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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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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 제국 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4세기 성 니니안이 최초의 스코틀랜드 사제로 기록되었다. 켈트 교회와 로마 전례 사이의 차이점,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가톨릭 탄압,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지하 교회의 존재, 그리고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의 증가 등 다양한 시련을 겪었다. 20세기에는 종파 갈등과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지지 등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는 2개의 대교구와 6개의 교구가 있으며, 가톨릭 신자 수는 약 84만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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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교회 - 지극히 거룩하신 구속주의 아들들회
    지극히 거룩하신 구속주의 아들들회는 1988년 창설된 보수적인 가톨릭 단체로, 수도원 이전과 교회법적 인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화해 시도, 아동 엑소시즘 논란으로 인한 사목 활동 중단 등의 변화를 겪으며 월간지 발행 및 구속회 홍보 활동을 진행해왔다.
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교회
일반 정보
"후안 코레아 데 비바르의 '성 안드레아의 순교' (1540–1545)"
고유 명칭 (게일어)An Eaglais Chaitligeach ann an Alba (안 에글라이스 카흘리게흐 안 알바)
고유 명칭 (스코트어)Catholic Kirk in Scotland (캐슬릭 커크 인 스코틀랜드)
유형가톨릭교회
소속라틴 교회
성경성경
신학가톨릭 신학
정치 체제주교제
관할BCOS
교황프란치스코
스코틀랜드 주교회의 의장휴 길버트
교황청 대사미겔 마우리 부엔디아
지역스코틀랜드
언어영어, 라틴어
설립자성 니니안, 성 문고, 성 콜룸바
설립 시기기원후 200년대 경: 로마 브리튼의 기독교 기원후 400년대 경: 중세 기독교
분리스코틀랜드 교회
신자 수 (2011년)841,053명
웹사이트bcos.org.uk
역사
기원로마 브리튼의 기독교와 중세 기독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감
종교 개혁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신앙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특히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군도에서 유지됨.
법적 지위 회복1793년, 가톨릭 신자들은 법적 지위를 회복함.
이민19세기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대규모 아일랜드인 이민이 유입되어 스코틀랜드 가톨릭교회의 규모가 크게 증가함. 이탈리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이민자들이 유입됨.
교구
교구세인트 앤드루스-에든버러 대교구
글래스고 대교구
애버딘 교구
아가일 앤드 아일스 교구
던켈드 교구
갤러웨이 교구
머더웰 교구
페이즐리 교구
관구2개의 관구 (세인트 앤드루스-에든버러 관구, 글래스고 관구)로 구성됨.
인구 통계
2011년 스코틀랜드 인구 조사스코틀랜드 인구의 약 16%가 가톨릭 신자임.
분포가톨릭 신자는 특히 글래스고, 서부 스코틀랜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
변화최근 수십 년 동안 가톨릭 신자 수는 감소하는 추세임.
사회적 영향
교육가톨릭 교회는 스코틀랜드 전역에 걸쳐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 교육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
자선 활동가톨릭 자선 단체는 빈곤 퇴치, 노숙자 지원, 난민 지원 등 다양한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
논란 및 도전 과제
아동 학대가톨릭 교회는 아동 학대 사건으로 인해 비판을 받아왔으며, 피해자 지원 및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종교 간 관계가톨릭 교회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비롯한 다른 종교 단체와 종교 간 대화 및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
세속주의스코틀랜드 사회의 세속화 추세는 가톨릭 교회에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하고 있음.
추가 정보
관련 인물성 마가렛
존 던스 스코투스
성 존 오길비
관련 주제스코틀랜드의 종교
스코틀랜드의 기독교
영국의 가톨릭교회
아일랜드의 가톨릭교회

2. 역사

스코틀랜드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로마 제국 지배 시대로 알려져 있다. 4세기 말 컴브리아 출신의 성 니니안이 최초의 스코틀랜드 사제로 여겨진다. 6세기에는 아일랜드 켈트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성 콜룸바가 아이오나 수도원을 세웠다. 중세 시대에는 프란체스코회 소속 신학자 요하네스 둔스 스코투스가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비판하고 의지주의를 주장했다.

16세기에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존 녹스패트릭 해밀턴조지 위샤트이신칭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칼뱅주의를 스코틀랜드에 정착시키려 했다.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스코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인들은 장로교로 개종했고, 스코틀랜드의 가톨릭은 비주류가 되어 불법화되었다. 하일랜드 지역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강하게 유지되었으며, 자코바이트 봉기 이후 1793년에 이르러서야 가톨릭교도에게도 프로테스탄트와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다.

19세기에는 아일랜드 이민자 유입으로 가톨릭 인구가 증가했다.

2. 1. 초기 기독교 전래

기독교는 현재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로마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이 지역에 처음 전파되었을 수 있다. 로마 제국 브리타니아 속주의 북쪽 변방에 주둔했었다.[12]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에 의해 로마 수비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성 문고, 성 니니안에 대한 자료, 그리고 초기 웨일스어 문학 작품(예: ''Y Gododdin'', ''탈리에신의 서'', ''아네린의 서'')에서 기독교가 스코틀랜드의 프로토-웨일스어를 사용하는 왕국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웨일스어로 여전히 Hen Ogledd(문자 그대로 "옛 북쪽")라고 불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족 침략으로부터 도망온 난민들과 함께 서쪽으로 서서히 밀려났다.[13] 현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앵글로-색슨족, 게일족은 전통적으로 부족 사회였으며, 주로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성 콜룸바와 바네인 막 브레난드, 아이오나 수도원의 창립자이자 초대 수도원장 두 명, 에그의 도난의 성 도난, 뱅고어 수도원의 수도승이자 웨스터 로스의 애플크로스 수도원 창립자인 성 마엘 루바와 같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전파받고 개종했다. 이 선교사들은 학교, 도서관, 사제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넓은 지역을 섬기는 수도원 기관을 설립하는 경향이 있었다.[14]

2. 2. 중세 시대

800년경 아이오나 수도원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켈스의 서 삽화


기독교는 현재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로마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이 지역에 처음 전파되었을 수 있으며, 로마 제국 브리타니아 속주의 북쪽 변방에 주둔했었다.[12] 마그누스 막시무스에 의해 383년 로마 수비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성 문고, 성 니니안에 대한 자료, 그리고 초기 웨일스어 문학 작품(예: ''Y Gododdin'', ''탈리에신의 서'', ''아네린의 서'')에서 기독교가 스코틀랜드의 프로토-웨일스어를 사용하는 왕국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웨일스어로 여전히 Hen Ogledd(문자 그대로 "옛 북쪽")라고 불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족 침략으로부터 도망온 난민들과 함께 서쪽으로 서서히 밀려났다.[13]

