 아들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425년–1448년)는 서유럽 국가들을 직접 방문하거나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지만,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백년 전쟁, 레콩키스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분열, 후스 전쟁, 그리고 바르나 전투의 여파 등으로 인해 동로마를 도울 여력이 없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448년 요안니스 8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449년–1453년)가 제위에 올랐다. 1451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메흐메트 2세(재위: 1444년–1446년, 1451년–1481년)가 술탄이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십자군 잔존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오히려 메흐메트 2세의 경계심을 샀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오스만 제국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메흐메트 2세는 이에 대응하여 1452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루멜리 히사리 요새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외부 해상 지원으로부터 차단했다.

1451년의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영토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육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1453년 4월 6일 마침내 도시를 향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통합 선언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이나 서유럽 국가들로부터의 공식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에서 온 소수의 병사들과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롱고가 이끄는 약 2,000명의 용병이 도시 방어를 도왔을 뿐이다. 이들 용병과 시민들로 구성된 약 5,000명의 민병대가 도시 방어의 전부였는데, 이는 오랜 전쟁과 역병,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든 결과였다. 방어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대포에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 수적으로 10대 1 이상의 압도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시기 영토 변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오스만 군대는 초반의 실패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에게 도시 함락 후 얻게 될 막대한 부와 약탈을 약속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결국 1453년 5월 29일, 압도적인 병력과 예니체리 군단의 활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은 무너졌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시가지 전투 중에 행방불명되어 사실상 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시가 함락되자 오스만 군대는 약속대로 사흘간 약탈을 자행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참전했던 베네치아 외과 의사 니콜로 바르바로는 도시의 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도시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던 하기아 소피아는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하기아 소피아는 함락 후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20세기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나, 21세기에 다시 모스크로 전환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은 한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1460년 오스만 제국은 모레아 전제공국을 정복했고, 1461년에는 트레비존드 제국마저 멸망시키면서 천년 이상 지속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후 테오도로 공국(1475년)과 에피루스 전제공국(1479년, 당시 토코 가문 통치) 등 다른 잔존 세력들도 차례로 정복되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유럽에서 명목상의 황제 칭호를 유지했으나, 종교 개혁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 증대, 십자군 운동의 퇴조 속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 말기에 일어난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는 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 등으로 망명한 학자들을 통해 서유럽 르네상스의 발전에 중요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3. 동로마 제국 패배의 원인

동로마 제국오스만 제국에게 점진적으로 영토를 상실하고 결국 패배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제국 내부의 고질적인 약점과 외부 세력의 압박,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강점이 맞물려 작용한 결과이다.

내부적으로는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 반복된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 히페르피론 가치 하락 등으로 인한 경제적 쇠퇴, 그리고 군사력 약화가 제국의 기반을 끊임없이 약화시켰다. 외부적으로는 서방 라틴 세력의 지속적인 위협과 실질적이지 못했던 지원이 동로마 제국의 국력 분산을 초래했으며, 새롭게 부상한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취약점을 효과적으로 파고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 주변 기독교 국가들의 분열을 이용하고, 효율적인 통치 방식과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외부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점차 쇠퇴하여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3. 1. 라틴 세력의 개입

