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한말은 후한 영제 시기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군벌들이 할거하며 혼란에 빠진 시기이다. 영제 사후, 동탁이 정권을 잡고 헌제를 옹립하며 폭정을 이어갔고, 이에 반발한 연합군이 결성되었지만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고 낙양을 불태웠다. 이후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 후에도 군벌 간의 다툼은 계속되었고,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조조는 둔전을 실시하여 경제적 안정을 꾀하고,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손권, 유비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유비는 익주를 점령하고 한중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웠다. 결국,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로 삼국이 정립되며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후한말 | |
---|---|
개요 | |
![]() | |
시기 | 189년 ~ 220년 |
국가 | 후한 |
원인 |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동탁의 집권 군벌의 할거 |
결과 | 삼국 시대의 시작 |
주요 사건 |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동탁의 집권 군웅할거 관도 대전 적벽 대전 |
관련 인물 | 영제 소제 헌제 동탁 조조 유비 손권 원소 원술 여포 도겸 유표 마등 공손찬 장로 |
배경 | |
정치적 혼란 | 환관의 발호 척신의 권력 남용 부패한 관리 |
경제적 문제 | 토지 겸병 심화 농민 생활 악화 황건적의 난 발생 |
군사적 불안 | 변방 민족의 침입 지방 군벌의 성장 |
주요 사건 | |
황건적의 난 | 184년 ~ 205년 |
십상시의 난 | 189년 |
동탁의 집권 | 189년 ~ 192년 |
군웅할거 | 190년 ~ 220년 |
관도 대전 | 200년 |
적벽 대전 | 208년 |
결과 | |
후한 멸망 | 220년 |
삼국 시대 개막 | 위나라, 촉한, 오나라 건국 |
사회적 변화 | 귀족 세력 약화, 호족 세력 성장 |
관련 정보 | |
영향 | 삼국지연의 등 창작물에 큰 영향 중국 문화에 깊은 흔적 남김 |
2. 군벌 할거의 시작 (184년 ~ 191년)
184년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고, 후한 조정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군벌들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188년, 유언의 건의로 주자사보다 권한이 강화된 주목 제도가 시행되면서 지방 군벌 할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189년 영제 사후,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횡포로 중앙 정부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다. 동탁에 대항하는 연합군이 결성되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되면서 군벌 할거는 가속화되었다.
이후 각지의 군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왕처럼 자신의 영토를 통제하고 다스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2. 1. 황건적의 난과 지방 통제력 강화 (184년 ~ 189년)
황건적의 난은 후한 영제 시기, 주자사들의 행정력 부재로 인해 발생한 농민 반란이었다. 184년에 일어난 가장 심각한 반란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초래했다.188년, 유언은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민란의 원인이 주자사들의 실질적인 행정 권한 부족에 있다고 영제에게 건의했다. 영제는 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방관의 명칭을 주자사에서 주목(牧)으로 변경하고, 세금 징수 및 주 안의 군사 통솔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지방 군벌 할거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유언은 익주목으로, 유우는 유주목으로 임명되는 등 주요 인사들이 주목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이후 군벌들이 한 제국의 광대한 지역을 통제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 2. 조정 권위의 실추 (189년 ~ 191년)
영제가 189년에 사망하고, 그의 13세 아들 유변(하태후 소생)이 뒤를 이어 소제가 되었다. 하태후는 어린 황제의 섭정이 되었고, 그녀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은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가 되었다. 하진과 원소는 조정의 영향력 있는 환관 무리인 십상시를 모두 제거하려 음모를 꾸몄지만, 하태후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했다. 하진은 동탁을 소환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양주(涼州; 현재의 간쑤성) 군벌로 하여금 수도 낙양으로 진군하여 하태후에게 십상시를 제거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했다. 환관들은 하진의 음모를 알아채고 그를 궁궐로 유인하여 살해했다(189년 9월 22일). 이에 원소는 황실 경비대를 이끌고 궁궐 환관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살아남은 환관들은 소제와 그의 동생인 8살의 진류왕(할머니 동태후가 양육)을 납치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향해 도망쳤지만, 결국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동탁이 현장에 도착하여 소제와 진류왕을 발견했다. 어린 황제는 초조하고 두려워 보였지만, 진류왕은 침착하고 의연하게 동탁에게 그들을 궁궐로 호송하라고 명령했다. 동탁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군대를 수도로 불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독살한 후 진류왕을 옹립하여 헌제가 되게 했다. 동탁은 조정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상국"으로 칭했는데, 이 칭호는 서한 시대의 정치가 소하 이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동탁은 무기를 해제하거나 신발을 벗지 않고 조정에 참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90년 봄, 여러 지방 관리와 군벌들은 동탁이 황위를 찬탈하려 하고 헌제를 사실상 납치했다고 주장하며 동탁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했다. 원소는 발해 (현재의 창저우, 허베이성)의 태수로 연합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연합군의 군대는 하내 (河內; 현재의 자오쭤, 허난성)에 주둔했으며 수도 낙양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춘 듯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실제로는 상당히 조직력이 떨어졌고, 원소는 전체 연합군에 대한 효과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게다가, 연합군 구성원들은 동탁과 그의 강력한 양주 군대에 직접 맞서는 것을 꺼렸다. 그럼에도 동탁은 불안해하며 연합군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서쪽의 장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약 한 달 후, 동탁은 헌제와 조정에 낙양 주민들과 함께 장안으로 이동하도록 강요했고, 그 과정에서 이전 수도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동하는 동안 동탁은 낙양 근처에 머물면서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191년, 연합군은 황족의 일원으로서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유우를 옹립하려 하여 동탁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려 했다. 유우는 헌제에게 충성을 지키며 단호하게 황위를 거부했다. 연합군 구성원들이 전투 계획을 놓고 계속 다투는 동안, 원술 휘하의 부장 손견은 위험을 감수하고 낙양 근처에서 동탁을 직접 공격했다. 동탁 군대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후, 손견은 결국 동탁을 장안으로 후퇴하게 만들었고, 낙양은 연합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 후 191년 말까지 연합군은 동탁에 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해산되었으며, 구성원들은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곧, 여러 관리들은 왕처럼 자신의 영토를 통제하고 다스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3. 군벌 간 전쟁과 조조의 부상 (192년 ~ 207년)
동탁이 장안으로 후퇴한 후, 조정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잔혹하게 진압하자, 사도 왕윤을 비롯한 관료들은 동탁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동탁의 양아들 여포를 포섭했는데, 여포는 동탁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192년 5월, 여포와 왕윤은 동탁을 암살하고 그의 일족을 몰살했다.
왕윤은 동탁 사후 정국을 안정시킬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오만함으로 인해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여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동탁 잔존 세력에게 사면령을 내리지 않아 그들이 두려움을 품게 했다. 우보는 양주에서 동탁의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지만,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이각, 곽사, 번조는 황실에 항복하려 했으나, 왕윤이 거부하자 장안을 공격하여 정부를 장악했다. 왕윤은 처형되었고, 여포는 패주했다.
이각, 곽사, 번조는 장안에서 황실을 장악한 후,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웠다. 한편, 각지의 군벌들은 세력을 확장하거나 이익을 위해 다퉜다. 이들은 헌제를 명목상 군주로 인정했지만, 일부는 이각 세력과 우호적이었고, 다른 일부는 적대적이었다.
