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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공방전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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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공방전은 70년에 로마군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민족적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게르마니아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의 성전 기금 요구로 촉발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일환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 티투스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유대인 내부의 분열과 열악한 방어 능력으로 인해 로마군은 제3, 제2 성벽을 차례로 돌파하고 안토니아 요새를 함락했다. 결국 로마군은 성전을 파괴하고 도시를 함락시켰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이 사망하고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대교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로마는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여 기념 주화를 발행하고 개선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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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공방전 (70년)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명예루살렘 공방전 (70년)
전쟁제1차 유대-로마 전쟁
공방전 기간 로마군의 작전 수행을 나타내는 지도
공방전 기간 로마군의 작전 수행을 나타내는 지도.
날짜70년 4월 14일 – 70년 9월 8일 ()
장소유다이아 예루살렘
결과로마의 결정적 승리
세력 변화주요 유대 반란군 진압.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신전 파괴.
레반트 지역으로 로마 확장 더욱 확대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제국
교전국 2유다이아 임시 정부 잔존 세력
구성사두개파
바리새파
농민 세력
에돔인들
교전국 3열심당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제국티투스
유다이아 임시 정부시몬 바르 기오라
열심당기스칼라의 요한
병력 규모
로마 제국70,000명
유다이아 임시 정부15,000–20,000명
열심당10,000명
사상자 및 피해
로마 제국알려지지 않음
유다이아 임시 정부15,000–20,000명
열심당10,000명
추가 정보요세푸스에 따르면, 비전투원 110만 명이 예루살렘에서 사망했으며, 주로 폭력 사태와 기근으로 인한 죽음이며, 하지만 요세푸스의 이 수치는 공방전 이전 예루살렘의 인구를 넘는다. 사상자의 다수는 이집트와 바빌론같이 매년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으나 대신에 무질서한 공방전에 갇힌 전세계에서 온 온순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는 또한 97,000명이 노예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매슈 와이트, 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 (Norton, 2012) p.52,는 제1차와 제3차 로마 유대 전쟁의 모든 사상자 수가 대략 350,000명이라 측정했다.

2. 배경

제2성전 시대에 예루살렘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민족적 삶의 중심지였다.[23] 3대 절기 동안에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도시를 찾았으며[23], 당시 예루살렘은 상당한 규모와 인구를 자랑하는 주요 도시였다.[19][24]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 ''자연사''에서 예루살렘을 "동방에서 단연 가장 유명한 도시"라고 칭송하기도 했다.[25]

2. 1. 제2성전 시대 예루살렘

제2성전 시대에 예루살렘은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유대인들의 종교적, 민족적 삶의 중심지였다.[23] 3대 절기 동안에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찾았다.[23] 제2성전 시대 후기에 도시는 크기와 인구 면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면적은 약 2km2에 달했고 약 20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9][24]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 ''자연사''에서 예루살렘을 "동방의 도시 중 가장 유명한 도시"라고 칭송했다.[25]

초기 로마 시대 예루살렘은 두 개의 주요 구역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구역은 "제1 성벽" 안쪽 지역으로, 다윗의 도시와 상부 도시를 포함했다. 이 지역은 부유층 거주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구 밀도가 높았다. 두 번째 구역은 "교외" 또는 "베데스다"로 알려져 있으며, 첫 번째 구역의 북쪽에 위치했고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았다. 이 구역은 헤롯 왕이 건설한 "제2 성벽"(당시에도 남아 있었음)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26]

아그리파 1세 왕은 기존의 제2 성벽 바깥으로 새로운 "제3 성벽" 건설을 시작했다.[26]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당시의 공성 무기로도 뚫기 어려운, 두께가 최소 5m에 달하는 강력한 성벽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이러한 강력한 성벽 건설이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지 의심할 것을 우려하여 기초 공사 단계에서 건설을 중단했다.[27] 이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고 예루살렘 방어 강화의 필요성이 커지자, 제3 성벽은 원래 계획보다 훨씬 약하게 서둘러 완성되었다. 완성된 제3 성벽에는 9개의 탑이 있었다.

2. 2. 반란 발발

제1차 유대-로마 전쟁(대 유대 반란이라고도 함)은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임명된 후 성전 기금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26] 네로 황제는 유대 반란 진압 임무를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맡겼다. 68년 초, 베스파시아누스는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하여 갈릴리 지역에서 작전을 시작하며 반란 진압에 나섰다. 69년 7월까지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 전역이 로마군에게 평정되었고, 반란 지도자들이 모여 있던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8]

요새화된 거점인 예루살렘은 내부에서 온건파와 열심당원 사이에 격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8] 69년 여름,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떠나 그해 12월 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로마 군단의 지휘권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넘어갔다.

3. 공방전

서력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며 약 5개월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유월절 직전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는데,[101][104][30] 당시 축제를 위해 모인 많은 순례자들로 인해 예루살렘 내부는 식량 부족 등 어려움이 가중되었다.[105][33]

초반 유대인 방어군은 로마군의 공세를 일부 막아내기도 했으나,[99] 열심당을 비롯한 저항 세력 내부는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104][29] 지도력 부재와 내부 다툼은 효과적인 방어 전략 수립을 저해했으며, 일부 세력은 극단적인 판단 하에 도시의 식량 비축품을 스스로 파괴하기도 했다.[99][100][35][36]

로마군은 5월경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펼쳐 도시 외곽의 성벽들을 차례로 돌파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104] 유대인 저항 세력은 성전과 도시 일부 지역으로 밀려났지만, 내부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었다.[104][29] 티투스는 도시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 예루살렘 둘레에 새로운 포위 성벽을 건설하여 압박을 강화했다.[104][29]

이후 로마군은 성전 북쪽의 안토니아 요새 공략에 집중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 끝에 요새를 함락시켰다.[104][29] 안토니아 요새 점령은 성전 공격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로마군의 공격과 방화 시도로 인해 성전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고,[104] 결국 70년 8월, 티샤 베아브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104][103][29][32] 성전 파괴가 티투스의 본래 의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기록이 엇갈리지만,[104][114][41] 성전에서 시작된 불은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다.[104][103]

