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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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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교 개혁은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 개혁 운동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권위 남용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군 이후 상업 발달과 국가주의의 등장,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 등으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 커졌으며, 흑사병과 같은 사회적 재앙과 매독과 같은 질병의 유행, 예상치 못한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은 종교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또한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들의 도덕적 해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 인쇄술의 발달 등 지적인 요인들도 개혁을 촉진했다.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종교 개혁가들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강조하며,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례에 반박했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츠빙글리는 성찬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으며,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이혼 문제로 시작된 종교 개혁을 통해 영국 성공회를 설립했다.

종교 개혁은 루터파, 츠빙글리파, 칼뱅파, 재세례파, 성령주의자, 반삼위일체파 등 다양한 분파를 낳았으며, 특히 재세례파는 신자 세례와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박해를 받았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개혁을 시도하고 예수회를 창설하여 반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종교 개혁은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의 분열과 종교 전쟁을 초래했다. 또한 개신교의 발전과 함께 문맹률 감소, 교육의 발전, 경제 발전 등 긍정적인 결과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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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개요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주요 인물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존 칼빈
필리프 멜란히톤
마틴 부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윌리엄 틴들
마르크시옹
주요 사건95개조 논제
보름스 의회
마르부르크 논쟁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트렌트 공의회
뮌스터 반란
독일 농민 전쟁
스말칼덴 전쟁
위그노 전쟁
80년 전쟁
30년 전쟁
배경
시기16세기
장소유럽
이전 사건르네상스
아비뇽 유수
교회 대분열
이후 사건계몽주의
종교 전쟁
반종교개혁
가톨릭 개혁
원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면죄부 판매
성직 매매
교황의 세속 권력 강화
인쇄술 발달과 지식 보급
민족주의 의식 성장
종교적 요인
결과
종교적 결과프로테스탄트 교파 탄생
가톨릭 교회 개혁 (반종교개혁)
종교 전쟁 발생
정치적 결과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분열 심화
국가 권력 강화
개인의 자유와 권리 신장
신학적 영향
교파
주요 교파루터교
개혁교회 (칼뱅주의)
성공회
재침례교
관련 주제
기타
영향근대 사회 발전에 기여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 발달
교육, 문화, 예술 발전

2. 종교 개혁의 요인

16세기 서방교회의 '종교 개혁'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0세기부터 서방교회 내에 만연했던 창부정치, 정치 세력의 꼭두각시가 된 교황,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유력 가문들의 권력 다툼[122] 등은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또한 교황과 일부 성직자들의 도덕적 해이,[123] 라틴계와 게르만계 민족 간의 차별, 차별적 세금 부과,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정치적 목적[124],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면죄부 판매[126] 등은 개혁의 필요성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가들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 판매[125]와 같은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성경에 근거한 신앙 회복을 주장했다.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등은 종교 개혁 이전부터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선구자들로 평가받는다.

A stone wall with the sculptures of four bearded men
종교 개혁 기념 국제 기념물은 1909년 제네바에 세워진 조각상으로, 윌리엄 파렐, 존 칼빈, 테오도르 드 베즈, 존 녹스칼뱅주의의 네 지도자를 묘사하고 있다.


종교 개혁은 루터교, 칼뱅주의, 급진 종교 개혁, 가톨릭 종교 개혁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일부 역사가는 에라스뮈스의 종교 개혁도 포함시키기도 한다. 종교 개혁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개혁의 시작과 끝은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1517년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시점을 시작으로 본다.

2. 1. 사회/경제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농업 경제에서 상업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다. 레오 10세의 지나친 사치와 유지를 위해 교황청이 부과한 조공의 상승은 라틴족과 게르만족에게 부담을 주었으며, 특히 게르만족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마르틴 루터는 교황청의 권위 남용을 개혁하기 시작했다.[124]

사제, 성가대, 운반자 또는 조문객, 구걸하는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장례 미사 (1460–1480년경)


유럽은 14세기 초부터 끔찍한 재앙의 시기를 겪었다. 이러한 재앙은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을 사망시킨 흑사병이라는 파괴적인 대유행으로 절정에 달했다. 1500년경 유럽의 인구는 약 6000만~8500만 명으로, 14세기 중반 인구 정점의 75%를 넘지 못했다.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지주들은 소작농들의 권리를 제한하기 시작했고, 이는 종종 타협으로 끝나는 농촌 봉기로 이어졌다.

추기경, 주교, 수도사, 해골과 함께 춤을 추는 농부를 묘사한 벽화
슬로베니아 흐라스토블레의 성 삼위일체 교회에 있는 요한 오브 카스타브의 (1490)의 세부 묘사


예상치 못한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는 죽음의 무도프랑스어('죽음의 춤')와 같은 대중적인 예술적 모티프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공포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의 인기가 높아지는 데에도 기여했다.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미 감지되었듯이, 이 의식들은 기독교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정화가 필요한 영혼의 과도기적 상태인 연옥에 대한 광범위한 믿음을 나타냈다. 악의적인 마법 행위에 대한 공포도 커져 마녀사냥이 격화되었다.

15세기 말, 성병매독이 유럽 전역으로 처음 퍼졌다. 매독은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궤양과 딱지로 외모를 망가뜨렸다. 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 침공과 함께 매독은 피렌체에서 도덕적 갱신을 요구한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98년 사망)의 성공 배경이 되었다. 그는 이단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기독교 명상은 여전히 대중적인 읽을거리로 남아 있었다.

A baby with a halo around his head lying on hay with a kneeling woman and man on his both sides
필리포 리피의 ''탄생'' (1445). 탄생 장면을 그릴 때,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로마네스크 미술고딕 미술이 성육신에 대한 추상적인 해석을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주로 모성애를 묘사했다.


역사가 존 보시(Eamon Duffy가 요약)는 "중세 기독교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이념도 제도도 아닌, 종교적 이상—끊임없이 열망했지만 거의 달성되지 못한—이 평화와 상호 사랑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했다"고 강조했다.[10]

가톨릭교회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은총의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 근거하여, 교회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이를 주고 병든 사람을 방문하는 것과 같이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을 구원의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했다. 마을 사람들과 도시의 평신도들은 자주 친목 단체 (예: 곤팔로네 대친목회)의 회원이거나,[11][12] 성인과 관련된 상호 지원 길드 또는 종교 형제회 (예: 성 프란치스코 제3회)의 회원들이었다. 신자들은 성인들의 성지로 기독교 순례를 갔지만, 성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그들의 명성이 훼손되었다.

