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니아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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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364년부터 455년까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 가문이다. 36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3세 등이 이 왕조에 속하며,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딸 갈라가 테오도시우스 1세와 결혼하면서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연결되었다.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면서 왕조는 단절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6세기 말까지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귀족으로 남았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364년부터 455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으로, 4세기 후반의 격동기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시기를 포함한다. 이 시기는 고대 후기에 해당하며,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율리아누스의 사망 이후 시작되어 제국 역사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콘스탄티누스 가문과의 결혼(예: 그라티아누스와 콘스탄티아,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갈라)을 통해 왕조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그의 동생 발렌스가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황제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혼인을 통해 관계를 맺기도 했다. 왕조의 주요 황제 및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2. 역사
왕조의 창시자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364년 군대의 추대로 황제가 된 후,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했다. 이는 점차 제국의 동방과 서방이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395년)에는 이러한 분열이 영구화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시대에는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3세 등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했으며, 이는 전통적인 황제의 이미지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갈라 플라키디아와 같이 황실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라인강과 도나우강 국경 너머 게르만족의 대규모 이동(프랑크족, 알레만니족, 고트족 등)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위협 등 끊임없는 외부의 압력에 시달렸다. 또한 마그누스 막시무스나 에우게니우스와 같은 내부의 찬탈자들과 잦은 내전으로 제국의 힘은 계속 약화되었다. 왕조 말기에는 훈족의 아틸라가 제국을 크게 위협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는 율리아누스의 짧은 고대 로마 종교 부흥 시도 이후 기독교가 다시 제국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았으나, 기독교 내부에서는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의 한 분파인 호모이오이우스파 사이의 신학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비교적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으나, 동생 발렌스는 호모이오이우스파를 적극 지지했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동방에서는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발렌스가 전사하면서 일찍 막을 내리고 테오도시우스 왕조로 이어졌지만, 서방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 호노리우스의 통치 기간을 거친 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외손녀인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455년 사망할 때까지 왕조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암살되면서 왕조는 실질적으로 종말을 맞았고, 이후 서로마 제국은 급격한 혼란에 빠져 476년 멸망에 이르게 된다.
2. 1. 왕조의 성립과 발전 (364년 ~ 392년)
364년 서로마 제국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원정 중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1년도 채 안 되어 사망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군대와 관리들은 니케아에 모여 새로운 황제를 물색했고, 당시 스쿠타리 제2사단 사령관이었던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364년 2월 25일(또는 26일) 니케아에서 발렌티니아누스 1세로 즉위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년~375년)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병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동생 발렌스(재위 364년~378년)를 364년 3월 28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동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두 형제는 제국을 나누어 발렌티니아누스는 서방을, 발렌스는 동방을 통치하기로 했다. 이는 서방은 라틴어, 동방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으며, 행정과 군사 구조도 분리되어 점차 지역화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트리어를 중심으로 통치했고, 발렌스는 안티오크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갔다. 365년 두 형제는 처음으로 로마 집정관이 되었다. 이는 제국의 두 부분이 실질적으로 분리된 첫 사례였으나, 집정관 임명권은 발렌티니아누스가 우선권을 가졌다.