성전 함락 이후에도 일부 유대인 저항 세력이 항전을 이어갔으나,[111][42] 로마 군단은 이들을 진압하고 9월 8일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했다.[112][113][43][44] 요세푸스는 공방전 기간 동안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수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끌려갔다고 기록했으나, 그 정확한 수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17][118][120]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했으며,[115] 이 공방전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고 유대 민족에게 성전 파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3. 1. 포위 시작

티투스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며칠 전인 70년 4월 14일에 예루살렘 포위를 시작했다.[101][30] 로마군은 서쪽 방면에 세 개의 군단(마케도니카 제5군단, 풀미나타 제12군단, 아폴리나리스 제15군단)을 배치하고, 동쪽 올리브산에는 네 번째 군단인 프레텐시스 제10군단을 주둔시켜 도시를 완전히 둘러쌌다.[102][103][31][32]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들로 인해 인구가 크게 불어난 상태였다.[105][33] 티투스는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도시로 들어오는 물과 식량 공급을 차단하는 병참 작전을 펼쳤다. 순례자들의 입성은 막지 않았으나 포위로 인해 도시를 떠날 수 없게 되면서, 예루살렘 내 식량 부족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초기에 유대인 방어군은 로마군의 공성 시도를 몇 차례 성공적으로 격퇴하기도 했다.[99] 그러나 열심당을 비롯한 유대인 저항 세력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서로 다투었으며, 통일된 지도력 부재로 인해 규율과 훈련, 전투 준비가 매우 미흡한 상태였다.[104][29] 심지어 일부 세력은 로마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신의 개입이 필수적이라 믿거나, 방어자들을 더욱 필사적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라는 명분 아래 도시의 식량 비축품을 스스로 파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99][100][35][36] 이러한 내부 분열과 자멸적인 행동은 로마군의 포위 전략과 맞물려 예루살렘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2. 유대인들의 내분과 저항

초기에 로마군의 공성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내부의 열심당 세력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99] 이들은 적절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고, 이는 형편없는 규율과 훈련 부족, 전투 준비 미흡으로 이어졌다.[99]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 저항 세력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시몬 바르 기오라, 기스칼라의 요한, 엘레아자르 벤 시몬 등이 있었다.[29] 특히 기스칼라의 요한이 이끄는 세력은 성전 앞마당을 장악하고 있던 엘레아자르 벤 시몬을 살해하는 등[104][29] 내부 갈등이 극심했다. 열심당은 로마에 항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34] 심지어 도시의 식량 비축품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로마군을 격퇴하기 위해 신의 개입을 바라거나,[99] 방어자들을 더욱 필사적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0][35][36]

로마와 평화적으로 협상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요하난 벤 자카이와 같은 인물들의 노력은 열심당 지도부의 강경 노선과 공포 정치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34] 기스칼라의 요한과 시몬 바르 기오라 사이의 뿌리 깊은 적대감은 로마군이 본격적으로 성곽을 쌓기 시작하자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도 했다.[104][29]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유월절을 앞둔 4월 14일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다.[101][104][30]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순례자들로 인해 인구가 크게 불어난 상태였다.[105][33] 로마군은 5월경 제3 성벽과 제2 성벽을 차례로 돌파하며 유대인 수비대를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 일부 지역으로 몰아넣었다.[104] 티투스는 도시를 완전히 둘러싸는 성벽을 추가로 건설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전술을 사용했다.[104][29]

안토니아 요새를 둘러싼 공방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로마군은 여러 차례 공격에 실패한 후 기습 공격을 통해 요새를 점령했다.[104][29] 요새 성벽 일부는 기스칼라의 요한 측이 미리 파놓은 땅굴로 인해 약해져 무너지기도 했다.[106][37] 요새 함락 이후 로마군은 성전 공격을 준비하며 토벽을 쌓았다.[107][38]

유대인들은 올리브산 근처에서 로마군을 공격하거나,[107] 성전 북서쪽 회랑에 불을 지르고,[108] 성벽을 오르는 로마군을 함정에 빠뜨리는 등[108]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도시 내부의 상황은 처참했다. 극심한 굶주림으로 인해 일부 주민이 자신의 자녀를 잡아먹는 비극까지 발생했다.[108]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티투스의 명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유대인 저항군은 화살을 쏘아 그를 부상 입히며 거부했다.[104]

안토니아 요새를 점령한 로마군은 이를 발판 삼아 성전을 공격했다. 충차 공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전투 과정에서 한 로마 병사가 던진 불붙은 막대기가 성전 외벽에 옮겨붙으면서 화재가 발생했다.[104]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헤로데 대왕이 증축한 웅장한 성전을 파괴할 의도는 없었으며, 오히려 로마 황제와 신들에게 바치려 했다고 기록했지만,[104]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기록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109][110][39][40] 다른 기록들은 티투스가 성전 파괴를 직접 명령했다고 전하며, 현대 학계에서는 이 견해를 더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41]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불길로 인해 성전은 70년 8월, 티샤 베아브 절기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불은 도시의 주거 지역까지 삼켰다.[104][103][29][32] 요세푸스는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로마 군단들이 달려들 때, 설득이나 위협도 그들의 성급함을 억제할 수 없었고 분노만이 통제할 뿐이었다. 출구 주변의 군중들 다수가 다함께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짓밟혔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뜨겁고 연기나는 콜로네이드의 폐허 속으로 떨어졌고 패잔병들만큼이나 비참하게 죽었다. 로마군들은 성소에 접근하자, 그들은 심지어 카이사르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불 붙은 나무 토막들을 더 발사할 것을 재촉했다. 유대인 유격대들은 더 이상 도울 만한 위치가 아니었고, 모든 곳들에서 살육과 도주가 일어났다.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평화로운 시민들과 약자들, 비무장인원들이었고, 그들이 붙잡힌 어디에서든 살육을 당했다. 제단 주위의 시체 더미는 쌓이고 더욱 쌓이는 한편, 성소의 계단 아래로 피의 강물이 쏟아져내리고 꼭대기에서 살해당한 자의 시체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109][39]

성전 파괴 이후 로마 군단은 남은 유대인 저항 세력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일부는 숨겨진 터널이나 하수구를 통해 탈출했지만, 다른 이들은 도시 상층부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111][42] 로마군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성탑을 추가로 건설해야 했다.[111][42] 9월 7일 헤로드 궁전이 함락되었고, 9월 8일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112][113][43][44] 이후 로마군은 도시를 탈출한 유대인들을 추격하며 소탕 작전을 이어갔다.[113]

에드워드 포인터 (1868년)의 ''카타풀타''. 이와 같은 공성 무기들이 공방전 동안 로마군에게 사용되었다.


