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드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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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리드와르는 갠지스강이 평원으로 흘러드는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카필라스타나, 강가드와라, 마야푸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마우리아 제국, 쿠샨 제국, 델리 술탄국, 무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으며, 16세기에 무굴 황제 악바르 시대에는 구리 주화 주조소가 있었다. 하리드와르는 힌두교의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로, 하르 키 파우리, 찬디 데비 사원, 만사 데비 사원, 마야 데비 사원 등 여러 종교 유적이 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하리드와르 구의 인구는 189만 명이며, 힌두교가 다수를 차지한다. 교육 기관으로는 구루쿨 캉그리 대학교, 데브 산스크리티 비슈와비댸라야 등이 있다. 교통은 국도와 철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가까운 공항은 데라둔의 졸리 그랜트 공항이다. 2002년 SIIDCUL이 통합 산업 단지를 설립하면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고 있으며, BHEL을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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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드와르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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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마야푸리 |
유형 | 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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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1868년 (지방 자치 단체) |
행정 구역 | |
주 | 우타라칸드 주 |
지구 | 하리드와르 지구 |
정부 유형 | 시장-시의회 |
통치 기구 | 하리드와르 시립 공사 |
시장 | 아니타 샤르마 (INC) |
시립 위원 | 알로크 쿠마르 판데이, IAS |
지리 | |
면적 | 105 km2 |
해발 고도 | 314 m |
인구 통계 | |
전체 인구 (2011년) | 228,832명 |
수도권 인구 | 231,338명 |
성비 | 남성 1.18 : 여성 1 |
언어 | |
공용어 | 힌디어 |
토착어 | 카리볼리어 |
시간대 | |
시간대 | IST |
UTC 오프셋 | +5:30 |
식별 | |
우편 번호 | 249401 |
전화 코드 | +91-1334 |
차량 등록 번호 | UK-08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하리드와르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하리드와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힌두교와 시크교의 중요한 성지이자 순례지였다.
마우리아 제국과 쿠샨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기원전 17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테라코타 문화가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다.[18] 629년 중국 여행가 현장은 하리드와르를 '모-유-로'라고 기록하고, '강가드바라' 사원을 언급했다.[30]
1206년 델리 술탄국에 편입되었고, 1399년에는 티무르에게 함락되었다.[22] 시크교의 첫 번째 구루 구루 나나크는 1504년 바이사키 날에 하리드와르를 방문하여 '쿠샤와르트 가트'에서 목욕했다.[23][24] 이 방문은 구루드와라 (구루드와라 나나크와라)로 기념된다.
16세기 무굴 제국 시대에는 악바르 황제가 갠지스강 물을 '불멸의 물'이라 칭하며 애용했고,[27] 하리드와르에 구리 주조소를 설치했다. 암베르의 라자 만 싱은 현재 하리드와르 시의 기초를 세우고, 하르 키 파우리 가트를 개조했다.
1840년대에는 갠지스강의 물을 상부 갠지스 운하로 돌리는 빔고다 댐이 건설되어[28] 주변 지역 관개에 기여했지만, 갠지스강의 수량 감소와 내륙 수로로서의 쇠퇴를 야기했다. 1886년에는 철도가 연결되었고,[29] 1901년에는 연합 주의 일부였다.[30]
1960년대 BHEL 설립은 하리드와르 발전에 전환점이 되었다.
2. 1. 고대
산스크리트어와 힌두교 전례 언어에서 하리는 "비슈누"를, ''드바라''는 "관문"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리드와르''는 "비슈누로 가는 관문"으로 해석된다. 순례자들이 바드리아나트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는 곳이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마찬가지로 ''하라''는 "시바"를 의미하여, ''하드와르''는 "시바로 가는 관문"을 뜻할 수 있다.[9] 하드와르는 카일라스 산, 케다르나트 등 순례 여정을 시작하는 일반적인 장소로, 힌두교 신자들이 숭배하는 중요한 곳들이다.전설에 따르면, 갠가 여신이 시바가 머리카락 묶음에서 강력한 강을 풀어냈을 때 하리드와르에 강림했다고 한다. 갠지스강은 간고트리 빙하 가장자리의 고무크에서 253km를 흐른 후, 하리드와르에서 처음으로 갠지스 평원으로 들어서는데, 이로 인해 이 도시는 고대 이름인 간가드와라를 얻게 되었다.