현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앵글로-색슨족, 게일족은 전통적으로 부족 사회였으며, 주로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성 콜룸바와 바네인 막 브레난드(아이오나 수도원의 창립자이자 초대 수도원장), 에그의 도난의 성 도난, 뱅고어 수도원의 수도승이자 웨스터 로스의 애플크로스 수도원 창립자인 성 마엘 루바와 같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전파받고 개종했다. 이 선교사들은 학교, 도서관, 사제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넓은 지역을 섬기는 수도원 기관을 설립하는 경향이 있었다.[14]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독특한 켈트 교회를 확인했으며, 가톨릭, 개신교,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논쟁에서 유일한 정당한 상속자라고 주장해 왔다. 켈트 교회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주의에 대한 태도가 더 관대했고, 다른 형태의 수도원 삭발이 사용되었으며, 성 도미니크가 묵주를 발명하기 전에 Pater Noster cord라고 알려진 염주가 사용되었으며, 부활절 계산을 위해 음력 방법을 사용했다. 프랭크 오코너는 아일랜드해 양쪽에서 수도원장들이 종종 주교보다 더 중요했던 이유를 "주교 제도에 의해 통치되는 교회는 부족 사회에서는 모순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작고 약하더라도, 어떤 부족도 다른 부족의 주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조직을 통해 각 부족은 자체 수도원을 가질 수 있었고, 더 큰 부족은 원하는 만큼 많은 수도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15]

성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공유된 믿음,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존경, 전례 언어로서의 교회 라틴어 사용에도 불구하고, Stowe Missal과 같은 1차 자료에 의해 기록된 바와 같이, 켈트 전례와 주류 로마 전례 사이에는 종종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16][17] 또한 이 시대의 전례 음악 필사본에서 갈리아 전례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라틴어 켈트 성가의 독특한 형태의 증거가 남아 있다.[18]

게일 아일랜드의 은둔자 단체인 컬디도 스코틀랜드로 퍼져나가 11세기까지 그들의 존재가 지속되었다. 성 마가렛 (스코틀랜드)의 생애에서 더럼의 터고트,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는 컬디에 대해 "그 당시 스코틀랜드 왕국에는 육신으로는 육신에 따라 살지 않으면서, 격렬한 생활 방식으로 지정된 장소의 작은 집에 갇혀, 땅에서 천사와 소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19]

게일 아일랜드에서 가족 지파에 의해 의도적으로 임명된 데르브핀에서 영주가 교회 토지를 세습적으로 관리하는 에레나그 시스템은 악명 높은 남용으로 이어졌다. 수도원이 서로 싸우고, 코크와 클론퍼트 대성당의 악명 높은 아일랜드 "왕립 수도원장"인 페델미드 막 크림타인은 다른 아일랜드 씨족과 수도원을 상대로 개인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으며, 다른 수도원을 약탈하고 교회 방화했다.[20] 양국의 교회 간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에레나그 시스템은 게일 스코틀랜드로도 퍼져나갔다. 예를 들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의해 허구화된 스코틀랜드의 하이킹 맥베스의 11세기 통치 기간 동안, 하이킹의 가장 큰 국내 적은 그의 삼촌 덩켈드의 크리난, 애솔의 모르메어, 정당하게 결혼한 고 덩컨 1세 (스코틀랜드)의 아버지, 말콤 3세 (스코틀랜드)의 할아버지, 스코틀랜드 왕가 덩켈드 가문의 조상이였다.[21][22][23]

종교 박해가 계속되고 "켈트 교회가 부족 사회에 얼마나 흡수되었는지"와 "지역 세속 통치자들의 통제"에서 독립성을 잃은 것에 반대하는 모 추아 오브 발라와 같은 "로마 가톨릭교도"가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24] 이러한 문제 중 적어도 일부는 7세기 중반까지 아일랜드해 양쪽에서 해결되었다.[25][26] 노르웨이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위한 성공적인 전쟁과 소머레드와 아일스 경의 통치 하에 스칸디나비아 스코틀랜드와 맨 섬의 증가하는 게일화 이후, 교황청이 임명한 주교가 있는 로마 전례의 아일스 교구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27]

말콤 3세가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성녀 마가렛을 맞이하는 모습; 빅토리아 시대 예술가 윌리엄 홀의 벽화 세부


말콤 3세 치세 동안 스코틀랜드 교회는 일련의 개혁과 변화를 겪었다. 그의 헝가리 출신 부인 성 마가렛의 영향으로 대륙 유럽에서의 여왕의 경험에 따라, 교구 주교의 명확하게 정의된 위계와 지역 교회를 위한 교구 구조가 개발되었다.[28] 1286년 왕실 덩켈드 왕가가 단절된 후, 에드워드 롱샹크의 스코틀랜드 침략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이 위계, 수도회, 교구에서 정치적 숙청을 당하고 잉글랜드 성직자로 대체된 것은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였으며, 많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이 교황 요한 22세의 친잉글랜드 정책에 반대하고 아브로스 선언에 서명한 이유 중 일부이다.

배녹번 전투 이후, 개혁된 유럽 대륙 형태의 수도원주의를 도입한 많은 새로운 재단들이 스코틀랜드 교회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재확립하고 더 명확한 교구 구조를 발전시키면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으며,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딸"이 되었지만 대주교 형태의 지도력은 부족했다.[29] 후기 중세 시대 동안,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임권 투쟁과 서방 대분열로 인해 스코틀랜드 왕실은 켈트 교회 시대에 에레나흐 제도를 사용한 스코틀랜드 씨족장들과 마찬가지로, 고위 성직자 임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15세기 말까지 두 개의 대주교구가 설립되었다.[30]

일부 역사가들은 후기 중세 시대에 수도원주의의 쇠퇴를 감지했지만, 탁발 수도사들의 수도사들은 특히 확장되는 자치 도시에서 인구의 영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성장했다. 새로운 성인과 종교적 숭배 또한 번성했다. 14세기 흑사병 이후 성직자 수와 질에 대한 문제, 그리고 후스파 사절 파벨 크라바르의 기독교 이단으로 여겨지는 교리를 퍼뜨리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르네상스는 구텐베르크 혁명으로 인해 고전과 초기 근대 스코틀랜드 문학의 새로운 작품을 포함한 더 넓은 범위의 책의 가용성을 보였다. 이것은 또한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퍼져나간 르네상스 인문주의로 알려진 "신학습"을 퍼뜨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까지 비교적 강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30]

2. 3. 종교 개혁과 가톨릭 탄압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신칭의를 외친 패트릭 해밀턴조지 위샤트와 친밀했던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에 칼뱅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책략을 꾸몄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동군 연합으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 스코틀랜드인은 장로교로 개종했고, 이때 스코틀랜드의 가톨릭은 비주류가 되어 후에 비합법화되었다. 하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강하여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자코바이트 봉기를 거쳐 1793년에 가톨릭교도에게도 프로테스탄트와 동등한 권리가 인정되었다.

루터교 목사 패트릭 해밀턴의 이니셜, 그가 화형된 장소의 포장돌에 새겨져 있다.


