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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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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벌은 동양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폭군이나 암군을 유덕한 제후가 토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맹자는 이를 정당화하는 탕무방벌론을 제시했으며, 하 걸왕을 은 탕왕이 멸한 것, 은 주왕을 주 무왕이 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탕무방벌은 폭군을 토벌하여 백성을 구하는 영웅적 행위이나, 하극상이나 시역에 해당하여 충과 대의명분과 충돌하며,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이어졌다. 서양에서도 폭군 살해는 정당하다는 관념이 존재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중세, 르네상스를 거쳐 근현대까지 다양한 철학자, 사상가, 정치 지도자들이 폭군 살해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역사적으로는 많은 지도자들이 참칭 군주 살해라는 명목으로 사망했으며, 문학 작품에서도 폭군 살해는 인기 있는 소재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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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벌
개요
정의폭군이나 부당한 통치자를 살해하는 행위
관련 용어군주제에서 군주를 살해하는 행위는 반역죄에 해당됨
역사적 맥락
고대 그리스폭군 살해는 옹호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행위로 여겨짐
로마 시대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은 공화정 회복을 위한 시도로 간주됨
중세 시대토마스 아퀴나스는 극단적인 폭정에 대한 저항을 옹호함
르네상스 시대군주국 반대론자들은 폭군 살해를 정당화함
에티엔 드 라 보에티는 《자발적 복종》에서 폭정의 근원을 분석함
근대 시대폭군 살해는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사용됨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 처형은 폭군 살해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음
현대 시대폭군 살해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나타남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여러 독재자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음
철학적 논쟁
정당성폭군 살해는 억압적인 통치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음
그러나 법치주의와 질서 유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비판도 존재함
윤리적 문제폭군 살해는 살인이기 때문에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함
개인의 권리와 사회 전체의 이익 사이의 충돌을 보여줌
정치적 영향폭군 살해는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으며, 새로운 폭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음
그러나 억압적인 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음
법적 측면
법률대부분의 국가에서 폭군 살해는 불법으로 간주됨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있음
정당방위극단적인 경우, 폭군 살해는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음
그러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됨
관련된 인물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게이톤기원전 514년, 아테네의 폭군 히파르코스를 암살함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주의자
샤를로트 코르데1793년, 프랑스 혁명 지도자 장 폴 마라를 암살함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쳤으나, 암살당함
같이 보기
참고 문헌
외부 링크

2. 동양의 방벌

동양에서 방벌의 개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맹자』는 무도한 천자를 덕 있는 제후가 토벌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탕무방벌론(湯武放伐論)을 제시했다. 이는 고대 중국은나라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몰아낸 역사적 사례에서 유래한 용어이다.[60]

선양이 이상적인 계승 방식으로 여겨지던 고대와 달리, 하나라 이후 세습 제도가 정착하면서 왕조 교체 시 방벌이 나타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명확한 최초의 방벌은 주 무왕이 은 주왕을 토벌한 사례로 간주된다. 그러나 맹자가 역성혁명의 논리로 방벌을 정당화했음에도, 이후 중국 역사에서는 실제 방벌보다는 찬탈 후 선양으로 포장하거나 이민족에 의한 정복 형태로 왕조가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탕무방벌은 폭군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하는 행위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군주를 살해하는 하극상이자 시역이라는 점에서 유교의 핵심 가치인 (忠)이나 대의명분과 충돌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방벌의 정당성 여부는 후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61][62]

2. 1. 유래와 개념

동양에서 방벌(放伐)의 개념은 오랜 유래를 가진다. 『맹자』에서는 천자가 무도한 폭군이나 암군일 경우, 천하와 백성을 위해 덕망 있는 제후가 그 천자를 토벌하는 것을 방벌이라 칭하며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탕무방벌론을 제시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은나라 탕왕주나라 무왕이 각각 폭군을 몰아낸 역사적 사례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탕무방벌'''(湯武放伐)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천자의 자리는 덕이 있는 인물에게 평화적으로 계승되는 선양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기』 등에 따르면 하나라 시대에 이르러 혈통에 따른 세습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세습 왕조가 교체될 때 방벌이 일어나게 되었다. 최초의 방벌 사례로는 하나라 말기 은(상)의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을 토벌한 것을 꼽는다. 다만, 하나라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므로,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확인되는 최초의 방벌은 은(상) 말기 의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토벌한 사례이다.

