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근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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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근교대는 에도 시대에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를 떠나 에도 막부에 출석하는 제도이다. 이는 다이묘의 모반을 방지하고 막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시행되었으며, 다이묘는 격년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야 했다. 참근교대는 다이묘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에도와 각 지방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가마쿠라 시대에도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으며, 1635년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무가제법도를 통해 제도화되었지만, 1867년 대정봉환으로 막부의 권력이 천황에게 이양되면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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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근교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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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법 | Sankin-kōtai |
한자 표기 | 参覲交代, 参勤交代, 参覲交替, 参勤交替 |
가나 표기 | さんきんこうたい |
다른 이름 | 참근교대 |
설명 | 에도 막부의 중앙집권 정책 |
역사적 배경 | |
목적 | 다이묘의 권력 약화 및 중앙 통제 강화 |
시행 시기 | 에도 막부 시대 |
제도 내용 | |
다이묘 | 정기적으로 에도에 거주해야 함 |
가족 | 에도에 인질로 남겨짐 |
이동 비용 | 다이묘가 부담 |
효과 | 다이묘의 재정 압박 및 반란 방지 |
정책 결과 | |
다이묘의 재정 | 악화 |
막부의 권한 | 강화 |
사회적 영향 | 막부 체제 유지에 기여 |
참고 문헌 | |
출처 | 위키백과 (참근교대) 위키백과 (Sankin-kōtai) 위키백과 (参勤交代) |
저자 | 무베 겐이치 |
2. 명칭
참근(参勤)은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를 떠나 에도의 막부에 출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교대(交代) 또는 취봉(就封)은 참근이 해제되어 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군인 쇼군을 알현하고 보좌하는 것이므로 참근(参覲)이라고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참근(参勤)이라는 용어가 더 흔히 쓰였다. 에도 시대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에 대한 법률인 《무가제법도》에서는 교대 대신 교체(交替)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까지 교토의 헤이안쿄에 있는 천황이 율령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중앙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당시에도 후지와라와 같은 씨족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천황의 영향력은 이른바 "동이(東夷)의 추장"이라 불리던 아베의 오쿠로쿠군(奥六郡) 이상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당시에도 일본의 지방은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헤이안 정부는 이들 권세가들에게 적절한 관직을 부여하여 충성을 다짐받는 느슨한 통제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22]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들어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실질적인 정치의 수장이 되면서 천황의 역할은 쇼군의 지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 역할에 머물게 되었고 이후 무로마치 막부 시기 말이 되자 일본의 각지는 사실상 독립국인 번들로 나뉘면서 다이묘가 일본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영향력 상실과 함께 1백년이 넘는 센고쿠 시대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22]
3. 역사적 배경
가마쿠라 시대에는 고케닌이 가마쿠라에 참근하는 제도가 있어, 3년에 한 번 참근이 이루어졌다. 또한 와다, 하타케야마, 미우라, 사사키 등의 구공보대의 가문은 가마쿠라에 정주하고, 때때로 영지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등은 교토에 머물렀고, 그 외의 다이묘는 교토에 참근했다.[11] 다만, 가마쿠라후 관할의 관토(후에 도호쿠도 포함됨)의 다이묘는 가마쿠라에 정주했다(가마쿠라 정주제).
각지의 다이묘가 상쟁하는 센고쿠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각지를 복속시키며 종식되었고 결국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면서 에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막부를 연 도쿠가와는 다이묘들의 모반을 사전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고, 참근교대를 통해 다이묘가 수시로 쇼군을 알현하게 하는 한편, 정실 부인과 후계자를 에도에 상주하게 하여 모반을 막을 인질로 활용하였다. 각 번의 다이묘들은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고 자체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가 약화될 경우 언제든 모반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근교대 자체는 가마쿠라 시대에 이미 시행되었던 제도로 지방의 슈고들을 3년에 1번 두 달 가량 불러들여 쇼군을 알현하게 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도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등은 교토에 머물렀고 다른 다이묘들은 교토에 참근하였다.[28] 전국 시대에도 쇼군에 대한 참근은 계속되었다。또한 일부 전국 다이묘는 복속한 무사를 성하에 모으게 되었고 오다 정권에도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참근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전에 봉건 영주들이 그들의 아내와 상속자들을 오사카성이나 그 부근에 인질로 두도록 하는 유사한 관행을 확립하여 충성을 보장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면서 이 관행은 새로운 수도 에도에서 관습으로 이어졌다.