193년, 북부 군벌 유우와 공손찬이 충돌했다. 유우는 전쟁에 반대했지만, 공손찬은 원소와 전쟁을 벌였다. 유우와 공손찬은 헌제에게 서로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유우는 공손찬을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죽었다.
195년, 이각과 곽사는 번조를 죽이고, 이후 서로 반목하며 장안은 혼란에 빠졌다. 이각은 헌제를, 곽사는 황실 관리들을 납치하며 대립했다. 그해 말, 이각과 곽사는 화해하고 헌제의 낙양 귀환을 허용했지만, 곧 후회하고 추격했다. 헌제는 무사했지만, 황실은 빈곤하여 자립할 수 없었다. 낙양은 동탁에 의해 파괴되어 생필품이 부족했고, 많은 관리들이 굶어 죽거나 식인 행위를 했다.
이때, 원소의 참모 저수는 헌제를 자신의 영지로 맞이하여 정권을 장악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곽도와 순우경은 원소가 헌제를 모시면 중요한 결정에서 황제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원소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3. 1. 동탁의 죽음과 계속되는 혼란 (192년 ~ 196년)
동탁이 장안으로 후퇴한 후, 조정을 더욱 강력하게 장악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에 사도 왕윤을 비롯한 황완(黃琬), 사손예(士孫瑞), 양찬(楊瓚) 등의 관료들이 동탁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동탁의 호위무장이자 양아들인 여포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는데, 여포는 동탁이 격노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고, 동탁의 시녀 중 한 명과의 은밀한 관계가 발각될까 두려워 동탁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192년 5월, 여포와 왕윤이 이끄는 음모자들은 동탁을 주살하고 동씨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동탁이 죽자 중앙 조정은 동탁의 공포정치로 인한 혼란기는 끝날 것이니 제국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정의 수장이 된 왕윤은 몇 가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고, 이는 왕윤의 실각으로 이어진다. 왕윤은 여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고, 동탁의 과거 추종자들에 대한 사면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 동탁의 옛 부하들은 자신들도 동탁처럼 살해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동탁의 사위 우보가 동탁의 서량군을 장악하고 왕윤에게 저항했으나, 우보는 저항 도중에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죽었다. 우보의 부하 이각, 곽사, 번조 등은 조정에 항복하고자 했으나 왕윤은 여전히 그들에 대한 사면을 거부했다. 그 결과 이각 등은 서량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여포는 야전에서 패하여 동쪽으로 도망가고, 왕윤은 이각 등에게 붙잡혀 그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장안에서 황실을 장악한 후, 이각과 곽사, 번조는 국가의 복지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헌제를 중국의 군주로 인정했지만, 일부 군벌들은 이각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반면, 다른 군벌들은 이들에게 적대적이었다.
193년, 북부 군벌 유우와 공손찬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유우는 전쟁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공손찬은 끊임없이 원소와 전쟁을 벌였다. 유우와 공손찬은 헌제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서로를 비난했다. 결국 유우는 공손찬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죽었다.
195년, 이각과 곽사가 번조를 함께 죽이고, 나중에는 서로 등을 돌리면서 장안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이각은 헌제를 인질로 잡았고, 곽사는 황실 관리들을 납치했으며, 양측은 전투를 벌였다. 그해 말, 이각과 곽사는 화해하여 헌제가 옛 수도인 낙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지만, 나중에 후회하여 그를 추격했다.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다시 잡을 수 없었지만, 황실은 가난해져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었다. 낙양은 동탁 시대에 화재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도시에는 생필품이 부족했고 많은 관리들이 굶어 죽거나 식인 행위를 했다. 이 무렵, 원소의 참모 저수는 헌제를 자신의 영지로 맞아들여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원소의 다른 참모인 곽도와 순우경은 저수의 의견에 반대하며, 만약 원소가 헌제를 자신의 영지로 데려온다면, 그는 중요한 결정에서 황제에게 굴복하고 적절한 조정 의례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소는 망설이며 황제를 맞이할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3. 2. 조조의 패권 장악 과정 (196년 ~ 207년)
조조는 196년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다. 동승과 양봉이 조조를 막아섰으나 결국 조조의 헌제 알현을 허락하게 되었다. 명목상 조조는 다른 조정 신료들과 권력을 나누었지만 실상 그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양봉 등이 조조에게 저항했으나 패배하여 도주했고, 조조는 얼마 뒤 허창으로 황제를 데리고 가서 그곳을 새 수도로 삼았다.이때부터 조조는 조정을 장악하고 다른 군벌들에게 헌제의 이름으로 된 조정에 복종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상 조정에 복종하라 함은 곧 조조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조조가 원소에게 황제에게 복종하라는 칙령을 보내자 원소는 황제의 이름을 빌어 다른 군벌들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허창으로 천도한 뒤에도 여전히 조정은 돈과 식량이 모자랐다. 조기(棗祇)의 제안으로 조조는 군인들을 농사에 동원하는 둔전을 실시했고, 둔전에서 얻은 식량을 군과 민 양쪽에 모두 나누었다. 이 정책은 효과를 거두어 허창 일대는 식량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197년 완성의 군벌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런데 조조는 미망인인 장수의 숙모를 탐하였고, 그 결과 분노한 장수는 반란하여 조조를 완성에서 참패시켰다(완성 전투). 이때 조조의 장자 조앙, 조카 조안민, 호위장 전위가 사망했고, 조조도 겨우 살아서 빠져나갔다. 이후 장수는 200년에 가후의 진언에 따라 조조에게 완전히 항복한다. 같은 해, 남양의 원술이 수춘(오늘날의 안휘성 수현)에서 황제 즉위를 선언했다. 이는 후한 조정에 대한 명백한 반역행위였고 다른 군벌들은 이를 원술을 공격할 빌미로 삼았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194년에서 199년 사이에 강동을 평정하여 원술에게서 독립하였다. 원술과 동맹이었던 여포 또한 관계가 수틀려 수춘 근교에서 원술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겼다. 조조는 손책, 여포와 함께 원술을 공격해 쓰러뜨렸다(원술 토벌전). 원술은 이복형 원소가 있는 북쪽으로 도망갔으나 유비 등에 의해 진로가 막혔고, 199년 병으로 사망했다.
198년, 원소는 조조에게 수도를 견성(오늘날의 산둥성 하택시)으로 옮기라고 권유했다. 물론 조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해 말 조조는 유비와 연합해 여포를 토벌했다(하비 전투). 여포는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서주는 조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99년, 오랫동안 계속되던 공손찬과 원소 사이의 역경 전투가 원소의 승리로 끝나고 공손찬은 역경성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한 제국의 북방 국경에 해당한 공손찬의 영토는 원소에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원소는 남쪽의 조조에게로 칼끝을 돌렸다. 조조는 대륙 중앙인 중원·사예에서 세력 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공손찬 토벌에 지친 군사들을 쉬게 해야 한다는 저수와 전풍의 의견을 기각하고 원소는 조조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당시 원소의 세력이 더욱 강대했기에 원소는 조조를 쉽게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조조 역시 전쟁을 준비했다. 그 와중에 동승을 비롯한 관료들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 음모를 포착한 조조는 그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일족을 멸했다. 음모 가담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비는 서주로 도주하여 조조가 임명한 서주목 차주를 살해하고 서주를 장악했다.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느라 병력이 빈 사이 원소가 공격해올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원소는 이번에는 기회를 잡아 조조를 공격해야 한다는 전풍의 의견을 다시 기각했고, 유비는 조조에게 패하여 북쪽으로 도주, 원소에게 합류했다. 유비군의 장군 관우는 유비의 일족을 데리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가 원소에게 합류한 직후 원소는 조조에 대한 전역 개시를 준비했으나, 전풍이 이미 기회가 지나갔다며 또 반대했다. 사사건건 반대하는 전풍에 분노한 원소는 그를 잡아 가두고 조조를 공격했다. 전초전인 백마 전투에서 원소군의 안량이 관우에게 죽었고, 그 뒤 연진 전투에서 문추도 서황 등이 이끄는 조조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초장에 두 차례의 패배를 겪고 주요 장수 둘을 잃은 원소군의 사기는 크게 하락했다.
