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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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간군은 중국의 옛 행정 구역으로, 진나라 때부터 수나라 때까지 존재했다. 진나라 때는 하간태수, 한나라 때는 하간군으로 불렸으며, 설치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전한 시기에는 조나라의 일부였으나, 하간문왕 유벽강에게 하사되어 하간국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하간국은 하간군, 하간국으로 명칭이 바뀌며 존속하다가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 하간 지역은 여러 왕조를 거치며 하간군, 하간국, 영주 등으로 불렸으며, 후한, 위, 서진, 북위, 수나라 시기에도 중요한 지역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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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군은 중국의 행정 구역으로, 진나라의 제북군을 전신으로 하여 전한 시대에 설치되어 예주에 속했으며, 후한, 서진, 남조 송, 북위 시대를 거치며 관할 현의 변화와 명칭 변경을 겪다가 북제 시대에 동평군으로 개칭되었다.
2. 진
“하간태수”(河間太守), “하간위인”(河間尉印) 등의 봉니가 출토되어 진나라 당시 이미 하간군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보인다.[16] 설치 시기와 관련해서는 왕국유와 후효영의 주장이 대립한다. 치소는 불명확한데, 한대 하간국의 서울인 악성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6]
2. 1. 설치 시기 논란
“하간태수”(河間太守), “하간위인”(河間尉印) 등이 써진 봉니가 출토되어 진나라 당시 이미 하간군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보인다.[16] 왕국유는 《진군고》에서 진나라가 조나라의 하간 땅을 취한 기사들을 모아 조나라가 망하기 전 하간군이 설치됐다고 했으나, 후효영은 이 하간 땅은 여불위의 봉지이지 군이 아니라며 실제 하간군은 진나라의 통일 이후 지나치게 큰 거록군을 쪼개어서 설치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치소는 불명확한데, 한대의 하간국의 서울인 악성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6] 문헌과 출토자료에서 확인되는 현은 다음과 같다.[17]
2. 2. 속현
문헌과 출토자료에서 확인되는 현은 다음과 같다.[17]
기원전 203년 고제 4년에 장이가 조왕이 되고 조국이 설치되었다.[5] 기원전 198년 고제 9년에 대왕 유여의가 조왕이 되었다.[6] 기원전 178년 문제 2년에 유벽강이 하간왕이 되어 조국에서 '''하간국'''이 분할 설치되었다.[7] 전한의 하간국은 기주에 속했으며, 낙성, 후정, 무수, 궁고의 4현을 관할했다. 왕망 때 삭정군으로 개칭되었다.[8]
3. 전한
3. 1. 하간군
응소는 두 강[河] 사이에 있어서 하간이라 이름했다고 했고, 하작은 그 두 강은 호지하와 호지별하라고 했다.[21] 고제 10년(기원전 197년) 진희의 난 전에 이미 조연(趙衍)과 장상여가 하간수를 서로 이어받았으므로 그 전에는 이미 존재했다. 주진학은 고제 9년(기원전 198년) 장오가 조나라 왕에서 쫓겨나고 유여의가 그를 대신하기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했다. 이 군은 연나라와 접경하고 있는데, 연나라에서 나중에 갈려나오는 탁군의 속현인 여오현(蠡吾-)[18]과 중수현(中水-)[19]이 원래 이 군에 속했으므로 이 일대의 고양(高陽)·무원(武垣)·중수·요양(饒陽)·여오·안평(安平) 등이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연나라 일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문제 2년(기원전 178년), 조나라에서 분할돼 조나라 왕 유수의 아우 하간문왕 유벽강을 왕으로 모시는 하간나라의 봉토가 됐다. 하간애왕 원년(기원전 165년), 애왕이 후사 없이 죽어 왕국은 폐해지고 그 영역은 하간군·발해군·광천군으로 분할됐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 경제의 아들 하간헌왕을 왕으로 삼아 부활했다.[20]
기주자사부에 속했다.[2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45,043호, 187,662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21][22]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4현이다. 서울은 악성현이다.
다음은 하간왕국에서 갈려나온 왕자후국으로, 총 25국이다. 이 중 한서 지리지의 현황으로 추측되는 원연·수화지간(기원전 8년) 이후 봉해진 후국이 6국이다.[23][24][25]
그 중 왕자후 본인이 아닌 왕자후의 후손으로서 조상과는 다른 지역에 봉해진 후가 하나 있다.