근세의 참근은 도요토미 정권 시기의 여러 다이묘에 의한 자발적인 오사카·후시미 참근을 근원으로 하며,[7] 여러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도 오사카 여름의 진까지 도요토미가·도쿠가와가 양쪽에 참근했다.[8] 도쿠가와 정권 성립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락하여 후시미성에 여러 다이묘가 참근했고,[9] 여러 다이묘의 에도 참근이 정착하는 것은 관에이 연간 이후이다。
처음에는 참근 자체가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점차 제도로 자리 잡았다. 겐와 3년(1617년) 이후에는 동국과 서국의 다이묘가 거의 격년으로 참근하는 상태가 되었다。
관에이 12년(1635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무가제법도』가 개정되어(관에이령), 제2조에서 “다이묘 소명 재에도 교대 상정야, 매년 여름 4월 중 참근”이라고 규정됨으로써 제도로서의 참근교대가 명문화되었다。그 후 겐로쿠-쿄호기에 참근교대 제도가 확립되었다。3. 1.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도 고케닌(御家人)들이 쇼군에게 봉사하는 일종의 참근교대 제도가 있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경비 근무를 서거나 쇼군의 궁정에 출사해야 했다.
고케닌의 주요 의무는 오반야쿠(ōban'yaku, 大番役)였는데, 이는 교토(Kyoto)와 가마쿠라에서 정기적으로 경비 근무를 서는 것을 의미했다. 1186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Minamoto no Yoritomo)는 이 봉사를 고케닌에게 의무화하고 기간을 6개월, 나중에는 3개월로 단축했다. 1275년에는 가마쿠라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시행되어 동일본의 고케닌들이 매년 한 달 동안 가마쿠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또한, 슈고(shugo)와 지토(jitō)가 자신의 아들을 쇼군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 전체가 가마쿠라에 머물러야 했다.
가마쿠라 시대 고케닌에게 부과된 이러한 의무는 에도 시대에 등장한 더욱 엄격한 참근교대(sankin-kōtai) 제도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4. 규정과 시행
1635년,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무가제법도를 통해 참근교대를 명문화하여 제도화했다. 이에 따라 다이묘들은 격년으로 에도와 영지를 왕복해야 했고, 정실 부인과 후계자는 에도에 상주해야 했다.[25]참근교대/参勤交代일본어는 다이묘를 영지와 분리하여 유대를 약화시키고, 잦은 참근교대로 다이묘의 재정을 약화시켜[38] 독자적인 군사력 강화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26]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제정한 무가제법도 간에이령(寛永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65년에는 다이묘 증인 제도가 폐지되어 유력 가신의 자제는 에도에 상주할 의무가 없어졌지만, 다이묘의 정실 부인과 후계자는 막부가 폐지될 때까지 에도에 머물렀다. 1673년 사누키 다카마쓰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참근교대의 간소화를 청하기도 하였다.
1722년 교호 개혁의 일환으로 상미 제도를 시행하면서 에도에 머무르는 기간을 반년으로 줄였지만, 막부 내 반발이 심하여 1730년 다이묘의 에도 체류 기간은 종전과 같이 1년으로 복귀되었다.