"임페라토르들 카이사르, 우리의 주 발렌티니아누스와 발렌스, 가장 화합하는 형제들, 가장 위대한 승리자들과 트리움파토르들, 그리고 영원한 아우구스투스들…"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승리 칭호를 받았다. 368년에는 게르마니아, 알레만니, 프랑크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알레만니쿠스 막시무스', '프랑키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고, 369년에는 발렌스가 고트족에 대한 승리로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고 5주년 기념제를 기념했으며, 발렌티니아누스 역시 같은 해 5주년 기념제를 지내고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다. 두 형제는 370년과 373년에도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시조인 그라티아누스(Gratianus Funarius)는 판노니아 세쿤다 속주 빈코프치의 키발라에 출신으로, 로마군 고위 장교이자 아프리카 총독이었다. 그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321년생)와 발렌스(328년생) 역시 키발라에 출신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장남 그라티아누스는 359년 시르미움에서 첫 부인 마리나 세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367년 여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병에 걸리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고, 회복 후 그는 8살 된 아들 그라티아누스를 8월 27일 아미앵에서 관례적인 '카이사르'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공동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재위 367년~383년).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은 수사학자 아우소니우스였다. 370년경 마리나 세베라가 사망하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유스티나와 재혼했고, 371년 가을 둘째 아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낳았다. 374년, 15세의 그라티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13세 딸 콘스탄티아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계를 강화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365년에서 368년 사이 로마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금화와 은화의 품질을 관리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세금 징수를 개선하고 재정 지출에 신중을 기했다. 종교적으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정통 니케아파 기독교인이었으나 교회 분쟁에는 비교적 무관심하여 이교도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그의 두 번째 부인 유스티나는 아리우스파의 한 분파인 호모이오이파 신자였고, 발렌스 역시 호모이오이파를 적극 지지하여 364년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추방하고 아리미눔 공의회와 셀레우키아 공의회의 교령을 옹호했다. 그럼에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이단 종파와 부도덕한 성직자들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고, 마니교 집회를 금지했으며 도나티즘에 반대하는 법률도 만들었다.
375년 11월 17일,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판노니아의 브리게티오(쇠뉴)에서 콰디족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 뇌졸중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382년 2월 21일 성 사도 교회의 콘스탄티누스 능묘에 안장되었고, 사후 신격화되어 Divus Valentinianus Senior|신성한 발렌티니아누스 장로la로 불렸다. 그의 죽음으로 서방 제국은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유일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으나, 발렌티니아누스의 장군들은 그의 네 살배기 둘째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375년 11월 22일 아퀸쿰(부다페스트)에서 공동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다.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파 어머니 유스티나의 영향 아래 있었고, 실권은 그라티아누스의 스승 아우소니우스와 군사령관 메로바우데스가 장악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서방 제국의 최고 황제로 남았다.
한편 동방에서는 훈족의 서진으로 고트족이 로마 제국 영토로 밀려 들어오는 등 외부 압력이 거세지고 있었다. 376년, 고트족의 일파인 테르빙기족과 그레우퉁기족이 발렌스 황제에게 도나우강 이남 정착을 허가받았으나, 로마 관리들의 학대와 식량 부족으로 반란을 일으켰다(376년~382년 고트 전쟁). 378년, 그라티아누스는 서방의 알레만니족을 격퇴하고 발렌스를 돕기 위해 동방으로 향했으나, 발렌스는 그라티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8월 9일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근처에서 고트족과 전투를 벌였다. 이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패했고, 발렌스 황제는 전사했다. 이 전투는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 최악의 군사적 재앙으로 평가된다. 발렌스 역시 사후 신격화되어 Divus Valens|신성한 발렌스la가 되었다.
발렌스의 죽음으로 19세의 그라티아누스가 제국 전체의 최고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그는 제국 전체를 혼자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페인에 은퇴해 있던 테오도시우스를 불러 379년 1월 19일 시르미움에서 동방의 공동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1][2][3] 테오도시우스는 고갈된 군대를 재건하고 고트족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382년 10월 3일 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포이데라티로서 제국 내에 정착시켰다.[3]
383년, 브리타니아의 로마군 사령관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군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해협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했고, 그라티아누스의 군대는 그를 배신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알프스로 도망쳤으나 루그두눔(리옹) 근처에서 막시무스의 부하 안드라가티우스에게 체포되어 383년 8월 23일 24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막시무스는 트리어에 궁정을 세우고 그라티아누스의 영토를 장악했다. 그라티아누스는 Divus Gratianus|신성한 그라티아누스la로 신격화되었다.
그라티아누스 사후, 12세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재위 375년~392년)가 서로마의 유일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동방 문제에 집중하며 383년 장남 아르카디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켰고,[1] 384년 여름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마그누스 막시무스 사이의 평화 협정을 중재했다.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 스페인, 갈리아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일리리쿰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387년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어머니 유스티나와 함께 테살로니키로 도망쳐 테오도시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누이 갈라와 결혼하고,[1] 388년 여름 군대를 이끌고 막시무스를 포에토비오 전투에서 격파하고 8월 28일 아퀼레이아에서 처형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를 물리친 후 사실상 제국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391년 동방으로 돌아가면서 19세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명목상의 서방 황제로 트리어에 남겨두고, 프랑크족 출신 장군 아르보가스트를 그의 후견인이자 실권자로 임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르보가스트를 해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392년 5월 15일 갈리아의 비엔느에서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살인지 아르보가스트에 의한 암살인지는 불분명하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메디오라눔에 묻혔고, Divae Memoriae Valentinianus|신성한 기억의 발렌티니아누스la로 신격화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남계는 단절되었으나,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딸 갈라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 갈라 플라키디아를 통해 혈통은 이어져 발렌티니아누스 3세까지 연결되었다.