200년 하반기에 원소군과 조조군은 관도(오늘날의 허난성 정주시)에서 격돌했다(관도 대전). 원소는 병력의 수적 우세와 보급량에서 조조를 크게 앞서고 있었다. 몇 차례의 산병전이 벌어진 뒤 양군은 스테일메이트 상태에 빠졌다. 조조는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해 순우경이 방어하던 오소의 원소군 보급고를 타격했다. 원소는 오소를 지원하지 않고 장합과 고람을 보내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오소 함락은 원소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원소는 황하 북쪽으로 퇴각했다.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강대했으나, 이젠 조조의 패권 장악을 막을 수 없었다.
원소가 202년에 병으로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원담과 셋째 아들 원상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원소의 측근 중 방기와 심배는 원상을 지지했고,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지지했다. 원소가 죽은 후, 그의 부하 대부분은 처음에는 장남인 원담을 새로운 군주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배와 방기는 유언장을 위조하여 원상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원담은 이에 격분하여 조조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이는 조조의 주의를 끌게 되자 조조는 선제 공격을 가했다. 원상은 형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들은 여양 전투에서 조조와 결정적인 승부를 내지 못했다.
203년, 조조는 원씨 세력에 대승을 거두었고, 원씨 세력은 기주 수도인 업현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업현을 포위하려 했으나, 곽가의 조언을 듣고 철수했다. 곽가는 조조가 원씨를 압박하면 그들이 공동의 적에게 대항하여 연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조가 철수하면 사이가 좋지 않은 원씨 형제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곽가의 예측은 원담이 더 많은 상속을 받은 것에 대해 원상에게 여전히 앙심을 품고 원상을 공격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청주에 있던 그의 군대는 원상에게 투항했다. 원담은 평원군으로 도주하여 원상에게 포위당했다. 원담은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조조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업현을 공격했고, 원상은 평원에 대한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204년 초, 원상은 조조가 철수했다고 잘못 판단하여 평원에서 다시 형을 공격했다. 조조는 업성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업현을 공격했고, 원상은 자신의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해 돌아갔으나 조조에게 패했다. 원상은 북쪽으로 도주하여 중산으로 도주했고, 업현은 조조에게 함락되었다. 고간 역시 조조에게 병주를 항복했다.
조조가 업현을 포위하는 동안, 원담은 업현 공격을 돕지 않고 원상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으며, 중산에서 원상을 격파했다. 원상은 더 북쪽으로 도주하여 유주에서 원희와 합류했다. 조조는 원담이 동맹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동쪽으로 돌아서 원담을 공격하여 남피 전투에서 원담의 마지막 거점인 남피를 점령하고 원담을 죽였다. 한편, 유주에서는 원희의 부하 교촉이 반란을 일으켜 조조에게 항복했고, 원희와 원상은 더 북쪽으로 도주하여 오환 추장 타돈 휘하로 들어갔다. 이 무렵, 고간 또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206년에 패배했고, 유표에게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207년, 조조의 군대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오환을 공격했고, 백랑산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타돈은 전투에서 사망했고, 원희와 원상은 현재 랴오닝성 대부분을 통치하는 군벌 공손강에게 피신했다. 공손강은 원씨가 자신을 배신하고 영토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들을 처형하고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이 무렵, 원씨는 멸망했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은 조조의 지배하에 재통일되었다.
4. 삼국 정립 과정 (208년 ~ 229년)
원소가 헌제를 맞이할지 망설이는 동안,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영토로 데려와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당시 조조는 산둥성 서부와 허난성 동부를 포함하는 연주만을 다스리는 작은 군벌이었다. 196년,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다. 그는 동승과 양봉을 만나 헌제를 알현하고, 헌제를 허로 데려와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때부터 조조는 명목상 헌제의 신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권을 행사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그럼에도 조조는 헌제에게 공식적인 황실 의례에 따라 경의를 표했다. 조조는 헌제의 이름으로 다른 군벌들에게 칙서를 내려 황실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명령했는데, 실제로는 그들이 조조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소도 조조의 칙서를 받고서야 헌제를 이용하여 다른 군벌들을 통제할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 후에도 중앙 정부는 여전히 자금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조지(棗祇)의 제안에 따라 조조는 군인들을 파견하여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물을 군대와 민간인에게 분배하는 새로운 ''둔전제''를 시행했다. 이 정책은 허창 주변 지역이 생산성이 높은 농지로 발전하고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중국의 주요 군벌은 다음과 같았다.
군벌 | 세력 범위 |
---|---|
원소 | 기주, 병주, 청주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대부분) |
원술 | 안후이성 대부분과 장쑤성 일부 |
공손찬 | 유주 (베이징시, 톈진시, 서부 랴오닝성) |
유표 | 형주 (후베이성과 후난성) |
유장 | 익주 (쓰촨 분지) |
여포 | 서주 (이전 지사 유비로부터 빼앗음) |
그 외에도 많은 소규모 군벌들이 있었고, 조조는 특히 그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197년, 장수는 완성을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조조는 장수의 숙모와 불륜을 저질렀고, 이에 분노한 장수는 반란을 일으켜 완성에서 조조를 기습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조의 장남 조앙, 조카 조안민, 호위 무사 전위가 사망했고, 조조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가후의 조언에 따라 장수는 199년 겨울에 조조에게 항복했다. 또한 197년, 조조는 마등과 한수를 설득하여 옹주와 량주 (산시성과 간쑤성 대부분)를 자신에게 복종시킬 수 있었다.
같은 해, 원술은 수춘에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이는 한나라 정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군벌들이 그를 공격하는 구실로 삼았다. (원술 토벌전 참조) 손견의 아들 손책은 194년부터 199년 사이에 강동에서 손책의 강동 정벌을 통해 여러 영토를 정복했고, 원술과의 동맹을 끝내고 독립적인 군벌이 되었다. 여포도 원술과 관계를 끊고 수춘 부근에서 그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조조 또한 원술을 공격하여 그를 격파했다. 원술은 북쪽으로 도망쳐 원소에게 합류하려 했지만 길이 막혔고, 199년 수춘으로 돌아가 병으로 사망했다.
198년, 원소는 조조에게 황제를 자신의 영토에 더 가까운 연성(현재의 허쩌시)으로 옮겨 조조로부터 헌제를 빼앗으려 했으나, 조조는 거절했다. 그해 말, 조조는 유비와 연합하여 하비 전투에서 여포를 격파했다. 여포는 생포되어 조조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고, 서주는 조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199년, 공손찬은 역경 전투에서 원소에게 패배했고,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했다. 공손찬의 영토는 원소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원소는 그 후 중국 중부에서 부상하는 세력인 조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원소는 유표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공격하려 했다.