스코틀랜드는 16세기 초부터 해외에서 밀반입된 책에 실린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전파되기 전까지 가톨릭 국가였다. 종교 박해에서 흔히 그렇듯이, 교회의 계층이 "오류는 권리가 없다"는 전통적인 교회법 원칙을 강요하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범죄 행위로 취급하려는 노력은 광범위한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종이와 책의 보급과 구매가 용이해지면서,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의 재판과 처형은 인쇄기에 의해 널리 알려졌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더욱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1528년 대주교 제임스 비튼이 주재한 종교 재판에서 루터교 신앙을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고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을 당한 후 "석탄(즉, 연기)이 패트릭 해밀턴을 스쳐간 만큼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켰다"는 말이 전해졌다.[31]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은 상당한 대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의회가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1560년 법으로 칼뱅주의 신앙을 국교로 설립하면서 실질적으로 완료되었다. 그 시점에서 미사의 집전이나 참석이 금지되었다.[32] 수도원 폐쇄, 종교 단체 금지, 우상 파괴와 분서가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생한 것은 최근 가톨릭교도가 아닌 역사학자들조차 스코틀랜드의 문화 유산 파괴라고 비판했다.[33][34]

교황 관할권법 1560 및 기타 유사한 법률에 따라 엄격히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는 칼뱅의 제네바 모델의 신정 국가가 되지 않았고,[35] 지하 가톨릭 교회는 살아남아 스코틀랜드 인구의 적어도 절반의 충성을 계속 받았다. 역사학자 조지 스콧-몽크리프에 따르면, "세속 성직자들의 붕괴는, 그들 중 많은 수가 서약을 포기하고 결혼한 성직자가 되었고, 세 명의 주교가 배교했으며 나머지는 혼란 속에서 은퇴했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평신도로 변장하여 다니면서 그들이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36]

1565년 존 녹스는 지하 사제 서 제임스 타버트가 5년 전에 범죄화된 트리엔트 미사를 드린 혐의로 체포되어 이틀에 걸쳐 각각 한 시간, 네 시간 동안 에든버러의 메르캣 크로스에 묶여 달걀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37]

제임스 6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코틀랜드 교회("더 커크")가 엘리자베스 종교적 타협, 고교회 앵글리칸주의, 국왕 지배권, 주교제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커크의 통제권을 둘러싼 감독주의자 및 장로교 분파 간의 장기간의 내부 싸움, 권력을 잃은 분파에 대한 종교 박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별도의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형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는 감독주의 및 장로교 정부 모두에서 계속되었다.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헌틀리 후작에 의해 헌틀리 성에 숨겨졌다가 결국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밀반입된, 노트르담 드 봉 수세 성당에 있는 어버딘의 성모의 14세기 원본 조각상.


남아있는 국내 성직자들은 비교적 작은 역할을 했고 그 주도권은 종종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귀족 가문, 지역 영주 또는 스코틀랜드 씨족장들이 불법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제공하는 곳에서는 로키어버, 이그, 사우스위스트의 클랜 도널드, 바라의 클랜 맥닐, 스트래스글래스의 치isholm과 프레이저 아래, 또는 클랜 고든 아래 북동부에서 가톨릭교가 은밀하게 계속 번성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가톨릭 성사가 변장하고 불법화된 사제들에 의해 집행되었지만 비교적 개방적으로 이루어졌다.[41] 종종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귀족들은 종교적 반대에 대한 문제로 서로를 추궁하는 것을 꺼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600년의 한 영국 보고서에 따르면 귀족과 지주의 3분의 1이 여전히 가톨릭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38]

아일랜드 섬 주교인 존 레슬리는 국왕의 종교적 타협을 시행하려는 노력에서 때때로 지역 귀족()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는 특히 1620년대와 30년대에 지하에 있던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서 파견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에 의해 그의 교구에서 엄격하게 불법적이고 지하적인 목회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주교의 노력 동안 그러했다.[39]

1630년 9월 9일, 프란치스코회 소속 패트릭 헤가티 신부가 사우스위스트에서 레슬리 주교가 직접 지휘하는 사제 사냥꾼들에게 체포되었지만, 주교가 헤가티 신부를 재판에 넘기기 전에, ''라그날 맥 알레인 '익 자인''(벤베큘라의 라날드 맥도날드), 당시 씨족장이자 스코틀랜드 게일어 국민 시인 알라스데어 맥 마이스타르 알라스데어의 증조부인 클랜 맥도날드 오브 클랜라날드의 삼촌이 개입하여 주교와 그의 일행으로부터 포로를 구출했다. 이 사건은 찰스 1세 국왕을 격분시켜 1630년 12월 10일 스코틀랜드 추밀원에 이에 대한 격렬한 편지를 보냈고, 이후 하이랜드 귀족을 형사 기소하기 위해 인버라리로 소환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40]

스코틀랜드 대부분 지역에서 가톨릭교는 친족 관계를 통해 연결된 사저와 비밀 교구 공동체에서 지하 신앙이 되었다. 이러한 가정 의존은 스코틀랜드 평신도 여성들이 신앙의 옹호자이자 전달자로서 생명력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를 들어 보더스 지역의 레이디 페르니허스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들은 가정을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변화시키고 로마 가톨릭 사제를 위한 안전 가옥과 비밀 예배당을 만들었다.[41]

개혁된 교회가 교회의 기존 구조와 자산을 인수하고, 1567년 메리 여왕의 전복, 그리고 1570년대 그녀의 복원을 추구하는 군대의 패배 이후, 바티칸은 스코틀랜드를 선교 지역으로 재분류하여 신앙 전파 성성의 관할하에 두었다. 반종교 개혁의 주요 종교 단체인 도미니코회와 새로 설립된 예수회는 처음에 스코틀랜드를 선교 사업의 대상으로 삼는 데 비교적 무관심했고, 그들의 효과는 처음에는 바티칸의 관료주의, 특히 서로에 대한 영토 경쟁, 세속 사제, 그리고 다른 종교 단체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 주도권은 덩켈드의 주교를 배출했던 크라이튼 가문과 관련된 소규모 스코틀랜드인 그룹에 의해 취해졌다. 그들은 예수회에 가입하여 개종을 시도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귀족과 궁정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데 주력했고, 이로 인해 일련의 복잡한 정권 교체 음모와 정치적 연루를 통해 교회의 종교 박해를 종식시키려는 시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런던에서 벌리 경과 서 프랜시스 월싱엄에 의해 은밀하게 반대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스코틀랜드 평신도의 대다수는 오랫동안 무시되었다.[41]

성인 존 오길비가 글래스고 크로스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 1615년 3월 10일.