발칸 반도 내 라틴 세력의 존재는 동로마 제국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는 노력을 조정하는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는 특히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탈환한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 시대에 두드러졌다. 그는 그리스 본토 등지에 남아있는 라틴 공국들을 몰아내려 했으나, 이들 라틴 세력은 여전히 라틴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미카일 8세가 이러한 서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을 서쪽으로 집중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동쪽의 아나톨리아 국경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스만 1세를 비롯한 여러 튀르크계 부족(베이릭)들이 이전 동로마 영토를 침략하고 정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안드로니코스 2세 시기에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아나톨리아 영토 보존에 관심을 기울여 요새를 건설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정책 중 일부는 오히려 라틴 세력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1274년 리옹 제2차 공의회에서 결정된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라틴 세계와의 적대감을 키웠다. 이는 서방 세계로부터의 잠재적인 지원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나톨리아 원정은 알렉시우스 필란트로페노스의 반란이나 카탈루냐 용병대의 배신과 약탈 같은 내부 문제뿐만 아니라, 제국 서부에서 발생하는 라틴 세력과의 긴장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방해받고 좌절되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교황과 라틴 세력으로부터의 공격 위협에 직면하거나, 혹은 내부적인 반발을 감수하고 교회 통합을 추진해야 하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러한 외교적, 군사적 딜레마와 내부 분열은 동로마 제국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동로마 황제에 대한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마지막 십자군"의 낭만적인 묘사. 증가하는 무슬림의 승리, 기독교의 패배, 유럽의 위반 행위는 종교 개혁 및 반종교 개혁과 함께 십자군 전쟁의 종말을 가져왔다.


14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서방으로부터 일부 형식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같은 기독교 국가에 대한 동정심의 표현에 가까웠다. 두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이 서방(로마)으로부터 받은 실질적인 도움은 미미하여, 당시 동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맘루크 이집트 술탄에게서 받은 만큼 로마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3세기 맘루크 술탄국은 중동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려는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으며, 이후 키프로스의 약탈 행위 등은 14세기와 15세기에도 서방의 실질적인 군사 지원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3. 2. 동로마 제국의 약화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정복한 이후, 비잔틴 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놓였다. 그리스 본토와 다른 지역에 남아 있던 라틴계 공국들은 여전히 라틴 제국의 복원을 목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논의하고 있었고,[1] 북쪽에서는 스테판 우로시 1세가 이끄는 세르비아 왕국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며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2]

과거 콤네노스 왕조 시절 강력한 국경선이었던 다뉴브강 유역의 세력들이 이제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한 미카일 8세는 자신의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다. 그는 공동 황제였던 어린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멀게 하여 폐위시켰는데, 이는 제국 내에서 큰 반감을 샀다.[1] 이러한 반발을 무마하고 라틴 세력의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미카일 8세는 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게르마노스 3세를 임명했다. 그는 게르마노스 3세에게 전임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레이아노스가 자신에게 내린 파문을 철회하고, 로마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여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지시했다.[1]

비잔틴 제국이 서쪽의 라틴 영토를 회복하는 데 힘쓰는 동안, 동쪽에서는 오스만 1세가 이끄는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1265년에는 쇠위트가, 1289년에는 에스키셰히르가 오스만 세력에게 점령당했다.[3] 미카일 8세는 서방 문제에 집중하느라 동방 국경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초기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1282년 미카일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미카일 8세의 죽음은 제국 사회 전반에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로마 교회와의 화해 정책, 과도한 세금 부과, 그리고 막대한 군사비 지출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튀르크가 제국의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하자, 일부 아나톨리아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여기기도 했으며, 많은 이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정통 기독교 세력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4]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는 무능함과 근시안적인 결정으로 점철되었고, 이는 장기적으로 비잔틴 제국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 그는 비잔틴 화폐인 ''히페르피론''의 가치를 떨어뜨려 제국 경제를 약화시켰다. 세금은 토지를 소유한 유력 귀족들에게는 줄여주면서, 군사 복무를 담당하던 기사 계급인 ''프로노이아''에게는 더 무겁게 부과했다. 또한 자신의 인기를 얻기 위해, 1274년 리옹 제2차 공의회에서 결정되었던 정교회가톨릭 교회의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라틴 세력과의 적대 관계를 더욱 심화시켰다.[2]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나톨리아 영토 보존에 관심을 보이며 소아시아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다.[2] 그는 직접 아나톨리아로 궁정을 옮겨 군사 작전을 감독하려 했고, 장군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페노스에게 튀르크족 격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필란트로페노스가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눈이 멀게 되면서 초기 군사적 성공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의 군사 활동도 중단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오스만 제국은 1301년 니케아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 미카일 9세와 장군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은 1302년 마그네시아와 바페우스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다.[2]

