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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아쓰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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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라타 아쓰타네는 1776년 일본에서 태어난 국학자로, 유교와 불교를 비판하고 신비학적 경향을 보인 복고신토를 주창했다. 그는 일본 국학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며 사후 세계와 영혼에 대한 탐구를 통해 '팔가학'으로 불렸으며, 서민들에게도 국학을 보급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확산시켰다. 그의 사상은 막말 존왕양이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히라타 신토는 신흥 종교 발생으로 이어졌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신토 형성 과정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그는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며, 민족주의적 저술은 보신 전쟁에서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무라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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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아쓰타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41년 65세 때 히라타 아쓰타네의 자화상.
1841년 65세 때 히라타 아쓰타네의 자화상.
출생명오와다 다네유키 (Ōwada Taneyuki, 大和田胤行)
출생일1776년 10월 6일
출생지구보타 번, 데와 국, 일본
사망일1843년 11월 2일
사망지구보타 번, 데와 국, 일본
국적일본
기타 이름이부키노야 (Ibukinoya, 気吹舎)
다이가쿠 (Daigaku, 大壑, Great Abyss)
다이카쿠 (Daikaku, 大角)
겐타쿠 (Gentaku, 玄琢)
겐즈이 (Genzui, 玄瑞)
한베에 (Hanbē, 半兵衛)
영향 받은 사상가라잔
안사이

장자
모토오리
코페르니쿠스
가모
가다
게이추
리치
영향을 준 사상가오엔
무사 정보
시대에도 시대 후기
개명오와다 다네유키 (大和田胤行) → 히라타 아쓰타네 (平田篤胤)
별명다이가쿠 (大壑)
다이카쿠 (大角)
겐타쿠 (玄琢)
이부키노야 (気吹乃舎)
마스게노야 (真菅乃屋)
신호신령능진주대인 (神霊能真柱大人)
데와 국구보타 번 → 빗추 국마쓰야마 번 → 구보타 번
씨족보소 헤이시계 오와다 씨 → 이세 헤이시계 히라타 씨
부모실부: 오와다 도시야쓰(大和田 祚胤)
양부: 히라타 도쿠인(平田 篤隠)
형제마사타네
마사타네
다네유키
사네타네
다네히데
아내오리세 (이시바시 쓰네후사의 딸)
오리세 (야마자키 도쿠토시의 양녀)
자녀실자: 쓰네타로, 지에, 마타고로
양자: 가네타네

2. 생애

1776년 10월 6일(안에이 5년 음력 8월 24일) 데와국 구보타 번(현 아키타시)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쇼키치(正吉), 통칭 한베에(半兵衛)였고, 성인이 되어 아쓰유키(胤行)로 개명했다. 이후 빗추 마쓰야마 번의 번사이자 병학자인 히라타 도쿠인의 양자가 되었으며, 교와 연간(1801~1804) 이후 아쓰타네(篤胤)로 다시 개명했다. 호는 이부키노야(気吹舎), 가호는 마스게노야(真菅乃屋)이며, 의사로 활동할 때는 겐타쿠(玄琢)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843년 11월 2일(덴포 14년 9월 11일) 사망했으며, 사후 시라카와 백왕가로부터 신령능진주대인(神霊能真柱大人)이라는 신호를 받았다.

생가인 오와다 씨는 치바 씨의 일족으로 사타케 씨를 섬긴 오와다 이에타네를 시조로 하며, 양가인 히라타 씨는 헤이케의 무장 타이라 이에쓰구의 후손을 칭한다. 두 가문 모두 간무 헤이 씨의 계통이다.

첫 부인 오리세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으나 아들 둘은 일찍 사망했다. 장남 조타로(1802년생)는 이듬해, 차남 한베에(후에 마타고로로 개명, 1808년생)는 1816년에 사망했다. 장녀 치에(치에코, 1805년생)만이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했다. 1824년 1월 15일, 치에는 이요국 신야번 출신의 아오카와 아쓰마와 결혼했다. 치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져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고 아버지의 저술에 대해 막힘없이 답했으며, 영어에도 능통하고 글씨도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를 대신해 와카를 단자쿠에 쓰기도 했다. 후에 오테우(오나가)로 개명했고, 말년에는 어머니의 이름 오리세를 사용했다. 1888년(메이지) 3월 사망했다.

사위 아오카와 아쓰마는 아쓰타네의 제자 아오카와 코쇼의 형으로, 히라타 가문의 양자가 되어 히라타 테츠타네(鉄胤)를 칭했다. 테츠타네는 1868년(메이지 원년) 신기관 판사, 메이지 천황 시강, 대학 대박사, 대교정 등을 역임했다. 아쓰타네 사후 가학(家學)을 계승하고 히라타학을 보급했으며, 선대의 부채를 청산했다. 저서로 『축사정훈』이 있으며, 1880년 10월 15일 사망했다.

치에와 테츠타네 사이에는 히라타 노부타네와 타네오 두 아들이 있었다. 노부타네(1828년생)는 막말에 활동하며 구보타 번주에게 막부 타도를 진언했으나, 히라타 학파 3대째로 촉망받던 중 1872년 부모보다 먼저 사망했다. 동생 타네오는 할아버지 아쓰타네의 신격화 운동에 관여했다.

노부타네 사후에는 사위 양자인 히라타 모리타네(미노국 출신, 도쿄 제국대학 졸업)와 히라타 무네타네로 가계가 이어졌으며, 대대로 간다묘진의 신직을 맡았다. 무네타네가 1973년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히라타 종가는 단절되었다. 다른 자손으로는 히라타 신사의 6대 당주인 요네다 가쓰야스가 알려져 있다.

간세이의 삼 기인 중 한 명인 가모 준페이와 백성 출신 탐험가 모가미 도쿠나이 등과 평생 친구로 지냈다. 특히 모가미 도쿠나이는 아쓰타네의 이문화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학자 반 노부토모와도 교류했으며, 한때 그를 스승처럼 따랐으나 후에 의견 차이로 결별했다. 아쓰타네는 노부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한 비추국의 국학자 후지이 다카나오는 『이세 이야기』의 특정 구절 해석에 있어 노부토모를 통해 전해 들은 아쓰타네의 설을 채택했다[10]. 고향 구보타로 돌아온 후에는 오토모 나오에나 깃카와 다다유키 등 아키타 지역 국학자들과 교류했다.