2. 2.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관계 (392년 ~ 455년)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는 각각 동쪽과 서쪽의 부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양쪽을 모두 다스린 마지막 황제였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첫 번째 아내인 아엘리아 플라킬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었으며, 그들의 누이인 풀케리아도 있었다. 386년 아엘리아가 사망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유스티나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여동생인 갈라와 387년 결혼하여 자신의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갈라와의 사이에서 그는 그라티아누스(388/389년 출생)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394년 유아기에 사망했고, 딸 아엘리아 갈라 플라키디아(392/393년 출생)를 낳았다. 또 다른 아들인 요한네스(Ioannesla)는 394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갈라는 394년 4월 말에 사망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치는 즉시 도전을 받았다. 아르보가스트는 황제의 권력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비로마인이라는 배경 때문에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대신 8월 22일 아르보가스트의 지시에 따라 ''마기스터 스크리니''(magister scrinii)이자 ''비르 클라리스시무스''(vir clarissimus)인 에우게니우스(재위 392년~394년)가 루그두눔에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었다. 막시무스처럼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승인을 받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트리어와 밀라노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의 이미지가 새겨진 새로운 주화를 주조했으며, 암브로시우스를 협상자로 영입하려고 시도했다.
폴레미우스 실비우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의 세 번째 집정관직인 393년 1월 23일에 그의 두 번째 아들인 호노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을 때 에우게니우스를 인정할 것이라는 어떤 희망도 사라졌다. 에우게니우스의 불법성을 이유로 들었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4년 9월 6일 프리기두스 전투(비파바 강)에서 에우게니우스를 패배시켰고, 395년 1월 1일 호노리우스는 메디오라눔에 도착하여 승리 축하 행사가 열렸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5년 1월 17일 메디오라눔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2월 25일에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395년 11월 8일 성 사도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는 신격화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에 사망하자 제국은 그의 아들들 사이에 영구적으로 분할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던 두 아들은 각각 17세와 10세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후견인의 통제하에 있는 명목상의 지도자였다. 이 후견인들은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반달족 출신으로 테오도시우스의 군대 최고 사령관(comes et magister utriusque militiae praesentalis|전군 총사령관la)이었던 스틸리코였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의 조카딸인 세레나와 결혼하여 왕조와 동맹을 맺었고, 자신이 제국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할은 동방 궁정에서 거부되었다. 그는 딸인 마리아와 그녀의 사망 후 테르만티아를 호노리우스 황제와 결혼시켜 왕조 내 자신의 지위를 더욱 강화했다. 이 기간 동안 서방 군대의 야만화가 가속화되었고, 야만족 부족들이 로마 땅에 대규모로 정착했다. 이들은 주로 게르만 부족들이었으며, 갈리아에는 서고트족과 부르군트족이 있었다. 브리타니아는 버려졌고, 이탈리아 자체는 야만족 세력의 침투에 점점 더 취약해졌으며, 점차 제국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 정부에 가까워졌고, 대립보다는 타협이 더 선호되는 외교 정책이 되었다. 반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법정은 동쪽의 페르시아 이웃들과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지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서쪽 전선에서는 알라리크 1세의 세력에 취약했다. 군사 행정 개혁으로, 빈번히 게르만족인 전군 총사령관(magister utriusque militiaela)이 등장하여, 황제를 그들의 통제하에 있는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두 제국은 최악의 경우 공공연히 적대적이었고, 최선의 경우에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갈라 플라키디아 (388년경–450년)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갈라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손녀이며, 어린 황제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의 이복자매이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 갈라는 387년 테오도시우스와 결혼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388년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갈라와 그녀의 딸은 콘스탄티노플로 갔지만, 의붓아들 아르카디우스가 그녀를 거부하여 테오도시우스는 391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와야 했다.
