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항 (16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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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항(1601년)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사상(士常)이며 본관은 우계 이씨이다. 1613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박사제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성균관 직장, 의금부 통사랑 등을 거쳐 1626년 명경과에 입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 전적, 감찰, 형조좌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신계 현령, 예안·결성 현감, 경상도, 함경도 도사를 지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송곡 이서우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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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항 (160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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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경항 |
원래 이름 | 李慶恒 |
출생일 | 1601년 1월 12일 |
사망일 | 1643년 10월 17일 (향년 42세)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
국적 | 조선 |
별명 | 자(字)는 사상(士常)·중구(中久) |
본관 | 우계(羽溪)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정보 | |
배우자 | 전주 이씨 부인 |
자녀 | 4남 2녀 (장남 이덕우, 차남 이가우, 삼남 이희우, 사남 이서우, 장녀 이씨, 차녀 이씨) |
부모 | 이길남(부), 하동 정씨 부인(모) |
친인척 | 이성헌(친조부) 이감(증조부) 이희헌(종조부) 김세렴(사돈) 유형원(사돈) |
관직 정보 | |
직책 | 성균관 학유 |
임기 | 1628년 2월 29일 ~ 1628년 3월 23일 |
군주 | 조선 인조 이종 |
직책2 | 경상도 도사 |
임기2 | 1633년 3월 19일 ~ 1633년 9월 19일 |
군주2 | 조선 인조 이종 |
직책3 | 함경도 도사 |
임기3 | 1633년 9월 28일 ~ 1636년 8월 7일 |
군주3 | 조선 인조 이종 |
직책4 | 함경도 북청 판관 |
임기4 | 1636년 8월 7일 ~ 1637년 6월 5일 |
군주4 | 조선 인조 이종 |
정치 성향 | |
정당 | 무소속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1627년 식년문과 을과 급제 |
경력 | 문신 겸 시인 및 학자 겸 정치인, 서예가 출신 |
기타 정보 |
2. 주요 이력
1613년(광해군 6)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17년(광해군 7) 박사제자로 등용되었다. 1618년 음보로 출사하여 성균관 직장, 의금부 통사랑을 지냈다. 1626년 명경과(明經科)에 입격하였고, 162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권지, 학유, 전적(典籍), 감찰(監察), 형조좌랑, 공조좌랑, 종묘서령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신계 현령(新溪 縣令), 예안(禮安)·결성(結城)의 현감 및 경상도, 함경도의 도사(都事)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6)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17년(광해군 7) 박사제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음보로 출사하여 성균관 직장, 의금부 통사랑을 지냈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3. 생애
1626년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권지, 학유 등에 보임되었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 형조 정랑, 공조 좌랑, 공조 정랑, 군기시 첨정, 사복시 첨정,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의 내직을 거쳐, 신계 현령, 북청 판관, 예안 현감(縣監), 결성 현감, 경상도 도사, 함경도 도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그는 세태를 따르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으며, 벼슬을 잃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벼슬길이 멀면 부임하지 않거나, 부임했다가도 사직하고 돌아와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는데, 부모의 나이가 고령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목에 의하면 그는 "온 세상이 명예를 다투고 세력을 좇는데 어찌하여 대는 우물쭈물하다가 용납되지 못하였는가" 하니 "나는 천성이 할 수도 없지만 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였다.[1] 그는 과부가 된 큰어머니를 어머니처럼 섬겼으며, 사촌 형이 죽은 뒤 가난으로 고생하는 서출의 딸 둘의 혼인을 지원했다. 그 밖의 친척들 가운데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의 생계도 돌봐주었다.