궁지에 몰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번에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하여 튀르크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 했다. 미카일 9세의 지휘 아래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6,500명의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3년 봄과 여름에 걸쳐 튀르크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용병들은 맹렬한 공격으로 튀르크족을 필라델피아에서 키지코스까지 밀어냈지만, 그 과정에서 아나톨리아 지역에 심각한 파괴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역시 내부 문제로 인해 좌절되었다. 용병대장 로제 드 플로르가 암살당하자, 복수심에 불탄 용병들은 아나톨리아 시골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이 1307년 비잔틴령 트라키아를 공격하기 위해 떠나자, 아나톨리아 현지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을 환영하기에 이르렀고, 오스만 세력은 다시 소아시아의 주요 요새들을 봉쇄하기 시작했다.[2] 오스만 제국은 적들의 분열 덕분에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아나톨리아의 많은 농민들은 오스만 제국을 더 나은 통치자로 여기게 되었다.[4][5]

이러한 거듭된 패배 이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더 이상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320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아버지이자 황태자였던 미카일 9세의 사망 이후 제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6] 이에 반발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다음 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트라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고, 1322년에는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결국 1321-1328년 비잔틴 내전으로 이어졌는데, 이 내전에는 세르비아가 안드로니코스 2세를, 불가리아가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하며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1328년 5월 23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내전 기간 동안 제국의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고, 오스만 제국은 1326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부르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3]

니케아의 운명은 1329년 6월 10일 펠레카논 전투에서 비잔틴 구원군이 패배하면서 결정되었다.[7] 결국 1331년, 니케아는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고,[7]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비잔틴의 군사력은 다시 한번 고갈되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외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남은 비잔틴 영토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은 1333년 니코메디아를 포위했고, 도시는 결국 1337년에 함락되었다.[7]

이러한 좌절 속에서도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에페이로스와 테살리아를 재정복했으며,[6] 1329년에는 키오스를, 1335년에는 레스보스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 섬들은 오스만 제국의 정복이라는 큰 흐름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제국의 전반적인 쇠퇴를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페이로스)는 세르비아의 팽창으로 다시 위협받게 되었고, 제국은 곧이어 발생한 파괴적인 내전으로 인해 더욱 약화되어 결국 오스만 제국에 종속되는 길을 걷게 된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에 사망했고, 10살 된 아들 요안니스 5세가 제위를 계승했다.[6] 어린 황제를 대신해 그의 어머니 사보이의 안나,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그리고 유력 귀족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와 다른 섭정단 사이의 권력 다툼은 1341-1347년 비잔틴 내전이라는 또 다른 파괴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 칸타쿠지노스는 1347년 2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승리했다. 이 내전 기간 동안 흑사병의 창궐과 지진[8],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끊임없는 약탈이 겹치면서 제국은 더욱 피폐해졌다. 아나톨리아에서는 필라델피아만이 비잔틴의 수중에 남았지만, 이마저도 조공을 바쳐야 유지될 수 있었다. 내전 동안 양측은 튀르크족과 세르비아인 용병을 고용하여 서로 싸웠고, 이들 용병은 제국 영토를 자유롭게 약탈했다.[9] 그 결과 마케도니아의 많은 부분이 황폐화되었고, 새롭게 부상한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와 함께 공동 황제로 통치했다.[4][5]

그러나 이 공동 통치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고, 두 황제는 1352-1357년 비잔틴 내전이라는 새로운 내전을 벌이며 제국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가 다시 한번 승리하여 요안니스 5세를 추방하고, 자신의 아들 마태오 칸타쿠지노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이 내전 과정에서 오스만 1세의 아들인 오르한 1세 휘하의 튀르크인들이 1354년 갈리폴리 요새를 점령하면서[8][5] 유럽 본토로 진출할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는 오스만 군대의 등장은 수도에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제노바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요안니스 5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1354년 11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를 몰아냈다. 실각한 요안니스 6세는 수도사가 되었다.[8]