교회 건물은 그림,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창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고딕 미술은 초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했지만,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하느님과 성인을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묘사했다. 교회 제도는 주교와 사제를 통해 오류 없이 사도 전승과 성경을 전달하는 신뢰할 수 있는 종교 권위였다. 이는 공의회의 결정과 교황 권위에 의해 해석되었으며, 성사전례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방과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성찬 빵과 성찬 포도주가 외관상으로는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1215년에 "화체설"로 공식화되어 가톨릭 교리로 선포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부터 평신도는 성찬례 동안 빵만 받았다.

교회 라틴어는 가톨릭 유럽 대부분 교구에서 공적인 예배의 언어였으나,[14] 라틴어를 이해하는 평신도는 거의 없었다.[15] 가톨릭 전례의 핵심 요소인 성찬례 또한 라틴어로 거행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불가타를 성경의 진정한 라틴어 번역본으로 여겼다.

대학교에서는 스콜라 철학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스콜라 신학자들 간의 정당한 논쟁은 드물지 않았다. 예정론—사후 개인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 자주 논의되었다. 오컴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은총의 신성한 제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미리 아는 사람들에게 (공로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예정하셨다고 가르쳤다.[16] 반대로, 던스 스코투스 (1308년 사망)와 리미니의 그레고리 (1358년 사망)는 개인의 선택이 하나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리미니는 또한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의 운명을 모두 예정했다고 주장했다. 칭의와 은총의 시기 또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가브리엘 비엘 (1495년 사망)[17]과 같은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신자들이 신성한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규칙을 제정했다고 가르쳤다. 오르비에토의 휴고리노 (1374년 사망)와 같은 다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중재 없이는 아무도 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제안했다.

인문주의자에 의한 성서 연구가 진전되면서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르네상스적 운동"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다. 즉, 같은 르네상스적 운동이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로의 복귀로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성서로의 복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히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서 르네상스의 일부인 인문주의 연구는 종교적인 것과 결부되기 쉬웠다고 한다.

16세기는 근대 국가의 싹이 트던 시대였으며, 그전까지 각 지역으로부터의 교회세는 바티칸의 수입이 되었다. 근대 국가의 탄생과 함께 각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국의 부가 바티칸으로 흘러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국 내에 묶어두는 것을 오히려 환영했으며, 각 지역 교회가 로마와 절연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종교 개혁 이념이 확대·침투하는 데 있어서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2. 2. 도덕적 요인

서방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은 12세기 라테란 공의회 이후 신부 독신 의무를 지키지 않고 연인을 두는 등 도덕적으로 해이한 모습을 보였다. 16세기에는 교황들마저 공공연하게 제도를 비웃으며, 율리오 2세는 밀회와 동성애를, 그레고리오 13세는 사생아를 두었고, 바오로 3세는 연인 관계를 가졌으며, 레오 10세와 율리오 3세는 동성애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129] 주교와 사제들 중 일부 또한 도덕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2. 3.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고대 문학으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동서 문화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 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등장한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의 사상과 같은 다양한 사상의 등장은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 다가오자, 당시 교회의 전통을 보전하던 동방교회 지역에서 기독교 신학과 헬라 철학을 기록한 다양한 헬라어 사본을 그나마 안전한 기독교 지역이었던 서방교회로 학자들이 이주하며 옮겼다.[130] 이외에도 비잔틴 지역의 혼란을 틈타 서적 사업가들이 수백 권의 헬라어 필사본들을 서유럽 지역으로 가지고 와서 판매하였다.[131] 이러한 헬라 사상과 초기 기독교 헬라어 문헌들의 대규모 등장은 헬라 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져, 서유럽인들은 인문주의와 새로운 유럽 문화를 조망하였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헬라어로 작성된 바울 등의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속사도들의 기록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교의를 세워 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교부들의 신학과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인문주의자에 의한 성서 연구가 진전되면서 일어난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르네상스적 운동"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다. 즉, 같은 르네상스적 운동이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로의 복귀로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성서로의 복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히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서 르네상스의 일부인 인문주의 연구는 종교적인 것과 결부되기 쉬웠다고 한다. 종교 개혁의 지도자 중 몇몇은 원래 인문주의자였다는 점에서도, 이 양자의 결합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종교 개혁이 격화되면서, 특히 루터파의 종교 개혁과 인문주의는 갈라지게 되었다.

3.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당시에는 중요한 게시물을 교회 정문에 붙이는 관행이 있었으나,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았다는 것은 역사적 상상이라는 주장도 있다.[132] 요하네스 슈나이더의 육필원고에 따르면, 루터는 신학적 비판을 조심스러운 형태로 제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방 기독교교황 수위권을 가톨릭 교회에 확립하고, 성직자를 평신도와 법적으로 분리한 그레고리 개혁 덕분에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중세 교회는 자체적인 법률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재판소는 성직자를 보호하고 평신도를 처리했다. 또한 교회는 십일조를 징수했으며, 여러 교회 직책을 겸임하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성직자는 수도 성직자와 세속 성직자로 나뉘었다. 수도 성직자는 수도원 규칙에 따라 생활했고, 세속 성직자는 목회 돌봄을 담당했다. 교회는 위계적인 조직이었으며, 교황은 추기경에 의해 선출되었고, 로마 교황청의 직원이 보좌했다. 각 교구는 주교 또는 대주교가 통치했으며, 본당 사제가 성사를 집행했다. 피렌체 공의회는 세례, 견진, 결혼, 종부성사, 고해성사, 성찬례, 사제 서품을 가톨릭 교회의 일곱 성사로 선언했다.

A pope and about a dozen bishops sitting in a large room.
대립교황 요한 23세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만나는 추기경, 주교, 신학자들 (울리히 폰 리헨탈의 ''콘스탄츠 공의회 연대기''에서)


교황청의 권위는 잘 조직된 의사소통 시스템과 관료제에 기반을 두었다. 교황은 묶고 푸는 권한을 주장하며 면죄부를 제공했고, 교황령을 통해 교회법의 특정 조항을 면제해 주었다. 1302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선언을 통해 교황청에 대한 복종을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선언했다.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교황들은 고위 성직자 임명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왔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추기경단 사이의 갈등은 서방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세 명의 교황 중 한 명이 사임하고, 교황 마르티노 5세가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선언을 통해 교황이 가톨릭 세계 공의회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공의회주의는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단죄되었다. 교황청과 가톨릭 통치자 간의 관계는 정교 협약으로 규제되었다.