저수와 전풍은 군대가 공손찬과의 전투 이후 지쳐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원소는 자신의 군대가 조조를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조조를 상대로 한 원정을 준비했다. 조조는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동승, 유비, 그리고 몇몇 다른 관리들이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00년 초, 유비는 조조를 배신할 기회를 이용해 서주를 장악했는데, 이는 조조가 임명한 서주 자사 차주를 살해한 뒤였다. 한편, 동승 등은 조조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수도에 있던 모든 공모자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몰살당했다. 조조는 서주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위험을 감수했는데, 이는 원소의 공격에 취약한 측면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왜냐하면 원소는 전풍의 촉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비는 패배했고, 원소에게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하여 잠시 조조 휘하에서 복무했다.
유비가 패배한 후에야 원소는 조조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지만, 전풍은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며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원소는 전풍에게 짜증이 나서 그를 투옥했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조조를 공격했다. 백마 전투에서 원소의 장수 안량은 관우에게 살해되었고, 원소의 또 다른 장수 문추는 조조 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200년 말, 원소와 조조의 군대는 황하 남쪽 관도에서 충돌했다. 원소는 조조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더 많은 물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조조의 군대는 원소의 군대보다 더 훈련되었다. 몇 차례의 작은 충돌 이후,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조조는 직접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순우경이 지키는 원소의 보급 기지인 오소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원소는 오소에 증원을 보내는 대신, 장합과 고람을 보내 조조의 진영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오소의 함락은 원소 군대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고, 그 결과 조조 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원소는 황하 북쪽으로 도망쳤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죽거나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 시점부터 원소는 주요 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조조의 증대되는 지배력에 도전할 수 없었다. 조조는 창정 전투 (201)에서 황하 남쪽에 남아 있던 원씨의 잔여 군대를 격파하며 관도 전투를 마무리했다.
원소가 202년에 병으로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원담과 셋째 아들 원상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원소는 임종 직전에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에 대한 명확한 지시를 남기지 않았다. 원소의 측근 중 방기와 심배는 원상을 지지했고,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지지했다. 원소가 죽은 후, 심배와 방기는 유언장을 위조하여 원상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원담은 이에 격분하여 조조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조조는 선제 공격을 가했다. 원상은 형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들은 여양 전투에서 조조와 결정적인 승부를 내지 못했다.
203년, 조조는 원씨 세력에 대승을 거두었고, 원씨 세력은 업현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업현을 포위하려 했으나, 곽가의 조언을 듣고 철수했다. 곽가는 조조가 원씨를 압박하면 그들이 연합할 수 있지만, 조조가 철수하면 사이가 좋지 않은 원씨 형제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곽가의 예측은 원담이 원상을 공격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원담은 평원군으로 도주하여 원상에게 포위당했다. 원담은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조조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업현을 공격했고, 원상은 평원에 대한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204년 초, 원상은 조조가 철수했다고 잘못 판단하여 평원에서 다시 형을 공격했다. 조조는 업성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업현을 공격했고, 원상은 자신의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해 돌아갔으나 조조에게 패했다. 원상은 북쪽으로 도주하여 중산으로 도주했고, 업현은 조조에게 함락되었다. 고간 역시 조조에게 병주를 항복했다.
조조가 업현을 포위하는 동안, 원담은 업현 공격을 돕지 않고 원상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으며, 중산에서 원상을 격파했다. 원상은 더 북쪽으로 도주하여 유주에서 원희와 합류했다. 조조는 원담이 동맹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동쪽으로 돌아서 원담을 공격하여 남피 전투에서 원담의 마지막 거점인 남피를 점령하고 원담을 죽였다. 한편, 유주에서는 원희의 부하 교촉이 반란을 일으켜 조조에게 항복했고, 원희와 원상은 더 북쪽으로 도주하여 오환 추장 타돈 휘하로 들어갔다. 이 무렵, 고간 또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206년에 패배했고, 유표에게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207년, 조조의 군대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오환을 공격했고, 백랑산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타돈은 전투에서 사망했고, 원희와 원상은 요녕성 대부분을 통치하는 군벌 공손강에게 피신했다. 공손강은 원씨가 자신을 배신하고 영토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들을 처형하고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이 무렵, 원씨는 멸망했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은 조조의 지배하에 재통일되었다.
북중국을 통일하는 동안 조조는 남쪽으로는 어떠한 주요 군사 작전도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손권, 유표, 유장 등 세 명의 주요 군벌에 대항할 기회를 엿보며 때를 기다렸다. 그동안 손권은 강남의 영토를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208년 손권은 강하 전투에서 유표의 부하 황조를 격파하고 살해했으며, 강하(현재 우한시 신저우 구)의 대부분 영토를 장악했다.
조조가 북중국에서 원씨 일족을 공격하는 동안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쳐 유표에게 의탁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고, 조조를 막기 위해 신야현의 북쪽 국경에 주둔했다. 조조의 유비에 대한 초기 공격은 박망파 전투 (202년)에서 격퇴되었다.
조조는 220년 3월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조비는 헌제의 공식적인 인가를 기다리지 않고 "위왕"의 지위를 상속받았다. 220년 겨울, 헌제는 전국옥새를 조비에게 보냈고 조비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조비는 형식적으로 세 번이나 즉위를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한나라는 그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멸망했고 조비는 그 자리에 조위를 건국했으며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폐위된 헌제는 "산양공"의 작위를 받았다.
221년,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를 칭하고 촉한을 건국했다. 손권은 222년까지 조비의 명목상 신하로 남아 있었고, 그해 별도의 국가인 오의 왕을 칭했다. 229년, 손권은 공식적으로 오의 황제가 되었다.
4. 1. 적벽대전과 형주 공방전 (208년 ~ 210년)
조조는 208년에 유표의 형주를 정복하기 위해 남쪽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유표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아들 유기와 유총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 유표 사후, 형주의 새로운 자사가 된 유총은 조조에게 항복했고, 형주의 대부분은 조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유비는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도망쳤으나, 조조의 경기병대에게 장판 전투에서 격파당했다. 유비는 겨우 목숨을 건져 당양(當陽; 현재 이창시, 후베이성)으로 도망쳤다.한편, 강동의 손권은 조조에게 위협을 느끼고, 노숙을 보내 유비, 유기와 대조조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조조는 손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이때 조조군의 전력은 약 220,000 명이었으나 조조는 800,000 명이라고 주장했다. 손권은 30,000 명, 유비와 유기의 군사를 합하면 10,000 명 정도였다. 압도적인 조조의 힘에 질린 장소 등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손권은 주유, 노숙의 의견을 받아들여 항복을 거부했다. 208년 하반, 주유와 노숙의 노력으로 유비와 손권은 조조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손권은 주유에게 군사 30,000 명의 전권을 맡겼다. 손권군은 대개 수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유는 유비와 상의하여 유비는 땅을, 주유는 물을 맡아 방어선을 펼쳤다. 이때를 전후해 조조군에 역병이 돌아 전력이 약화되었고, 주유군의 황개가 조조에게 거짓 항복했다. 황개는 조조에게 자기 군사를 이끌고 가겠다고 했는데, 조조군의 배에 가까이 다가가자 황개는 자기 배들에 불을 붙이고 전선을 이탈했다. 불이 붙은 황개군의 배들은 조조군의 큰 배들에 충돌했고, 화재가 번져 조조군의 함대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적벽대전). 조조는 북쪽으로 퇴각하여 강릉(오늘날의 호북성 형강)으로 들어갔다.