공방전 중 로마군의 진격 과정


당시 예루살렘 시가지의 재현 모형. 왼쪽 아래 성전에 인접해 있는 중앙의 탑이 헤로데 대왕이 건설한 안토니아 요새이다.


로마 병사들이 성전 언덕 서쪽 벽(통곡의 벽)에서 제9가로 던진 돌

3. 3. 로마군의 공격과 성벽 돌파

로마군의 초기 공성 시도 격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내부의 열심당은 분열되어 있었고 지도력 부족으로 규율과 전투 준비가 미흡했다. 이들은 식량 비축품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신의 개입을 바라거나 방어자들을 더 필사적이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로 추정된다.[99][100][35][36]

티투스유월절 직전인 70년 4월 14일에[101][30] 예루살렘 포위를 시작했다. 그는 서쪽에 마케도니카 제5군단, 풀미나타 제12군단, 아폴리나리스 제15군단 등 세 개의 군단을, 동쪽 올리브산에는 프레텐시스 제10군단을 배치했다.[102][103][104][31][32]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기념하러 온 많은 순례자들로 붐볐다.[105][33]

로마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자파 문 북쪽, 제3 성벽 서쪽에서 시작되었다. 5월경, 로마군은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29] 제3 성벽을 돌파했고, 곧이어 제2 성벽마저 함락시켰다.[104] 이로써 유대인 수비대는 성전과 상층 도시, 하층 도시 지역만을 통제하게 되었다.

유대인 내부에서는 기스칼라의 요한이 성전 앞마당을 장악하고 있던 엘레아자르 벤 시몬을 살해하는 등[104][29] 분열이 계속되었다. 기스칼라의 요한과 시몬 바르 기오라 사이의 적대감은 로마군이 성곽 건설을 시작하고 나서야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104]

로마군은 안토니아 요새 공략에 나섰으나 여러 차례 실패했다.[104][29] 티투스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기 위해 도시를 완전히 둘러싸는 새로운 포위 성벽 건설을 지시했다.[104][29] 이후 로마군은 안토니아 요새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104][29]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요새 성벽의 돌 네 개를 제거했을 때 밤중에 성벽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전에 기스칼라의 요한이 파놓은 땅굴 때문에 성벽 기반이 약해져 무너진 것이라고 기록했다. (v. 28)[106][37] 안토니아 요새를 점령한 티투스는 성전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 마당 옆 북서쪽 구석과 북쪽, 서쪽에 토벽(제방)을 쌓도록 지시했다. (v. 150)[107][38]

유대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올리브산 근처 동쪽에서 로마군을 공격했고, 북서쪽 콜로네이드에 불을 질렀다. (v. 165) 로마군도 다른 콜로네이드에 불을 질렀다. (v. 166) 또한 유대인들은 성벽을 오르려는 로마군을 함정에 빠뜨려 불태우는 등[108](v. 178-183) 로마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유대인 연합군의 공격으로 많은 로마 병사가 죽자,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보내 방어자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유대인들은 화살을 쏘아 요세푸스에게 부상을 입히며 거부했다. 이어진 유대인의 기습 공격 때 티투스 본인도 거의 사로잡힐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했다.

3. 4. 예루살렘 성전 함락

안토니아 요새를 점령한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할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104] 티투스는 성전 마당 인근에 토벽을 쌓아 공격을 준비했다.[107] 충차(공성추)를 동원한 공격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치열한 전투 중에 한 로마 병사가 성전 외벽 안으로 던진 불붙은 막대기가 결정적인 화근이 되었다.[104]

요세푸스에 따르면, 티투스는 헤로데 대왕이 막대하게 증축한 성전을 파괴할 의도는 없었으며, 오히려 성전을 점령하여 로마 황제로마의 신들에게 바치려 했다고 한다.[104][114] 그러나 한번 붙은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결국 성전은 서력 70년 8월, 유대력으로 티샤 베아브 9일 혹은 10일에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104][103]

요세푸스는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로마 군단들이 달려들 때, 설득이나 위협도 그들의 성급함을 억제할 수 없었고 분노만이 통제할 뿐이었다. 출구 주변의 군중들 다수가 다함께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짓밟혔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뜨겁고 연기나는 콜로네이드의 폐허 속으로 떨어졌고 패잔병들만큼이나 비참하게 죽었다. 로마군들은 성소에 접근하자, 그들은 심지어 카이사르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불 붙은 나무 토막들을 더 발사할 것을 재촉했다. 유대인 유격대들은 더 이상 도울 만한 위치가 아니었고, 모든 곳들에서 살육과 도주가 일어났다.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평화로운 시민들과 약자들, 비무장인원들이었고, 그들이 붙잡힌 어디에서든 살육을 당했다. 제단 주위의 시체 더미는 쌓이고 더욱 쌓이는 한편, 성소의 계단 아래로 피의 강물이 쏟아져내리고 꼭대기에서 살해당한 자의 시체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109]

요세푸스의 기록은 성전 파괴의 책임을 티투스에게서 면제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는 요세푸스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109][110] 실제로 타키투스를 비롯한 다른 기록에서는 티투스가 성전 파괴를 명시적으로 지시했다고 전하기도 한다.[41] 성전에서 시작된 불길은 예루살렘의 주거 지역으로까지 번져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104][103]