일부 귀족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공개적으로 가톨릭 교회로 개종했다. 밴프셔 귀족 존 오길비 (1569–1615)는 1610년에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앵글로-가톨릭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스포티스우드에게 체포되었고, 나중에 킬링 타임으로 알려진 사건 동안 장로교 언약도에 대한 종교 박해와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오길비는 수위 서약을 거부하고 국왕이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고 선언했다는 이유로 1615년 3월 10일 글래스고 크로스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토마스 윈에 따르면 또 다른 이유는 스포티스우드 대주교가 당시 로디안주의의 많은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교회와 궁정 양쪽의 적들에게 가톨릭 암호주의 혐의를 받았고 오길비의 재판과 처형을 사용하여 그 혐의가 거짓임을 증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2] 1976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성된 오길비는 종종 종교 개혁 시대의 유일한 스코틀랜드 가톨릭 순교자로 여겨진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의 불법적인 지위가 오래 지속되면서 평신도의 수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히더 사제"에 의해 봉사받는, 상당히 많은 가톨릭 인구가 계속 존재했다.[44] 이것은 특히 도릭을 사용하는 북동부와 헤브리디스, 북서 고원의 더욱 외딴 게일어 사용 지역 및 갤러웨이에서 그러했다.[45]

2007년 7월 Scalan의 대학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자 수가 감소하고 조직이 약화되었을 것이다.[46]

교황은 1694년 선교 활동을 위해 최초의 사도 대리로 토마스 니콜슨을 임명했다.[47] 국가는 구역으로 나뉘었고 1703년까지 33명의 가톨릭 성직자가 있었다.[62] 1733년에는 두 개의 사도 대리구, 즉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었고 각 대리구는 주교가 관할했다. 주로 얼스터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선교사들이 관할했던 고지대에서는 제임스 고든 주교가 현지 출신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로크 모라르의 에일런 반에 소신학교를 설립했다. 1716년에는 글렌리벳의 스칼란으로 옮겨졌는데, 이곳은 이 지역 가톨릭 사제를 위한 지하 교육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불법이었고, 여러 차례 고지대 밖에서 온 군인들에 의해 교회 방화로 소실되었다.[48] 스칼란 외에도 1732년과 1838년 사이에 고지대에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6번 있었지만, 모두 재정적 어려움과 가톨릭의 불법적인 지위 때문에 실패했다.[47] 성직자들은 비밀리에 입국했고, 예배는 불법이었지만 계속 유지되었다.[62]

존 게데스 주교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불법적인 지하 교단의 성직자였던 휴 맥도날드 주교(1731년부터 1773년까지 고지대 총대리)와 그의 구역 사제들이 제이콥주의에 대해 매우 희망적인 기대를 가졌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는 스튜어트 왕가가 가톨릭 해방, 종교의 자유, 시민권을 국교회 밖에서 예배하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낙담하고 억압에 많이 노출되었던" 스코틀랜드 가톨릭 평신도들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자유 시민의 특권을 다시 갖게 해 줄 만한 사건을 바랐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49]

많은 장로교 신자와 성공회 신자도 제이콥파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1745년 제이콥 반란의 여파는 스코틀랜드 가톨릭교도들이 겪는 박해를 더욱 심화시켰다.[46]

이러한 탄압은 특히 ( lit. "로커버 및 시라모어 습격의 해")[50] 컬로든 전투에서 제이콥 군이 패배한 후 더욱 심해졌다.[51]

존 게데스 주교에 따르면, "컬로든 전투 직후 가톨릭 예배당을 모두 교회 방화로 철거하고 사제들을 사제 사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52] 역사가 존 와츠는 이러한 정책이 정부군에 의해 시행되었고 "그들은 공식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확인한다.[53] "헤더 사제" 알렉산더 캐머런의 전기 작가 토마스 윈은 이러한 공식 명령이 실제로 컬로든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한다. "1745년 12월 6일 포고령이 발표되어, 다소 효력을 잃은 법률, 즉 엘리자베스 여왕의 법, 제27장 및 제임스 6세의 법, 제3장이 예수회와 가톨릭 사제를 반대하는 법률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자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우스워크와 이 지역에서 10마일 이내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 100파운드의 현상금이 걸렸다."[54]

그 뒤에 이어진 하노버 왕가의 만행은 미국 남북 전쟁 역사가 토마스 로리가 "승리자에게 전리품이 돌아간다는 유럽의 전통, 즉 패자는 약탈과 강탈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과 적대적인 민간인이 "징기스칸, 티무르, 이반 뇌제와 같은 냉철한 정복자들의 맷돌에 들어갈 곡물"이라는 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55][56]

존 게데스 주교에 따르면, "1746년 초 봄에 몇 척의 군함이 바라 섬 해안에 도착하여 몇몇 사람들을 상륙시켰고, 그들은 사제를 넘겨주지 않으면 섬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선교사이자 나중에 주교가 된 제임스 그랜트 신부는 작은 섬에 있는 안전한 은신처에서 그 위협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자수했으며, 서해안(아르드나머컨)의 밍가리 성으로 끌려가 몇 주 동안 구금되었다."[57]

그랜트는 인버네스 감옥과 템스 강에 정박된 감옥선에서 다른 가톨릭 사제들과 함께 오랫동안 잔혹한 투옥을 당한 후 네덜란드로 추방되었고, 영국 제도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와 함께 추방된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그랜트 신부는 거의 즉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의 동료 죄수였던 알렉산더 캐머런 신부는 로버트 가문과 치즘 가문의 불법적인 "헤더 사제"였고, 전 군목이었으며, 도널드 캐머런 오브 로치엘, 스코틀랜드 씨족장의 동생이었다. 그는 1746년 10월 19일 투옥의 어려움으로 인해 감옥선에서 사망했다.[51][58] 21세기 동안, 성 콜럼바 기사단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캐머런 신부를 성인 시성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를 위한 위대한 성인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나라가 그의 중재를 통해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59] 그들은 터번 홀의 대학교 가톨릭 예배당에 있는 성 요셉 제단에 작은 탄원서를 세웠다.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을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는 성인에 대한 신앙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59]

그러나 역사가 다니엘 세치에 따르면, 컬로든 이후 정부의 반발은 고지대 구역의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집중되었고, 훨씬 더 크고 조직적인 저지대 구역은 비교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60]

마커스 태너에 따르면, "개혁 교회가 도시와 점점 더 산업화되는 저지대에서 흔들리자, 장로교는 게일 고지대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달리아다의 영주령 이후 아일랜드와 연결된 문화적 유대를 사실상 끊었다. 사우스 유이스트와 바라와 같은 작은 가톨릭 앙클라브를 제외하고 고지대는 그 이후로 보존해 온 윤곽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안식일 준수의 강한 전통과 기악 음악과 춤에 대한 청교도적인 혐오감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는 최근에야 대중적인 수용을 다시 얻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선구적인 민속학자이자 켈트학자인 아일레이의 존 프란시스 캠벨 ()과 그의 많은 조수들은 고지대의 캘빈주의화가 불필요하게 과도하다고 비판하는 데 매우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획기적인 컬렉션 ''서부 고지대의 민간 설화''의 시작 부분에서 캠벨과 그의 조수들은 지역 목사, 장로, 교구 학교 교사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톨릭에서 장로교 또는 스코틀랜드 성공회로 최근 개종한 게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세안차이로부터 스코틀랜드 신화나 민속을 수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장황하게 불평했다.[61]