르네상스 교황들은 교황령의 군주로서 권력 투쟁에 깊이 관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사생아들을 고위직에 임명했고,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령 회복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 대항해 시대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새로 발견된 땅을 분배할 권리를 주장했고, 그의 결정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확인되었다. 교황들은 예술과 건축의 후원자였으며, 율리오 2세는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의 대성전 건설을 명령했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13세기 말부터 논의되었지만, 특권을 잃고 싶어하지 않은 이해 관계자들 때문에 현 상태가 유지되었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1517년에 해산되었다.

A middle-aged man with a book in his hands wearing a fur coat and a fur hat
한스 홀바인 더 영의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초상화''


후기 중세 시대에 인문주의라는 새로운 지적 운동이 등장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텍스트와 문헌 비평에 대한 열정을 보였고,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비잔틴 학자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플라톤이 재발견되었다. 니콜라우스 쿠자와 같은 인문주의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라는 것을 증명했다.

공동생활 형제단은 평신도의 종교적 실천에 대한 더 깊은 참여를 장려했고, 경건한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베셀 간스포르트는 면죄부 남용을 공격했다.

종이활자 인쇄기 덕분에 책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종교 서적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2권으로 인쇄된 벌게이트를 처음 출판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출판되었다.

제롬이 완성한 벌게이트는 70인역 버전의 구약을 포함했다. 성경 필사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제롬의 번역 오류를 밝혀냈다. 에라스뮈스는 신약 노붐 악기멘툼 옴네판을 완성하여 일부 가톨릭 교리에 대한 성경적 증명 텍스트에 도전했다.

두 악마의 형상을 묘사한 모자를 쓴 남자가 불타고 있다. 그는 무장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의 화형 (울리히 폰 리헨탈의 ''콘스탄츠 공의회 연대기''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사라진 후, 서방 교회의 신학적 통일을 위협하는 주요 분쟁은 없었다. 왈도파는 예외였는데, 그들은 공적 사역에 대한 성직자들의 독점을 거부하고, 훈련받은 모든 구성원이 설교하도록 허용했다.

서구 분열은 교회 개혁에 대한 열망을 강화했다. 존 위클리프는 순례, 성자 숭배, 성변화 교리를 공격하고, 교회를 선택받은 사람들의 배타적인 공동체로 간주했다. 롤라드로 알려진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성직자의 독신과 면죄부 부여를 거부했다.

위클리프의 신학은 얀 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후스는 성직자의 부와 세속 권력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의 처형은 보헤미아 개혁으로 이어졌고, 교황은 후스 전쟁을 촉구했다. 온건한 후스파는 우트라키스트로 알려졌고, 급진적인 후스파는 타보르파라고 불렸으며, 리파니 전투에서 파괴되었다. 후스파 교회의 위계가 없었기 때문에 체코 귀족과 도시 치안 판사는 후스파 성직자를 통제할 수 있었다. 급진적인 후스파는 보헤미아 형제 연합을 세웠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그들의 성경 강조는 오직 성경la의 초기 사례로 간주되지만, 스콜라 철학자들 또한 성경에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사보나롤라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등은 로마 교회를 비판하며 종교 개혁의 선구적 운동을 이끌었다.

1415년 후스는 로마 교회에 의해 처형되었고, 후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 대분열을 해소하고 위클리프와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교회 개혁은 진전되지 않았다. 1498년 사보나롤라는 로마 교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왈도파의 창시자 왈도 역시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마르틴 루터 외에도 울리히 츠빙글리장 칼뱅이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로 언급된다.[132]

3. 1. 마르틴 루터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항의하며 비텐베르크 시의 교회이자 비텐베르크 성 안에 95개조 논제를 내걸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132]면죄부 비판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비판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에 의해 순식간에 각지로 확대되었고, 교황에 혐오감을 품고 있던 주변의 제후, 기사, 시민, 농민을 휘말리게 하여 독일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 루터는 신종교를 창설할 의사는 없었고, 가톨릭 교회 내부의 개혁을 원했지만, 대립은 첨예해져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자설의 41개 조항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를 거부하고 1520년 12월에 칙서와 교회 문서를 비텐베르크 시민 앞에서 불태웠다. 1521년 루터는 파문되었고,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우게 되었다.

1521년 4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보름스 제국 의회에 소환했지만, 루터는 여기서도 자설의 철회를 거부하여 양측의 분열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때 "나는 여기 서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성경에 관한 것으로, 어디까지나 성서 중심주의라는 자세를 흔들리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5일에 발포된 보름스 칙령에 의해 루터는 법의 보호 밖 (제국 추방)에 놓였지만,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보호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1년여를 보내게 된다. 여기서 루터는 신약성서독일어 번역을 완성했고, 이 루터 성서는 후일 독일어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널리 읽히게 되었다.

'''기사 전쟁'''(1522년)은 기사인 프란츠 폰 지킹겐이 이끈 라인강 하류 독일의 많은 개신교 신자와 인문주의자 기사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가난한 남작의 반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반란은 단기간에 진압되었지만, 독일 농민 전쟁(1524년 - 1526년)의 시작이 되었다.

3. 2. 울리히 츠빙글리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는 장 칼뱅과 함께 언급되는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이다.[132]

3. 3. 장 칼뱅

A middle-aged man
한스 아스퍼가 그린 16세기 울리히 츠빙글리의 초상화


스위스 인문주의 사제 울리히 츠빙글리마르틴 루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던 1516년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132] 1522년 사순절 기간 동안 취리히에서 소시지 만찬에 참석하여 금식 규정을 위반하면서 주목받았다.[27] 그는 교회 변화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도시 치안 판사의 승인을 받아 토론회를 열었고, 항상 치안 판사의 지원을 받아 변화를 시작했다. 1524년에는 모든 이미지가 교회에서 제거되었고, 금식과 성직자의 독신이 폐지되었다. 2년 후, 독일 성찬례가 미사의 라틴 전례를 대체했으며, 성찬식(또는 주의 만찬)은 화려한 제단 대신 평범한 나무 탁자에서 거행되었다.

