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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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쾰른 대성당은 1248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880년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4세기에 처음 건축된 이후, 화재와 종교 개혁 등으로 인해 여러 번의 재건 과정을 거쳤으며, 19세기 민족주의 고조와 고딕 리바이벌 건축의 영향으로 공사가 재개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었고, 1996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쾰른 대성당은 동방 박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과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11개의 종을 갖추고 있다. 현재는 공영 법인인 'Hohe Domkirche zu Köln'이 소유하고 있으며, 쾰른 중앙역이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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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쾰른 대성당 - 동방 박사 유물함
동방 박사 유물함은 동방 박사로 여겨지는 세 명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1164년 쾰른 대주교가 밀라노에서 가져온 유물을 보관하고자 쾰른에 건설되어 1225년경 완성되었고, 1,000개 이상의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쾰른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 1880년 완공된 건축물 - 로마 오페라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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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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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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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성 베드로 대성당 |
독일어 이름 | Hohe Domkirche St. Petrus Kölner Dom |
위치 | 쾰른 |
국가 | 독일 |
종파 | 가톨릭 교회 |
봉헌 대상 | 성 베드로 |
상태 | 대성당 |
기능적 상태 | 활동 중 |
건축 양식 | 고딕 건축 |
건축 기간 | 1248–1560 1842–1880 1950년대–현재 (복원) |
개장일 | 1880년 10월 15일 |
길이 | 144.5m |
너비 | 86.25m |
첨탑 개수 | 2 |
첨탑 높이 | 157m |
종 개수 | 11 |
웹사이트 | 쾰른 대성당 공식 웹사이트 |
조직 | |
대사교 | 라이너 뵐키 |
부사제 | 외르크 슈토켐 |
수석 사제 | 귀도 아스만 |
부 수석 사제 | 로베르트 클라이네 |
오르간 연주자 | 빈프리트 뵈니히 |
오르간 학자 | 울리히 브뤼게만 |
세계 유산 | |
ID | 292 |
등재 연도 | 1996년 |
기준 | 문화: i, ii, iv |
위험 목록 등재 기간 | 2004–06 |
건축물 정보 (내부 정보 상자) | |
이전 최고 높이 건축물 | 루앙 대성당 |
다음 최고 높이 건축물 | 울름 대성당 |
최고 높이 유지 기간 (시작) | 1880년 |
최고 높이 유지 기간 (종료) | 1890년 |
안테나/첨탑 높이 | 157.4m |
2. 역사
쾰른 대성당은 여러 차례 재건축 및 증축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의 성당은 4세기에 지어진 정사각형 건물이었다.[75] 818년에 두 번째 성당이 완공되었고, 12세기 후반 동방 박사의 성유물 안치로 쾰른은 순례자들의 중심지가 되어 도시 발전에 기여했다.[76] 그러나 124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77]
같은 해 8월 15일, 현재 대성당의 초석이 놓이며 세 번째 건물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한동안 탑이 하나만 있는 상태로 유지되었다.[77]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 민족주의 고조와 고딕 리바이벌 건축 양식 유행으로 1842년 건설이 재개되었고, 1880년에 완공되었다.[78] 같은 해 8월 14일, 독일 제국 황제빌헬름 1세가 참석한 가운데 국가적인 완공 축하 행사가 열렸다.[7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14발의 직격탄을 맞아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1956년까지 복구되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으나,[129] 2004년 주변 고층 건물 계획으로 위험 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쾰른 시 당국의 노력으로 2006년 해제되었다.
2005년 8월 18일, 로마 교황베네딕토 16세가 방문했고, 2015년 12월 31일에는 대성당 앞 광장에서 쾰른 대규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80]
2. 1. 로마 시대와 초기 기독교 시대
현재 쾰른 대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1248년 건축 이전부터 여러 건물들이 존재했었다. 쾰른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1~4세기 사이에 지어진 로마식 주택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내진 밑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최소 4세기 이후부터 쾰른의 첫 교구장 주교였던 마테르누스의 지시로 지어진 정사각형의 '최초 성당'을 포함한 기독교 관련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90][91]마테르누스는 313년경 쾰른의 초대 주교였다.[10] 그러나 당시 쾰른의 기독교 공동체는 아직 작았고, 교회 대신 주거 건물에 모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성가대석 아래에 있는 대성당 언덕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이미 고대 후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이 당시의 의식에 따라 무릎 깊이의 물에 들어가 완전히 물에 잠기는 세례를 행하던 세례당이 대성당 합창단 동쪽에 있었다.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세례반(수조)은 원래 기독교 집회 장소로 사용된 로마 가옥의 정원에 위치해 있었다.[13] 현 성당의 동쪽 끝 부분에는 세례반이 있었으며, 9세기에 구 성당을 지으면서 파괴되었다. 현재는 팔각형의 세례용 우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92] 힐데볼드 대성당이 세워지고 바뀐 의식에 따라 세례반을 갖추면서, 세례당에서는 세례 수조만 남게 되었다.[15] 오늘날, 대성당 기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이 세례 수조는 쾰른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예배의 증거로 여겨진다.[16]
현재 존재하는 대성당은[75] 3번째 건물로, 초대의 성당은 4세기에 완성된 정사각형 건물로 알려져 있다.
2. 2. 구 성당 (힐데볼트 대성당)

'구성당' 혹은 '힐데볼트 성당'은 현재 쾰른 대성당이 지어지기 바로 이전의 성당이다. 건축을 시작한 힐데볼트 대주교가 사망한 후인 873년 12월 27일에 축성되었다.[93] 그는 건축주이자 성당 설립 기금 헌납자로서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마지막으로 구성당을 개축한 최고의 적임자로 평가받으며, 구성당의 실질적 기반을 닦았다.[94]
구성당은 직사각형의 주랑을 가진 건물로, 당시 유럽 여러 교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95] 10세기부터 서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십자가 유물인 게로 십자가의 보관소로 운영되었다.[94]
1248년, 새 고딕 양식의 성당을 짓기 위해 구성당은 보수되지 않고 노후화되었다. 결국 같은 해 4월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어 파괴되었다.[96] 화재 이후 구성당의 서쪽 부분을 재건하여 쾰른 대성당 착공 전까지 몇 년 동안 미사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구 대성당은 쾰른 대성당 언덕에 세워졌으며 870년에 봉헌되었다.[17] 이 대성당은 힐데볼트 주교의 이름을 따서 힐데볼트 대성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샤를마뉴의 측근이었고 818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주교가 건물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아마도 새로운 건설을 시작했고, 샤를마뉴 역시 이를 관대하게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주교의 거처는 원래 대성당 옆에 위치해 있었다.