가톨릭의 불법적인 지위 때문에 신자의 정확한 수는 불확실하다. 1755년에는 약 16,500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북부와 서부에 있었다.[62] 1764년에는 "스코틀랜드 전체 가톨릭 인구는 약 33,000명 또는 전체 인구의 2.6%였을 것이다. 이 중 23,000명이 고지대에 있었다."[63] 1764년에 대한 또 다른 추정치는 고지대에 13,166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고, 그중 4분의 1이 1790년까지 이주했을 수 있으며,[64] 다른 자료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10% 정도라고 추정한다.[64]

고지대 정리와 저지대 정리 동안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를 임명하고 제거하는 토지 소유 귀족을 막으려는 결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커스 태너는 또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인구에게 특히 비판적인 감시적이고 엄한 기독교 버전을 주입하고, 개혁 근본주의적 비관주의와 정치적 수동성을 주입하고, 공동체가 고지대 정리로 황폐해지고 있을 때 사소한 교리적 문제에 대해 숙고하도록 권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혐의에는 무언가가 있다. 고지대 목사 중 몇 명은 1830년대와 1840년대 철회 협회와 수십 년간의 토지 전쟁을 지휘한 아일랜드 가톨릭 성직자를 모방했다. 티퍼레리 주와 같이 격동적인 아일랜드 카운티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선두에서 농업 투사들을 이끌었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혼란 성직자나 그들의 후계자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복음주의 장로교는 불행에 대한 복종과 수용을 조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신앙이었고, 그것이 그들을 불의에 대한 반역자로 만들지 못했지만, 확실히 그들에게 위엄을 부여했다."[65]

2. 4. 가톨릭 부흥과 종파 갈등

17세기 초, 스코틀랜드 가톨릭 신자 수는 줄고 조직은 약화되었다.[46] 1694년, 교황은 토마스 니콜슨을 최초의 사도 대리로 임명하여 선교 활동을 지원했다.[47] 스코틀랜드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었고, 1703년에는 33명의 가톨릭 성직자가 활동했다.[62] 1733년에는 고지대와 저지대, 두 개의 사도 대리구로 분리되었고, 각 대리구는 주교가 관리했다. 얼스터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했던 고지대에서는 제임스 고든 주교가 로크 모라르의 에일런 반에 소신학교를 설립하여 현지 출신 성직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 신학교는 1716년 글렌리벳의 스칼란으로 이전되어 이 지역 가톨릭 사제를 위한 지하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불법이었고, 여러 차례 고지대 밖에서 온 군인들에 의해 교회 방화로 소실되었다.[48] 스칼란 외에도 1732년과 1838년 사이에 고지대에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6번 있었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가톨릭의 불법적인 지위 때문에 모두 실패했다.[47] 성직자들은 비밀리에 입국했고, 예배는 불법이었지만 계속 유지되었다.[62]

존 게데스 주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불법적인 지하 교단의 성직자였던 휴 맥도날드 주교(1731년부터 1773년까지 고지대 총대리)와 그의 구역 사제들은 제이콥주의에 대해 매우 희망적인 기대를 가졌다. 스튜어트 왕가가 가톨릭 해방, 종교의 자유, 그리고 시민권을 국교회 밖에서 예배하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낙담하고 억압에 많이 노출되었던" 스코틀랜드 가톨릭 평신도들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자유 시민의 특권을 다시 갖게 해 줄 만한 사건을 바랐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49]

많은 장로교 신자와 성공회 신자도 제이콥파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1745년 제이콥 반란의 여파는 스코틀랜드 가톨릭교도들이 겪는 박해를 더욱 심화시켰다.[46] 이러한 탄압은 특히 Bliadhna nan Creachgd (로커버 및 시라모어 습격의 해)[50] 컬로든 전투에서 제이콥 군이 패배한 후 더욱 심해졌다.[51]

존 게데스 주교에 따르면, "컬로든 전투 직후 가톨릭 예배당을 모두 교회 방화로 철거하고 사제들을 사제 사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52] 역사가 존 와츠는 이러한 정책이 정부군에 의해 시행되었고 "그들은 공식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확인한다.[53] "헤더 사제" 알렉산더 캐머런의 전기 작가 토마스 윈은 이러한 공식 명령이 실제로 컬로든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한다. "1745년 12월 6일 포고령이 발표되어, 다소 효력을 잃은 법률, 즉 엘리자베스 여왕의 법, 제27장 및 제임스 6세의 법, 제3장이 예수회와 가톨릭 사제를 반대하는 법률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자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우스워크와 이 지역에서 10마일 이내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 100파운드의 현상금이 걸렸다."[54]

그 뒤에 이어진 하노버 왕가의 만행은 미국 남북 전쟁 역사가 토마스 로리가 "승리자에게 전리품이 돌아간다는 유럽의 전통, 즉 패자는 약탈과 강탈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과 적대적인 민간인이 "징기스칸, 티무르, 이반 뇌제와 같은 냉철한 정복자들의 맷돌에 들어갈 곡물"이라는 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55][56]

존 게데스 주교에 따르면, "1746년 초 봄에 몇 척의 군함이 바라 섬 해안에 도착하여 몇몇 사람들을 상륙시켰고, 그들은 사제를 넘겨주지 않으면 섬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선교사이자 나중에 주교가 된 제임스 그랜트 신부는 작은 섬에 있는 안전한 은신처에서 그 위협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자수했으며, 서해안(아르드나머컨)의 밍가리 성으로 끌려가 몇 주 동안 구금되었다."[57]

그랜트는 인버네스 감옥과 템스 강에 정박된 감옥선에서 다른 가톨릭 사제들과 함께 오랫동안 잔혹한 투옥을 당한 후 네덜란드로 추방되었고, 영국 제도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와 함께 추방된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그랜트 신부는 거의 즉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의 동료 죄수였던 알렉산더 캐머런 신부는 로버트 가문과 치즘 가문의 불법적인 "헤더 사제"였고, 전 군목이었으며, 도널드 캐머런 오브 로치엘, 스코틀랜드 씨족장의 동생이었다. 그는 1746년 10월 19일 투옥의 어려움으로 인해 감옥선에서 사망했다.[51][58] 21세기 동안, 성 콜럼바 기사단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캐머런 신부를 성인 시성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를 위한 위대한 성인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나라가 그의 중재를 통해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59] 그들은 터번 홀의 대학교 가톨릭 예배당에 있는 성 요셉 제단에 작은 탄원서를 세웠다.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을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는 성인에 대한 신앙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59]

그러나 역사가 다니엘 세치에 따르면, 컬로든 이후 정부의 반발은 고지대 구역의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집중되었고, 훨씬 더 크고 조직적인 저지대 구역은 비교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60]

가톨릭의 불법적인 지위 때문에 신자의 정확한 수는 불확실했다. 1755년에는 약 16,500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북부와 서부에 있었다.[62] 1764년에는 "스코틀랜드 전체 가톨릭 인구는 약 33,000명 또는 전체 인구의 2.6%였을 것이다. 이 중 23,000명이 고지대에 있었다."[63] 1764년에 대한 또 다른 추정치는 고지대에 13,166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고, 그중 4분의 1이 1790년까지 이주했을 수 있으며,[64] 다른 자료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10% 정도라고 추정한다.[64]

1755년에 지어진 세인트 니니안 교회는 엔지에 위치한 가톨릭 비밀 교회이다.