2. 1. 어린 시절과 에도 유학

1776년 10월 6일(안에이 5년 음력 8월 24일) 데와국 구보타 번(현재의 아키타시)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쇼키치(正吉), 통칭은 한베에(半兵衛)였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아쓰유키(胤行)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구보타 번의 오오반구미 가시라(大番頭組頭, 번의 경비대 간부)였던 오와다 세이베에 토시타네(大和田 清兵衛 祚胤)로, 아쓰타네는 그의 넷째 아들이었다. 생가인 오와다 가문은 주자학을 따랐으며, 국학이나 신토와는 거리가 있었다.[9]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적지만, 가난했으며 계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 현존하는 자료를 통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보타 번의 의사이자 시강(侍講, 군주나 귀족에게 학문을 강의하던 직책)이었던 나카야마 세이가(中山青莪)의 문하생이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는 대부분 양자인 히라타 테쓰타네(平田鐵胤)의 기록에 근거한다. 아쓰타네 본인은 자서전 『선경이문』(1822년)에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나는 대체 어떤 인연으로 태어났는가"라고 한탄했으며, 훗날 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부모 손에 자라지 못했다"고 언급하며 가난 속에서 힘든 소년 시절을 보냈음을 암시했다.[9]

1795년 (간세이 7년) 1월 8일, 20세가 되던 해에 탈번(번을 무단으로 이탈하는 행위)하여 에도로 향했다. "정월 8일에 집을 나가는 사람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라 날짜를 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500문(文, 당시 화폐 단위)을 미리 마련해두고 유서를 남긴 채 고향을 떠났다. 에도에서는 대팔차(大八車, 에도 시대의 큰 수레)를 끌거나, 가부키 배우 5대 이치카와 단주로의 집에서 밥 짓는 일을 하거나, 소방수(火消し) 등으로 일하며 힘겹게 생활했다. 동시에 당시 최신 학문이었던 ''란가쿠''(蘭學,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 지리학, 천문학 등을 공부할 기회를 찾았고, 한 하타모토(旗本, 쇼군의 직속 가신)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10][2]

1800년 (간세이 12년), 25세 때 에도에 거주하던 빗추 마쓰야마 번 출신의 번사이자 야마가 소코류 병학(兵學)자인 히라타 도베이 아쓰야스(平田 藤兵衛 篤穏)의 눈에 띄어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양자가 되었다. 양자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이때부터 히라타(平田) 성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교와 연간(1801년~1804년) 이후 아쓰타네(篤胤)로 개명했다. 호는 이부키노야(気吹舎), 가호는 마스게노야(真菅乃屋)를 사용했으며, 의사로 활동할 때는 겐타쿠(玄琢)라는 이름을 썼다.

양자가 된 무렵, 스루가 누마즈 번의 번사 이시바시 쓰네후사(石橋常房)의 딸 오리세(織瀬)를 만났다.[10] 당시 오리세는 아쓰타네가 하인으로 일하던 하타모토 저택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여 1801년 (교와 원년), 아쓰타네가 26세 때 결혼했다.[10][2] 오리세는 남편의 성을 따라 히라타 오리세로 불리게 되었다.

히라타 아쓰타네는 자신이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3]

2. 2. 국학 연구와 복고신도

18세기 작자 미상의 족자, 히라타 아쓰타네의 초상화.


『몽중대면의 그림』(와타나베 키요시 그림)


히라타 아쓰타네『영능진주(たまのみはしら)』1812년


히라타 아쓰타네는 본래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학문 노선을 따랐으나, 점차 그의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에서 벗어나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학문은 일본 국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신과 현세, 그리고 사후 영혼의 행방과 구원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아쓰타네는 국학 외에도 불교, 유교, 도교, 난학(란가쿠), 기독교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으며, 이를 '팔가학'(八家の学)이라 칭하기도 했다. 이러한 광범위한 연구는 그의 사상이 다소 복잡하고 혼합적인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특히 난학에 대한 관심으로 요시다 초슈쿠 밑에서 서양 의학을 배우고 해부에 참여하기도 했으며[4],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정보 수집에도 힘썼다. 그는 러시아어 사전을 직접 편찬할 정도로 정보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사후 2년 뒤인 쿄와 3년(1803년)에 그의 저작을 접하고 국학에 입문했으며, 속에서 노리나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노리나가 사후의 문인'을 자처했다. 이후 노리나가의 아들 모토오리 하루니와에게 정식으로 입문(분카 2년, 1805년)했으나[11], 주로 노리나가의 저작 『나오히노미타마』, 『하쓰야마후미』, 『타마카츠마』, 『고지키덴』 등을 통해 독학으로 국학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핫토리 나카쓰네의 『삼대고』(三大考) 도식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12][13].

분카 8년(1811년) 스루가국 방문을 계기로 고전 기록 간의 모순점에 주목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 『고사성문』(古史成文)과 『고사징』(古史徴)을 저술했다[16]. 이는 기존 모토오리 학파의 해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분카 9년(1812년) 아내 오리세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 사후 세계와 영혼 문제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저술한 『영능진주』(霊能真柱, 또는 타마노 미하시라)는 그의 독창적인 사후관과 우주론을 담고 있는 대표작이다.

아쓰타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사후 세계를 어둡고 부정적인 '황천'(黄泉)으로 본 것과 달리, 사람이 죽으면 대국주신이 다스리는 '유명'(幽冥,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원이 되어 현세와 같은 공간에서 신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유명계는 현세(顕世, 보이는 세계)와 단절된 곳이 아니며, 조상신들은 유명에서 현세의 후손들을 보호한다고 보았다. 그는 핫토리 나카쓰네의 『삼대고』 도식을 기반으로[12], 지동설 등 당대의 과학 지식(시즈키 타다오의 『역상신서』 등[14])을 접목하고,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를 우주의 창조주로 설정하는 등 기독교적 요소(초기 저작 『본교외편』(本教外篇) 등에서 확인됨)를 가미하여[13] 독자적인 복고신도 신학을 체계화했다. 이는 일본 중심의 세계관과 천황 숭배 사상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신학은 '영혼의 안정'을 통해 '대화심'(やまとごころ)을 굳건히 하고 '진실된 길'(まことのみち)을 알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쓰타네는 고전의 내용을 재구성하고[16], 때로는 외국의 전승까지 참고하여 자신의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주관적 해석과 문헌고증학적 엄밀함에서 벗어난 방법론은 모토오리 학파로부터 '사도'라 비판받는 원인이 되었다[16]. 특히 『영능진주』의 유명관은 노리나가를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져 모토오리 학파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고대 연구 자체보다는 당대 사람들의 영혼의 안식과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분카 3년(1806년) 문을 연 그의 사숙 '기취사'(気吹舎, 초기 명칭 '마스가노야')는 신분에 관계없이 많은 문인을 받아들였으며(최종 553명, 사후 문인 1,330명), 그의 사상은 토속적이고 민간 신앙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학자뿐 아니라 서민층에게도 넓게 수용되었다. 그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라고도 불렸으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아쓰타네의 복고신도는 미토학과 더불어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천황에 대한 충성을 쇼군보다 우선시한다는 내용을 담은 『천조무궁력』(天朝無窮暦, 1841) 등으로 인해 막부의 탄압을 받아 만년에는 아키타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1841-1843). 메이지 유신 이후 그의 사상은 한때 영향력을 가졌으나, 국가 신토 체제가 확립되면서 점차 배제되었다.

