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칸트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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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칸트 학파는 1860년대 독일에서 시작된 철학 운동으로, 1850년대 독일 유물론 논쟁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칸트 철학으로 돌아가려는 이 운동은 19세기 중엽, 정신을 물질의 부대현상으로 보는 유물론에 반대하며, 칸트의 초월철학을 재해석하고,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분야에서 칸트 철학을 발전시켰다. 신칸트 학파는 마르부르크 학파와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로 나뉘며, 1930년대 현상학의 부상과 함께 쇠퇴했다. 20세기 철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사회 철학과 정치 철학 분야에서 현대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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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칸트 학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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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조 | |
명칭 | 신칸트주의 |
로마자 표기 | Sin-kanteuijuui |
주요 관심사 | 인식론, 과학 철학, 윤리학, 문화 철학, 법 철학 |
영향 받은 사상 | 이마누엘 칸트, 헤르만 폰 헬름홀츠,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 |
영향을 준 사상 | 현상학, 실존주의, 분석 철학, 사회학, 문화 과학, 미학 |
주요 학자 | 헤르만 코헨 파울 나토르프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 에른스트 카시러 한스 켈젠 요나스 콘 리하르트 호니히스발트 브루노 바우흐 루돌프 슈타멘글러 |
상세 내용 | |
시대적 배경 |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
주요 목표 | 칸트 철학의 부흥 및 발전 |
특징 | 칸트 철학으로의 회귀, 과학적 방법론 중시, 가치 철학 강조, 문화 현상 분석 |
학파 | 마르부르크 학파 바덴 학파 (남서 독일 학파) |
주요 개념 | 선험적 방법 가치 관련 이상적인 의지 문화 과학 |
비판 | 형이상학적 요소 결여, 역사적 맥락 무시, 추상적 개념 과용 |
2. 역사
1860년대에 시작된 "칸트에게로의 복귀" 운동은 1850년대의 독일 유물론 논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1] 이 운동은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에두아르트 첼러의 연구 외에도, 쿠노 피셔의 칸트 관련 저작과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유물론의 역사》(《Geschichte des Materialismus》, 1873–75)를 통해 전개되었는데, 랑게는 선험적 관념론이 유물론적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 사이의 역사적 갈등을 대체한다고 주장했다.
피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독일 관념론자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와 선험적 미학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헤르만 코헨의 1871년 저서 《경험의 칸트 이론》(《Kants Theorie der Erfahrung》)을 촉발시켰으며, 이 책은 20세기 신칸트주의의 기초로 여겨진다. 피셔-트렌델렌부르크 논쟁과 코헨의 저작을 참고하여 한스 바이에힝거는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주석 작업을 시작했다.
신칸트 학파는 크게 세 학파로 나뉜다.
- 도시에 중심지를 둔 '''마르부르크 학파'''는 헤르만 코헨이 지도자였으며, 파울 나토르프와 에른스트 카시러가 주요 대표였다.
- 하이델베르크, 남서부 독일의 바덴에 중심지를 둔 '''남서부 학파''' ('''하이델베르크 학파''' 또는 '''바덴 학파''')는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 에른스트 트뢸취를 포함했다.
- 레오나르트 넬슨이 대표한 '''신-프리시안 학파'''는 후기 칸트 학파 철학자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으며, 과학 철학을 강조했다.[3]
마르부르크 학파는 인식론과 철학적 논리학을 강조한 반면, 남서부 학파는 문화 및 가치 이론(특히 사실-가치 구분) 문제를 강조했다.
신칸트 학파는 칸트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직관의 역할을 축소하고 개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은 이들을 사회주의 영역으로 이끌었으며,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에두아르트 번스타인의 수정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랑게와 코헨은 칸트 사상과 사회주의의 연관성에 주목했다.[4] 또한 코헨의 주요 저작을 통해 수정된 유대교 개념을 홍보하려 했다.
신칸트 학파는 인식론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존재론보다 인식론의 중요성을 옹호하며 독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토르프는 현상학에 영향을 주어 에드문트 후설이 초월적 관념론 어휘를 채택하게 했다. 에밀 라스크는 후설의 영향을 받았고,[5] 마르틴 하이데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카시러와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 논쟁은 하이데거가 칸트를 현상학의 선구자로 보는 관점을 만들게 했으며, 이는 오이겐 핑크에 의해 반박되었다. 신칸트 학파의 업적 중 하나는 현재까지 발행되는 ''칸트-슈투디엔'' 저널 창간이다.
