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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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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는 1470년대에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난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해적이다. 그는 지중해에서 해적 활동을 시작하여, 형 오루츠 레이스와 함께 서지중해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이후 알제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에 귀순하여 알제 총독과 해군 제독을 역임했다. 그는 오스만 해군의 해상력을 강화하고,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신성 동맹을 격파하며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지배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545년 은퇴 후 이듬해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이스탄불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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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하이렛딘 바르바롯사 초상화
하이렛딘 바르바롯사 초상화
본명하이르 앗 딘 바르바루스
별칭바르바롯사 (붉은 수염)
하이렛딘
흐즈르 레이스
출생대략 1478년
출생지오스만 제국 레스보스 (현재의 그리스)
사망1546년 7월 4일
사망지오스만 제국 뷔위크데레 (현재의 튀르키예)
소속
국가오스만 제국
속령알제리 섭정
군사오스만 제국 해군
복무 기간대략 1500년–1545년
계급카푸단 파샤 (제독)
가족 관계
아버지야쿠프 아아
어머니카테리나
형제이샤크
오루츠 레이스
일야스
자녀하산 파샤
주요 전투
전투 목록알제 점령
알제 원정
알제 원정
마온 약탈
페뇬 데 알제 점령
셰르셸 원정
튀니스 정복
프레베자 해전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카스텔누오보 공방전
니스 공방전
리파리 약탈
이스키아 약탈

2. 어린 시절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의 본명은 흐즈르(Hızır|흐즈르tr)로,[50] 1470년대 전후(1466년[54]~1478년[55] 사이 추정) 오스만 제국령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스파히 출신의 야쿠프 아아(Yakup Ağa|야쿠프 아아tr)[56][6]였고, 어머니는 그리스인 카테리나(Κατερίνα|카테리나el)[57]였다. 그는 이스하크(İshak|이스하크tr), 우르지(Oruç), 일리아스(İlyas|일리아스tr) 등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해상 운송업을 도우며 어린 시절부터 바다 생활에 익숙해졌다.[59][49] 형제들은 이후 로도스 기사단 등을 상대로 한 사략선 활동에 뛰어들었으며,[49] 이 과정에서 동생 일리아스가 사망하기도 했다.[49] 훗날 오스만 술탄으로부터 '하이레딘'(خير الدين|카이르 앗딘ar, Khair ad Din)이라는 존칭을 하사받았으며,[49] 유럽에서는 형 우르지와 함께 '바르바로사'(Barbarossa|바르바로사it, 붉은 수염)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2. 1. 성장 배경

튀르키예 서부 에게 해에 위치한 레스보스 섬 태생이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70년대 전후인 1466년[54]에서 1478년[55] 사이로 추정된다. 레스보스 섬 내 팔라이오키포스(Παλαιόκηπος|팔라이오키포스el, 현재 게라)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1] 그의 본명은 흐즈르(Hızır|흐즈르tr)였다.[50]

아버지는 야쿠프 아아(Yakup Ağa|야쿠프 아아tr)[56]로, 오스만 제국의 봉건 기병인 스파히 출신이었다.[6] 야쿠프의 출신에 대해서는 터키인[14][7][8][9][10] 또는 알바니아인[11][12][13]이라는 설이 있으며, 얀니차(현재 중앙 마케도니아 지역)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 어머니는 레스보스 섬 출신의 그리스인 카테리나(Κατερίνα|카테리나el)[57]로,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으며 정교회 사제의 미망인이었다.[6][12][16] 흐즈르는 4남 2녀 중 막내[57](혹은 셋째[50])로 태어났으며, 형제로 이스하크(İshak|이스하크tr), 우르지(Oruç), 일리아스(İlyas|일리아스tr)가 있었다.[59] 누이 두 명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버지 야쿠프는 1462년 제노바 공화국의 가틸루시오 가문이 지배하던 레스보스 섬을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는 전쟁에 참여하였고,[58] 그 공로로 섬의 보노바(Bonova) 마을에 봉토를 하사받았다.[56] 그는 도공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은퇴하여 해상 운송업을 경영했다.[59]

네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장남 이스하크는 재정을 담당하며 미틸리니에 남았고,[59][49] 우르지와 일리아스는 배의 운항을 맡아 아나톨리아, 레반트, 시리아, 이집트 등지에서 활동했다.[59][49] 흐즈르는 처음에는 도자기 일을 도왔으며, 주로 테살로니키를 거점으로 에게 해에서 활동했다.[49] 오스만 제국의 연대기 작가 시난 샤오슈의 기록에 따르면,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상선을 타며 해상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한다.[59] 이후 형제들은 로도스 기사단 등을 상대로 사략선 활동을 시작했다.[49] 막내 동생 일리아스는 로도스 기사단의 공격으로 사망했다.[49]

'하이레딘'(خير الدين|카이르 앗딘ar, Khair ad Din)은 '종교의 번영' 또는 '종교의 선함'을 의미하는 아랍어식 존칭으로, 훗날 오스만 술탄이 하사한 이름이다. 유럽에서는 그의 형 우르지와 함께 '바르바로사'(Barbarossa|바르바로사it, 붉은 수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2. 해적 입문

하이레딘은 에게해의 레스보스 섬 출신으로, 아버지 Yakup Ağa|야쿱 아가tr와 어머니 카테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야쿱은 알바니아계 혹은 튀르크계 시파히였으며[49], 어머니는 미틸리니 출신 동방 정교회 사제의 미망인이었다. 부부는 이스하크, 우루지, 하이레딘(본명: Hızır|흐즈르tr), 일리아스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49][50]

