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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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창손은 1402년에 태어나 1487년에 사망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섬기며 영의정을 세 번 역임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고,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수양대군을 지지했으며, 성종의 즉위를 도왔다.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며, 사후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되었으나 중종 때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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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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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창손 |
원어명 | 鄭昌孫 |
출생일 | 1402년 3월 11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노환으로 병사 |
사망일 | 1487년 1월 27일 (향년 84세) |
별명 | 자는 효중(孝仲) 호는 동산(東山) 시호는 충정(忠貞) |
학력 | 1423년 사마시 급제 1426년 식년문과 급제 |
경력 | 문신, 정치인, 언어학자, 유학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청풍군부인 청풍 정씨(淸風郡夫人 淸風 鄭氏) |
자녀 | 정괄(3남) |
부모 | 정흠지(부), 최씨 부인(모) |
친인척 | 김질(사위) |
형제 | 정갑손(형) |
웹사이트 | 정창손 |
관직 | |
직책 | 조선국 승문원 예하 부정자 (朝鮮國 承文院 隸下 副正字) |
직책2 | 조선국 의정부 영의정 겸 섭정승 (朝鮮國 議政府 領議政 兼 攝政丞) |
임기2 | 1476년 7월 31일 ~ 1476년 8월 26일 |
군주2 | 조선 성종 이혈 |
군주 | 조선 세종대왕 이도 |
섭정 | 영의정 황희(前) |
임기 | 1426년 3월 16일 ~ 1441년 4월 30일 |
정당 | 훈구파 세력 |
2. 생애
정창손은 1402년 태어나 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고려사》, 《세종실록》 등 여러 중요 서적 편찬에 참여하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에는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계유정난 때에는 수양대군(훗날 세조)을 적극 지지하여 정난공신이 되었고, 세조 즉위 후 이조판서 등 요직을 맡으며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후 예종, 성종 대까지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특히 성종 대에는 세 차례나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성종의 생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현덕왕후 복위 문제에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
1485년 83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487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연산군 대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 폐출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었지만, 조선 후기 사림파에 의해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한 인물로 지목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 1. 생애 초기
1402년 동래 정씨 정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학문에 능통하여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1423년(세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그의 학문적 재능은 세종에게 인정받아 집현전에 등용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치며 학자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2. 1. 1. 출생과 가계
동산 정창손은 1402년 동래 정씨 정흠지(鄭欽之)와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흠지는 중추원사를 지냈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고려 말 중대광(重大匡) 봉원군(蓬原君)을 지낸 정량생(鄭良生)이고, 할아버지는 한성부윤을 지낸 정부(鄭符)이다. 어머니 전주 최씨는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지낸 최병례(崔丙禮)의 딸이다. 형은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정갑손(鄭甲孫)이다.할아버지 정부는 사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아버지 정흠지는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고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는데, 이는 모두 정창손이 훗날 높은 관직에 오르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창손은 태어날 때부터 생각이 남달랐으며,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보통 아이들과는 크게 달랐다고 평가받았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에 능했으며 남다른 야망을 지녔다. 소년 시절 학문을 익히면서는 견문(見聞)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문장(文章)에도 능했다. 일찍이 처부(妻父) 정지(鄭持)의 딸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과 결혼하였다. 1423년(세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2. 1. 2. 수학과 과거 급제
1423년(세종 5년) 사마시를 거쳐,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교리를 거쳐 학문의 출중함을 세종으로부터 인정받아 집현전에 보임되었다.1426년(세종 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동진사(同進士)에도 급제하여 권지(權知),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승문원 박사와 집현전 수찬에 임명되었으며 경연 시강관,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 뒤 집현전 저작랑·교리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2. 2. 관료, 정치 활동
정창손은 세종 대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의 주요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활동한 문신이자 관료이다. 그는 관직 생활 초기에 《고려사》, 《세종실록》 등 중요한 역사서 편찬 사업에 참여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승정원 승지와 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세종의 분노를 사 파직되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후 계유정난에서는 수양대군(훗날 세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정난 공신이 되었으며, 세조 즉위 후에는 이조판서 등 핵심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성종 대에는 원로 대신으로서 성종의 즉위를 돕고 덕종 추존 논의를 주도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복위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 세조의 뜻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 2. 1. 초기 관료 생활과 서적 편찬