나치즘의 부상으로 1933년까지 독일의 신칸트 학파는 해산되었다.[6]
2. 1. 제1기 (19세기 중엽)
19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모레스코트, 포크트, 루트비히 뷔히너 등의 "속류 유물론"이 퍼져나가면서, 자연과학적 지식만이 중요하며 철학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 이에 대한 반발로 칸트 철학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감각 생리학 연구를 바탕으로 지각이 주관적 조건에 의존한다는 점을 들어 칸트의 초월철학을 옹호했다. 그는 자연과학과 같은 "경험 과학"이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독단론을 비판했다.[1]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는 선험적 관념론이 유물론적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 사이의 갈등을 대체한다고 주장하며 신칸트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오토 리프만은 "칸트로 돌아가라!"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칸트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저서 『칸트와 그 아류』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비판적인 형이상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2. 2. 제2기 (1870년대~1890년대)
1870년대부터 칸트 철학 연구가 본격화되어 코헨의 《칸트 경험의 이론》(1871)이 나왔고, 빈델반트는 《역사와 자연과학》(1874)에서 개성기술적 방법과 법칙정립적 방법을 분류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 밖에 문헌학적인 칸트 연구가 1880년에 융성하여 아르놀, 파이힝거 등의 활약이 있었다.[1]2. 3. 제3기 (1890년대 이후)
1890년대 이후, 신칸트학파는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는 코헨, 나토르프, 카시러가, 서남(독일) 학파에서는 빈델반트, 리케르트, 라스크 등이 칸트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1896년에는 학술지 《칸트 연구》가 창간되어 신칸트학파의 학문적 교류와 발전에 기여했다. 이 시기부터 신칸트학파는 개별 학문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확산되었다.법철학 분야에서는 루돌프 슈탐러가 마르부르크 학파의 사상을 순수 법학에 적용했다. 교육학 분야에서는 나토르프가 헤르바르트 학파에 맞서 사회 교육학을 주장했다. 신학 분야에서는 알브레히트 리츨이 종교를 가치 판단의 총체로 보았으며, 트뢸치는 리츨의 제자로서 서남독일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막스 베버 역시 리케르트와 관련이 있었으며, 사회 문제에서는 베른슈타인, 슈타우딩거, 아들러, 포를렌더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코헨은 윤리적 사회주의를 주창했고, 나토르프는 이를 사회 이상주의로 발전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르누비에, 필롱, 라슐리에가,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케어드, 토머스 힐 그린이,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칸토니 등이 신칸트 학파에 속한다.
2. 4. 쇠퇴와 영향
신칸트학파는 20세기 철학, 특히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 철학과 정치 철학 분야에서도 현대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1898년경 G. E. 무어와 버트런드 러셀은 당시 영국과 미국 대학의 주요 철학자였던 칸트와 헤겔에 반발했다.[7] 이후 50년간 신칸트주의는 이들 대학에서 배척되었고, 대륙 철학에서만 존속했다.[8] 1960년대 피터 프레데릭 스트로슨은 ''감각의 한계''를 출판하여 신칸트주의를 재조명하면서도 초월적 관념론은 부정할 것을 제안했다.[8]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은 칸트의 실천 철학과 정언 명법을 부활시켰다.[8]
3. 주요 학파
신칸트 학파는 공통된 운동으로 뭉쳐 있다고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근본적인 의견 불일치를 보였다.[2]
마르부르크 학파와 서남독일 학파(하이델베르크 학파 또는 바덴 학파라고도 함)가 신칸트주의의 주요 학파로 꼽힌다. 마르부르크 학파는 인식론과 철학적 논리학을 강조한 반면, 서남독일 학파는 문화 및 가치 이론(특히 사실-가치 구분) 문제를 강조했다. 레오나르트 넬슨을 중심으로 한 '''신-프리시안 학파'''는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이름을 따 과학 철학을 강조했다.[3]
신칸트 학파는 칸트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윤리적 측면은 사회주의와 연관되어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에두아르트 번스타인의 수정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랑게와 코헨은 특히 칸트적 사상과 사회주의의 연관성을 강조했다.[4]
3. 1. 마르부르크 학파