네 형제는 모두 아버지를 도우며 지중해북아프리카에서 선원 생활을 하며 해상 업무와 국제 무역에 종사했다. 처음 선박 일에 뛰어든 것은 우루지였고, 곧이어 일리아스가 합류했다. 하이레딘 역시 자신의 배를 얻어 해상 경력을 시작했다. 형제들은 처음에는 평범한 선원이었으나, 로도스 섬에 근거지를 둔 성 요한 기사단의 사략 행위에 맞서기 위해 점차 사략선 활동으로 전환했다(1522년까지 기사단은 로도스에 주둔). 장남 이스하크는 미틸리니에 남아 가문의 재정을 관리했고, 우루지와 일리아스는 주로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하는 레반트 지역에서 활동했다. 하이레딘은 에게해에서 주로 테살로니키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함대 사령관 하이레딘 바르바로사, 아고스티노 베네치아노의 판화 (c. 1490 – c. 1540)


아버지가 사망한 후, 우루지와 일리아스는 레바논 트리폴리에서 무역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성 요한 기사단의 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일리아스는 사망하고 우르지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59][17] 우르지는 로도스 섬에서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예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석방 과정에 대해서는 하이레딘이 몸값 협상을 시도했으나 우르지가 거절하고 이집트로 팔려갔다가 3년 뒤 탈출했다는 설[59][60]과, 몸값 지불로 풀려났다는 설[17]이 있다.

석방 혹은 탈출 후, 우르지는 본격적으로 해적 활동을 시작했고, 하이레딘 역시 형을 따라 해적의 길을 걷게 되었다.[60] 우루지는 뛰어난 선원이었으며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17] 그는 안탈리아로 가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왕자이자 총독이었던 셰흐자데 코르쿠트로부터 18척의 갤리선을 지원받아 성 요한 기사단과 싸우라는 임무를 받았다.[18] 이후 코르쿠트가 마니사 총독이 되자 우루지는 이즈미르 항구에서 24척의 더 큰 함대를 지원받아 이탈리아 풀리아로 가는 오스만 해군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3. 지중해 해적

(내용 없음)

3. 1. 공공의 적

서로마 제국이 쇠락하면서 지중해의 질서가 무너지자 해적들이 증가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해적은 지브롤터를 건너 북아프리카카르타고를 점령한 반달족이다. 이들은 서기 455년에 서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마저 약탈하여[61][62][63]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이들의 약탈은 서로마의 몰락을 부추겼으며, 훗날 파괴 행위를 뜻하는 반달리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476년 서로마 멸망 후, 6세기 비잔틴 제국에 의해 잠시 옛 영광이 재현되는 듯했으나, 지중해는 다시 해적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7세기에 발흥한 이슬람 세력이 단기간에 급격히 팽창하면서 동-지중해,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정복하여 육상과 해상에서 비잔틴 제국을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력은 711년에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다. 이들의 힘을 등에 업은 북아프리카인들은 해상 강도 행위와 지중해 연안의 유럽 대륙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지중해의 주요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유럽을 압박하였다. 11세기경부터 유럽은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하였는데,[64] 자체적으로 또는 협력을 통해 해적들의 거점인 북아프리카 항구들을 공략하며 적극적인 소탕 작전을 펼쳤다. 이 시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높아져 잉여 생산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눈에 띄게 발전하였고, 안전한 해상 운송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64]

하이레딘 의 초상화, 1540년경


스페인군은 틀렘센오란의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한 아부 자얀에게 육로로 오루츠 레이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오루츠는 이 계획을 미리 알고 선제적으로 틀렘센을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틀렘센 함락 (1518) 과정에서 아부 자얀을 처형했다. 아부 자얀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인 셰이크 부하무드는 오란으로 도망쳐 스페인에 지원을 요청했다.

오루츠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 스스로 알제의 술탄이라고 선언한 후 내륙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밀리아나, 메데아, 테네스를 점령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사막을 통과하기 위해 대포에 돛을 다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517년, 오루츠 형제는 카포 리미티를 습격했고, 나중에는 카포 리주토, 칼라브리아를 공격했다.

1518년 5월, 카를 5세가 오란에 도착하여 셰이크 부하무드와 도시의 스페인 총독 디에고 데 코르도바의 영접을 받았다. 디에고 데 코르도바는 10,000명의 스페인 군인을 지휘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현지 베두인과 합류한 스페인군은 육로로 틀렘센을 향해 진군했다. 오루츠와 그의 동생 이샤크는 1,500명의 튀르크 병사와 5,000명의 무어인 병사들과 함께 도시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20일 동안 틀렘센을 방어했지만, 결국 가르시아 데 티네오가 이끄는 군대와의 전투에서 오루츠와 이샤크 모두 사망했다.

3. 2. 바르바리 해적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지역을 유럽인들은 바르바리(Barbary)[65]라고 불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해적들을 바르바리 해적이라 하였다. 이런 바르바리 해적들은 당시 북아프리카의 군주들에게 있어서, 좋은 수입원이자 노예 등 노동인력을 제공하였고, 유럽에 비해 척박하고 자원이 부족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필요로한 물품들의 공급원이었으며, 전시에는 부족한 군사력을 보강해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연안항구를 거점이나 은신처로 제공하면서 활동을 장려하고 후원하였다.[66] 바르바리 해적들이 선호하는 표적 중에 하나는 남미에서 금은 등을 실어오는 스페인 수송선이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 남미 개척을 통해 점차 경제적인 수익이 창출되었으나 해적들로 인해 피해가 늘어나자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2세(1452-1516)는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페드로 나바로(1460-1528)를 원정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509년부터 1512년까지 오랑, 베자이아, 알제, 튀니스 등을 정벌한 후[67][68] 그곳에 요새를 세웠다.[69] 요새에는 스페인군을 상주시켜 해적의 항구 출입을 막고 해적 활동을 봉쇄시켰다.[69] 스페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어 요새를 빼앗기고 조공까지 바쳐야 하는 등 바르바리 해안의 군주들은 불만이 많았으나 강대국인 스페인의 기세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4. 해적 활동