적벽대전 직후, 주유가 이끄는 손권군은 형주에 남아 있는 조조군을 공격하였다(강릉 전투). 한편 유비는 영릉, 계양, 무릉, 장사의 4개 소군을 공격해 정복했다. 209년 초 조조는 형주의 대부분을 잃었고, 형주는 손-유 동맹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유비가 4개 군을 가짐으로써 형주에서 유비의 전력이 손권보다 우세해지자 손권은 불안해져서 여동생 손부인을 유비와 정략결혼시켜 동맹을 공고히 했다. 주유는 유비의 저의를 의심하여 유비를 사로잡으라고 손권에게 권했다. 그러나 손권은 계획이 성공해도 유비군은 자신에게 항거할 것이라 생각하고 주유의 제안을 기각했다. 이에 주유는 손권에게 서쪽의 유장과 장로를 치자고 제안했고 손권도 동의했으나 주유가 210년 죽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손권은 서쪽으로 팽창하지는 못했으나 오늘날의 광둥성, 광서성, 베트남의 세력들을 포섭했고, 교주군벌 사섭이 손권에게 신종했다. 유비가 형주 남부는 척박해서 군사력 유지에 힘이 든다고 불평하자 손권은 형주의 북부를 유비에게 "대여"해주기로 했다.
4. 2. 유비의 익주 점령과 한중 공방전 (211년 ~ 219년)
211년 유비는 익주의 군주 유장의 초청을 받아 익주로 들어갔다. 유장은 장로와 조조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비의 부하 법정은 유장에게 불만을 품고 유비에게 익주를 차지할 것을 권유했다. 유비는 법정의 제안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익주로 갔고, 유장은 유비를 가맹관에 주둔시켰다.212년, 유비는 유장을 배신하고 전쟁을 선언했다. 형주에 있던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유비에게 합류했고, 관우가 형주를 책임지게 되었다. 215년, 유비는 유장군 대부분을 격파하고 익주의 주도 성도를 포위했다. 유장은 항복하고 익주를 유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익주는 유비의 새로운 근거지가 되었으며, 험준한 산지는 북쪽의 조조를 막는 천혜의 방어선이 되었다.
유비가 익주를 장악한 같은 해, 손권은 5년 전 "대여"해주었던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관우가 이를 거절하자 유비와 손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노숙의 중재로 형주 3개 군(장사, 강하, 계양)을 손권에게 넘겨주고, 상강을 경계로 형주를 양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215년, 조조는 양평관 전투에서 장로에게 승리하고 한중을 점령했다. 조조는 남쪽으로 진격해 익주의 유비를 공격하라는 참모들의 의견을 기각하고 군사를 물렸다. 그리고 사촌동생 하후연에게 한중 방위를 맡겼다.
217년, 유비는 조조에게서 한중을 탈취하기 위해 한중 공방전을 시작했다.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이 전사하자 조조는 증원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가 유비와 맞섰다. 한수 전투에서 한 번 격돌한 것을 제외하면 양측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결국 조조는 한중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유비는 이 승리 이후 스스로를 한중왕이라고 칭하였다.
4. 3. 형주 공방전과 삼국 정립 (219년 ~ 229년)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스스로를 한중왕이라 칭했을 무렵, 관우는 형주 북부의 번성(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판청구)을 공격했다. 조인이 굳게 방어했으나, 관우의 기세가 거세어 조조는 수도를 허도에서 옮기는 것까지 고려했다.한편, 손권은 관우에게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유비가 손권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3개 군의 관리들을 관우가 쫓아낸 것, 번성 공략을 위해 손권의 식량 창고를 털어간 것, 관우의 아들과 손권의 딸의 정략결혼 제안에 손권을 쥐새끼라고 모욕한 것이 그 이유였다.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느라 북쪽으로 떠난 사이,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동쪽에서 공격하게 했다. 여몽은 수 주일 안에 형주를 거의 다 손에 넣었고, 관우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져 300여 명의 군사만 남게 되었다. 맥성에 갇혀 포위된 관우는 포위망을 뚫으려다 붙잡혔고, 항복을 거부하여 처형당했다(형주 공방전). 이로써 손권과 유비의 동맹은 완전히 깨졌다. 손권은 조조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조조는 손권에게 오후의 작위를 내렸다.
조조는 220년 음력 3월에 죽고, 아들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220년 겨울, 헌제는 조비에게 전국옥새를 넘기고 황제 자리를 양위했다. 조비는 세 번 양위를 거절하다 승낙하고 황제 자리에 올라 위나라를 건국, 한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조비는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되돌렸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졌다.
221년,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 즉위를 선포하고 국호를 한이라 했다(촉한). 손권은 222년까지 조비의 제후로 남아 있다가, 222년 오왕을 칭했고 229년에 오 황제를 칭하였다. 이로써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5. 주요 인물
조조, 유비, 손권은 각각 위, 촉한, 오 삼국의 군주였다. 이들은 후한 말 혼란기에 등장하여 각자의 세력을 구축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경쟁했다. 조조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으며, 유비는 인의와 덕을 강조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손권은 아버지와 형에게서 물려받은 강동 지역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통치를 이루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책사였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외교술로 유비 세력의 기반을 다지고, 적벽대전에서 손권과의 동맹을 성공시켜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유는 손권 휘하의 명장으로,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여 손권 세력의 안정을 도모했다. 순욱과 곽가는 조조의 핵심 참모로서, 조조의 세력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욱은 내정과 인재 등용에 뛰어났고, 곽가는 군사 전략에 능통하여 조조의 군사적 성공에 기여했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의형제로, 용맹함과 충성심으로 유명하다. 관우는 뛰어난 무예와 의리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장비는 용맹함과 호탕함으로 유비 세력의 중요한 장수로 활약했다. 여포는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혔으나, 배신을 거듭하여 결국 조조에게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헌제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였으나, 실권은 동탁, 조조 등 군벌들에게 있었다. 원소는 하북 지역의 강력한 군벌이었으나,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동탁은 십상시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폭정을 일삼았으나, 여포에게 살해되었다. 유표는 형주 지역의 군벌이었으나, 조조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유장은 익주 지역의 군벌이었으나, 유비에게 항복하고 영토를 넘겨주었다.
6. 주요 사건
영제 치세 말, 조정 관리들은 영제가 죽으면 정치 상황이 혼란에 빠질 것을 예견했다. 유언은 188년에 당시 농민 반란, 특히 184년의 황건적의 난의 근본 원인이 자사(刺史)에게 실질적인 행정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건의했다. 영제는 유언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사의 직함을 목(牧)으로 바꾸고, 세금 부과 및 군대 지휘 권한을 부여했다. 유언은 익주 (사천 분지 일대)의 목으로 임명되었고, 유우는 유주 (현재의 북부 허베이성, 베이징, 톈진 및 랴오닝 일대)의 목으로 임명되었다. 이 지방 목들의 영향력 증가는 이후 군벌들이 한 제국의 광대한 지역을 통제하는 기반이 되었다.