4. 예루살렘 파괴

안토니아 요새 함락 이후, 로마군의 공격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집중되었다. 70년 8월, 유대력으로 티샤 베아브 9일 혹은 10일에 성전은 결국 로마 병사들에 의해 불탔고, 화재는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104][103] 성전 파괴가 티투스의 본래 의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기록과 타키투스 등의 기록이 엇갈리며 논란이 있다.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유대인들의 저항은 상도(Upper City) 등 일부 지역에서 이어졌으나, 로마군은 공성탑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했다.[111] 마침내 9월 8일,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112][113] 티투스는 일부 탑과 성벽을 제외하고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도시는 기초까지 파헤쳐져 황폐화되었다.[115]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요세푸스는 이 과정에서 1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약 9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기록했다.[117][118] 포로들은 검투사가 되거나 노역에 동원되었고, 일부는 노예로 팔려나갔다.[119]

예루살렘 파괴의 구체적인 과정, 로마군의 만행, 요세푸스의 기록과 그에 대한 평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어지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4. 1. 로마군의 만행

로마군이 안토니아 요새를 점령한 뒤,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충차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격렬한 전투 중에 한 로마 병사가 성전 벽 안으로 불붙은 막대기를 던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104][103] 성전은 70년 8월, 유대력으로 티샤 베아브 9일 혹은 10일에 점령되어 파괴되었고, 불길은 예루살렘의 거주 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104][103]

성전 파괴가 티투스의 본래 의도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헤로데 대왕이 막대하게 증축한 성전의 건축적 가치를 고려하여 보존하려 했으며, 로마 황제와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개조할 생각이었다고 기록했다.[45]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전에 처음 불을 지른 것은 로마군의 진격을 막으려던 유대인들이었고, 이후 로마 병사들이 성전 인근 건물에 불을 붙인 것이 걷잡을 수 없는 대화재로 번졌다는 것이다.[114][45] 그러나 요세푸스의 이러한 기록은 티투스와 플라비우스 왕조의 호의를 얻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109][110] 반면,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타키투스의 기록을 인용하며 티투스가 유대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전 파괴를 명령했다고 주장했다.[41]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타키투스의 기록처럼 티투스가 파괴를 승인했다는 관점을 지지하지만,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41]

요세푸스는 성전 파괴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로마 군단들이 달려들 때, 설득이나 위협도 그들의 성급함을 억제할 수 없었고 분노만이 통제할 뿐이었다. 출구 주변의 군중들 다수가 다함께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짓밟혔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뜨겁고 연기나는 콜로네이드의 폐허 속으로 떨어졌고 패잔병들만큼이나 비참하게 죽었다. 로마군들은 성소에 접근하자, 그들은 심지어 카이사르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불 붙은 나무 토막들을 더 발사할 것을 재촉했다. 유대인 유격대들은 더 이상 도울 만한 위치가 아니었고, 모든 곳들에서 살육과 도주가 일어났다.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평화로운 시민들과 약자들, 비무장인원들이었고, 그들이 붙잡힌 어디에서든 살육을 당했다. 제단 주위의 시체 더미는 쌓이고 더욱 쌓이는 한편, 성소의 계단 아래로 피의 강물이 쏟아져내리고 꼭대기에서 살해당한 자의 시체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109]


성전이 불탄 후, 로마 군단은 남은 유대인 저항군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일부는 숨겨진 터널과 송수로를 통해 탈출했지만, 다른 이들은 상도(Upper City)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다.[111] 로마군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성탑을 건설해야 했고, 9월 7일 헤로데 궁전이 함락되면서 9월 8일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놓였다.[112][113]

티투스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파사엘루스(Phasaelus), 히피쿠스(Hippicus), 마리암네(Mariamne) 탑과 도시 서쪽 성벽 일부는 남겨두도록 했다. 이 구조물들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를 확보하고, 후대에 로마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력한 요새 도시를 정복했는지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성벽은 기초까지 파헤쳐져 예루살렘이 한때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115][46] 요세푸스는 이 파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현재 로마군에겐 더 이상 죽이거나 약탈할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것들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대상이 있었다만, 그들은 그 어느 것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티투스] 카이사르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탑들은 뛰어나기에 많은 것들을 남겨두라 하였고, 여기에는 파사일루스 (Phasaelus), 히피쿠스 (Hippicus), 마리암네 (Mariamne), 상당한 성벽이 서쪽에서 도시를 둘러쌌던 상당한 성벽 등이 있었다. 이 성벽은 상도에 있는 로마 수비대가 있을 주둔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보존되었고, 탑들 [세 개의 요새] 역시도 자손들에게 로마의 용맹함이 정복한 이 도시가 어떤 도시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요새화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보존되었지만, [예루살렘을 둘러싸던] 그 성벽의 남은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군이 심지어는 기초까지 파내며, 철저히 무너져서 이곳이 [예루살렘]이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걸 믿게 하는 것들이 남지 않았다. 이것이 혁신적이던 이들의 광기에 의한, 대단히 장엄하며 모든 인류에 있어 위대했던 도시, 예루살렘의 종말이었다.[115]
그리고 진실로, 그 광경 자체는 슬픈 것이었다. 나무들과 아름다운 정원들로 꾸며졌던 장소들은 지금은 어딜가든 황폐해졌고, 나무들은 베였다. 그리고 또한 유다이아와 그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교외를 과거에 보았고 지금은 사막으로서 모습을 본 그 어떤 외국인들도 그런 큰 변화에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으로 아름다움의 모든 흔적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전의 이곳을 알았고, 현재의 이곳을 갑작스럽게 방문한 누구라도 이곳을 다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 도시에 있음에도, 그 도시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다.[116]


요세푸스는 공성전 동안 110만 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 때문에 희생자 수가 많았다고 설명했다.[117] 또한 97,000명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다고 기록했다.[118] 로마군은 무장한 반란군뿐 아니라 노약자들도 처형했으며, 포로 중 시몬 바르 기오라는 로마 개선식 후 처형당했고, 기스칼라의 요한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수많은 포로가 강제로 검투사가 되어 투기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로마의 평화의 포룸과 콜로세움 건설에 동원되었고, 17세 이하의 청소년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119] 그러나 요세푸스가 제시한 사망자 수는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와 비교했을 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스 슈워츠 (Seth Schwartz)는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를 약 100만 명(그중 절반이 유대인)으로 추정하며, 전쟁 이후에도 상당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다는 점을 들어 요세푸스의 수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120]