1449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부제학으로서 춘추관 편수관(編修官)과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며,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 《고려사절요》, 《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편수관으로서 책의 편차(編次), 즉 순서를 정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1450년(세종 32년) 책이 완성되어 미처 올리기도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였다. 문종은 사국(史局)에 명하여 역사서 편찬을 마무리하도록 지시했고, 정창손은 밤낮으로 《고려사》 편수에 매진했다.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발탁되어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겸임하면서도 계속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우승지(右承旨)로 자리를 옮겨 왕명 출납을 담당했으며, 8월에는 《고려전사 (高麗全史)》를 완성하여 올리자 문종으로부터 안장을 얹은 말(鞍馬)과 옷감을 하사받았다. 그해 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이후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 관료들 사이에서는 그가 남달리 청렴하고 절조를 지키며 사사로운 재산 증식에 힘쓰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사헌으로서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2. 2. 2. 훈민정음 창제 반대
정창손은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전에 《삼강행실》을 한글로 번역하여 반포했음에도 충신, 효자, 열녀가 눈에 띄게 늘지 않은 것을 근거로 들었다. 사람의 행동은 타고난 자질에 달린 것이지, 글이나 교육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한글 창제나 경전 번역은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정창손의 이러한 주장은 "사람이 (효도 등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는 성리학을 포함한 유교에서 강조하는 자기 수양을 통한 군자 양성이라는 기본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심각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상소를 읽은 세종대왕은 크게 분노하며 정창손을 향해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그를 파직시켰다.
2. 2. 3.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제학,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과 협력하여 수양대군을 지지하였다. 비록 형 정갑손의 딸이 문종의 후궁이었으나, 그는 수양대군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도왔다.1453년 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정창손은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하며 세종실록의 남은 부분과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같은 해(1453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외척 홍원용(洪元用)과의 상피관계(相避關係) 문제로 사헌부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단종의 명으로 이조판서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황보 인과 김종서 등 소수의 재상들이 정무를 독단적으로 처리한다고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후 1453년 10월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였다.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고 영의정부사 자리에 오르자, 정창손은 수양대군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며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다. 같은 해 10월, 정창손은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은 "오늘날 정직하고 신실하기로는 정창손 같은 이가 없다"고 평가하며 그를 유임시켰다. 이조판서로 재임명된 후에도 그는 뇌물이나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여 높은 명망을 얻었다.
계유정난 이후에도 사헌부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을 거치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 관직을 유지했다.
2. 2. 4. 성종 추대와 덕종 추존
정희왕후 등이 후사 없이 사망한 예종의 뒤를 이을 왕을 정할 때, 정창손은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자을산군(훗날 성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며 조정에 계속 참여했다. 1471년(성종 2) 나이를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치사, 致仕)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종을 지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2등관(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고, 다시 봉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472년에도 고령을 이유로 다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대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70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왕으로 높이고 싶어 하자, 정창손은 이를 헤아려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는 데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앞장섰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었으므로 예종의 아들 자격으로 왕이 된 것이라며 의경세자의 추존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창손은 왕의 뜻을 이해해 줄 것을 설득하며 이들과 맞섰고, 결국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을 성사시켰다.
성종 즉위 초, 남효온(南孝溫)이 상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기에 세조의 꿈에 나타났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던 노산군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소릉 폐출에 관여했던 정창손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남효온이 다른 뜻을 품고 세조를 모독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현덕왕후 복위를 막았다. 훗날 현덕왕후가 복위되면서 정창손은 이 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2. 3. 생애 후반
세조 즉위 이후에도 정창손은 예종, 성종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특히 성종 재위 기간에는 세 차례나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되는 등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고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고, 마침내 1485년 83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그는 폐비 윤씨의 폐출을 결정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연산군 대 갑자사화 때 그가 부관참시를 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어 관작과 명예를 회복하였으나, 조선 후기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한 인물로 지목되어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게 되었다.