고지대 강제 이주(Highland Clearances)를 일으킨 대부분의 지주들은 인종적 또는 종교적 이유로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지는 않았지만,[66] 그들 중 일부에게서 반가톨릭주의(anti-Catholicism)의 증거가 나타난다.[67][68][69][70][71][72][73] 특히, 1770년부터 1810년까지 서부 고지대에서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주했으며, 기근, 가난, 고율의 임대료(rackrenting)와 함께 반가톨릭 정서가 그 시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있다.[74][75]

1787년 4월, 모이더트(Moidart)에서 로마의 선교 전파성에 보낸 편지에서 오스틴 맥도날드 신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이 사제와 함께 노이더트(Knoydart)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저는 가을에 남겨진 사람들을 돌보고, 겨울에는 모이더트 사람들도 돌보게 되었습니다. 600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국으로 갔지만, 저는 여전히 500명이 넘는 영혼에게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러한 지역의 과잉 인구, 그리고 지주들의 압박이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된 주요 원인입니다."[76]

온타리오주 글렌게리 카운티의 어퍼 캐나다에는 영국 육군(British Army)의 군종 신부(military chaplain)이자 미래의 가톨릭 주교인 알렉산더 맥도넬의 노력으로 스코틀랜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캐나다 게일어(Canadian Gaelic)를 사용하는 개척촌이 세워졌다. 이 정착촌의 주민들은 고지대 펜서블 군단(Highland Fencible Corps)의 해산된 가톨릭 부대인 글렌게리 펜서블의 구성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구성되었다.[77][78]

맥도넬 주교 외에도, 윌리엄 프레이저, 앤거스 버나드 맥이처른(Angus Bernard MacEachern), 그리고 유명한 게일어 크리스마스 캐럴인 ''탈라드 크리오스다(Tàladh Chrìosda)''의 작곡가인 레이널드 랭킨과 같은 많은 "헤더 사제"들이 강제 이주 및 자발적 이주민인 교구민들을 따라 강제 이주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디아스포라로 갔다.

1879년, 스코틀랜드에서 온 한 방문객은 글렌게리의 스코틀랜드 게일어가 "가장 완벽한 억양을 유지하고 있으며 영어가 거의 또는 전혀 섞이지 않은 채" 로하버(Lochaber) 자체보다 글렌게리 카운티와 온타리오주 콘월(Cornwall, Ontario)에서 더 잘 보존되어 있다고 열정적으로 선언했다.[79] 매우 유사한 이유로, 오도 블런델은 1909년에 한때 인구 밀도가 높았고 압도적으로 가톨릭 신자였던 스트래스글래스(Strathglass)의 언어, 관습, 구전(oral tradition)이 스코틀랜드보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에서 더 잘 보존되어 있다고 안타깝게 언급했다.[80]

1878년 교계 복원 이후, 그리고 강제 이주가 끝나갈 무렵, 아르가일 제도 교구의 앤거스 맥도날드 주교는 고지대 토지 연맹(Highland Land League)의 격렬한 시위가 한창일 때 솔선수범했다. 주교와 그의 사제들은 소작인의 권리, 합리적인 임대료, 재산권 보장(security of tenure), 자유 선거, 그리고 고지대와 섬의 가톨릭과 개신교 인구의 대다수를 심각하게 빈곤하게 만들었던 정치 보스(political boss)주의, 과도한 임대료, 종교 차별에 반대하는 선도적이고 강력한 운동가가 되었다.[81][82]

19세기에 아일랜드 이민은 특히 글래스고와 그 주변 지역,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다른 산업 공동체에서 가톨릭 신자 수를 실질적으로 증가시켰으며,[85] 많은 농촌 지역에서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토목 노동자 및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1971년 감자 노동 스캔들 참조).[86] 초기에는 반가톨릭 지구 출신의 성직자들이 지원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5]

1820년에 가톨릭 가정이 두세 가구 밖에 없었던 덤바턴에서는 아일랜드 및 하이랜드 이주로 인구가 증가하여 1830년에 성 패트릭에게 헌정된 최초의 본당 교회가 건설되었다. 지역 역사가 I.M.M. 맥페일에 따르면, "1830년 이전에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레벵그로브 정책의 오래된 개혁 이전 카드로스 본당 교회의 폐허에서 모임을 가졌고, 나중에 교회가 건설되기 직전에 존 고든 그리녹 신부가 예배를 칼리지 스트리트의 오래된 창고에서 거행했습니다. 1837년에는 덤바턴에 284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87]

같은 공동체에서는 현지 아일랜드 토목 노동자들의 급여일과 1855년 10월에 방문한 반가톨릭 설교자이자 논객 존 세이어스 오르의 설교를 들은 개신교 조선공들의 영향을 받아 덤바턴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많은 심각한 반아일랜드 폭동이 정기적으로 발생했다.[88][89] 팀 팻 쿠건이 목사 이안 페이즐리와 비교한 오르는 이전에 1851년 7월 12일에 그리녹에서 매우 유사한 폭동을 선동했다. 오르가 감옥에 갇히자 그의 추종자들도 폭동을 일으켰습니다.[90] 장로교로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개종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얼스터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앤트림 글렌스 출신의 울스터 아일랜드어 원어민인 패트릭 맥메네미 목사를 선교사로 영입했지만, 1885년에 여성 편력 혐의로 그의 사역 평판이 무너졌다.[91]

가톨릭 교계가 재건되었고,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1878년에 6개의 새로운 교구가 창설되었다. 그 중 5개는 세인트 앤드루스 및 에든버러 대주교를 수도 대주교로 하여 단일 관구로 구성되었고, 글래스고 교구는 분리되어 교황청에 직접 종속되었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가톨릭의 존재가 증가하고 부활하면서 하이랜드 이주민과 아일랜드 이주민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와 가톨릭 본당, 학교 및 지역 사회 통제에 대한 정기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은 특히 1878년 스코틀랜드 교계가 복원된 후 성좌에 아일랜드 사제가 본당과 학교를 조직하는 데만 사용된 다음 곧바로 주교가 도릭어를 사용하는 밴프셔 및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다른 반가톨릭 지구의 사제로 교체한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비록 이것이 하이랜드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를 가능한 한 빨리 저지대 스코틀랜드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92] 이 정책에 대한 교계의 성공은 결국 엇갈린 결과를 낳았습니다. 저지대의 도시 중심지에는 콘라드 나 가엘게 지부가 계속 존재하며 아일랜드 밖의 아일랜드어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또한, 최근의 스코틀랜드 게일어 르네상스와 언어 몰입 학교의 증가와 함께 글래스고 게일어와 같은 새롭고 부상하는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1928년에는 프랭크 더프가 더블린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위해 최근 조직한 마리아 운동인 성모군단이 스코틀랜드에 최초의 해외 프레시디움 (지부)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이민자들이 그 수를 더욱 늘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우크라이나 피난민이 도착하면서 1965년에 최초의 스코틀랜드 동방 가톨릭 교회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에든버러 리트의 성 안드레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였습니다.