티투스와 그의 군대는 로마로 돌아가 메노라와 성전의 기물들을 앞세우고 승전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 장면은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 개선문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119][117] 3세기 역사가 필로스트라토스에 따르면, 티투스는 자신의 승리가 개인의 능력이 아닌 신의 분노를 집행하는 도구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며 승리의 화환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121]

4. 2. 요세푸스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로마군과 예루살렘 방어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시도했으나, 협상 도중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공방전과 그 여파를 직접 목격하고 자신의 저서 『유대전쟁사』에 상세히 기록했다.[114][45]

요세푸스는 티투스를 비교적 온건한 지도자로 묘사하며, 그가 다른 지휘관들과 상의한 후 500년 역사의 예루살렘 성전을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했다.[114][45]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전 파괴는 티투스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유대인들이 먼저 로마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성전 입구에 불을 질렀고 이후 로마 병사들이 인근 건물에 불을 붙인 것이 걷잡을 수 없는 대화재로 번졌다고 한다.[114][45] 이러한 기록은 요세푸스가 로마 플라비우스 왕조의 호의를 얻기 위해 티투스의 책임을 축소하려 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109][110] 반면, 술피키우스 세베루스가 인용한 타키투스의 기록이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티투스가 성전 파괴를 직접 지시하거나 최소한 승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41]

요세푸스는 로마군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한 후의 파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현재 로마군에겐 더 이상 죽이거나 약탈할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것들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티투스] 카이사르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탑들은 뛰어나기에 많은 것들을 남겨두라 하였고, 여기에는 파사일루스 (Phasaelus), 히피쿠스 (Hippicus), 마리암네 (Mariamne), 상당한 성벽이 서쪽에서 도시를 둘러쌌던 상당한 성벽 등이 있었다. 이 성벽은 상도에 있는 로마 수비대가 있을 주둔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보존되었고, 탑들 [세 개의 요새] 역시도 자손들에게 로마의 용맹함이 정복한 이 도시가 어떤 도시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요새화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보존되었지만, [예루살렘을 둘러싸던] 그 성벽의 남은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군이 심지어는 기초까지 파내며, 철저히 무너져서 이곳이 [예루살렘]이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걸 믿게 하는 것들이 남지 않았다. 이것이 혁신적이던 이들의 광기에 의한, 대단히 장엄하며 모든 인류에 있어 위대했던 도시, 예루살렘의 종말이었다.[115][46]

:

: 그리고 진실로, 그 광경 자체는 슬픈 것이었다. 나무들과 아름다운 정원들로 꾸며졌던 장소들은 지금은 어딜가든 황폐해졌고, 나무들은 베였다. 그리고 또한 유다이아와 그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교외를 과거에 보았고 지금은 사막으로서 모습을 본 그 어떤 외국인들도 그런 큰 변화에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으로 아름다움의 모든 흔적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전의 이곳을 알았고, 현재의 이곳을 갑작스럽게 방문한 누구라도 이곳을 다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 도시에 있음에도, 그 도시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다.[116][47]

요세푸스는 공방전 중에 11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했다.[117][53] 또한 로마군이 무장한 저항 세력과 노인들을 처형한 뒤, 9만 7천 명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고 기록했다.[118][54] 포로가 된 지도자 중 시몬 바르 기오라는 로마에서 처형되었고, 기스칼라의 요한은 종신형에 처해졌다.[118] 수많은 포로들은 강제로 검투사가 되거나 콜로세움 건설과 같은 노역에 동원되었고, 17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119] 그러나 현대 역사가 세스 슈워츠는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를 고려할 때 110만 명이라는 사망자 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면서도, 9만 7천 명의 포로 수는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했다.[120][57][59] 요세푸스는 살아남은 많은 유대인들이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흩어져 피난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3세기경의 작가 필로스트라토스는 티투스가 "자신들의 신에게 버림받은 백성을 정복한 것일 뿐"이라며, 이 승리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신의 분노를 집행하는 도구로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겨 승리의 화관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기록했다.[121][92]

4. 3. 고고학적 증거

수년에 걸쳐 예루살렘 파괴의 증거를 제공하는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되어,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묘사가 정확하다고 믿게 되었다.[1][48] 고고학자 로니 라이히(Ronny Reich영어)는 "성전 파괴와 관련된 유물은 부족하지만 성전산 성벽과 그 주변, 상층 도시, 도시 서쪽, 티로포이온 계곡에 관한 유물은 상당합니다. [...] 대부분의 경우 고고학적 기록이 역사적 묘사와 일치하여 요세푸스의 신뢰성을 보여줍니다"라고 평가했다.[48]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흐만 아비가드(Nahman Avigad영어)가 이끄는 고고학 팀은 예루살렘 상층 도시의 주거용 건물들이 대규모 화재로 파괴된 흔적을 발견했다. 이 화재로 건물 내 모든 유기물이 소실되었으며, 층 사이에 있던 들보 천장이 무너지면서 상층부의 돌들이 아래층을 덮쳤다. 일부 건물은 부분적으로, 일부는 완전히 불탔으며, 여러 곳에서 발견된 산화칼슘(Calcium oxide영어)은 석회암이 오랜 시간 불타며 손상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헤로디아누스 지구에서 발견된 '불탄 집'(Burnt House영어)은 당시 도시 파괴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48][49]

화재 흔적이 보이는 프레스코화, 볼 고고학 박물관, 유대인 지구


화재는 집 안에 있던 가정용품과 물건들에도 흔적을 남겼다. 고대 유대의 석기류는 재로 얼룩지거나 타서 석회로 변했고, 유리 용기는 고열에 녹아 터지거나 뒤틀렸다. 반면, 도자기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화재로 인해 남겨진 재와 숯으로 이루어진 층의 두께는 평균 약 1m에 달했으며, 무너진 돌 더미는 최대 2m 이상 쌓인 곳도 있었다.[48] 또한, 하층 도시의 대규모 배수로와 실로암 못은 토사가 쌓여 기능을 상실했고, 도시 성벽 역시 여러 곳에서 무너진 채 발견되었다.[50]

성전산의 서쪽 성벽(통곡의 벽)을 따라 이어진 헤로디아누스 거리 위에서는 성벽에서 무너져 내린 거대한 돌들이 발견되었다.[51] 이 돌무더기 속에서는 성전 파괴 당시 로마 군단병들이 던져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비적인 히브리어 비문인 '나팔 부는 곳 비문'(Trumpeting Place inscription영어)도 함께 발견되었다.[52]

5. 여파

예루살렘이 70년 9월 8일 완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들어간 후,[112][113] 로마군은 도시에 남아있던 유대인 저항군들을 신속하게 격파했다. 일부 저항군은 숨겨진 통로나 송수로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고, 다른 이들은 상도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111]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탈출한 이들도 계속해서 추격했다.

