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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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인(東人)은 조선 시대 사림파에서 분화된 붕당으로, 1575년 관직 임명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면서 시작되었다. 김효원 지지 세력은 서울 동쪽에 거주했기에 동인으로 불렸으며, 이황의 학설을 지지하는 주리파가 많았다. 동인은 서인과의 대립 속에서 정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나, 정여립의 모반 사건과 세자 책봉 문제 등을 겪으며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다. 동인은 이황, 조식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으며, 이후 사색당파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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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5년 설립 - 서인
서인은 조선 시대의 붕당으로, 동인과의 분열로 형성되어 이이와 성혼의 학문적 기반을 두고 기호 지역의 세력을 키웠으며, 인조반정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고 남인과 대립했다. - 동인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 동인 - 이황
이황은 16세기 조선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발전시키고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의 저서를 남기고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으며, 만년에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동인 (붕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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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동인 (東人) |
로마자 표기 | Dongin |
뜻 | 동쪽 사람들 |
상세 정보 | |
창립자 | 김효원 |
주요 지도자 (1570년대) | 김효원 |
주요 지도자 (1580년대) | 이발, 최영경, 류성룡 |
주요 지도자 (1590년대) | 이산해, 류성룡 |
창당 | 1575년 |
해체 | 1591년 |
분열 | 사림 |
후계 | 북인, 남인 |
이념 | 이황과 조식의 철학 |
종교 | 성리학 |
국가 | 조선 왕조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허엽, 정철 |
기타 | |
관련 항목 | 동서분당, 기축옥사 |
2. 역사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으로 나뉘었다. 동인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9] 1573년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추천하는 세력과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추천하는 세력이 대립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7]
동인은 신진 학자 중심이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 관련이 있었다. 류성룡, 이산해 등이 주요 인물이었으며, 1584년 동인이 득세하면서 당쟁이 격화되었다.[7] 이들은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을 계승했고, 영남, 강원 지역에 기반을 두었으며, 선조 때 등용된 신진 관료들이 중심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 초기, 이이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정인홍이 이이의 상소문을 수정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이는 결국 서인임을 선언하며 중립을 철회했다.[13]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 서인이 정권을 잡았고, 많은 동인들이 숙청되었다. 그러나 1591년 서인이 세자 책봉 문제로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다.[34]
1598년경, 류성룡과 같은 남인들이 이이첨과 같은 북인들에게 공격받으면서 분열이 심화되었다.[37]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살아남은 북인들은 대부분 남인에 흡수되었다.[38]
남인은 조선 현종 때 예송 논쟁으로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경신환국 (1680년)으로 허적, 윤휴 등이 처형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45] 1689년 장희빈이 경종을 낳으면서 남인이 다시 집권했지만,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에게 정권을 내주고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했다.[47]
2. 1. 사림의 분열
사림파 가운데 기존 훈구파에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를 중심으로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당파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에 있던 데서 유래하여 '동인'으로 불렸다.[9] 1573년경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대립하면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7]1567년 선조의 즉위로 사림파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1575년 관직 임명권을 놓고 사림파 내부의 심의겸과 김효원 간의 당쟁이 시작되었다. 이 당쟁은 주자학 해석 차이로까지 번져, 동인은 이황의 학설을 지지하는 주리파가 많았다.
동인은 주로 신진 학자로 구성되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도 관계가 있었다. 류성룡, 이산해 등이 중심 인물이었으며, 1584년 동인이 득세하면서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7] 학문적으로는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 강원에 기반을 두었으며,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선조 때 처음 등용된 신진 관료들이 중심 세력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시작되자 당시 대사헌 이이는 김효원, 심의겸 양쪽을 지방으로 물러나게 했고, 동인의 영수 자리에 정인홍을 앉혔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2. 2. 이이와의 갈등
1575년, 이이는 선조의 자문관으로서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멀리 떨어진 고을의 관료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이이의 조언에 따라 김효원을 부령 수령으로, 심의겸을 개성 수령으로 임명했다. 이는 선조가 심의겸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여 동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에 이이는 동인들을 달래기 위해 김효원이 북쪽의 먼 지역을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선조는 김효원을 삼척 수령으로 옮겼다.[11]그러나 조정의 다수를 차지한 동인들은 심의겸에게 분명한 잘못이 있다고 믿었기에, 이이가 갈등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이는 김효원과 심의겸 모두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심의겸은 이량과 그의 추종자들을 조정에서 내쫓아 사림의 5차 숙청을 막았지만, 김효원은 많은 새로운 학자들을 정부에 등용하여 사림 정권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심의겸은 왕비의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간섭했고, 김효원은 선비임에도 불구하고 윤원형과 가까이 지냈다.[12] 따라서 이이는 양측이 그들의 행동과 잘못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믿었다.