맹자역성혁명의 논리를 통해 방벌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중국 역사에서 방벌의 형태로 왕조가 교체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 시대 이후의 왕조 교체는 주로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찬탈(유혈 쿠데타)을 일으킨 뒤 이를 선양으로 포장하거나, 한족 이외 민족의 침입으로 기존 왕조가 멸망하는 정복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폭군이나 참주를 살해하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보는 관념이 존재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의무론』,[63] 세네카의 『헤라클레스의 광기』[64] 등에서 이러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후기에는 교황권과 세속 권력의 대립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요안네스 사레스베리엔시스와 같은 기독교 철학자들이 이를 신앙의 문제(“폭군에 대한 반역은 신에 대한 순종이다”, 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eng)와 연결시켜 폭군방벌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탕무방벌은 폭군을 토벌하여 백성을 구하는 영웅적인 행위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이자 시역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유교의 핵심 가치인 이나 대의명분과 충돌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탕무방벌의 정당성 여부는 후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인물/학파입장주요 논거
맹자긍정주왕은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어겼으므로 더 이상 군주가 아닌 일부(一夫, 한낱 사내)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를 죽이는 것은 주군 살해의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60]
고학긍정(구체적인 논거는 원문 자료에 명시되지 않음)
야마가타 다이니긍정(구체적인 논거는 원문 자료에 명시되지 않음)
야마자키 안사이부정탕왕이나 무왕의 방식보다는 문왕처럼 끝까지 을 지키는 태도를 지지했다.[61][62]
우에다 아키나리부정국학자의 입장에서 저서 『우게츠 이야기』의 "백봉" 편에서 맹자의 방벌 긍정론을 비판했다.


2. 2. 역사적 사례

동양에서 방벌의 개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맹자』에서는 천자가 무도한 폭군이나 암군일 경우, 천하와 백성을 위해 덕망 있는 제후가 그 천자를 토벌하는 것을 방벌(放伐)이라 칭하며,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탕무방벌론을 제시했다. 이는 고대 중국의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사례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천자의 자리는 덕망 있는 사람이 다른 덕망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는 선양 방식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하나라 시대에 이르러 혈통에 따른 세습 제도가 확립되었고, 이후 세습 왕조가 교체될 때 방벌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폭군 걸왕을 은나라의 탕왕이 토벌한 것이 최초의 방벌로 여겨진다. 다만, 하나라의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므로,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확인되는 최초의 방벌은 은나라 말기 폭군 주왕을 주나라의 무왕이 토벌한 사례이다.

맹자역성혁명의 논리를 통해 방벌의 정당성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중국 역사에서 방벌의 사례는 드물게 나타난다. 진·한나라 시대 이후 왕조 교체는 주로 찬탈(유혈 쿠데타)을 통해 이루어진 뒤 선양의 형식을 빌리거나,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기존 왕조가 멸망하는(정복)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탕무방벌은 폭군을 토벌하여 백성을 구하는 영웅적인 행위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주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이자 시역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이나 대의명분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어, 탕무방벌의 정당성 여부는 후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탕무방벌에 대한 주요 학자들의 견해'''
인물입장주요 논거
맹자긍정주왕은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어겼으므로 더 이상 군주가 아닌 일부(一夫, 한 사내)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를 토벌하는 것은 주군 살해의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60]
고학・야마가타 다이니긍정방벌을 긍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야마자키 안사이부정탕왕이나 무왕의 방벌보다는, 문왕처럼 끝까지 을 지키는 태도를 더 높이 평가했다.[61][62]
우에다 아키나리부정국학자의 입장에서 저서 『우게츠 이야기』의 "백봉" 편에서 맹자의 방벌 긍정론을 비판했다.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폭군이나 참주를 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상이 존재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의무론』,[63] 세네카의 『헤라클레스의 광기』[64] 등에서 이러한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후기에는 교황권과 세속 권력의 대립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요안네스 사레스베리엔시스와 같은 기독교 철학자들이 이를 신앙의 문제와 결부시켜 "폭군에 대한 반역은 신에 대한 순종이다(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lat)"라는 명제 아래 폭군방벌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2. 3. 맹자의 방벌론과 그 이후