2. 3. 저술 활동과 영향력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학문을 계승하여 처음에는 유교불교의 영향을 받은 신토를 비판했으나, 점차 모토오리 학파의 실증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신비학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일본 국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특히 신과 현세의 존재, 사후 영혼의 행방과 구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불교, 유교, 도교, 난학,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연구하고 절충하여 그의 학문은 '팔가학'(八家の学)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함 때문에 그의 학문 체계는 다소 복잡하고 혼합적이며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도 받는다. 아쓰타네의 학설은 미토학과 함께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지주가 되었다.

아쓰타네는 학자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민 대중을 대상으로 국학 사상을 널리 보급하려 했다. 그의 학설이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친숙하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라고 불렸으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동은 오쿠니 다카마사, 스즈키 시게타네 등 500명 이상의 제자를 끌어모았다. 그의 민족주의적 저술은 메이지 유신 시기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외치며 보신 전쟁에 참여한 ''존왕양이'' 운동 지지 사무라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아쓰타네는 자신의 학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저술 활동에 힘썼다. 에도에 서재를 겸한 사숙인 "마스게노야(真菅乃屋)"를 열었으나, 유력한 후원자 없이 무사상인 등 소수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다.[10] 이에 그는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분카 13년(1816년), 시모사가즈사 지역을 처음으로 순회하며 가시마 신궁, 가토리 신궁, 이키스 신사 등을 참배했다.[10] 이 여행 중 얻은 영석 "아마노이시부에(天之石笛)"를 계기로 사숙의 이름을 "이부키노야(気吹舎)"로 바꾸고 자신을 "오스미(大角)"라 칭했으며,[18] 이듬해(1817년) 여행의 기록인 『아마노이시부에노키(天石笛之記)』를 저술했다.

분세이 원년(1818년), 43세의 아쓰타네는 무사시 고시가야의 문인이자 재정적 후원자인 야마자키 아쓰토시의 양녀와 재혼했다.[10] 고시가야 문인들의 도움으로 구이즈 신사 경내에 초암 "쇼세이안(松声庵)"을 마련하기도 했다. 같은 해 『고시세이분(古史成文)』을 간행하고, 그의 필생의 역작이 될 『고시덴(古史伝)』 집필에 착수했다. 분세이 2년(1819년)에는 두 번째 동총(東総) 순회에 나서 『다마타스키(玉襷)』와 『고도다이이(古道大意)』 등을 강설하며 적극적으로 문인을 모집했다.[10] 농정가이자 국학자인 미야오 사다오의 아버지 사다히사를 비롯한 많은 호농과 신관들이 이때 입문했다.

『기부키노야 일기(気吹舎日記)』


이 시기 아쓰타네는 유계(幽界, 사후 세계 또는 신선 세계) 연구에 몰두했다. 유계에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소년이나 환생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믿고, 이를 바탕으로 유계의 모습을 직접 저술했다. 분세이 3년(1820년) 가을, 에도에서 화제가 된 '''덴구 코조 토라키치'''라는 소년을 양자로 삼아[19] 그가 신선계에서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여 분세이 5년(1822년) 『선경이문(仙境異聞)』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화가를 시켜 신선계의 "칠생무(七生舞)"를 묘사한 그림도 포함되었다.

『선경이문(仙境異聞)』에 실린 「칠생무(七生舞)의 그림」(1819년). 아쓰타네는 덴구 코조 토라키치의 이계 이야기를 기록하며,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화가에게 칠생무를 그리게 했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무사시 다마군의 농민 고야타 쇼고로의 이야기를 듣고 『쇼고로 재생기문(勝五郎再生記聞)』(분세이 6년, 1823년 간행)을 저술했다. 그 외에도 『유향진어(幽郷眞語)』, 『고금요매고(古今妖魅考)』, 『이나바노모노노케록(稲生物怪録)』 등 유계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요괴 설화를 모은 『신기인론(新鬼人論)』(분세이 3년 성립)은 후대의 야나기타 구니오나 오리쿠치 시노부 같은 민속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세력 확장을 위해 분세이 5년(1822년)에는 『히토리고토(ひとりごと)』를 저술하여, 이전에 『속신도대의(俗神道大意)』에서 비판했던 신토 요시다 가문을 변호하며 접근을 시도했고, 요시다 가문과 경쟁 관계인 시라카와 하쿠오 가문에도 접근했다. 분세이 6년(1823년),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비추 마쓰야마 번주 이타쿠라 씨에게 영구 휴가를 요청하여 번을 사임했다. 이후 오와리 번에 접근하여 잠시 봉록을 받기도 했으나 말년에 회수되었다.

히라타가 일본 사상에 기여한 부분 중 하나는 모든 일본인이 황족이나 특정 귀족 가문뿐 아니라 가미(神)의 후손임을 강조한 점이다. 그는 "이 영광스러운 우리의 땅은 가미가 기원하는 땅이며, 우리 모두는 가미의 후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삶과 존재를 부여한 부모님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조부모님과 증조부모님을 넘어 고대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원래 조상은 필연적으로 가미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5]

막부 붕괴 후 메이지 유신 시기 히라타 신토 학파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신토를 국가 통제 하에 두려는 국가 신토 체제가 형성되면서 점차 배제되어 영향력을 상실했다. 또한, 그의 국학에 대한 영향력은 최근 과대평가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스스로를 "국학 4대 거장" 중 한 명으로 칭했지만, 그의 저작은 일본 제국 정부 정책보다는 종교 단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 주요 저서 ===