영제(靈帝)가 189년에 사망하고, 그의 13세 아들 유변 (황후 하태후 소생)이 뒤를 이어 소제(少帝)가 되었다. 하태후는 섭정이 되었고, 그녀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이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가 되었다. 하진과 원소는 십상시를 제거하려 했으나, 하태후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했다. 하진은 동탁을 소환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양주(涼州; 현재의 간쑤 성) 군벌로 하여금 수도 낙양으로 진군하여 하태후에게 압력을 가하게 했다. 환관들은 하진의 음모를 알아채고 그를 궁궐로 유인하여 살해했다(189년 9월 22일). 이에 원소는 황실 경비대를 이끌고 궁궐 환관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살아남은 환관들은 소제와 그의 동생인 8살의 진류왕(할머니 동태후가 양육)을 납치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향해 도망쳤지만, 결국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동탁이 현장에 도착하여 소제와 진류왕을 발견했다. 어린 황제는 초조하고 두려워 보였지만, 진류왕은 침착하고 의연하게 동탁에게 그들을 궁궐로 호송하라고 명령했다. 동탁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군대를 수도로 불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독살한 후 진류왕을 옹립하여 헌제가 되게 했다. 동탁은 조정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상국"으로 칭했는데, 이 칭호는 서한 시대의 정치가 소하 이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동탁은 무기를 해제하거나 신발을 벗지 않고 조정에 참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90년 봄, 여러 지방 관리와 군벌들은 동탁이 황위를 찬탈하려 하고 헌제를 사실상 납치했다고 주장하며 동탁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했다. 원소는 발해 (현재의 창저우, 허베이성)의 태수로 연합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연합군의 군대는 하내 (河內; 현재의 자오쭤, 허난성)에 주둔했으며 수도 낙양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춘 듯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실제로는 상당히 조직력이 떨어졌고, 원소는 전체 연합군에 대한 효과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게다가, 연합군 구성원들은 동탁과 그의 강력한 양주 군대에 직접 맞서는 것을 꺼렸다. 그럼에도 동탁은 불안해하며 연합군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서쪽의 장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약 한 달 후, 동탁은 헌제와 조정에 낙양 주민들과 함께 장안으로 이동하도록 강요했고, 그 과정에서 이전 수도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동하는 동안 동탁은 낙양 근처에 머물면서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191년, 연합군은 황족의 일원으로서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유우를 옹립하려 하여 동탁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려 했다. 유우는 헌제에게 충성을 지키며 단호하게 황위를 거부했다. 연합군 구성원들이 전투 계획을 놓고 계속 다투는 동안, 원술 휘하의 부장 손견은 위험을 감수하고 낙양 근처에서 동탁을 직접 공격했다. 동탁 군대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후, 손견은 결국 동탁을 장안으로 후퇴하게 만들었고, 낙양은 연합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 후 191년 말까지 연합군은 동탁에 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해산되었으며, 구성원들은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곧, 여러 관리들은 왕처럼 자신의 영토를 통제하고 다스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두각을 나타낸 주요 군벌들은 다음과 같다.
- 191년 한복으로부터 기주 (현재의 중부 및 남부 허베이성과 북부 허난성을 포함)를 장악한 원소
- 유언, 익주를 통치
- 유표, 형주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를 통치
- 원소의 이복 형제 (이름만 사촌)인 원술, 회하 남쪽 지역 (현재의 북부 및 중부 안후이성을 포함)을 통치
그러나, 이러한 주요 군벌 외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체 한 제국은 사실상 소규모 블록으로 분열되었고, 각 블록은 지역 군벌에 의해 통제되었다.


동탁이 장안으로 철수한 후, 그는 정부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잔혹하게 처리했다. 내무부 장관 왕윤과 황완(黃琬), 사손예(士孫瑞), 양찬(楊瓚)을 포함한 몇몇 다른 관리들은 동탁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결국 동탁의 양아들인 여포를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하도록 했다. 여포는 동탁이 격노하여 그를 죽일 뻔한 적이 있었고, 또한 동탁의 시녀 중 한 명과의 은밀한 관계가 발각될까 두려워 동탁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192년 5월, 여포와 왕윤이 이끄는 공모자들은 동탁을 암살하고 그의 일족을 학살했다.
동탁의 죽음 이후, 동탁의 "공포 통치"로 인한 혼란이 가라앉고 중앙 정부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왕윤은 유능한 대신으로 여겨졌지만, 점차 거만해져서 그의 몰락을 초래할 몇 가지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여포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동탁의 생존 추종자들에게 사면을 허용하지 않고 해산을 명령했다. 이로 인해 동탁의 부하들은 학살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동탁의 사위인 우보는 양주에서 동탁의 군대를 장악하고 왕윤에게 저항했지만, 나중에 아군 간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우보의 부하인 이각, 곽사, 번주는 황실에 항복하려 했지만, 이전에 왕윤에게 저항했기에 왕윤은 이제 그들의 사면 요청을 거부했다. 이각, 곽사, 번주는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정부를 장악했다. 왕윤은 그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여포는 패배하여 쫓겨났다.
장안에서 황실을 장악한 후, 이각과 곽사, 번조는 국가의 복지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동시에 중국 전역의 지방 군벌들은 세력을 확장하거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서로 싸웠다. 이러한 군벌들 중 일부는 이각의 세력과 우호적이었지만, 다른 군벌들은 표면적으로는 헌제를 중국의 군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193년, 북부 군벌 유우와 공손찬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유우는 전쟁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공손찬은 끊임없이 원소와 전쟁을 벌였다. 유우와 공손찬은 헌제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서로를 비난했다. 결국 유우는 공손찬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죽었다.
195년, 이각과 곽사가 번조를 함께 죽이고, 나중에는 서로 등을 돌리면서 장안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이각은 헌제를 인질로 잡았고, 곽사는 황실 관리들을 납치했으며, 양측은 전투를 벌였다. 그해 말, 이각과 곽사는 화해하여 헌제가 옛 수도인 낙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지만, 나중에 후회하여 그를 추격했다.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다시 잡을 수 없었지만, 황실은 가난해져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었다. 낙양은 동탁 시대에 화재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도시에는 생필품이 부족했고 많은 관리들이 굶어 죽거나 식인 행위를 했다. 이 무렵, 원소의 참모 저수는 헌제를 자신의 영지로 맞아들여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원소의 다른 참모인 곽도와 순우경은 저수의 의견에 반대하며, 만약 원소가 헌제를 자신의 영지로 데려온다면, 그는 중요한 결정에서 황제에게 굴복하고 적절한 조정 의례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소는 망설이며 황제를 맞이할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새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 후에도 중앙 정부는 여전히 자금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조지(棗祇)의 제안에 따라 조조는 군인들을 파견하여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물을 군대와 민간인에게 분배하는 새로운 ''둔전제''를 시행했다. 이 정책은 허창 주변 지역이 생산성이 높은 농지로 발전하고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중국의 주요 군벌은 다음과 같았다.
- 원소, 그는 기주, 병주, 청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의 허베이성, 산시성, 산둥성 대부분을 포함) 이 지역들 중 일부는 원소의 세 아들(원담, 원희, 원상)과 조카(고간)이 다스렸다.