맹자』에서는 무도한 천자(폭군 또는 암군)를 천하와 백성을 위해 덕 있는 제후가 토벌하는 것을 방벌(放伐)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은나라 탕왕주나라 무왕의 고사를 들어 '''탕무방벌론'''(湯武放伐論)을 제시했다. 맹자는 은나라 주왕처럼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저버린 자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한 사내[일부(一夫)]'에 불과하므로, 그를 제거하는 것은 시역(弑逆)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60]

원래 삼황오제 시대에는 덕 있는 군주가 다음 통치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선양이 이상적인 계승 방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하나라 시대에 이르러 세습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왕조 교체 시 방벌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라 걸왕을 은나라 탕왕이 몰아낸 것이 최초의 방벌로 알려져 있지만, 하나라의 역사적 실재성은 아직 논란이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명확한 최초의 방벌은 은나라 주왕주나라 무왕이 토벌한 사례로 본다.

하지만 맹자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음에도, 진· 시대 이후 중국 역사에서 실제 방벌을 통한 왕조 교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왕조 교체는 쿠데타를 통한 찬탈 이후 선양의 형식을 빌리거나,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기존 왕조가 멸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의무론』,[63] 세네카의 『헤라클레스의 광기』[64] 등에서 폭군이나 참주를 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관념이 존재했다. 중세 후기에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이라는 배경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요안네스 사레스베리엔시스 등 기독교 철학자들이 이를 신앙의 문제(“폭군에 대한 반역은 신에 대한 순종이다”, 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eng)와 결부시켜 폭군방벌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탕무방벌은 폭군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하는 영웅적인 행위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군주를 살해하는 하극상이자 시역이라는 점에서 유교의 핵심 가치인 (忠)이나 대의명분과 충돌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탕무방벌의 정당성 여부는 후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 긍정론: 맹자는 앞서 언급했듯 방벌을 긍정했다. 일본의 고학파나 야마가타 다이니 등도 방벌을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 부정론: 야마자키 안사이는 탕왕이나 무왕보다는 끝까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 주 문왕의 태도를 지지하며 방벌을 부정했다.[61][62] 국학자 우에다 아키나리 역시 『우게츠 이야기』 권1 "백봉"에서 맹자의 방벌 긍정론을 비판했다.

2. 4. 탕무방벌에 대한 논쟁 (일본어 위키 텍스트에서 발췌)

탕무방벌은 폭군을 토벌하여 백성을 구한다는 영웅적인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이자 시역에 해당한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이 때문에 유교의 중요한 가치인 이나 대의명분과 충돌하게 되었고, 후대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탕무방벌의 정당성에 대한 오랜 논쟁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긍정론자는 맹자이다. 그는 주왕처럼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저버린 자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라 평범한 한 사내, 즉 '일부(一夫)'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주왕을 토벌한 것은 주군 살해의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방벌을 정당화했다.[60] 일본의 고학파 학자나 야마가타 다이니 등도 방벌을 긍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 방벌을 부정하는 입장도 있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탕왕이나 무왕의 방벌보다는 문왕처럼 끝까지 신하로서의 을 다하는 태도를 지지하며 방벌에 비판적이었다.[61][62] 또한, 국학자 우에다 아키나리는 자신의 저서 『우게츠 이야기』의 "백봉" 편에서 맹자의 방벌 긍정론을 국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3. 서양의 폭군 살해론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폭군 살해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존재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의무론』,[63] 세네카의 『헤라클레스의 광기』[64] 등에서는 폭군이나 참주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폭군 살해 개념은 고대부터 정치 및 법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5]

중세 후기에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요안네스 사레스베리엔시스(솔즈베리의 존) 등 기독교 철학자들이 이를 신앙의 문제(“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 폭군에 대한 반역은 신에 대한 순종이다)와 결부시켜 폭군 살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서양의 폭군 살해에 대한 사상적 흐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시작으로 중세,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논의되어 왔다.

