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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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촌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지역으로, 인왕산, 북악산, 경복궁, 사직단으로 경계가 정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장의동, 장동, 창의동 등으로 불렸으며, 북악산 기슭에 위치하여 북동, 북촌, 북리 등으로도 불렸다. 서촌은 세종대왕의 탄생지이며, 한국 무속 신앙과 풍수지리에서 중요한 곳이다. 주요 시설로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이 있으며, 사직단, 칠궁, 통인시장, 대림미술관 등 명소와 역사적 건축물들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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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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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글 | 서촌 |
한자 | 西村 |
로마자 표기 | Seochon |
일반 정보 | |
개요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효자동, 사직동에 있는 경복궁 서쪽 지역 |
특징 | 전통 가옥과 현대적인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예술가와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음. |
역사적 배경 | 조선 시대부터 중요한 지역으로, 중인 계층과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함. |
주요 명소 | 경복궁 인왕산 청계천 북촌한옥마을 서촌한옥마을 통인시장 윤동주 하숙집 터 박노수 미술관 대오서점 |
문화적 중요성 | 다양한 갤러리, 공방, 전통 공예점 등이 위치해 있어 예술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 |
교통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가깝고, 다양한 버스 노선이 운행되어 접근성이 좋음. |
최근 동향 |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 중임. 지역 주민과 예술가, 상인들이 협력하여 서촌의 독특한 매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 |
2. 범위
서촌의 범위는 인왕산, 북악(백악) 등 2개의 명확한 자연물과 경복궁과 사직단이라는 2개의 명확한 인공물로 정해진다. 동쪽 경계는 경복궁,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사직단 앞길(사직로 8길), 북쪽은 창의문과 북악산이다.[1][2] 현대의 서촌은 조선 시대 한성부 북부의 서쪽, 한성부 서부의 북쪽으로 이뤄진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 한성부 북부와 서부의 경계는 인왕산 필운대에서 경복궁 쪽으로 이어지는 길인 필운대로 1길과 자하문로 1~2길이다.[3] 현재 서촌 남부의 사직로는 조선 시대엔 없던 길이다.
서촌은 조선 시대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서쪽의 인왕산과 북쪽의 북악으로 인해 서울의 서쪽이자 북쪽으로 인식되었고, 행정구역상 서촌의 중북부는 한성부 북부, 남부는 서부에 속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원의 쿠데타,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의 주도, 영조의 젊은 시절, <몽유도원도>, <인왕제색도>와 같은 역사적 사건, 인물, 그리고 활발한 예술 활동도 다양한 지명이 생겨난 배경이 되었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며, 인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 성곽과 사직역 및 자하문 도시 철도 터널이 이 지역의 경계이다. 서촌은 "동"이라고 불리는 15개의 더 작은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촌은 북위 36° 39′ 25.794″, 동경 127° 24′ 4.3848″에 위치하며, 평균 해발고도는 33.141m이다.
3. 지명과 유래
'서촌'이라는 명칭은 승정원일기에서 영조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1773년 영조는 자신의 옛 집(창의궁)이 "서촌(西村)의 창의동(彰義洞)에 있었다"고 말했다. 영조의 집 창의궁은 현재 서촌 통의동 35번지 일대에 있었으므로, 영조 때에도 이 일대를 '서촌'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서촌'을 넓은 지역을, '창의동'을 좁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인식했다.