출판 연도제목비고
1817년『아마노이시부에노키(天石笛之記)』분카 13년(1816년) 동총 순회 기록
1818년『고시세이분(古史成文)』
1818년~『고시덴(古史伝)』미완성 유고, 전 33권 (사후 간행)
분세이 3년(1820년) 성립『신기인론(新鬼人論)』요괴 설화 모음
1822년『선경이문(仙境異聞)』덴구 코조 토라키치의 이계 이야기 기록
1822년『히토리고토(ひとりごと)』요시다 가문 옹호
1823년『쇼고로 재생기문(勝五郎再生記聞)』고야타 쇼고로의 환생 이야기 기록
불명『속신도대의(俗神道大意)』
불명『다마타스키(玉襷)』
불명『고도다이이(古道大意)』
불명『유향진어(幽郷眞語)』
불명『고금요매고(古今妖魅考)』
불명『이나바노모노노케록(稲生物怪録)』
사후 간행『영의 진주(霊の真柱)』
사후 간행『고사징 개제기(古史徴開題記)』
사후 간행『히라타 아쓰타네 가문집(平田篤胤家文集)』
사후 간행 (1875년)『고역성문(古易聖文)』전 2권
사후 간행 (1879년)『동몽입학문(童蒙入学門)』
사후 간행 (1881년)『매조신배사기(売卜神拝詞記)』히라타 테츠타네 편
사후 간행 (1881년)『대발사정훈(大祓詞正訓)』
사후 간행 (1885년)『가도대의(歌道大意)』스다 타다유키 편
사후 간행 (1902년)『천만궁어전기(天満宮御伝記)』기타오 마사미 편
사후 간행 (1906년)『인도장지(印度蔵志)』카쿠겐 신료 편
출판년도 불명『적현태고전성문(赤県太古伝聖文)』


2. 4. 말년과 죽음

히라타 아쓰타네의 묘


문정 6년(1823년), 아쓰타네는 간사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7월 22일 에도를 출발하며 "흐르는 물에 잠긴 용이 구름을 일으켜 하늘에 알려질 때가 왔네"라는 노래로 포부를 밝혔고, 8월 3일에는 오와리국아쓰타 신궁에 참배한 뒤 8월 6일 교토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도미노코지 사다나오를 통해 고카쿠 상황에게, 문인 무토베 세이코·고에를 통해 닌코 천황에게 각각 헌상했다.

한편, 아쓰타네의 스즈야(鈴屋) 방문 소식은 스즈야 문인들 사이에서 그를 어떻게 맞이할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쓰타네에게 호의적이었던 『삼대고』(三大考)의 저자 핫토리 추요는 아쓰타네가 노리나가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문인들은 아쓰타네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배척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교토의 에도 센다테(江戶千楯)와 오사카의 무라타 슌몬(村田春門)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쓰타네가 고전을 임의적으로 해석한다고 비판했으며, 센다테는 아쓰타네의 방문을 방해하기도 했다. 아쓰타네는 교토에서 핫토리 추요를 포함한 모토오리파 문인들과 교류했으며, 이들은 아쓰타네에 대한 비평을 담은 편지를 와카야마의 모토오리 종가인 모토오리 오히라에게 보냈다. 오히라가 정리한 이 비평들은 후에 아쓰타네에게 전해졌고, 훗날 그의 사위 히라타 테쓰타네가 논평을 더해 『훼예상반서』(毀誉相半書)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스즈야 일문의 후계자였던 모토오리 오히라는 『삼대고』 논쟁에서 아쓰타네에게 비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인 중 한 사람으로서 아쓰타네를 대접하기로 했다. 아쓰타네가 방문 전 보낸 "무사시노에 떨어진 채로 있어도 이제 다시 찾아온 아이를 불쌍히 여겨 바라보라"는 노래에 대해, 오히라는 "남들이 괴로워할 만한 말을 했던 사람이 오늘 만나보니 밉지도 않네"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고, 아쓰타네는 이때 노리나가의 영비(影碑) 중 하나를 오히라에게 받았다.[20]

이후 아쓰타네는 이세 신궁을 참배하고, 마쓰사카의 모토오리 하루니와(노리나가의 아들)를 방문하여 11월 4일에는 염원하던 노리나가의 묘를 참배했다. 묘 앞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1500명이나 되는 중에 저를 사용해 주시는 영혼이 두렵습니다"라는 노래를 읊었다. 마쓰사카에서 스즈야 본가를 방문하고 모토오리 하루니와와 회담한 후, 11월 19일 에도로 돌아왔다.

문정 7년(1824년), 문인이었던 아쓰마(篤眞)가 아쓰타네의 딸 지에(千枝)와 결혼하여 사위 양자가 되었고, 히라타 테쓰타네(平田鐵胤)로 개명하여 아쓰타네의 후계자가 되었다. 겸손한 성격의 테쓰타네는 아쓰타네의 활동을 충실히 지원했다.

이 시기 이후 아쓰타네는 『갈선옹전』(葛仙翁伝), 『부상국고』(扶桑国考), 『황제전기』(皇帝傳記), 『삼신산여고』(三神山餘考), 『천주오악여론』(闡耶蘇教)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도장(道藏)을 비롯한 중국인도의 경전 연구에 힘을 쏟았다. 문정 9년(1826년)에 완성된 『인도장지』(印度蔵志)나 문정 10년(1827년)에 완성된 『적현고전』(赤縣古傳)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연구는 일본의 고전과 고대 전승을 연구하는 기존 국학의 범위를 넘어, 인도와 중국의 고대 문헌 연구가 저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다른 국학자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인도장지』는 덴포 11년(1840년), 아쓰타네가 조동종 총본산 에이헤이지의 57세 주지 재안 우린(載庵禹隣)에게 보여주었을 때, 우린 선사가 아쓰타네의 노고를 칭찬하며 "동화대윤거사"(東華大尹居士)라는 법호를 증정했다고 전해진다. 아쓰타네는 정토진종과 니치렌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선종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히라타 아쓰타네는 1843년 11월 2일(덴포 14년 9월 11일)에 아키타현 나카카메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시내의 언덕에 묻혔으며, 묘비는 자연석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묘 주위에는 돌 울타리가 둘러져 있고 입구에는 돌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이 묘는 1934년 일본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6] 사후 시라카와 백왕가로부터 신령능진주대인(神霊能真柱大人)이라는 신호를 받았다.