길이가 약 95미터인 힐데볼트 대성당은 지금까지 지어진 가장 큰 카롤링거 양식의 교회 중 하나였으며,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의 수많은 교회의 건축적 모델이 되었다. 카롤링거 건축 전통에 따라 동쪽 합창단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서쪽의 더 중요한 합창단은 성 베드로의 기억에 헌정된 두 개의 합창단을 가진 바실리카로 지어졌다. 힐데볼트 대성당은 후원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로마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조했으며,[19] 북쪽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여겨졌다. 이는 쾰른이 신성한 도시이자 로마 교회의 충실한 딸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20] 성 베드로의 유물 지팡이와 성 베드로의 족쇄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유물 중 하나였다.[21] 11세기의 힐리누스 코덱스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현실적인 묘사로 힐데볼트 대성당을 보여준다.[22] 오늘날, 카롤링거 바실리카의 기초 벽은 대성당 발굴을 통해 드러났다.[23]
1164년 7월 23일, 쾰른 대주교이자 제국 대재상인 다젤의 라이날트는 밀라노에서 동방 박사의 유골을 쾰른으로 가져왔다.[24] 1190년에서 1225년 사이에 쾰른에서 매우 존경받는 성인들을 위해 세 왕의 성유물함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중세 시대의 가장 정교한 금세공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성유물함은 구 대성당 중앙에 놓였다.[26] 쾰른은 이렇게 하여 유럽에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27] 그러나 대성당의 좁은 측면 출입구는 순례자 군중에게 적합하지 않았다.[29]
1248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건설되면서 구 대성당은 단계적으로 철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주의한 철거 작업과 화재로 동쪽 합창단뿐만 아니라 거의 전체 대성당이 파괴되었으며, 세 왕의 성유물함은 화재에서 구출되었다. 힐데볼트 대성당의 서쪽 부분은 임시로 재건되었으며, 고딕 양식의 합창단이 완성되고 고딕 양식의 본당 건설이 시작된 1322년 이후에야 철거되었다.[30]
2. 3. 쾰른 대성당 건설
쾰른 대성당은 여러 세기에 걸쳐 건설되었다. 최초의 대성당은 4세기에 완성되었고, 두 번째 건물은 818년에 완성되었다.[76] 12세기 후반 동방 박사의 성유물이 안치되면서 쾰른은 순례자들의 중심지가 되었고,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76] 그러나 1248년 4월 30일 화재로 소실되었다.같은 해 8월 15일,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 대주교에 의해 현재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다.[31] 마이스터 게르하르트의 지휘 아래 동쪽 부분이 완공되어 1322년에 봉헌되었고, 임시 벽으로 봉쇄되어 공사가 이어졌다. 성가대에 있는 84개의 미제레코르디아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 종교 개혁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한쪽 탑만 있는 상태가 지속되었다.[77] 300년 넘게 미완성 상태로 남은 대성당은 쾰른 시민들에게 도시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고, 14세기에 만들어진 공사용 거중기가 1868년까지 남쪽 탑 꼭대기에 방치되어 있었다.[112][113]
1744년부터 1770년까지 성당의 사용되던 공간은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증축되었다. 프랑스가 쾰른을 점령한 1794년부터 성당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796년 11월 프랑스 점령군은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기 위해 건설 재료 등을 모두 정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1804년 1월 4일, 1794년 프랑스 점령군이 베스트팔렌으로 가져갔던 동방 박사 유골함이 쾰른으로 돌아왔다. 1814년 11월 20일에는 요셉 괴레스가 신문 ''"Rheinischen Merkur"''를 통해 성당의 완공을 촉구하였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과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서 고딕 리바이벌 건축 양식이 다시 주목받게 되면서, 건설이 중단되었던 쾰른 대성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쾰른은 영국 및 미국군의 공습으로 14발의 직격탄을 맞았다. 내부는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전체 구조는 무너지지 않아 1956년까지 복구 공사가 진행되어 원래 상태로 복원되었다.
1996년,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으나, 주변 고층 건물 건설 계획으로 인한 경관 파괴 위기에 놓였다. 2004년에는 위험 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대성당 주변에 높이 규제를 시행하는 등 시 당국의 노력으로 2006년에 해제되었다.
2005년 8월 18일에는 로마 교황베네딕토 16세가 직접 대성당을 방문했다.
2015년 12월 31일에는 대성당 앞 광장에서 아랍인·아프리카인에 의해 쾰른 대규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80]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는 "콜론의 악마"라는 요괴담에서, 쾰른 대성당의 설계도를 그린 건축가는 악마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건축가는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넘겨주는 대신 십자가를 "코 앞에 들이대" 악마를 물리쳤다. 화가 난 악마가 저주를 걸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81]
카롤링거 왕조 시대, 쾰른 대성당 언덕에 구 대성당이 세워져 870년에 봉헌되었다.[17] 이 대성당은 힐데볼트 주교의 이름을 따 힐데볼트 대성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샤를마뉴의 측근이었던 그는 818년에 사망했다. 힐데볼트 주교가 건물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새로운 건설을 시작했고, 샤를마뉴 역시 이를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주교의 거처는 원래 대성당 옆에 있었다.
길이 약 95미터인 힐데볼트 대성당은 당시 가장 큰 카롤링거 건축 양식의 교회 중 하나였으며, 초기 신성 로마 제국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이 대성당은 동쪽 합창단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서쪽 합창단은 성 베드로에게 헌정되었다. 힐데볼트 대성당은 로마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조했으며,[19] 북쪽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여겨졌다. 이는 쾰른이 신성한 도시이자 로마 교회의 충실한 딸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20] 성 베드로의 지팡이와 족쇄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유물 중 하나였다.[21] 11세기 힐리누스 코덱스는 힐데볼트 대성당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22] 오늘날, 카롤링거 바실리카의 기초 벽은 대성당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23]
1164년 7월 23일, 쾰른 대주교이자 제국 대재상인 다젤의 라이날트는 밀라노에서 동방 박사의 유골을 쾰른으로 가져왔다.[24] 이 유물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전쟁 전리품으로 대주교에게 남긴 것이었다. 1190년에서 1225년 사이, 쾰른에서 존경받는 성인들을 위해 세 왕의 성유물함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중세 시대 가장 정교한 금세공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성유물함은 구 대성당 중앙에 놓였다.[26] 쾰른은 유럽에서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고,[27] 순례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1162년 이후 "왕의 수호자"(custos regum) 직책이 설립되었다.[28] 그러나 대성당의 좁은 측면 출입구는 순례자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했다.[29]
1248년 고딕 양식 대성당 건설과 함께 구 대성당은 단계적으로 철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주의한 철거 작업과 화재로 동쪽 합창단뿐만 아니라 거의 전체 대성당이 파괴되었고, 세 왕의 성유물함은 화재에서 구출되었다. 힐데볼트 대성당의 서쪽 부분은 임시로 재건되었으며, 1322년 고딕 양식 합창단이 완성되고 본당 건설이 시작된 후에야 철거되었다.[30]
2. 3. 1. 1차 건설기 (13세기 ~ 16세기)
1165년 7월 23일,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드 폰 다셀은 밀라노에서 동방 박사 유골함을 가져왔다.[97] 이 유골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이후 대주교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 때 금세공을 하여 1225년에 새로운 유골함을 완성했다.[90] 동방 박사 유골함은 유럽 전역에서 순례객을 불러모았고, 1248년 8월 15일 대주교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은 대성당이자 순례성당으로서 명성에 걸맞은 새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90][98] 게르하르트 폰 릴레가 공사 총 책임자로 임명되어,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아닌 프랑스 아미엥 대성당을 본뜬 고딕 양식으로 설계했다.[99][100][101] 건축 자재는 라인란트 지역에 단단한 암반이 없어, 라인 강을 따라 본 남쪽 드라헨펠스에서 조면암을 채굴해 사용했다.[102]1265년 제실과 아치형 천장이 완성되었고,[103] 1277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성구실 제단을 축성했다.[104] 1288년 쾰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자유 도시로 승격되면서 성당도 명목상 대성당으로 격상되어 건설에 탄력을 받았다.