초기 한나라 시대에 하간은 조왕국의 일부였다. 이 왕국은 기원전 178년에 조 유왕(趙幽王) 유우의 아들이자 조왕 유수의 형제인 유벽강에게 수여되면서 만들어졌다. 벽강이 사망한 후, 그 영토는 그의 아들 유복에게 넘어갔다. 유복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국은 해체되었다.[1]
기원전 155년, 경제는 그의 셋째 아들 유덕에게 하간왕의 작위를 수여했다. 덕의 후손들은 전한 말기까지 이 작위를 유지했다.[1] 왕국은 광무제 통치 기간 동안 잠시 부활했다.[2]
90년, 장제는 낙성군, 발해군, 탁군 군의 영토에 하간을 재건했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인 유개가 하간왕이 되었다. 개의 혈통은 조위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하간을 유지했다. 환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실의 이 분파 출신이었다.[3]
하간은 조위 시대에 군이 되었다. 초기 서진 시대에 하간은 사마의의 형제인 사마용의 봉토가 되었다.
140년, 이 왕국은 낙성(樂成), 궁고(弓高), 역(易), 무원(武垣), 중수(中水), 모(鄚), 고양(高陽), 문안(文安), 속주(束州), 성평(成平), 동평서(東平舒) 등 11개 현을 관할했다. 총 인구는 634,421명, 가구 수는 93,754호였다.[4]
기원전 203년(고제 4년), 장이가 조왕이 되고, 조국이 설치되었다.[5] 기원전 198년(고제 9년), 대왕 유여의가 조왕이 되었다.[6] 기원전 178년(문제 2년), 유벽강이 하간왕이 되어, 조국에서 '''하간국'''이 분할 설치되었다.[7] 전한의 하간국은 기주에 속했으며, 낙성, 후정, 무수, 궁고의 4현을 관할했다. 왕망 때, 삭정군으로 개칭되었다.[8]
후한이 건국되자,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31년(건무 7년), 유소가 하간왕이 되어 하간국으로 개칭되었다. 37년(건무 13년), 하간왕 유소가 낙성후로 강등되어[9], 하간국은 폐지되고, 그 지역은 신도군에 편입되었다. 90년(영원 2년), 유개가 하간왕이 되자, 다시 하간국이 설치되었다.[10] 후한의 하간국은 낙성, 궁고, 역, 무원, 중수, 모, 고양, 문안, 속주, 성평, 동평서의 11현을 관할했다.[11]
진나라 때, 하간국은 낙성, 무원, 모, 역성, 중수, 성평의 6현을 관할했다.[12]
북위 초년에 하간군은 정주에 속했다. 487년(태화 11년), 영주가 정주에서 분할되어 세워지자, 하간군은 영주로 전속되었다. 북위의 하간군은 무원, 낙성, 중수, 모의 4현을 관할했다.[13]
583년(개황 3년), 수나라가 군제를 폐지하자, 하간군은 폐지되어 영주에 편입되었다. 607년(대업 3년)에 주가 폐지되고 군이 설치되자,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하간군은 하간, 문안, 낙수, 속성, 경성, 고양, 모, 박야, 청원, 장로, 평서, 노성, 요양의 13현을 관할했다.[14]
621년(무덕 4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멸망시키자,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었다. 742년(천보 원년),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758년(건원 원년),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어, 하간군의 명칭은 사라졌다.[15]
3. 2. 하간국
응소는 두 강[河] 사이에 있어서 하간이라 이름했다고 했고, 하작은 그 두 강은 호지하와 호지별하라고 했다.[21] 기원전 197년 진희의 난 전에 이미 조연(趙衍)과 장상여가 하간수를 서로 이어받았으므로 그 전에는 이미 존재했다. 주진학은 고제 9년(기원전 198년) 장오가 조나라 왕에서 쫓겨나고 유여의가 그를 대신하기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했다. 이 군은 연나라와 접경하고 있는데, 연나라에서 나중에 갈려나오는 탁군의 속현인 여오현(蠡吾-)[18]과 중수현(中水-)[19]이 원래 이 군에 속했으므로 이 일대의 고양(高陽)·무원(武垣)·중수·요양(饒陽)·여오·안평(安平) 등이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연나라 일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문제 2년(기원전 178년), 조나라에서 분할돼 조나라 왕 유수의 아우 하간문왕 유벽강을 왕으로 모시는 하간나라의 봉토가 됐다. 하간애왕 원년(기원전 165년), 애왕이 후사 없이 죽어 왕국은 폐해지고 그 영역은 하간군·발해군·광천군으로 분할됐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 경제의 아들 하간헌왕을 왕으로 삼아 부활했다.[20]
기주자사부에 속했다.[2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45,043호, 187,662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21][22]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4현이다. 서울은 악성현이다.