서촌이 도성의 서쪽 동네로 인식된 배경에는 서울의 내사산 중 우백호(서쪽 산)인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의 옛 이름은 '서산'이다. 또한 서촌 남부는 행정구역상 한성부 '서부'였으며,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은 '서궁'이라고 불렸다. 서촌을 대표하는 조선 시대 사대부 당파는 '서인'이었다. 조선 후기 조정만이 주도한 서촌 사대부들의 시모임은 '서림'(서쪽 숲), 마성린이 주도한 서촌 중인들의 시모임은 '서사'(서쪽 모임)였다. 이춘제의 서촌 별서(별장) 이름은 '서원'(서쪽 정원)이었고,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서촌 별서 이름은 '서정'(서쪽 정원)이었다. 이덕무는 서촌의 도성을 '서곽'(서쪽 성곽), 조정만은 서촌 청풍계 부근을 '성서'(도성 서쪽), 윤기는 서촌 필운대를 '서대'(서쪽 언덕)라고 불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2007년 김한배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서촌'이라는 이름을 현대에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조선 시대에 서촌이라는 명칭은 서소문 일대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현재의 서촌을 서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서촌'은 한성부 서부에서 유래한 지명이므로 서소문 일대에 한정할 수 없다. 한성부 서부는 서소문에서 서대문, 서촌 남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한성부의 5개 '부'를 5개 '촌'으로 바꿔 부른 사례는 동촌, 남촌, 북촌, 중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기록에서도 정동과 서소문, 현재의 서촌 일대를 모두 서촌으로 불렀다. 1899년 11월 27일 독립신문 기사에는 "서촌에는 영, 미, 덕, 법, 아국 다섯 나라의 공사관이 있고"라고 하였다.[12] 여기서 서촌은 정동 일대를 가리킨다. 《개벽》 1924년 6월호 김기전의 글에서는 "서소문 내외를 서촌"이라고 하여 서촌이 서소문 일대임을 밝혔다.[16]
반면 황학정 창건 당시 우궁수였던 성문영은 《황학정기》(1928)에서 현재의 서촌을 서촌이라고 불렀다. 이 글에서는 누상동 백호정, 필운동 등과정, 옥인동 등룡정, 사직동 대송정, 삼청동 운룡정을 '서촌오처사정'(西村五處射亭)이라고 불렀다.[13] 이 중 4개의 활터가 현재의 서촌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서촌의 활터라고 부른 것이다. 1년 뒤 간행된 《조선의 궁술》(1929)에서는 이를 '상대오처'(上垈五處)라고 불렀는데,[14] '상대'는 '우대'(웃대)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서촌과 우대는 서로 비슷하고 통용되는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종로구 지명위원회는 이 지역의 명칭을 '세종마을'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세종마을은 역사적으로 사용된 예가 전혀 없고, 현재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명칭이다. 더욱이 종로구는 2017년 서촌의 한옥체험관을 '상촌재'라 명명하여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상촌'(우대, 웃대)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우대'는 청계천 상류 또는 한성부 북부(현재의 서촌+북촌)를 뜻하는 말로, 현재의 서촌 지역에만 특정하여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주민단체인 ‘서촌탐구', ‘서촌주거공간연구회’ 등은 서촌의 역사적 지명은 장의동, 장동이 가장 타당하나, 서촌이라는 지명도 역사적 유래가 분명하고 풍부하며, 현대 사람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으므로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3. 1. 장의동, 장동, 창의동
조선 시대에 서촌은 한성부의 북부와 서부에 속했으며, '장의동'(藏義洞, 壯義洞), '장동'(壯洞), '창의동'(彰義洞) 등으로 널리 불렸다. 이 이름들은 세검정에 있는 장의사와 도성의 북문인 창의문에서 유래했다.[11] 예를 들어, 서촌 통인동에 있던 태종 이방원의 집은 '장의동 본궁'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신안동 김씨(장동 김씨)가 현재의 궁정동, 효자동, 청운동, 옥인동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어 '장동 김씨'로 불렸다.[11] 영조는 젊은 시절을 서촌 통의동의 창의궁에서 보냈으며, 자신의 집이 '장의동' 또는 '창의동'에 있다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집이 적선방이 아닌 '장동'에 있다고 한글 편지 봉투에 적었다.[11] '장의동', '장동', '창의동'은 한국고전종합DB에 468회나 등장하며, 조선 시대 한성부 지도에도 자주 나타난다. 이 지명들은 서촌을 대표하며, 서인 노론 사대부들의 중심지였다.[11]
3. 2. 북동, 북촌, 북리
서촌의 중북부는 조선 시대에 한성부의 북부에 속했으며, 이로 인해 북동, 북촌, 북리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불렸다. 현재는 북촌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만을 가리키지만,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 좌우의 서촌과 북촌을 모두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즉, 북동, 북촌, 북리는 한성부 북부라는 공식 행정 지명에서 유래했다.