1304년부터 1322년까지 48명의 왕이 그려진 17.15m 높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었다.[105] 수염 유무로 구약성서의 24명 유대 왕들과 묵시록의 24명 장로를 표현했는데, 이 형상들은 높이가 약 2.25m이다. 마리아와 예수를 찬양하는 동방 박사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되었다.[105] 내진과 후진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총 1,350m²로 중세 최대 규모이다. 시간이 지나며 세밀함은 사라졌지만, 처음 색상은 유지되었다. 1310년과 1320년, 공사 책임자 요하네스는 구성당 석재 위 4.5m 높이로 건물을 짓는 전면부 설계를 그렸다. 1300년경 남쪽 탑이 착공되었고,[106] 1994년 남쪽 탑 4m 아래에서 발견된 동전으로 1360년경 착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22년 9월 27일, 내진과 후진 축성식과 함께 동방 박사 유골함이 안치되었다. 구성당에 매장되었던 대주교 게로, 라이날드 폰 다셀,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 엥엘베르트 1세,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의 묘도 제실 안으로 옮겨졌다.[105]
1331년 신랑 토대가 설치되었고, 1333년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공사 현장을 방문했다. 1375년 현관 석상이 제작되었고, 1395년 안드레아스 폰 에베르딩겐이 새 책임자가 되었다. 1410년 남쪽 탑이 2층까지 증축되고 "동방 박사의 종" 또는 "피의 종"이라 불리는 최초의 종이 설치되었다.[108] 후임 니콜라우스 판 부에렌은 1437년 59m 높이 남쪽 탑에 종을 걸었다.[109] 1448년과 1449년, 11,500kg의 프레티오사 종과 5,200kg의 스페시오사 종이 남쪽 탑 57m 높이에 추가 설치된 후 남쪽 탑 공사가 재개되었다.[110]
15세기 말, 건설 속도가 느려졌다. 1차 건설기 마지막 책임자는 1469년부터 1491년까지 재임한 요한 판 프랑켄베르크였다. 1500년경 북쪽 탑 기초 석이 설치되었고, 1510년부터 공사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 1528년 마지막 공사가 거행되었다. 1530년 이후에도 건설 비용이 남아있어 젊은 학자들이 건설 재개를 위해 고용되었으나, 면죄부와 성물 판매 감소, 과도한 인력 고용으로 재정난에 부딪혀 공사가 완전히 중단되었다.[111]
1531년 1월 5일, 황제 카를 5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가 쾰른 대성당에서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2. 3. 2. 2차 건설기 (19세기)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중세에 대한 열정과, 정면의 원본 도면 발견에 힘입어, 프로이센 궁정은 교회와 협력하여 대성당을 완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1842년에 설립된 중앙 돔바우페라인은 막대한 비용의 3분의 2를 모금했고, 프로이센 국가는 나머지 3분의 1을 지원했다. 프로이센은 이를 1815년에 얻은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으로 보았지만, 특히 1871년 이후에는 독일 민족성을 상징하는 사업으로 여겨졌다.[34]1842년에 중세 시대의 생존한 도면을 바탕으로 작업이 재개되었지만, 철제 지붕 거더를 포함한 더욱 현대적인 건축 기술이 사용되었다. 본당이 완공되었고 탑이 추가되었다. 종들은 1870년대에 설치되었다. 가장 큰 종은 성 베드로 종이다.
건축이 시작된 지 632년 만인 1880년 10월 15일에 독일 최대 규모의 대성당 완공은 국가적인 행사로 기념되었다.[35] 이 행사에는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 황제가 참석했다. 높이가 157.38m에 달하는 이 건물은 워싱턴 기념탑이 완공되기 전까지 4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36]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중세 독일에서 자민족의 전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건축에서는 고딕 리바이벌의 흐름이 강해져, 건설 중이던 쾰른 대성당에 주목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1842년에 건설이 재개되었고, 또 하나의 탑 완성이 서둘러졌다.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건설 시작으로부터 600년 이상이 지난 1880년이었다.[78] 같은 해 8월 14일에는 빌헬름 1세가 참석한 가운데, 국가 행사로 완공 축하 행사가 거행되었다.[79]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복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쾰른 대성당은 70여 대의 폭격기가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른바 쾰른 공습으로 불리는 이 폭격으로 신랑을 비롯한 아치형 천장과 내부, 외부 석상들이 파괴되었고, 북쪽 탑은 심각한 피해를 입어 수십 년 동안 붕괴를 막기 위한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125] 심지어 1945년 6월에는 미군 부대의 소총 사격 연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125]1945년 3월 6일, 대성당 서쪽 지역은 제3 기갑사단의 미국 전차와 제106 펠트헤르할레 기갑여단 소속 판터 Ausf. A 전차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판터 전차는 쾰른 대성당 바로 옆 기차역 근처 잔해 더미 옆에 배치되어 셔먼 전차 두 대를 격파했지만, 곧 T26E3 퍼싱 "Eagle 7"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전투는 영상 자료로 남아있다.[38]
전쟁이 끝난 후 1946년부터 1997년까지 오토 도펠펠트의 주도로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되었다.[126] 1948년은 성당의 첫 구조물이 세워진 지 700년이 되는 해였다. 긴급 복원 작업 끝에 1956년부터 성당은 다시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126] 전쟁 피해 복구는 1956년에 완료되었으나, 1944년에 주변 건물 잔해에서 가져온 벽돌로 복구된 북서쪽 탑 일부는 2005년까지 전쟁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가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폭격으로 돔의 기초가 손상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은 1946년 오토 도펠펠트의 지휘 아래 시작되어 1997년에 완료되었다. 이 발굴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건물에 대한 세부 정보를 밝혀내며 교회 발굴 중 가장 의미 있는 발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9]
오늘날 쾰른 대성당은 산성비로 인한 암석 부식과 매연으로 인한 변색 등 환경오염에 노출되어 있다. 성당 건축 조합은 성당의 붕괴를 막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127] 대성당의 보수 및 유지 보수 비용의 절반은 여전히 돔바우페라인(Dombauverein)이 부담하고 있다.