3. 1.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폭군 살해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존재했다. 왕위 찬탈 역시 정치 이론의 대상이 되었으며, 정당화된 형태의 살인 범죄로 간주되어 법철학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5]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 『정치가』에서 폭력적인 폭군을 선량하고 "진정한 왕"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묘사했다.[10]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폭정을 다른 모든 유익한 정부 형태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폭군 살해가 주로 폭군의 죽음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보았지만, 개인적 이득 없이 명예를 위해 행동하거나 공동선을 위해 행동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언급했다.[6]

로마 공화국 시대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그의 저서 『의무론』에서 폭군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7] 키케로는 특정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폭군을 살해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통치자가 법을 어기고 백성을 억압하는 폭군이 된다면, 시민들은 국가를 보호하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폭군 살해와 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의 안녕과 시민의 보호가 폭군의 생명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8][9]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역시 비극 『헤라클레스의 광기』에서 폭군 살해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10] 세네카는 폭정에 저항하는 행위의 복잡하고 비극적인 본질을 탐구했다. 그는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억압적인 통치자에 맞서는 사람들이 겪는 심리학적, 윤리적 갈등을 묘사했다. 작품 속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광기와 엄청난 힘의 무게 속에서 고뇌하며, 이는 부당한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세네카는 등장인물을 통해 폭군 살해의 도덕적 복잡성과 정당성을 탐구하고, 폭정에 맞설 때 발생하는 내적, 외적 갈등을 강조했다.[11][12]

그리스 출신의 로마 시대 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전기 작품, 특히 『영웅전』에서 폭군 살해를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는 행위로 묘사했다. 그는 로마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나, 코린토스를 구하기 위해 폭군이었던 자신의 형제를 죽인 코린토스의 티몰레온 같은 인물들을 통해 이러한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러한 행동이 공동선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라고 칭찬하며, 시민적 미덕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된 폭군 살해는 집단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정당하고 필요한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13] 이러한 관점은 공동선에 기여한다면 폭군의 제거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 등 이전 철학자들의 견해와도 맥을 같이 한다.[14][15]

3. 2. 중세 사상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의무론』,[63] 세네카의 『헤라클레스의 광기』[64] 등에서 폭군이나 참주를 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관념이 있었다. 왕위 찬탈은 정치 이론의 주제가 되기도 했으며, 정당화된 형태의 살인 범죄로 간주되어 법철학에서 딜레마적인 사례로 다루어졌는데, 이러한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했다.[5]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틀 안에서 폭군 살해의 도덕적, 윤리적 함의에 대해 논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폭정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지만, 기독교 윤리의 더 광범위한 원칙과 폭력 및 무질서의 가능성에 비추어 그러한 행동을 신중하게 평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저술은 불의한 통치자에 반대해야 할 필요성과 폭력적 저항을 통해 더 큰 해악을 초래할 위험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면서, 미묘한 관점을 반영한다.[16] R. A. 마르쿠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폭군 살해에 대한 접근 방식은 폭정의 도덕적 혐오감을 인식하면서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무정부 상태를 방지하는 그의 전반적인 관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다.[17] 반면, 나지안의 그레고리우스[18]와 크리소스토무스[19]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죽음을 폭군 살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신의 심판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율리아누스의 죽음을 이교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보여주는 증거로 강조했다.[20]