18세기에 서촌 장의동에 본가를 두고 살았던 형조참판 이춘제는 1740년 현재의 서촌 옥인동 군인아파트 부근에 서원(西園)이라는 정자와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서원소정 자서'에서 "이 서원은 '북동'의 서쪽에 있고, 또 거처에서도 서쪽인지라 서원이라 한 것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북동은 장의동을 의미하며, 현재의 서촌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일대를 가리킨다.
이춘제의 아들 이창급은 자신의 본가가 있던 장의동과 아버지의 서원이 있던 옥류동(옥인동) 일대를 '북촌'이라고 불렀다. 그는 1753년에 쓴 '천우정 소회서'에서 "나는 북촌 사람이다. 북촌은 예전 옥류동의 청휘각, 청풍계의 태고정처럼 이름난 원림과 빼어난 구역이 많다. (...) 다만 한스러운 것은 북촌이 큰데도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 무척 적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18세기에 서촌 중북부를 '북동', '북촌'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춘제 부자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관아재 조영석은 한 시에서 "'북리'인 순화방, 예로부터 북악 아래"라고 썼고, 자신의 친구인 겸재 정선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한성의 '북리'인 순화방 백악산 아래에 살았다"고 적었다. 순화방은 현재의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일대를 가리키며, 바로 장동 지역이었다. 당시에 순화방이나 장동을 '북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 이종묵 국어국문과 교수는 "지금은 서촌으로 불리는 곳이 사실 진정한 북촌"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 문헌에서 ‘북촌’, ‘북동’, ‘북리’라고 하면 현재의 북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현재의 서촌을 말한다. 서촌엔 장동 김씨 등 유명한 선비가 많이 살았고, 백악과 인왕산 사이여서 경관적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 서촌을 북촌으로 바로잡을 수 없다면, ‘장동’이나 ‘북동’이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고 덧붙였다.
3. 3. 서촌
서촌은 경복궁 서쪽, 인왕산 동쪽, 남쪽 사직단 앞길(사직로 8길), 북쪽 창의문과 북악산 사이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와 서부에 속했으며, '장의동'(藏義洞, 壯義洞), '장동'(壯洞), '창의동'(彰義洞), '북동'(北洞), '북촌'(北村), '북리'(北里), '서촌'(西村), '우대' 등 다양하게 불렸다.
장의동, 장동, 창의동은 세검정의 장의사와 도성 북문인 창의문에서 유래했다. 북동, 북촌, 북리는 서촌 중북부가 한성부 북부에 속하고 북악(백악) 기슭에 있어 붙여졌다. 서촌은 서산(인왕산) 기슭이고 서촌 남부가 한성부 서부에 속했기 때문에, 우대(웃대)는 청계천 상류, 도성 안 북쪽에 있어 붙여졌다.