에도 근처의 특정 후다이 다이묘의 경우에는 6개월마다 에도 참석을 번갈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여러 예외가 있었다. 질병이나 극단적인 참작 사유로 인해 일시적인 예외적 특례가 부여되기도 했다.[1]
4. 1. 제도 폐지
1853년(가에이 6년) 미국 메슈 페리의 포함외교로 일본이 개항한 뒤 200년 이상 지속되던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이 종료되었다.[28] 1862년(분큐 2년) 8월 분큐 개혁으로 참근교대의 주기가 3년에 1회로 조정되고 에도 체류 기간 또한 100일로 단축되었으며, 다이묘의 처자 또한 에도 거주 의무가 사라졌다.[28] 이는 서양 열강의 등장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 전국의 군비 증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에도 막부의 통제력 약화로 이어졌다.1864년(겐지 원년) 교토에서 조슈번과 아이즈번의 무력 충돌인 금문의 변이 일어났다. 금문의 변 이후 막부의 영향력은 급격히 쇠락하여, 결국 1867년(게이오 3년)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참근교대 역시 폐지되었다.
5. 참근교대의 과정
참근교대는 매년 4월에 이루어졌지만, 그 준비는 반년 전부터 이루어졌다.[29] 예산 확보, 도쿠가와 고산케나 막부의 관리, 칙사, 다른 다이묘와의 숙박 장소 조정 등이 주요 준비 과정이었다.[29] 이들의 행렬이 길에서 뒤엉키지 않으려면 경로와 일정을 미리 조정하여야 하였고 여행 중 숙박할 곳과 숙박비도 미리 협상하여야 하였다.[29] 가가 번의 가로였던 요코야마 마사히로(横山 政寛)가 남긴 《어도중일기》(御道中日記)에는 매일 매일의 참근교대의 모습이 그날의 비용, 어려운 점 등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근교대에 관한 자료는 많이 있지만, 특히 가가번(加賀藩) 가로(家老)였던 요코야마 마사히로(横山政寛)가 남긴 『오도중일기(御道中日記)』에는 자세한 날짜뿐만 아니라 소요 기간, 비용, 고생담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참근교대는 매년 4월에 이루어지지만, 준비는 반년 이상 전부터 시작되며, 예산 확보를 시작으로 다른 다이묘들과 숙소 중복이 없는지 정찰병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도쿠가와 고산케(徳川御三家), 막부의 역관(役人)과 칙사(勅使), 다른 다이묘 행렬 등을 배려하여 되도록 마주치지 않도록 여정을 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숙박비 협상 등 준비 작업은 다양하다. 「가나자와 이타바시칸 역역리정표(金沢板橋間駅々里程表)」라는 자료[12]에는 이시카와현(石川県) 가나자와시(金沢市)와 도쿄도(東京都) 이타바시 숙소(板橋宿) 사이에 숙박 가능성이 있는 모든 숙소까지의 거리가 다이어그램(ダイヤグラム)처럼 기록되어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한정된 예산과 노력으로 에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지혜를 짜낸 고생이 보인다.