중세 시대 동안,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책에서는 기독교인이 세속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언급했다.[21] 중세 후기에 교권과 속권의 대립이라는 맥락 속에 스콜라 철학 철학자 솔즈베리의 존은 특정 조건 하에서 폭군 살해를 옹호한 최초의 중세 기독교 학자였으며, 이는 1159년경에 쓰여진 ''폴리크라티쿠스''에서 나타난다. 그의 이론은 국가를 모든 구성원이 공공의 유용성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정치적 유기체로 보는 그의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이 정치 공동체의 통치자가 폭군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특징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다른 지체와 기관들은 공공 복지와 신에 대한 의무에 의해 묶여 폭군을 바로잡고 궁극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23]

토마스 아퀴나스는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에 대한 주석에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의 예를 사용하여 불의한 권위에 대한 불복종뿐만 아니라 "폭군을 죽여 조국을 해방시키는 자"에 대한 변론을 제시했다. 아퀴나스에게 "권위에 의해 명령된 것이 그 권위가 구성된 목적에 반대될 때... 권위에 복종할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폭군의 불경한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죽음을 당한 성스러운 순교자들처럼, 불복종할 의무가 있다."[24] 토마스 아퀴나스, 요안네스 사레스베리엔시스 등 기독교 철학자들은 이를 신앙의 문제(“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와 결부시켜 폭군방벌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3. 3. 르네상스에서 계몽주의 시대까지

왕위를 빼앗는 행위는 정치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법철학에서는 정당화된 살인 범죄로 간주되어 딜레마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했다.[5]

1408년, 신학자 장 프티는 부르고뉴 공작 공포공 요한에게 살해당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사건 이후, 성경 사례를 들어 폭군 살해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통치자가 공익에 위협이 되면 폭군 살해는 허용될 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성하고 도덕적인 법을 지키기 위해 폭군에 맞선 성경 인물들의 행동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프티의 주장은 큰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회는 그의 견해를 파문했다. 정당한 권위와 통치자의 신성함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25][26]

1556년 존 포넷은 ''A Shorte Treatise of Politike Powereng''에서 국민이 자연법과 신성법의 수호자이며, 통치자가 신탁을 위반하면 권력을 상실하고 강제로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27] 특히 군주참칭론자들은 폭군 살해 이론을 발전시켰다. 예수회 신부 후안 데 마리아나는 1598년 저서 ''De rege et regis institutionelat''에서 "철학자와 신학자 모두 무력으로 국가를 장악하고 법적 권리나 시민의 승인 없이 통치하는 군주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기술하며 이들의 견해를 대변했다.[28][7] 예수회의 경우론 역시 비슷한 이론을 제시했으나, 블레즈 파스칼은 ''지방의 편지''에서 이를 비판했다.[29] 존 밀턴도 ''군주와 치안 유지'' (1649)에서 폭군 살해의 역사를 다루며 필요할 경우 이를 옹호했다.[30]

반면,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 (1651)에서 폭군 살해가 정당하다는 생각은 시민 사회의 안정을 위해 억눌러야 할 해로운 교리 중 하나라고 보았다. 홉스는 이러한 주장이 사람들이 통치자를 폭군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죽일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31]

존 로크는 ''정부론''(1689)에서 국민이 자신들의 자연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를 전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정당한 저항의 한 형태로 폭군 살해를 포함시켰다. 로크에 따르면, 폭군은 본질적으로 국민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므로 통치할 권리를 상실하며, 이때 자연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폭군을 제거하는 것은 시민의 도덕적 의무가 된다. 생명, 자유, 재산 보호를 기본권으로 강조한 로크의 정치 이론은 현대 민주주의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32][33]

장 자크 루소는 ''사회 계약론'' (1762)에서 일반의지 개념을 제시하며, 이에 반하는 폭군을 전복할 국민의 권리를 주장했다. 루소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일반의지에 따르지 않는 정부는 정당성이 없다고 보았다. 이는 국민이 사회 계약을 위반한 폭군을 폐위시킬 권리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루소의 저작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정치적 정당성과 인민주권 논의에서 핵심적인 텍스트로 평가받는다.[34][35]

3. 4. 현대적 관점

왕위 찬탈은 정치 이론이 될 수 있으며, 정당화된 형태의 살인 범죄로 간주되어 법철학에서 딜레마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했다.[5]