1641년(인조 19) 5월 비변사 사록이 되었다가 2, 3일만에 신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고 정순(呈旬)을 청하자, 비변사 낭청의 논계를 받고 체직되었다. 5월 9일 다시 비변사가 그가 사록직을 더러운 직책으로 생각한다며 탄핵, 파출되었다.[15] 뒤에 복직하여 사복시첨정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다.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글을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았으며, 일이 없다면 독서로 소일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사복시첨정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재직 중 1642년(인조 20) 5월 4일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상을 치루던 중 너무 슬퍼하여 병을 얻어 몸이 수척해졌다. 1643년(인조 21년) 10월 1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한때 그가 지난날 북인이 자행한 사주(使嗾)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고, 이는 숙종 때 넷째 아들 이서우가 출사할 때 남인 중 청남 허적 등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 1. 출생과 가계
우계(羽溪)를 본관으로 하며, 자(字)는 사상(士常)·중구(中久)이다. 증조부는 이감(李戡), 할아버지는 주서(注書) 이성헌(李成憲)이다. 아버지는 선무랑을 지내고 증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이길남(李吉男)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영의정 문성공 정인지의 4대손이자 호조판서 하남부원군 정숭조(鄭崇祖)의 손녀이며 군수, 도사를 지낸 정욱(鄭彧)의 딸이다. 아버지 이길남의 본명은 영남이고 자는 석보였는데 뒤에 길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소암 임숙영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다.[1]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보의 7대손이며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경유의 딸이자, 병마절도사 제주목사를 지낸 이경록의 조카딸이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서는 이경록의 아들로 그의 4촌 처남이 된다. 그의 서처남은 이기축인데 정조대의 시인인 문무자 이옥의 선조가 된다.
위로 형 이경복(李慶復)이 있었는데 그가 과거에 합격할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으나, 형 이경복은 한확의 장남 한치인(韓致仁)의 7대손 교리 한영(韓詠)의 딸 청주한씨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의 형 이경복은 이름만 전하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그의 넷째 아들 송곡 이서우의 문집이 재간행되면서, 이서우의 문집 중 이길남 묘갈명에서 이경복의 결혼 사실과 부인 청주한씨가 한영의 딸인 것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송(암기)에 능하였다.[1] 미수 허목(許穆)에 의하면 그는 세속을 따르려 들지 않았고, 쉽게 남의 말을 따르면서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인물은 전하지 않으나, 그가 살던 동네 근처에 살던 미수 허목과 교류하였다. 후일 이경항의 넷째 아들 이서우는 미수 허목의 문하에서도 글을 배웠으며, 허목은 1675년(숙종 1) 넷째 아들 이서우가 북인 대북계열이라는 이유로 허적의 공격을 받을 때 이서우를 두둔, 감싸주었다. 백강 이경여(李敬輿)와도 간혹 교류가 있었다.
그는 소암 임숙영(疎庵 任叔英)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3. 2. 초기 생애 ( ~ 1613년)
1601년에 태어났으며, 자(字)는 사상(士常) 또는 중구(中久)이고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이감(李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서(注書) 이성헌(李成憲)이고, 아버지는 선무랑을 지내고 증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이길남(李吉男)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문성공 정인지의 4대손이며 호조판서 하남부원군 정숭조(鄭崇祖)의 손자인 정욱(鄭彧)의 딸 하동정씨(河東鄭氏)이다. 아버지 이길남은 본명이 영남이고 자는 석보였는데 뒤에 길남으로 개명하였다. 임숙영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다.[1]
부인은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7대손이며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경유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서는 이경유의 동생 이경록의 아들로 그의 4촌 처남이 된다.
위로는 형 이경복(李慶復)이 있었는데, 과거에 합격할 무렵까지는 생존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형 이경복은 한확의 장남 한치인(韓致仁)의 7대손 교리 한영(韓詠)의 딸 청주한씨와 결혼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암기에 능하였다.[1] 허목(許穆)에 의하면 그는 세속을 따르려 들지 않았고, 쉽게 남의 말을 따르면서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인물은 전하지 않으나, 그가 살던 동리 근처에 살던 허목과 교류하였다. 1613년(광해군 6년) 식년사마시 생원에 3등, 그해 식년사마시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1]
3. 3. 관료 생활 (1613년 ~ 1643년)
1613년(광해군 6)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17년(광해군 7) 박사제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음보로 출사하여 성균관 직장, 의금부 통사랑을 지냈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의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처사촌인 이서(李曙)의 도움으로 무마되었다. 1623년(인조 1)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에 제수되었다.[4] 1626년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권지, 학유 등에 보임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형편이 없는 친척들도 자신이 직접 보살펴주었다. 모친의 3년상을 치루던 중 병에 걸려 수척해졌고,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한때 북인이 자행한 사주(使嗾)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숙종 때 넷째 아들 이서우가 출사할 때 남인 중 청남 허적 등에 의해 의혹이 다시 제기되기도 했다.