레티샤 엘리자베스 랜던은 그녀의 시 ''허드와르, 힌두 순례지''에 대한 주석에서 이 이름의 유래와 갠지스 강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한다.[10]

경전에서 하리드와르는 카필라스타나, 강가드바라,[11] '''마야푸리'''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된다. 또한, 차르 담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마하바라타의 바나 파르바에서 현자 다우뱌가 유디슈티라에게 인도의 티르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강가드바라(하리드와르)와 칸칼이 언급되었으며,[13] 이 텍스트는 또한 현자 아가스티야가 그의 아내 로파무드라(비다르바의 공주)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고행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14]
현자 카필라는 이곳에 아쉬람(수행 공동체)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에 고대 이름인 카필라 또는 카필라스타나가 부여되었다고 한다.[15]
전설적인 왕 바기라타는 사티아 유가 시대에 수년간 고행을 통해 갠지스강을 하늘에서 가져와 현자 카필라의 저주로부터 6만 명의 선조들을 구원했다고 전해진다.[17] 비슈누는 갠지스강이 항상 닿는 하르 키 파우리 상단 벽에 있는 돌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하리드와르는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2–185년)과 쿠샨 제국(1–3세기경)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 이 지역에 테라코타 문화가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다.[18] 629년 중국 여행가 현장은 하리드와르를 '모-유-로'로 기록했는데, 그 유적은 현대 도시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야푸리에 아직 남아 있다. 유적 중에는 요새와 세 개의 사원이 있으며, 부서진 석조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30][20][21] 그는 또한 '강가드바라'라고 불리는 사원이 '모-유-로' 북쪽에 있었다고 언급했다.[30]
2. 2. 중세
마하바라타의 바나 파르바에서 현자 다우뱌가 유디슈티라에게 인도의 티르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강가드바라, 즉 하리드와르와 칸칼이 언급되었다.[13] 이 텍스트는 또한 현자 아가스티야가 그의 아내 로파무드라(비다르바의 공주)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고행(죄에 대한 슬픔이나 후회를 나타내는 행위)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14]현자 카필라는 이곳에 아쉬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에 고대 이름인 카필라 또는 카필라스타나가 부여되었다고 한다.[15]
전설적인 왕 바기라타는 수르야밤샤 왕 사가라 (라마의 조상)[16]의 증손자로, 사티아 유가 시대에 수년간 고행을 통해 갠지스강을 하늘에서 가져와 현자 카필라의 저주로부터 6만 명의 선조들을 구원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수천 명의 독실한 힌두교도들이 세상을 떠난 가족 구성원의 유골을 가져와 구원을 바라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17] 비슈누는 갠지스강이 항상 닿는 하르 키 파우리 상단 벽에 있는 돌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하리드와르는 마우리아 제국 (기원전 322–185년)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쿠샨 제국 (1–3세기경)의 지배를 받았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 이 지역에 존재했던 테라코타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18] 하리드와르에 대한 최초의 현대 시대 기록 증거는 629년 중국 여행가 현장이 기록한 것으로, 그는 하르샤바르다나 왕 (590–647)의 통치 기간에 인도를 방문하여 하리드와르를 '모-유-로'로 기록했는데, 그 유적은 현대 도시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야푸리에 아직 남아 있다. 