2. 3. 1. 영의정 삼선과 은퇴
1475년(성종 5년) 다시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삼공(三公)의 중신(重臣)들을 경처럼 노성(老成)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진정할 수가 없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송나라의 승상(丞相) 문언박(文彦博)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듬해 성종이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으로 폐하려 할 때, 그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간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폐비 윤씨의 폐출 당시 정청에는 참여하였고, 이때 회합에 참여한 것이 후일의 화근이 되었다.1480년 성종이 계비를 간택하여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를 왕비로 책봉하자, 책봉 고명을 받아오는 진책정사(進册正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다. 1483년에는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하면서, 세자서연(世子書筵)에 매일 빈객 1인, 낭청 2인, 대간 각 1인으로 하여금 진강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1484년 이후 여러 차례 영의정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며 사직을 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거듭 사퇴 상소를 올린 끝에 1485년 마침내 83세의 고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2. 3. 2. 사망과 사후
1485년 영의정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정의 원로이자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다. 1486년 그가 병석에 눕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원 의관과 약물을 보내 진료하게 했다. 관료 생활 중에도 서실을 열어 문인들을 가르쳤으며, 문하에서 서거정 등이 배출되었다.정창손은 박학강기(博學强記)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키가 크고 풍채가 준수하며 수염이 배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고 전해진다. 정승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높은 명망을 얻었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활동하다가 1487년(성종 17년) 1월 27일 자택 정침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였다.
성종은 "백관의 귀감이 되는 청빈한 재상을 잃었다"며 애도하고 3일간 조회를 중단했으며, 후한 장례비를 내려 부의하였다. 사후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영예를 얻었고 청백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시호는 충정(忠貞)이 내려졌다.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군 방이동에 묻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평군 부용리로 이장되었다. 이후 도시 개발로 인해 1970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번지 하개산(荷開山) 아래로 다시 옮겨졌다. 그의 묘역 석물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사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폐비 윤씨의 사사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묘정에서 출향되었다. 또한 윤필상, 한치형, 한명회, 어세겸, 심회, 이파, 김승경, 이세좌, 권주, 이극균, 성준 등과 함께 십이간(十二奸)으로 지목되어 관작이 추탈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1488년(성종 19년) 문인 서거정이 글을 짓고 세웠던 신도비 역시 파괴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중종에 의해 신원되어 복권되었다. 1514년(중종 14년)에는 청백리로도 복권되었으며, 부관참시 때 철거되었던 석물들을 다시 세우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고, 다시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 후 1623년(인조 1년) 개장 때 외후손인 이원익, 이시언, 심열, 최명길 등이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이때 서거정의 원래 비문에 한백겸이 내용을 추가하고, 외후손 심열의 글씨로 복원하였다.
성종 대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이후, 정창손은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한 인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야 그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3. 평가
정창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그는 세 조정에 걸쳐 정승을 지내면서도 검소함을 유지하여 사후 청백리로 기록되었고, 1451년(문종 1년) 사헌부 대사헌 시절에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고, 사위 김질을 통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세조에게 밀고하여 좌절시킨 행적 때문에 비판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특히 사림파가 집권한 선조 이후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1910년 조선 멸망 후 청백리였다는 점을 들어 재평가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20세기 후반 평등 사상의 확산과 세조 집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선민사상과 훈구파로서의 역할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되어 현재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우세하다.