내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태오 칸타쿠지노스는 오르한으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려 했으나, 1356년 체포되면서 황제가 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요안니스 5세의 복위를 도왔던 오스만 제국에게는 일시적인 좌절이었다.[8]

내전이 종식된 후,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그러나 1361년 디디모테이코가 튀르크인들에게 함락되었다.[8] 오르한의 뒤를 이은 무라트 1세는 초기에는 아나톨리아 지역 문제에 더 집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셀주크 제국알프 아르슬란처럼, 비잔틴 영토 공략을 부하들에게 맡겼다. 그 결과 1363-64년의 주요 작전 끝에 필리포폴리스가 함락되었고, 1369년에는 아드리아노플(현재의 에디르네)이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가면서 오스만 제국은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9]

비잔틴 제국은 이러한 영토 상실에 제대로 대응하거나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쯤 오스만 제국은 이미 너무 강력해져 있었다. 무라트 1세는 1371년 9월 26일 마리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를 격파하여[9] 발칸 반도에서의 세르비아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안니스 5세는 교황에게 군사적 지원을 호소하며 로마 교회에 복종할 것을 제안했다. 비록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는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받지 못했다. 결국 요안니스 5세는 적인 오스만 제국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라트 1세와 요안니스 5세는 비잔틴 제국이 안보를 보장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정기적으로 군대와 조공을 바치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동로마 제국의 경제가 쇠퇴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바치는 30만 은화의 조공은 더욱 큰 부담이 되었다.


1394년,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재위 1389–1402)는 황제 마누일 2세가 자신의 조카 요안니스 7세와 화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명령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후 바예지트 1세는 결정을 번복했지만,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스크를 건설하고 튀르크인 거주지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마누일 2세는 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술탄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마저 중단하고 술탄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이는 결국 139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마누일 2세는 서유럽에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고, 1396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국왕(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 이끄는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의 오스만 군대에게 참패했다.

이 패배는 마누일 2세가 직접 서유럽으로 가서 원조를 구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이전에 화해했던 요안니스 7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길었던 공방전은 예상치 못한 외부 요인에 의해 끝났다.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차가타이 칸국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던 베이국들을 와해시킨 것이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 군대는 바예지트 1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바예지트 1세는 포로로 잡히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사건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트 1세의 아들들 사이에서 내전(오스만 공위시대)에 돌입했다.

비잔틴 제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독교 이웃 국가들 및 바예지트의 아들 중 한 명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 테살로니카와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내전은 1413년, 비잔틴 제국의 지원을 받은 메흐메트 1세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종식되었다.

두 국가 사이에 형성된 드문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술탄으로 즉위했으며, 비잔틴 제국에서는 요안니스 8세가 황제가 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두 지도자 모두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않았다.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위험한 수를 두었다. 그는 무스타파라는 인물을 풀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이 바예지트 1세의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는 유럽에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모아 무라트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분노한 무라트 2세는 결국 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1422년에는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다. 요안니스 8세는 당시 생존해 있던 아버지 마누일 2세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결과, 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또 다른 반란을 부추겼다. 이번에는 무라트 2세의 동생인 쿠추크 무스타파의 왕위 주장을 지지했다. 이 반란은 소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부르사를 포위하는 등 초기에는 유망해 보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라트 2세는 군대를 돌려 쿠추크를 격파해야 했다. 이 패배로 비잔틴 제국은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의 속국 신세가 되었고, 매년 30만 은화의 조공을 술탄에게 바쳐야 했다.