하이레딘은 형 우르지 레이스와 함께 에게 해에서 해적 활동을 시작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동지중해 장악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16세기 초 서지중해로 무대를 옮겼다. 이들은 튀니스를 거점으로 삼아 하프스 왕조 술탄의 허가 아래 활동하며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55] 초기에는 교황령, 시칠리아 왕국, 스페인 제국 등의 선박을 나포하며 명성을 쌓았고,[70] 특히 스페인에서 박해받던 무슬림들을 북아프리카로 구출하는 활동을 통해 형 우르지가 '바바 오루치'(아버지 오루치)라는 존칭을 얻었다. 이 별명은 유럽에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로 잘못 알려졌고, 훗날 하이레딘이 형의 사후 이 별명을 물려받게 된다.[52]

형제는 스페인이 점령한 북아프리카 도시들을 공략하기도 했으나, 베자이아 공격 중 형 우르지가 큰 부상을 입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71] 1516년, 알제의 요청으로 도시를 장악한 우르지는 스페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알제를 바치고 총독으로 임명되었다.[73] 그러나 1518년 텔렘센에서 우르지가 전사하자, 하이레딘은 그의 지위와 '바르바로사'라는 이름을 계승하고 알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74]

하이레딘은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의 지원을 받아 알제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으며,[19][20] 특히 1529년 스페인 세력의 거점이었던 페논 요새를 함락시키며 알제를 명실상부한 자신의 근거지로 만들었다.[77] 그는 알제를 바르바리 해적들의 주요 활동 기지로 삼아 서지중해 전역에서 활동했으며,[76] 이는 카를 5세가 이끄는 유럽 세력과의 지속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1535년 카를 5세의 대규모 원정으로 튀니스를 잠시 빼앗기기도 했으나,[81][82] 곧바로 스페인령 메노르카 섬을 공격하며 반격하는 등 끈질기게 저항했다.[84]

이후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1세의 부름을 받아 이스탄불로 향한 하이레딘은 오스만 제국 해군의 총사령관(카푸단 파샤)으로 임명되어 오스만 해군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78] 그의 지휘 아래 오스만 함대는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신성 동맹 함대를 격파하며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9] 이 승리로 하이레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중 한 명이자, 유럽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해적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해적 활동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 북아프리카에서의 오스만 세력 확장과 유럽 기독교 세력과의 해상 패권 다툼이라는 더 큰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4. 1. 튀니스 정착

서양식 하이레딘 바르바로사 묘사. 그의 삼지창은 해상력의 비유를 의미한다. (익명,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해상 교역이 위축되어 약탈 대상이 줄어들자, 우르지와 하이레딘 형제는 1502년경 활동 무대를 서지중해로 옮겼다.[55] 이들은 당시 하프스 왕조가 지배하던 튀니스의 술탄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4세 알-무타와킬을 만나 약탈품의 일부를 바치는 조건으로 항구 출입과 물자 조달 허가를 얻어냈다.

1503년, 우르지는 선박 3척을 더 확보하고 제르바 섬을 새로운 기지로 삼았으며, 히즈르(하이레딘)도 이곳에 합류했다. 1504년, 형제는 튀니스 술탄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라 굴레트 항구를 작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고, 술탄에게 전리품의 일정 비율(소스에 따라 1/3 또는 1/5[51])을 바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튀니스의 라 굴레타 항과 제르바 섬을 거점으로 삼은 형제는 소형 선단을 이끌고 서지중해에서 대담한 해적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같은 해(1504년), 우르지는 소형 갤리엇을 지휘하여 엘바 섬 근처에서 규모가 훨씬 큰 교황령 갤리 2척을 나포했다. 이후 리파리 근처에서는 시칠리아 왕국의 군함 '카발레리아'호를 나포했는데, 이 배에는 스페인에서 나폴리로 향하던 아라곤 출신 스페인 군인 380명과 스페인 기사 60명이 타고 있었다. 1505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해안을 습격했으며, 1506년에는 스페인 해군 범선을 공격하여 500명의 군인을 포획하는 등[70] 점차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공은 다른 유명 무슬림 해적들의 합류를 이끌었는데, 쿠르토을루(서양에서는 커토골리로 알려짐) 등이 대표적이다. 1508년, 형제는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 해안을 습격했으며, 특히 디아노 마리나 등이 포함되었다. 1509년에는 형제 중 한 명인 이샤크도 미틸리니를 떠나 라 굴레트에서 합류했다.

1504년부터 1510년 사이, 우르치는 기독교 스페인에서 박해받던 무슬림 무데하르들을 북아프리카로 수송하는 활동을 통해 명성을 더욱 높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바바 오루치'(아버지 오루치)라는 존칭을 얻었으며, 이 이름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발음이 비슷한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을 뜻하는 '바르바로사'로 변형되었다고 전해진다.[52] 훗날 하이레딘은 형 우르지의 사후 이 별명을 물려받게 된다.[52]

4. 2. 베자이아 공략

1512년, 형 우르지 레이스와 함께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의 베자이아를 공격했다. 베자이아는 1510년부터 스페인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곳이었다.[71] 이 공격은 추방당했던 베자이아의 옛 지배자가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8일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전투 중 형 우르지가 총에 맞아 왼팔을 크게 다치면서[71] 결국 베자이아 정복에는 실패했다. 이 부상으로 우르지는 이후 '은의 팔'(Gümüş Kol|귀뮈쉬 콜tr)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베자이아에서 퇴각하여 돌아가던 중, 우연히 조업 중이던 제노바 공화국 어선을 나포했다. 그런데 이 어선은 제노바와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조업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제노바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를 파견하여 우르지의 선단을 기습 공격했다.[72] 당시 선단의 지휘관인 우르지가 부상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기습으로 인한 피해는 매우 컸다. 이 사건은 하이레딘과 안드레아 도리아 사이에 오랜 악연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4. 3. 알제의 지배자

1516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알제의 통치자 살림은 우르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73] 그러나 알제에 도착한 우르지는 살림을 살해하고 도시를 장악했다. 살림의 아들은 오랑으로 도망쳐 스페인에 도움을 청했다. 우르지와 형제들은 지젤과 알제를 점령하여 기존 통치자였던 베니 지야드 왕조의 아부 하모 무사 3세를 몰아냈다. 알제에 남아있던 스페인인들은 항구 앞의 작은 섬인 페논으로 피신하여 카를 5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517년 봄, 프란시스코 데 베라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알제 연안에 도착했으나,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많은 전함이 침몰하면서 스페인의 알제 탈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알제 주변의 아랍 부족장들이 테네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우르지 형제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했다. 이로써 형제는 알제를 새로운 활동 근거지로 확립했다.[74]

16세기 알제의 조감도로, 댐으로 도시에 연결된 페논이 보인다.