다음은 하간왕국에서 갈려나온 왕자후국으로, 총 25국이다. 이 중 한서 지리지의 현황으로 추측되는 원연·수화지간(기원전 8년) 이후 봉해진 후국이 6국이다.[23][24][25]
그 중 왕자후 본인이 아닌 왕자후의 후손으로서 조상과는 다른 지역에 봉해진 후가 하나 있다.
초기 한나라 시대에 하간은 조왕국의 일부였다. 이 왕국은 기원전 178년에 조 유왕(趙幽王) 유우의 아들이자 조왕 유수의 형제인 유벽강에게 수여되면서 만들어졌다. 벽강이 사망한 후, 그 영토는 그의 아들 유복에게 넘어갔다. 유복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국은 해체되었다.[1]
기원전 155년, 경제는 그의 셋째 아들 유덕에게 하간왕의 작위를 수여했다. 덕의 후손들은 전한 말기까지 이 작위를 유지했다.[1] 왕국은 광무제 통치 기간 동안 잠시 부활했다.[2]
90년, 장제는 낙성군, 발해군, 탁군 군의 영토에 하간을 재건했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인 유개가 하간왕이 되었다. 개의 혈통은 조위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하간을 유지했다. 환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실의 이 분파 출신이었다.[3]
하간은 조위 시대에 군이 되었다. 초기 서진 시대에 하간은 사마의의 형제인 사마용의 봉토가 되었다.
140년, 이 왕국은 낙성(樂成), 궁고(弓高), 역(易), 무원(武垣), 중수(中水), 모(鄚), 고양(高陽), 문안(文安), 속주(束州), 성평(成平), 동평서(東平舒) 등 11개 현을 관할했다. 총 인구는 634,421명, 가구 수는 93,754호였다.[4]
- 유벽강(劉辟疆), 하간문왕(河閒文王), 기원전 178년–기원전 165년
- 유복(劉福), 하간애왕(河閒哀王), 기원전 165년–기원전 164년
- 유덕(劉德), 하간헌왕(河閒獻王), 기원전 155년–기원전 129년
- 유부주(劉不周), 하간공왕(河閒共王), 기원전 129년–기원전 125년
- 유기(劉基), 하간강왕(河閒剛王), 기원전 125년–기원전 113년
- 유환(劉緩), 하간경왕(河閒頃王), 기원전 113년–기원전 97년
- 유경(劉慶), 하간효왕(河閒孝王), 기원전 97년–기원전 54년
- 유원(劉元), 기원전 54년–기원전 37년
- 유량(劉良), 하간혜왕(河閒惠王), 기원전 32년–기원전 5년
- 유상(劉尚), 기원전 5년 – 서기 9년
- 유소(劉劭), 32–37
- 유개(劉開), 하간효왕(河閒孝王), 90–132
- 유정(劉政), 하간혜왕(河閒惠王), 132–142
- 유건(劉建), 하간정왕(河閒貞王), 142–152
- 유리(劉利), 하간안왕(河閒安王), 152–180
- 유개(劉陔), 180–221
기원전 203년(고제 4년), 장이가 조왕이 되고, 조국이 설치되었다[5] . 기원전 198년(고제 9년), 대왕 유여의가 조왕이 되었다[6] . 기원전 178년(문제 2년), 유벽강이 하간왕이 되어, 조국에서 '''하간국'''이 분할 설치되었다[7] . 전한의 하간국은 기주에 속했으며, 낙성, 후정, 무수, 궁고의 4현을 관할했다. 왕망 때, 삭정군으로 개칭되었다[8] .