3. 3. 1. 광해군 치하 (1613년 ~ 1623년)
1613년(광해군 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후 잠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년) 6월 해주목사 최원행(崔源行)의 역모 가담 사건으로 해주옥사가 발생하자 잠시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나, 별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2] 1617년(광해군 9년) 박사제자(博士弟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음보로 출사하였다.
3. 3. 2. 인조반정 이후 (1623년 ~ 1643년)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 계열에 속했던 그의 과거 전력이 문제시되어 유적[8] 삭제 대상에 올랐으나, 처사촌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성균관에 압력을 행사하여 무마되었다.[9]
1626년(인조 4년) 명경과(明經科)에 발탁되었고,[1] 통사랑으로 재직 중[5] 1627년(인조 5년) 9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3위로 급제, 권지성균관학유로 등용되었다. 1628년(인조 6) 성균관 학유, 1629년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 형조 정랑, 공조 좌랑, 공조 정랑, 군기시 첨정, 사복시 첨정,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의 내직을 거쳐, 신계 현령, 북청 판관, 예안 현감(縣監), 결성 현감, 경상도 도사, 함경도 도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1628년(인조 6) 1월 3일 유효립의 옥사 사건 당시 이계선(李繼先) 등의 모의에 동참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의금부의 형문을 받았다.[6] 1월 4일 투옥되었으나,[7]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곧 풀려났다.
1628년(인조 6) 12월 25일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숙영의 문인이었으나 대북 계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1629년 3월 12일 정사에서 이만(李曼)ㆍ김효건(金孝建) 등과 함께 그해 청나라에 파견될 동지사의 서장관 후보로 거론되었다.[10] 1629년 형조좌랑으로 있다가 그해 4월 10일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임명되었다. 함경도도사로 임명된 직후 1629년 4월 10일 인조는 그를 통정대부로 승진시켰으나,[11] 곧 뜻을 바꾸어 승진을 취소하였다. 승진 취소 사유는 알 수 없다.
1630년 형조정랑, 그해 10월 14일 이조정랑, 1631년 11월 공조정랑을 거쳐 그해 11월 기주관, 12월 기사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632년(인조 10)에는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추숭도감의 낭청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5월 김상용 이하 추숭도감 관원들을 시상할 때 낭청들은 6품으로 승진되거나, 이미 6품인 이들을 승진하게 하였으나, 어떤 이유로 승진하지 못했다.
3. 3. 3. 지방관 생활
1629년 형조좌랑을 거쳐 그해 4월 10일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임명되었다.[10] 함경도도사로 임명된 직후 1629년 4월 10일 인조는 그를 통정대부로 승진시켰으나[11], 곧 승진을 취소하였다.
1633년(인조 11) 3월 19일 경상도도사(都事)로 부임, 그해 9월 19일 이임하였다.
1636년 8월 7일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가 1637년 6월 5일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어 상경하였다.[12] 그해 6월 9일 금교역 찰방(金郊驛察訪)에 임명되었으나, 황해도관찰사 김세렴(金世濂)과 사돈이라 하여 이조에 체차를 청하여 허락받았다.[13] 김세렴은 그의 둘째 아들 이가우의 장인이었다. 그해 6월 9일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임명되어 6월 16일 도임하였다.