2. 5. 종교적 관용
1960년대 독일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주 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많은 터키 이주 노동자들이 이민을 왔는데, 당시 독일에는 무슬림이었던 그들을 위한 이슬람 예배 공간이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터키 이민노동법에 따라 쾰른 대성당은 북쪽 본당을 이슬람 예배를 위해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1965년 라마단 마지막 날에는 400여 명의 이슬람 신도가 쾰른 대성당 내부에 양탄자를 깔고 라마단의 끝을 축하하는 기도를 했다. 당시 본당 주임 신부는 언론을 통해 쾰른 대성당에서 다른 종교인들이 예배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128]2. 6. 세계 문화유산
1996년 유네스코는 쾰른 대성당을 유럽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인정하여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129] 2004년에는 대성당의 라인 강 건너편 도이츠 지역에 대한 쾰른 시의 도시 계획으로 인해 경관이 훼손될 가능성이 제기되어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44][45]200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네스코 정례 회담에서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되었고, 유네스코 독일 사무국은 도이츠 지역의 녹지를 늘릴 것을 권고했다.[129] 그러나 이듬해에도 해당 지역에는 새로운 건축물 공사가 계획되어 있었다.
2006년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국제위원회는 쾰른 대성당을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130] 그러나 쾰른 시 당국이 건설 계획을 변경하고 대성당을 중심으로 엄격한 고도 제한을 시행하면서 논란은 해결되었다.[46]
3. 건축
쾰른 대성당의 건축은 1248년에 시작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쾰른 대성당이 화재로 소실된 후, 게르하르트 폰 라일이라는 석공 출신 장인이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맡았다. 그는 아미앵 대성당을 비롯한 프랑스 고딕 건축의 성과를 참고하여 쾰른 대성당을 설계했다.
쾰른 대성당은 아미앵 대성당의 영향을 받아 라틴 십자 형태의 평면과 높은 아케이드, 트리포리움, 클리어스토리 창문 등을 갖춘 프랑스식 고딕 양식을 따랐다. 하지만, 울름, 빈 등과 같이 독일적인 특징인 거대한 첨탑을 가지고 있다.
내진은 1322년에 완성되었지만, 서쪽 파사드의 탑은 고딕 리바이벌 시대인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이는 쾰른 대성당이 중세 시대의 건축 계획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건축 기술과 양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쾰른 대성당은 중세 시대의 성가대석과 19세기의 본당이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본당에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가 기증한 ''바이에른펜스터''를 비롯한 19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의 독일 회화 양식을 엿볼 수 있다.
3. 1. 외부 구조물
쾰른 대성당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고딕 양식 성당으로, 후기 중세 고딕 건축물의 정수로 평가받는다.[85] 13세기에 착공되어 19세기에 완공되었으며, 19세기에 네오 고딕 양식으로 설계 변경된 거대한 두 개의 탑이 특징이다. 이 탑들은 증기기관의 힘으로 건설되었다.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8] 1880년부터 1884년까지 4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88] 2004년에는 주변 고층 건물 건설 계획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유산' 목록에 등재되기도 했으나, 2006년 건물 높이 제한 결정으로 목록에서 삭제되었다.[46]
- -|]]|thumb|쾰른 대성당: 지속적인 석재 갱신이 필요하다]]
쾰른 대성당은 동방 박사 유물함을 소장하고 있어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이다.[47] 방문객들은 533개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100m 높이의 전망대에서 라인 강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48]
대성당은 견고하게 지어졌지만, 석조 구조물은 지속적인 유지 보수가 필요하다.[49] 1906년 천사 조각상 날개가 떨어지는 사건 이후 보수 작업이 재개되었고,[51] 산성비 등으로 인한 석재 손상과 변색 문제도 발생했다.[55] 1990년대부터는 원래 사암과 가까운 석재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57]
2021년에는 드론을 이용해 대성당의 3D 모델을 제작하여 보존 및 복원 작업에 활용하고 있다.[61][62]
쾰른 대성당의 평면은 아미앵 대성당을 본뜬 라틴 십자 형태이며, 두 개의 통로가 있는 높은 고딕 볼트를 가지고 있다. 외부에는 프랑스식 플라잉 버트레스가 볼트를 지탱하고, 동쪽 끝에는 7개의 방사형 예배당이 있는 ''셰베''가 있다.
내부는 높은 아케이드와 트리포리움 갤러리, 클리어스토리 창문으로 구성된 프랑스식 배치를 보여준다. 성가대석은 원래 설비의 대부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본당에는 19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다.
외부는 거대한 첨탑이 특징이며, 이는 울름, 빈 등과 같은 게르만적인 특징을 보여준다.[63]

3. 1. 1. 서쪽 현관
쾰른 대성당의 주 현관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현관의 오른쪽 ‘베드로 현관’은 1370년에서 1380년 사이에 지어진 중세시대부터 사용된 원래의 현관이다. 현관 양옆에 있는 석상 중 왼쪽 3개와 오른쪽 2개만이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형상이다. 19세기에 제작된 석상과 중세시대에 제작된 석상은 색상뿐만 아니라 질도 명확히 차이가 난다.왼쪽 현관은 ‘동방 박사 현관’으로 1872년에서 188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중앙 현관은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3. 1. 2. 남쪽 현관
왼쪽 현관부터 오른쪽 현관까지 각각 ‘우르술라 현관’, ‘수난의 현관’, ‘게레온 현관’이라 불린다. 1847년 루트비히 슈반탈러가 제작한 이 석상들은 독일 최고 로마네스크-나사렛 종교 예술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남쪽 정면은 네오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에발트 마타레에 의하여 재건되었다.[131] 우르술라와 게레온은 쾰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녀와 성인이며, 각각 쾰른에 있는 성당들의 명칭이기도 하다.3. 1. 3. 북쪽 현관
왼쪽 현관부터 오른쪽 현관까지 각각 ‘보니파티우스 현관’, ‘미하엘 현관’, ‘마터누스 현관’이라 불린다. 북쪽 전면부의 모습은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서제 사품 인도식으로 시작되는 쾰른 대성당의 역사와 관련되어 설계되었다. 마터누스 현관은 쾰른의 대주교 관할구의 기원을 재현하였다. 마터누스는 쾰른 최초의 신학생이자 최초의 주교가 된 사람으로, "쾰른 주교좌에 앉은 사도의 가르침"으로 비유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현관의 이름은 마터누스로 명명되었다.[69]3. 1. 4. 교차랑 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교차랑 위에 있던 원래의 네오 고딕 양식 탑은 파괴되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아르 데코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탑 꼭대기에는 다른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 대신 별 모양 장식이 있는데, 이는 성경 속 동방 박사 이야기에서 나오는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다.3. 2. 내부 구조물
쾰른 대성당 내부는 라틴 십자 형태의 평면을 가지며, 이는 고딕 양식 대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양쪽에는 두 개의 통로가 있고, 플라잉 버트레스가 보베 대성당 수준의 높은 고딕 볼트를 지탱한다.내부 성가대석은 19세기에 지어진 부분보다 다양하고 덜 기계적인 세부 사항을 가진다. 높은 아케이드와 창문으로 밝게 빛나는 좁은 트리포리움 갤러리는 프랑스식 배치를 보여준다. 클리어스토리 창문은 크고 오래된 형상 유리를 보존하며, 바닥에서 볼트까지 뻗어 있는 높은 샤프트로 연결된다. 볼트는 단순한 사분면 배열이다.
성가대석은 프랑스 혁명군의 훼손에도 불구하고 조각된 스톨 등 원래 설비 대부분을 유지하고 있다. 성 크리스토퍼의 큰 석상은 19세기 말 대성당 완공 이전 입구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본당에는 19세기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많으며, 남쪽의 ''바이에른펜스터''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가 기증한 것으로 당시 독일 회화 양식을 보여준다.