스코틀랜드로의 대규모 이민은 종파적 긴장의 출현을 보았다. 스코틀랜드의 전간기 가톨릭 공동체는 압도적으로 노동 계급이었고 빈곤과 경제 위기에 의해 위협받았지만, 대공황에 대처할 수 있었다.[93] 이러한 상대적인 면역력은 가톨릭 학교를 전적으로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도록 한 1918년 스코틀랜드 교육법에 의해 야기되었다. 마이클 존 로지(Michael John Rosie)는 국가 자금 지원 교육 외에도 스코틀랜드 가톨릭교의 본질이 "경제적 혼란에 덜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라크홀 (스코틀랜드)에서 행진하는 오렌지 교도 (7월 12일)


이러한 상대적인 경제적 안정은 가톨릭 공동체가 스코틀랜드의 정치 및 사회 생활에 진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반 가톨릭 및 유니오니스트 세력, 특히 오렌지 교단의 대 로지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의 기독교인 간의 종파 폭력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정점에 달했고, 가톨릭 종교 행렬은 반 가톨릭 및 오렌지 폭도들의 잦은 공격을 받았다. 오렌지 교단은 또한 가톨릭 지역을 통해 자주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행진을 벌였다.

특히 친 가톨릭과 반 가톨릭 글래스고 레이저 갱 사이의 폭력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스코틀랜드 전체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로지는 "1931년과 1935년 사이에 나타난 폭력의 수준과 규모는 1870년대 오렌지 행렬이 재개된 이후 어떤 시기보다 훨씬 심각하고 계획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말했다.[94] 종파 폭력은 너무 심해서 더 높은 경찰 비용을 야기했고, 지방 의회는 모든 "종교적 및 유사 종교적 행렬"을 즉시 금지하려 했다. 결국 그러한 금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반 가톨릭 폭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한이 강화되었다.[95]

1923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후 거부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제목은 ''스코틀랜드 민족에 대한 아일랜드 인종의 위협''으로, 주로 이민자 가톨릭 인구가 장로교 가치를 훼손하고, 술 취함, 범죄, 재정적 부주의를 퍼뜨렸다고 비난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고위 멤버였던 존 화이트 목사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스코틀랜드를 요구하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비토착 구성원을 거부하고 토착 요소로부터 국가 생활을 결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선언했다.[96]

이러한 공식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는 1930년대와 1940년대부터 현저히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 교회의 지도부가 우생학을 인식하는 나치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종적으로 순수한" 국가 교회를 창조하는 것의 위험이 실제로는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면서 더욱 그랬다. 특히 슬라브족이나 유대인 혈통을 일부라도 가지고 있거나, 전통적인 개신교 고백 교회의 신봉자였던 독일인은 더 이상 ''민족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97][98]

이 시대의 종파 폭력 수준은 북아일랜드의 분쟁에서 비롯된 글래스고 펍 폭탄 테러가 1979년 2월 17일 가톨릭교도가 자주 찾는 펍을 상대로 얼스터 자원군에 의해 감행될 때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폭탄 테러의 책임이 있는 글래스고 기반 UVF 현장 작전 부대는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99][100][101]

2. 5. 20세기와 현재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은 특히 글래스고와 그 주변 지역,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다른 산업 공동체에서 가톨릭 신자 수를 실질적으로 증가시켰다.[85] 초기에는 반가톨릭 지구 출신의 성직자들이 지원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5] 1820년에 가톨릭 가정이 두세 가구 밖에 없었던 덤바턴에서는 아일랜드 및 하이랜드 이주로 인구가 증가하여 1830년에 성 패트릭에게 헌정된 최초의 본당 교회가 건설되었다.[87] 같은 공동체에서는 현지 아일랜드 토목 노동자들의 급여일과 1855년 10월에 방문한 반가톨릭 설교자이자 논객 존 세이어스 오르의 설교를 들은 개신교 조선공들의 영향을 받아 덤바턴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많은 심각한 반아일랜드 폭동이 정기적으로 발생했다.[88][89]

가톨릭 교계가 재건되었고,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1878년에 6개의 새로운 교구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가톨릭의 존재가 증가하고 부활하면서 하이랜드 이주민과 아일랜드 이주민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와 가톨릭 본당, 학교 및 지역 사회 통제에 대한 정기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은 특히 1878년 스코틀랜드 교계가 복원된 후 성좌에 아일랜드 사제가 본당과 학교를 조직하는 데만 사용된 다음 곧바로 주교가 도릭어를 사용하는 밴프셔 및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다른 반가톨릭 지구의 사제로 교체한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비록 이것이 하이랜드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를 가능한 한 빨리 저지대 스코틀랜드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92] 이 정책에 대한 교계의 성공은 결국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이탈리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이민자들이 그 수를 더욱 늘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우크라이나 피난민이 도착하면서 1965년에 최초의 스코틀랜드 동방 가톨릭 교회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는 에든버러 리트의 성 안드레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였다.

스코틀랜드로의 대규모 이민은 종파적 긴장의 출현을 보았다. 스코틀랜드의 전간기 가톨릭 공동체는 압도적으로 노동 계급이었고 빈곤과 경제 위기에 의해 위협받았지만, 대공황에 대처할 수 있었다.[93] 이러한 상대적인 면역력은 가톨릭 학교를 전적으로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도록 한 1918년 스코틀랜드 교육법에 의해 야기되었다.

이러한 상대적인 경제적 안정은 가톨릭 공동체가 스코틀랜드의 정치 및 사회 생활에 진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반 가톨릭 및 유니오니스트 세력, 특히 오렌지 교단의 대 로지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의 기독교인 간의 종파 폭력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정점에 달했고, 가톨릭 종교 행렬은 반 가톨릭 및 오렌지 폭도들의 잦은 공격을 받았다.

1923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스코틀랜드 민족에 대한 아일랜드 인종의 위협''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주로 이민자 가톨릭 인구가 장로교 가치를 훼손하고, 술 취함, 범죄, 재정적 부주의를 퍼뜨렸다고 비난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고위 멤버였던 존 화이트 목사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스코틀랜드를 요구했다.[96] 이러한 공식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는 1930년대와 1940년대부터 현저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2011년 영국 인구 조사에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신자 비율


1982년과 2010년 사이에 스코틀랜드 가톨릭 신자 비율은 18% 감소했다.[121] 2001년 영국 인구 조사와 2011년 영국 인구 조사 사이에서 가톨릭 신자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었지만, 스코틀랜드 교회와 같은 다른 기독교 종파의 비율은 감소했다.[122][123][124]

2001년에는 스코틀랜드의 32개 지방 자치 단체 각각에서 가톨릭 신자가 소수였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가톨릭 신자 수가 공식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자 수에 근접했다.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글래스고 인근의 서부 중앙 벨트 자치 단체 지역이다. 인버클라이드에서는 2001년 영국 인구 조사에서 응답자의 38.3%가 가톨릭 신자라고 답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자는 40.9%였다. 노스 라나크셔 역시 스코틀랜드 교회의 40.0%에 비해 36.8%로 가톨릭 소수자가 많았다.