서촌이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서쪽 인왕산, 북쪽 북악으로 인해 서울의 서쪽이자 북쪽으로 인식되었고, 행정구역이 서촌 중북부는 북부, 남부는 서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원의 쿠데타, 장동 김씨 주도, 영조의 젊은 시절, <몽유도원도>, <인왕제색도>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 예술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장의동, 장동, 창의동조선 시대 서촌의 지명으로 '장의동', '장동', '창의동'이 널리 쓰였다. 장의동은 세검정 장의사에서 비롯되었으며, 창의문, 창의궁도 여기서 나왔다. 장의동은 원래 창의문 안쪽, 청풍계 맞은편인 현재 효자동, 궁정동 일대를 말하나, 정선의 《장동팔경첩》처럼 서촌 전체를 일컫기도 했다.[11] 태종 이방원의 집은 '장의동 본궁', 신안동 김씨 집성촌(현재 궁정동, 효자동, 청운동, 옥인동)은 '장동 김씨', 영조는 자신의 집(창의궁)이 '장의동', '창의동'에 있다고 했다. 김정희는 집(현재 적선동)이 '장동'에 있다고 했다.[11] '장의동', '장동', '창의동'은 <한국고전종합DB>에 468회나 나오며, 조선 시대 한성부 지도에도 등장한다. 장동은 서촌 대표 지명이며, 서인 노론 사대부 중심지였다.[11]
북동, 북촌, 북리서촌 중북부는 조선 한성부 북부여서 북동, 북촌, 북리로도 불렸다. 현재 북촌은 경복궁-창덕궁 사이 지역이지만, 조선 시대엔 경복궁 좌우 서촌-북촌을 모두 아울렀다. 18세기 이춘제는 옥인동에 '서원'을 짓고 "북동의 서쪽에 있고, 거처에서도 서쪽이라 서원이라 했다"고 했다. 여기서 북동은 장의동(현재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일대)이다.
이춘제 아들 이창급은 본가(장의동)와 아버지 서원(옥류동, 옥인동) 일대를 '북촌'이라 했다. 1753년 '천우정 소회서'에서 "나는 북촌 사람이다. 북촌은 ... 이름난 원림과 빼어난 구역이 많다"고 했다.
조영석은 시에서 "'북리'인 순화방, 예로부터 백악산 아래"라 했고, 정선을 "어려서부터 한성의 '북리'인 순화방 백악산 아래 살았다"고 했다. 순화방은 현재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일대, 즉 장동 지역이다.
서울대 이종묵 교수는 “조선 문헌에서 ‘북촌’, ‘북동’, ‘북리’는 현재 북촌이 아닌, 대부분 현재 서촌을 말한다. ... ‘장동’이나 ‘북동’이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고 했다.
서촌'서촌'은 <승정원일기>에서 영조 발언으로 확인된다. 1773년 영조는 “나는 신축년에 옛 집(창의궁)이 ‘서촌(西村)의 창의동(彰義洞)’에 있었다”고 했다. 영조 집 창의궁은 현재 서촌 통의동 35번지 일대이므로, 영조 때도 이 일대를 '서촌'이라 불렀다. 영조는 '서촌'을 넓은 영역, '창의동'을 좁은 영역 지명으로 인식했다.
서촌을 도성 서쪽 동네로 인식한 지명은 많다. 인왕산 옛 이름은 '서산'이다. 서촌 남부는 행정구역상 한성부 '서부'였고, 광해군 인경궁은 '서궁'이라 불렸다. 서촌 대표 사대부 당파는 '서인'이었다. 조선 후기 조정만 주도 서촌 사대부 시모임은 '서림'(서쪽 숲), 마성린 주도 서촌 중인 시모임은 '서사'(서쪽 모임)였다. 이춘제 서촌 별서는 '서원'(서쪽 정원), 정선 그림 속 서촌 별서는 '서정'(서쪽 정원)이었다. 이덕무는 서촌 도성을 '서곽'(서쪽 성곽), 조정만은 서촌 청풍계 부근을 '성서'(도성 서쪽), 윤기는 서촌 필운대를 '서대'(서쪽 언덕)라 했다. 이런 배경에서 2007년 김한배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서촌'을 다시 썼다.