동쪽 끝에는 단일 주랑이 있으며, 두 번째 통로는 7개의 방사형 예배당의 ''셰베''로 이어진다.
3. 2. 1. 신랑
쾰른 대성당의 신랑은 길이가 144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 중 하나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43.35미터로, 보베 대성당(48.5m), 밀라노 대성당(46.8m), 팔마 데 마요르카에 있는 라 세우(43.74m)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높다.쾰른 대성당의 평면 설계는 아미앵 대성당을 기반으로 했으며, 중앙 본당의 양식과 너비 대 높이 비율도 마찬가지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 형태로, 고딕 양식 대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양쪽에 두 개의 통로가 있어, 보베 대성당의 높이(붕괴된 부분이 많다)에 거의 육박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딕 볼트 중 하나를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외부적으로 볼트의 외향적인 추력은 프랑스식 플라잉 버트레스에 의해 지탱된다.
내부적으로 중세 시대의 성가대석은 19세기 건물보다 더 다양하고 덜 기계적인 세부 사항을 가지고 있다. 매우 높은 아케이드, 창문으로 밝게 빛나고 위에 있는 창문과 세밀한 트레이서리가 융합된 섬세하고 좁은 트리포리움 갤러리의 프랑스식 배치를 보여준다. 클리어스토리 창문은 키가 크고 하단 부분에 오래된 형상 유리를 보존하고 있다. 전체는 바닥에서 볼트의 시작 부분에 있는 주두까지 끊임없이 뻗어 있는 높은 샤프트에 의해 연결된다. 볼트는 단순한 사분면 배열이다.
본당에는 19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많이 있다. 남쪽에 있는 5개의 세트인 ''바이에른펜스터''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가 기증한 것으로, 당시의 회화적인 독일 양식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3. 2. 2. 제실
쾰른 대성당에는 7개의 방사형 제실과 2개의 일반 제실, 1개의 독립 제실이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계방향 순서는 다음과 같다.[90]순서 | 이름 | 설명 |
---|---|---|
1 | 십자가 제실(일반 제실) | 970년경에 제작된 게로 십자가가 있고 그 뒤로는 성체 제실(독립 제실)이 있다. |
2 | 엥엘베르투스 제실 | 게오르그 제단과 대주교 안른 폰 샤우엔부르크의 묘비가 있다. |
3 | 마터누스 제실 | 16세기 제작된 동방 박사 목판과 대주교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의 묘비가 있다. |
4 | 요한네스 제실 | 1320년 제작된 십자가형 제단과 만성절, 야곱, 마리아 스테인드글라스, 대주교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의 묘비가 있다. |
5 | 삼 왕(동방 박사) 제실 | 1260년 제작된 성서 창유리, 1330년경에 완성된 삼 왕, 베드로-마테르누스 창유리가 있다. |
6 | 아네스 제실 | 1100년 제작된 대주교 이르밍가르디스 폰 쥐히텔른의 석관과 1320년 제작된 창유리가 설치 되어있다. |
7 | 미하엘 제실 | 대주교 발라름 폰 윌리히의 묘비와 1820년경에 제작된 토마스, 요하네스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다. |
8 | 스테파노 제실 | 대주교 게로의 묘비와 1280년경 제작된 새 성서 창유리가 있다. |
9 | 마리아 제실(일반 제실) | 원래 성모상이 있던 제실로 현재는 1442년경 제작된 스테판 로흐너의 동방 박사 제단이 있다. |
3. 2. 3. 창문
쾰른 대성당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성당을 가득 채운 스테인드글라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것은 성당 남쪽 측랑에 설치되어 있는 5개의 채색 창으로 이루어진 바이에른 창이다. 1842년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가 기증하여 1848년 창틀에 삽입된 이 창문에는 성 요한 세례자와 카를 대제, 네 명의 복음 사가 등이 묘사되어 있다.[90]바이에른 창 맞은편에는 1507년에서 1509년 사이에 기증되어 설치된 다섯 개의 창이 있는데, 여기에는 쾰른 기사 성인들과 베드로의 성인담, 수난 장면, 성모 마리아 등이 그려져 있다.[90]
2007년 8월 25일 봉헌된 게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인 리히터 창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파괴된 기존 스테인드글라스를 대신하여 익랑의 남쪽 창문에 설치되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현대 미술 작품으로 11,263개의 색상이 입힌 균일한 유리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색상과 거대한 규모로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창이다.[132][133]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대성당 남쪽 창이 파괴되자 빌헬름 토이벤(Wilhelm Teuwen)이 디자인한 창문이 설치되었지만, 창문을 통과하는 빛이 너무 강렬하여 기능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여겨졌다.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을 20세기의 가톨릭교회 순교자들의 구체적인 초상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2001년 리히터는 이 작업을 맡아 처음에는 국가 사회주의 희생자들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을 바탕으로 한 두 가지 디자인 초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리히터는 이 매우 잔혹한 장면이 모티프로 부적절하며, 다른 역사적 모티프도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리히터는 중세의 기하학적, 추상적인 무늬와 그 자신이 고안한 기하학적 구성을 조합한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했다. 새로운 창문은 각각 9.6제곱센티미터의 정사각형 유리 11,500개로 이루어져 복잡한 격자 무늬를 이루고 있다. 리히터는 유리의 색상을 대성당에 남아 있는 중세 유리에 사용된 72가지 색상으로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창문을 교회의 내부 배색과 조화시키려고 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각 부분은 전통적으로 납 가새로 구분되었지만, 환경 부하를 고려하여 폭 2mm 정도의 검은색 실리콘으로 대체되었다.
색상 배치는 Mike Karstens가 개발한 컴퓨터 난수 발생 프로그램을 통해 무작위로 결정되었다. 이 배치는 무작위적이면서 최대한의 무질서를 창출하도록 신중하게 결정되었다. 따라서 웅장하고 다채로운 인상을 주면서 동시에 엄격한 격자 무늬가 다채로운 혼돈에 고도의 조화를 부여한다. 이 색상 배치의 법칙은 리히터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제작한 컬러 차트를 기반으로 한 초기 패널 그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디자인은 특히 쾰른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파는 너무 현대적이고 추상적이라 대성당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보다 구체적이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디자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반드시 구체적인 묘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쾰른 대성당에는 19세기 또는 20세기에 제작된 창문 외에도 1260년부터 1562년까지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43면 있다. 이들은 총 4,100개의 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500개가 구체적인 모티프를 표현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장식적인 것이며, 식물을 모티프로 한 것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을 사용한 것도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내진의 남쪽과 북쪽의 세 개의 채광창으로, 이 창의 꼭대기 근처에는 리히터의 디자인과 매우 유사한 작은 사각형으로 구성된 격자 무늬의 원형 창이 장식되어 있다. 이는 1300년경에 제작된 것이지만, 리히터는 이 창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6년 쾰른 대성당 주임 사제 노르베르트 펠드호프는 리히터가 디자인한 창문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고, 활력을 불어넣고, 명상을 촉진하며, 우리에게 종교를 수용하는 분위기를 만든다"고 말했다.