유적 중에는 요새와 세 개의 사원이 있으며, 부서진 석조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30][20][21] 그는 또한 '강가드바라'라고 불리는 사원이 '모-유-로' 북쪽에 있었으며, 갠지스강의 관문이라고 언급했다.[30]
하리드와르는 1206년에 델리 술탄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99년 1월 13일에는 중앙 아시아 정복자 티무르 랭 (1336–1405)에게 함락되었다.[22]
시크교 첫 번째 구루 구루 나나크 (1469–1539)는 하리드와르를 방문하여 '쿠샤와르트 가트'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작물에 물 주기' 에피소드가 일어났다.[23][24] 그의 방문은 오늘날 구루드와라 (구루드와라 나나크와라)로 기념되고 있다. 두 개의 시크교 자남사키에 따르면, 이 방문은 1504년 바이사키 날에 이루어졌으며, 그는 나중에 가르왈 왕국의 코트드와라로 가는 도중에 칸칼을 방문하기도 했다.[25] 하리드와르의 판다는 대부분의 힌두교 인구의 가계 기록을 보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히''로 알려진 이 기록들은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업데이트되며, 북인도 가족의 방대한 가계도를 보관하고 있다.[25]
16세기에 이 도시는 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무굴 황제 악바르의 통치 기간에 16세기에 아불 파잘이 쓴 ''아인-e-아크바리''는 이곳을 마야 (마야푸르), 갠지스강의 하드와르로 알려졌으며, 힌두교의 일곱 개의 성스러운 도시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길이가 18 코스 (각각 약 2 km)이며, 많은 순례자들이 차이트라의 10일에 모인다고 언급한다.[26] 무굴 황제 악바르는 여행 중에도, 집에 있을 때에도 갠지스강의 물을 마셨으며, 그는 그것을 '불멸의 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특별한 사람들이 소룬과 나중에 하리드와르에 배치되어 물을 봉인된 항아리에 담아 그가 주둔한 곳으로 보냈다.[27]
무굴 시대에는 하리드와르에 악바르의 구리 주화 주조소가 있었다. 암베르의 라자 만 싱이 현재 하리드와르 시의 기초를 세웠고, 하르 키 파우리에서 가트를 개조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는 그의 유골이 브라흐마 쿤드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영국 여행가 토마스 코리아트는 자항기르 황제 (1596–1627)의 통치 기간에 이 도시를 방문하여 시바의 수도인 '하리드와라'라고 언급했다.[30]
2. 3. 근현대
마우리아 제국 (기원전 322–185년)과 쿠샨 제국 (1–3세기경)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 이 지역에 테라코타 문화가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18] 하리드와르에 대한 최초의 근대 기록은 629년 중국 여행가 현장의 기록으로, 하르샤바르다나 왕 (590–647) 통치 기간에 인도를 방문하여 하리드와르를 '모-유-로'로 기록했다. 그 유적은 현대 도시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야푸리에 남아 있으며, 요새와 부서진 석조 조각으로 장식된 세 개의 사원이 있었다.[30][20][21] 그는 또한 '모-유-로' 북쪽에 '강가드바라'라는 사원이 있었으며, 갠지스강의 관문이라고 언급했다.[30]

1206년 델리 술탄국의 지배를 받았다. 1399년 1월 13일 중앙 아시아 정복자 티무르 랭 (1336–1405)에게 함락되었다.[22]