취리히에는 Prophezeide(성경 연구를 위한 공립 학교)와 결혼 및 도덕 법정(두 명의 평신도와 두 명의 성직자로 구성된 법원 및 도덕 경찰)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기관이 조직되었다. 이 두 기관은 다른 도시에서도 복제되었다.[18] 츠빙글리의 성찬식에 대한 해석은 가톨릭 신학과 루터의 가르침과 달랐다. 그는 성찬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부정하고, 성찬식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기리는 기념 의식으로 간주했다. 이 의견 불일치로 인해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격렬한 팜플렛 전쟁이 벌어졌다.

3. 4. 토머스 크랜머

(섹션 제목 '토머스 크랜머'는 원본 소스에 관련 내용이 없으므로 출력하지 않습니다.)

4. 종교 개혁의 전개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사상은 '''다섯 솔라'''(Five Solas)로 요약된다.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성경만이 진리의 최종 권위이며,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의미이다.
  •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어떠한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원의 은총을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다.
  •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독일에 이어 종교 개혁의 불길이 타오른 곳은 스위스였다. 울리히 츠빙글리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을 시작했으며, 1523년 취리히주에서 종교 개혁을 성공시켰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으며, 성찬론에서 루터와 의견 차이를 보여 결국 루터파와 츠빙글리파(후의 칼뱅파)는 분리되었다.[106]

스위스 내에서는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주와 반대하는 주 간의 갈등이 발생하여 1529년 제1차 카펠 전쟁1531년 제2차 카펠 전쟁이 발발했다. 츠빙글리는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전사했지만, 이후 맺어진 제2차 카펠 화약에서는 각 주(州)가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106]

4. 1. 독일의 종교 개혁

1519년 에크마르틴 루터 사이의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열렸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회가 복음 중심주의를 따라야 하며, 교황을 인정하는 교황 중심주의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가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예로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보았다.[141] 그는 에베소서 1장 22-23절[142]을 근거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만물의 우두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교회의 권위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자신의 주장이 공교회(보편교회)적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루터는 교황과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현재의 천주교)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와 시민들은 루터를 열렬히 지지했다. 이후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교황은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인 수구세력(현재의 로마 가톨릭교회)으로부터 탄압받았던 개혁 찬성파(현재의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적 그리스도(Anti-Christ)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143]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 않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개혁 사상을 변호할 기회인 보름스 회의에 참여하여 1521년 4월 18일 독일 황제 카를 5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144]

보름스 회의에서 추방령이 내려진 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으며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현대 독일어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독일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주도하는 시위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는 지배 계급의 억압에 맞선 민중 항쟁으로 이어졌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은 지배 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하고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에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며 1524년 독일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도시 빈민층까지 가세하며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농민들의 참여는 루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지원을 받아 교회 개혁을 주도했지만, 프리드리히는 농민들에게 착취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었고, 결국 교황청과 타협해야 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협상에서 그의 주장은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 제출되는 등, 그는 더 이상 혼자 힘으로 개혁 운동을 이끌 수 없게 되었다.

1524년 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은 파리 코뮌과 같은 근현대 사회주의 운동처럼 정치, 사회적 비평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노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내부 결속력이 약했던 농민 혁명은 1526년에 거의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10만~15만 명의 농민군이 사망했다. 루터는 농민 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소요 지역을 다니며 설교했고, 이는 자신의 신앙개혁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하고, 제후들이 농민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빌라도가 손을 씻은 것을 연상케 한다. 농민 소요는 루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둥근 얼굴의 중년 남성
루카스 크라나흐 (1529)의 ''마르틴 루터 초상화''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해 1515년 교황 칙서 Sacrosanctis|사크로산크티스la를 발표하여 새로운 면죄부를 발행했다. 그는 야코프 푸거의 조언에 따라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를 독일 내 판매 책임자로 임명했다. 요한 테첼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는데, "동전이 상자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영혼이 날아간다"는 슬로건이 유명하다.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는 Sacrosanctis|사크로산크티스la가 이전 면죄부 판매를 중단시켜 수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판매를 금지했다.

이러한 면죄부 판매의 저속함은 마르틴 루터를 포함한 많은 신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루터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연구하며 믿음을 통한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고, 1517년 9월 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스콜라 철학 신학 반박la에서 인간의 노력에 의한 칭의를 비난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첨부한 서신을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보냈다. 그는 면죄부 설교자들이 신자들을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죽은 자들을 위한 면죄부의 효능에 의문을 제기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마인츠 대학교 신학자들에게 조사를 명했고, 테첼, 콘라트 빔피나, 요한 에크는 루터의 주장을 후스파와 연관시켰다. 이 사건은 로마 교황청으로 이송되었으나, 교황 레오는 "수도사들 간의 다툼"이라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4. 1. 1. 개혁 이전의 독일 상황

독일의 종교 개혁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마르틴 루터의 주장이 독일인들,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교황청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개혁 이전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곳으로, 십자군 전쟁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봉건 제도에 대한 도전이 나타나고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과 백년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스페인은 1492년 통일 왕국을 이루고 해상 무역을 장악했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는 주변국의 간섭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미칠 수 있는 곳은 독일이었다.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성향까지 더해져, 독일은 교황청에 각종 세금을 바치는 등 재정적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를 통해 운영되는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148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막시밀리안 1세가 1519년 1월 사망하고, 카를 5세1519년 6월 선제후들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4. 1. 2.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항의하며 비텐베르크 시의 교회, 비텐베르크 성 안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처음 루터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생각이 없었고, 가톨릭 교회 내부 개혁을 원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에 루터가 자설의 41개 조항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루터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1521년에 루터는 파문되었고,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우게 되었다.

1521년 4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보름스 제국 의회에 소환했지만, 루터는 여기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나는 여기 서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며, 성서 중심주의 자세를 확고히 했다.