이이는 동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선조에게 심의겸을 파면하라는 상소를 작성하여 동인인 정인홍에게 전달하며 내용 수정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정인홍은 상소에 심의겸의 잘못을 나열하는 부분에 "다른 관료들을 모아 당파를 만들었다"는 문구를 추가했다.[13]
선조가 정인홍에게 "다른 관료들"이 누구냐고 묻자, 정인홍은 당시 조정의 유일한 서인이었던 정철과 윤두수, 윤근수 형제라고 답했다. 이이는 정인홍이 자신의 상소 내용을 바꾼 것에 분노하여, 정인홍에게 정철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당파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말하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이이는 고향으로 물러났고, 이로 인해 동인들은 이이에게 격분했다.
이이와 정철은 모두 물러나야 했고, 심의겸은 조정에 머물렀다.[14] 이이는 1580년대 초에 복귀했고, 1582년에는 자신이 서인임을 선언하여 이전의 중립적인 관찰자 입장을 철회했다.[13]
2. 3. 1580년대 동인 정권
1573년경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서로 대립한 일을 계기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15]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동인 이발은 심의겸과 다수의 서인들을 공격했다. 정철, 성혼, 심의겸이 파면되고[16] 1589년까지 5년 동안 확실한 동인 정권이 수립되었다.[17] 이이와 성혼은 동인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며, 종종 파당을 만들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은 이에 반박했지만, 동인들을 효과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18]특히 영의정 (노수신)과 같은 정부의 주요 요직은 주요 동인들이 차지했다.[13] 조헌과 같은 더욱 강경한 서인들은 유배되었다.[19]
1580년대의 동인 정권은 1590년대의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증가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20] 주류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이가 국왕에게 외국 침략에 대비해 10만 명의 군사를 준비하라고 조언했다고 믿고 있다.[21] 그러나 동인의 주요 지도자인 류성룡은 대규모 군대 양성이 백성들에게 가혹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이의 걱정은 1592년 20만 명의 일본군이 부산을 침략했을 때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이 조언이 사실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이이를 더 현명하게 보이게 하고 류성룡을 어리석게 보이게 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20]
2. 4. 정여립의 난
1589년 서인 한준, 박충간, 이축, 한응인은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용하여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민중을 현혹하기 위해 이단 사상인 도참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24] 그러나 정여립과 같은 주요 동인이 동인 정부에 반역하려 했다는 주장의 타당성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24]선조는 정여립을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했다. 정여립은 자신의 서신이나 서적을 파기하지 않고 인근의 죽도로 도주하여 자결했다. 그러나 숙청 이후 동인들은 서인들이 정여립을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반대 이론을 제기했다.[24]
정여립의 반역 혐의는 서인들이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만들었다. 선조는 서인 정철에게 반역 사건 조사를 맡겼다. 당시 영의정인 노수신과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과의 연루로 인해 유배되었다.[18] 정여립이 자결할 때 자신에게 보낸 서신을 파기하지 않아, 이 서신들은 정여립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13]
가장 영향력 있는 동인 중 한 명인 이발은 고문으로 사망했고,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씨 가문은 과거에서 8대에 걸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전라도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13] 이발의 80세 어머니와 여섯 살 된 아들도 1년 후 고문으로 살해당했다. 이발의 조카들 대부분도 죽었다.[25]
또한 정여립이 반란에 더 영향력 있는 존재, '길삼봉'의 존재를 주장한 것이 밝혀졌다. '길삼봉'의 정체나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했다. 정여립의 지인들이 '길삼봉'에 대해 다양한 증언을 했지만, 나이, 키, 외모 등 중요한 부분에서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13]
'길삼봉'의 정체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동안, 서인들은 전주의 영향력 있는 학자이자 주요 동인이었던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동계가 주최한 활쏘기 연습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최영경은 선조 앞에 불려 갔고, 정여립과 어떤 관계도 맺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선조와 정철 모두 최영경이 '길삼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인들의 압력으로 인해 선조는 최영경에 대한 고문을 계속했다. 최영경은 1590년 고문으로 사망했다.[13][26]
이 숙청은 동인과 서인 사이의 영원한 적대 관계를 더욱 심화시켰으며,[27] 특히 1,000명에 달하는 동인들이 숙청 과정에서 죽거나 유배, 파면되었기 때문이다.[28] 정여립, 이발, 최영경이 모두 호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 호남 출신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이 생겼으며;[24][27] 이것이 동학 농민 운동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27]
2. 5. 정권 재장악
1590년, 동인의 이산해와 유성룡, 서인의 정철이 삼정승이었다. 당시 선조는 세자를 책봉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맏아들 임해군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고, 차남 광해군은 총명하여 대부분의 관료들이 광해군을 지지했다.[29]
그러나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총애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30] 정철과 유성룡이 광해군을 세자로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13][30] 이산해는 정철의 성격을 이용하여 서인들을 몰락시키기로 결심하고, 인빈의 오빠인 김공량을 통해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든 후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 말은 선조에게까지 전해졌다.[30]

한편, 동인 유성룡, 이산해, 이성중과 서인 정철은 함께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하기로 약속했지만,[31]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유성룡은 소극적이었고, 정철이 먼저 선조에게 광해군 책봉을 권했다. 선조는 인빈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격분하여 정철을 유배시키고 서인들을 해임하여 동인 정권이 재창출되었다.[31]
같은 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명나라 정복을 위해 조선에 길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32] 선조는 일본과의 전쟁을 우려하여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선조실록》에는 황윤길이 일본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33]
사신들이 돌아왔을 때,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김성일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3]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성일이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기록했다.[13] 김성일이 동인이었고 당시 동인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은 전쟁 대비를 소홀히 했다. 그러나 결국 황윤길의 말이 옳았고, 1592년 도요토미는 20만 명의 병력으로 부산을 침략하여 조선은 큰 혼란에 빠졌다.