시네시우스의 ''제61서한'' (402년경)에 따르면, 갈라와 그녀의 딸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동방 프라이토리아 총독인 아블라비우스의 재산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궁전을 하사받았다. 테오도시우스는 393년 1월 23일 여덟 살 된 막내아들 호노리우스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가장 고귀한 소녀"(nobilissima puellala)라는 칭호와 함께 domina nostra|우리 주la라는 명예칭호를 받았다. 플라키디아는 세속 및 종교 문제에 대한 고등 교육을 받았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는 394년 출산 중 사망했다. 이후 그녀는 아버지의 조카인 세레나와 그녀의 남편 스틸리코에게 양육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세레나의 아버지 호노리우스가 사망하자 세레나를 입양하여 스페인의 가족 영지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왔다. 테오도시우스는 394년 9월 6일 에우게니우스를 패배시킨 후 병이 들었고, 세레나는 호노리우스, 플라키디아와 함께 밀라노로 여행하여 그와 합류했다. 그는 호노리우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스틸리코를 ''마기스터 밀리툼''(magister militum)으로 승진시켰지만,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는 사망했다. 플라키디아는 당시 몇 살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틸리코는 그 후 자신이 어린 황제들의 후견인(parens principumla)으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장례식 후, 세레나와 아이들은 그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호위했고, 11월에 성도 사도 교회에 안치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사후, 스틸리코는 두 딸을 호노리우스와 차례로 결혼시키고 아들인 유케리우스를 플라키디아와 약혼시킴으로써 자신의 왕조적 지위를 강화했다. 그의 아내 세레나는 호노리우스의 비공식 섭정으로서 사실상 황후 역할을 했다. 플라키디아는 초기 몇 년 동안 밀라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서고트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인해 궁정은 402년에 더 안전한 남쪽 라벤나로 이동했다. 하지만 로마를 자주 방문했는데, 스틸리코와 세레나도 로마에 저택을 유지했다.
한편, 스틸리코의 명성은 쇠퇴하고 호노리우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호노리우스는 408년 라벤나에서 유케리우스와 세레나와 함께 그를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플라키디아는 로마에 있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갈라 플라키디아는 로마 상원의 세레나 처형 결정을 승인했다. 이 모든 일은 서고트족의 진격을 배경으로 일어났는데, 그들은 408년과 409년에 로마를 포위 공격했고, 마침내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409년 또는 410년에 십대였던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고트족에게 붙잡혀 이탈리아 남부를 거쳐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알라리크가 죽고 아타울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사실상 인질이었던 플라키디아는 그 후 3년 동안 서고트족과 로마인 사이의 협상에서 교섭 카드가 되었다. 플라키디아와 그녀의 납치범들은 결국 412년 봄에 남부 갈리아로 돌아왔다.
로마 궁정과 서고트족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협상 중에, 플라키디아는 아타울프와 결혼했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그들은 414년 1월 나르본(Narbo)에서 결혼했는데, 그곳은 아타울프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도미티아 가도(Via Domitia)에 그의 궁정을 설립했던 곳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녀는 그를 테오도시우스라고 불렀다.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지휘 아래 나르본에 대한 해상봉쇄로 대응했다. 서고트족은 그 해 말까지 남쪽으로 콜로니아 파벤티아(바르셀로나)로 후퇴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곳에서 그들을 다시 공격했고, 415년 여름 아타울프는 살해당하고 시게리크가 그의 뒤를 이었으며, 유아였던 테오도시우스는 죽었다. 7일 만에 시게리크 자신도 살해당하고 왈리아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백성을 위한 식량이 절박하여 416년 여름 플라키디아를 식량과 조약과 맞바꾸었다. 그 조약은 빠르게 히스파니아를 점령하고 있던 다른 야만족들에 맞서 서고트족을 모집했다. 그들은 이 일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호노리우스는 418년에 그들을 남부 갈리아에 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단계에서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로 축소되었지만, 서일리리쿰, 갈리아, 히스파니아에 대한 지배는 미약했다.