1637년 7월 예안현감에 부임했으나, 1638년 2월 스스로 사직서를 올리고 물러났다.[14] 예안현감 부임 직후 지역 품관(品官), 향리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계암 김령은 이경항이 현감으로 부임하자 품관들이 보러 들어갔는데, 침묵하며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매를 맞은 하인이 매우 많았다 한다. 1638년 2월 28일 사직서를 냈는데, 계암 김령에게 "내가 만약 그대로 유임된다면 틀림없이 좌수 윤동창(尹東昌)에게 무함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동창의 사람됨은 이경항도 알았던 것이라 하였다. 그가 예안현감에서 물러난 뒤 그를 비판하는 말이 나왔는데, 김령은 '실제와 달리 지나치게 헐뜯은 것은 모두 관아의 아전들과 좌수 윤동창(尹東昌)이 지어낸 말'이라 하였다.
그는 신계 현령(新溪 縣令), 예안·결성(結城)의 현감 및 경상도, 함경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3. 4. 사망과 사후
1642년(인조 20) 5월 4일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상을 치르던 중 너무 슬퍼하여 병을 얻어 몸이 수척해졌다. 1643년(인조 21년) 10월 1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1]
처음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사동(寺洞, 절골부락)) 광주 관아 남쪽 산에 장사지냈다. 3년 뒤 둘째 아들 이가우(李嘉雨)도 요절하였다. 1667년(현종 8) 부인 전주이씨가 사망하자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또는 언주리(현, 청담동) 헌릉 근처, 이지방의 묘소 왼쪽 언덕에 부인 전주이씨를 합장하였다.
사후 넷째 아들 이서우가 윤휴, 허목 등에 의해 청요직에 천거될 때마다 영상 허적은 이서우의 아비 이경항이 흉론(대북)에 물들었다며 임용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경항과 같은 동네에 살던 허목이 '신이 그 아비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그가 끝내 흉론(凶論)에 물들지 아니하였음을 안다'고 변호하였다.
묘갈명은 미수 허목이 지었고, 뒤에 증(贈)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20세기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 뒷산 자좌(子坐)로 이장했다가, 1995년 10월 19일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확장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절골(사동) 부락의 선영 근처로 이장하였다. 2017년 8월 성남시 도시개발계획으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1리 산77번지와 단강1리 산90번지 작실, 원주 영정각 뒷산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1995년 10월 9일 이장 시 구 묘소에서 넷째 아들 이서우가 제작 매설한 지석 8매 중 3매가 발견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이성헌 | 1534년 ~ 1601년 |
조모 | 전주이씨 | 이한(李澣)의 딸 |
조모 | 전주이씨 | 이봉령(李奉令), 1536년 ~ 1613년, 광원수 이구수의 딸 |
아버지 | 이길남 | 자는 석보(錫甫), 초명은 영남(英男), 1561년 ~ 1644년 |
어머니 | 하동정씨 | 1562년 ~ 1642년, 군수, 도사를 지낸 정욱(鄭彧)의 딸, 정숭조의 증손녀 |
형 | 이경복 | 1596년 ~ ?년, 1627년 이후 사망 |
형수 | 청주한씨 | 1596년 ~ ?년, 교리 한영(韓詠)의 딸 |
부인 | 전주 이씨 | 1600년 ~ 1667년, 효령대군의 7대손 이경유의 딸, 완풍부원군 이서의 사촌누이 |
장남 | 이덕우 | 1617년 ~ 1687년 |
자부 | 인천채씨 | 1618년 ~ ?년, 충의위 채극계(蔡克稽)의 딸 |
차남 | 이가우 | 1621년 ~ 1646년, 증 이조참판 |
자부 | 선산김씨 | 1620년 ~ 1668년, 동명 김세렴의 딸, 성암 김효원의 증손녀 |
삼남 | 이희우 | ? ~ 1705년 |
사남 | 이서우 | 1633년 ~ 1709년 |
자부 | 청송심씨 | 1631년 ~ 1673년, 참판 심광위의 딸 |
자부 | 이름 미상 | |