예루살렘 함락과 제2성전 파괴 이후에도 헤로디움, 마카이로스, 마사다 등 몇몇 요새에서는 유대인 반군의 저항이 계속되었다.[122] 이들 요새에서의 저항은 이후 몇 년간 이어졌으며, 로마군은 이들을 차례로 진압해 나갔다.

5. 1. 유대인 저항의 지속

예루살렘 함락과 도시 및 성전 파괴 이후에도 유대인 반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헤로디움, 마케라우스, 마사다 등 몇몇 요새에서는 여전히 저항이 이어졌다.[64][122] 헤로디움과 마케라우스는 예루살렘 함락 후 2년 안에 로마군에게 함락되었고, 마사다는 유대 반란군의 최후의 요새로 남았다. 73년, 로마군은 마사다의 성벽을 돌파하고 요새를 점령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진입하기 직전 거의 모든 유대인 수비대가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고 한다.[65][123] 마사다의 함락으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막을 내렸다.

5. 2.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종결

예루살렘 함락과 도시 및 성전 파괴 이후에도 헤로디움, 마케라우스, 마사다 등 몇몇 요새에서는 유대 반군의 저항이 계속되었다.[64] 헤로디움과 마케라우스는 2년 안에 로마군에게 함락되었고, 마사다는 유대 반군의 최후 거점으로 남았다.[64] 73년, 로마군은 마사다의 성벽을 돌파하고 요새를 점령했으며, 요세푸스는 로마군이 진입하기 전 거의 모든 유대인 수비대가 집단 자결했다고 기록했다.[65] 마사다 함락으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막을 내렸다.[65]

5. 3. 바르 코크바의 난

서기 132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진압 후 60년 만에 바르 코크바의 난으로 알려진 또 다른 봉기가 유대 지방에서 일어났다.[66] 이 반란은 예루살렘 폐허 위에 로마 식민지인 엘리아 카피톨리나가 건설되고, 성전산 터에 주피터 신전이 세워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여겨진다.[67]

산헤드린의 지지를 받은 시몬 바르 코시바(후에 바르 코크바로 알려짐)는 독립 국가를 세웠으나, 서기 135년 로마 제국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 반란의 결과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보다 더 광범위한 유대 공동체의 인구 감소로 이어졌으며,[68] 일부 학자들은 이를 대량 학살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68][69] 로마 제국의 탄압으로 유대 지방의 유대인 공동체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갈릴리, 골란 고원, 베이트산 계곡, 그리고 유대 지방의 동부, 남부, 서부 등 다른 이스라엘 땅에서는 유대인 인구가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며 번영했다.[70]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유대 지방의 이름을 지도에서 지우고 팔레스티나 속주로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71][72][73]

6. 기념

로마 제국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로마에서는 개선식을 열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메노라와 같은 전리품을 과시했으며,[119][117][53] 이 장면은 티투스 개선문에 부조로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진다.[127][74][93] 또한, 승리를 기념하는 유다이아 캅타 주화를 발행하고,[124][77][93] 평화의 신전콜로세움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건설하여 제국의 위상을 과시했다.[125][75][93][126][76]

반면,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는 민족적 비극으로 기억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제1성전제2성전이 파괴된 날로 전해지는 티샤 베아브를 매년 금식하며 애도하는 날로 지키고 있다. 또한 일부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성전 파괴 연도를 기점으로 하는 연대 표기법을 사용하여 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기도 했다.[78] 성전 파괴는 유대교의 중심을 성전 제사에서 율법 연구와 회당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94]

6. 1. 로마 측

로마로 복귀한 티투스와 그의 병사들은 거리 행진을 통해 메노라와 슐찬(빵상)을 과시하며 승리를 기념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물건들은 성전의 고위 사제들만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티투스 개선문에 기념되어 있다.[119][117][53] 개선식 도중 약 700명의 유대인 포로들이 사슬에 묶인 채 로마 거리를 행진했으며, 그중에는 시몬 바르 기오라와 기스칼라의 요한도 포함되었다.[54][60] 시몬 바르 기오라는 반역죄로 타르페이언 암벽에서 주피터 신전으로 던져져 처형되었고,[61] 기스칼라의 요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62][63]

플라비우스 왕조는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여러 건축물과 기념물을 남겼다.

  • '''유다이아 캅타 주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인 서기 70년, 아들 티투스의 유대 점령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기념 주화 시리즈이다.[124][77][93]
  • '''평화의 신전''': 서기 75년,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으로 로마에 건설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이라고도 불리며,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하고 헤로데 성전에서 가져온 메노라를 보관했다고 전해진다.[125][75][93]
  • '''플라비아누스 원형극장 (콜로세움)''': 서기 70년에서 80년 사이에 건설된 이 건축물은 유대 전쟁의 전리품으로 건설 자금의 일부를 조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트래버틴 석재가 발견되기도 했다.[126][76]
  • '''티투스 개선문''': 서기 82년경,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로마의 사크라 가도에 건설했다. 이는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개선문의 부조에는 개선 행렬 중 병사들이 성전에서 약탈한 메노라를 운반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127][74][93] 이 개선문 외에도 상원이 막시무스 서커스 입구에 세운 또 다른 티투스 개선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흔적만 남아있다.[5]

티투스 개선문에는 성전에서 탈취한 귀중품, 특히 메노라가 묘사되어 있다.