테베의 올림피오도로스에 따르면 갈라 플라키디아는 417년 1월 1일에 콘스탄티우스와 강제로 결혼하여 라벤나로 돌아왔다. 그들의 첫째 아이는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호노리아)였고, 1년 남짓 후인 419년 7월 4일에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태어났다. 421년 2월, 후계자가 없었던 호노리우스 황제는 마지못해 콘스탄티우스를 콘스탄티우스 3세(재위 421년)로서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켰고, 갈라 플라키디아는 남편과 호노리우스에 의해 아우구스타로, 발렌티니아누스는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노빌리시무스''(nobilissimus)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칭호들은 동방 궁정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콘스탄티우스는 7개월 만인 421년 9월에 사망했다.
플라키디아와 호노리우스 황제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각자의 지지자들이 라벤나 거리에서 충돌하면서 플라키디아는 422년에 가족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이전에 가까운 사이였던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이유는 여러 사료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사후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그들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정치 및 종교 문제에 개입하여, 예를 들어 로마 교황직을 둘러싼 분쟁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호노리우스가 423년에 사망하면서 갈라 플라키디아가 서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지만, 동로마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동로마 궁정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 아르카디우스(재위 383년~408년)가 408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2년~450년)가 계승했는데, 그 또한 아직 어린 황제였지만 이제는 22세가 되어 자신을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여겼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곧 프리미케리우스 노타리오룸(primicerius notariorum) 요안네스(재위 423년~425년)라는 찬탈자가 등장하여 서로마의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면서 공백이 빠르게 채워졌다. 그러자 동로마 궁정은 가문을 고려하여 콘스탄티우스, 플라키디아, 그리고 그들의 여섯 살 난 아들을 소급 인정하고, 424년 초 서로마에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를 복원해야 했다. 테오도시우스는 424년 10월 23일 발렌티니아누스를 카이사르로 격상시켰다. 플라키디아와 테오도시우스의 연합군은 425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요안네스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그 후 1주년 기념일에 로마에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년~455년)로 선포되었고, 플라키디아는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세 살 난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발렌티니아누스와 약혼시켜 제국 전역의 가계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이 무렵 서로마의 영향권은 이탈리아와 경제적으로 전략적인 북아프리카 지방으로 축소되었다. 여섯 살짜리 명목상의 황제가 있었기에 실권은 그의 어머니와 세 명의 주요 군 지휘관에게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중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433년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아 자신을 ''파트리키우스''(patricius)로 임명했다. 이러한 싸움으로 제국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많은 이웃 민족들이 빈번하게 침략했다. 그러나 유일한 군 지휘관으로 등장한 아에티우스는 430년대 후반에 일부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439년 반달족에게 카르타고가 함락되고 이어 시칠리아 침공이 이루어졌으며, 441년 다뉴브 강을 건너 훈족의 침입이 잇따르면서 또 다른 위기가 초래되었다. 440년대 대부분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에 소비되었고, 영토와 세수 기반의 점진적인 상실은 라벤나의 중앙 정부를 계속 약화시켰다.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 호노리아는 426년 아우구스타(Augusta) 칭호를 받았으나, 그녀가 영지 관리인인 에우게니우스와 간통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주장으로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에우게니우스는 즉시 처형되었고 호노리아는 투옥된 후 상원의원과 약혼했다. 이에 호노리아는 훈족 지도자 아틸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신과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제공했다. 아틸라에게는 발칸 반도의 거점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외교 공세를 펼친 후, 아틸라는 451년 초 다뉴브 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여 모곤티아쿰(마인츠)에서 라인 강을 건너 벨기카와 북부 갈리아를 케나붐(오를레앙)까지 약탈했다. 아에티우스는 6월 말이나 7월 초 카탈라우눔 전투가 벌어진 현재의 샬롱 앙 샹파뉴 근처에서 그와 맞섰다. 아에티우스가 승리하여 아틸라는 판노니아로 후퇴했다. 이듬해 아틸라는 베네티아와 북부 이탈리아를 휩쓸고 아퀼레이아, 파타비움(파도바), 만투아, 베로나, 브릭시아(브레시아)를 함락했다. 아퀼레이아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아에티우스는 침입자들을 괴롭히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동로마 제국이 아틸라의 측면을 공격하여 그를 다시 한번 철수하게 만들었으며, 이듬해(453년) 사망했다. 아틸라의 죽음