시크교의 첫 번째 구루 구루 나나크 (1469–1539)는 '쿠샤와르트 가트'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작물에 물 주기' 사건이 일어났다.[23][24] 그의 방문은 오늘날 구루드와라 (구루드와라 나나크와라)로 기념되고 있다. 두 개의 시크교 자남사키에 따르면, 이 방문은 1504년 바이사키 날에 이루어졌으며, 그는 나중에 가르왈 왕국의 코트드와라로 가는 도중에 칸칼을 방문하기도 했다.[25] 하리드와르의 판다는 대부분의 힌두교 인구의 가계 기록을 보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히''로 알려진 이 기록들은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업데이트되며, 북인도 가족의 방대한 가계도를 보관하고 있다.[25]
16세기 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황제 악바르 통치 기간에 아불 파잘이 쓴 ''아인-e-아크바리''는 이곳을 마야 (마야푸르), 갠지스강의 하드와르로 알려졌으며, 힌두교의 일곱 성스러운 도시 중 하나라고 언급한다. 또한 길이가 18 코스 (각각 약 2 km)이며, 많은 순례자들이 차이트라의 10일에 모인다고 언급한다.[26] 악바르는 여행 중에도, 집에 있을 때에도 갠지스강의 물을 마셨으며, '불멸의 물'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사람들이 소룬과 나중에 하리드와르에 배치되어 물을 봉인된 항아리에 담아 그가 주둔한 곳으로 보냈다.[27]
무굴 시대에는 하리드와르에 악바르의 구리 주화 주조소가 있었다. 암베르의 라자 만 싱이 현재 하리드와르 시의 기초를 세웠고, 하르 키 파우리에서 가트를 개조했다. 그의 사후에는 그의 유골이 브라흐마 쿤드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영국 여행가 토마스 코리아트는 자항기르 황제 (1596–1627) 통치 기간에 이 도시를 방문하여 시바의 수도인 '하리드와라'라고 언급했다.[30]
갠지스강의 두 주요 댐 중 하나인 빔고다가 이곳에 있다. 1840년대에 건설된 이 댐은 갠지스강의 물을 상부 갠지스 운하로 돌려 주변 토지에 관개했다. 이로 인해 갠지스강의 수류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18세기까지 동인도 회사의 선박이 많이 사용했고 테리와 같은 높은 도시가 항구 도시로 간주되었던 갠지스강이 내륙 수로로서 쇠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갠지스 운하 시스템의 헤드워크는 하리드와르에 있다. 상부 갠지스 운하는 1837–38년의 기근으로 인해 1842년 4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854년에 개통되었다.[28] 운하의 독특한 특징은 루르키의 솔라니 강 위에 있는 반 킬로미터 길이의 도수로로, 운하가 원래 강보다 25m 높게 된다.

'하리드와르 연합 자치구'는 1868년에 설립되었으며, 당시 마야푸르와 칸칼 마을을 포함했다. 하리드와르는 1886년 루르키를 거쳐 사하란푸르까지 아와드 및 로힐칸드 철도 노선이 연장되면서 지선으로 처음 철도와 연결되었으며, 이 노선은 1900년에 데라둔까지 연장되었다.[29]
1901년에는 인구가 25,597명이었으며, 연합 주의 사하란푸르 지구 루르키 테실의 일부였으며,[30] 1947년 우타르 프라데시가 창설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31]
하리드와르는 몸과 마음, 정신이 지친 사람들의 거처가 되어 왔다. 또한 다양한 예술, 과학 및 문화를 배우는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아유르베다 약품과 약초 치료의 훌륭한 공급원으로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으며, 광대한 캠퍼스를 가지고 1902년부터 자체적인 전통 교육을 제공해 온 구루쿨 (전통 교육 학교)인 구루쿨 강리 비슈와비달라야를 포함한 독특한 구루쿨의 고향이다. 하리드와르의 발전은 1960년대에 현대 문명의 사원인 BHEL의 설립과 함께 전환점을 맞이했으며, 1975년에는 '마하라트나 PSU'가 설립되어 기존 라니푸르 마을 근처에 자체 BHEL, 라니푸르 읍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일련의 부속 시설을 가져왔다. 루르키 대학교, 현재 IIT 루르키는 과학 및 공학 분야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교육 기관 중 하나이다.