후한이 건국되자,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31년(건무 7년), 유소가 하간왕이 되어 하간국으로 개칭되었다. 37년(건무 13년), 하간왕 유소가 낙성후로 강등되어[9], 하간국은 폐지되고, 그 지역은 신도군에 편입되었다. 90년(영원 2년), 유개가 하간왕이 되자, 다시 하간국이 설치되었다[10] . 후한의 하간국은 낙성, 궁고, 역, 무원, 중수, 모, 고양, 문안, 속주, 성평, 동평서의 11현을 관할했다[11] .
진나라 때, 하간국은 낙성, 무원, 모, 역성, 중수, 성평의 6현을 관할했다[12] .
북위 초년에 하간군은 정주에 속했다. 487년(태화 11년), 영주가 정주에서 분할되어 세워지자, 하간군은 영주로 전속되었다. 북위의 하간군은 무원, 낙성, 중수, 모의 4현을 관할했다[13] .
583년(개황 3년), 수나라가 군제를 폐지하자, 하간군은 폐지되어 영주에 편입되었다. 607년(대업 3년)에 주가 폐지되고 군이 설치되자,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하간군은 하간, 문안, 낙수, 속성, 경성, 고양, 모, 박야, 청원, 장로, 평서, 노성, 요양의 13현을 관할했다[14] .
621년(무덕 4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멸망시키자,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었다. 742년(천보 원년),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758년(건원 원년),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어, 하간군의 명칭은 사라졌다[15] .
3. 3. 속현 (하간군/국)
응소는 두 강(河) 사이에 있어서 하간이라 이름했다고 했고, 하작은 그 두 강은 호지하와 호지별하라고 했다.[21] 고제 10년(기원전 197년) 진희의 난 전에 이미 조연(趙衍)과 장상여가 하간수를 서로 이어받았으므로 그 전에는 이미 존재했다. 주진학은 고제 9년(기원전 198년) 장오가 조나라 왕에서 쫓겨나고 유여의가 그를 대신하기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했다. 이 군은 연나라와 접경하고 있는데, 연나라에서 나중에 갈려나오는 탁군의 속현인 여오현(蠡吾-)[18]과 중수현(中水-)[19]이 원래 이 군에 속했으므로 이 일대의 고양(高陽)·무원(武垣)·중수·요양(饒陽)·여오·안평(安平) 등이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연나라 일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문제 2년(기원전 178년), 조나라에서 분할돼 조나라 왕 유수의 아우 하간문왕 유벽강을 왕으로 모시는 하간나라의 봉토가 됐다. 하간애왕 원년(기원전 165년), 애왕이 후사 없이 죽어 왕국은 폐해지고 그 영역은 하간군·발해군·광천군으로 분할됐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 경제의 아들 하간헌왕을 왕으로 삼아 부활했다.[20]
기주자사부에 속했다.[2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45,043호, 187,662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21][22]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4현이다. 서울은 악성현이다.
다음은 하간왕국에서 갈려나온 왕자후국으로, 총 25국이다. 이 중 《한서》 지리지의 현황으로 추측되는 원연·수화지간(기원전 8년) 이후 봉해진 후국이 6국이다.[23][24][25]
그 중 왕자후 본인이 아닌 왕자후의 후손으로서 조상과는 다른 지역에 봉해진 후가 하나 있다.
3. 4. 하간국에서 분봉된 왕자후국
응소는 두 강[河] 사이에 있어서 하간이라 이름했다고 했고, 하작은 그 두 강은 호지하와 호지별하라고 했다.[21]하간왕국에서 갈려나온 왕자후국은 총 25국이다. 이 중 《한서》 지리지의 현황으로 추측되는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이후 봉해진 후국이 6국이다.[23][24][25]
왕자후 본인이 아닌 왕자후의 후손으로서 조상과는 다른 지역에 봉해진 후가 하나 있다.
4. 신
5. 후한
후한이 건국되자, 하간군은 하간국으로 개칭되었다. 31년(건무 7년), 유소가 하간왕이 되었다.[9] 37년(건무 13년), 유소가 낙성후로 강등되면서 하간국은 폐지되고 신도군에 편입되었다.[10]
90년(영원 2년), 장제는 유개를 하간왕으로 봉하여 하간국을 다시 설치했다.[3] 유개의 혈통은 조위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하간을 유지했다. 환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이 분파 출신이었다.