우르지는 스페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알제 통치자의 지위를 버리고 1517년, 알제를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게 바쳤다. 셀림 1세는 알제를 오스만 제국의 ''산자크''(행정 구역)로 받아들이고, 우르지를 알제 총독 겸 서지중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예니체리, 갤리선, 대포 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우르지는 세력을 내륙으로 확장하여 밀리아나, 메데아, 테네스 등을 장악했다. 1517년, 스페인이 텔렘센의 통치자로 아부 자얀을 내세워 우르지를 공격하게 했으나, 오히려 우르지가 텔렘센을 함락시키고 아부 자얀을 처형했다.

1518년, 스페인 황제 카를 5세는 대규모 병력을 오랑에 파견하여 텔렘센 탈환을 시도했다. 디에고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1만 명의 스페인군과 현지 베두인 동맹군이 텔렘센으로 진격했다. 우르지와 그의 동생 이스하크는 1,500명의 투르크 병사와 5,000명의 무어인 병사로 맞섰으나, 20일간의 전투 끝에 두 형제 모두 전사했다.

형 오루치의 사망 이후, 하이레딘은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1519년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게 공식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지원을 요청했다.[19] 셀림 1세는 그에게 ''베일레르베이''(총독보다 높은 직위) 칭호를 수여하고, 예니체리, 갤리선, 대포 등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로써 하이레딘은 형의 지위, 이름(바르바로사), 그리고 임무를 공식적으로 물려받아 알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20]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1518년 12월에 텔렘센을 다시 점령했으며, 1519년에는 알제를 탈환하려던 스페인-이탈리아 연합 함대를 격파하며 알제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하이레딘은 알제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1529년 5월, 알제 항구 앞을 지키며 스페인 세력의 거점 역할을 하던 페논 섬의 요새를 마침내 함락시켰다. 이로써 알제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하이레딘은 알제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카브레라 섬을 점령하여 서지중해 활동을 위한 전략적 기지로 활용했다.

4. 4. 틀렘센 원정

1517년 9월, 자이얀 왕조(1236~1550)가 지배하던 틀렘센(알제리 서부)에서 후계 분쟁 해결을 위한 파병 요청이 들어왔다. 우르지 혼자 원정을 떠나 오랑 동쪽의 모스타가넴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며 틀렘센을 점령했다. 오랑의 스페인 주둔군 사령관 코마레스 후작은 새로 국왕에 즉위한 카를 5세에게 북아프리카의 상황을 알리고 우르지 토벌을 청원했다. 1518년 5월, 1만 명의 스페인 원정군이 진격해오자 수적 열세에 있던 우르지는 알제로 후퇴하던 중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우르지는 전사하였고, 동생 하이레딘은 알제를 계승하여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74] 이때부터 하이레딘은 Barbarossa|바르바로사ita(붉은 수염)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4. 5. 오스만의 알제 총독

형 우루즈가 1518년 텔렘센에서 전사하자, 동생인 후즈르(하이레딘)가 그의 지위와 임무, 그리고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을 계승했다. 알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바르바로사는 오랑으로 물러난 스페인군의 잠재적 위협에 직면했다. 그는 자력으로 알제를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오스만 제국에 사신을 보내, 알제를 제국의 속주로 편입하는 조건으로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당시 서지중해 진출을 모색하던 오스만 술탄 셀림 1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519년 바르바로사를 오스만 제국의 알제 총독이자 서지중해 해상 주지사(베일레르베이)로 공식 임명했다.[75] 이와 함께 예니체리 병사 2천 명과 갤리선, 대포 등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오스만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바르바로사는 주변 지역 지배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알제에서의 통치 기반을 다져나갔다. 1518년 12월에는 오스만 증원군을 이끌고 텔렘센을 스페인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바르바로사는 알제 항구를 해적들에게 전면 개방하여[76] 이곳을 지중해 최대의 해적 거점 항구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알제는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카를 5세는 해적의 소굴이 된 알제를 정벌하고자 스페인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휴고 제독이 이끈 5천 명의 병력과 5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알제 해역에서 강력한 태풍을 만나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76] 같은 해, 바르바로사는 알제를 되찾으려는 스페인-이탈리아 연합군의 공격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카를 5세는 이후에도 알제 문제 해결을 고려했지만, 1520년대 내내 스페인 내부의 코뮤네 반란, 이탈리아 전쟁, 독일 농민전쟁, 코냐크 동맹 전쟁,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침공(모하치 전투) 및 빈 공방전, 그리고 종교개혁으로 인한 독일 내 분열 등 제국 전역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 대처하느라 북아프리카의 해적 소탕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유럽 대륙의 혼란은 결과적으로 바르바로사가 알제를 중심으로 지중해에서 자신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가는 데 유리한 배경이 되었다.

4. 6. 페논 요새 공격

1529년 봄, 바르바로사알제 연안에 있는 작은 섬 패논을 공격했다.[77] 이 섬은 육지에서 약 200m 떨어져 있었으며, 1510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가 정복한 후 요새를 건설한 곳이었다. 요새에는 보통 200명 정도의 스페인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다. 보름간의 포격 끝에 요새가 무너졌고, 오스만 병사와 해적들이 진입했을 때는 55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바르바로사는 요새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돌을 이용해 섬과 육지를 잇는 제방을 쌓았다. 이로써 알제는 스페인의 감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알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바르바리 해적들은 서지중해에서 상선을 나포하거나 약탈하는 등 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여 연안 지역에 피해를 입혔다.