2. 3. 왕조의 몰락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에 그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 왕조 통치의 종식을 의미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454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암살한 후, 불과 몇 달 뒤인 455년 3월 16일에 아에티우스의 근위병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제위는 공석이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죽자 상원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전날 아에티우스의 죽음에 발렌티니아누스와 공모했던 인물이었다. 관례에 따라 그는 즉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의 미망인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동로마 제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 팔라디우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와 결혼시키려 했다. 한편,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다른 딸 플라키디아는 명문 귀족 가문인 아니키아 겐스 출신의 로마 상원의원 올리브리우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남편의 복수를 위해 아프리카의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이세리크는 455년 로마를 약탈하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를 살해했으며(455년 5월 22일),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두 딸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를 카르타고로 잡아갔다. 팔라디우스도 이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이세리크는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 후네리크와 결혼시켰다. 페트로니우스의 죽음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실질적인 종말을 고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통치 기간이 짧고 실제 권력은 군 지휘관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 말기의 "그림자 황제"로 불린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죽자,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 praesentalis) 아비투스는 갈리아에서 서고트족의 지지를 얻어 455년 7월 10일경 아를에서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출신인 그가 갈로-로마인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부여하려 하자 로마에서 인기를 잃었고, 456년 10월 플라켄티아 전투(피아첸차)에서 그의 군사령관 리키메르에게 폐위되었다. 짧은 공위기를 거쳐, 궁정 백작(comes domesticorum) 마요리아누스가 456년 12월 라벤나에서 동로마 제국의 묵인 아래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제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461년 리키메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리키메르는 세베루스 3세를 황제로 세웠다(461년-465년).
세베루스 3세가 죽자, 리키메르는 동로마 제국과 협력하여 안테미우스를 황제로 세웠다(467년-472년).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였고, 그의 딸 알리피아는 리키메르와 결혼하여 리키메르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 서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으며, 프랑크족과 같은 게르만 부족들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한편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와 협상하여 황실 가족의 귀환을 성사시켰고,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플라키디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우도키아는 남편 후네리크와 아들 힐데리크와 함께 아프리카에 남았다.
472년, 제국의 실권을 쥔 리키메르와 안테미우스의 관계가 악화되자, 리키메르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사위이자 플라키디아의 남편인 올리브리우스를 4월에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 이로써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두 딸 모두 황후가 되었다. 안테미우스는 7월 11일에 폐위되고 살해당했다. 그러나 리키메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8일에 사망했고, 올리브리우스도 황제로서 불과 몇 달 만인 11월 2일에 사망했다. 이로써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다만 발렌티니아누스의 후손들은 플라키디아를 통해 6세기 말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올리브리우스의 죽음 이후, 몇몇 단명한 황제들이 제국의 최종적인 붕괴를 지켜보았다. 혼란 끝에 473년 3월 3일 궁정 백작(comes domesticorum) 글리케리우스가 황제로 선포되었으나,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율리우스 네포스를 파견해 그를 폐위시켰다. 네포스는 474년 6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통치도 짧았는데, 자신의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인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475년 8월 라벤나에서 달마티아로 도망쳐 살로나에서 통치를 이어가려 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를 그해 10월 라벤나에서 황제로 내세웠다.