5. 1. 하간국
광무제가 한나라를 재건한 뒤 일시적으로 신도군에 통폐합시켰다가 90년(영원 2년)에 '''하간국(河間國)'''으로 복구시켰다. 낙양에서 북쪽으로 2,500리 거리에 있으며 11개 현, 93,754호, 634,421명을 거느렸다. 후정현은 폐지되었고 무수현은 안평국으로 이관되었다.[28]
기원전 203년(고제 4년), 장이가 조왕이 되고, 조국이 설치되었다.[5] 기원전 198년(고제 9년), 대왕 유여의가 조왕이 되었다.[6] 기원전 178년(문제 2년), 유벽강이 하간왕이 되어, 조국에서 '''하간국'''이 분할 설치되었다.[7] 전한의 하간국은 기주에 속했으며, 낙성, 후정, 무수, 궁고의 4현을 관할했다. 왕망 때, 삭정군으로 개칭되었다.[8]
초기 한나라 시대에 하간은 조왕국의 일부였다. 이 왕국은 기원전 178년에 조 유왕(趙幽王) 유우의 아들이자 조왕 유수의 형제인 유벽강에게 수여되면서 만들어졌다. 유벽강이 사망한 후, 그 영토는 그의 아들 유복에게 넘어갔다. 유복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국은 해체되었다.[1]
기원전 155년, 경제는 그의 셋째 아들 유덕에게 하간왕의 작위를 수여했다. 유덕의 후손들은 전한 말기까지 이 작위를 유지했다.[1] 왕국은 광무제 통치 기간 동안 잠시 부활했다.[2]
90년(장제 2년), 장제는 낙성군, 발해군, 탁군 군의 영토에 하간을 재건했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인 유개가 하간왕이 되었다. 유개의 혈통은 조위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하간을 유지했다. 환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실의 이 분파 출신이었다.[3]
후한이 건국되자,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31년(건무 7년), 유소가 하간왕이 되어 하간국으로 개칭되었다. 37년(건무 13년), 하간왕 유소가 낙성후로 강등되어[9], 하간국은 폐지되고, 그 지역은 신도군에 편입되었다. 90년(영원 2년), 유개가 하간왕이 되자, 다시 하간국이 설치되었다.[10] 후한의 하간국은 낙성, 궁고, 역, 무원, 중수, 모, 고양, 문안, 속주, 성평, 동평서의 11현을 관할했다.[11]
하간은 조위 시대에 군이 되었다. 초기 서진 시대에 하간은 사마의의 형제인 사마용의 봉토가 되었다.
140년, 하간국은 낙성(樂成), 궁고(弓高), 역(易), 무원(武垣), 중수(中水), 모(鄚), 고양(高陽), 문안(文安), 속주(束州), 성평(成平), 동평서(東平舒) 등 11개 현을 관할했다. 총 인구는 634,421명, 가구 수는 93,754호였다.[4]
진나라 때, 하간국은 낙성, 무원, 모, 역성, 중수, 성평의 6현을 관할했다.[12]
북위 초년에 하간군은 정주에 속했다. 487년(태화 11년), 영주가 정주에서 분할되어 세워지자, 하간군은 영주로 전속되었다. 북위의 하간군은 무원, 낙성, 중수, 모의 4현을 관할했다.[13]
583년(개황 3년), 수나라가 군제를 폐지하자, 하간군은 폐지되어 영주에 편입되었다. 607년(대업 3년)에 주가 폐지되고 군이 설치되자,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하간군은 하간, 문안, 낙수, 속성, 경성, 고양, 모, 박야, 청원, 장로, 평서, 노성, 요양의 13현을 관할했다.[14]
621년(무덕 4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멸망시키자,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었다. 742년(천보 원년),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758년(건원 원년),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어, 하간군의 명칭은 사라졌다.[15]
역대 하간왕은 다음과 같다.