3세기 작가 필로스트라토스에 따르면, 티투스는 예루살렘 정복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신의 분노를 집행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며 승리의 화환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121]

6. 2. 유대 측

로마군의 공성 시도를 초기에 성공적으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당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지도력의 부재는 형편없는 규율과 훈련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투 준비 태세에 악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식량 비축품을 스스로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신의 자비로운 개입을 바라거나,[99] 혹은 방어자들을 더욱 필사적으로 만들어 로마군을 격퇴하려는 극단적인 전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00]

티투스유월절이 시작되기 며칠 전인 4월 14일,[101] 서쪽에서 세 개의 군단(마케도니카 제5군단, 풀미나타 제12군단, 아폴리나리스 제15군단)을, 동쪽 올리브산에는 네 번째 군단(프레텐시스 제10군단)을 배치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다.[102][103][104]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105]

포위 공격은 자파 문 북쪽, 세 번째 성벽의 서쪽에서 시작되었다. 5월경 세 번째 성벽이 돌파되었고, 곧이어 두 번째 성벽마저 함락되면서 유대인 수비대는 성전과 하도, 상도 지역만을 통제하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 측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기스칼라의 요한이 이끄는 집단은 성전 앞마당을 점거하고 있던 엘레아자르 벤 시몬을 살해하며 내부 갈등을 격화시켰다.[104] 기스칼라의 요한과 시몬 바르 기오라 사이의 적대감은 로마군이 성곽 공격을 위한 공성 무기 설치를 시작하고 나서야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굶주리게 하기 위해 도시를 완전히 둘러싸는 성벽을 추가로 건설했다. 안토니아 요새의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몇 차례 시도가 실패한 후, 로마군은 마침내 결정적인 공격을 개시했다.[104]

로마군이 안토니아 요새에 도달하여 요새 성벽 파괴를 시도했다. 그들은 네 개의 돌을 제거했을 뿐이지만, 밤사이 성벽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는 요한 측이 로마군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 아래에 판 땅굴로 인해 기반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106] 티투스는 성전 마당의 북서쪽 구석, 북쪽, 서쪽에 토벽을 쌓아 압박을 가했다.[107]

이에 유대인들은 올리브산 근처 동쪽에서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티투스에게 격퇴당했다. 열심당은 북서쪽 콜로네이드(주랑)에 불을 질렀고, 로마군 역시 방화로 맞섰다. 유대인들은 불타는 콜로네이드를 이용해 로마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마군이 성벽을 오르려 할 때 함정을 파고 불을 질러 저항하기도 했다. 한편 도시 내부에서는 극심한 굶주림으로 인해 일부 주민들이 자신의 자녀를 잡아먹는 참혹한 일까지 벌어졌다.[108]

유대인 연합군이 많은 로마 병사를 사살하자, 티투스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유대인들은 화살을 쏘아 요세푸스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어진 갑작스러운 공격에서 티투스는 하마터면 사로잡힐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했다.

예루살렘 성전 지역을 내려다보는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위치였다. 충차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격렬한 교전 중에 한 로마 병사가 성전 벽 안으로 불붙은 막대기를 던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성전 파괴는 본래 티투스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헤로데 대왕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증축한 웅장한 건축물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티투스는 성전을 점령하여 로마 황제로마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개조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번 붙은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결국 성전은 70년 8월, 유대력으로 티샤 베아브 9일 또는 10일에 점령 후 파괴되었고, 불길은 예루살렘의 거주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104][103] 요세푸스는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로마 군단들이 달려들 때, 설득이나 위협도 그들의 성급함을 억제할 수 없었고 분노만이 통제할 뿐이었다. 출구 주변의 군중들 다수가 다함께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짓밟혔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뜨겁고 연기나는 콜로네이드의 폐허 속으로 떨어졌고 패잔병들만큼이나 비참하게 죽었다. 로마군들은 성소에 접근하자, 그들은 심지어 카이사르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불 붙은 나무 토막들을 더 발사할 것을 재촉했다. 유대인 유격대들은 더 이상 도울 만한 위치가 아니었고, 모든 곳들에서 살육과 도주가 일어났다.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평화로운 시민들과 약자들, 비무장인원들이었고, 그들이 붙잡힌 어디에서든 살육을 당했다. 제단 주위의 시체 더미는 쌓이고 더욱 쌓이는 한편, 성소의 계단 아래로 피의 강물이 쏟아져내리고 꼭대기에서 살해당한 자의 시체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109]


요세푸스의 서술은 티투스에게 성전 파괴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그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호의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술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9][110]

로마 군단은 남아있는 유대인 저항군을 신속하게 제압했다. 일부는 숨겨진 터널과 송수로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고, 다른 이들은 상도(Upper City)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다.[111] 이 저항으로 로마군은 공성탑을 추가로 건설해야 했고, 진격이 잠시 멈추기도 했다. 헤로드의 궁전은 9월 7일에 함락되었고, 9월 8일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놓였다.[112][113] 로마군은 예루살렘에서 탈출한 유대인들도 계속해서 추격했다.

유대교 전통에서 매년 티샤 베아브는 금식일로 지켜지는데, 이는 제1성전제2성전이 모두 같은 날(히브리력 아브월 9일)에 파괴되었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성전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수 세기 동안 일부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성전 파괴 연도를 기점으로 하는 새로운 히브리력을 사용하기도 했다.[78] 예를 들어, 사해 남쪽 조아라의 유대인 묘지에서는 이 연대 체계가 사용되었는데, 한 여성의 비문에는 "그녀는 엘룰월 17일, 셰미타 4년, 성전 파괴 후 362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달력 체계는 고대 후기 레반트의 다른 유대인 공동체와 이후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도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78] 예루살렘 성전은 이후 재건되지 않았고, 성전 중심의 사두개파는 쇠퇴했으며 율법 중심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다. 후대의 유대 학자들은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를 당시 유대 사회의 근거 없는 증오에 대한 신의 벌로 해석하기도 했다.[94]

7. 이해와 역사적 유산

로마군은 남은 유대인 저항군을 신속하게 격파했다. 일부는 숨겨진 터널과 송수로를 통해 달아났고, 다른 이들은 상도(上都)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다.[111] 이 저항으로 로마군은 남은 유대인들을 공격하기 위한 공성탑을 건설해야 했고, 진격이 잠시 멈추었다. 헤로데 대왕의 궁전은 9월 7일에 함락되었고, 9월 8일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12][113] 로마군은 예루살렘에서 탈출한 이들을 계속해서 추격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투스는 다른 이들과 상의한 뒤 500년 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존하라고 명령하는 등 온화한 접근 방식을 보였다.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성전 입구에 먼저 불을 질렀고, 이후 로마 병사들이 성전과 인접 건물에 불을 붙여 대화재가 발생했으며, 유대인들이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114] 그러나 요세푸스의 이러한 서술은 플라비우스 왕조의 호의를 얻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109][110]