벤자민 프랭클린의 미국 국장 제안에는 "폭군에 대한 반역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한 백성이 오랫동안 폭군 아래 고통받았고 모든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축출 수단을 소진했을 때,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보았다.[36] 그는 폭군 살해를 자유와 정의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여겼다. 미국 남북 전쟁의 영향을 받은 링컨의 견해는 폭정에 대한 폭력적 저항에 대한 윤리적 논쟁을 반영하며, 폭군을 제거하는 것이 민주적 통치와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도덕적 의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37][38] 아이러니하게도 링컨 자신은 1865년, 정부 전복을 위한 실패한 음모의 일환으로 암살당했으며, 암살범은 sic semper tyrannis|시크 셈페르 티란니스la("폭군에게는 항상 이렇게")를 외쳤다고 전해진다.[39]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1922)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에서 주권의 본질과 예외 상태를 다루었다. 슈미트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실존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정상적인 법적 질서가 중단될 수 있으며, 여기에는 폭군 살해와 같은 극단적인 조치에 대한 정당성이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생각은 법적, 정치적 권위의 한계에 대한 논의에서 영향력이 컸지만 동시에 많은 논란을 낳았다.[40][41]

레오 스트라우스는 『폭정에 대하여』(1956)에서 폭정에 대한 저항에 관한 고전적, 현대적 논의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스트라우스는 역사적 사례와 철학적 논쟁을 통해 폭정에 반대하는 것의 철학적 의미와 폭군 살해의 잠재적 정당성을 분석하며, 폭군에 저항하는 행위의 도덕적 복잡성을 탐구했다.[42][43]

한나 아렌트는 저서 『폭력에 대하여』(1970)에서 권력, 폭력, 권위의 본질을 탐구했다. 아렌트는 폭력이 특정한 상황, 특히 억압적인 정권에 맞서고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될 때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폭군 살해에만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분석은 폭정에 대한 폭력적 저항의 윤리적 정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44][45]

존 롤스는 주로 정의 이론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의론』(1971)에서 불의한 권위에 대한 시민 불복종과 저항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다루었다. 롤스는 정부가 정의와 공정성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며 폭정적으로 행동할 때, 시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폭군 살해가 포함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46][47]

마이클 월저는 『정의로운 전쟁과 불의한 전쟁』(1977)에서 전쟁과 저항의 윤리를 검토하며, 폭군 암살과 관련된 도덕적 고려 사항을 포함시켰다. 월저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더 넓은 맥락에서 폭군 살해를 논하며, 어떤 경우에는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폭군을 살해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8][49]

데이비드 조지는 『고전적 폭군 살해와 현대적 테러리즘의 구분』(1988)에서 테러리즘은 폭군 살해로 부정되어야 할 폭정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50] 그는 폭군 살해가 공포와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 수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조지의 견해에 따르면, 폭군의 암살은 억압적인 구조를 해체하고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는 해방의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는 폭군 살해를 정치적 폭력의 윤리에 대한 더 넓은 담론 안에 위치시키며, 폭정을 제거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제안한다.[51]

오이페 오도노휴는 저서 『폭정 그리고 세계 법질서』(2021)에서 세계 법질서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폭정과 폭군 살해의 개념을 탐구한다. 오도노휴는 폭군 살해의 역사적, 철학적 기초를 파고들어 현대 정치 사상에서 그 진화와 관련성을 검토한다. 그녀의 분석은 폭군 살해와 세계 정의, 주권, 국제법의 문제를 교차시키며, 폭력을 통한 폭정 저항 행위가 현대 법적, 윤리적 틀에서 어떻게 여겨지는지에 대한 미묘한 이해를 제공한다.[52]

4. 역사 속 폭군 살해 사례

역사를 통틀어 많은 지도자들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목 아래 살해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514년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암살되었는데, 이들은 최초의 '참주 살해자'로 기록된다.[4] 이 사건 이후 '참주'라는 용어는 점차 객관적 기준 없이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많은 통치자들이 반대파에게는 폭군으로 여겨졌지만, 지지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참주로 여겼으며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비유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암살 당시 sic semper tyrannis|시크 셈페르 티란니스la(항상 폭군에게는 이렇게 되리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폭군 살해가 항상 의도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은 로마 공화정의 부활 대신 로마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이후 다른 암살 시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카이사르 이후에도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등 여러 로마 황제들이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26]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동로마 제국에서도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군중에 의해 살해되는 등[57] 폭군 살해는 계속되었다.