5. 2. 속현
河間國중국어은 후한 90년(영원 2년)에 신도군에서 분리, 복구 설치되었다. 낙양에서 북쪽으로 2,500리 거리에 있었으며 11개 현, 93,754호, 634,421명을 거느렸다. 후정현은 폐지되었고 무수현은 안평국으로 이관되었다.[28]
6. 위진
211년(건안 16년) '''전은(田銀)'''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선비족의 대인이었던 가비능이 이를 진압했다.[29]
222년(황초 3년)에서 224년(황초 5년)까지 일시적으로 국으로 복구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격하되었다. 253년(가평 5년)부터 265년(태시 원년)까지 폐지된 장무군의 일부 속현을 본군에 내속시켰다. 265년 국으로 다시 격상되었다가 277년 군으로 격하되었다.
6. 1. 위
211년(건안 16년) '''전은(田銀)'''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선비족의 대인이었던 가비능이 이를 진압했다.[29]222년(황초 3년)에서 224년(황초 5년)까지 일시적으로 국으로 복구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격하되었다. 253년(가평 5년)부터 265년(태시 원년)까지 폐지된 장무군의 일부 속현을 본군에 내속시켰다. 265년 국으로 다시 격상되었다가 277년 군으로 격하되었다. 서진 시기 하간군은 6현 2,7000호를 거느리고 있었다.[30]
초기 한나라 시대에 하간은 조왕국의 일부였다. 이 왕국은 기원전 178년에 조 유왕(趙幽王) 유우의 아들이자 조왕 유수의 형제인 유벽강에게 수여되면서 만들어졌다. 유벽강이 사망한 후, 그 영토는 그의 아들 유복에게 넘어갔다. 유복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국은 해체되었다.[1]
기원전 155년, 경제는 그의 셋째 아들 유덕에게 하간왕의 작위를 수여했다. 유덕의 후손들은 전한 말기까지 이 작위를 유지했다.[1] 왕국은 광무제 통치 기간 동안 잠시 부활했다.[2]
90년, 장제는 낙성군, 발해군, 탁군 군의 영토에 하간을 재건했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인 유개가 하간왕이 되었다. 유개의 혈통은 조위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하간을 유지했다. 환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실의 이 분파 출신이었다.[3]
하간은 조위 시대에 군이 되었다. 초기 서진 시대에 하간은 사마의의 형제인 사마용의 봉토가 되었다.
140년, 이 왕국은 낙성(樂成), 궁고(弓高), 역(易), 무원(武垣), 중수(中水), 모(鄚), 고양(高陽), 문안(文安), 속주(束州), 성평(成平), 동평서(東平舒) 등 11개 현을 관할했다. 총 인구는 634,421명, 가구 수는 93,754호였다.[4]
기원전 203년(고제 4년), 장이가 조왕이 되고, 조국이 설치되었다.[5] 기원전 198년(고제 9년), 대왕 유여의가 조왕이 되었다.[6] 기원전 178년(문제 2년), 유벽강이 하간왕이 되어, 조국에서 '''하간국'''이 분할 설치되었다.[7] 전한의 하간국은 기주에 속했으며, 낙성, 후정, 무수, 궁고의 4현을 관할했다. 왕망 때, 삭정군으로 개칭되었다.[8]
후한이 건국되자,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31년(건무 7년), 유소가 하간왕이 되어 하간국으로 개칭되었다. 37년(건무 13년), 하간왕 유소가 낙성후로 강등되어[9], 하간국은 폐지되고, 그 지역은 신도군에 편입되었다. 90년(영원 2년), 유개가 하간왕이 되자, 다시 하간국이 설치되었다.[10] 후한의 하간국은 낙성, 궁고, 역, 무원, 중수, 모, 고양, 문안, 속주, 성평, 동평서의 11현을 관할했다.[11]
진나라 때, 하간국은 낙성, 무원, 모, 역성, 중수, 성평의 6현을 관할했다.[12]
북위 초년에 하간군은 정주에 속했다. 487년(태화 11년), 영주가 정주에서 분할되어 세워지자, 하간군은 영주로 전속되었다. 북위의 하간군은 무원, 낙성, 중수, 모의 4현을 관할했다.[13]
583년(개황 3년), 수나라가 군제를 폐지하자, 하간군은 폐지되어 영주에 편입되었다. 607년(대업 3년)에 주가 폐지되고 군이 설치되자,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하간군은 하간, 문안, 낙수, 속성, 경성, 고양, 모, 박야, 청원, 장로, 평서, 노성, 요양의 13현을 관할했다.[14]
621년(무덕 4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멸망시키자,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었다. 742년(천보 원년),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758년(건원 원년),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어, 하간군의 명칭은 사라졌다.[15]
6. 2. 서진
211년(건안 16년) '''전은(田銀)'''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선비족의 대인이었던 가비능이 이를 진압했다.[29]222년(황초 3년)에서 224년(황초 5년)까지 일시적으로 국으로 복구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격하되었다. 253년(가평 5년)부터 265년(태시 원년)까지 폐지된 장무군의 일부 속현을 본군에 내속시켰다. 265년 국으로 다시 격상되었다가 277년 군으로 격하되었다. 서진 시기 하간군은 6현 2,7000호를 거느리고 있었다.[30]
초기 서진 시대에 하간은 사마의의 형제인 사마용의 봉토가 되었다.