서촌의 범위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서촌은 서소문 일대여서 현재 서촌을 서촌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서촌'은 한성부 서부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소문 일대에 한정할 수 없다. 한성부 서부는 서소문~서대문~서촌 남부 지역이다. 한성부 5개 '부'를 5개 '촌'으로 바꾼 사례는 동촌, 남촌, 북촌, 중촌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 일제 시대 기록에서도 정동과 서소문, 현재 서촌을 모두 서촌으로 불렀다. 1899년 독립신문 기사에는 “서촌에는 영, 미, 덕, 법, 아국 다섯 나라의 공사관이 있고”라고 했다.[12] 여기서 서촌은 정동 일대다. 《개벽》 1924년 글에서는 "서소문 내외를 서촌"이라 했다.[16]
황학정 창건 당시 성문영은 《황학정기》(1928)에서 현재 서촌을 서촌이라 했다. 누상동 백호정, 필운동 등과정, 옥인동 등룡정, 사직동 대송정, 삼청동 운룡정을 '서촌오처사정'이라 했다.[13] 5개 활터 중 4개가 현재 서촌에 있다. 《조선의 궁술》(1929)에서는 이를 '상대오처'라 했다.[14] '상대'는 우대(웃대)를 한자 번역한 것이다. 즉, 당시 서촌-우대는 비슷하고 통하는 지명이었다.
우대, 상대, 상촌조선 후기~대한제국 시기 '우대'(友臺), '상대'(上垈), '상촌'(上村)이 등장한다. 모두 고유어 '우대'(웃대)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안민영 시조집 《금옥총부》(1885?)에서는 필운대 중심 박효관 운애산방을 '우대소리' 현장으로 언급했다. 정교 《대한계년사》(1910)에서는 우대가 경아전, 별감들 사는 지역이라 했는데, 이는 《옥계청유첩》 서문에서 경복궁 서쪽 지역 기록과 일치한다. 1900년 황성신문 기사에는 우대를 '상촌'으로 바꿔 “상촌 사람들은 말투가 공경스럽다”라고 했다.[15] 《개벽》 1924년 글에서는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한양 내 신분, 직업 따라 지역 분화되어 광통교 위쪽을 우대, 서소문 내외를 서촌이라 했고, 우대에는 이배, 고직, 서촌에는 소론 일파가 살았다고 했다.[16]
우대는 청계천 상류라는 뜻으로, 조풍연은 "큰 개천(청계천)을 사이에 놓고 남쪽이 아래대인데, 북쪽이 반드시 우대는 아니다. ... 경복궁 서쪽 및 북쪽 동네를 우대라고 했었다. ... 우대 사람들은 우댓말을 써서 ... 발음 억양이 달랐다"고 했다. 즉, 도성 안 현재 서촌이 우대였고, 양반, 평민 모두 서울 대표 지역이 서촌(우대)이었다. 우대는 원래 인왕산 기슭 지역이나, 구한말 북촌 일대까지 포함했다. 즉,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 우대는 현재 서촌-북촌, 또는 한성부 북부 전체를 이르는 표현이었다.
현대의 서촌2013년 종로구 지명위원회는 이 지역 명칭을 '세종마을'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세종마을은 역사적 용례가 없고, 현재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종로구는 2017년 서촌 한옥체험관을 '상촌재'라 명명해 옛 이름이 '상촌'(우대, 웃대)이라고도 주장했다. '우대'는 청계천 상류, 또는 한성부 북부(현재 서촌+북촌)를 뜻해 서촌에 특정해 쓰기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주민단체 '서촌탐구', '서촌주거공간연구회' 등은 서촌 역사적 지명은 장의동, 장동이 가장 타당하나, 서촌도 역사적 유래가 분명, 풍부하고 현대인들이 널리 쓰므로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통의동은 서촌 한 동네다. 조선 시대 고위 관료들이 출근 위해 이곳을 지났고, 상인, 장인들이 상점을 열었다.[7] 이중섭, 이상범, 윤동주, 이상 등 역사 인물들이 거주했다.