3. 지리 및 기후
갠지스강은 산에서 나와 평원을 만난다. 갠지스강의 물은 대부분 맑고 차가우나, 장마철에는 상류 지역의 흙이 강으로 흘러든다. 갠지스강은 서로 분리된 일련의 수로인 아이트(aits)로 흐르며, 대부분은 숲이 우거져 있다. 다른 작은 계절성 하천으로는 라니푸르 라오, 파트리 라오, 라비 라오, 하르나우이 라오, 베감 나디 등이 있다.[32]
지구의 상당 부분은 숲으로 덮여 있으며, 라자지 국립공원이 지구 경계 내에 있어 야생 동물과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목적지이다. 라자지는 다양한 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라ಮ್가르 문과 모한드 문은 데라둔에서 25km 이내에 있으며, 모티추르, 라니푸르, 칠라 문은 하리드와르에서 약 9km 떨어져 있다. 쿠나온 문은 리시케시에서 6km, 랄드항 문은 코트드와라에서 25km 떨어져 있다.
하리드와르 지구는 약 2360km2의 면적을 차지하며, 인도 우타라칸드 주의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하리드와르는 해발 314m 높이에 있으며, 북쪽과 북동쪽에는 시발릭 언덕이 있고, 남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른다.[32]
하리드와르 역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닐 다라 팍시 비하르는 하르 키 파우리 가트 근처 갠지스 강에 있는 빔고다 배리어에 위치한 조류 관찰 지점으로, 풍부한 동식물군을 자랑한다. 이 배리어는 원래 관개용으로 건설되었지만 수력 발전을 하고 홍수를 통제하기도 한다. 배리어 뒤 지역은 닐 다라 팍시 비하르로 알려져 있으며, 겨울철 시베리아 학으로 유명하고 다양한 종의 철새들의 자연 서식지이다. 이곳은 새를 사랑하는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많은 자연 애호가와 트레커들도 찾는다. 방문객들은 조류 관찰 지점에서 시발릭 언덕과 눈 덮인 산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3. 1. 기후
하리드와르의 기온은 여름에는 25°C에서 44°C 사이이며, 겨울에는 -1°C에서 24°C 사이이다.[53]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
평균 최고 기온 (℃) | 20°C | 22°C | 27°C | 33°C | 36°C | 34°C | 31°C | 30°C | 30°C | 29°C | 26°C | 22°C |
평균 최저 기온 (℃) | 7°C | 9°C | 13°C | 18°C | 21°C | 23°C | 23°C | 23°C | 21°C | 17°C | 11°C | 8°C |
평균 강수량 (mm) | 72mm | 76mm | 78mm | 55mm | 113mm | 296mm | 599mm | 568mm | 301mm | 102mm | 23mm | 91mm |
4. 인구
2011년 인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하리드와르 구의 인구는 1,890,422명이며, 2001년에는 1,447,187명이었다.[36] 2001년 하리드와르 시의 인구는 175,010명이었으나, 2011년에는 310,562명으로 증가했다. 2011년 기준으로 남성이 인구의 54%, 여성이 46%를 차지한다. 하리드와르의 평균 문해율은 70%로 전국 평균 59.5%보다 높으며, 남성 문해율은 75%, 여성 문해율은 64%이다. 하리드와르 인구의 12%가 6세 미만이다.[36]
4. 1. 종교 분포
2011년 인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하리드와르 시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35]
2011년 기준 하리드와르 시의 인구는 310,562명이다. 남성이 인구의 54%를 차지하고, 여성은 46%를 차지한다.