2011년에는 가톨릭 신자가 노스 라나크셔, 인버클라이드, 웨스트 던바턴셔, 그리고 인구가 가장 많은 글래스고 시를 포함한 여러 자치 단체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자 수를 넘어섰다.[125]

2011년 영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16%를 차지하며, 스코틀랜드 교회(32%)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교회이다.[128] 인종 또는 민족 계열로 볼 때, 스코틀랜드 가톨릭교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주로 백인 또는 밝은 피부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129]

최근 몇 년 동안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는 주류 언론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도덕을 옹호하고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주교들의 발언으로 인해 부정적인 여론에 직면했다.

마리아 동굴 및 기독교 순례지 성지인 스트래서릭의 임마큘레이트 컨셉션 교회 부지에 있는 하이랜드의 성모


화이트브리지 (게일어로 )와 로크 네스 인근의 임마큘레이트 컨셉션 로마 가톨릭 교회 부지에 있는 '하이랜드의 성모' 기독교 순례지 성지에서 2017년 3월 로마 가톨릭 애버딘 교구의 휴 길버트 주교에 의해 새로운 야외 미사석이 축성되었다.[139]

2024년 스코틀랜드 경찰 자료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의 모든 종교 혐오 범죄의 33%가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하며, 가톨릭 신자는 인구의 13%에 불과하다.[144]

2020년, 스코틀랜드 주교들은 SNP를 당내의 리사 캐머런과 같이 낙태 합법화에 대한 당 지도부의 원하는 플랫폼에 반대하는 기독교인에 대한 "노골적이고 악의적인 적대감"으로 비난했다.[145]

3. 조직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구 지도


스코틀랜드에는 2개의 대교구와 6개의 교구가 있으며, 총 신자 수는 841,000명이다.[112]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를 포괄하는 4개의 실체가 있다.

  • 군종 교구는 스코틀랜드 기지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모든 구성원을 섬긴다.
  • 월싱엄의 성모 개인 교구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맺은 전직 성공회 신자를 위한 교구와 동등한 관할 구역이다.
  • 런던 성가족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구는 비잔틴 전례의 '자율권' 의례 교회의 구성원인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을 섬긴다.
  • 영국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구는 시로-말라바르 교회의 구성원을 섬긴다.


교구관할 구역대략적인 영토대성당설립신자 수
애버딘 교구
휴 길버트 주교
성 앤드루스 및 에든버러애버딘, 모레이, 하이랜드 (남부 인버네스셔, 스카이 및 섬 제외), 오크니, 셰틀랜드성모 승천 대성당187851,000명 (2022년)[113]
아길과 아일스 교구
브라이언 맥기 주교
아길 앤 뷰트, 남부 인버네스셔, 아란, 헤브리디스 섬성 콜럼바 대성당10,000명 (2022년)[114]
던켈드 교구
주교 선출 앤드루 맥켄지
던디, 포파셔, 퍼스셔 및 북부 파이프성 앤드루 대성당63,260명 (2021년)[115]
갤러웨이 교구
프랜시스 도우건 주교
에어셔 (아란 제외), 덤프리스 앤 갤러웨이성 마가렛 대성당41,350명 (2021년)[116]
글래스고 대교구
윌리엄 놀란 대주교
글래스고글래스고 및 던바턴셔성 앤드루 대성당218,170명 (2021년)[117]
마더웰 교구
조셉 토알 주교
라너크셔선한 조력자 성모 대성당1947
(글래스고 대교구 및 갤러웨이 교구에서)
163,000명 (2021년)[118]
페이즐리 교구
존 키넌 주교
렌프루셔성 미린 대성당1947
(글래스고 대교구에서)
87,940명 (2021년)[119]
성 앤드루스 및 에든버러 대교구
레오 쿠쉴리 대주교
성 앤드루스 및 에든버러세인트 앤드루스, 파이프, 킨로스셔, 클라크매넌셔, 스터링셔, 웨스트 로디언, 에든버러, 미들로디언, 이스트 로디언, 스코틀랜드 변경 지역성모 승천 대성당1878123,500명 (2022년)[120]
런던 성가족 교구
케네스 노바코프스키 주교
키예프-갈리시아영국망명 성가족 대성당1968
(2013년 교구로 승격)
13,000명 (2021년)
군종 교구
폴 메이슨 주교
교황청영국 및 해외의 영국군성 미카엘 및 성 조지 대성당1986
월싱엄의 성모 개인 교구
데이비드 월러 주교
영국, 웨일스 및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전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성직자, 수도자 및 평신도.성모 승천과 성 그레고리의 주 교회20111,950명 (2021년)
영국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구
조셉 스램피칼 주교
에르나쿨람-앙가말리 수대교구영국, 웨일스 및 스코틀랜드의 시로-말라바르 교회.성 알폰소 시로-말라바르 대성당201641,000명 (2021년)



군종 교구와 월싱엄의 성모 개인 교구는 교황청의 직접적인 관할을 받는다. 런던 성가족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구와 영국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구는 자체 관할의 대주교, 수대주교 및 수대주교 시노드의 관할을 받는다.

4. 인물

존 리드 하원 의원은 1999년에 최초의 가톨릭교도 스코틀랜드 담당 국무 장관이 되었다.[109] 2001년에는 헬렌 리델 하원 의원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녀가 이 직책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 주목받았다.[109]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총장 및 부총장으로 임명된 루이스 리처드슨은 아일랜드 태생의 미국 시민권을 가진 가톨릭교도로, 이 직책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자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처음으로 이 직책을 맡은 가톨릭교도이다.[109]

글래스고 대교구의 필립 타르탈리아 대주교와 세인트앤드루스-에든버러 대교구의 레오 쿠슐리 대주교도 주요 인물이다.

이 외에도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언급되어 있다.


  • 존 블랙 (순교자)
  • 성 블라흐마크
  • 알렉산더 캐머런 (사제)
  • 성 에이그의 돈난
  • 조지 더글러스 (순교자)
  • 윌리엄 깁슨 (순교자)
  • 존 잉그램 (순교자)
  • 성 마엘 루바
  • 이오나의 순교자
  • 성 존 오길비
  • 패트릭 프림로즈

5. 같이 보기


  • 주교 전쟁
  • 국가별 가톨릭교회
  •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가톨릭교회
  • 아일랜드의 가톨릭교회 (북아일랜드 포함)
  • 영국 가톨릭교회
  • 영국의 가톨릭 학교
  • 서부 제도에서의 가톨릭교
  • 가톨릭교회의 계층 구조
  •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교회 목록
  • 스코틀랜드의 수도원 목록
  • 교황, 총대주교, 수석 사제, 대주교, 주교 목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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