3. 4. 우대, 상대, 상촌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 시기에는 ‘우대(友臺)’, '상대'(上垈), ‘상촌’(上村)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모두 고유어인 '우대'(웃대)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안민영의 시조집 《금옥총부》(1885?)에서는 박효관의 운애산방(雲崖山房)을 ‘우대(友臺)소리’의 현장으로 언급하였다. 정교의 역사서 《대한계년사》(1910)에서는 우대가 경아전(京衙前)과 별감들이 사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1900년 10월 9일 황성신문 기사에는 우대를 한자 '상촌'으로 바꿔 “상촌의 사람들은 말투가 공경스럽다”라고 하였다.[15] 《개벽》 1924년 6월호에서 김기전은 조선 시대 중후기로 갈수록 한양 내에서 신분과 직업에 따라 지역이 분화되어, 광통교 위쪽을 우대[上垈], 서소문 내외 지역을 서촌(西村)이라고 하였는데, 우대에는 이배(吏輩)와 고직(庫直)이, 서촌에는 소론 일파가 살았다고 기록하였다.[16]
우대는 청계천의 상류라는 뜻으로, 서울 토박이인 조풍연은 "큰 개천(청계천)을 사이에 놓고 남쪽이 아래대인데, 북쪽이 반드시 우대는 아니다. 이씨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및 북쪽 동네를 우대라고 했었다. 서울의 양반하면 우대 양반을 치는데 상민(평민)하고 통틀어 '우대 사람'이라면 서울 사람을 대표했었다. 우대 사람들은 우댓말을 써서 한강, 용산, 마포 등 강변 사람, 또는 왕십리 같은 미나리 장수와는 발음의 억양이 달랐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의 말이 우댓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의 조심하면서 바로잡아 주었다"고 말했다. 즉, 도성 안에서 현재의 서촌이 우대였으며, 양반이든 평민이든 서울을 대표하는 지역이 서촌(우대)이었다는 것이다. 또 우대는 원래 인왕산 기슭 지역을 가리켰으나 구한말에 안국동, 송현동, 계동, 가회동, 재동, 화동 등 북촌 일대까지 포함하였다고 전한다. 다시 말해 조선 말기나 대한제국 시기에 우대는 현재의 서촌과 북촌인 청계천 상류, 또는 한성부 북부 전체를 이르는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역사
서촌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역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랜드마크는 거의 없지만, 세종대왕 탄생지를 비롯한 많은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다. 인왕산과 가까워 전통적으로 무속 신앙과 풍수지리에서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으며, 사직단, 종묘, 경복궁 등이 있다. 보호 대상 역사적 랜드마크로는 600채가 넘는 한옥 군락, 이상과 이상범 가옥,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한 옥인동 박노수 가옥 등이 있다.
통의동은 서촌의 한 동네로, 조선 시대 고위 관료들이 출근길에 지나던 곳이며, 상인과 장인들이 상점을 열기도 했다.[7] 이중섭, 이상범, 윤동주, 이상 등 유명 역사 인물들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4. 1. 고려 시대
1067년 고려 문종은 현재의 서울 도성 일대에 고려 4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을 정했고, 1068년 남경에 행궁을 지었다. 고려의 4경은 개경(개성), 동경(경주), 서경(평양), 남경(한양)이다. 당시 한양과 함께 남경을 두고 경쟁한 후보지는 노원, 해촌, 마포대교 북단(용산) 등이었다. 1102년 고려 숙종은 남경의 경계를 북쪽의 면악(백악)과 서쪽의 기봉(인왕산), 동쪽의 대봉(낙산?), 남쪽의 사리(청계천?)로 정했다. 조선의 <<태조실록>>을 참고할 때 고려의 남경 행궁은 현재의 경복궁 북쪽 부분과 청와대 일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조선의 <<태조실록>>에 "고려 숙종 시대에 경영했던 (남경의) 궁궐 터가 너무 좁다. 그 남쪽을 궁궐 터로 정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서촌의 역사는 고려 때 지어진 남경 행궁이 지어진 때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보인다. 궁궐 옆에는 행궁 관련 시설과 민가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4. 2. 조선 시대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점 때문에 왕족이 많이 살았다. 태종, 무안대군, 세종,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이 서촌에 거주한 대표적인 인물이다.