3. 3. 오스만 제국의 이점

동로마 제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군사 지출은 제국 내 주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만 튀르크아나톨리아로 진출하자, 많은 아나톨리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존재로 여겼다. 특히 아나톨리아의 농민 계층은 오스만 제국을 더 나은 통치자로 받아들였으며,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보다 낮은 세금을 부과하여 아나톨리아 평민들에게 더 유리했고, 이는 오스만 제국이 기꺼이 따르는 많은 병력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동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주변 불가리아, 세르비아, 라틴계 국가들 간의 분열은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들 국가는 서로 경쟁하느라 오스만 제국의 성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각개격파당하며 속국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너무 늦게 인지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이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정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뛰어난 포위 공격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 방식과 통치 정책 역시 빠른 성장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세력을 키웠고, 점차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정착하면서 현지 농민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지지를 확보했다.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지 않는 세력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정복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속국으로 삼는 유연한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중앙 집권적인 동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과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자유 방임주의적' 접근은 오스만 제국이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고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또한, 정복된 국가들로부터 조공으로 아이들과 돈을 징수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파괴나 정복보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더 효율적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압도하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4. 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동로마 제국의 완전한 종말을 고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후 1460년 모레아 전제공국을, 1461년에는 마지막 동로마계 국가였던 트레비존드 제국을 정복했다. 트레비존드의 함락으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완전히 끝났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한동안 유럽 군주들에게 정통 황가로 여겨졌으나, 종교 개혁, 오스만 제국의 지속적인 위협, 십자군에 대한 관심 감소 등으로 인해 유럽 열강은 점차 오스만 제국을 아나톨리아레반트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인정했다.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인 테오도로 공국(1475년)과 에피루스 전제공국(1479년)마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소식은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교황청은 즉각적인 반격을 위해 십자군 결성을 촉구했다. 부르고뉴 공국의 선량공 필리프가 유일하게 호응했으나, 다른 강력한 군주의 지원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교황 비오 2세가 다시 십자군을 추진했으나, 유럽 주요 군주들의 외면으로 교황 자신이 십자군을 이끌려다 1464년 사망하면서 안코나 항구에서 해산되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백년 전쟁, 레콩키스타, 내부 분열, 바르나 전투에서의 패배 등으로 인해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문화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한 그리스 학자들이 가져온 고전 지식과 문화가 유럽 르네상스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7]

종교적으로는 니코폴리스 십자군과 바르나 십자군의 실패,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목격한 많은 유럽인들이 이를 기독교 세계의 죄에 대한 신의 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 역시 초기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교황 주도의 십자군이 아닌 세속 군주들이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교황이 얼마나 부끄럽게... 오랫동안 우리를 투르크와의 전쟁으로 유혹하고 돈을 빼앗았으며, 수많은 기독교인을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저질렀는가!

유럽이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발판 삼아 유럽과 중동 지역으로 더욱 활발히 팽창해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17세기 중반에 절정에 달했으나, 점차 예니체리 군단의 보수화 등으로 내부 개혁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유럽 군대의 현대화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의 견제를 받으며 점차 쇠퇴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참조

[1] 논문 Chapter VII. The Ottoman Turks and the Crusades, 1329–1451 https://images.libra[...]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9
[2] 논문 Chapter VII. The Ottoman Turks and the Crusades, 1451–1522 https://images.libra[...]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9
[3] 웹사이트 Saljuqs of Rum https://iranicaonlin[...] 2010
[4] 서적 Les Balkans au Moyen Age: la Bulgarie des Bogomils aux Turcs https://books.google[...] Variorum Reprints
[5] 서적 Nicephori Gregorae Byzantina Historia: Graece Et Latine, Volume 2 https://books.google[...] Creative Media Partners, LLC 2014-02
[6] 서적 Histoire de Constantinople depuis le regne de l'Ancien Justin, jusqu'a la fin de l'Empire, traduite sur les Originaux Grecs par Mr.Cousin, President de la Cour des Monnuyes https://books.google[...]
[7] 서적 Constantinople and the West: Essays on the Late Byzantine (Palaeologan) and Italian Renaissances and the Byzantine and Roman Church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8] 뉴스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http://www.historyto[...] History Today 2004-05
[9] 문서 Compac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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