- 원술, 그는 현재의 안후이성 대부분과 장쑤성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 공손찬, 그는 현재의 베이징시, 톈진시, 그리고 서부 랴오닝성을 포함한 유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 유표, 그는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하는 형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 유장, 그는 사천 분지를 포함하는 익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 여포, 그는 이전 지사 유비로부터 서주를 빼앗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소규모 군벌들이 있었고, 조조는 특히 그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197년, 장수는 완성을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조조는 나중에 장수의 과부인 숙모와 불륜을 저질렀고, 이에 장수는 분노했다. 장수는 조조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자 반란을 일으켜 완성에서 조조를 기습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조의 장남 조앙, 조카 조안민, 그리고 호위 무사 전위가 사망했고, 조조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가후의 조언에 따라 장수는 결국 199년 겨울에 조조에게 항복했다. 또한 197년, 조조는 마등과 한수를 설득하여 옹주와 량주 (현재의 산시성과 간쑤성 대부분을 포함)를 자신에게 복종시킬 수 있었다.
그 해, 원술은 수춘(壽春; 현재의 수현), 안후이)에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이는 한나라 정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군벌들이 그를 공격하는 구실로 삼았다. (원술 토벌전 참조) 손견의 아들 손책은 194년부터 199년 사이에 강동에서 손책의 강동 정벌을 통해 여러 영토를 정복했고, 원술과의 동맹을 끝내고 독립적인 군벌이 되었다. 이전에도 원술의 동맹이었던 여포도 원술과 관계를 끊고 수춘 부근에서 그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조조 또한 원술을 공격하여 그를 격파했다. 원술은 북쪽으로 도망쳐 원소에게 합류하려 했지만 길이 막혔고, 199년 수춘으로 돌아가 병으로 사망했다.
198년, 원소는 조조에게 황제를 자신의 영토에 더 가까운 연성(鄄城; 현재의 허쩌시, 산둥)으로 옮겨 조조로부터 헌제를 빼앗으려 했으나, 조조는 거절했다. 그해 말, 조조는 유비와 연합하여 여포를 공격하여 하비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여포는 생포되어 조조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고, 서주는 조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199년, 공손찬은 역경 전투에서 원소에게 패배했고,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했다. 한나라 제국의 북쪽 경계까지 확장되었던 공손찬의 영토는 원소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원소는 그 후 중국 중부에서 부상하는 세력인 조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원소는 유표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공격하려 했다.

저수와 전풍은 군대가 공손찬과의 전투 이후 지쳐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원소는 자신의 훨씬 더 큰 군대가 조조를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조조를 상대로 한 원정을 준비했다. 조조는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동승, 유비, 그리고 몇몇 다른 관리들이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00년 초, 유비는 조조를 배신할 기회를 이용해 서주를 장악했는데, 이는 조조가 임명한 서주 자사 차주를 살해한 뒤였다. 한편, 동승 등은 조조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수도에 있던 모든 공모자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몰살당했다. 조조는 서주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위험을 감수했는데, 이는 원소의 공격에 취약한 측면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왜냐하면 원소는 그를 공격할 기회를 잡으라는 전풍의 촉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비는 패배했고, 원소에게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하여 잠시 조조 휘하에서 복무했다.
유비가 패배한 후에야 원소는 조조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전풍이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며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원소는 전풍에게 짜증이 나서 그를 투옥했고, 그 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조조를 공격했다. 백마 전투에서 원소의 장수 안량은 관우에게 살해되었고, 원소의 또 다른 장수 문추는 조조 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두 장수의 손실은 원소 군대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년 말, 원소와 조조의 군대는 마침내 황하 남쪽, 현재의 허난성 정저우에 위치한 관도(官渡)에서 충돌했다. 원소는 조조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더 많은 물자를 가지고 있다는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조의 군대는 원소의 군대보다 더 훈련되었다. 몇 차례의 작은 충돌 이후,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조조는 직접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순우경이 지키는 원소의 보급 기지인 오소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원소는 오소에 증원을 보내는 대신, 장합과 고람을 보내 조조의 진영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오소의 함락은 원소 군대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고, 그 결과 조조 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원소는 황하 북쪽으로 도망쳤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죽거나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 시점부터 원소는 주요 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조조의 증대되는 지배력에 도전할 수 없었다. 조조는 창정 전투 (201)에서 황하 남쪽에 남아 있던 원씨의 잔여 군대를 격파하며 관도 전투를 마무리했다.
원소가 202년에 병으로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원담과 셋째 아들 원상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원소 사망 몇 년 전, 전통적인 후계자 순서에 따라 원담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어야 했지만, 원소의 부인 유씨 부인이 원상을 총애했기 때문에 원소는 원담을 사후에 원상의 숙부인 원성에게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후 원소는 아들들과 조카 고간에게 영토를 분할했는데,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능력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근거지인 기주는 원상에게, 원담은 청주를, 원희는 유주를, 고간은 병주를 각각 통치하게 했다. 원소는 임종 직전에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에 대한 명확한 지시를 남기지 않았다. 원소의 측근 중 방기와 심배는 원상을 지지했고,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지지했다. 원소가 죽은 후, 그의 부하 대부분은 처음에는 장남인 원담을 새로운 군주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배와 방기는 유언장을 위조하여 원상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원담은 이에 격분하여 조조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이는 조조의 주의를 끌게 되자 조조는 선제 공격을 가했다. 원상은 형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들은 여양 전투에서 조조와 결정적인 승부를 내지 못했다.
203년, 조조는 원씨 세력에 대승을 거두었고, 원씨 세력은 기주 수도인 업현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업현을 포위하려 했으나, 곽가의 조언을 듣고 철수했다. 곽가는 조조가 원씨를 압박하면 그들이 공동의 적에게 대항하여 연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조가 철수하면 사이가 좋지 않은 원씨 형제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곽가의 예측은 원담이 더 많은 상속을 받은 것에 대해 원상에게 여전히 앙심을 품고 원상을 공격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청주에 있던 그의 군대는 원상에게 투항했다. 원담은 평원군으로 도주하여 원상에게 포위당했다. 원담은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조조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업현을 공격했고, 원상은 평원에 대한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204년 초, 원상은 조조가 철수했다고 잘못 판단하여 평원에서 다시 형을 공격했다. 조조는 업성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업현을 공격했고, 원상은 자신의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해 돌아갔으나 조조에게 패했다. 원상은 북쪽으로 도주하여 중산으로 도주했고, 업현은 조조에게 함락되었다. 고간 역시 조조에게 병주를 항복했다.
조조가 업현을 포위하는 동안, 원담은 업현 공격을 돕지 않고 원상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으며, 중산에서 원상을 격파했다. 원상은 더 북쪽으로 도주하여 유주에서 원희와 합류했다. 조조는 원담이 동맹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동쪽으로 돌아서 원담을 공격하여 남피 전투에서 원담의 마지막 거점인 남피를 점령하고 원담을 죽였다. 한편, 유주에서는 원희의 부하 교촉이 반란을 일으켜 조조에게 항복했고, 원희와 원상은 더 북쪽으로 도주하여 오환 추장 타돈 휘하로 들어갔다. 이 무렵, 고간 또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206년에 패배했고, 유표에게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207년, 조조의 군대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오환을 공격했고, 백랑산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타돈은 전투에서 사망했고, 원희와 원상은 현재 요녕성 대부분을 통치하는 군벌 공손강에게 피신했다. 공손강은 원씨가 자신을 배신하고 영토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들을 처형하고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이 무렵, 원씨는 멸망했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은 조조의 지배하에 재통일되었다.