요세푸스는 공방전과 그 여파를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현재 로마군에겐 더 이상 죽이거나 약탈할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것들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티투스] 카이사르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파사일루스, 히피쿠스, 마리암네 탑과 서쪽 성벽 일부는 남겨두라 하였다. 이 성벽은 상도에 주둔할 로마 수비대를 위해, 탑들은 후세에 로마의 용맹함이 얼마나 잘 요새화된 도시를 정복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보존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둘러싸던] 그 성벽의 남은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군이 기초까지 파내어 철저히 무너뜨려, 이곳이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걸 믿게 하는 것들이 남지 않았다. 이것이 혁신적이던 이들의 광기에 의한, 장엄하고 모든 인류에게 위대했던 도시, 예루살렘의 종말이었다.[115]
...나무들과 아름다운 정원들로 꾸며졌던 장소들은 지금은 어딜 가든 황폐해졌고, 나무들은 베였다. 과거 유다이아와 그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교외의 모습을 보았고 지금은 사막이 된 모습을 본 외국인이라면 누구든 그런 큰 변화에 한탄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아름다움의 모든 흔적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116]


요세푸스는 공방전 동안 110만 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월절 행사 때문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던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117] 무장한 반군뿐 아니라 비무장 시민들도 처형되었고, 남은 시민들은 포로가 되었다. 로마군은 시몬 바르 기오라와 기스칼라의 요한을 포함한 지도자들과 나이 든 사람들을 죽인 후, 97,000명을 노예로 삼았다.[118] 시몬 바르 기오라는 로마에서 처형당했고, 요한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노예가 된 이들 중 수천 명은 강제로 검투사가 되어 투기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다른 많은 이들은 로마의 평화의 포룸과 콜로세움 건설에 동원되었다. 17세 이하의 청소년들은 노예로 팔렸다.[119] 하지만 현대 역사가 세스 슈워츠는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가 약 100만 명(그중 절반이 유대인)이었던 점을 들어 요세푸스의 사망자 수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유대 지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음은 분명하다.[120]

티투스와 그의 군대는 로마로 돌아가 메노라와 슐찬(성전의 빵상) 등을 앞세우고 개선 행진을 벌였다. 이 물건들은 이전까지 성전의 대제사장만 볼 수 있었던 신성한 기물이었다. 이 사건은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 개선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기념되고 있다.[119][117]

살아남은 많은 유대인들은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흩어졌다. 3세기 작가 필로스트라토스에 따르면, 티투스는 이 승리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신의 분노를 집행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며 승리의 화환을 거부했다고 한다.[121]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는 유대인 공동체에 깊은 정신적 충격을 안겼으며, 이후 유대교기독교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두 종교가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7. 1. 유대교의 변화

유대교의 아모라임(Amoraim)은 제2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당시 유대 사회에 만연했던 “근거 없는” 증오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겼다.[79] 많은 유대인들이 절망 속에서 유대교를 버리고 이교로 개종한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많은 유대인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합류했다.

이 멸망은 초기 기독교(Early Christianity)가 유대교의 뿌리에서 분리되는(Split of early Christianity and Judaism)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복음서(Gospel)에 반영된 대로, 예수를 성전 반대자로 묘사하며 다른 유대인들과 거리를 두었다. 예수는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고(마태복음 24장, 누가복음 21장, 마가복음 13장), 기독교인들은 서기 70년의 사건을 그 예언의 성취로 이해했다.[80][81][82]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를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하기도 했다.

예루살렘은 멸망한 후에도 유대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중요성을 유지했으며, 귀환과 재건, 그리고 민족적 삶의 갱신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23] 제3성전(Third Temple)에 대한 믿음은 정통 유대교(Orthodox Judaism)의 초석으로 남아 있다.[83]

7. 2. 기독교의 분리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초기 기독교유대교의 뿌리에서 분리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80][81][82]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성전 반대자로 묘사하고 성전 파괴를 예수를 거부한 것에 대한 처벌로 보면서, 유대교의 나머지 부분과 거리를 두었다. 이는 복음서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예수는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고(마태복음 24장, 누가복음 21장, 마가복음 13장), 기독교인들은 서기 70년의 사건을 그 예언의 성취로 이해했다.[80][81][82]

7. 3. 예술 작품

유다이아 전쟁, 특히 예루살렘 공방전과 파괴는 수 세기를 거쳐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티투스 개선문의 박육조제2성전 약탈의 가장 극적인 상징으로서 메노라를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 공방전과 파괴', ''La Passion de Nostre Seigneur'', 1504년경 작품


다음은 예루살렘 공방전과 파괴를 주제로 한 주요 예술 작품들이다.

  • ''예루살렘 공방전'': 14세기 중세 영어 시이다.[129]
  • 프랑크인의 관 (8세기): 상자 뒤쪽 면에 예루살렘 공방전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130]
  • 니콜라 푸생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1637년작): 캔버스에 그린 유화 (147cm × 198.5cm)로,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제2성전 파괴와 약탈을 묘사한다.[131]
  • 빌헬름 폰 카울바흐의 ''티투스의 예루살렘 파괴'' (1846년작): 캔버스에 그린 유화 (585cm × 705cm)로,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에서 소장 중이다. 대제사장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 파괴를 우화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한다.[132]
  • 데이비드 로버츠의 ''70년, 티투스 명령하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방전과 파괴'' (1850년작): 캔버스에 그린 유화 (136cm × 197cm)로, 개인 컬렉션에 속해있다. 티투스 지휘하 로마군의 예루살렘 방화와 약탈을 묘사한다.[133]
  •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1867년작): 캔버스에 그린 유화 (183cm × 252cm)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로마군의 제2성전 파괴와 약탈을 묘사했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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