애초에 미리 막부에 신고한 기한까지 에도에 도착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체가 하루 발생하기만 해도 현대 화폐 가치로 수천만 엔에서 수억 엔에 해당하는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정해진 날짜까지 에도에 도착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다리나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곳도 있어 그러한 경우에는 미리 다리나 도로를 건설했다. 그래도 통행이 어려운 경우에는 인근 주민들을 대량으로 고용하여 사람들이 방패가 되어 강이나 바다의 흐름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가가번이 오야시라즈(親不知)를 넘을 때 파도를 진정시키기 위해 인근에서 주민 700명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슈번(紀州藩)의 경우에는 번사(藩士)들이 수개월 전부터 사전 준비를 위해 숙소에 와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 준비에는 매우 철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 1. 준비
참근교대는 매년 4월에 이루어졌지만, 그 준비는 반년 전부터 이루어졌다.[29] 예산 확보, 도쿠가와 고산케나 막부의 관리, 칙사, 다른 다이묘와의 숙박 장소 조정 등이 주요 준비 과정이었다.[29] 이들의 행렬이 길에서 뒤엉키지 않으려면 경로와 일정을 미리 조정하여야 하였고 여행 중 숙박할 곳과 숙박비도 미리 협상하여야 하였다.[29] 가가 번의 가로였던 요코야마 마사히로(横山 政寛)가 남긴 《어도중일기》(御道中日記)에는 매일 매일의 참근교대의 모습이 그날의 비용, 어려운 점 등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참근교대는 원래 막부에 제출한 에도 도착 기일까지 당도해야 하는데다 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하루라도 늦을 경우 오늘날 가치로 수천만엔의 손실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다이묘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기한 안에 도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29] 이 때문에 다리와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곳은 미리 이를 건설하고 정비하였다. 이렇게 하여도 통행이 어려운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 경우엔 인근 주민을 고용하여 물자의 이동을 돕도록 하였다. 다이묘에 따라서는 큰 강이나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가번의 경우 가파른 절벽인 오야시라즈를 넘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인근 주민 7백인을 동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9] 기슈번에서는 번사가 수개월 전부터 행렬이 지날 경로를 미리 답사하여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였다.[29]
5. 2. 일정
다이묘들은 격년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갔으며, 이웃 번과 겹치지 않도록 출발일이 배정되었다.[30] 다이묘에 따라 4월, 6월, 8월, 12월 등에 영지를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고 에도 출발은 2월과 8월로 나뉘어 배정되었다.[30] 참근교대를 하는 번주들은 짝수 해에 에도로 가는 그룹과 홀수 해에 가는 그룹으로 나뉘었다.[13] 이렇게 일정을 배정한 것은 다이묘들이 이를 빌미로 회합하여 담합하지 못하도록 한 의도이다.[30][13]5. 3. 출발
다이묘 행렬은 군역을 질 병력, 무사, 의사, 다도 전문가, 매사냥꾼 등 수많은 수행원으로 구성되었다.[31][14] 다이묘 전용 다도구와 식기, 개인 소지품 등도 함께 운반했다.[31] 행렬의 규모는 다이묘의 지위에 따라 달랐는데, 가가번(加賀藩)의 경우 2천-4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행렬이었다.[31] 기슈 도쿠가와가의 1841년(덴포 12년) 참근교대에는 무사 1639 명, 인부 2337 명, 말 103 두가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행렬은 인근 주민들이 구경할 정도로 위엄을 과시했다.행렬은 하루 평균 30-40km를 이동했으며, 최대한 빨리 이동하려 했다.[31] 하루 평균 여섯 시간에서 아홉 시간 정도 걸었지만, 급할 경우 하루 50km를 이동하기도 하였다.[31] 많은 다이묘가 같은 시기에 참근교대에 나섰기 때문에 가도와 숙소는 혼잡하였다. 초기에는 해로를 이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육로를 더 많이 이용하였다.[32][15]



5. 4. 영지 통과