북중국을 통일하는 동안 조조는 남쪽으로는 어떠한 주요 군사 작전도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200년에 형 손책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손권, 형주 자사 유표, 익주 자사 유장 등 세 명의 주요 군벌에 대항할 기회를 엿보며 때를 기다렸다. 그동안 손권은 강남의 영토를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208년 손권은 강하 전투에서 유표의 부하 황조를 격파하고 살해했으며, 강하(江夏; 현재 후베이성 우한시 신저우 구)의 대부분 영토를 장악했다.
조조가 북중국에서 원씨 일족을 공격하는 동안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쳐 유표에게 의탁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고, 조조를 막기 위해 신야현의 북쪽 국경에 주둔했다. 조조의 유비에 대한 초기 공격은 박망파 전투 (202년)에서 격퇴되었다.
208년, 조조는 유표의 형주를 정복하기 위해 남쪽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유표는 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아들들인 유기와 유총 사이에서 후계 다툼이 벌어지는 동안 죽어가고 있었다. 황조가 패배한 후, 유기는 유표에 의해 이전에 황조가 다스리던 강하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유표의 두 번째 부인인 채부인의 총애를 받은 유총(그녀의 조카와 결혼했기 때문)은 형주의 수도인 양양에 머물렀다. 유총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형주의 새로운 자사(刺史)가 되었다. 북쪽의 조조와 남동쪽의 유기와의 전쟁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한 유총은 조조에게 항복했고, 형주의 대부분은 조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유비는 조조에게 항복하려 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도중에, 조조의 경무장 기병대가 민간인을 포함한 유비의 퇴각 부대를 따라잡아 장판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유비는 목숨을 건져 당양(當陽; 현재 이창시, 후베이성)으로 도망쳤다.
강동에서는 손권이 조조의 접근하는 군대에 위협을 느껴 노숙을 보내 유비, 유기와의 동맹을 맺어 조조에 대항할 것을 논의했다.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위협하여 항복시키려 했다. 조조의 군대는 22만 명으로 추정되었지만, 조조 자신은 80만 명의 군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3만 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유비와 유기의 연합군은 약 1만 명이었다. 장소를 포함한 많은 손권의 추종자들은 압도적인 조조의 군대 때문에 항복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러나 손권은 주유와 노숙의 견해에 동의하여 조조에게 항복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208년 말, 주유, 노숙, 제갈량 (외교 교환에서 유비를 대표)의 도움으로 손권과 유비 사이에 조조에 대항하는 동맹이 맺어졌다.
손권은 30,000명의 병력을 주로 해상 전함에 배치하고, 주유에게 지휘를 맡겼다. 주유는 육상에 주둔한 유비의 군대와 연합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때, 유행병이 퍼지면서 조조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주유의 부하 황개는 조조에게 투항하는 척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황개는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배를 타고 조조의 기지로 향했다. 배가 조조의 함대에 접근하자, 황개는 부하들에게 배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고, 불타는 배들은 조조의 대형 선박에 충돌했다. 불길은 통제 불능 상태로 번져 조조의 해군 함대를 모두 파괴했다. 우림(烏林, 현재 후베이성 훙후시)에 있던 조조의 육상 부대 역시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 의해 공격받아 후퇴했다. 조조는 적벽 전투에서 대패하여 북쪽으로 퇴각하여 강릉(江陵, 현재 징장시에 위치, 현재의 장릉현과는 혼동하지 말 것)으로 돌아갔다.
적벽 전투 직후, 주유의 지휘를 받는 손권의 군대는 조조에 대한 추가 공격을 가하여 강릉 전투로 이어졌다. 한편, 유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형주 남부의 무릉, 장사, 영릉, 계양 등 4개 군을 공격하여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209년 초까지 조조는 형주의 대부분을 연합군에게 잃었다.
유비가 4개 군을 정복한 후 비교적 더 강력해지자, 손권은 그를 경계하여 그의 여동생인 손부인과 유비의 결혼을 주선하여 동맹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주유는 유비의 의도를 의심하여 손권에게 유비를 생포하여 가택 연금한 후 유비의 군대를 장악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손권은 이 계획이 성공하더라도 유비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주유의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손권은 주유가 현재 중국 서부, 즉 오늘날의 남부 산시성과 쓰촨 분지를 포함한 지역을 통제하는 군벌 유장과 장로를 공격하는 것을 고려하자는 제안에는 동의했다. 이 계획은 210년 주유가 사망하면서 실행되지 못하고 결국 중단되었다. 손권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의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북부 베트남의 여러 지역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그에게 복종하게 했고, 이 지역들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손권은 또한 유비가 남쪽이 군대를 유지할 자원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북부 형주를 유비에게 "대여"하기로 동의했다.

]]
조조는 적벽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수년간 군대를 휴식시킨 후, 211년에 다시 대규모 진격을 감행했는데, 이번에는 표면적으로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수와 마초는 양주와 옹주를 통제했는데, 조조가 자신들을 노린다고 의심하여 반격에 나섰다. 한곡관 서쪽에서 마초와 한수가 이끄는 연합군은 211년 통관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했고, 그들의 영토는 그 후 몇 년 동안 조조에 의해 병합되었다.
유장은 익주에서 장로와 조조의 공격을 우려하여 법정을 보내 유비가 장로와 조조에 대항하여 방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토로 초청했다. 법정은 유장의 통치에 감명을 받지 못했고 유비가 주인을 교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비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익주를 장악하라고 설득했다. 유비는 법정의 제안을 따르며 군대를 이끌고 익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유장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유장은 유비를 장로에 대항하기 위해 익주 북부의 가맹관에 주둔하도록 보냈다.
212년, 유비와 유장은 서로 적대하게 되었고 전쟁을 벌였다. 제갈량은 형주에 남겨진 유비 군대의 일부를 이끌고 유장을 공격하기 위해 주군과 합류했다. 관우는 형주를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215년, 유비는 유장의 군대 대부분을 격파하고 그의 수도인 성도를 포위했다. 유장은 항복했고 유비에게 익주를 넘겨주었다. 익주는 유비의 새로운 근거지가 되었고, 그는 북쪽의 조조에 대한 자연 방어선으로 산악 지형을 활용했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같은 해, 5년 전에 손권으로부터 "빌린" 형주를 반환하지 않자 그와 손권 사이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다. 손권은 관우를 상대로 첫 번째 공격을 시작했고 형주의 동쪽 대부분이 빠르게 항복했다. 그러나 관우와 노숙 사이의 협상 후 유비는 장사, 강하, 계양의 세 개
7. 평가 및 영향
위나라가 한나라를 대신하면서 한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조조는 220년 음력 3월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의 재가도 없이 위왕의 자리를 이었다. 같은 해 겨울, 헌제는 조비에게 전국옥새를 넘기고 황제 자리를 양위했다. 조비는 형식적으로 세 번 거절한 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조비는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겼고, 폐위된 헌제는 산양 공에 봉해졌다.
221년,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 즉위를 선포하고 국호를 한이라 했다. 하지만 유비의 근거지가 파촉 일대였기 때문에, 그의 나라는 촉한으로 불린다. 손권은 222년까지 조비의 제후로 있다가, 222년 오왕을 칭하고 229년에 황제를 칭했다. 이로써 三國時代|삼국시대중국어가 시작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