헤르만 코헨이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학파를 형성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헤르만 코헨, 파울 나토르프, 에른스트 카시러 등의 마르부르크 학파는 과학적 인식의 기초를 다지려 하였고, 공간과 시간조차도 직관이 아닌 사고의 범주로 보았다.3. 2. 서남독일 학파 (바덴 학파)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 에밀 라스크 등을 중심으로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인식론과 가치론을 포괄하는 가치 철학을 구상했다.[1]서남독일 학파는 역사학,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의 인식 차이 또는 그 구별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인식 방법을 둘러싼 주제였으며, 딜타이와도 관심을 공유했고, 그의 제자인 게오르크 미슈에게도 이어졌다. 에드문트 후설 또한 비슷한 논의를 진행했다.[1]
막스 베버는 리케르트의 제자로서 신칸트 학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철학자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1]
4. 주요 개념 및 사상
신칸트 학파는 칸트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당대의 시대적 요구에 맞춰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인식론, 가치론, 윤리학, 사회주의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 에밀 라스크 등을 중심으로 한 바덴 학파(서남독일 학파)는 가치 철학을 발전시켰고, 막스 베버와 같은 학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1]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와 헤르만 코헨은 칸트 철학과 사회주의 사상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에두아르트 번스타인의 수정주의에 영향을 미쳤다.[4]
4. 1. 가치 철학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 에밀 라스크 등의 바덴 학파(서남독일 학파)는 인식론과 가치론을 포괄하는 가치 철학을 구상했다.[1] 이들은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고,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이들이 논쟁을 벌인 역사학,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의 인식 차이 또는 그 구별은 당시 유행하던 인식 방법을 둘러싼 주제이기도 했으며, 딜타이와도 관심을 공유했고, 이 논의는 그의 제자인 게오르크 미슈에게도 이어졌다.[1] 비슷한 논의가 에드문트 후설 사이에도 있었다.[1]
막스 베버는 후년에 리케르트의 제자로서 신칸트 학파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철학자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1]
4. 2. 사회주의와의 관계
신칸트학파는 칸트 철학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며, 특히 윤리적 측면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에두아르트 번스타인의 수정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4] 특히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와 헤르만 코헨은 칸트적 사상과 사회주의의 연관성을 강조했다.[4]5. 영향
신칸트 학파의 철학은 빈델반트에 의해 정신 과학에 자연 과학과 다른 학문으로서의 독자성이 부여되자, 같은 정신 과학으로 분류된 역사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철학사 연구가 진전되게 되었다. 이는 연구 성과가 알기 쉽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있어, 그 후 강단 철학의 방향성을 기초 지었다.
또한, 신칸트 학파는 철학뿐만 아니라, 형법학 등 기타 여러 학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2]
5. 1. 철학
신칸트학파는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회 철학 및 정치 철학 분야에서 현대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고 있다.[7]19세기 말, G. E. 무어와 버트런드 러셀은 칸트와 헤겔에 반발하며 신칸트주의를 배척했지만,[8] 1960년대 피터 프레데릭 스트로슨이 ''감각의 한계''를 출판하면서 신칸트주의를 재점화했다.[8]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은 칸트의 실천 철학과 정언 명법을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8]
피터 스트로슨과 윌프리드 셀라스의 영향으로 분석 철학에서도 칸트 철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다. 로버트 브랜덤은 셀라스의 프로젝트를 계승하여 분석 철학에 헤겔적 단계를 도입하려 했다.[14] 1980년대에는 질리언 로즈와 막스 베버 연구를 통해 신칸트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다. 칸트의 인식의 한계에 대한 관심은 게오르그 짐멜 등 독일의 반실증주의 사회학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5]
대륙 철학에서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와 장-뤽 낭시가 칸트의 초월적 이해를 차용했다. 고전적 보수주의 사상가 로저 스크루턴은 칸트의 윤리학과 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신칸트학파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칸트를 따라 선험적 도덕률과 정신, 문화의 가치를 복권하려 했다. 이들은 인과율에 지배되는 "존재"의 세계로부터 "당위"의 영역을 확립하고자 했다.