3. 사상

히라타 아쓰타네는 처음에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학문 노선을 따라 유교불교와 융합된 신토를 비판했으나, 점차 모토오리 학파의 실증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신비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신학은 일본 국학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으며, 신과 이 세계의 존재, 특히 사후 영혼의 행방과 그 구제를 학문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그는 불교·유교·도교·난학·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팔가학'(八家の学)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 체계는 매우 광범위하고 여러 요소가 혼합되어 있어 복잡하고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도 받는다.

아쓰타네의 학설은 미토학과 더불어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학자나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도 국학 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의 사상이 토속 신앙이나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아쓰타네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라고 불렸으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의 발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막부 붕괴 후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히라타 학파가 큰 영향력을 가졌지만, 신토를 국가 통제하에 두려는 국가 신토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점차 배제되어 영향력을 잃어갔다.

3. 1. 복고신도(復古神道)

히라타 아쓰타네는 본래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학문 노선을 계승하여 유교불교의 교리를 절충한 신토를 비판했으나, 점차 모토오리 학파의 실증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신비학으로 나아갔다. 그의 신학은 일본 국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신과 이 세계의 존재, 특히 사후 영혼의 행방과 구제를 학문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그는 불교, 유교, 도교, 난학,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팔가학'(八家の学)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 체계는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여러 요소가 혼합되어 있어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도 받는다.

아쓰타네의 학문적 관심은 매우 넓었다. 초기에는 야마자키 안사이의 신유학을 공부했으며, 러시아 제국의 북방 침략에 대한 우려로 외과 의사 吉田長淑|요시다 조슈쿠일본어에게 네덜란드 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인체 해부에도 참여했다.[4] 이후 장자의 저작을 통해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고, 1803년에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저작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꿈속에서 노리나가로부터 직접 국학(고쿠가쿠)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전설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真菅乃屋|마스가노야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저술 활동을 했으나, 1816년 고대 돌피리를 얻은 후 気吹舎|이부키노야일본어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모토오리 하루니와의 제자가 되어 고대 및 중국 고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아이작 뉴턴의 서양 학문, 불교와 신토 관련 논저를 폭넓게 탐독했다.

1812년, 아내 오리세의 죽음은 아쓰타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고, 이는 사후 세계와 영혼의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천지의 신은 없는 것인가, 계신 것인가, 이 재앙을 보고 계시는가"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같은 해에 저술한 『영능진주(霊能真柱)』는 그의 독특한 생사관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죽음 이후 영혼이 더러운 황천(黄泉)으로 간다고 본 것과 달리, 사람은 죽으면 대국주신이 다스리는 "유명"(幽明,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이 되어 천황이 다스리는 현세(顕界, 눈에 보이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주재자를 섬기게 되므로 죽음을 반드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유명"은 현세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며, 단지 현세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신들은 "유명"에서 현세의 인간들을 항상 지켜보고 보호한다고 설파했다. 『영능진주』에서는 지동설적 해석을 가미하여 우주의 생성 과정을 설명하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다스리는 "현세"와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가 다스리는 "유세"(かくりよ)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죽은 후의 영혼은 평안하게 유명계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후 안심론을 제시했다.[12][17]

아쓰타네는 이 세상의 행복과 죽은 후 영혼의 행방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신토에서 찾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신토는 이전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해졌다. 그는 기독교천지창조 신화와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아,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를 우주의 창조주로 설정하고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한 복고신도 신학을 구축했다. 그는 일본(어국, みくに)이 세계의 중심이며 천황은 만국의 군주라는 국수주의적 사상을 강조하며, 이를 국학을 따르는 이들의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세우는 기둥, 즉 "영의 진주"라고 여겼다.

그의 복고신도는 고사기, 일본서기 등 고전을 근거로 삼았지만, 고전 기록의 모순이나 비합리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주관적으로 재구성하거나 외국의 고전설을 참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문헌 고증을 중시한 모토오리 노리나가 학파로부터 비판받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영능진주』의 유명관은 노리나가를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져 모토오리 학파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6] 그러나 아쓰타네는 고대 연구 자체보다는 당대 일본인들에게 신의 본모습과 영혼의 행방을 제시하고 필요한 신학을 구축하는 데 더 큰 목적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 고전과 주술 등을 활용했다.

히라타 아쓰타네의 『춘추명력서고(春秋命歴序考)』 하권, 1833년 간행


아쓰타네의 학문은 전통적인 국학 연구의 범위를 넘어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삼아 때로는 방언을 사용하며 자신의 사상을 쉽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의 학설이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유교불교 학자들에게 비판적이었으며, 천황가를 숭배하는 "고대의 길"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첫 저술인 『감모초(呵妄書)』(1803)는 유학자 다자이 슌다이의 불교 저작을 비판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요시다 신토 가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미토학과 더불어 에도 시대 말기 존왕양이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1841년, 서양 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에도 막부의 역법을 비판한 『천조무궁력(天朝無窮暦)』을 출판하면서 막부의 분노를 샀다. 이는 그의 격렬한 유교 부정과 존왕주의 사상 때문이거나, 자좌(座) 설립 운동에 관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결국 그는 저술 활동 금지와 함께 고향 아키타로 추방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아키타에서도 국학을 가르치며 문인들을 길러냈으나, 에도로 돌아가지 못한 채 1843년 실의 속에서 병사했다.

아쓰타네 사후, 그의 학문은 '히라타 신토'로 불리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히라타 학파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신토를 국가 통제하에 두려는 국가 신토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점차 배제되어 영향력을 상실했다. 사후 1845년에는 시라카와 가문으로부터 "신령능진주 어른(神霊能真柱大人)"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1943년에는 종3위에 추증되었다.