폭군 살해는 종종 혁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도 했다. 성공적인 혁명 과정에서 폭군으로 지목된 지도자가 살해되거나, 반대로 특정 인물에 대한 살해가 혁명적 격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혁명 중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러시아 혁명 이후의 니콜라이 2세,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등이 혁명기에 처형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암살자들의 운명은 다양했다.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처럼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안토니오 데 라 마사, 김재규[54], 할리드 이슬람불리[55]처럼 체포되어 재판 후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히파르코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 제2차 세계 대전베니토 무솔리니를 처형했다고 주장한 발터 아우디시오[57][56]처럼 반란 상황 속에서 행동하여 이후에도 활동하거나, 새뮤얼 도, 모하마드 나지불라, 무아마르 카다피[57]처럼 내전이나 혼란 속에서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4. 1. 고대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동상


고대 그리스에서 '참주(Tyrant)'라는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지도자 중 한 명인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514년, 최초의 참주 살해자로 알려진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암살당했다.[4] 이 사건 이후 '참주'는 객관적인 기준 없이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많은 통치자들이 반대파에게는 폭군으로 여겨졌지만, 지지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참주 살해는 의도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표적인 예로,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로마 공화정을 복원하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했지만, 이는 오히려 로마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카이사르 암살은 이후의 암살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암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칼리굴라는 41년에 카시우스 카에레아와 다른 친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고, 도미티아누스는 96년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집사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당했다.[26] 2세기 후반의 황제 코모두스는 그의 누이 루킬라가 사주한 것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지만, 결국 지나친 폭정으로 인해 성공적인 쿠데타의 희생양이 되었다.[53] 이 외에도 클라우디우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등 많은 황제들이 내부의 음모로 암살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동로마 제국에서는 참주 살해가 계속되었다. 1185년,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는 성난 군중에게 붙잡혀 기둥에 묶인 채 구타당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살해당했다.[57]

히파르코스를 암살한 하르모디우스는 현장에서, 아리스토게이톤은 고문 끝에 살해되었으며, 카이사르 암살의 주요 공모자들 역시 살해되거나 자살을 강요당하는 등 암살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4. 2. 중세 및 근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방벌은 동로마 제국에서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는 1185년 군중에게 붙잡혀 기둥에 묶인 채 구타당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살해당했다.[57]

근대에 들어서도 방벌이라는 명분 아래 암살이 이루어지는 사례는 이어졌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참주로 간주했으며,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부스는 암살 당시 sic semper tyrannis|시크 셈페르 티란니스la(항상 폭군에게는 이렇게 되리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방벌은 종종 혁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성공적인 혁명 과정에서 방벌이 일어나거나, 반대로 방벌이 혁명적 격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 국민 공회 의장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부터 1794년까지 이어진 공포 정치를 주도한 후 국민 공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1917년 10월 혁명 이후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1918년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되었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때는 불만을 품은 루마니아 인민군 군인들이 공산주의 지도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를 체포하여 약식 재판을 거쳐 사격 분대에 의해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많은 암살자들은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이후 처형되는 운명을 맞았다. 1956년 니카라과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를 저격한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즉석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몇 시간 만에 처형되었다. 1961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를 암살한 안토니오 데 라 마사와 공모자들도 처형되었다. 1979년 대한민국 독재자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54]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에 가담했던 젊은 보스니아 조직원 5명은 교수형을 당했고, 실제 총격을 가한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포함한 11명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한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 조직원 할리드 이슬람불리 등 3명도 처형되었다.[55]