3. 3. 내부 설치물
쾰른 대성당에는 다양한 종교적 예술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고제단: 1322년에 설치된 고제단은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약 4.57m 길이의 석판이 상단을 형성한다. 앞면과 측면은 흰색 대리석 틈새로 덮여 있으며,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이 조각되어 있다.[64]
- 동방 박사 유해함: 1190년에 니콜라스 오브 베르던이 제작한 동방 박사 유해함은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이다. 동방 박사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고 여겨지며, 1164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에 의해 획득되었다. 유해함은 청동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금박을 입히고 건축적 디테일, 형상 조각, 에나멜,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1864년에 개봉되었을 때 뼈와 의복이 발견되었다.
- 게로 십자고상: 성구실 근처에 있는 게로 십자고상은 참나무로 조각되었고 페인트와 금박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형 십자가이다.[65] 960년경 게로 대주교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알프스 산맥 북쪽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십자가이자 중세 시대의 가장 초기의 북부 조각 작품이다.[66]
- 밀라너 마돈나: 성찬 예배당에 있는 '밀라너 마돈나'는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한 고딕 양식의 조각상이다. 1290년경 쾰른 대성당 작업장에서 제작되었다.
- 슈테판 로흐너 제단화: 국제 고딕 화가 슈테판 로흐너의 제단화는 '마리엔카펠레'(성 마리아 예배당)에 있다.
- 성 이르가르디스 유해: 1265년에 완공된 방사형 예배당은 즉시 매장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 이르가르디스의 유해는 성 아그네스 예배당에 안치되었으며, 트라키암 석관은 1280년경 대성당 석공 길드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67]
- 석비: 내부 벽에는 쾰른에서 유대인의 거주를 허용한 엥겔베르트 2세 대주교(1262–67)가 제정한 규정이 새겨진 석비 한 쌍이 있다.[68]
- 기타: 이 외에도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대성당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3. 1. 동방 박사 유물함
1165년 7월 23일,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드 폰 다셀은 밀라노에서 동방 박사 유골함을 쾰른으로 옮겨왔다.[97] 이 유골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쾰른 대성당에 봉헌했다. 이후 대주교 필리프 폰 하인스베르크는 금세공을 더한 새 유골함을 제작하여 1225년에 완성했다.[90] 이 유골함은 유럽 전역에서 순례객을 끌어모으는 계기가 되었다.1190년에서 1225년 사이에 제작된 동방 박사 유물함은 금 도금된 외면에 구약 성경의 시작부터 그리스도 재림까지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옆면 아랫단에는 예언자와 왕들, 윗단에는 동방 박사의 경배, 요르단 세례, 심판자로 재림하는 신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 아래쪽에는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형, 위쪽에는 성 펠릭스와 나르보르가 월계관을 받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90]
쾰른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은 필립 폰 하인스베르크 대주교(1167년~1191년 재임)가 의뢰하고 니콜라스 오브 베르던이 1190년에 제작한 ''동방 박사 유해함''이다. 이 유해함에는 동방 박사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지며, 1164년 밀라노 정복 당시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가 획득했다. 청동과 은으로 만들어진 유해함은 금박, 건축적 디테일, 형상 조각, 에나멜, 보석으로 장식된 바실리카 교회 형태의 대형 유물함이다. 1864년 개봉 당시 뼈와 의복이 발견되었다.
3. 3. 2. 내진 의자
1308년에서 1311년에 제작된 후기 중세 양식의 내진 의자는 독일에서 가장 많은 104개의 좌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에서 가장 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금으로 도금된 동방 박사의 성물함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교황과 황제를 비롯한 주요 사회 계층 인물들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이다.[134]1332년에서 1340년에는 내진 의자에 21개의 작품이 그려져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전해진다. 남쪽 내진 의자에 그려진 7개의 작품은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밀라노에서 가져온 동방 박사 유물함의 소유자로서 쾰른의 자부심을 나타낸다.[135]
3. 3. 3. 제대
쾰른 대성당의 중앙 제대는 1322년 9월 27일에 축성되었으며,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총 넓이는 9.58m2로, 중세 시대 기독교 제대 중 가장 크고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이다. 제단의 양 옆면은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되었고, 앞면에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이 새겨져 있다. 양 옆에는 6개씩 아치가 있는데, 각 아치마다 12사도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136]클라라 제대는 1350년에서 1360년 사이에 날개 제단 형태로 제작되었다. 원래 쾰른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 클라라 성당에 있었다가 181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금으로 세공된 날개 제단 부분은 3단으로 열리며, 모두 펼치면 길이가 6미터에 달한다.[90] 평소에는 닫혀 있지만, 성녀 클라라 축일에는 열어둔다.
아길롤푸스 제단은 1521년 네덜란드 안트베르펜에서 제작되었으며, 원래는 성 마리아 앗 그라두스 성당 소유였다.[90]

1322년에 설치된 고제단은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약 4.57m 길이의 단단한 석판이 상단을 형성한다. 앞면과 측면은 흰색 대리석 틈새로 덮여 있고, 그 안에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이 조각되어 있다.[64]
3. 3. 4. 기둥 석상
내진 기둥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예수의 열두 제자를 묘사한 14개의 석상이 장식되어 있다. 이 석상들은 2.15미터 높이로, 1270년과 1280년 사이에 당시 성당 건설 총책임자였던 아놀드에 의해 조성되었다. 석상들을 통해 39개의 서로 다른 의상 무늬를 볼 수 있으며, 독일적인 용모와 몸짓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137]신랑 기둥에도 내진의 석상들과 마찬가지로 12명의 사도들과 예수, 마리아를 묘사한 석상들이 있다. 1322년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 채색된 용결응회암 석상들은 성당 건설 조합에서 제작되었다.