3. 2. 유명(幽冥) 사상



분카 9년(1812년), 37세의 아쓰타네는 사랑하는 아내 오리세를 잃는 큰 슬픔을 겪었다. 이 개인적인 비극은 그가 죽음 이후 영혼의 행방과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유명(幽冥)'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본격적인 유계(幽界) 연구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같은 해, 아쓰타네는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유명의 세계를 다룬 중요한 저작 『영능진주』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만의 독특한 생사관을 펼쳐 보였다. 『영능진주』는 "영혼의 안정을 알게 되면" "대화심(やまとごころ)"을 굳건히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진실된 길(まことのみち)"을 깨달을 수 있다는, 즉 사후 세계에 대한 안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이는 스승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사상과는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노리나가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더러운 저승 세계인 "황천"으로 가기 때문에 죽음은 슬픈 일이라고 보았다. 반면 아쓰타네는 사람은 살아있을 때는 천황이 다스리는 현세(보이는 세계)의 백성("어민(御民)")이지만, 죽어서는 대국주신이 주재하는 "유명"(보이지 않는 세계, 명부)의 신이 되어 각자의 주재자를 섬기게 되므로, 죽음 이후를 반드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아쓰타네에 따르면, 이 "유명"은 우리가 사는 현세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산과 숲, 무덤처럼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단지 현세에서는 유명계가 보이지 않고, 유명계에서는 현세가 보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신들은 바로 그 "유명"의 세계에서 현세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명과 삶, 고향의 평화와 안녕을 항상 지켜보고 보호해 준다고 설파하여, 신과 인간의 거리를 좁혔다. 그는 10개의 그림을 통해 천지 개벽부터 하늘(태양), 땅(지구), 샘()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생성을 지동설적 해석을 가미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아쓰타네는 하토리 추요(服部中庸)의 『삼대고』에 나타난 산령(むすび)의 영력 개념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에게 다스리게 한 "현세(うつしよ)"와 대국주명이 다스리는 "유세(かくりよ)"를 대비시켰다. 그는 모든 것이 드러난 세계의 일("현명사(あらわごと)")과 숨겨진 세계의 일("유명사(かくりごと)")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균형을 이루며, 이는 대국주명이 스스로 은퇴한 용기에 의해 보증된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죽은 후의 영혼은 평안하게 유명계로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12][17]

아쓰타네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현세의 행복이었으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죽은 후 영혼의 행방이었다. 그는 영혼의 안정을 신토에서 찾고자 했고, 이로 인해 신토는 이전보다 종교적인 색채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쓰타네는 기독교(천주교)의 천지창조 신화와 『구약성서』의 역사 전개 방식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를 창조주로 설정하고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한 복고신도 신학 체계를 수립했다. 그에 따르면, 하늘·땅·샘 세 세계의 형성과 신의 공덕은 결국 일본("어국(みくに)")이 세계의 중심이며 천황이 만국의 군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국학을 배우는 이들의 대화심을 굳건히 세우는 기둥, 즉 "영의 진주(たまのみはしら)"라고 보았다.

히라타 국학과 복고신도는 고사기와 같은 고전을 이론적 근거로 삼았지만, 고전 자체에 포함된 모순이나 비합리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아쓰타네는 고전의 내용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고 자신이 만든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고전 기록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천지개벽과 같은 현상은 세계 공통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외국의 고전설까지 연구의 범위를 넓혔다. 아쓰타네의 목표는 고전설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 유명계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었지만, 문헌 고증을 중시했던 모토오리 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방식은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졌다[16]。 그러나 아쓰타네는 고대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으며, 당대 일본인들이 직면한 신의 본질과 영혼의 행방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고전과 주술 등을 활용했다. 『영능진주』는 아쓰타네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저작이었으나, 모토오리 학파 문인들은 이 책의 유명관이 스승 노리나가를 모독한다고 여겨 아쓰타네를 "산지기(山守)"라고 비난했고, 이로 인해 아쓰타네는 이세 마쓰사카의 스즈야(鈴屋)와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덴포 2년(1831년) 이후 아쓰타네는 역일역학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러한 후기 연구의 씨앗은 이미 『영능진주』 안에 담겨 있었다고 평가된다.

3. 3.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

히라타 아쓰타네의 학문은 처음에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노선을 따라 유교불교의 영향을 받은 신토를 비판했지만, 점차 모토오리 학파의 실증주의에서 벗어나 신비학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아쓰타네의 신학은 일본 국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신과 현세, 그리고 사후 영혼의 행방과 구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불교, 유교, 도교, 난학,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연구하고 절충하여 '팔가학'(八家の学)이라는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하려 했으나, 그 내용은 다소 복잡하고 혼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아쓰타네의 학설은 미토학과 더불어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학자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도 국학 사상을 널리 알렸는데, 그의 이론이 토속 신앙과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라고 불리며 후대 신토계 신흥종교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히라타 학파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신토를 국가 통제하에 두려는 국가 신토 체제가 형성되면서 점차 배제되어 힘을 잃어갔다.

히라타는 오쿠니 다카마사, 스즈키 시게타네를 비롯한 500명 이상의 제자를 두었다. 그의 민족주의적 저술들은 메이지 유신 당시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외치며 보신 전쟁에 참여했던 존왕양이 운동 지지 사무라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든 일본인이 황족이나 특정 귀족뿐 아니라 가미(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했다.[5]

그러나 히라타가 국학에 미친 영향력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스스로를 '국학 4대 거장' 중 한 명으로 칭한 사실이나, 그의 사상이 일본 제국 정부의 정책보다는 종교 단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

덴포 12년(1841년), 서양의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에도 막부의 역법을 비판한 『천조무궁력(天朝無窮暦)』을 출간했다가 막부로부터 저술 활동 금지 및 에도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는 그의 강한 유교 비판과 존왕주의 사상이 막부 체제에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의 저작 『출정소어』는 평이하고 통속적인 문체로 쓰여 막말 시기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왕정복고 운동과 폐불훼석 움직임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했다.

3. 4. 비판적 관점

히라타 아쓰타네는 서양 지식과 기독교천지창조 개념 등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변형하여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를 정점으로 하는 독자적인 고신도 신학을 세웠다. 그는 이 신학을 통해 일본을 '세계의 근본'이자 '만국보다 우월한 나라'로, 천황을 '만국의 군주'로 격상시키는 일본 중심주의 사상을 전개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서구 열강의 접근에 맞서 일본의 독자성을 내세우고 쇄국 정책을 옹호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즉, 일본은 외부 세계와의 교류 없이 자립할 수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인식을 퍼뜨린 것이다. 아쓰타네의 사상은 유교동아시아 질서로부터 일본의 이탈을 의미했으며, 서구의 충격에 대한 일본 단독의 대응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일본 중심주의와 선민사상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그는 토착 신앙과 조상 숭배 관념에 일본 신화를 재해석한 거대 우주론과 사후 세계관을 접목시켰다. 이는 신사의 위상을 높이고 내세의 평안을 약속하며 공동체 질서를 다지는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에 대한 배타성을 심화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저서