4. 7. 오스만의 해군 제독

1533년 쉴레이만 1세는 바르바로사를 이스탄불로 불러들였다.[78] 당시 오스만 제국지중해 연안으로 팽창하고 있었기에 강력한 해상 전투력이 필요했지만, 내륙의 유목민족에서 출발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해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약점 중 하나였다. 해양 능력은 단기간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다. 정복지의 해양 민족에게 의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지배 계층 대부분이 항해에 무지했으며, 해전의 양상도 과거의 등선육박전에서 대포 등 화약 무기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병참 보급 역시 육군과 달라 원거리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쉴레이만 1세는 경험이 풍부한 해적인 바르바로사가 짧은 역사의 오스만 해군을 발전시킬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쉴레이만 1세는 바르바로사를 오스만 해군의 제독으로 임명하고 해군 정비를 맡겼다. 바르바로사는 기대에 부응하여 수개월 만에 갤리선 60여 척을 건조하는 등 오스만 해군의 초석을 다졌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북아프리카 총독으로 지위가 승격되었고, 갤리선 40척을 하사받았다.[79] 1534년, 바르바로사는 귀국길에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하며 알제로 돌아왔다.

바르바로사의 함대가 프랑스 군과 연합하여 1543년 니스 공방전에서 도시가 함락되기 전에 공격했다.


바르바로사의 오스만 함대가 1543–44년 툴롱에서 겨울을 보냈다.
1543년,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를 돕기 위해 마르세유로 향했다. 그는 210척의 함대(갤리선 70척, 갤리엇 40척, 기타 군함 100척)를 이끌고 서부 지중해를 순항했으며, 이 함대는 터키 군인 14,000명을 포함하여 총 30,000명의 오스만 군대를 수송했다. 항해 중 메시나 해협을 통과하면서 레조 칼라브리아의 총독 디에고 가에타니에게 도시 항복을 요구했으나, 가에타니는 대포 사격으로 응답하여 오스만 선원 3명이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바르바로사는 도시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그는 이후 캄파니아와 라치오 해안에 상륙하여 테베레 강 하구에서 로마를 위협했지만, 프랑스가 교황령 보호를 위해 개입했다. 바르바로사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대신하여 여러 이탈리아 및 스페인 섬과 해안 정착지를 습격한 후, 1543년 8월 5일 니스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오스만 함대는 이후 앙티브 근처의 생트마르그리트 섬에 상륙한 뒤 산레모, 리구리아의 다른 항구, 모나코, 라 튀르비를 약탈했다. 프랑수아 1세는 툴롱을 오스만 함대의 겨울 숙영지로 제공했고, 도시는 6개월 동안 바르바로사의 통제 하에 놓였다. 이 기간 동안 툴롱에는 모스크와 노예 시장이 들어서는 등 터키 도시처럼 개조되었다.[33]

1543–44년 프랑스에서 그의 원정 중 바르바로사의 갤리선 모형,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


술레이만 1세가 이스탄불에서 바르바로사를 맞이하고 있다.


1544년 봄, 산레모를 두 번째로 공격하고 보르게토 산토 스피리토와 체리알레에 상륙한 후, 바르바로사는 또 다른 스페인-이탈리아 함대를 격파하고 나폴리 왕국 깊숙이 습격했다. 그는 이후 210척의 함대를 이끌고 제노바로 항해하여, 1540년 코르시카에서 잔네티노 도리아에게 체포되어 제노바 선박에서 갤리선 노예로 복역 중이던 투르구트 레이스를 석방하지 않으면 도시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바르바로사는 안드레아 도리아의 초청으로 제노바의 빌라 델 프린치페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두 제독은 3,500 금 두카트를 받는 조건으로 투르구트 레이스를 석방하는 데 합의했다.

바르바로사는 이후 프랑스 남부에 대한 스페인의 추가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154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술레이만 1세가 휴전에 합의하면서 이스탄불로 소환되었다.

1544년 5월 생트마르그리트 섬 항구를 떠난 후, 바르바로사는 세 번째로 산 레모를 공격했고, 바도 리구레 앞에 나타나자 제노바 공화국은 추가 공격을 막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그에게 지불했다. 1544년 6월, 바르바로사는 엘바 섬 앞에 나타나 피옴비노 영주를 위협하여, 10년 전 튀니스에서 스페인에게 체포되어 세례를 받았던 시난 레이스의 아들을 석방시켰다.[28] 그는 이후 토스카나의 그로세토 지방에서 카스틸리오네 델라 페스카이아, 탈라모네, 오르베텔로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그는 전년도에 미틸리니에서 자신의 아버지 집을 불태웠던 바르톨로메오 페레티의 무덤을 파괴하고 유해를 불태웠다.

그는 이후 몬티아노를 점령하고 포르토 에르콜레와 질리오 섬을 점령했으며, 치비타베키아를 공격하려 했으나 프랑스 특사 레오네 스트로치의 설득으로 포위를 풀었다.

오스만 함대는 이후 사르데냐 해안을 공격한 후 1544년 7월 이스키아에 상륙하여 도시와 포리오, 프로치다 섬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4,000명의 포로를 잡고 리파리 주민 약 2,000명에서 7,000명을 노예로 삼았다.[34][35] 그는 포추올리를 위협했으며, 잔네티노 도리아가 이끄는 갤리선 30척과 마주치자 그들을 시칠리아로 몰아 메시나로 피신하게 했다. 강한 바람으로 살레르노 공격은 실패했지만, 근처의 케이프 팔리누로에 상륙하는 데는 성공했다. 바르바로사는 이후 메시나 해협에 진입하여 카토나, 피우마라, 칼란나 (레조 칼라브리아 근처)에 상륙한 후 카리아티와 리파리에 다시 상륙했는데, 리파리는 15일간의 포격 끝에 점령했다. 이것이 그가 이탈리아 반도에 마지막으로 상륙한 기록이다.