다이묘는 번을 다스리는 영주였으므로 자신의 영지를 행렬할 때 위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수행원들은 복장을 잘 갖추고 역할에 따라 도열하여 행진하였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실무가 없는 사람들도 행렬에 세워 장대한 광경을 연출하고자 하였다.[33]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 절반 정도는 조카마치를 벗어나 가도에 들어서는 것으로 임무를 완료하여 해산하였고 나머지 인원들만이 실제 에도로 출발하였다.[33] 가도에 오른 다이묘 행렬은 첫 숙박을 할 슈쿠바로 향했다.혼슈의 다이묘는 육로로도 충분하였으나 규슈와 시고쿠 같은 곳의 다이묘는 부득이하게 해상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큰 비용이 들었다. 다이묘 행렬이 육로를 지나면 마주오던 서민들은 길 한켠으로 비켜나 행렬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하였고 말을 타고 있던 경우엔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하였다. 자신이 속한 번주의 행렬에 대해서는 도게자를 하였다. 파발이나 출산을 돕기 위해 가던 산파와 같이 응급한 용무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행렬 앞을 가로지를 수 없었고 행렬을 가로막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무례한 것으로 여겨져 에도 시기 법전 《공사방어정서》(公事方御定書)의 제71조 부가 조항인 기리스테고멘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칼로 베어버릴 수 있었다.[33] 행렬이 지나고 있음을 알리는 사람이 선두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는데 도쿠가와 고산케의 경우 "물럿거라"(시타니/下に일본어)라고 외쳤고 그 외의 번주들의 경우 "비켜서라"(가타요레-/片寄れー일본어)하고 외쳤다.[33] 막부 말기 서양인들이 일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제도를 이해못하여 문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의 참근교대 행렬을 영국인이 말을 탄 채 방해하자 무례하다며 칼로 베어버린 나마무기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났다.[33]
5. 5. 영지 밖
참근교대 행렬은 다른 가문의 영지를 지날 수 밖에 없었고 통과하는 측의 다이묘는 사자를 보내 선물을 전하며 양해를 구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로 정비를 위한 비용이나 선박 건조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다른 지방 다이묘를 맞이하는 측에서도 받은 선물에 대해 답례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참근교대 행렬은 다이묘들끼리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조정되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길에서 서로 마주치게 될 경우 가마에서 내려 예의에 어긋났다며 사과하였다.
백성은 다른 번의 다이묘 행렬이 지날 때도 말에서 내리고 길 한켠으로 물러나 지나기를 기다려야 하였지만 도쿠가와 고산케를 제외하면 도게자를 할 필요는 없었다.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 있었던 도카이도를 지나는 다이묘의 경우에도 다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강이 범람하면 행렬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 경우 비용 절감을 위해 막부의 허락을 얻어 내륙의 나카센도를 이용하였다.
5. 6. 숙박

참근교대 중 다이묘가 숙박하였던 곳은 혼진(本陣)이라 불렸다. 혼진은 지방의 숙박 업주가 관리하였고 다이묘가 머물게 되면 호위하는 사람들과 잠잘 때 무기를 수발하는 사람들 정도가 묵을 수 있었다. 혹시 있을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밤을 새워 책을 낭독하는 직무를 맡은 고쇼(小姓)가 불침번을 섰다.[34] 나머지 일행들은 혼진 근처의 일반적인 여관에서 묶었다. 숙박 업주로서는 다이묘 행렬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일정의 변경이나 각종 문제로 인해 숙박 비용을 놓고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다이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숙박비를 절약하여야만 하였고, 숙박 업주 입장에서는 미리 예약된 숙박이 취소되거나 하는 경우 그 동안의 준비 비용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34].[17]
5. 7. 세키쇼
다이묘는 반드시 지정된 세키쇼(関所)를 지나 모반의 의사가 없음을 증명하여야 하였다. 세키쇼의 역인들은 다이묘를 직접 만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통과시켰고 행렬의 인원수나 창과 활 등의 장비 상태를 기록하여 막부에 보고하였다.비용 절감을 위해 간소화된 행렬은 에도에 도착하면 위엄을 보이기 위해 우선 자신의 번에 할당된 시모야시키로 향하여 인원을 보충하고 의복을 가다듬어 행렬을 재편성하였다.