히라타 아쓰타네는 다작의 작가였다. 그의 저술은 고대 일본 전통 연구, 고대 인도와 중국 전통 연구, 그리고 영적 세계를 다루는 텍스트 등 광범위한 주제를 포괄한다. 고대 일본 전통 연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타마노 미하시라''(霊能真柱|다마노 미하시라일본어, 영의 참된 기둥), ''코시 세이분''(古史成文|고시 세이분일본어), ''코도 타이이''(古道大意|고도 다이이일본어, 고대의 길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조쿠 신토 타이이''(俗神道大意|조쿠 신토 다이이일본어, 민속 신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가 있으며, 주석서로는 ''코시초''(古史徴|고시초일본어, 고대 역사 색인)와 ''코시덴''(古史伝|고시덴일본어, 고대 역사 해설)이 있다. 또한 고대 인도와 중국 전통에 관한 연구로는 ''인도 조시''(印度蔵志|인도 조시일본어, 인도에 대한 진실의 모음)와 ''모로코시 타이코덴''(唐土太古傳|모로코시 다이코덴일본어, 고대 중국 역사 전승)이 있으며, 영적 세계를 다룬 텍스트로는 ''센쿄 이분''(仙境異聞|센쿄 이분일본어, 선인의 땅에서 온 기이한 이야기)과 ''카츠고로 사이세이 키분''(勝五郎再生記聞|가쓰고로 사이세이 기분일본어, 카츠고로의 환생 기록) 등이 유명하다. 그의 초기 작품 ''혼쿄 가이헨''(本教外篇|혼쿄 가이헨일본어, 우리 교리의 외편)은 중국 예수회에서 저술한 기독교 문학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4]

히라타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일본 천황가 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방식"의 부흥을 주장하며 당시 유교 및 불교 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자주 드러냈다. 그의 첫 출판물인 ''카모쇼''(呵妄書|가모쇼일본어, 건방진 저술에 대한 꾸짖음, 1803)는 유교 철학자 다자이 슌다이의 불교 관련 저작을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또한 1841년에 저술한 ''텐초 무큐레키''(天朝無窮暦|덴초 무큐레키일본어, 불멸의 제국 궁정의 달력)에서는 천황에 대한 충성이 쇼군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해 1843년 사망할 때까지 아키타에서 가택 연금을 당했다.
주요 저서 목록:


  • ''지시마노 시라나미''(千島の白波|지시마노 시라나미일본어, 지시마의 흰 파도)
  • ''혼쿄 가이헨''(本教外篇|혼쿄 가이헨일본어, 우리 교리의 외편)
  • ''코도 타이이''(古道大意|고도 다이이일본어, 고대의 길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 ''타마노 미하시라''(霊能真柱|다마노 미하시라일본어, 영의 참된 기둥)
  • ''타마다스키''(玉襷|다마다스키일본어, 소중한 타스키)
  • ''조쿠 신토 타이이''(俗神道大意|조쿠 신토 다이이일본어, 민속 신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 ''코시초''(古史徴|고시초일본어, 고대 역사 색인)
  • ''코시덴''(古史伝|고시덴일본어, 고대 역사 해설)
  • ''시즈노 이와야''(志都能石屋|시즈노 이와야일본어, 고요한 동굴)
  • ''슈츠조 쇼고''(出定笑語|슈쓰조 쇼고일본어, 명상에서 벗어나 나눈 웃음 담론)
  • ''인도 조시''(印度蔵志|인도 조시일본어, 인도에 대한 진실의 모음)
  • ''모로코시 타이코덴''(唐土太古傳|모로코시 다이코덴일본어, 고대 중국 역사 전승)
  • ''센쿄 이분''(仙境異聞|센쿄 이분일본어, 선인의 땅에서 온 기이한 이야기)
  • ''카츠고로 사이세이 키분''(勝五郎再生記聞|가쓰고로 사이세이 기분일본어, 카츠고로의 환생 기록)
  • ''레이호 고가쿠 신케이스''(霊宝五嶽真形図|레이호 고가쿠 신케이즈일본어, 오악의 정확한 도표)
  • ''사이세키 가이론''(西籍慨論|사이세키 가이론일본어, 서양 학문에 대한 비난)
  • ''텐추키''(天柱記|덴추키일본어, 하늘 기둥의 기록)
  • ''카모쇼''(呵妄書|가모쇼일본어, 건방진 저술에 대한 꾸짖음)
  • ''코콘 요미코''(古今妖魅考|고콘 요미코일본어, 과거와 현재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조사)
  • ''텐초 무큐레키''(天朝無窮暦|덴초 무큐레키일본어, 불멸의 제국 궁정의 달력)
  • 1749년의 ''이노 모노노케로쿠''(稲生物怪録|이노 모노노케로쿠일본어, 이노의 유령 출현 기록)에 대한 해설.
  • ''고역성문''(古易聖文|고에키 세이분일본어, 1875년)
  • ''동몽입학문''(童蒙入学門|도모 뉴가쿠몬일본어, 1879년)
  • ''대발사정훈''(大祓詞正訓|오하라에노코토바 세이쿤일본어, 1881년)
  • ''적현태고전성문''(赤県太古伝聖文|세키켄 다이코덴 세이분일본어)

5. 영향

아쓰타네신학모토오리 노리나가실증주의 노선에서 벗어나 신비학적 경향을 띠며 일본 국학에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다. 그의 학설은 미토학과 함께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10], 민족주의적 저술은 메이지 유신 시기 도쿠가와 막부 타도와 보신 전쟁에서 싸운 ''존왕양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무라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동은 오쿠니 다카마사, 스즈키 시게타네를 포함하여 500명 이상의 제자를 모으는 결과를 낳았다.

아쓰타네는 학자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도 국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그의 학설이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라고 불렸으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히라타 신토 학파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으나, 신토를 국가 통제하에 두는 국가 신토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점차 배제되어 영향력을 상실했다.