같은 해 5월 25일에 발포된 보름스 칙령에 의해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지만,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았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1년여를 보내며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 루터 성서는 널리 읽히며 독일어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95개조 논제에서 회개를 강조하였다.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한 신자는 십자가를 멀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구원을 돈을 주고 사는 값싼 은혜가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값비싼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일생동안 회개를 함으로써 육신의 정욕을 억누르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고 보았으며, 회개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징계의 뜻으로 주시는 형벌이 부과되지 면제되지 않는다고 논박했다.[140]

1519년 에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는데,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회는 복음중심주의를 따르며, 교황을 인정하는 교황중심주의는 필요 없다고 반박하였고, 콘스탄츠 공의회(1414 - 18)가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141] 또한 에베소서 1:22-23[142]을 논거로 하여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만물의 우두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라는 논박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 권위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자신의 주장이 공교회적(보편교회적)이라고 확신했다.

루터는 자신의 개혁 사상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인 보름스 회의에 참여하여 1521년 4월 18일 독일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144]

4. 1. 3. 루터의 개혁 평가

독일의 종교 개혁은 정치적 상황 및 교회의 여러 모습과 관련이 깊다. 마르틴 루터의 주장은 독일인들,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그들이 교황청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참석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 멜란히톤에게 뒷일을 맡겼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주도하는 시위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는 지배 계급의 억압에 맞선 민중 항쟁으로 이어졌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은 지배 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하고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에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며 1524년 독일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도시 빈민층까지 가세하며 더욱 거세졌다.

  • '''루터의 보수적 입장'''


그러나 농민들의 참여는 루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지원을 받아 교회 개혁을 주도했지만, 프리드리히는 농민들에게 착취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었고, 결국 교황청과 타협해야 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협상에서 그의 주장은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 제출되는 등, 그는 더 이상 혼자 힘으로 개혁 운동을 이끌 수 없게 되었다.

1524년 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은 파리 코뮌과 같은 근현대 사회주의 운동처럼 정치, 사회적 비평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노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내부 결속력이 약했던 농민 혁명은 1526년에 거의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10만~15만 명의 농민군이 사망했다. 루터는 농민 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소요 지역을 다니며 설교했고, 이는 자신의 신앙개혁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하고, 제후들이 농민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빌라도가 손을 씻은 것을 연상케 한다. 농민 소요는 루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4. 2. 스위스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스위스에서도 종교 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울리히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접하고 1519년 면죄부 판매를 비판, 1523년 취리히주에서 종교 개혁을 성공시켰다.[106] 츠빙글리의 개혁은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등 인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성찬론에서 루터와 의견 차이를 보여 루터파와 츠빙글리파(후의 칼뱅파)는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스위스 내에서는 양 파 간의 대립으로 1529년 제1차 카펠 전쟁1531년 제2차 카펠 전쟁이 발발했다. 츠빙글리는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전사했지만, 같은 해 맺어진 제2차 카펠 화약에서는 각 방백이 가톨릭, 루터파, 츠빙글리파 중 신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명시되었다.

스위스는 척박한 땅이었으나,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과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모여들어 1291년 연방 체계로 발전했다. 이탈리아, 프랑스어 사용권, 독일어 사용권 지역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수아 1세의 박해를 피해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슈트라스부르크와 제네바로 피난 오기도 했다.

스위스인들은 강인한 신체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교황청의 용병으로 일하며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청 시절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간의 전투에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용병 제도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 차단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2.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특히 신학적으로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145] 루터는 개인의 구원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에서 시작하여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과정을 거쳤다. 반면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 공격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이유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 안에서의 구원 확신이 처음에는 약했다. 그러나 목회 경험이 쌓이면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를 깨닫고 점차 복음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복음 이해에는 인문주의적 합리성이 끝까지 남아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고 재세례를 베푸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와도 맞서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은 루터보다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동족의 생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을 차단하는 어려운 결정을 통해 모범을 보임으로써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되는 복음 이해와 화체설에 반대하는 성만찬 신학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울리히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4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자신이 시작한 많은 일들을 칼뱅에게 넘겨주었다. 인문주의자로 시작하여 개혁주의로 변화한 칼뱅은 츠빙글리의 적절한 후계자이자 완성자였다고 할 수 있다.

4. 2. 2. 제네바의 종교 개혁

1387년 이래로 제네바는 도시의 군주인 주교, 도시 소유자인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의 3원 체제로 통치되었다. 1444년 이후 사보이 가문이 주교직을 세습하면서 자유 시민들의 반발을 샀다. 제네바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했지만, 베른은 동의하지 않아 대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 제도로 바뀌었고, 모든 중대사는 대의회에서 결정되었다. 베른은 제네바의 개혁을 원했지만,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대사를 수여 받을 수 있다."라는 현수막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532년 가을 제네바에서 조용히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되었다. 그러나 파렐은 프로망을 불어 선생으로 위장시켜 제네바에 잠입, 불어 교습과 함께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하게 했다.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고, 윌리라는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기도 했다.

가톨릭 측의 반격 시도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을 들었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의 공개 토론회가 열렸고, 파렐은 1532년 12월 20일 제네바에 다시 돌아왔다. 1533년 2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가 있었고, 3월 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가 드려졌으며, 수도원 교회를 빌려 수천 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제네바 시는 프랑스인 파렐을 통해 종교 개혁을 이끌 준비를 마쳤다. 이후 칼뱅이 제네바 종교 개혁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4. 2. 3. 칼뱅의 신학

장 칼뱅의 석판화, 추정 1830.


1537년 1월, 장 칼뱅제네바 대의회에 자신의 개혁안을 담은 비망록을 제출했다. 개혁안은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칼뱅은 성만찬을 가급적 자주 집행해야 하지만, 현재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또한, 부적합한 자는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출교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중에게는 시편 찬송을 권장하고 가르쳐야 하며, 어린이들에게는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하여 목회자가 직접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결혼은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의 제안은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했으며, 성만찬은 1년에 4번, 결혼 광고는 예식 3주 전에 시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제네바시는 장 칼뱅과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 개혁을 추진했지만, 모든 사람이 개혁에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 성만찬을 베풀지 않기로 결정했고, 2월 선거에서는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4명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른시가 간섭하자, 개혁 반대파는 재세례파와 손을 잡고 파렐과 칼뱅을 아리우스주의자,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포함한 전 지역을 장악하려 했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약했던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코로우, 파렐, 칼뱅은 제네바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를 떠났고, 칼뱅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는 파렐과 함께 3년간 시도했던 개혁이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한 분노와 갈등을 극복하며 연구와 프랑스 난민 목회에 힘썼다.