그는 마침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고, 1545년 마지막 해상 원정을 떠나 스페인 본토의 항구를 폭격하고 마요르카와 메노르카에 상륙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보스포러스 해협의 뷔윅데레 지구(현재 사르예르 지역)에 궁전을 지었다.

바르바로사의 깃발


바르바로사의 깃발 상단에 있는 아랍 서예는 نَصرٌ مِنَ اللَّـهِ وَفَتحٌ قَريبٌ وَبَشِّرِ المُؤمِنينَ يَا مُحَمَّد|nasrun mina'llāhi wa fatḥhun qarībun wa bashshiri'l-mu’minīna yā muḥammadar로, "알라로부터의 승리와 임박한 정복;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 오 무함마드"로 번역된다. 이는 쿠란 61장 13절에서 인용한 구절에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을 추가한 것이다.[36]

아브라함 크레스케스


깃발의 네 개의 초승달 안에는 초기 이슬람 국가를 이끌었던 첫 네 명의 정통 칼리프, 즉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트만, 알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두 날을 가진 칼은 이슬람 역사에서 유명한 줄피카르를 나타내며, 이는 무함마드를 거쳐 알리에게 전해진 칼이다. 칼자루 왼쪽에는 작은 손 모양이 있다.[37]

칼날 사이에는 육각형 별이 그려져 있다. 이 별은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과 혼동될 수 있으나, 중세 시대에는 솔로몬의 인장으로 알려진 인기 있는 이슬람 상징이었으며 아나톨리아 베이리크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 인장은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도 모스크 장식, 동전, 그리고 하이레딘 바르바로사를 포함한 파샤들의 개인 깃발에 사용되었다.[38] 이 인장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터키 베이리크 중 하나는 잔다리드이다. 아브라함 크레스케스가 1375년에 제작한 카탈루냐 아틀라스에 따르면, 또 다른 아나톨리아 베이리크인 카라만 베이리크의 깃발에도 파란색 육각형 별이 그려져 있었다.

4. 8. 스페인의 튀니스 침공

알제에 인접한 튀니스하프스 왕조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후계 다툼 끝에 40명의 친족을 살해한 하산이라는 인물이 왕위에 올랐으나, 반대파는 바르바로사에게 반란 지원을 요청했다.[80] 바르바로사는 북아프리카 총독 자격으로 대군을 이끌고 튀니스로 진격했지만, 하산은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도주한 하산은 스페인의 속주가 되겠다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를 5세는 교황 바오로 3세와 논의하여 해적 소탕과 튀니스 정벌을 명분으로 유럽 연합 원정대를 구성했다.

1535년 6월,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이 참여한 400여 척의 함선에 4만 명의 병력을 태운 원정대가 튀니스로 향했다. 총사령관은 안드레아 도리아가 맡았고, 카를 5세 역시 바르바로사를 축출하기 위해 직접 참전했다.[81] 바르바로사는 유럽 원정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직접 방어에 나섰으나, 약 3개월간의 공방 끝에 튀니스는 함락되었다.[82] 유럽의 압도적인 물량 공세와 점령지 내 노예들의 내부 반란[83]으로 인해 바르바로사는 튀니스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제로 퇴각한 바르바로사는 곧바로 30여 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스페인의 메노르카 섬을 공격했다. 튀니스 원정으로 스페인 군의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노린 것으로, 이 과정에서 주민 6천 명을 납치했다.[84] 한편, 정복당한 튀니스에서는 카를 5세의 군대가 3일 동안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튀니스에는 스페인 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하프스 왕조의 하산이 통치자로 복위했다.[85][86][87] 유럽 세력은 시칠리아, 몰타, 튀니스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여[88] 오스만 제국의 서지중해 진출에 큰 장애물을 만들었다.

4. 9. 프레베자 해전

1538년 2월, 교황 바오로 3세의 주도로 교황령,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등이 참여하는 신성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시난 레이스 등이 포함된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의 오스만 함대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신성 동맹 함대를 격파했다. 이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1571년 레판토 해전 이전까지 약 33년간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9. 1. 배경

1525년 프랑스가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사건은[89][90][91][92][93] 유럽 기독교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는 파비아 전투(1525년 2월)에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생포되자[94] 그의 석방을 위한 프랑스의 궁여지책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를 유럽을 향해 서쪽으로 진출할 좋은 기회로 보고 1526년 헝가리를 침공하고 1529년에는 빈을 공격하며 응답하였다.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황제 카를 5세는 코냑 동맹 전쟁(1526~1530)으로 프랑스와 갈등 중인 상황에서 오스만의 침공까지 겹치며 전선이 이중으로 형성되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95]

전쟁이 마무리된 후, 카를 5세는 제국 내 산적한 과제들을 뒤로하고 튀니스 원정(1535년)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써 황제로서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서지중해 진출에 제동이 걸린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에게는 타개책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국에 1535년 11월 밀라노 공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유럽에서도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카를 5세는 측근을 보내 밀라노를 접수하고 자신의 아들을 공작에 임명하려 했다. 이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전임 루이 12세의 상속권자로서 밀라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를 저지하려 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은 군사 동맹을 맺었다.[96]

1536년 3월 프랑스가 북이탈리아를 공격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를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였다.[97][98] 다시 시작된 전쟁은 예상과 달리 이내 큰 진전 없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538년 6월 교황 바오로 3세의 중재로 종전되었다. 전쟁 중에 남부 이탈리아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령들이 바르바로사의 습격과 약탈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인들은 분개하였고, 해적들을 동원한 오스만 해군을 격퇴하기 위해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97]

4. 9. 2. 충돌

153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명령을 받은 안드레아 도리아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갤리선 40척을 이끌고 지젤과 페논 데 베레스 데 라 고메라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이에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은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와 풀리아를 공격하며 맞섰고, 이후 알제리로 돌아와 메시나 해협에서 몰타 기사단의 배를 침몰시키고 다음 해에는 스페인 해안을 약탈하며 보복했다.