최근에는 히라타의 국학에 대한 영향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시각도 제기된다. 그가 스스로를 "국학 4대 거장" 중 한 명으로 칭했지만, 이는 그가 직접 만든 표현이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그의 학문 체계는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여러 사상이 혼합되어 부자연스럽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저작은 일본 제국 정부보다는 종교 단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히라타가 일본 사상에 남긴 지속적인 영향 중 하나는, 모든 일본인이 황족이나 특정 귀족 가문뿐만 아니라 가미(신)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 영광스러운 우리의 땅은 가미가 기원하는 땅이며, 우리 모두는 가미의 후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삶과 존재를 부여한 부모님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조부모님과 증조부모님을 넘어 고대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원래 조상은 필연적으로 가미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5]

아쓰타네의 복고 신토와 '고도(古道)의 학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면서도, 일본인 개개인을 신분과 관계없이 '어 나라의 백성(御国の御民)'으로 규정하여 주체성을 부여했다. 아쓰타네 자신도 '천(賤)한 사내(男)인 우리에 이르기까지 신의 후손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며 신과 인간의 친밀함을 강조했다. 이는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했던 막번 체제 하에서, 천황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일본인으로서의 국민 의식이 싹트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실 정치에서는 천황과 쇼군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 체제를 '미요사시(위임)'의 논리로 설명했다. 이 논리는 '어 나라의 백성' 개념과 결합하여 촌락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천황이나 막부·번으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은 존재로 여기게 했고, 유령론(幽冥論)을 통해 얻은 내면적 확신을 바탕으로 근세 후기 촌락 공동체 붕괴 문제에 맞서는 강한 실천력을 부여했다. 이는 촌역인으로서 지도자들이 일반 민중에게 질서를 설명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동시에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상층부에 대한 비판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아쓰타네의 논리는 촌락 지도자들에게 강한 자각과 책임감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6. 평가

히라타 아쓰타네는 초기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학문 노선을 따랐으나, 점차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학문은 일본 국학에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으며, 신과 현세, 사후 영혼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불교, 유교, 도교, 난학,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연구하여 '팔가학'(八家の学)이라 불리기도 했다.

아쓰타네의 사상은 학자뿐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도 널리 퍼졌는데, 이는 그의 학문이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서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로 불리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막말 시기에는 미토학과 더불어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히라타 학파는 한때 영향력을 가졌으나, 국가 신토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일본어학사 측면에서는 신대 문자에 관한 연구를 남겼으며, 언어문자의 기원을 탐구했다. 사후 간행된 『고사본사경』은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고훈 해명과 더불어 오십음도의 역사 연구에 중점을 둔 저술로, 가모노 마부치의 『어의고』를 자주 인용했다. 그의 오십음 사상은 다이코쿠 다카마사 등에 의해 계승되어 음의설과 언령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6. 1. 부정적 평가

히라타 아쓰타네는 스승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학문적 방법론인 실증주의를 초기에는 따랐으나, 점차 그 노선에서 벗어나 신비학으로 기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학문은 불교·유교·도교·난학·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폭넓게 다루었지만, 그 체계가 너무 광범위하고 여러 요소가 혼합되어 복잡하며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사후 영혼의 행방과 구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신비주의적 색채가 강해졌다. 대표적인 예로, 신선계를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소년 토라키치의 이야기를 기록한 『선경이문』이나 죽음에서 소생했다는 소년의 이야기를 정리한 『가쓰고로 재생기문』 등은 그의 학문이 가진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또한 학문적 엄밀성 측면에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기독교 문헌을 번역한 『본교외편』에서는 원문의 내용을 자신의 사상에 맞게 임의로 변경했으며, 『고사성문』에서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와 같은 고전 신화를 자신의 독자적인 가치관에 따라 주관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아쓰타네의 사상은 미토학과 함께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나, 이러한 사상이 이후 일본의 국가주의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의 학파는 메이지 유신 초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신토를 국가 통제하에 두려는 국가 신토 체제가 형성되면서 점차 배제되어 영향력을 상실했다.

6. 2.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논문 "Dancing as if Possessed: A Coming Out Party in Edo Spirit Society." 2010
[2] 웹사이트 2004 Hirata Atsutane Exhibition https://www.rekihaku[...] 2022-01-10
[3] 서적 From Country to Nation: Ethnographic Studies, Kokugaku, and Spirits in Nineteenth-Century Japan Cornell University Press 2021-05-15
[4] 서적 Bakumatsu ishin henkakushi, Volume 1 Iwanami Shoten 2012-08
[5] 서적 Emperor and Nation in Japan, Political Thinkers of the Tokugawa Period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64
[6] 웹사이트 平田篤胤墓 http://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7] 서적 When Tengu Talk: Hirata Atsutane's Ethnography of the Other World University of Hawai‘i Press
[8] 웹사이트 国学の四大人(こくがくのしたいじん)の意味 https://dictionary.g[...] goo国語辞書 2020-07-22
[9] 문서 当時の久保田藩は財政危機にあって、藩士の給料から強制借上げが恒常的に行なわれていた。
[10] 웹사이트 歴博・ほっとひと息・展示の裏話紹介 https://www.rekihaku[...]
[11] 문서 別の伝記では、[[1801年]](享和元年)に本居宣長のことを知り、その門下に加わろうとするが、同年に宣長は没し、没後の門人としてその名を鈴屋に置いたとされる。
[12] 웹사이트 松岡正剛 千夜千冊「1653夜 田尻祐一郎『江戸の思想史』」 https://1000ya.isis.[...]
[13] 문서 篤胤は、服部中庸とはのちに鈴屋の[[本居大平]]を通じて知己となった。中庸は、篤胤を敵視する者が多い本居門下のなかでは篤胤に対し好意的で、古道の本義を伝えるよう篤胤を励ましている。
[14] 문서 『暦象新書』はイギリス人{{仮リンク|ジョン・キール|en|John Keill}}の天文学書のオランダ語からの訳述である。
[15] 문서 門人[[新庄道雄]]は、『古史徴』序文のなかで、師は非常に睡眠時間の少ない人で、布団の上にゆっくり寝るのは月に6回(5日間で一夜)ほどであり、それ以外以外は机に寄りかかってうたた寝するだけであったと記し、その精勤ぶりは実に感服に耐えないと述べている。
[16] 웹사이트 苅部直「日本思想史の名著を読む 第14回 平田篤胤『霊の真柱』」 http://www.webchikum[...]
[17] 문서 一般的には「顕明事」は「あらわにごと」、「幽冥事」は「かみごと」と訓読するが、篤胤は、それぞれ「あらわごと」「かくりごと」と詠むべきだと主張している。
[18] 문서 東総遊歴で得た岩笛は東京代々木の平田神社宗家に所蔵されている。
[19] 문서 篤胤は、文政3年から文政12年(1829年)までの9年間、寅吉を保護している。寅吉が神仙界に戻ると言ったときには、神仙界の者に宛てて教えを乞う書簡を持たせたりもしている。
[20] 문서 宣長の霊碑は、宣長自身によって3つ用意されていて、1つは実子である春庭のもとに、残る2つは後継者である大平のもとにあった。その大平が持っていた1つを篤胤に託したのである。
[21] 웹사이트 平田神社 http://hirata-jinja.[...]
[22] 웹사이트 武蔵国越谷郷 久伊豆神社 https://www.hisaizu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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