[1] 경복궁 서쪽 지역에는 일반인은 거의 살지 않았고, 왕족의 주거지, 세력가들의 경승지,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관련된 관서, 그곳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주거지가 전부였다.[1]조선 중기에는 광해군이 이 지역에 인경궁을 지었다. 인경궁은 대체로 사직단 앞길(사직로 8길)과 자하문로 17길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광해군의 몰락으로 버려졌다. 인경궁은 금천교(궁궐 들머리의 다리)와 사직단 앞의 남정문현(남쪽 정문 고개) 등 지명에 자취를 남겼다. 조선 후기에 영조가 서촌 남쪽의 창의궁에서 살았고, 김정희가 창의궁 남쪽의 월성위궁에서 살았는데, 두 곳은 모두 인경궁의 일부였다. 인경궁이 버려진 뒤 숙종은 인경궁 터에 사대부들이 들어가서 살지 못하도록 했고, 군인과 평민들은 들어가 살도록 허용했다. 그로 인해 군인과 평민들이 사는 작은 집들이 서촌 남부 누각동, 체부동, 필운동 일대에 대거 들어섰다. 숙종의 이런 결정은 당시 인구가 급증하는 도성 안에 더 많은 집을 공급하기 위한 조처로 추정된다. 사대부의 집은 규모가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서촌의 남부인 누각동과 체부동, 필운동 일대엔 궁궐이나 주변 관서에 근무하는 서리(書吏)나 경아전(京衙前) 등 중인들이 몰려 살면서 위항 문학 활동을 펼쳤다.
서촌의 중북부에는 여전히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는데, 특히 대대로 장동에 살았던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그 후손들에서는 무려 15명의 정승, 35명의 판서가 나왔다. 조선 후기에 이른바 '경화세족'들이 문과 급제와 청요직(핵심 보직)을 싹쓸이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장동 김씨 가운데 정승을 지낸 사람은 김상용과 그 후손인 김이교, 김상헌과 그 후손인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 김이소, 김달순,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김병시, 김병덕, 김병국, 김병학이었다. 이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한 집안에서 낸 최다 정승이었다. 장동 김씨들은 김조순 이후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60년가량 왕실과 혼인을 맺으며, 조선의 정치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다. 장동 김씨의 주거지 주변으로 창녕 성씨, 의령 남씨, 기계 유씨, 임천 조씨, 전주 이씨 등 서인과 노론의 사대부들이 어울려 살았다. 종로구 효자동 남쪽 창성동은 성수침과 성혼이 살았던 '창녕 성씨 동네'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장동은 서인과 노론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다.
4. 3.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서촌은 세종대왕 탄생지를 비롯한 많은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인왕산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무속 신앙과 풍수지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사직단, 종묘, 경복궁 등이 이곳에 위치한다. 600채가 넘는 한옥 군락, 이상과 이상범 가옥, 최근 복원되어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한 옥인동 박노수 가옥 등이 보호 대상 역사적 랜드마크이다.5. 주요 시설 및 명소
서촌은 세종대왕의 탄생지로, 많은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무속 신앙과 풍수지리에 매우 중요한 곳인데, 이는 인왕산과의 근접성 때문이다. 또한 사직단과 종묘, 경복궁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보호 대상 역사적 랜드마크로는 600채가 넘는 한옥 군락, 이상과 이상범 가옥, 그리고 최근 복원되어 [http://magazine.seoulselection.com/2013/12/31/historic-houses-in-seoul-2/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한 옥인동의 박노수 가옥 등이 있다.
5. 1. 주요 시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여러 시민단체들이 있다. 청와대의 연무관과 영빈관이 있으며, 정부서울청사의 창성동 별관도 있다.
효자동에 위치한 통인시장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시작되었다.[3] 한국 전쟁 이후 시장은 성장했고, 시장 내 점포들의 수요가 증가했다. 현재 시장에는 70개 이상의 상점[4]이 있으며, 여기에는 여러 식당과 관광객을 위한 식료품점도 포함되어 있다.