당시 15세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축소된 제국 내 이탈리아 포에데라티(용병)의 지도자인 오도아케르의 위협에 직면했다. 오도아케르는 476년 8월 라벤나로 진격하여 오레스테스를 처형했다. 그 후 군대는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의 왕(rex Italiae)으로 선포했고, 오도아케르는 라벤나로 진격하여 476년 9월 4일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이 사건으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 계보는 사실상 끊어졌다. 로마 원로원은 이를 인정하고 제국의 상징물을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보냈다. 제논은 오도아케르를, 명목상 달마티아에 있는 네포스 황제의 권위 아래 있는,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네포스는 480년 암살될 때까지 달마티아에서 명목상의 황제로 남아 있었다. 네포스가 죽자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합병했으며, 이로써 제논은 명실상부한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만이 로마 제국의 명맥을 잇게 되었으며,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여러 게르만족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3. 역대 황제
인물 재위 기간 또는 활동 기간 비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 364년 ~ 375년 서로마 제국 황제, 왕조 창시자 발렌스 364년 ~ 378년 동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 그라티아누스 367년 ~ 383년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2세 375년 ~ 392년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의 이복동생 테오도시우스 1세 379년 ~ 395년 동로마 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임명, 갈라와 결혼하여 왕조와 연결 갈라 플라키디아 년 ~ 45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손녀,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 및 섭정 콘스탄티우스 3세 421년 서로마 제국 황제,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 발렌티니아누스 3세 425년 ~ 455년 서로마 제국 황제, 갈라 플라키디아와 콘스탄티우스 3세의 아들 올리브리우스 472년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와 결혼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혼인을 통해 이어진 인물들을 포함한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의 딸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섭정으로서 왕조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사위인 올리브리우스를 마지막으로 왕조와 직접적인 혈연 또는 혼인 관계를 가진 황제의 계보는 사실상 마무리된다. 각 황제의 자세한 행적과 통치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서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시대 서로마 제국을 다스린 주요 황제는 다음과 같다.
황제 | 재위 기간 |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364년 ~ 375년 |
그라티아누스 | 375년 ~ 383년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375년 ~ 392년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425년 ~ 455년 |
'''참고:''' 발렌스(재위 364년 ~ 378년)는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으나,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형제로서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재위 기간 동안 관례적인 황제와 아우구스투스 외에도 여러 칭호를 받았다. 두 사람은 368년, 두 번째 집정관직에 오른 해에 게르만족, 알레만니족, 프랑크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la), ''알레만니쿠스 막시무스''(Alamannicus Maximusla), ''프랑키쿠스 막시무스''(Francicus Maximusla)라는 로마 승리 칭호를 받았다. 369년 발렌스는 ''고티쿠스 막시무스''(Gothicus Maximusla)라는 승리 칭호를 받고 그의 5주년 기념제(퀸쿠엔날리아, quinquennaliala)를 기념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역시 369년 2월 25일에 5주년 기념제를 기념하며 같은 칭호를 받았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370년에 세 번째로 집정관이 되었다. 373년은 두 사람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공동 집정관을 지낸 해였다. 한편, 373년 또는 374년에 테오도시우스(당시 마기스터 에퀴툼의 아들)는 모이시아 프리마 주의 둑스(dux)로 임명되었다. 발렌스는 374년 3월 29일에 그의 10주년 기념제(데켄날리아, decennaliala)를 기념했다. 그의 아버지(마기스터 에퀴툼)가 사망하자, 모이시아 프리마의 둑스였던 젊은 테오도시우스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은퇴하여 376년 첫 번째 아내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와 결혼했다. 그라티아누스의 네 번째 집정관직은 377년이었다. 발렌스의 여섯 번째 집정관직은 378년이었으며, 이때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공동으로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3. 2. 동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판노니아 세쿤다 지역 출신으로, 왕조의 시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Funarius)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 형제가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이 중 동생인 발렌스가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재위 364년 - 378년) 발렌스는 328년 빈코프치 인근 키발라에에서 태어나 형과 마찬가지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발렌스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갈라테스는 366년 1월 18일에 태어나 369년 집정관이 되었으며, "가장 고귀한 아이"(nobilissimus puerla)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370년경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현재 카이세리)에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발렌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중요한 건축 사업이 진행되었다. 370년 4월 9일에는 콘스탄티누스 능묘 옆에 있는 성 사도 교회가 봉헌되었으며, 375년에는 발렌스의 딸 이름을 딴 카로사 목욕탕(Thermae Carosianaela)이 문을 열었다.