3. 3. 5. 크리스토포로스 입상
크리스토포로스 입상은 1470년경 틸만 판 데어 부르흐가 제작하였다.[90]
3. 3. 6. 바닥 모자이크화
쾰른 대성당 주보랑의 모자이크 바닥화는 총 1300m²에 이른다. 1880년에서 1892년까지 아우구스트 에써바인에 의해 설계되었다. 첫 번째 모자이크 그림은 대성당의 바로 이전 건축양식 모델을 보이고 있는 대주교 힐데볼트를 나타낸다.[90]3. 3. 7. 종
쾰른 대성당에는 총 11개의 종이 있으며, 이 중 4개는 중세 시대부터 존재한다. 1418년에 주조되어 1437년에 설치된 3.8톤의 '드라이쾨니히스글로케'(Dreikönigsglocke, "세 왕의 종")가 첫 번째 종이었으나 1880년에 다시 주조되었다. 10.5톤의 '프레티오사'(Pretiosa)와 5.6톤의 '스페치오사'(Speciosa)는 1448년에 설치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138]19세기 성당 완공이 가까워지면서 종을 추가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빌헬름 2세는 1870~1871년 사이에 포획한 프랑스산 청동 대포를 기증했다.[139] 1872년 5월 11일, 대포 22개 조각이 성당 밖에 전시되었다. 1873년 8월 19일 안드레아스 함은 이를 녹여 27톤짜리 종을 만들었으나 소리가 조화롭지 않아 같은 해 11월 13일에 다시 주조했다. 성당 건설 조합은 이 종도 만족하지 못했다. 1874년 10월 3일 세 번째 주조를 거쳐 1875년 5월 13일 쾰른으로 옮겨져 성당에 설치된 '황제의 종'(Kaiserglocke)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18년에 철거되었다.[139]
24톤의 '성 베드로의 종'(St. Petersglocke, 쾰른어로 "Decke Pitterksh" 또는 "Dicker Pitter")은 1922년에 주조되었으며[140], 진자 운동을 하는 서양식 종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었다.[141]


2022년 3월 3일, 유럽 전역의 랜드마크 대성당들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애도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모인 주변 사람들이 연대감을 표하기 위해" 일제히 종을 쳤으며, 쾰른 대성당도 그중 하나였다.[72]
이름 | 번호 | 무게 | 비고 | 주조자 | 연도 |
---|---|---|---|---|---|
성 베드로의 종 (Dicker Pitter) | 1 | 24000kg | C0 | 하인리히 울리히, 아폴다 | 1923 |
프레티오사 | 2 | 10500kg | G1 | 하인리히 브로더만 & 크리스티안 클로이트, 쾰른 | 1448 |
스페치오사 | 3 | 5600kg | A1 | 요하네스 호르켄 데 베첼, 쾰른 | 1449 |
드라이쾨니히스글로케 (세 왕의 종) | 4 | 3800kg | H0 | 헤르만 그로세, 드레스덴 | 1880 |
성 우르술라의 종 (Ursulaglocke) | 5 | 2500kg | C1 | 요셉 베두에, 아헨 | 1862 |
성 요셉의 종 (Josephglocke) | 6 | 2200kg | D2 | 한스 아우구스투스 마크, 아이펠 주조소, 브로크샤이드 | 1998 |
챕터 종 (Kapitelsglocke) | 7 | 1400kg | E2 | 카를 I 오토, 브레멘 | 1911 |
만세 종 (Aveglocke) | 8 | 830kg | G2 | 카를 I 오토, 브레멘 | 1911 |
이름 | 번호 | 무게 | 비고 | 주조자 | 연도 |
---|---|---|---|---|---|
안젤루스글로케 | 9 | 762kg | G♯2 | 미상 | 14세기 |
메트글로케 | 10 | 280kg | B2 | 안토니우스 코벨렌츠, 쾰른 | 1719 |
반들룽스글로케 | 11 | 428kg | E3 | 미상 | 14세기 |
3. 3. 8. 성당 보물 전시관
2000년 10월 21일부터 쾰른 대성당의 유물들은 성당 북쪽 지하에 있는 성당 보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관은 13세기에 지어진 구조물을 개조한 것이다.쾰른 성당 보물 전시관은 어두운 청동으로 만들어진 입구 건물을 통해 들어갈 수 있으며, 지하 3층, 총 6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의 총 면적은 500m²이며, 4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귀중한 종교적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대성당의 보물 중에는 동방 박사 유해함과 게로 십자고상 등이 있다. 동방 박사 유해함은 1190년에 니콜라스 오브 베르던이 제작한 것으로, 동방 박사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게로 십자고상은 960년경 게로 대주교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알프스 산맥 북쪽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십자가이다.[65][66]
3. 3. 9. 오르간
쾰른 대성당에는 두 대의 오르간이 있다. 이 오르간들은 독일 본에 있는 요하네스 클라이스 공방에서 제작되었다.[143]1948년, 전쟁 이후 교차랑 북동쪽 모서리에 오르간이 설치되었다.[143] 이 오르간은 북쪽 익랑의 동쪽 벽면에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고딕 성당에서는 보기 드문 위치이다. 1948년에 오르간이 봉헌되었을 당시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신랑을 복원하는 작업이 1956년까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내진과 대제대에서의 미사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1956년 이후 이 오르간은 확장되어 오늘날에는 88개의 음전으로 구성된 전기기압식 오르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8년에는 익랑 오르간만으로는 음량이 충분하지 않아 새로운 제비집 오르간이 신랑 북쪽 벽면 위에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고딕 성당에서 오르간이 주로 위치하는 자리이다.[69]
쾰른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는 요제프 짐머만, 클레멘스 간츠(1985–2001), 빈프리트 뵈니히(2001) 등이 있다.
3. 3. 10. 묘비

쾰른 대성당은 쾰른 대교구장들의 마지막 안식처이다. 대성당 내부와 아래에 매장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
게로 |
라이날트 폰 다셀 |
필립 1세 폰 하이젠베르크 |
엥엘베르트 1세 |
콘라드 폰 호흐슈탄트 |
이르밍가르트 폰 쥐흐텔른 |
발라름 폰 율리히 |
빌헬름 폰 게넵 |
엥엘베르트 3세 폰 데어 마르크 |
프리드리히 3세 폰 자르베르덴 |
디트리히 2세 폰 묄스 |
헤르만 4세 폰 헤센 |
필립 2세 폰 다운 |
아돌프 3세 폰 샤움부르크 |
안톤 폰 샤움부르크 |
페르디난트 아우구스트 폰 슈피겔 |
요한네스 폰 가이셀 |
파울루스 멜커스 |
필립 크레멘츠 |
휴베르트 테오필 지마르 |
안톤 피셔 |
펠릭스 폰 하르트만 |
카를 요셉 슐테 |
요셉 프링스 |
요셉 회프너 |
쾰른 대성당에 매장된 사람 중 비종교인은 아른스베르크의 마지막 백작이었던 고트프리드 4세(1318~1368)가 유일하다.
3. 4. 조명
2008년 10월부터 컴퓨터로 자동 조정되는 내부 및 외부 조명이 가동되었다. 80개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능을 통하여 다양한 조명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1000여 개에 달하는 조명 기구로 밤을 밝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밝기를 통하여 여러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성당 건설 조합은 약 1200000EUR에 달하는 유지비를 조명 운영에 사용하고 있다.[144]4. 법적 소유주
현재 쾰른 대성당 건물은 법적으로 공영 법인인 ‘Hohe Domkirche zu Köln’(호에 돔키르헤 추 쾰른)의 소유이다. 대표 기관을 따로 소유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주교좌 성당 참사회를 맡고 있다. 주교좌 성당 참사회는 Hohe Domkirche zu Köln를 대리하며 교회 법을 대표한다. 주교좌 성당 참사회는 16명의 주교좌 성당 참사 회원과 교구장,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 2명의 지도자로 구성된다.[145]
쾰른 대성당의 유지비는 1년에 약 1000만유로에 달하며, 이 중 3분의 2는 보수 및 유지 활동에 사용된다. 유지비의 대부분은 성당 복권 판매 소득에서 나온다. 쾰른 대성당과 관련된 모든 직장은 대성당의 행정 관청에서 관리된다.