2. 6. 남인과 북인의 분열
1590년 정철이 대부분의 서인들과 함께 파면되자 동인들은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할지, 아니면 단순히 유배를 보내야 할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정철을 사형에 처하려 했던 동인들 대부분은 북악산 근처에 살았던 반면, 정철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 반대했던 동인들 대부분은 남산 근처에 살았다.[34] 이러한 지역적 차이로 인해 정철의 사형을 원했던 사람들은 '북인'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사형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13]그러나 정철의 사형 여부에 대한 분쟁이 분열의 유일하거나, 심지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35] 조식의 제자들은 정여립의 숙청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반면, 이황의 제자들은 아무도 잃지 않았다.[13] 더욱이 이황의 제자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류성룡은 숙청을 주도했던 정철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조식의 제자들은 류성룡과 이황의 다른 제자들보다 정철을 사형에 처하기를 더 원했다.[35] 분열의 또 다른 원인은 조식의 가장 총애받는 제자인 정인홍이 동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황과 그의 제자들을 경멸했다는 것이다.[35] 이러한 동인 내의 차이로 인해 이황의 추종자들은 주로 남인이 되었고, 조식의 추종자들은 주로 북인이 되었다.[36]
1598년경에는 동인의 분열이 분명해져, 류성룡과 같은 남인들이 이이첨과 같은 북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37] 그러나 북인들은 여전히 서인들보다는 남인들과 더 가까웠고, 1623년 서인들이 권력을 잡은 후, 살아남은 북인들 대부분은 남인들에게 흡수되었다.[38]
2. 7. 분열 이후

동인 분열 이후 북인이 집권했으며, 북인은 다시 대북(정인홍 등)[41]과 소북(유영경 등)[42]으로 나뉘었다. 조선 선조 재위 말과 조선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대북과 소북이 다투었지만, 1618년 대북이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면서 우위를 점했다.[43] 그러나 1623년 북인 정권은 능양군(인조)과 서인의 쿠데타로 조선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붕괴되었다.[38] 남이웅의 북인 부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인은 곧 남인에 합류했다.[38]
한편, 남인은 조선 현종 시대까지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파벌로 남아있다가, 예송 논쟁을 통해 1674년에 권력을 잡으면서 정부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44] 남인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허적, 윤휴, 유혁연 등 저명한 남인들이 죽을 때까지 다수 파벌로 집권했다.[45]
1689년, 남인 출신 후궁 희빈 장씨가 조선 숙종의 장자를 낳으면서, 숙종은 서인 정권을 남인 정권으로 바꾸었다.[46] 하지만 남인 정권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으로 바뀌었고, 이후 남인은 다시 권력을 잡지 못했다.[47]
3. 주요 인물
4. 사상
사림파 가운데 기존 훈구파에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동인(東人)이 성립되었다. 동인은 학문적으로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 강원에 기반을 두었다.[36] 시기적으로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선조 때 처음 등용된 신진 관료들이 중심 세력이었다.
동인의 사상은 매우 다양하여 조식, 이황, 서경덕의 제자들이 포함되었다.[36] 동인을 형성한 사람들은 조식과 이황을 포함하는 영남 학파의 철학을 주로 따랐다. 반대로 서인의 다수는 이이와 성혼의 기호 학파였다.[39] 이후 남명 학파가 쇠퇴하면서 '영남 학파'라는 표현은 퇴계 학파와 동의어가 되었다.