5. 8. 에도 생활
참근교대는 기본적으로 1년 마다 번갈아 이루어지는 것이었지만 간토와 같이 에도 인근에 영지가 있던 다이묘들은 영지에는 반년 정도만 머무르고 나머지 기간에는 에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35]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며 서양의 배들이 드나들었던 나가사키를 경호하는 후쿠오카번과 사가번은 2년 중 에도에 1백일만 머무르도록 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쓰시마번의 경우 3년에 한 번 4개월간 참근하도록 하였고 오늘날의 홋카이도 남부에 위치하였던 마쓰마에번의 경우 5년에 한 번 4개월을 참근하도록 하였다.에도에서 참근하는 다이묘의 가장 큰 역할은 정기적으로 쇼군을 알현하는 것이었다. 매 달 정기적인 알현 외에도 새해를 맞아 연시(年始) 알현이 있었고, 절기에 따른 셋쿠(節供), 다이묘의 지위 계승을 위한 서임(叙任)도 있었다.[35] 그 외의 시간에는 별다른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소일을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고, 그 비용도 매우 커서 종종 빚을 져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36]
6. 일정과 비용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번의 재정에 큰 부담이었다.[37]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번일수록 이동 거리와 기간이 늘어나 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각 번은 소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오가도츄니키(御道中日記)》등의 기록에 따르면, 주요 번의 다이묘 행렬 일정과 비용은 다음과 같다.[37][18]
지방 | 번 | 석고 | 번청 | 여정 | 일수 | 행렬 규모 | 경비 |
---|---|---|---|---|---|---|---|
토호쿠 | 센다이번 | 63만 석 | 센다이성 | 약 368km | 8-9일 | 2,000~3,000명 | 3,000~5,000냥 |
호쿠리쿠 | 가가번 | 103만 석 | 가나자와성 | 약 480km | 13일 | 2,000~4,000명 | 5,333냥 |
산인 | 돗토리번 | 33만 석 | 돗토리성 | 약 720km | 22일 | 700명 | 5,500냥 |
시고쿠 | 우와지마번 | 10만 석 | 우와지마성 | 약 1,020km | 30일 | 300~500명 | 986냥 |
규슈 | 사쓰마번 | 77만 석 | 가고시마성 | 약 1,700km | 40-60일 | 1,880명 | 17,000냥 |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토호쿠 지방의 센다이번은 8-9일, 호쿠리쿠 지방의 가가번은 13일, 규슈의 사쓰마번은 40-60일이 소요되었다.[37]
에도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참근교대 비용은 번 수입의 5%에서 20%를 차지했으며, 에도 번저의 비용까지 포함하면 50%에서 75%에 달했다.[11] 쇼나이번쇼나이번/庄内藩일본어 사카이씨사카이씨/酒井氏일본어의 경우, 1702년부터 1706년까지 세출의 약 82%가 에도에서 소비되었다.[11] 키시와다번키시와다번/岸和田藩일본어 오카베씨오카베씨/岡部氏일본어의 경우, 1776년 에도에서의 비용은 전체의 84%에 달했고, 중소 번에서는 참근교대에 필요한 비용이 번 세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11]
7. 영향
7. 1. 정치
무로마치 시대부터 이어지던 번주의 교토 채류 전통을 에도의 참근교대로 대체하면서, 각 번 영주의 지위는 천황으로 상징되는 조정의 신료 이전에 막부의 쇼군과 주종 관계가 우선시되었다. 따라서 막부는 실질적인 중앙정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전 시기 각지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것과 달리 에도로 집결하게 되면서 이들 사이의 연락과 정보교환이 촉진되었다.정기적인 참근교대는 무로마치 시대처럼 영지나 교토에 머무르면서 막부의 통제를 무시하거나, 반대로 영지 관리를 맡긴 수호대에게 숙청당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참근교대라는 행위 자체가 대명에게 쇼군과의 종속 관계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에도에 대명들이 모여 대명 간의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 정보의 집약과 전파가 이루어져, 아직 통신 기술이 미발달했던 근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7. 2. 경제
참근교대는 태풍이나 홍수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에도 정해진 기일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다이묘들은 도로와 교량을 정비해야 했다. 그 결과 일본의 도로망은 에도 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가가 번이 구로베 강에 놓은 아이모토보시(愛本橋)는 이러한 토목공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참근교대를 위해 건설되었으나 이후 인근 슈쿠바들의 발전을 이끌면서 교통 요지가 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38][39]참근교대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번과 다이묘에게 큰 재정적 부담이었다. 구마자와 반잔, 무로큐소, 나카이 지쿠잔과 같은 일본 유학자들은 번의 재정 파탄이 국가 쇠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28] 에도 시대 법령집인 《어촉서관보집성》(御触書寛保集成)에 따르면 "기존의 인원수가 근래에 들어 몹시 많아졌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군(國郡)의 비용이고 한편으로는 인민의 노고이다. 앞으로는 이에 걸맞는 대접으로 이를 절감해 주어야 할 것이다"라며 다이묘의 수행 인원과 비용 절감을 주문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이묘 행렬과 토목공사 등에 고용된 사람들과 숙박 업자에게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고, 이는 일본 화폐 경제 발달의 동력이 되었다. 에도와 각 번에 호화로운 저택을 유지하는 비용과 에도를 오가는 연례 여행의 막대한 비용은 다이묘들에게 재앙과 같았으며, 상번교대(sankin-kōtai) 제도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크게 강화했다.