1532년, 슐레이만 1세가 오스트리아 원정에 나선 사이, 안드레아 도리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레판토, 코로니, 파트라, 모레아를 점령했다. 슐레이만 1세는 야흐야 파샤자데 메흐메트 베이(Yahya Pashazade Mehmed Bey)를 보내 이 지역들을 되찾게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해상 방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을 이스탄불로 불렀다. 바르바로스는 8월에 출발하여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의 보니파시오, 몬테크리스토 섬, 엘바 섬, 람페두사 섬을 약탈하고 메시나 근처에서 18척의 갤리선을 나포했다. 포로를 통해 안드레아 도리아가 프레베자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그는 칼라브리아 해안을 추가로 약탈하며 프레베자로 이동했다. 도리아 함대와 짧은 교전 끝에 7척의 배를 나포하는 데 그쳤으나, 도리아는 퇴각했다. 바르바로스는 44척의 함선 중 25척을 알제리로 돌려보내고 19척을 이끌고 이스탄불로 향했다. 그는 톱카프 궁전에서 슐레이만 1세를 알현하고, 오스만 제국 해군의 카푸단 파샤(대제독), 북아프리카의 베일레르베이(총독), 로도스, 에우보이아, 키오스 섬의 산자크(지방관)로 임명되었다.

1534년,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은 8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출정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레판토, 파트라, 모레아를 되찾았다. 그는 칼라브리아 해안을 다시 약탈하고, 산 루치도의 성을 점령했으며, 체트라로 항구를 파괴했다. 7월에는 카프리 섬을 습격하고 나폴리를 포격했으며, 로마 근교의 라치오 지역까지 진출하여 테라치나, 폰디, 스페르롱가 등 해안 마을에 상륙했다. 테베레 강 하구의 오스티아에 상륙했을 때는 로마 전역에 경종이 울리기도 했다. 카를 5세는 암살자를 보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바르바로스는 튀니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1535년,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 군주 물라이 하산은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아 300척의 갤리선과 2만 4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스페인-이탈리아 연합군과 함께 튀니스, 안나바, 마디아를 탈환했다.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바르바로스는 적군이 도착하기 전에 바다로 탈출하여 카프리로 피신, 요새를 수축했다. 이후 알제리로 향하는 도중 마요르카 섬과 스페인 연안의 마을, 마오를 습격하고 스페인과 제노바의 배를 나포했으며, 노예로 잡혀 있던 무슬림들을 해방시켰다. 또한 트렘센에서 별동대의 스페인 군을 격파했다.

1536년, 바르바로스는 이스탄불로 소환되어 나폴리 공격을 위해 200척의 전함을 지원받았다. 1537년에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오트란토, 우젠토, 카스트로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류트피 파샤와 바르바로스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베네치아 공화국 소유의 이오니아 제도와 에게 해 제도를 점령했다. 바르바로스는 코르푸 섬을 공격하여 농작물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으나, 4000명의 베네치아 병사와 700정의 총으로 방어된 오래된 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몇 차례 요새 공격 실패 후, 바르바로스는 다시 칼라브리아를 습격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베네치아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신성 동맹” 결성을 촉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레베자 해전 (1538년)


1538년 2월,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황령,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제노바가 참여하는 신성 동맹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9월, 신성 동맹 함대는 이오니아 해의 코르푸 섬에 집결했고, 시난 레이스 등이 포함된 바르바로스의 오스만 함대는 프레베자 만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9월 28일,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동맹 함대가 프레베자 앞바다로 접근하자 바르바로스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해전이 시작되자 동맹 함대는 매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으며, 총사령관 안드레아 도리아는 전면전을 피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선을 이탈했다.[99]

결과적으로 해전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시오노 나나미는 저서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 이 결과를 "기묘한 패전"이라고 평했으며,[100]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지중해: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에서 "도리아의 함대는 바르바로사의 갤리 선과 푸스타 선과 싸워보지도 않은 채 프레베자 전장에서 물러나고 말았다"[101]고 지적하며,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도리아와 바르바로사가 결탁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고 언급했다.[102] 프레베자 해전에서의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이후 33년간, 1571년 레판토 해전 이전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9. 3. 영향

프레베자 해전(1538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끈 신성 동맹 함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그의 모국인 제노바의 오랜 경쟁 상대였던 베네치아를 위한 전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설, 또는 당시 유럽 국가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얽혀 있어 베네치아에게만 유리하게 끝날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었다는 분석 등이 있다.[103] 이 전투의 패배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베네치아는 유럽 동맹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고, 결국 1540년 단독으로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프레베자 해전의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다졌으며, 서지중해에서도 영향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오스만 해군의 주축이었던 바르바리 해적들은 하이레딘의 지휘 아래 서지중해를 무대로 활동하며 위세를 떨쳤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는 1540년 6월, 하이레딘의 오른팔로 알려진 투르구트 레이스를 코르시카에서 생포하여[104][105] 프레베자 해전 패배로 실추된 명예를 일부 회복하려 했다.

하이레딘 바르바로사의 이야기는 현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러 터키 영화의 소재가 되었으며,[43] 2021년 터키 TV 드라마 ''바르바로스: 지중해의 검''에서는 배우 울라시 투나 아스테페가, 2022년 드라마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술탄의 칙령''에서는 배우 톨가한 사이쉬만이 그를 연기했다. 또한, 유명 영화 시리즈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캐릭터 헥터 바르보사의 이름 역시 하이레딘 바르바로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4][43]

5. 말년과 사망

1540년 9월, 카를 5세는 바르바로사에게 합스부르크 편으로의 전향을 제안했으나, 바르바로사는 이를 거절했다.