영남 학파는 네 개의 분파로 나뉘었다.
- 영 학파는 4개 중 가장 오래된 분파로, 김종직을 창시자로 여긴다. 또한 나머지 세 학파의 기초를 형성한 학파이기도 하다. 영 학파는 중국 철학에서 합리성의 개념인 이가 물질인 기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영 학파는 사림의 철학적 기반을 형성했다.[40]
- 조식이 창시한 남명 학파는 경상남도의 철학 학파였다. 남명 학파는 논쟁과 토론을 싫어하고 토론보다 행동을 강조했다. 남명 학파는 북인의 다수를 차지했다. 이 학파는 조식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정인홍의 처형(1623년)으로 붕괴되었으며, 생존자 대부분은 퇴계 학파에 흡수되었다.[40]
- 이황이 창시한 퇴계 학파는 이(합리성)가 절대적이며, 기(물질)는 상대적이라고 믿었다. 또한 이와 기는 완전히 다르며, 인간의 윤리는 이(합리)이고 인간의 감정은 기(물질)라고 믿었다. 후자의 생각은 이이가 비판했는데, 그는 윤리가 감정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믿었다. 퇴계 학파는 남인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18세기까지 기호 학파의 경쟁자로 남았다.[40]
- 장현광의 여헌 학파는 종종 퇴계 학파의 분파로 여겨진다. 그는 이가 기와 같으며 윤리 또한 감정이라고 믿었다. 장현광 자신은 이황의 제자들과 매우 가까웠으며, 그의 제자들은 일반적으로 퇴계 학파를 따르게 되었다.[40]
동인은 주자학의 해석 차이로 조광조의 제자 중 한 명인 이황(퇴계)의 학설을 지지하는 주리파가 많았다. 주리파는 주자학에서 우주의 근본인 기와 리 중, 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학파였다.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될 때 이황, 이언적 계열은 더 온건한 남인으로, 서경덕, 조식 계열은 행동, 실천파적 성격의 북인으로 나뉘었다.
5. 평가 및 영향
동인은 사림파가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정권을 잡은 후, 1575년 관직 임명권을 둘러싸고 심의겸과 김효원 간의 당쟁에서 비롯되었다. 김효원 파의 영수가 한양(서울)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동인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주자학에서 이황(퇴계)의 학설을 지지하는 주리파가 많았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동인과 서인 간의 당쟁이 본격화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1591년 서인이 세자 책봉 문제로 실각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서인 숙청 과정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다.
1590년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가능성을 두고 상반된 보고를 했다. 김성일은 도요토미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황윤길은 침략을 경고했다. 당시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은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다.[13] 결국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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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ark Sibaek's Annals of the Joseon Dynasty-Sukjong
[47]
서적
Park Sibaek's Annals of the Joseon Dynasty-Sukjong
[48]
문서
심의겸 - 기호학파(율곡학파, 우계학파)
[49]
문서
김효원 - 영남학파(퇴계학파, 남명학파) 및 화담학파.
[50]
문서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주로 퇴계학파. [[류성룡]], [[이원익]] 등.
[51]
문서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주로 남명학파. [[이산해]], [[정인홍]] 등.
[52]
문서
광해군 폐위 반대. [[유희분]] 등.
[53]
문서
광해군 폐위와 영창대군 세자옹립 주장. [[유영경]] 등.
[54]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이경전]], [[이이첨]], [[허균]] 등.
[55]
문서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홍여순]] 등.
[56]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유몽인]], [[곽재우]] 등.
[57]
문서
인조반정 주도세력. [[이귀]], [[김류]], [[최명길]], [[심기원]] 등
[58]
문서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김상헌]] 등.
[59]
문서
[[원두표]] 및 그 추종자들
[60]
문서
[[김자점]] 및 그 추종자들
[61]
문서
[[김집]] 및 그 추종자들
[62]
문서
[[김육]] 및 그 추종자들
[63]
문서
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
[64]
문서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윤휴]], [[윤선도]], [[허목]], [[심광수]] 등.
[65]
문서
[[송시열]] 및 그 추종자들
[66]
문서
[[윤증]] 및 그 추종자들
[67]
문서
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박문수]] 등
[68]
문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이인좌]], [[심유현]], [[김일경 (1662년)|김일경]] 등
[69]
문서
척신정치 반대. [[김종수]] 등.
[70]
문서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홍봉한]], [[정후겸]], [[김상로]] 등
[71]
문서
천주교 박해 주장
[72]
문서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
[73]
문서
천주교 박해 반대
[74]
문서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75]
문서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76]
문서
정순왕후 사망 이후 벽파 세력을 전멸시키고 정권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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