5. 종교 유적
이 도시는 힌두교 신자들이 숭배하는 중요한 장소들이 많다. 전설에 따르면, 여신 갠가가 시바가 그의 머리카락 묶음에서 강력한 강을 풀어냈을 때 하리드와르에 강림했다고 한다. 갠지스강은 간고트리 빙하 가장자리에 있는 고무크에서 253km를 흐른 후, 하리드와르에서 처음으로 갠지스 평원으로 들어선다.[17]
마하바라타의 바나 파르바에서 현자 다우뱌가 유디슈티라에게 인도의 티르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강가드바라, 즉 하리드와르와 칸칼이 언급되었다.[13]
경전에서 하리드와르는 카필라스타나, 강가드바라[11], '''마야푸리'''로 다양하게 언급된다. 또한, 차르 담 (우타라칸드의 4대 순례 중심지, 즉 바드리나트, 케다르나트, 강고트리, 야무노트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비를라 가트 근처 랄타라오 풀 근처에 위치한 강가 여신에게 헌정된 사원은 몇 십 년 전 칸치 카마코티의 샹카라차리아인 자얀드라 사라스와티에 의해 건립되었다.[40] 남인도 양식으로 지어진 이 사원은 아쉬타미 푸자(나바라트리의 여덟 번째 날)에 채소와 건과일로 여신을 장식하여 샤쿰바리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전통적인 관습을 가지고 있다.[39]
닥세스와라 마하데브 사원이라고도 알려진 고대 다크샤 마하데브 사원은 칸칼 타운 남쪽에 위치해 있다. 힌두교 경전에 따르면 시바의 첫 번째 아내인 다크샤야니의 아버지인 다크샤 프라자파티 왕은 시바를 고의로 초대하지 않은 야그나를 수행했다. 그녀가 초대받지 않고 도착했을 때 왕은 그녀를 더욱 모욕했고, 사티는 격분하여 ''야그나 쿤드''에서 자살했다. 다크샤 왕은 나중에 시바의 분노에서 태어난 비라바드라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중에 왕은 살아났고 시바에 의해 염소 머리를 받았다. 다크샤 마하데브 사원은 이 전설에 대한 헌사이다. 사티 쿤드는 또 다른 역사적 유산으로 칸칼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티는 이 ''쿤드''에서 자살했다.
5. 1. 하르 키 파우리
비크라마디티야(기원전 1세기) 왕이 그의 형제 바르타리를 기리기 위해 이 가트를 건설했다. 바르타리는 하리드와르에 와서 성스러운 갠지스강 강둑에서 명상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자 그의 형제는 그의 이름을 딴 가트를 건설했고, 나중에 하리 키 파우리라고 알려지게 되었다.[37] 하리 키 파우리 내에서 가장 신성한 가트는 브라마쿤드이다. 황혼 무렵 하리 키 파우리 (하라 또는 시바 신의 계단)에서 강가 여신에게 바치는 저녁 기도 (아르티)는 방문객들에게 매혹적인 경험이다. 의식이 끝난 후 순례자들이 죽은 조상을 기리며 강에 ''디야'' (램프가 달린 꽃 부유물)와 향을 띄우면 소리와 색채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리드와르를 방문하여 이 기도에 참석한다.[38] 현재 가트의 대부분은 1800년대에 개발되었다.

두세라 축제 밤이나 그 며칠 전에, 하리드와르의 갠지스 운하는 강바닥을 청소하기 위해 말린다. 물은 디왈리 축제에 복구된다. 두세라에 마 강가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바이 두즈 또는 바이 포타 후에 돌아온다고 믿어진다. 이런 이유로 하리드와르의 갠지스 운하의 물은 두세라 밤에 부분적으로 말리고, 바이 두즈 또는 바이 포타 날에 물이 복구된다.
5. 2. 찬디 데비 사원
이 사원은 갠지스강 동쪽 둑에 있는 '닐 파르바트' 꼭대기에 자리 잡은 여신 찬디에게 헌정되었다. 1929년에 카슈미르의 왕 수챗 싱이 건설했다. 스칸다 푸라나에는 지역 악마 왕 ''쉼바''와 ''니쉼바''의 군대 지휘관인 ''찬다-문다''가 이곳에서 여신 찬디에게 살해당했고, 그 후 이 장소가 찬디 데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이 언급되어 있다. 주요 조각상은 8세기 CE에 아디 샨카라차르야에 의해 세워졌다고 믿어진다. 사원은 찬디갓에서 3km 거리에 있으며 로프웨이를 통해서도 갈 수 있다.