파렐과 칼뱅이 떠난 후 제네바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새 목회자는 특별평의원들의 종처럼 취급받았고, 모든 가장에게 교회 참석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주의 만찬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었고, 평의원들의 인기는 떨어져 다음 해 선거에서 재선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칼뱅 재초청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539년 10월, 대의회는 대표단을 보내 칼뱅에게 뜻을 전했지만, 칼뱅은 보름스 의회에 참석 중이라 답장을 유보했다. 파렐은 제네바의 지역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네바 개혁이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복음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칼뱅을 설득했다. 결국 칼뱅은 3년 만인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 규범을 제정하고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후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칼뱅은 엄격한 훈련과 경건 생활 실천, 이단 색출 및 처리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외국인이었기에 세력 확장이 매우 힘들었다. 복귀 후에도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 독선이라고 비난했다.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듯, 칼뱅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칼뱅의 개혁은 이단 색출과 처단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이단성이 있는 것을 정죄하고,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전통 신앙과 신학을 고수했다.

4. 2. 4. 칼뱅의 개혁 평가

칼뱅의 개혁은 제네바에서 소위 외국인이었던 그가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칼뱅이 다시 돌아온 후에도 그와 제네바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이지 않았으며, 많은 이들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했다.[145]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듯이, 칼뱅 역시 이러한 반대 세력들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칼뱅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종교 개혁가들과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그는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எதிர்த்து 전통 신앙과 신학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4. 3. 영국의 종교 개혁

헨리 7세는 잉글랜드 내부 결속을 다진 후 에스파냐와의 우호 관계를 위해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딸 카타리나와 큰아들 아더를 결혼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했다. 이사벨라는 아더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을 요구했고,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원했으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 메리 1세만 살아남았다. 왕위 계승 문제로 헨리 8세는 궁녀 앤 불린과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갖게 되자 근친혼을 금지한 성경[149]에 따라 혼인 무효[150]를 원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혼인 무효를 거부했다. 토머스 울지는 실각되고,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가 실권자가 되었다. 크랜머는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으로 교황 권한을 제한하고, 헨리 8세와 앤의 결혼을 적법하다고 공포했다.

1533년 9월 앤은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고, 1534년 수장령이 통과되었다. 수장령은 잉글랜드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도록 했으며, "신앙상의 권위 또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과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권에 있다는 선언이다.[151]

1536년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켜 잉글랜드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독립했다. 교황청은 헨리 8세 등을 파문했다. 앤은 간통죄로 처형되고,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여 에드워드 6세를 얻었다. 이후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 이혼하고, 캐서린 하워드를 처형한 후 캐서린 파와 결혼했다.

헨리 8세는 권력 유지에 힘썼으나, 영국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 입장을 유지했다.

1596년판 성공회 기도서


에드워드 6세는 10세에 즉위하여 외척 서머셋 공작이 실권을 잡았다. 프로테스탄트 추종자였던 서머셋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진행했다.

  • 로마 가톨릭 관련 법을 파기했다.
  • 성만찬에서 성체와 보혈 분배를 허용하고, 성직자 결혼 금지 법령을 무효화했다.
  •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 영문 성서 출판과 판매 자유가 허락되었다.
  • 에드워드 제2기도서가 마련되었다.
  •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의 근본이 된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 헌금법으로 교황청으로 가던 헌금을 국왕 수입으로 돌렸다.


토마스 크랜머


메리 1세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몰아내고 즉위하여 로마 가톨릭화를 재추진했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때 법령을 번복하고, 로마 가톨릭 미사를 실시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여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이 복귀하고, 교황청 사절이 파견되었다. 순종법과 이단 규제법으로 개신교 신자와 성공회 신자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휴 래티머 주교 등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했다.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휴 래티머 주교는 "오늘 영국은 하느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영원한 빛으로 밝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공회 기도서를 작성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신앙을 버렸으나, 비겁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신앙을 공언하며 화형으로 순교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1559년-1603년) 즉위 이전부터 영국은 개신교 분위기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9년 1월 15일 즉위하여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이끌었으나, 극단을 피하는 중용 노선(Via Media)을 걸었다.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영국을 보호했다.

장 칼뱅개혁 사상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인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로마 가톨릭 잔재 청산을 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켜 모든 성직을 여왕에 종속시켰다. 영국 교회 통일법으로 사제, 주교성직자들의 예복과 교회 장식을 통일했다.

1563년 제2차 통일령으로 칼뱅주의 영향을 받아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를 개정했다.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분열을 초래했고, 청교도 측이 패배했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1585년 예수회를 추방했다.

5. 급진 종교 개혁

탑에서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람과 배경에서 불타는 도시
1527년 로마 약탈 (교황 클레멘스 7세 시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한 약탈


종교 개혁은 루터회, 장로회, 성공회로 대표되는 보수적 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반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급진적 종교개혁으로 나뉜다. 급진 종교 개혁은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데, 보수적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성경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보수파들에게도 배척받았다.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지만,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집단적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5. 1. 재세례파

종교 개혁은 루터회, 장로회, 성공회로 대표되는 보수적 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반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급진적 종교개혁으로 나뉜다. 급진적 종교개혁은 보수적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경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보수파들에게도 배척받았으며, 한시적인 운동에 그쳤다. 그러나 이들은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고, 집단적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의 긴장 관계,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며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주요 분파로는 스위스 형제단, 뮌스터의 은거자들,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5. 1. 1. 스위스 형제단

츠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던 콘라트 그레벨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 행정에서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가도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 보니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교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1]

5. 1. 2. 뮌스터의 은거자들

멜키오프 호프만은 루터교회에 입문했다가 츠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으며, 예수스트라스부르에 재림하여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네덜란드까지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가 처형된 후에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에 도시 밖의 재세례파들은 처형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 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들은 로마 가톨릭 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했으며, 도시 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했다. 이 상황은 전쟁으로 번졌고, 남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일부다처제가 실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교황청에서 파견한 군대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면서, 결국 재세례파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5. 1. 3. 메노나이트

메노 시몬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였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책을 통해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했다. 메노 시몬스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메노나이트(Mennonite영어)라고 부른다.[1] 이들은 세례를 원하는 자에게 베풀고, 성경 중심적인 훈련을 강조했다.[1]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부름받았다고 믿었다.[1] 따라서 메노나이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통해 평화주의를 실천한다.[1] 이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1]