자부 | 첩, 이름 미상 | |
장녀 | 우계이씨 | |
사위 | 윤득열 | 1597년 - 1656년, 감사, 본관은 파평, 윤사로의 손자 윤수강의 5대손 |
차녀 | 우계이씨 | 요절 |
삼녀 | 우계이씨 | |
사위 | 이서규 | 1630년 ~ ?, 교관, 별검, 성종왕자 익양군 후손[17] |
사녀 | 우계이씨 | 요절 |
외조부 | 정욱 | 1527년 - 1570년 |
외조모 | 순흥안씨 | 별좌 안영우(安英祐)의 딸, 외조부 정욱(鄭彧)의 본처 |
외조모 | 창원황씨 | 황윤규(黃潤奎)의 딸 |
장인 | 이경유 | 1562년 - 1620년, 효령대군의 7대손, 병마절도사 역임 |
장모 | 연일정씨 | 정희석(延錫禧)의 딸, 자녀 없음, 아버지 이경유의 첫째 정실 |
장모 | 죽산박씨 | 병절교위(秉節校尉) 박문좌(朴文佐)의 딸, 아버지 이경유의 둘째 정실, 부인 전주이씨의 생모 |
서장모 | 장흥고씨 | ? - 1644년, 옥구현감 고언명(高彦命)의 서녀, 장인 이경유의 첩 |
서처남 | 이기축 | 1589년 ~ 1645년 |
사돈 | 한영 | 1580년 - 1624년 |
5. 평가
권시중에 의하면 그는 예안 현감 재직 시 강직하고 과감하여 결단력이 있었다. 영이 엄중하여 아랫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물러날 때에 모든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더 있기를 바랐다 한다.[18]
계암 김령(溪巖 金土+令)은 '예안 현감 이경항(李慶恒)이 처음에 부임했을 때는 치정에 대한 명성이 아주 자자했다. 조금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아전들을 위엄으로 통제했다. 이 때문에 현에서는 읍민들의 마음이 쏠려 떠날 때 도로를 가로막는 일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김령은 '우리 읍의 전임 수령 이경항(李慶恒)은 얼음을 채취할 때 민간에 역(役)을 부과하지 않고 지난 분기 내의 미수질(未收秩)을 기준으로 부과했기 때문에 미수질 장정 1명당 얼음 2정(丁)씩을 납부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남아돌아서 질중(秩中)에 고루 역을 부과하지 않고 그 장부를 불살라 버렸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김령에 의하면 그가 예안 현감 재직 시, 도 관찰사, 병마절도사, 사신 등이 올 때 접대하는 폐단을 없앴다고 한다. 김령은 그가 예안현감 재직 시 '감사가 매달 20일 이후에 우리 고을로 오는데, 이바지할 찬거리를 민간에서 거두지 말고 관에서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였다. 전에는 크고 작은 사신과 빈객이 방문하면, 온갖 물목을 백성에게 내도록 요구하여 이미 고질적 폐단이 되었다. 이경항(李慶恒)이 비로소 중지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참조
[1]
문서
첨정이공묘갈명, 미수기언
[2]
일기
죄인 전 감찰 유회·허통·이경림 등이 진술하다
1616-06-29
[3]
실록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1628-12-25
[4]
일기
정찬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5]
문헌
이경항 편
[6]
일기
정국에서 죄인 이계선 등을 나수하였다
[7]
일록
응천일록 3권
[8]
문서
유생들의 명부. 유적에서 삭제되는 것을 선비로서의 치욕으로 여겼다.
[9]
실록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1628-12-25
[10]
일록
응천일록 4권
[11]
일기
정사가 있었다
[12]
일기
정사가 있었다
[13]
일기
본도의 감사 김세렴과 상피 혐의가 있는 금교 찰방 이경항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14]
서적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15]
일기
신병을 핑계하고 정순한 사록 이경항을 파출하고 후임을 가려서 차출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 대신의 계
[16]
문집
이군묘갈명
[17]
문서
익양군 회-용천군 이수한(龍川君 李壽朋+鳥)-기성군 이현(箕城君 李俔)-평림군 이지윤(平林君 李祉胤)-이후석(李後奭)-이서규
[18]
서적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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