신칸트학파는 칸트 연구를 부흥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칸트 협회의 논문지 『칸트 연구』 (Kantstudien)는 오늘날에도 국제적인 칸트 연구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신칸트학파는 마르부르크 학파와 남서독일 학파(바덴 학파)로 나뉜다. 이들의 철학은 정신 과학에 독자성을 부여하고, 철학사 연구를 진전시켜 강단 철학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5. 2. 법학
루돌프 슈탐러는 마르부르크 학파의 생각을 순수법학에 응용하였다. 형법학 분야에서는 M. E. 마이어 등 많은 학자들이 당시의 자연주의적・법실증주의적인 형법 이론을 비판하고, 목적론적・가치 관계적인 이론을 수립했지만, 후에 한스 벨첼의 목적적 행위론에 의해 비판받아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2]5. 3. 사회과학
막스 베버는 리케르트와 관계가 있으며, 그의 사회학 방법론에 영향을 미쳐 가치 중립성과 이해 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했다.5. 4. 교육학
나토르프는 헤르바르트주의에 대해 사회교육학을 주장했다.[1]5. 5. 신학
알브레히트 리츨은 종교를 가치 판단의 총괄로 보았고, 트뢸치도 신학에서 리츨의 제자로 서남독일학파 계통이다.[2]6. 주요 인물
인물 | 출생 | 사망 |
---|---|---|
에두아르트 젤러 | 1814년 | 1908년 |
샤를 베르나르 르누비에 | 1815년 | 1903년 |
헤르만 로체[9] | 1817년 | 1881년 |
헤르만 폰 헬름홀츠 | 1821년 | 1894년 |
쿠노 피셔 | 1824년 | 1907년 |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 | 1828년 | 1875년 |
빌헬름 딜타이 | 1833년 | 1911년 |
아프리카 스피르 | 1837년 | 1890년 |
오토 리프만 | 1840년 | 1912년 |
헤르만 코헨 | 1842년 | 1918년 |
알로이스 리엘 | 1844년 | 1924년 |
빌헬름 빈델반트 | 1848년 | 1915년 |
요하네스 폴켈트 | 1848년 | 1930년 |
벤노 에르트만 | 1851년 | 1921년 |
한스 파이힝거 | 1852년 | 1933년 |
파울 나토르프 | 1854년 | 1924년 |
에밀 메이어슨 | 1859년 | 1933년 |
카를 포어랜더 | 1860년 | 1928년 |
하인리히 리케르트 | 1863년 | 1936년 |
에른스트 퇼취 | 1865년 | 1923년 |
요나스 콘 | 1869년 | 1947년 |
로베르트 라이닝거 | 1869년 | 1955년 |
에른스트 카시러 | 1874년 | 1945년 |
에밀 라스크 | 1875년 | 1915년 |
리하르트 호니히스발트 | 1875년 | 1947년 |
브루노 바우흐 | 1877년 | 1942년 |
한스 켈젠 | 1881년 | 1973년 |
레오나르트 넬슨 | 1882년 | 1927년 |
조지프 B. 솔로베이칙 | 1903년 | 1993년 |
관련 사상가
인물 | 출생 | 사망 |
---|---|---|
로버트 아담슨 | 1852년 | 1902년 |
앙리 푸앵카레[10] | 1854년 | 1912년 |
게오르크 짐멜 | 1858년 | 1918년 |
막스 베버 | 1864년 | 1920년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1] | 1883년 | 1955년 |
게오르크 루카치[12] | 1885년 | 1971년 |
헤르만 바일[13] | 1885년 | 1955년 |
니콜라이 하르트만 | 1882년 | 1950년 |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Philosophy
1963
[2]
웹인용
Neo-Kantianism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
2023-07-02
[3]
간행물
"J. F. Fries' Philosophy of Science, the New Friesian School and the Berlin Group: On Divergent Scientific Philosophies, Difficult Relations and Missed Opportunities"
2013
[4]
서적
Walter Benjamin and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Bloomsbury academic
2022
[5]
논문
Two Idealisms: Lask and Husserl
http://ontology.buff[...]
1993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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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é Ortega y Gas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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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 Lukács: Neo-Kantian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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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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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Simmel: On Individuality and Social Fo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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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マイケル・フリードマンの「Overcoming Metaphysics: Carnap and Heidegger」を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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