5. 2. 명소
- 사직단 - 사적 제121호
- 칠궁 - 사적 제149호,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2호
- 통의동 백송 - 천연기념물 제4호 (해제)
- 인왕산 수성동 계곡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1호
- 인왕산 백운동 계곡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40호
- 옥인동 서용택 가옥 -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23호 (해제)
- 체부동 홍종문 가옥 -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29호
- 필운동 홍건익 가옥 -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33호
- 박노수 가옥 -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1호
- 필운대 -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9호
- 백호정 -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59호
- 통인동 이상 가옥
- 통인시장
- 대오서점
- 보안여관
- 청풍계
- 송석원

한국 문학은 서촌 지역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랜드마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지역에는 많은 역사적 흔적이 있으며, 세종대왕의 탄생지이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무속 신앙과 풍수지리에 매우 중요한 곳이며, 이는 부분적으로 인왕산과의 근접성 때문이다. 또한 이 지역에는 사직단과 종묘를 비롯하여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의 보호 대상 역사적 랜드마크로는 600채가 넘는 한옥 군락, 이상과 이상범 가옥, 그리고 최근 복원되어 [http://magazine.seoulselection.com/2013/12/31/historic-houses-in-seoul-2/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한 옥인동의 박노수 가옥이 있다.
사직공원은 조선 시대에 설계되어 192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5] 이 공원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 중 하나이다.[6]
통의동은 서촌의 한 동네이다. 조선 시대에는 고위 관료들이 출근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갔으며, 상인과 장인들이 상점을 열었다.[7] 또한 화가 이중섭,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 유명 역사 인물들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대림미술관은 통의동 주거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복궁 근처에 있다. 대림미술관은 사진 박물관으로 시작하여, 디자인 및 광범위한 다른 예술 분야를 포함하도록 범위를 넓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시대 궁궐에서 유래한 방대한 예술품과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9] 박물관은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조선 왕조의 예술적, 문화적 유산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자 노력한다.[10]
참조
[1]
웹사이트
Rediscovering Seochon
https://www.koreatim[...]
2016-02-02
[2]
웹사이트
Latitude and Longitude Finder on Map Get Coordinates
http://www.latlong.n[...]
2016-02-29
[3]
웹사이트
Tongin Market (통인시장)
http://english.visit[...]
2016-02-02
[4]
웹사이트
종로 엔 다 있다
http://tour.jongno.g[...]
Jongno District Office
2015-12-14
[5]
웹사이트
Seochon , the place where the time slows down
http://times.uos.ac.[...]
The UOS Times
2015-12-14
[6]
웹사이트
Seochon
http://magazine.seou[...]
2015-12-14
[7]
뉴스
Galleries in Tongui-dong
http://www.korea.net[...]
The korea.net
2017-01-21
[8]
웹사이트
Seochon: Aromatic Alleyways in the West
http://english.visit[...]
Korea Tourism Organization
2015-12-14
[9]
웹사이트
Walking to the Seoul's oldest neighbourhood, Seochon Fair Travel
http://www.letsplayp[...]
PlayPlanet
2015-12-14
[10]
웹사이트
The Secret Journey to Seochon
http://smtimes.sookm[...]
2015-12-14
[11]
뉴스
세종마을 고집하더니 이번엔 ‘상촌’…‘서촌’은 무슨 죄?
http://www.hani.co.k[...]
2017-06-21
[12]
뉴스
셔울북촌사ᄂᆞᆫ엇던친구ᄒᆞ나이
https://nl.go.kr/new[...]
1899-11-27
[13]
서적
황학정 백년사
황학정
[14]
뉴스
"[단독]서울 경복궁 서쪽은 서촌?ㆍ세종마을?…지명 논란 ‘후끈’"
http://biz.heraldcor[...]
2015-03-16
[15]
뉴스
言語可整
https://nl.go.kr/new[...]
1900-10-09
[16]
서적
사라진 서울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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