6. 3. 속현
211년(건안 16년) '''전은(田銀)'''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선비족의 대인이었던 가비능이 이를 진압했다.[29]222년(황초 3년)에서 224년(황초 5년)까지 일시적으로 국으로 복구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격하되었다. 253년(가평 5년)부터 265년(태시 원년)까지 폐지된 장무군의 일부 속현을 본군에 내속시켰다. 265년 국으로 다시 격상되었다가 277년 군으로 격하되었다. 서진 시기 하간군은 6현 27,000호를 거느리고 있었다.[30]
7. 북위
북위 초, 하간군은 정주에 속했다. 487년(태화 11년), 영주가 정주에서 분할되면서 하간군은 영주로 전속되었다.[13] 당시 하간군은 무원, 낙성, 중수, 모의 4개 현을 관할했다.[13]
7. 1. 속현
8. 수
수나라 때 군제가 폐지되고 주현제가 실시되면서 '''영주(瀛州)'''로 불렸다. 607년(대업 3년) 주가 폐지되고 군이 다시 설치되자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14]
8. 1. 속현
주현제가 실시될 때 영주(瀛州)로 불렸으며, 13현 173,883호를 거느렸다.[32]
9. 당
621년(무덕 4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멸망시키자,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었다. 742년(천보 원년), 영주는 하간군으로 개칭되었다. 758년(건원 원년), 하간군은 영주로 개칭되어, 하간군의 명칭은 사라졌다[15] .
참조
[1]
서적
Book of Han
[2]
서적
Book of Later Han
[3]
서적
Book of Later Han
[4]
서적
Book of Later Han
[5]
서적
漢書
[6]
서적
漢書
[7]
서적
漢書
[8]
서적
漢書
[9]
서적
後漢書
[10]
서적
後漢書
[11]
서적
後漢書
[12]
서적
晋書
[13]
서적
魏書
[14]
서적
隋書
[15]
서적
旧唐書
[16]
서적
秦代政区地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09-01-01
[17]
서적
秦代政区地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09-01-01
[18]
서적
한서
[19]
서적
진서·지도기
[20]
서적
西汉政区地理
人民出版社
1987-08
[21]
서적
汉书地理志汇释
安徽教育出版社
2006-06
[22]
서적
한서
[23]
서적
西汉政区地理
人民出版社
1987-08
[24]
서적
한서
[25]
서적
한서
[26]
문서
발해군 성평현(成平-)으로 추정된다.
[27]
문서
이외에 《기수주》(淇水注)에서는 발해군의 천동(千童)으로 주장했다. 주진학은 이를 부정했다.
[28]
서적
《후한서》110권 지 제 20 군국 2 기주 하간국
https://zh.wikisourc[...]
[29]
서적
《삼국지》30권 위서 제30 오환선비동이전 가비능조
https://zh.wikisourc[...]
[30]
서적
《진서》14권 지 제4 지리지 上 기주 하간국
https://zh.wikisourc[...]
[31]
서적
《위서》106권 上 지 제7 지형지 2 上 영주 하간군
https://zh.wikisourc[...]
[32]
서적
《수서》29권 지 제30 지리지 中 기주 하간군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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