발렌스 사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재위 379년 - 395년)
'''동로마 제국 황제'''
4. 가계도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판노니아 출신의 그라티아누스 후나리우스의 두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1][2][3]
첫째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364년부터 375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다.[5] 그는 첫 번째 아내 마리나 세베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그라티아누스'''를 낳았다. 그라티아누스는 376년부터 383년까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라티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딸인 콘스탄티아와 첫 번째로 결혼했고, 이후 라에타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두 번째 아내인 유스티나와의 사이에서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딸 갈라를 두었다.[4]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형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그리고 그라티아누스 사후에는 단독으로 375년부터 392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있었다. 딸 갈라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이후 로마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결혼하여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연결되었다.[6]
둘째 아들인 '''발렌스'''는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364년부터 378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알비아 도미니카와 결혼하여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갈라테스를 낳았으나, 갈라테스는 요절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갈라의 결혼을 통해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혈연관계를 맺게 된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푸스와 첫 번째로 결혼했고[7], 이후 서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25년부터 455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며, 그가 사망하면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직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하여 두 딸 에우도키아와 플라키디아를 두었다. 에우도키아는 반달족의 왕 후네릭과 결혼했고, 플라키디아는 472년에 잠시 서로마 황제가 된 올리브리우스와 결혼했다.
5. 평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꾸준히 확산되었다. 36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할 무렵에는 제국 인구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된 상태였다. 이 시기 교회는 점차 조직화되고 계층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으며, 주교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특히 귀족이나 쿠리아(curiales) 계층 출신 인물들이 주교직을 맡는 경우가 늘어났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니케아 신앙을 지지했던 암브로시우스가 있다.[1] 그는 갈리아 총독의 아들이었으며, 원래 리구리아-아이밀리아 합병 주의 콘술라리스(consularis)였으나 밀라노 주교(374-397년)로 선출되었다.[2] 암브로시우스의 전임자였던 아리우스파의 아욱센티우스(Auxentius, 355-374년)가 사망하자 밀라노에서는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 기독교인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는데, 암브로시우스는 서로마군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기도 했다.[3]
로마 주교들, 예를 들어 다마수스 1세(366-384년) 등은 점차 더 큰 권위를 확보해 나갔지만, 후대 교황들이 누렸던 절대적인 권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동방 제국의 기독교 상황은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방보다 더 복잡했다. 동방 황제들은 교회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사도 계승을 주장하며 우위를 내세우는 세 개의 주요 주교좌(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가 존재했다. 이들은 새롭게 부상하며 제국 관료제와 함께 성장하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 권력을 다투었다.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이러한 복잡한 종교적 환경 속에서 통치해야 했다.[4]
5세기 역사가 소조메누스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정통 니케아파 기독교인이었으나, 당대의 교회 분쟁에는 대체로 거리를 두었다.[5] 그의 이러한 세속적인 태도는 특히 이교도들에게 환영받았다.[6] 반면,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유스티나는 열성적인 호모이오이파(homoian), 즉 아리우스파의 한 분파 신자였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처럼 유스티나 역시 판노니아 출신이었는데, 이 지역은 서부 발칸 반도와 더불어 니케아 신학이 아닌 다른 신학의 중심지였으며, 갈리아나 이탈리아의 니케아파와는 대조를 이루었다.[7]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관용 정책에도 한계는 있었다. 그는 이단으로 간주되던 종파나 부도덕한 성직자들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6] 372년에는 로마에서 마니교도들의 집회를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으며, 이는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기록되어 있다.[5] 또한 373년에는 주교들 사이의 도나티즘 문제에 관해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5]
한편, 동생인 발렌스 황제는 다른 종교적 성향을 보였다. 5세기 역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발렌스가 젊은 시절 ''프로텍토레스''(protectores)로 복무할 때,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재위 361-363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 종교 의식을 거부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발렌스는 호모이오이파(homoian), 즉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364년 즉위 직후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발렌스는 368년 콘스탄티우스 2세 시기에 열렸던 아리미눔 공의회(서방)와 셀레우키아 공의회(동방)의 결정을 지지했는데, 두 공의회 모두 아리우스파 교리를 채택한 바 있다.[6]
참조
[1]
논문
Kienast et al 2017
[2]
논문
Williams & Friell 1994
[3]
논문
Salisbury 2015
[4]
문서
Justina's Marriage to Magnus Magnentius
[5]
문서
Children of Valentinian I and Justina
[6]
문서
Children of Theodosius and Galla
[7]
문서
Son of Theodo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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