5. 3. 만사 데비 사원
만사 데비 여신을 모시는 사원은 문자 그대로 '소원을 이루는 여신'을 의미하는 빌바 파르바트 꼭대기에 있다. 만사는 관광 명소이며, 특히 도시 전망을 제공하는 산악 케이블카로 유명하다. 주요 사원에는 여신의 두 우상이 있는데, 하나는 입이 셋이고 팔이 다섯 개이며, 다른 하나는 팔이 여덟 개이다.
5. 4. 마야 데비 사원
마야 데비 사원은 11세기에 세워진 하리드와르의 수호 여신 마야 데비를 모신 고대 사원이다. 시다피타 중 하나로 여겨지며, 여신 사티의 심장과 배꼽이 떨어진 곳이라고 전해진다. 하리드와르는 마야 데비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마야푸리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사원은 나라야니 쉴라 사원, 바이라브 사원과 함께 하리드와르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고대 사원 중 하나이다.[11]5. 5. 기타 사원 및 아쉬람
힌두교 전통에서 하리드와르 내의 '판치 티르타'(다섯 개의 순례지)는 "강가드와르"(하르 키 파우리), ''쿠샤와르트''(칸칼의 가트), ''빌와 티르타''(만사 데비 사원)와 ''닐 파르바트''(찬디 데비 사원)이다.[39] 도시 안팎에는 여러 다른 사원과 아쉬람이 있다. 하리드와르에서는 술과 비채식 음식이 허용되지 않는다.- 바라트 마타 만디르: 바라트 마타(인도 어머니)를 기리는 여러 층으로 된 사원이다. 1983년 5월 15일 인디라 간디에 의해 갠지스 강둑에서 헌당되었다. ''사만바야 아쉬람''과 인접해 있으며, 높이는 약 54.86m에 달하는 8층 건물이다. 각 층은 라마야나 시대부터 인도 독립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역사를 보여준다.
층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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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 바라트 마타 조각상 |
2층 (슈르 만디르) | 인도의 유명한 영웅들 |
3층 (마트리 만디르) | 라다, 미라, 사비트리, 드라우파디, 아힐리야, 아누수야,
6. 교육 기관
간칼에 위치한 갠지스 강 유역의 구루쿨 캉그리 대학교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이며, 아리아 사마지의 창시자인 스와미 다야난다 사라스와티의 교리에 따라 1902년 스와미 슈라다난다(1856–1926)에 의해 설립되었다.[46] 영국의 노동조합 지도자 찰스 프리어 앤드루스와 영국의 총리 램지 맥도널드가 독특한 구루쿨 기반 교육 시스템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고대 베다 및 산스크리트 문학, 아유르베다, 철학 등이 현대 과학 및 저널리즘과 함께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1945년에 설립된 '고고학 박물관'에는 인더스 문명(기원전 2500–1500년경)부터 시작하는 희귀한 조각상, 동전, 그림, 필사본 및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세 번 캠퍼스를 방문했으며, 특히 1915년 쿰브 멜라 동안[46] 상당 기간 동안 이 광대하고 평화로운 캠퍼스에 머물렀으며, 1916년 3월 20일 구루쿨 기념식에서 연설을 했다.[47]
7. 교통
8. 산업
하리드와르는 2002년 주 정부 산하 기관인 SIIDCUL이 통합 산업 단지를 설립하면서 우타라칸드 주의 중요한 산업 도시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제조 시설을 설립하는 많은 중요한 산업체들을 유치하고 있다. SIIDCUL이 제공한 할당자 명단에 따르면, 이 산업 단지에는 현재 650개 이상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49] 참조
[1]
웹사이트
Hardwar Nagar Palika Parishad City Population Census 2011-2024 | Uttarakhand
https://www.censu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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