5. 2. 성령주의자

프란체스코 이후 종교 개혁이 활발하던 시기, 개인의 영적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교회의 기도문 대신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제를 추구하며 반(反)교회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서, 은총, 믿음이라는 종교 개혁의 মূল सिद्धांत을 거부하고 대중 속에서 조용히 활동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뮌처이다. 뮌처는 마르틴 루터의 '오직 성서'( Sola Scripturala )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이 직접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강조했다.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이 직접 성령을 체험하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성서보다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 얻는 영감, 즉 주관적 종교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겨 기록된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개인의 주관적 종교 경험을 가장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하게 보았고,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합리주의적인 면모도 보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카스파르 슈벵크펠트(1489년-1561년), 제바스티안 프랑크(1499년-1542년), 후안 데 발데스(1490년-1541년)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정하는 신비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적 영적 교제 주장은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기에, 19세기에 활발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5. 3. 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는 부분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이탈리아스페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폴란드, 모라비아 등 유럽의 자유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후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 그리고 신대륙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속죄론을 부정하고 삼위일체를 부인했다. 예수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한 구원을 반대하고, 예수가 도덕적 스승으로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예수의 삶을 본받아 거룩하게 사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하여 삼위일체론자가 아닌 일위일체론자였으며,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 불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학식과 지식이 높고 도덕적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윤리관 덕분에 현재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락시켜 초대 교회의 에비온주의와 유사하다는 비판도 있다.[152] 에비온주의는 예수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고, 하느님이 그를 양자로 삼아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고대 교회의 이단 종파이다.

6. 종교 개혁 반대파, 천주교회의 대응 (반종교 개혁)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교황청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하고자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기존 서방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는 16세기 이전 서방교회의 틀을 종교개혁 찬성파와 다른 방법으로 구축하고, 현재 천주교회의 틀을 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위해 예수회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신학 이론과 교리적 변화, 일부 제도 변경 외에 실제적인 쇄신은 부족했다. 이는 개혁 찬성파 추방 이후 교황청 내 개혁 주도 세력이 약화되었고, 교황이 세속 문제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대응하고, 유럽 국가 간 정치 분쟁에 개입해야 했다.

1572년 신성로마제국의 개혁 찬성파(개신교도) 용병들이 교황령을 침공하여 로마를 약탈하면서, 교황청은 종교개혁에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천주교회는 1869년-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보수적인 입장을 강화했다. 1962년-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며 종교 개혁에 대한 도전에 응답했다고 볼 수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식에서 개신교회와 동방정교회 종교자들에게 천주교회가 기독교 분열에 책임이 있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수도회 확산은 가톨릭 개혁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새로운 수도회는 사목에 힘썼으며, 그중 예수회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다.[28]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영신 수련을 저술하고, 교황 바오로 3세는 1540년 예수회 설립을 승인했다. 예수회는 학교 시스템을 통해 사제들을 양성했다.

바오로 3세는 종교 개혁으로 야기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신조, 성체 변화와 서품을 포함한 성사, 의인, 사제의 질 개선 등을 논의했다.[28] 공의회는 사도 전승이 성경만큼이나 신앙의 진정한 원천임을 재확인하고, 루터 신학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거부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8]

밀라노 대주교 카를로 보로메오는 교회 생활의 세부 사항을 다루는 핸드북을 완성했다. 공의회 이후 공의회 설립을 통해 교황의 권위가 강화되었고, 금서 목록이 작성되었다. 모든 교회 관리와 대학 교수는 교황청에 대한 "진정한 복종" 서약을 해야 했다.

6. 1.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12월 13일,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회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28]



트리엔트 공의회의 주요 목적은 개신교의 확산과 교회 내부 부패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공의회는 주교들의 태만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영적 이상 상실, 교리 문제에 대한 신학적 불명확성, 교황청의 타락 등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했다. 주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감독 소홀 등이 논의되었으며,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서를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1552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개신교 측 사절들이 회의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 인정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면서 공의회는 중단되었고, 천주교회와 개신교 간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는 서방교회의 통합이 아닌 분리를 확정짓는 결과를 낳았다. 공의회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예수회를 통해 개신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28]

공의회는 사도 전승이 성경만큼이나 신앙의 진정한 원천임을 재확인하고, 루터 신학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인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오직 믿음(sola fide)' 교리와,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만인 사제직' 교리를 거부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8] 공의회는 1563년 12월에 폐막되기 전에 교황청에 전례 서적을 개정하고 새로운 교리 문답을 완성하도록 지시했다.

인쇄된 텍스트가 있는 페이지
1548년 출판된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신 수련'' 초판 표지


새로운 수도회의 확산은 가톨릭 개혁 운동의 중요한 요소였다. 테아티노회와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사목을 제공했다. 그중에서 예수회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성 이냐시오 동굴에서 ''영신 수련''을 썼다. 교황 바오로 3세는 1540년 예수회의 설립을 승인했다. 예수회는 학교 시스템을 유지하고, 로마 독일-헝가리 대학을 통해 사제들을 양성했다.

밀라노 대주교인 카를로 보로메오는 교회 생활의 일상적인 세부 사항을 다루는 핸드북을 완성했다. 공의회 이후에는 공의회로 알려진 중앙 사무실의 설립을 통해 교황의 권위가 강화되었다. 그 중 하나는 금서 목록을 담당하게 되었다. 모든 교회 관리와 대학 교수는 교황청에 대한 "진정한 복종"의 서약을 포함하는 트리엔트 신앙 고백 서약을 해야 했다.