대부분 다이묘의 주요 재원은 주로 쌀 잉여량에 의존했는데, 번 제도(''han'') 생산 능력의 상대적 경직성으로 인해 쌀 잉여량은 급격히 제한되었다. 다이묘의 수입은 증가하는 재정적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고, 결국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상번교대(sankin-kōtai) 비용은 다이묘 연간 총 지출의 70~80%를 차지했다. 생산 증대 노력 및 특별세 등 경제 프로그램이 시도되었지만, 영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겐로쿠(Genroku) 시대에는 거의 모든 다이묘가 막대한 빚에 시달렸다. 가장 부유한 봉건 영주인 마에다 씨(Maeda clan)조차도 이때부터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도로와 다리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태풍이나 홍수 등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도 정해진 기한까지 에도까지 도착해야 했다. 가가 번(加賀藩)이 흑부가와(黒部川)에 건설한 아이모토바시(愛本橋)(메이지 시대 중반에 소멸) 등을 대표로 하는 참근교대용 다리와 도로가 건설되었고, 숙장마치(宿場町)의 발전을 가져오는 등 후세에 남는 도시와 교통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19][20]
이러한 가도(街道)의 정비 비용을 시작으로, 여정 중 숙박비와 이동비, 국본의 거성(居城)과 에도한저(江戸藩邸) 유지비 등으로 인해 경제적 효과는 매우 컸다. 그러나 여러 번(藩)의 재정난 원인으로 참근교대제를 거론하는 학자가 에도 시대에도 등장했다. 에도 시대를 통해 구마자와 반잔구마자와 반잔/熊沢蕃山일본어・무로토우소무로토우소/室鳩巣일본어・나카이 치쿠잔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일본어 등에 의해 참근교대 제도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고, 실제로 무로토우소를 중용한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에는 참근교대에 의한 에도 재부 기간이 반년으로 단축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11]
7. 3. 풍속
다이묘가 거느렸던 각지의 수행원들이 에도를 왕래하게 되면서 에도의 문화가 전국으로 널리 전파되었다.[40][21] 18세기 무렵 에도 인구의 4분의 1 가량인 약 25만 명 가량이 참근교대로 에도에 온 각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방의 언어와 풍속이 에도에 유입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39][20] 참근교대로 에도 시대 일본은 전국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안정기를 맞게 되었지만, 쇼군의 가신과 각지의 다이묘,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들까지 합하면 사무라이 계층이 에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게 되면서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남성 인구와 같은 새로운 사회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다. 참근교대를 통해 에도에 독신 부임하는 각 번의 가신은 상당한 수에 달했고, 이 결과 에도의 인구에서 여성에 비해 남성 인구가 극단적으로 많은 것은 참근교대의 영향이다.8. 유사 제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 건설을 완료한 후, 귀족(특히 "검의 귀족" 계층)들이 매년 6개월 동안 궁전에 머물도록 요구했다. 이는 일본 쇼군의 경우와 비슷한 이유였다. 귀족들은 식사, 파티, 그리고 특권층은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것, 목욕, 교회에 가는 것 등 왕의 일상 업무와 국가 및 개인적인 행사를 돕는 것이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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