공개적인 반란 상황에서 방벌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 경우 암살자들이 도주하거나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 가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저항 운동 시기, 발터 아우디시오는 자신의 유격대가 1945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납치하여 사격 분대로 처형했다고 주장했다.[57][56] 아우디시오는 이후 이탈리아 하원과 이탈리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무솔리니 처형의 정확한 정황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0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새뮤얼 도는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 군인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를 체포하여 살해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중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시르테 전투에서 불분명한 상황 속에 사망했다.[57]

4. 3. 현대

현대에도 독재자나 권력자를 '참주'로 규정하고 살해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존 윌크스 부스는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하면서 그를 참주로 여겼다고 기록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니콜라이 2세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1918년에 처형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저항 운동 시기에는 발터 아우디시오가 이끄는 유격대가 1945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처형했다고 주장했다.[57][56]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몇 시간 후 처형되었다.

많은 암살자들은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체포 후 처형되었다. 1956년 니카라과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를 암살한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1961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를 암살한 안토니오 데 라 마사와 공모자들도 처형되었다. 1979년 대한민국에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독재자 박정희를 암살했으며, 김재규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54] 1981년에는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 소속 할리드 이슬람불리 등이 독재적인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하고 처형되었다.[55]

혁명이나 내전 과정에서 지도자가 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중 군인들은 공산주의 지도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를 체포하여 재판 후 처형했다. 1990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새뮤얼 도는 반란군에게 고문당한 후 살해되었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은 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를 처형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중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시르테 전투에서 불분명한 상황 속에 사망했다.[57]

5. 문학 작품 속 폭군 살해

폭군은 인기 있는 문학적 장치이다. 많은 소설 작품들이 불의한 폭군을 전복하고 죽이려는 개인이나 집단의 투쟁을 다룬다. 흔히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왕좌를 찬탈한 자에 의해 폭정이 발생하며, 정당한 상속자를 복위시키는 결말을 맞이한다.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과 미디어에서 폭군 살해를 주제로 다루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5. 1. 다양한 장르에서의 폭군 살해

폭군은 인기 있는 문학적 장치이다. 많은 소설 작품들이 불의한 폭군을 전복하고 죽이려는 개인이나 집단의 투쟁을 다룬다. 흔히 폭정은 왕좌를 찬탈한 자에 의해 발생하며, 결말은 정당한 상속자를 복위시킨다. 아동 문학은 이 주제를 자주 다룬다. 민간 전승의 민담인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 행위가 등장하며, ''젤다의 전설''과 ''스타 폭스''와 같은 일부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예로는 왕정의 폭압적인 장악과 전복을 모두 다루는 ''라이온 킹''과 ''알라딘''이 있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 형제'', ''얼음과 불의 노래''와 같은 판타지 작품과 ''스타워즈'', ''닥터 후''와 같은 SF 시리즈 모두 폭군 살해를 다룬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줄리어스 시저'' 외에도 ''햄릿'', ''맥베스'', ''리처드 3세'' 등 여러 작품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58] 프리드리히 실러는 희곡 ''빌헬름 텔''과 발라드 ''디 뷔르샤프트''를 폭군 살해에 관한 기존의 전설에 기초했다. 이탈리아의 극작가, 시인, 철학자 비토리오 알피에리는 자신의 작품의 많은 부분을 이 문제에 할애했다.[59]

5. 2. 희곡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는 ''줄리어스 시저'' 외에도 ''햄릿'', ''맥베스'', ''리처드 3세'' 등 여러 희곡이 폭군 살해(방벌) 주제를 다루고 있다.[58] 프리드리히 실러는 기존의 폭군 살해 전설을 바탕으로 희곡 ''빌헬름 텔''과 발라드 ''디 뷔르샤프트''를 썼다. 이탈리아의 극작가이자 시인, 철학자인 비토리오 알피에리 역시 자신의 많은 작품에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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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인용 Assassinating Saddam: A Post-War View from International Law http://heinonlinebac[...] Denv. J. Int'l L. & Pol'y 199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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