1541년 10월, 카를 5세는 스페인과 기독교 선박에 대한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제를 포위했다.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고, 안드레아 도리아에르난 코르테스는 황제의 계획 변경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악천후 속에 진행된 원정은 폭풍으로 많은 배가 좌초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상륙 작전 역시 어려움을 겪은 끝에 결국 대실패로 끝났다.[107][108]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카를 5세를 꺾을 기회로 보고[109]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은 후 1542년 7월 전쟁을 일으켰다.

1543년 6월,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함대를 이끌고 마르세유로 이동하여 프랑스 해군과 연합했다.[110] 양국 연합 함대는 당시 카를 5세의 영지였던 니스를 8월 5일 포위하여 함락시키는 등 합동 작전을 펼쳤다. 바르바로사는 겨울 동안 3만 명의 군대와 함께 툴롱에 머물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이탈리아와 스페인 연안을 공격하며 프랑스를 지원했다. 이 기간 동안 툴롱 대성당은 일시적으로 모스크로 사용되기도 했다.

1544년 봄, 바르바로사는 산레모를 습격하고, 볼게토 산토 스피리토와 체리아레에 상륙했으며, 이탈리아-스페인 연합 함대를 격파하고 나폴리 왕국 깊숙이 진군했다. 이후 210척의 함대를 이끌고 제노바로 향하여, 포로로 잡혀 있던 투르구트 레이스의 석방을 요구했다. 제노바 근교에 있는 안드레아 도리아의 궁전에서 바르바로사와 도리아는 회담을 가졌고, 3,500 두카트 금화의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투르구트 레이스는 석방되었다. 바르바로사는 남프랑스에서도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지만, 쉴레이만카를 5세가 화해함에 따라 1544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그러나 같은 해 바르바로사는 산레모에 세 번째 공격을 가하고, 피옴비노를 포격했으며, 억류되어 있던 시난 레이스의 아들을 석방하도록 압박하여 성공시켰다. 더 나아가 토스카나 지방의 오르베텔로, 카스틸리오네 델라 페스카이아, 탈라모네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바르톨로메오 페레티의 묘를 파괴하고 유해를 불태웠다. 이는 바르톨로메오 페레티가 1543년에 미틸리니에 있는 바르바로사의 아버지 집을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1545년, 바르바로사는 마지막 원정에 나서 스페인 본토의 항구들을 포격하고, 발레아레스 제도의 메노르카와 마요르카에 상륙했다.

1545년 바르바로사는 은퇴했다. 그의 알제 총독 자리는 아들인 하산 파샤가 계승했다. 바르바로사는 자신의 회고록을 세이이드 무라디에게 구술하게 했는데,[53] 이는 현재 Gazavat-ı Hayreddin Paşa|가지와트 이 하이레딘 파샤ota (하이레딘 파샤의 정복)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톱카프 궁전이스탄불 대학교 도서관에 원고가 보존되어 있다.

이스탄불 베식타스 지구에 있는 하이레딘 바르바로사의 영묘


바르바로사는 이스탄불 근교 뷔위크데레의 해변에 지은 궁전에서 1546년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이스탄불 베식타스 지구에 있는 영묘에 안장되었는데, 이 영묘는 1541년 미마르 시난이 건설한 것이다. 영묘는 1944년에 개조되었다. 그의 사후 수 세기 동안 튀르키예의 선원들은 해상 작전이나 해전에 나서기 전에 예포를 쏘아 바르바로사의 영묘에 경의를 표하는 전통을 가졌다.

6. 유산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는 레판토 해전 (1571년) 이전까지 지속된 오스만 제국지중해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9] 그는 케말 레이스, 그의 형 오루츠 레이스와 같은 선배 제독들이나, 동시대의 투르구트 레이스, 살리 레이스, 피리 레이스, 쿠르토을루 무슬리히딘 레이스, 그리고 후대의 피얄레 파샤, 무라트 레이스, 세이디 알리 레이스, 울루츠 알리 레이스, 쿠르토을루 흐즈르 레이스 등 뛰어난 오스만 해군 제독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해군력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묘는 이스탄불 베식타스의 바르바로스 공원에 있으며, 근처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 옆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 뒤에는 터키의 유명 시인 야흐야 케말 베야틀리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39]

> ''바다의 지평선에서 저 굉음은 어디서 오는가?''

> ''바르바로사가 튀니지나 알제, 또는 섬에서 돌아오는 것인가?''

> ''두 백 척의 배가 파도를 타고 있다,''

> ''떠오르는 초승달이 비추는 땅에서 오네:''

> ''오, 축복받은 배들아, 너희는 어떤 바다에서 왔는가?''

이스탄불의 주요 도로 중 하나인 바르바로스 대로(Barbaros Bulvarıtur)는 그의 묘가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서 시작하여 레벤트와 마슬라크의 상업 지구를 지나 뻗어 있다.

과거 수 세기 동안 오스만 해군의 함선들은 세라이 곶을 지날 때 그의 묘를 향해 경례를 표하는 전통이 있었다.[40] 이 관행은 19세기 탄지마트 개혁 시기에 중단되었으나, 2019년 터키 해군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41] 오늘날에도 터키 해군의 여러 군함과 여객선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고 있다.

영국의 해군사학자 에드워드 케블 채터턴은 바르바로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적 중 한 명이자, 지중해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전술가 및 전략가 중 한 명"으로 높이 평가하며, 그의 죽음이 당시 기독교 유럽에 큰 안도감을 주었다고 기록했다.[42]

또한 이스탄불 레벤트 지역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바르바로스 하이레틴 파샤 모스크가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바르바로사는 생전에 자신의 경험과 정복 활동을 세이이드 무라디에게 구술하여 회고록으로 남겼다.[53] 『가자바트-으 하이레딘 파샤』 (غازوات خير الدين پاشا|Gazavat-ı Hayreddin Paşaota, '하이레딘 파샤의 정복 활동')로 알려진 이 회고록은 현재 톱카프 궁전이스탄불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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