6. 2. 예수회의 창설

이냐시오 데 로욜라피레네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성서와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키웠고, 영성 훈련, 은둔 생활, 고행, 대학 및 신학 공부를 하였다.[1]

1541년 4월 14일 예수회는 로욜라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 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되는 것, 해양 개척으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 그리고 학문 발달을 통해 선교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요구되었다.[1]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예수회의 토착화 선교는 선교 지역의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원주민들의 반발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도하였다.[1]

새로운 수도회 확산은 가톨릭 개혁 운동의 중요한 요소였다. 예수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1]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바스크 귀족 가문 출신으로, 군인 경력을 선택했지만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 중 부상을 입고 이를 포기했다. 그는 성 이냐시오 동굴에서 고행적인 수련을 하는 동안 묵상 안내서인 ''영신 수련''을 쓰기 시작했다.[1] 교황 바오로 3세는 1540년 예수회 설립을 승인했다.[1] 새로운 수도회는 빠르게 발전하여, 로욜라 사망 당시 약 1,000명의 회원을 보유했고, 10년도 안 되어 약 3,500명으로 늘어났다. 잘 조직된 학교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예수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로마 독일-헝가리 대학은 주로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논하고 거부할 미래의 사제들을 준비시켰다.[1]

6. 3. 종교 재판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교황청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16세기 이전의 서방교회와 다른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긍정적으로는 16세기 이전의 서방교회의 틀을 종교개혁 찬성파와 다른 방법으로 구축하고, 현재의 천주교회의 틀을 구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신학 이론과 교리적 변화, 일부 제도 변경 이외에 실제적인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1572년 신성로마제국의 개혁 찬성파(개신교도)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교황청도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천주교회는 1869년-1870년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종교개혁 찬성가들인 종교개혁자들의 살해와 약탈을 용서하고, 동방정교회가 교황청이 주도한 십자군의 정교회 사제 살해와 약탈을 용서한 이후인 1962년-1965년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은 16세기에 교황청이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을 받고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이러한 종교재판의 폐습은 소위 개혁교회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쟝 칼뱅이 정적인 미카엘 세베르투스를 처형하는데 요긴한 도구로 쓰였으며, 재세례파를 비롯한 소수파를 박멸하기 위하여 종교재판이 열렸다. 이러한 종교재판의 악습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간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도 반복되었다.

7. 종교 개혁의 결과와 영향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 운동으로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비칼케돈파인 오리엔트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불리는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개혁교회(장로회) 등의 교파로 나뉘게 되었다.[153] 종교 개혁은 서방 유럽의 중세를 벗어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유럽역사, 문화, 문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유럽 각 나라들은 왕권과 결탁한 교황청제국주의적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은 인문주의와 함께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 인간과 이성을 중심으로 삼게 되었고, 과학은 신앙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통해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정치적 권위를 약화시켰다.[153]

1517년 10월 31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로,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이 공존한다.

위클리프, 틴데일, 후스 등은 교황청 권위에 대한 신학적 도전을 통해 중세 기독교의 기초에 균열을 일으켰고,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운동은 범시민 운동으로 확산되어 교황청 단일 체제에 큰 위협을 가했다. 교황청 분열로 교회의 위신이 추락하고, 지나친 과세는 시민들의 원망을 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독일에서 가장 심했다. 독일은 연방제였기 때문에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해 직접 미치기 어려웠고,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 회복과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것을 재발견하게 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을 강조했다.[153]

츠빙글리칼뱅에 의해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이 더욱 완성되었다. 종교 개혁은 여러 나라의 종교,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개혁의 교훈은 지상의 어떤 교회도 완전하지 않으며, 교리와 삶이 부패했다면 언제나 오직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개혁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라고 표현한다.[154]

A fortified town on a river surrounded by soldiers
뮌스터 포위 모습


스웨덴에서 추방된 호프만은 남부 독일과 저지대 국가들을 떠돌며 재세례파가 되었지만, 박해를 피해 성인 세례를 보류했다. 그는 예수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144,000명의 선택받은 자들이 1533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볼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멜키오라이트라고 불렸으며, 스트라스부르로 몰려들어 도시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호프만도 체포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시한이 지나가자 많은 멜키오라이트들은 얀 마티스존의 지도를 따랐다. 그는 성인 세례를 보류한 호프만을 비난하고, 뮌스터 시를 새 예루살렘으로 선포했다. 뮌스터는 주교 관할 지역이었지만, 시의회는 새 주교 프란츠 폰 발데크를 무시하고 개신교 목사 베른하르트 로트만을 임명했다. 종교 개혁으로부터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뮌스터로 몰려들었고, 1534년 2월, 급진파는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프란츠 주교와 동맹자들은 뮌스터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티스존의 통치 하에 사유 재산과 화폐 사용이 금지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은 마티스존은 전사했고, 요한 폰 라이덴이 그의 뒤를 이었다. 라이덴은 자신을 "의의 왕", "새로운 시온의 통치자"라고 선포하고, 교회와 국가를 통합하여 모든 죄인을 처형했다. 그는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하고, 열두 살 이상 모든 여성에게 결혼을 명령했다. 장기간의 포위 공격으로 방어군은 사기가 저하되었고, 뮌스터는 1535년 6월 25일 배신으로 함락되었다. 뮌스터 함락 후,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메노 시몬스의 지도 아래 평화주의적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메노파로 알려졌다. 거의 모든 재세례파 공동체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파괴되었지만, 온건한 재세례파는 동프리지아에서 살아남았으며, 주로 잉글랜드에서 관용을 받았다.

8. 결론

종교개혁은 서방 유럽의 중세를 벗어나는 분수령이자, 유럽역사, 문화, 문명을 뒤바꾼 분기점이었다. 이는 단순한 서방 교회의 부패 개혁을 넘어, 유럽 각국이 왕권과 결탁한 교황청제국주의적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게 하였다. 예술은 인문주의와 함께 신앙적 주제에서 벗어나 인간과 이성을 중심으로 변화했고, 과학은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또한, 종교 개혁은 각국의 경제적 자립을 통해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정치적 권위를 약화시켰다.[153]

1517년 10월 31일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 중 하나로,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이 공존한다.

위클리프, 틴데일, 후스 등은 교황청 권위에 대한 신학적 도전을 통해 중세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었다.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운동은 범시민 운동으로 확산되어 교황청의 단일 체제를 위협했다. 교황청 분열로 교회의 위신은 추락했고, 과도한 세금은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독일에서 가장 심했다. 독일은 연방제였기에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해 직접 미치기 어려웠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개혁을 원하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 회복과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것을 재발견하게 했다. 즉,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이 강조되었다.[153]

루터의 개혁운동은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한 교회 개혁 운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칼뱅에 의해 종교 개혁이 더욱 완성되었다. 종교 개혁은 여러 나라의 종교,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개혁의 교훈은 지상의 어떤 교회도 완전하지 않으며, 교리와 삶이 부패하면 오직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혁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는 표현으로 나타난다.[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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