3. 1. 긍정적 평가
성품이 고요하고 간결하며 살림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1451년(문종 1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조정의 관리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부귀를 탐하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3대 조정에 거쳐 정승으로 있었으나 사치하지 않았고, 검소함을 유지하였다. 사후 청백리로 녹훈되기도 하였다.1910년(융희 3년) 조선이 멸망한 후에 그가 청백리였던 점 등을 근거로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3. 2. 부정적 평가
평소 검소하고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아 1451년(문종 1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 동료 관리들로부터 청렴하고 절조를 지킨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사후 청백리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행적으로 인해 비판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가장 큰 비판점 중 하나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최만리, 하위지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지배층의 선민사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되며, 백성을 위한 문자 보급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도 주요 비판 대상이다.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이 세조 축출을 모의했을 때, 사위인 김질을 설득하여 이를 밀고하게 함으로써 사육신의 거사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 세력이 된 선조 시대 이후 정창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확고해졌다.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한 후 그의 청렴함을 근거로 재평가하려는 시각도 일부 있었으나, 20세기 후반 들어 평등 사상이 정착하고 세조의 집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정창손에 대한 평가는 다시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그는 훈구파의 핵심 인물로서 세조 정권의 유지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4.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정량생(鄭良生) | |
종조부 | 정구 | 증조부 정량생의 동생 |
할아버지 | 정부(鄭符) | |
아버지 | 정흠지 | |
어머니 | 최씨(崔氏) | 최병례(崔丙禮)의 딸 |
형 | 정갑손 | |
조카 | 정우(鄭俁) | 정갑손의 아들 |
조카 | 정숙(鄭俶) | 정갑손의 아들 |
조카딸 | 소용 정씨 | 정갑손의 딸, 문종의 후궁 |
조카 | 정오(鄭烏) | 정갑손의 아들 |
형 | 정인손 | |
조카 | 정교(鄭僑) | 정인손의 아들 |
조카 | 정의(鄭依) | 정인손의 아들 |
형 | 정흥손 | |
조카 | 정효(鄭傚) | 정흥손의 아들 |
조카 | 정천(鄭倩) | 정흥손의 아들 |
동생 | 정희손(鄭喜孫) | |
동생 | 정육손(鄭六孫) | |
누이 | 정씨(鄭氏) | |
매부 | 박거완(朴去頑) | |
외조카 | 박호선(朴好善) | |
누이 | 정씨(鄭氏) | |
매부 | 이계기(李啓基) | |
부인 | 청풍군부인 청풍 정씨(淸風郡夫人 淸風 鄭氏) | 승녕부 소윤(承寧府少尹) 정지(鄭持)의 딸. 3남 4녀를 둠. |
장남 | 정개(鄭价) | 첨지(僉知) |
며느리 | 홍씨(洪氏) | 군사(郡事) 홍서종(洪瑞從)의 딸 |
손자 | 정주함(鄭奏咸) | 정개의 아들 |
손자 | 정계함(鄭啓咸) | 정개의 아들 |
손녀 | 정씨(鄭氏) | 정개의 딸 |
손녀사위 | 이극문(李克文) | |
손녀 | 정씨(鄭氏) | 정개의 딸 |
손녀사위 | 윤검(尹儉) | |
차남 | 정칭(鄭偁) | 첨지(僉知) |
며느리 | 최씨(崔氏) | 최계겸(崔季謙)의 딸 |
삼남 | 정괄 | |
며느리 | 이씨(李氏) | 부사(府使) 이긴(李緊)의 딸 |
손자 | 정종보(鄭宗輔) | 정괄의 아들 |
손녀 | 정씨(鄭氏) | 정괄의 딸 |
손녀사위 | 이익희(李益禧) | |
손녀 | 정씨(鄭氏) | 정괄의 딸 |
손녀사위 | 심형(沈浻) | 심온의 증손, 심준(沈濬)의 손자, 심치(沈淄)의 아들 |
손녀 | 정씨(鄭氏) | 정괄의 딸 |
손녀사위 | 윤첩(尹堞) | |
차녀 | 정씨(鄭氏) | 김질에게 출가 |
사위 | 김질(金礩, 1422 ~ 1478) | 백범 김구의 종21대조 |
외손자 | 김의동(金義童) | |
외손자 | 김예동(金禮童) | |
외손자 | 김지동(金知童) | |
외손자 | 김성동(金誠童, 1452 ~ 1495) | |
외손자 | 김이동(金利童) | |
외손녀 | 안동 김씨(安東 金氏) | |
외손녀 사위 | 부림군 이식 | 왕족 |
사녀 | 정씨(鄭氏) | 최직에게 출가 |
사위 | 최직(崔直) | |
외손자 | 최치(崔淄) | |
외손녀 | 최씨(崔氏) | |
외손녀 사위 | 윤초(尹超) | |
삼녀 | 정씨(鄭氏) | 조윤벽에게 출가 |
사위 | 조윤벽(趙允壁) | |
외손자 | 조영(趙瑛) | |
외손자 | 조규(趙珪) | |
외손녀 | 조씨(趙氏) | |
외손녀 사위 | 이시찬(李詩讚) | |
외손녀 | 조씨(趙氏) | |
외손녀 사위 | 여승감(呂承堪) | |
외손녀 | 조씨(趙氏) | |
외손녀 사위 | 박형성(朴亨性) | |
외손녀 | 조씨(趙氏) | |
외손녀 사위 | 이장원(李長源) | |
외손녀 | 조씨(趙氏) | |
외손녀 | 조씨(趙氏) | |
기타 | ||
외후손 | 이원익 | 호는 오리(梧里) |
장인 | 정지(鄭持) | |
사돈 | 김사형 | |
고모부 | 홍여방(洪汝方) | 인수대비의 외조부 |
5. 저서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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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공저
6. 정창손이 등장한 작품
-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강성욱)
- 《한명회》 (KBS2, 1994년~1994년 배우:강성욱)
- 《왕과 비》 (KBS1, 1998년~1999년 배우:안대용)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민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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