쾰른 대성당 유지 관리 비용의 약 60%는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독일 연방 정부와 지방 주, 교회가 부담한다.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쾰른 대교구에 속하지 않는 초당파·초교파 독립 조직이다. 대규모 보수 공사가 발생해도 비용 대부분을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가 부담하므로 가톨릭 교회 부담은 크지 않다. 따라서 현재 쾰른 대성당은 공공 건축물로서 성격이 강하다.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는 1840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칙허를 받아 대성당 건설을 위한 공법인으로 설립되었다. 1842년부터 1880년까지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는 대성당 건축 비용의 약 75%에 해당하는 약 6,500만 탈러 (, 현재 화폐 가치로 11억유로 상당)를 부담했다.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란트 지방을 병합하면서 쾰른은 세속화되었고, 쾰른 대성당 관리도 로마 가톨릭 교회 쾰른 대교구에서 프로이센 왕국으로 이관되었다. 쾰른 대성당 건축 재개도 프로이센 국왕의 재가로 이루어졌으며, 쾰른 대성당은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을 상징하는 건물로 변화했다. 쾰른 대성당 중앙 건축 협회 관련 정령은 현재 독일에서도 유효하며, 쾰른 대성당에 관한 프로이센 왕국의 역할은 독일 연방 정부가 계승하고 있다.
5. 통계
항목 | 값 |
---|---|
총 길이 | 144.58m |
총 폭 | 86.25m |
신랑 전면부의 폭 | 39.95m |
주랑 내부의 폭 | 45.19m |
서쪽 전면부의 폭 | 61.54m |
북쪽 탑의 높이 | 157.38m |
남쪽 탑의 높이 | 157.32m |
탑 꼭대기까지 계단의 개수 | 533 개 |
알려진 종의 개수 | 11 개 |
가장 큰 종 | 지름 3.22m, 무게 24ton |
신랑 전면부의 높이 | 69.95m |
지붕의 높이 | 109m |
지붕 마루의 높이 | 61.1m |
신랑의 높이 | 43.35m |
측랑의 높이 | 19.8m |
성당 상부 구조의 총 넓이 | 7914m2 |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총 넓이 | 10000m2 |
성당 지붕의 총 넓이 | 12000m2 |
서쪽 전면부의 총 넓이 | 7000m2 |
성당 건축에 사용된 석재의 총 무게 | 300000ton |
좌석 개수 | 약 1200 개 |
입석 개수 | 약 2800 개 |
연간 유지 비용 | 1000만유로 (127.786억원) |
6. 성당 주변
독일의 국가적, 민족적 문화유산인 쾰른 대성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19세기에 주변의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광장과 녹지를 조성했다. 성당 주변은 발굴, 교통, 쾰른 중앙역 문제 등으로 비판을 받아왔으며, 새로운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146]
과거 대성당 안뜰이 있던 남쪽에는 1824년에 호텔과 주택들이 철거되고 광장과 새 호텔이 들어섰다. 서쪽 정면 앞에는 작은 광장과 새로운 거리가 조성되었다. 북쪽 대지는 로마 제국 성벽이 있던 자리로, 주변보다 낮아 구시가지와 연결되지 못했다. 이 곳은 '구시가지의 모서리'로 불렸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부각되었다. 프로이센 왕가는 기차 여행 중 '문화 유산' 옆에서 내리길 원해 중앙역이 건설되었고, 1894년 중앙역 확장과 함께 북쪽 지대에 중앙역 광장이 건설되었다. 동쪽 언덕은 평탄화되었고, 20세기에 호텔이 철거되었다.[146]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면서 대성당 동쪽은 완전히 정리되어 라인강변과 연결되었다. 정리된 지역은 녹지와 확장된 중앙역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1968년, 쾰른 출신 프리츠 샬러의 설계를 바탕으로 현재 쾰른 대성당 주변 지대가 조성되었다. 이는 19세기 이후 쾰른 구시가지와 대성당 주변의 교통 문제 등을 해결하는 훌륭한 해답이 되었다. 서쪽 정면 광장 맞은편에는 대성당 포룸이 있는 유리 건물이 건설되었고, 지하에는 로마 성벽 일부와 성당 주차장이 들어섰다.[146]
서쪽 정면 광장 맞은편에는 대성당 크기를 실감하게 하기 위해 탑 꼭대기에 놓인 장미석의 실제 크기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남쪽 광장에는 로마-게르만 박물관, 동쪽에는 루트비히 박물관과 쾰른 필하모닉 공연장이 있다.
도이치반의 쾰른 중앙역 앞에 위치한다. 열차로 쾰른에 접근할 때 차창에서 보이는 쾰른 대성당은 매우 아름답다. 동역에서 열차 정차 중 성당을 올려다보면, 가까운 거리와 역 지붕 때문에 성당 상부가 보이지 않지만, 성당 하부의 웅장함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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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08]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09]
간행물
Koelhoffsche Chronik: Chron. d. deutschen Städte XIII
[110]
간행물
Der Dom zu Köln
[111]
서적
Der Kölner Dom
2003
[112]
웹사이트
Dom-Kran
http://www.koelner-d[...]
2012-01-12
[113]
서적
The Gothic Cathedral
1969
[114]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15]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16]
기타
[117]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18]
간행물
Notizen über den Betrieb die mechanischen Einrichtungen u. die Geschäftsführung beim Dombau in Coeln
Köln
2008
[119]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2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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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22]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23]
웹사이트
Steine des Kölner Doms - ...
http://www.baufachin[...]
1972
[124]
뉴스
Interview mit Arnold Wolff
Kölner Stadtanzeiger
1998-08-12
[125]
학위논문
Monate im Dunkeln
1955
[126]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27]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28]
웹사이트
40 Jahre Fremde Heimat. Materialsammlung
http://www.domit.de/[...]
DOMiT
2009-09-04
[129]
뉴스
라인강 명물 쾰른대성당, 세계문화유산 제외되나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6-07-07
[130]
웹사이트
Kölner Dom von der Roten Liste gestrichen
http://www.unesco.de[...]
UNESCO
2014-08-11
[131]
서적
Borger
[132]
웹사이트
Dombau Köln: Neues Südquerhausfenster
http://www.dombau-ko[...]
2008-12-26
[133]
뉴스
Pixelated Stained Glass
http://www.nytimes.c[...]
The New York Times
2007-12-09
[134]
서적
Borger
[135]
서적
Borger
[136]
서적
Borger
[137]
서적
Borger
[138]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39]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40]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41]
문서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은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세계 평화의 종’이지만 꼭대기를 중심으로 진자 운동을 하기보단 무게 중심이 회전하여 타종하는 방식이다.
[142]
뉴스
Das deutsche Denkmal bröselt
http://www.spiegel.d[...]
Der Spiegel
1998-08-10
[143]
서적
Arnold Wolff, Toni Diederich (Hrsg.)
1990
[144]
간행물
Aus dem Dunkeln ins Licht – Neue Beleuchtung des Doms vorgestellt
Kirchenzeitung für das Erzbistum Köln
2008-10-17
[145]
웹인용
쾰른 대성당 공식 홈페이지
https://web.archive.[...]
2010-06-12
[146]
서적
Köln: zwei Jahrtausende, Geschichte, Kunst und Kultur am Rhein
DuMont Reiseverlag
1998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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